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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자녀들을 참전 유공자 유족으로 인정하라

 
2015. 01. 13
조회수 29 추천수 0
 

  2014년 8월, 무더운 어느 날이었다. 내가 일하는 국회의원 사무실로 낯선 말투를 쓰는 3명의 남녀가 찾아와 무작정 의원과 면담할 수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순간 그들이 평범한 우리나라 주민이 아니고 북한 사람, 즉 탈북자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북한도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하고 있고 탈북자 역시 대한민국 국민이라고는 하지만, 탈북자를 아무 선입견 없이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더구나 최근 일부 탈북자들의 ‘삐라 날리기’ 등 불필요한 군사적 긴장을 초래하는 행위 때문에 나 역시 탈북자를 보는 인식이 좋지 않았다. 도대체 비난 문구로 가득찬 삐라를 날리는 행위가 남북 관계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또 그러한 행위가 결국 우리 국민의 안전만 위협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탈북자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날도 탈북자로 보이는 일단의 사람들이 무작정 찾아와 국회의원 면담을 강압하니 내 특유의 분노가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대답하는 내 말투가 고울 리 없었다. 퉁명스러운 내 태도에 방문한 남자의 태도도 거칠어졌다. “왜 사람을 무시하듯 불친절하게 대하냐”며 강하게 치고 나오는데 그 말이 다시  내 속을 자극했다. “내 말이 뭐가 문제라는 거냐? 확인해서 답해 준다고 하는데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냐”며 대꾸하니 바로 큰 소리가 왕왕 터지는 상황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다른 보좌진들이 말리고 또 그쪽 일행도 말리면서 대충 상황이 정리되었다. 이 때 갑자기 보좌관 한 명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보좌관님, 사실 저 분들은 탈북자가 아니라 국군포로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순간 나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 알게 된 국군포로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이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이 책임져야할 큰 정신적 빚인 국군포로, 우리가 몰랐거나 또는 외면했던 그 이야기다.

  한근수. 그날 나를 찾아온 국군포로 명예회복 관련 단체의 회장 이름이다. 북한에 여전히 남아 있는 다른 가족을 위해 나는 그의 이름을 가명으로 처리한다. 그는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우리나라 국민들 사이에서 아주 악명 높은 그 곳, ‘아오지 탄광’이 그가 태어난 고향이란다. 여기서 잠깐 아오지 탄광에 대해 정확히 확인해 보자. 지난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SNS에서 우스개 농담처럼 떠돌던 말이 있었다.

28년 만에 한국 남자축구가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 올라갔는데 결승전 상대가 북한이었다. 이때 우리나라 일부 네티즌들이 농담으로 ‘북한에 져주자’는 글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비록 결승에서 진다하더라도 축구 대표선수 중 군 미필자 일부만 논산훈련소로 가면 되지만 북한은 패배하면 ‘아오지 탄광’에 끌려간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이것은 과거에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1994년 탈북한 전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 문기남 씨 증언에 의하면 1960년대까지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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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의 국군포로 모습

 

  아오지 탄광 출신의 국군포로 2세

 

  여하간 이처럼 아오지 탄광은 우리나라 국민에게 있어 북한의 독재와 인권유린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이름이다. 바로 그곳에서 한근수 씨는  태어났다. 도대체 한근수 씨 부모는 누구이기에 이른바 저주받은 땅, 아오지 탄광에서 한근수 씨를 낳은 것일까.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국군포로였다. 1931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한 씨의 아버지는 18살이 되던 1949년 8월 15일 국방 경비대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같은 해 12월 말 또는 이듬해인 1951년 1월경 강원도 양구에서 중공군에 생포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끌려간 곳이 평안남도 강동에 위치한 포로수용소. 이곳에서 한 씨의 아버지는 다른 국군포로와 함께 수용되어 체포 당시 입게 된 부상을 치료하며 감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1953년 8월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북한군 계급으로는 중좌, 우리나라 계급으로 치면 중령에 해당하는 인민군 장교가 포로수용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날 국군포로에게는 수용소 연병장으로 전부 나오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어 인민군 중좌는 모여 있던 국군포로에게 “조국 해방전쟁이 우리 공화국의 승리로 끝났다!”는 거짓 선전을 하더니 연병장 한 가운데에 줄을 긋기 시작했다. 뜬금없는 행동에 놀라 말없이 이를 지켜보던 국군포로에게 인민군 장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화국이 동무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 지금 여기에 그어놓은 선을 기준으로 남조선으로 내려가고 싶은 자는 좌측으로, 그리고 우리 공화국에 남아서 살고 싶은 자는 우측으로 이동하라.”

