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 창간 15주년 기념 기획> 통일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
6.15공동선언과 함께 탄생한 <통일뉴스>가 어느덧 창간 15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연이은 보수정권의 집권으로 남북관계는 6.15공동선언 이전으로 되돌려지고 있습니다.
길을 찾기 어려울 때, 다시 떠나왔던 출발점들을 되짚어 보는 일도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지금보다 결코 녹록치 않았을 당시에도 통일의 거보를 내딛어 스스로 통일의 초석을 쌓았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처럼 역사를 바라보는 거시적 안목과 큰 결단, 그리고 뜨거운 가슴과 구체적 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문익환, 김대중, 정주영, 윤이상, 통일로 나아가는 길에 각 분야에서 우뚝 솟은 이정표가 될 인물들입니다.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를 설레게 하는 이들과 함께 웅대한 통일의 꿈을 한번 꾸어 봅시다.
<통일뉴스> 창간 15주년 기념공연은 11월 4일 오후 6시 30분 서울여성플라자 아트홀봄에서 열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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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활엽수처럼 계절에 따라 무성하고 착색되고 낙엽지지만, 민족은 창공처럼 영원하다"
유럽의 현존하는 5대 작곡가, 20세기 백 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 중 한 사람.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에 대한 수식어다. 그의 앞에 붙는 화려하고 웅장한 표현은 '창공처럼 영원한 민족'이라는 그의 믿음에서 출발한다.
윤이상. 우리에게 이름 석 자는 금기의 단어였다. 전 세계인이 찬사를 보내는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은 이적행위였다. 고단했던 망명객에게 조국은 영원히 안식할 1평의 땅도 허락하지 않았다.
여전히 친북용공의 대명사로 영혼마저 안식하지 못하는, 그의 어머니가 뱃 속에서 가졌을 때 꾼 꿈처럼 윤이상은 '상처받은 용'이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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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9월 평양 윤이상음악당에서 '윤이상음악연구소' 창립 30돌 기념 음악회가 열렸다. [자료사진-통일뉴스] |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이중 협주곡 견우와 직녀', 칸타타 '나의 땅, 나의 조국' 등으로 남북통일의 염원을 선율로 담은 윤이상은 "한 예술가로서 민족의 재통일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음악을 통한 남북화합을 모색했다.
1988년 7월 일본 도쿄에서 그는 '남북음악제전'을 제안했다. '남북음악제전'은 △남북한에서 각각 교향악단원을 선발하여 혼성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그 외 합창단, 독창자 역시 남북에서 각기 선발해, △휴전선의 어느 한 지점에서, △남북 이산가족을 중심으로 청중을 모으자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는 후에 '민족음악제전'으로 명칭이 바뀐다. 남과 북이 서로 '남북, '북남'이라고 바꿔 사용할 수 있으므로, 조국통일의 발전을 꾀한 작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불발됐다.
하지만 윤이상의 각고의 노력으로 1990년 10월 평양에서 제1회 범민족 통일음악제가 열렸다. 여기에 남측 음악가 17명이 참가했다. 그가 꿈꾼 '민족음악제전'은 아니었지만, 남북 음악인들이 함께 모여 통일을 선율에 담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는 1990년 12월 서울에서 개최된 '송년 통일음악제'로 이어진다.
그러나 음악이 정치를 뛰어넘지 못했다. 1991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교향악단의 남북한 상호교환 연주회가 추진됐지만 결국 무위에 그쳐 제3국인 일본에서 합동공연을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민족민주, 평화통일 실천 정신이 담긴 음악
우리에게 윤이상은 소위 '동베를린(동백림) 간첩사건'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후 행적만 머릿속에 남아있다. 작곡가 윤이상의 음악을 들어보지 않고 함부로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 윤이상의 음악은 처음 듣는 이들에게 매우 난해하다는 점도 한 몫한다.
베토벤, 모짜르트 등 서양 음악가들의 곡들에만 익숙한 우리의 귀에 동.서양의 조화, 노장사상의 가미, 민족선율을 서양악기에 접목시킨 윤이상의 음악이 들릴 리 만무하다. 하지만 세계인들은 윤이상의 음악에 찬사를 보낸다.
서양에서는 그에 대해 "서양 현대 음악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에 주력하고, '동서양을 잇는 중계자 역할을 한 음악가'라는 음악사적 지위와 함께 '독일 관념철학의 전통이 벽에 부닥친 서양문명의 흐름 속에서 동양사상을 담은 음악으로 세계음악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연 작곡가'"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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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측 '윤이상음악연구소'에 설립된 고 윤이상 선생 흉상. [자료사진-통일뉴스] |
윤이상 음악의 바탕에는 민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7년 9월 7일 경상남도 산청군 덕산면에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통영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윤이상의 귓전을 울린 어부들의 노래가 훗날 작곡에 영향을 줬다고 한다.
28살에 해방을 맞기까지 윤이상은 음악공부를 하면서도 일제강점기라는 민족현실 속에서 속 편히 음악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활약하고 3.1운동이 격렬했던 통영에서 자란 그는 자연스레 민족현실로 뛰어들었다.
일본유학시절 '민족운동서클'에 가입, '조국을 일본식민지에서 해방되게 하자고 맹세'하고 귀국해 동료들과 폭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거나 일제가 '불온하다'고 낙인찍은 가곡으로 2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현실을 껴안으며 민족과 함께 살려고 몸부림 치던 윤이상은 "5선 상에 음부(音符)를 기입하는 것이 너의 최량의 길이냐"라고 독백할 정도로 음악과 현실 속에서 고뇌했다. 그가 사회현실을 고뇌하며 민족을 음악에 담는 실천가로서의 면모가 쌓여가던 시기였던 셈이다.
