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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도올 김용옥

나의 딸 미루의 예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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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1-11 오전 8:08:45

 

김미루의 세계 거대 사막들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주제의 사진작품전시회대만까오시옹시(高雄市) 피어투 예술특구에서 1월 19일부터 3월 3일까지 열린다. 그 전시를 주관하는 문화협회사람들이 아버지로서 딸의 예술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은 글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쑥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하기의 글을 썼다. 이 글은 전시회를 기념하여 출간하는 도록에 중문번역과 함께 실린다. 한국 독자들에게도 의미 있는 글이라 생각되어 <프레시안> 지면에 소개한다. <필자>

자기 딸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버지가 그 딸의 정신세계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미루는 우리 다섯 식구 중에 막내둥이다. 미루는 내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유학하던 중에 보스턴 지역 스톤햄(Stoneham)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는데 담당의사가 인종편견이 조금도 없는 무던하고 친절한 휴머니스트였다. 닥터 린(Dr. Lynn)이라는 이름으로 내 뇌리에 남아 있는데,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하염없이 선량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 좀 거친 의사에게 걸려 곧바로 제왕절개를 했어야 했는데도, 닥터 린은 제왕절개 후에도 자연분만이 가능하다며 작위(作爲)가 없는 순산(順産)을 유도해주었다. 그리고 분만과정을 남편이 지켜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미루가 이 지구 상의 대기를 들이마시는 첫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곧 내 품에 안겼는데 아주 신비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사건이었다. 미루가 내 품에 안기는 순간, 아주 가느다란 실눈을 뜨면서 나를 보고 빙그레 웃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이 세상 누구든지 내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해석한 표정이지, 웃음이라 규정지을 수 없는 생리적 표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생후 몇 분도 안 되는 갓난아기가 웃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진실로 신비로운 사건이었다. 미루는 나를 보고 웃었다. 분명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표현된 얼굴이었다. 나는 미루가 매우 감성이 풍부한 아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확신한 것은 미루가 정말 미모의 개체가 될 것이라는 직감이었다. 생후 몇 분 안 된 아이를 보고 미(美)·추(醜)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미루가 정말 매력 있는 예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신비로운 교감의 체험이었다.
 

▲ 인간의 몸과 돼지의 몸이 이렇게 별로 다르지 않다. 모든 생명체는 기나긴 시간의 추이를 통하여 가장 정교한 최적의 모습으로 진화한 것이다. 생명체의 우열은 있을 수 없다. ⓒ김미루

노자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곧 추함'이라고 말했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이러한 노자의 지혜는 우리 동방인들의 생활습속에 깊게 배어 있다. 그래서 예쁜 아이일수록 그 아명(兒名)은 비천(卑賤)하거나 미운 이름을 붙인다. 그래야 귀신이 탐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인박명(美人薄命, 용모가 썩 아름다운 여자는 대개 불행한 사람이 많다는 뜻)"의 액을 땜질하려는 것이다.

아내는 내가 너무 과도하게 철학적인 이름을 붙일까 봐 걱정했다. 그리고 광산 김씨(光山 金氏)의 돌림자를 쓰지 말자고 했다. 아내는 중국 고대의 발음체계를 연구하는 성운학자였기 때문에 우선 발음이 간편하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구려 왕족의 이름 중에 "미루(miru)"가 있는데 그런 고어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미루"는 발음을 먼저 정하고 글자를 나중에 결정한 것이다. 나는 "미륵(彌勒)"의 "미(彌)"가 먼저 생각이 났다. "미(彌, 활 궁(弓) 자가 기본 부수이다)"는 활과 관련된 의미가 있지만 "더욱더욱"이라는 부사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루"를 "陋(더러울 루)"로 하게 되면, "미루"는 살면서 점점 더 누추(陋醜)해진다는 의미가 생겨난다. "정언약반(正言若反, 바른 말은 마치 반대되는 것 같다)"이라고 했으니 아름다운 삶에 대한 반어적(反語的) 내함(內涵)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미루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천재적 소질이 있었다. 두세 살 때에 내가 서재에 펼쳐놓은 책 위에 우연히 그려놓은 미루의 낙서를 보고 하도 감동을 받아 야단치는 것을 잊곤 했던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때도 미루의 그림은 인기가 좋았다. 미루의 그림은 이화여자대학교부속초등학교 복도에 자주 걸려 있곤 했다. 미루는 동물의 그림들을 잘 그렸는데 그 움직이는 모양들을 너무도 자유자재롭게 표현했다. 하늘에 수십 마리의 백조가 떠있는 그림을 그린 것이 있었는데 그 표현이 어찌나 자유분방하고 다이내믹했던지 그 펼친 날개와 치솟는 머리와 뻗친 다리의 선율들은 엘랑비탈의 화엄 세계였다. 그런데 불행하게 이 그림들은 하나도 보관된 것이 없다. 나의 모친이 미루 그림을 너무도 사랑하여 보관하고 계셨는데 돌아가시는 통에 모두 분실되고 말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 쥐 스케치 ⓒ김미루


