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에 우리는 서울 거여동의 성동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여기서 ‘우리’라 함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안종필 위원장과 홍종민 총무, 정연주 위원, 그리고 나를 가리킨다. 우리는 ‘자유언론실천선언’ 발표 4주년 기념일인 1978년 10월 24일에 ‘민주·인권일지’를 유인물로 펴낸 것이 ‘죄’가 되어 1심과 2심에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 사건으로 동아투위 위원 10명이 구속되었는데 처음에는 모두가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1979년 4월에 이감되어 우리 네 사람이 성동구치소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생물학적 죽음, 그러나···

1979년 10월, 성동구치소의 정치범 또는 양심수들은 ‘준(準)해방구’에서처럼 일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이었는지, 일부 교도관들과 일반 재소자들 가운데 다수가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애초에 독방에 수용되었던 우리 네 사람과 대학생 수십 명은 끈질기게 합사(合舍)를 요구한 끝에 한 사동에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다. 안종필 위원장과 홍종민 총무, 정연주 위원과 내가 같은 사동 2층에서 나란히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대학생 3명의 감방장 노릇을 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아침 점검이 끝나면 담당 교도관이 철문의 자물쇠를 풀어주는 덕분에 우리 네 사람은 한 방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찐빵 쪼가리를 다져 만든 ‘바둑’을 두기도 했다.

10월 27일 아침이었다. 우리 사동 담당 교도관이 군복을 입고 출근을 한 모습이 보였다. 이 방 저 방에서 대학생들이 그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비상 걸렸어요?” 그는 긴장한 얼굴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2013년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신문도 텔레비전도 볼 수 있다지만, 그 시절에는 전혀 그럴 수가 없어서 면회 온 사람들이나 호의적인 교도관의 입을 통해 바깥소식을 어렴풋이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잠자코 있어야 했다.

10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아침 식사를 끝낸 우리가 한 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발 담당 ‘소지’(기결수 가운데 잡무를 맡아 출역하는 사람. 일제강점기 감옥에서 쓰던 말인 소오지[掃除]에서 내려온 말인 듯)가 복도에서 쇠창살 사이로 우리를 들여다보며 이렇게 소곤거렸다. “지금 밖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어요.” 평소 그를 동생처럼 대하던 우리가 거의 동시에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는 사동 복도를 살피더니 교도관이 안 보이는 것을 확인한 뒤 겁에 질린 소리로 말했다. “그저께 금요일 밤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님을 총으로 쏘아 죽였어요.” 안종필 위원장이 경상도 사투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아아가 돌았나? 니 지금 뭐라 캤노?” 다른 세 사람도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야, 너 지금 헛소리 하냐?” 소지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참말이라니까요.”

나는 며칠 전 면회를 온 아내가 쇠창살 너머에서, 기록을 하는 교도관을 흘깃흘깃 곁눈질하면서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최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잇달아 일어나서 계엄령이나 다름없는 비상사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혼란 속에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했다는 것일까?’

우리는 소지에게 거듭 묻고 또 물었다. 그는 신문과 텔레비전에 “박 대통령님의 서거가 보도됐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 순간 우리는 ‘만세’를 부를 뻔했다. 한 인간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숨통이 끊긴 민주주의의 부활을 축하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 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안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박정희가 죽었으니 우리 이제 나가야 하는 거 아이가?” 그 말을 들은 정연주 위원이 방구석에 놓인 사물 보따리를 챙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성님들, 나 지금 집에 갈라요.” 우리는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월요일인 10월 29일 아침 우리 네 사람은 오랏줄에 묶인 채 호송차에 올랐다. 서소문의 대법원으로 확정 판결을 받으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차가 천호동을 지나 서울시청 앞 광장에 이르렀을 때 창밖을 보니 ‘애도 박정희 대통령 서거’라는 펼침막이 대형 건물들에 드리워져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국장’을 준비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띠었다.

우리는 재판이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성동구치소로 돌아갔다. 사동으로 가는 길에 보안과 앞 복도에 게시된 신문들을 보니 동아·조선·중앙일보 할 것 없이 박정희의 죽음에 대한 극도의 애도와 통분이 담긴 기사와 논설로 도배되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직감했다. ‘박정희와 유신독재는 우리가 바라는대로 쉽사리 사라지지 않겠구나’라고.

