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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유가족들, 참사 4주기 앞두고 개발지 돌며 '동병상련'

"사람도 안 사는 저 아파트 때문에…사람이 죽었나"

[현장] 용산참사 유가족들, 참사 4주기 앞두고 개발지 돌며 '동병상련'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1-16 오후 5:30:25

 

2009년 용산참사로 남편을 잃은 유영숙(53) 씨. 참사 4주기가 가까워진 요즘, 그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낮에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바쁘게 움직이지만, 밤이 되면 어두운 방에 홀로 남아 답답한 가슴을 친다. 그는 "아직도 남편이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지난 15일 아침, 유 씨는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이날은 용산참사 4주기 추모위원회가 준비한 '강제 퇴거 현장 순회'의 날. 남편을 떠나보낸 용산 4구역 남일당 현장처럼, 재개발 광풍에 휩싸여 폐허가 된 지역들을 방문한다. 오전 10시 자욱한 아침 안갯속에서 유 씨는 중구 대한문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의 손을 부여잡았다.

이날 유 씨를 비롯한 현장 순회단 70여 명은 중구 순화동 재개발 지역, 경기도 일산 덕이 재개발 지역, 경기도 김포 신곡 재개발 지역을 순서대로 방문했다. 모두 한때 재개발 광풍이 불어 소지주와 세입자들이 터전을 잃은 곳이다. 또 지금은 각각의 이유로 재개발이 중단된 곳이기도 하다. 유 씨와 함께 순회단에 참가한 전재숙(69) 유가족 대표는 "이렇게 다 중단될 것을, 왜 그리 사람을 죽기 살기로 내쫓았나"라며 내내 가슴을 쳤다.

[중구 순화동] "남편과 오손도손 꾸려가던 식당 자리엔 무성한 잡초만…"
 

▲ 중구 순화동 재개발 지역. ⓒ프레시안(최하얀)


중구 순화동 재개발 지역은 유영숙 씨가 남편 고(故) 윤용헌 씨와 함께 식당을 했던 곳이다. 경찰본청 바로 맞은편 이곳에서 부부는 10여 년 전 한정식 가게 '미락정'을 열었다. 주변에 있던 40여 개 상가 주민과 함께 유 씨 부부는 매일 바쁘게 보냈다. 점심시간이면 인근의 공무원과 경찰들이 식당 앞에 긴 줄을 만들었다. 유 씨는 "열심히 살았고, 잘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청천벽력 같은 재개발 통보는 모든 것을 바꿔 놨다. 2005년 5월, 세입자들과 소지주들은 일방적인 재개발 통보를 받았다. 재개발 조합 측이 내놓은 보상은 약 1000만 원 수준의 영업보상금이 전부였다. 좋은 상권으로 들어오기 위해 대출까지 받아 만든 권리금은 되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원주민들은 힘의 논리에 밀려갔다. 유 씨는 "조합의 회유·압박으로 소지주들은 땅을 헐값에 매매하고 하나씩 떠났다"라며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곧이어 2006년 명도집행이 들어왔다. 유 씨는 "100명은 훌쩍 넘어 보이는 새까만 철거 용역들이 집을 부수고, 주민들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고 말했다.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상스러운 욕에 기겁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처럼 개발 사업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어김없이 철거 용역이 등장한다. 덩치가 크고 몸 이곳저곳에 문신을 새겨 넣은 이들은 폭행, 협박, 성희롱 등을 거침없이 하며 거주민을 위협한다.

유 씨는 "그래도 남편은 싸워보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말했다. 유 씨는 "처음에는 온 가족이 나서 남편의 투쟁 의지를 꺾어보려고 했지만, 남편은 굳건했다"며 "용산에 간 것도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을 지나칠 수 없어서"라고 말했다.