나는 철학교수 노릇을 한 후에 뒤늦게 의과대학을 다녔다. 나는 늦깎이로 의학을 공부하면서 의학이라는 학문에 엄청난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미루 보고 의학을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의사 노릇을 안 해도 좋으니까 그냥 교양으로 의과대학을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미루는 프리메드 코스를 밟았는데 의대 공부가 너무 숨 막히는 것 같았던 모양이다. 미루는 끝내 미술대학원으로 적을 옮겼다. 미루는 동물 그림을 계속 즐겨 그렸다. 그러다가 미루는 흰쥐 몇 마리를 그림 모델로 키웠는데 쥐를 키우면서 쥐의 생태에 관하여 많은 공부를 했다. 미루는 나를 닮아서 그런지 독서를 즐기고, 어떤 주제를 깊게 탐구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주제에 관한 지식을 실천적으로 실험해보기를 좋아한다. 미루는 쥐가 많이 사는 곳이 맨해튼의 하수도라는 것을 알아내고 맨홀 구멍으로 기어들어가 쥐들의 엄청난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는 하수도의 환경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미루는 거대도시의 지하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지상의 도시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지하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지하의 세계에는 우리가 망각한 도시의 역사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무의식은 대타자(大他者)의 담론이다(The Unconscious is the Discourse of the Other)"라는 유명한 명제를 발했는데 미루는 지하세계야말로 지상의 도시에서 미끄러진(glisser) 시니피에(signifié)들이 숨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미루는 그 지하세계의 담론(discours)을 그려내고 싶어 사진을 찍어댔다. 그런데 그 어두컴컴한 터널 속에서 아무리 멋있는 사진을 찍어도 무엇인가 공허했다. 살아 있는 무의식의 담론이 포착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루는 자기 알몸을 오브제로 사용했다.
 

▲ 한국 모래내 철거지역, 문명파괴 현장. 개발을 핑계로 서울의 아름다운 삶의 터전이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있다. 불도저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집들 중에는 가족사진을 비롯하여 개인사에 기록될 만한 소중한 물건들이 팽개쳐져 있었다. 도무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저 뒤에 서있는 아파트 건물이야말로 흉측한 야만이 아닐 수 없다. 왜 문명을 버리고 야만으로 가는가? 자연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한 아름다운 삶의 공간이 인간의 행복과 무관하게, 자본과 탐욕과 그릇된 인식으로 파괴되어 가고만 있다. 이것은 너무도 슬픈 현실이다. 나는 문명을 수호하는 최후의 고양이처럼 철거되는 담벼락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제발 저 아파트가 지옥이고 판자촌이야말로 천당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한국인에게 생겨나기를 빌면서… ⓒ김미루


많은 사람이 나 보고, 당신네와 같이 유서 깊은 사대부가의 적통을 가지고 있는 집안의 딸이 나체로 예술 활동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느냐고 묻곤 한다. 그러나 미루는 자기 몸을 나체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원시적 생명체, 그러니까 태고의 무의식세계를 활성화시키는 '생명의 움틀'임의 상징으로서 던진 것이다. 한 인간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예술의 오브제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인위(人爲)적 반역(反逆)이 아니다. 미루의 활동은 도시의 지하세계를 탐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의 "전설(legend)"로 알려졌고, 그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뉴욕타임스>의 전면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전설은 결국 "나도(裸都)의 우수(憂愁) - Naked City Spleen"라는 대규모 전시가 되었다.

