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남북회담, ‘합의 이행’이 ‘현안 타결’의 지름길

 

<친절한 통일씨> 남북회담 44년, 화해·협력 지향하는 642회 회담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5.12.10  23:36:16
페이스북 트위터
   
▲ 2015년 8월 22일부터 판문점에서 진행된 남북고위당국자 접촉 장면. 825합의를 내놓았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남과 북은 11일 개성공단에서 차관(부상)급을 수석대표로 하는 ‘제1차 남북당국회담’을 개최한다.

이번 남북당국회담은 앞서 지난 남북고위당국자접촉 합의, 이른바 8.25합의에 따른 것으로, 석 달여가 지나서야 실무접촉이 이뤄지는 난항을 겪었지만 해를 넘기지 않고 합의 이행의 첫발을 내딛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양측은 지난달 26일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열린 실무접촉 과정에서 이번 당국회담이 지난 8.25합의 이행을 위한 후속회담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8.25합의 제1항에 명시한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당국 회담’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서 회담 명칭과 의제에 반영했다.

또 이번 당국회담에 참석하는 양측 대표단의 수석대표를 차관(부상)급으로 하고 각기 편리한 수의 인원들로 구성하기로 하는 등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회의가 운영되도록 하자는데 합의했다. 그리고 앞으로 회담이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회담 명칭에 차수를 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집권 4년차에 접어든 상황에서 내년 4월 중순, 총선을 치러야 하는 박근혜 정부로서는 이번 당국회담에서 성과를 내는 것이 긴요할 것이다. 또 36년만의 제7차당대회 소집을 공표해 놓은 김정은 체제로서도 이번 당국회담을 내년 5월 초 당대회까지 이어지는 징검다리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지난 44년간의 남북회담 역사를 살펴보고 이번 당국회담을 통해 남북관계 현안에 대한 타결이 이루어지길 기대해 보자.

남북회담 44년의 역사

분단 이후 1970년대까지 20여 년간 긴 대화 단절의 시기를 넘어 남과 북이 회담 테이블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함께 하기까지는 4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1971년 남북 적십자 파견원 첫 접촉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공식적이거나 공개적인 남북 접촉이나 대화는 거의 없었다.

이 기간 북측 당국은 130여 차례의 대남 대화를 제의했으나, 남측은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총재 최두선 명의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한 것이 유일한 대북 대화제의였다.

앞서 북측은 1950년 6월 7일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협의회 소집제의를 시작으로 남북체신대표회담(‘54.12.1), 남북보건당국자간 방역 정보교환 제의(’56.8.24), 국제체육대회 단일팀 구성제의(‘57.6.10), 남북대표의 경제위원회 설치 제의(’63.12.10) 등 각 시기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대화 제의를 거듭했으나 남측은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이 시기에 남과 북은 1954년 6.25참전국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네바 정치회담과 1963년 동경올림픽 단일팀 구성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 체육 관계자간 접촉에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는 지난 1971년 8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개최 준비를 위한 ‘남북적십자파견원 제1차 접촉’을 시발로 남북회담 역사가 비로소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부터 2015년 11월 26일 남북당국회담을 위한 실무접촉까지 44년간 남과 북은 정치분야 253회, 군사분야 49회, 경제분야 132회, 인도분야 153회, 사회문화분야 55회 등 총 642회의 회담을 이어왔다.

유신시대, 남북회담 시작...지속시키지 못해

남북 대화는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지만 1980년대까지 지지부진하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구체적인 의도와 방향이 잡히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1970년대 초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남북 당국 간의 대화가 시작된 배경에는 더 이상 ‘대화의 단절’을 버텨낼 수 없는 국내외 정치 정세의 변화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때의 남북회담은 실제 남북 당국 간의 대화는 물론 적십자회담도 지속시키지 못한 채 대화를 시작했다는 의미만 남기고 중단되었다.