윤용헌 씨는 2009년 참사 당시 망루에서 목숨을 잃었다. 유 씨는 "남편이 용산으로 떠나기 직전, 나를 데리고 이곳(순화동)을 한 바퀴 둘러보며 천막 치기 좋은 장소를 알려줬다"며 "'내가 없을 때 순화동을 잘 지켜라'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유 씨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꼴로 순화동을 방문한다. 2011년 이후 중단된 공사가 혹시라도 재개될까 걱정돼서다. 순화동 재개발 사업은 조합 비리가 터지고, 급기야 조합과 재개발 대책위원회 간의 소송에서 조합이 패소하며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사가 중단됐다고 해서 유 씨가 과거의 삶을 돌려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부부의 삶이 뿌리내렸던 '미락정' 자리는 이미 무성한 잡초가 차지했다. 이제는 모두 떠나고 다섯 가구만이 남은 이곳. 스산한 공터에 폐허처럼 서 있는 건물에서 나풀거리는 빨래 옷가지들이 "여기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일산 서구 덕이동] "사람도 살지 않는 저 아파트가 '집'이긴 한가"
 

▲ 일산 덕이동에 있는 김명자 씨의 천막. 순회단원들이 천막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다. ⓒ프레시안(최하얀)


유영숙 씨는 순화동을 떠나 일산 덕이동으로 향했다. 전국에서 유명한 대규모 가구 상가 단지였던 이곳에선 2006년 5월, '주거지 인가'가 떨어지며 재개발이 시작됐다.

당시 세입자들은 재개발이 논의 중임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 개발 사업은 보통 막바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대부분 거주민 모르게 구메구메 진행된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처음 개발 사업 구역을 지정할 때, 이를 아는 거주민은 전체의 10%(보통 개발 찬성 주민)도 채 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다 어느 날 "경축, 정비사업구역으로 지정"이란 현수막이 동네 어귀에 내걸려야 비로소 세입자들은 "쫓겨날 처지"임을 깨닫게 된다.

덕이동에서 200평 규모의 가구점운영하던 김명자(52) 씨도 그랬다. 2001년 가구점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동네에서 잘나가던 여성 최고경영자(CEO)로 불렸"던 김 씨. 그러다 2008년 4월, 건물 주인이 재개발 업체에 땅을 팔면서 그는 한순간에 '철거민'이 됐다.

김 씨는 세 딸과 함께 천막을 치고 '이주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김 씨는 "물도 전기도 없는 천막에서 우리 네 모녀만 1960년대에 살고 있다"며 "툭하면 철거 용역이나 술 취한 행인이 한밤중에 천막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린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하도 많아, 욕만 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 씨는 재개발 반대 투쟁을 하며 남편과 이혼했다. 하지만 세 딸은 김 씨를 떠나지 않았다. 천막을 처음 치던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막내딸은 올해 대학에 갔다. 원래 수의사가 꿈이었는데, 얼마 전에는 건축공학을 공부하겠단 포부를 밝혔다고 했다. "엄마한테 예쁜 집을 지어주고 싶어서라고 하더라"라며 김 씨는 정겹게 웃었다.

현재 김 씨의 가구점을 밀어낸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유령처럼 서 있다. 재작년에 분양이 시작됐지만, 이제 겨우 입주가 30%가량 진행됐다고 김 씨는 전했다. 그러면서 "사람도 살지 않는 저게 집이야? 내 천막이 집이지"라고 김 씨는 말했다.

김 씨의 설명을 듣고 있던 유영숙 씨는 결국 북받쳐 울음을 터뜨렸다. "어떡해. 정말 어떡해"라는 말이 입에서 연달아 터져 나왔다. 멀찌감치 떨어져 순회단을 지켜보고 있던 전재숙 씨도 가슴을 쳤다. 전 씨는 "엄마(김 씨)를 지켜주는 (김 씨의) 딸들이 정말 기특하다"면서도 "이런 일을 후세대에게 물려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자신을 살린 건 2009년 용산에서 목숨을 잃은 다섯 철거민(이상림, 양회성, 한대성, 윤용헌, 이성수)이라고 말한다. 그는 "죽으려고 몇 번 했는데, 돌아가신 분들 보니 안 되겠더라고"라며 "억울해도 죽으면 말 못해. 살아야 해. 저 사람들 몫까지 내가 살아야 해"라고 말했다.