  그때였다.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천천히 좌측으로 움직였다. 남한으로,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 삼척으로,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이 있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른 국군포로 역시 한근수 씨의 아버지처럼 좌측으로, 좌측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순간 연병장에 도열해 있던 인민군들이 대한민국을 선택한 국군포로 발밑으로 기관단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는 사람, 공포와 두려움으로 몸을 움츠리고 고꾸라진 사람, 또는 자신이 이미 총을 맞았다고 생각하고 기절하거나 또 누군가는 울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들려온 인민군 장교의 목소리. “동무들,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신중하게 판단하시오. 다시 선택할 기회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갔어” 더 무엇을 생각할까. 좌측에 서 있던 이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우측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제야 인민군 장교는 웃으며 “동무들을 공화국의 이름으로 열렬히 환영한다”는 말을 남기고 해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국군포로는 단 한 명도 북한에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다만 스스로 공화국을 선택하여 남은 자들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날의 일화가 그 주요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끌려간 그곳 ‘아오지 탄광’에서의 삶

 

  이 일이 있고 2, 3일이 지나가던 어느 날, 강동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한근수 씨의 아버지를 비롯한 국군포로들은 강제로 기차를 타게 된다. 승객 수송용 기차가 아닌 화물을 실어 나르는 기차였다. 이후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꼬박 하루를 달려 기차가 도착한 곳이 바로 ‘아오지 탄광’이었다고 한다.

  아오지 탄광은 북한 인권 탄압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이유가 뭘까. 아오지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아오지 탄광은 단순한 탄광이 아닌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이 높았다. 1945년 광복 후 북한 지역 통치자들이 친일파를 비롯한 북한 반체제 인사들을 아오지읍으로 강제 이주 시켰고 그곳에서 노역과 함께 외부로 나갈 수 없도록 철저히 통제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 아오지에 국군포로도 보내진 것이다. 한근수 씨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국군포로들은 그날 이후 아오지읍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쳐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들 국군포로들에게 새겨진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북한인민 서열 ‘43호’라는 숫자였다. 북한은 인민들에게 계급처럼 번호를 매긴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최고로 높은 1호는 김일성 일가라고 한다. 그리고 2호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던 군인 및 그 가족, 그리고 3호는 우리나라로 치면 의사자로 지정된 사람들. 이런 방식으로 각기 인민 서열이 정해져 있는데 그중 가장 마지막 번호는 43호였고 아오지 탄광 등에서 강제 노역을 하던 국군포로가 그 번호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즉, 43호는 북한에서는 반역의 저주받은 계급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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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2월 흥남항에 몰려 철수를 기다리는 북한주민들 <자료사진>

 

  그렇다면 이러한 국군포로는 누구와 결혼했을까. 한근수 씨의 어머니 역시 기구한 인생이었다. 1951년 1월 4일,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갔던 국군이 중공군 개입으로 전선 후퇴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긴급 철수를 하게 되는데 그때 국군은 흥남에서 배들을 강제 동원하게 된다. 이때 국군의 후송을 강요받은 배의 선주들은 자신의 가족을 남겨둔 채 남쪽으로 배를 몰아야 했는데, 그 가족들이 북한 입장에서는 부역자의 가족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 남게 된 부역자의 가족은 또 다른 ‘43호’가 되었고 이후 아오지 탄광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것이 한근수 씨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오지에서 만나 결혼하게 된 경위였다.

  이들은 삶은 또 어떠했을까. 북한 당국은 이들 국군포로들에게 일률적으로 작은 방과 부엌이 달린 ‘사택’을 제공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사택처럼 칸칸이 이어붙인 집이었는데 옆방에서 방귀를 끼면 그 소리가 들릴 정도의 허술한 집이었다고 한다. 가구와 살림 역시 빈약하기 짝이 없어 이불과 책상이 전부였다. 그래도 결혼이나 누군가가 환갑 등을 맞이하면 잔치는 했다고 하는데, 그 잔치 방식이 진짜 음식으로 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플라스틱 모형으로 된 과일과 떡을 행정기관에서 빌려와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한편 한근수 씨가 자신의 신분, 그리니까 ‘43호’라는 굴레를 이해하게 된 때는 15살이 되던 해였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왜 아오지에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던 한근수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사실, 그래서 국군포로의 자식은 대학을 갈 수도, 인민군에 입대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한근수 씨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전형적인 비행 청소년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국군포로의 자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탄광에서 일하는 것 뿐이었다. 다만 국군포로인 아버지는 탄광 안에 들어가는 채탄공만 할 수 있다면 그 자녀는 탄을 지상으로 옮기는 일을 할 수 있는 차이일 뿐 일평생 탄광에서 일하다 죽는 것은 똑같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는가.