   
▲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전, 박정희 대통령이 북측 박성철 제2부수상을 청와대에서 만났다. [사진제공-통일부]

박정희 정권이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을 북측에 제의한 것을 계기로 그해 9월 판문점에서 사상 첫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고 이듬해인 1972년에는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 위해서는 1971년 11월 20일부터 1972년 7월 1일까지 24차례의 비밀 실무자 접촉이 필요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후락 중정부장과 박성철 제2부수상이 각각 한 차례씩 평양과 서울을 비밀 교환 방문했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7.4남북공동성명이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됨에 따라 그해 7월 16일부터 10월 6일까지 4차례의 ‘남북공동위원장 회의’를 위한 실무접촉과 3차례(1972.10.12, 11.3, 11.30)의 남북공동위원장회의를 통해 양측 각 5명으로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그 안에 간사회의와 5개 분과위원회, 조절위원회 공동사무국을 판문점에 두기로 했다.

이 같은 합의에 따라 남북조절위원회 본회의가 3차례(1972.11.30.~12.1 서울, 1973.3.14.~15 평양, 1973.6.12.~13 서울) 열렸으나 지지부진하던 중 1973년 8월 북측의 대화중단 선언으로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이후 판문점에서 3차례의 간사회의(1973)와10차례의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회의(1974~1975), 3차례의 변칙대좌(1979) 등이 있었으나 사실상 남북회담은 끝나게 됐다.

노태우 제6공화국, 남북고위급회담 본격화

1980년대 들어서도 당국 간 대화에 특별한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남북국회회담을 위한 예비접촉(1985, 판문점)을 비롯해 5차에 걸친 남북경제회담(1984.11.15~1985.11.20, 판문점)이 새로 시작됐으며, LA올림픽 단일팀 구성 관련 남북체육회담(1984, 판문점), 서울올림픽 관련 남북체육회담(1985, 스위스 로잔) 등 각 분야별 회담은 계속 열렸다.

특히 이때 남북적십자 실무접촉(1984.9.18,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전달하는 수해 물자의 인도·인수가 이루어졌으며, 남북 이산가족들의 서울·평양 교환 방문과 예술공연단 교환이 실현되는 등 남북관계의 개선 기미가 보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쓰러진 1979년 10.26 직후인 1980년 2월 6일부터 그해 8월 20일 사이에 ‘남북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접촉’이 10차례에 걸쳐 진행됐으나, 당시 전두환을 위시한 쿠데타 세력이 권력 장악 과정에서 5.17 광주학살 사건을 일으키자 북측은 이를 이유로 더 이상의 접촉을 거부했다.

1985년 9월 초 북측의 허담·한시해 일행이 비밀리에 판문점을 통해 서울을 방문, 2박3일간 머물면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남북정상회담 문제를 논의하고 그해 10월 중순에는 남측 장세동·박철언 일행이 같은 방식으로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면담했으나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 1992년 5월 5일~8일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 [사진제공-통일부]

이후 노태우 정권 들어서 남측이 ‘남북고위당국자간 회담개최’를 제의하고 이에 북측이 ‘남북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을 수정 제의 한 것을 남측이 수용, 실무접촉을 거쳐 1990년 9월 4일부터 7일,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서울과 평양에서 2차례의 남북고위급 회담이 열리게 됐다.

이 회담은 이후 1992년 2월 평양에서 열린 제6차 회담까지 이어져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그리고 ‘남북고위급회담 분과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서명·발효시키기에 이르렀다.

또 그해 5월 초 및 9월 중순에 잇따라 열린 7, 8차 회담을 통해 각 공동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남북정치분과위원회’, ‘남북군사분과위원회’, ‘남북교류협력 분과위원회’를 비롯한 각 분과 및 공동위원회 부속 합의서를 채택, 발효시켰다.

이렇듯 1990년대에 이르러서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합의, 발효시키는 등 당국간 대화에서 의미있는 성과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1988~1993년)는 8차례의 남북고위급 회담을 개최하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는 등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1993년의 팀스피리트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재개되면서 당국간 회담은 중단되고 말았다.