미루의 두 번째 작품세계는 돼지우리 속에 던져진 미루의 몸이다. 미루는 돼지를 찍기 전에 돼지의 생리와 생태에 관해 깊은 연구를 했다. 그리고 돼지우리 속에서 나체로 돼지와 더불어 사는 체험을 했다. 중국인들은 돼지우리에 사는 여인을 생각하면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태후(呂太后)의 간악함에 희생된 가련한 척부인(戚夫人)의 비극을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미루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횡거(橫渠)가 <서명(西銘)>에서 웅변한 바, "건칭부(乾稱父), 곤칭모(坤稱母), 민오동포(民吾同胞)"라 말한 "동포(同胞)"의 외연(外延)을 확대하고자 한 것이다. 돼지와 내가 결코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는 것, 그러한 생명일체감 속에서 21세기 인간문명의 모습을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사유(cogitans)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미루는 그러한 존재의 근거로서의 순수사유를 거부한다. 그러한 연장(延長)을 배제한 실체적 사유의 대전제가 문명을 건설했지만 인간을 파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미루는 항변 한다 : "돼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 또한 존재한다(The Pig That Therefore I Am)." 이슬람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안 먹는 것은 그 나름대로 생태론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 미국의 대규모 돼지사육장은 마피아 재벌들이 장악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접근할 수가 없다. 나는 이런 사육장에 몰래 들어가 사진을 찍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경비원들이 장총을 들고 나타나기도 한다. 돼지는 매우 영리하고 깨끗한 동물이다. 그들을 잘 이해하면 그들은 나를 친구로서 취급한다. ⓒ김미루

 

▲ 몽골 고비사막 콩고린 엘즈Khongoryn Els. "콩고린 엘즈"는 "노래하는 모래언덕"이라고도 불린다. 모래언덕을 지나가는 바람에 모래알들이 기묘한 소리를 낸다. ⓒ김미루


요번에 미루는 사막으로 갔다. 낙타는 착한 동물이다. 거대 몸체를 가지고 있지만 남을 해칠 줄을 모른다. 그래서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말하는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악순환이 싫어서, 그는 평화를 갈망하며 쫓기고 또 쫓기어 갔다. 그리고 사막이라는 황량한, 최악의 생명의 조건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생리적 지혜를 진화시켰다. 모래바람만 이는 고독 속에서 생명의 환희를 발견한 것이다. 이 낙타라는 생명체에 의존하여 인간은 사막에서 평화롭게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生活)의 장(場)을 발견했다. 사막의 낙타-인간 공동체 속에서 미루는 반문명(反文明)의 지혜를 발견했다. 발전과 착취와 억압과 소외가 부재(不在)하는 황막한 삶의 장! 그곳에서 미루는 싯달타가 추구했던 해탈, 죽음으로서의 열반이 아닌 삶으로서의 열반을 발견했을 것이다.

미루의 테마들은 매우 우발적으로 전개된 것이지만, 그 나름대로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주제를 "무위(無爲)"라고 표현하고 싶다. 진실로 인간이 유위적 문명에 대하여 자부감을 갖는 것만큼 무위적 반문명에 대하여 깊은 통찰과 애정을 갖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제 정의롭게 생존할 길이 없다. 미루는 내가 지어준 이름대로 나날이 추해져 갔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세계의 반면으로 점점 깊숙이 천착해 들어간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 "학을 행하면 매일매일 더함이 있지만(爲學日益), 내가 말하는 도를 행하면 매일매일 손해만 본다(爲道日損)." 미루의 예술이 추구하는 세계는 익(益)에 있지 않고, 손(損)에 있다. 그 어느 땐가 우리 모두가 무위(無爲)의 밑바닥에서, 저(低)엔트로피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low entropy) 속에서 손잡고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나는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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