[스산한 유령도시 김포 신곡] "여기 사람이 있다"
 

▲ 김포 신곡동 재개발 지역에 마지막 하나 남은 주거 건물.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알린다. ⓒ프레시안(최하얀)


순회단을 실은 버스는 이번엔 김포 톨게이트 바로 옆에 있는 신곡동에 멈췄다. 참가자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충격'이란 표정을 지으며, 허공에 탄성을 쐈다.

115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넓디넓은 땅은 흡사 '전쟁터'와도 같았다. 쓱 보기만 해도, 반파된 공장 건물과 주택이 10여 개는 족히 돼 보였다. 길가에 자란 앙상한 나무들은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니라 씨앗이 날아와 자란 것이라고 했다. 이곳 주민들은 "사람들이 목매러(자살하러) 여기에 오고 쓰레기를 무단 투척하러 온다"며 "밤이 되면 온 동네가 캄캄해 무섭다"고 말했다.

신곡동에선 2006년 재개발이 시작됐다. 그러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시행사부도를 냈고, 재개발 조합도 해체됐다. 이미 철거 용역들이 거주민을 내쫓고, 여러 공장에 불을 지른 후였다.

이처럼 개발 사업으로 퇴거와 철거가 이루어지는 동네에 가보면, 한쪽 벽면이 무너져 있는 사이로 위협적인 낙서가 있거나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건물을 철거하기 전 철거 용역들이 거주 환경을 '일부러' 훼손한 것으로, '철거 예비 행위'라고 부른다.

이렇게 철거 예비 행위를 하면, 남아 있는 주민은 계속 거주하기 어렵다. 한밤중에 철거 용역들이 옆 건물에 불을 지르는데, 이를 버텨낼 수 있는 주민은 많지 않은 게 당연하다.
 

▲ 김포 신곡동 재개발 지역. ⓒ프레시안(최하얀)


신곡동 주민 조규승(58) 씨는 자신의 공장으로 순회단을 이끌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유영숙 씨는 조 씨의 공장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밖을 서성였다. 유 씨는 "여기 있기 싫어"라고 말했다.

유 씨 부부는 2009년 이전에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신곡동 주민들의 재개발 저지 싸움에 힘을 보태러 왔었던 게다. 신곡동을 방문했던 그날, 부부는 조 씨 공장에서 음식해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유 씨는 "이 공장에 오니 남편이 사무치게 그립다"며 "가슴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유가족 전재숙 씨는 "2009년 참사 전에는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며 "내가 이렇게 재개발 지역들을 알게 돼서 악에 받치게 된 건 나 때문이 아니라 저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재개발로 이득을 취하는 건설사들과 투기 자본, 그리고 이를 위해 국민의 주거권은 아랑곳하지 않는 정부 때문이란 얘기다.

전 씨는 "철거민이 되기 전에는 개발이 되면 좋은 건 줄 알았고, 세금 내고 열심히 살면 잘살게 되는 건 줄 알았다"며 "이 넓은 땅을 허허벌판으로 만들어놓을 것을, 대체 왜 내쫓은 건지 모르겠다"고 읊조렸다.
 

▲ 재개발 지역을 순회한 소감을 적는 용산참사 유가족 유영숙 씨. 오른쪽이 유가족 대표 전재숙 씨다. ⓒ프레시안(최하얀)


순회단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참가자들은 각자 작은 종이에 자신의 소감을 남겼다. 작은 흰색 종이에 유영숙 씨는 이렇게 썼다.

"오늘 하루가 너무 힘든 날인 것 같네요. 순회 지역을 가보니깐 남편이 어디선가 날 부르면서 올 것 같았는데. 덕이, 신곡에 와보니 더욱더 남편의 발자취가 생각나네요. '현구 엄마' 하면서 불러줄 것만 같은 마음에 심정이 답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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