이를 두고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는 "개인적 윤리보다 민족적인 사회윤리의 문제들에 책임적인 참여를 통하여 그는 민족현실을 끌어 안고 있었다"며 "작품에서 민족적 정서를 모색하는 것도 현실과 음악 사이를 좁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음악과 근대양악 사이도 좁히는 방황이자 대화이었으며 탐구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렇기에 1956년 프랑스로 떠난 뒤, 1957년 서베를린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음악공부와 창작에 매진하면서 그 만의 음악이 빛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민족과 현실, 음악을 향한 갈구는 사진으로만 보던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고분벽화 사신도를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한 1963년 방북으로 이어졌다. 이는 소위 '동베를린(동백림) 간첩사건'으로 비화되고, 1967년 6월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 유학 11년만에 강제 귀국 당했다.
1969년 2월 각국의 항의와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탄원으로 풀려난 윤이상은 개인이 아닌 민족과 통일이라는 사회실천적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부터 한국의 민주화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런 그의 음악적 세계와 민족의 평화.통일을 향한 실천은 '광주여 영원히'(1981), '나의 땅, 내 민족이여'(1986/87), '무궁동'(1986), '화염 속에 쌓인 천사'(1994) 등으로 표출됐다. 또한, 1990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의장을 맡아 통일운동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그리고 1992년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 '정 트리오'의 북한공연을 극비리 추진하기도 하는 등 남북 음악인 교류활동에도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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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10월 방북한 윤이상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자료사진-통일뉴스] |
정치.이념을 넘어선 음악을 통한 남북화해의 길
윤이상을 바라보는 남측의 시선과 달리 북측은 "열렬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숭고한 인도주의적 이념이 작품들마다에 그대로 뜨겁게 어려있는 것으로 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참되게 살아온 그의 창작생활의 빛나는 총화로 되고 있다"라고 높이 평가한다.
1984년 '윤이상연구소'가 설립되고, 1993년 3월 평양 연평거리에 1만7천여㎡, 15층 규모에 2개 연주홀과 2백 개의 방으로 구성된 '윤이상 음악당'이 건립됐다. 그리고 잡지 <음악세계>가 발행되고 있다. 이를 두고 윤이상을 소위 친북용공분자라고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민족선율을 서양악기에 접목한 그가 창작을 위해 남쪽 전통음악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작곡가는 주변의 자극을 받아서 편성이나 작곡의 내용이나 그런 것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지요. 저는 따로 떨어져 있고 정치적인 방해 때문에 한국의 연주가들과 접촉이 전혀 없었습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창작을 위해 택한 곳이 북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1972년 독일 뮌헨올림픽 문화행사 일환으로 창작된 오페라 '심청'으로 1973년 한국정부의 초청을 받기도 했지만, 당시 김대중납치사건을 이유로 윤이상은 방한을 거부했다.
"음악은 특권자들의 성찬의 식탁 위의 금잔에 담긴 향내 나는 미주(美酒)의 역할만을 할 수가 없다. 음악은 때로는 깨어진 뚝배기 속에 선혈을 담아 폭군의 코앞에다 쳐들고 그 선혈로 하여금 화염으로 연소시키는 강한 정열을 뿜어내야 한다... 나의 음악은... 사회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불행한 운명과 민족, 민권질서의 파괴, 국가권력의 횡포에 자극을 받아 음악이 가져야 할 격조와 순도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표현적 언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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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윤이상은 사망 2개월 전 독일을 찾은 리영희을 만났다.[사진출처-도천테마기념관] |
심신이 지친 오랜 망명객이 딸깍발이의 고행을 자처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통영 밤바다를 울리던 어부의 노랫소리를 안고 항일, 민주, 통일, 평화를 온 몸으로 부딪힌 음악가에게 민족을 향한 가슴은 버릴 수 없는 힘인 것이다.
1995년 11월 4일 윤이상은 78세의 나이로 독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생을 마치기 전에 고향땅을 밟고 싶다"는 소망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이제 내 고향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독일"이라는 한스런 유언을 남긴 채 이국땅에서 눈을 감았다.
조국으로부터 1평의 땅도 허락받지 못한 그는 베를린 시가 '인류에 명예로운 유산을 남긴 인물'을 위해 조성한 가토우 지역 특별묘지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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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으로부터 1평의 땅도 허락받지 못한 윤이상은 베를린 시가 '인류에 명예로운 유산을 남긴 인물'을 위해 조성한 가토우 지역 특별묘지에 잠들어 있다. [사진출처-도천테마기념관] |
민족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던 윤이상 사후, 남북간 음악교류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휘자 정명훈이 남북합동공연을 추진했음에도, 북한 은하수관현악단과 프랑스 라디오프랑스 필하모닉이 2013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협연했듯이 음악 앞에는 여전히 정치의 벽이 막혀 있다.
그러나 윤이상이 설계한 '민족음악제전'의 꿈은 유효하다. 남측 '윤이상평화재단'과 북측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오는 2017년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이상이 제안했던 '비무장지대(DMZ) 지구촌평화음악회' 개최를 신중히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이상 서거 20주기인 2015년. 남북관계 부침의 역사 속에서 그의 음악을 매개로 남북화해의 물꼬를 여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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