 

  아버지 고향은 강원도 삼척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삐뚤어진 막내 아들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한근수 씨에게 나무 하러 산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한다. 그래서 따라나선 그날, 한근수 씨는 오랫동안 묻고 싶었으나 꺼낼 수 없었던 그 말을 꺼냈다고 한다. “왜 아버지는 괴뢰군(국군)으로 살면서 공화국에 전향하지 않았냐?”는 원망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주춤하더니 아들의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후, 아버지의 입에서 고향 강원도 삼척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푸른 바다, 그리고 나무, 돌, 바람, 사람들. 특히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 중 한근수 씨가 가장 믿기 어려운 대목이 과일 중 ‘배’에 대한 설명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기 고향 삼척에서는 배가 어린애 머리통처럼 크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한근수 씨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북한에 살면서 그렇게 큰 배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북한의 재배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큰 배를 본적이 없는지 모르겠으나 설령 있다 해도 그 좋은 1등급 수준의 배를 아오지 탄광에서 저주받은 최하위 계급 43호인 국군포로에게 줄 리 있었을까. 여하간 그날 아버지에게 들은 배 이야기가 한근수 씨는 제일 신기했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이야기 말미에 아버지는 어린 아들 근수에게 속삭이며 말을 이어갔다. 놀랍고 무서운, 그러면서도 일생을 바꿀 제안이었다는 것이다.

“근수야, 잘 듣거라. 너의 두 형과 누이는 이 체제에서 그냥 안주하며 살아갈 것 같고 너는 다를 것 같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니 너는 때를 보아 남으로 탈출해라. 그리고 그곳에 가서 이 아버지의 군번을 알려줄테니 국방부를 찾아가거라. 이곳에서는 우리가 비록 43호로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지만 거기서는 우리가 또 2호가 되는 것 아니겠니. 그러니 탈출해라. 너만은 그곳에서 대우받고 잘 살 수 있도록 해라.”

  2004년 4월 9일. 그날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국군’으로 전향하지 않은 채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버지 장례가 끝난 직후 한근수 씨는 아버지의 군번을 가지고 북을 탈출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말한 고향 삼척도 가고 거기서 아버지가 말한 어린애 머리통만한 배가 정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한다. 마침내 43호의 굴레를 벗고 다시 새로운 대한민국의 ‘2호’로서 거듭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말로 다할 수 없는 탈북의 고난 끝에 입국한 대한민국. 한근수 씨는 아버지 고향인 강원도 삼척에서 아버지가 말한 어린 애 머리통만한 배도 봤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영원히 버리지 않은 조국 대한민국에 안긴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6.25당일에 전사한 아버지의 기록

 

  국방부를 찾아가 국군포로인 아버지 군번을 대자 국방부가 아버지가 병적기록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 한다. 사망 추정일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일에 아버지는 전사한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한근수 씨의 아버지 뿐 만이 아니었다. 1986년 국방부가 내 놓은 한국전쟁 요약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국군포로의 숫자는 82,318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중 휴전 협정 후 돌아온 국군 포로 7,86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1950년 6월 25일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한근수 씨는 아버지의 소원처럼 ‘2호’가 되지 못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북한의 ‘43호’였던 한근수 씨는 대한민국에서 또 다른 ‘43호’로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최고의 예우로 국군포로의 자녀를 대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 유공자 후손에게 주는 연금조차 지급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너무도 어처구니없다.

  한근수 씨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2004년까지 전향하지 않은 채 살아 있었다는 주장을 국방부는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병적기록표상 여전히 1950년 6월 25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때 사망한 사람이 어찌 1962년에 아들을 낳았다고 인정할 수 있느냐는 논리였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는 한근수 씨처럼 목숨걸고 북을 탈출한 국군포로 자녀가 93세대나 있으나 다른 참전 유공자 자녀와 달리 월 100만원 남짓 되는 연금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만약 한근수 씨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현재 이들 국군포로의 자녀들은 매일 국방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자신들을 북한의 2호처럼 예우해달라는 요구도 이미 포기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참전 유공자 유족처럼 대우만 해 달라는 것이 전부다. 과연 이것도 무리한 요구인가? 나는 대한민국의 양심에 묻고 싶다. 

여든 야든,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다. 국군포로 문제는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인권의 문제다. 북한도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을 우리 정부에 송환해야 한다. 정부가 파악한 사실에 의하면 최소한 500여 명의 국군포로가 여전히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의 송환을 위해 우리 정부가 더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에게 마땅히 취해야 할 이 나라의 예우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우리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국군포로와 그 자녀들을 정당하게 예우해야 한다. 그들에게 우리 대한민국은 갚아야 할 ‘정신적 부채’를 안고 있다. 이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 및 예우를 다 해야 한다. 그것이 끝내 전향하지 않고 조국 대한민국을 선택한 그들에게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일 것이다. 그것이 옳다. 나는 수많은 고통 속에서 살아 나와 대한민국으로 온 국군포로의 자녀에게 깊은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힘내시라.

 고상만 인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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