1994년 무산된 남북정상회담...무너진 남북관계

북측은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5월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 접촉’을 제의했다. 이에 남측이 핵문제를 포함시켜 ‘핵문제와 특사교환문제 협의를 위한 실무대표 접촉’을 제의함에 따라 서로 공방을 주고받다 실제 접촉은 그해 10월 5일로 미뤄지게 됐다.

그러나 1994년 3월 19일까지 8차례에 걸쳐 판문점에서 진행된 실무접촉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그해 6월 20일 남측은 국무총리 명의로 남북정상회담 개최 절차 문제 협의를 위한 예비접촉을 북측에 제의하고 이에 북측이 동의해 1994년 6월 28일 판문점에서 실무접촉이 이루어져 그해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필요한 1, 2차 대표접촉과 통신실무자 및 경호실무자 접촉까지 다 마친 상태에서 김 주석이 7월 8일 사망함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 후 김 주석에 대한 조문 파동을 겪으면서 한동안 냉랭했던 남북 관계는 1995년 5월 이홍구 국무총리의 특별 기자회견을 통해 북측에 ‘정치적인 부대조건 없는 곡물제공’을 제의하고 실무절차 협의를 위한 남북간 회담을 제의함으로써 간신히 회담의 실마리를 이어갔다.

1995년 6월 17일 중국 베이징에서 ‘대북 쌀지원을 위한 남북차관급회담’이 열려 1차로 쌀 15만톤이 무상 지원되었지만 이후 그해 9월까지 베이징에서 열린 2차, 3차 회담은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해를 넘겼다.

김영삼 정부(1993~1998년)를 통틀어 남북회담은 28회가 열렸으며, 1996년에는 한 건도 열리지 않았다. 이후 1998년 4월 북측의 제의에 따라 베이징에서 열린 ‘비료지원 문제 협의를 위한 차관급 남북 당국자 회담’도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이듬해 6월 ‘이산가족 문제와 상호관심사로 되는 당면 문제’를 토의하는 남북차관급 당국회담에서도 합의점은 나오지 않았다.

6.15공동선언, 10.4선언...남북관계 근본적 개선

   
▲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두손을 맞잡았다. [자료사진-통일뉴스]

2000년 6월 13일에서 15일까지 평양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발표한 6.15남북공동선언은 남북 양측의 최고당국자가 직접 합의하고 서명한 최초의 문건이다.

5개항으로 이루어진 6.15공동선언은 1항과 2항에서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해결원칙을 확인했으며, 기존 남북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3항과 4항에서는 이산가족 문제와 비전향 장기수 문제 등을 인도적 차원에서 풀어나가기로 하고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한 남북 경제협력과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 활성화를 꾀하기로 했다.

그리고 5항에 이 같은 합의사항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빠른 시일 안에 남북 당국사이의 대화채널을 상설화하겠다는 약속을 담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적절한 시기' 서울 방문도 명기됐다.

이에 따라 남과 북은 당국간 대화를 총괄하는 성격의 ‘남북장관급회담’을 갖기로 했다.

남북장관급회담은 2000년 7월 29일부터 31일까지 서울에서 제1차 회담이 개최된 이후 3차, 17차 제주, 6차 금강산, 19차 부산을 제외하고 2007년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에서 마지막 회담인 제21차 회담이 끝날 때까지 서울과 평양을 각각 8회, 9회씩 오가며 남북 당국회담의 원형을 만들어 냈다.

회담에서는 경제·사회 문화 분야의 교류협력과 인도적 문제 등은 물론 북핵문제, 남북간 군사문제 등 남북관계 전반에 대한 현안문제가 논의됐다.

또 분야별 세부 이행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하위 회담을 생성하고 여기에서 논의할 과제를 부여하는 한편, 하위 회담에서 의견차이가 좁혀지지 않거나 합의사항 이행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를 협의·해결하는 중심적 협의체로서 기능을 수행했다.

회담 의제는 경의선 철도연결(1차), 이산가족 생사확인·서신교환·면회소 설치 및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의 설치(3차), 금강산 육로관광과 개성공단 건설 실무협의 개최(5차), 북핵문제 (8, 9, 10차), 남북장성급회담(14차),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 지원(16차) 등 지금까지 미해결 상태인 남북관계 현안들이 두루 망라됐다.

6.15공동선언 4항 합의사항인 경제협력의 이행을 위해 3차 장관급회담에서 남북은 양측 차관급을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하고 2000년 12월 제1차 남북경추위 회의부터 2007년 4월 제13차 회의까지 7년간 정례화된 경제회담 틀을 운영했다.

또 6.15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해서는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가 필수적이며, 특히 철도와 도로 연결사업은 군사적 보장조치가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2차 장관급회담을 계기로 남북국방장관회담 개최를 합의해 2008년까지 3차례에 걸쳐 회담을 진행했다.

이처럼 남북6.15공동선언 이후 남북 사이에는 장관급 회담과 경제회담, 철도·도로 연결과 개성공단 건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화와 교류협력이 확대되었다. 민간교류도 비로소 본격화되었다.

6.15공동선언 발표 7년 후인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에 합의·서명했다.

전문과 8개항으로 구성된 10.4선언은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 추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남북 경협의 확대·발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설치, 사회문화분야 교류 협력 발전, 인도적 협력 추진 등에 관한 40여 개의 분야별 합의사항을 담았다.

   
▲ 2007년 2월 27일 평양 고려호텔. 제20차 남북장관급회담. 북측 권호웅 내각참사가 이재정 통일부 장관을 영접하고 있다. [사진제공-통일부]

특히 10.4선언은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장관급 회담과 차관급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등을 통해 남북 당국간 협력문제를 논의해 오던 것을 10.4선언에서는 남북총리회담과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로 격을 높이고 남북사회문화교류협력추진위원회를 신설해 협의기구를 체계화했다.

10.4선언 발표 이후 2007년 11월에 제1차 남북총리회담(11.14~16, 서울)과 제2차 남북국방장관회담(11.27~29, 평양)이 개최되었으며, 12월에는 제1차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12.4~6, 서울)와 제1차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추진위원회(12.28~29, 개성)가 열렸다.

이명박 정부, 도대체 뭘 했나?

이명박 대통령 집권 시기인 2008년 2월 25일부터 2013년 2월 24일까지 5년간 남북회담은 총 16회 열렸다. 평균 1년에 3회꼴이다. 집권 첫 해인 2008년과 2011년에는 각 한차례씩만 열렸고 그나마 2012년과 2013년에는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 연도별 남북회담 통계[자료-통일부]

이명박 정부의 첫 남북회담은 2008년 10월 25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37차 남북군사실무회담. 16번째 마지막 회담도 제39차 남북군사실무회담이었다.

37차 회담에서는 그해 8월 발생한 금강산관광객 피격사건과 남측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살포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고 39차 회담에서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대해 입씨름만 하다 합의없이 종료됐다.

2010년에 진행된 8차례의 회담은 개성공단 3통문제를 다루기 위한 남북 실무접촉(개성)과 적십자회담 실무접촉 등 실무회담 7차례에 본 회담은 그해 10월 26~27일 개성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이 유일했다.

남측이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북측은 쌀·비료 지원과 금강산관광재개를 위한 실무회담 개최를 주장하면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나게 됐다.

2000년 이전까지 남북회담이 347회로 연평균 12회, 2000년 이후 현재까지는 295회로 연평균 18회 개최된 것을 감안하면 이명박 정부 5년간의 성적은 초라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지경이다.

이 대통령은 집권 2년차인 2009년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한반도 신 평화구상’을 밝혔다.

이른바 ‘비핵·개방·3000’을 근간으로 하는 이 발표는 북핵 폐기와 재래식 무기 감축으로 상호신뢰를 구축해 함께 번영하자는 포괄적 구상이지만 실제 회담 통계에 나타난 결과를 보면 도대체 뭘 했나 싶을 정도이다.

전반기 ‘비방중상’으로 허비...반드시 성과내야

북한은 2012년 12월 인공위성 '광명성 3호' 발사에 이어 박근혜 정부 출범을 며칠 앞둔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어 3월 키리졸브-독수리 연합군사연습에 반발해 정전협정 백지화, 남북불가침합의 파기, 1호 전투태세 선포, 전시상황 돌입 등 쉼 없이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4월 8일 김양건 당 비서가 개성공단 잠정 중단 선언을 했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의 남북회담은 잔뜩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시작됐다.

2013년 6월 9일 판문점에서 남북당국회담 실무접촉을 열어 사흘 후인 12~13일 서울에서 남북당국회담을 개최하기로 했으나 회담 일시, 장소, 의제까지 모두 합의해 놓고 수석대표의 ‘급’을 이유로 바로 전날 회담이 무산됐다.

당시 류길재 장관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을 수석대표로 하는 당국회담을 내심 기대했던 남측이 회담을 하루 앞두고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내세우면서 강지영 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수석대표로 발표한 북측이 반발한 것.

결국 남북회담에 대한 절실한 의지가 없다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이미 회담은 무산된 상태였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첫해인 2013년에 24회 회담을 진행했다. 앞서 무산된 당국회담 실무접촉과 그해 8월 23일 판문점에서 개최한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을 제외하고 22차례의 회의가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한 것이었다.

그해 7월 6일부터 8월 14일까지 개성공단 남북당국 실무회담이 7차례 열렸으며, 9월 2일부터 12월 19일까지 개성공단 남북공동위원회 회의가 4차례, 9월 4일부터 11월 29일까지 개성공단 남북공동위원회의 4개 분과위원회 회의가 11차례 열렸다.

2014년은 신년 벽두부터 남북 정상간 대화 의지로 시작된 해였다.

2월 1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고위급접촉은 이산가족 상봉 문제와 상대방에 대한 비방중상 중지를 공동보도문으로 내놓았지만 그해 진행된 것은 이산가족 상봉행사와 상대방에 대한 비방중상이었다.

   
▲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일인 2014년 10월 4일, 인천시청 부근 영빈관에서 진행된 남북 고위급 접촉. [자료사진-통일뉴스]

10월 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회식 계기에 이루어진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합의한 10월 말~11월 초 2차 남북고위급 접촉이 무산된 배경에도 탈북자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와 남북간 총격사건이 있었다.

그렇게 2014년에는 2차례의 고위급접촉 및 회담과 개성공단 상사중재위원회 운영회의를 비롯한 6차례의 회담이 있었다.

11일 열리는 이번 남북당국회담은 지난 8월 22일부터 판문점에서 진행된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의 결과 발표된 8.25 합의에 따른 것이다. 군사분계선 일대에서의 지뢰폭발사건과 포격전으로 남측의 대북 확성기 방송이 재개된 상황에서 북측이 고위당국자 접촉을 제안해 성사된 이례적 회담 결과였다.

또 다시 발생할 지도 모르는 ‘격’ 논란과 관련해 통일부 당국자가 “원칙적으로 어느 나라에서든 협상 대표는 기본적으로 그 체제가 정하는 것”이며, “회담에 누가 나가면 좋겠다는 결정은 임명권자가 대사 임명하듯이 하는 것이므로 상대측에서 누가 나와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아가 이번 당국회담에서 8.25합의 이행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풀어나가다가 서로 필요하고 중요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고위 당국자 접촉을 다시 가동할 수도 있다는 상호인식이 지난 8.25합의 당시에도 있었고 이번 실무접촉 과정에서도 서로 확인했다고 말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모처럼 마련된 남북당국회담을 통해 남과 북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현안문제’에 대한 서로의 관심사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이견을 좁혀 합의, 타결로 나아가기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다. 한 번에 다 되지는 않더라도 필요한 만큼이라도 앞으로 나가길 바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