박정희가 1975년 5월에 발동한 긴급조치 9호는 1979년 12월 10일 자정에야 해제되었다. 그 이전에 홍종민 총무가 먼저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가고, 정연주 위원도 11월 말에 석방되었다. 안종필 위원장은 12월 7일, 나는 14일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거여동에서 동대문구 장안동의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거리를 내다보니 무장한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펴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틀 전인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가 중심이 되어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당한 인간 박정희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민족 중흥의 영도자’ ‘구국의 영웅’ 박정희는 ‘영생(永生)’을 누리고 있다. 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난 군사쿠데타 이래 지금까지 52년 동안 박정희라는 역사적 실체와 망령 때문에 갖은 고난을 당한 이들이 모두 그렇겠으나, 특히 동아투위 사람들은 아직도 그가 씌운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 개인만 하더라도 소중한 청춘 시절, 자유롭게 창의적으로 살아야 할 중·장년 시기, 그리고 너그럽고 평화롭게 보내야 할 노년기를 박정희한테 침탈당한 데 대한 분노를 삭이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다.

박정희와 동아투위 사람들의 관계에는 개인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그것은 순전히 ‘독재자 박정희’와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체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과 대립의 반영이었다. 그 과정을 연원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기관원’이 지배하는 동아일보

나는 1967년 11월 중순에 동아일보사 수습기자로 발령을 받았다. 대학 4학년 2학기 때였다. 지금과 달리 그 시절에는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에게도 응시 기회를 주던 터라 입사시험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인문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거나 흔치 않은 출판사에 취직하는 길을 빼고는 달리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언론사들이 신입사원을 뽑는 가을철이 되면 여러 신문사와 방송사에 수천 명이 몰려들곤 했다. 그 중 ‘제1순위’는 동아일보사였다. 회사의 얼굴인 <동아일보>가 신문의 질과 판매부수에서 다른 일간지들을 압도했을 뿐 아니라 대우도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동아일보를 모르는 요즈음 젊은 세대는 ‘조·중·동’이라고 굳어진 용어만을 보고, 또 실제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뒤를 숨을 헐떡이며 따라가는 동아일보를 보고 ‘대형신문들 가운데 꼴찌’라고 무시해버린다. 1960년대부터 1975년 3월까지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동아일보사에서 일했던 동아투위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다. 어쨌든 동아일보사가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 113명을 강제해직한 이래 신문이 그렇게 되어버렸으니 그 회사의 사주와 구성원들이 누구를 탓하겠는가?

나는 동아일보사에 들어가서 수습 교육을 받기 시작한 첫날부터 대단한 긍지를 느꼈다. 편집국장인 천관우 선생은 유명한 언론인이자 문필가 겸 역사학자였고, ‘애송이 기자들’의 교육을 맡은 분들도 아주 쟁쟁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도군사훈련단(ROTC) 교육과정을 마쳤기 때문에 동아일보사에서 수습기자 교육을 받던 중인 1968년 3월 말에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광주보병학교에 들어갔다. 그때는 북한 특수부대의 ‘1·21 청와대 습격 기도 사건’(이른바 ‘김신조 사건’)이 터진 뒤라서 온 나라의 분위기가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장교인 데도 삭발을 당한 채 모래주머니를 종아리에 차고 3개월 동안 지독한 훈련을 받고 나서 전방 부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휴전선의 철조망 앞에서 소대원들과 함께 날마다 ‘북괴’(당시에는 북한을 그렇게 불렀다)의 침투에 대비하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나는 1970년 6월 말에 전역해서 7월 초 동아일보사에 복직하고, 못 다 마친 수습교육을 다시 받아야 했다. 2년 4개월 만에 돌아간 편집국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히 동아일보사 임직원이 아닌 40대 중반의 사내가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는 물론이고 편집국장석까지 오가면서 간부들과 시시덕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슨 ‘의견’을 전달하고 있었다. 방(方)가 성을 가진 그 사내를 편집국 사람들은 ‘기관원’이라고 불렀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동아일보사에 파견된 ‘요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취재부서의 부·차장들은 물론이고 편집국장이나 부국장한테도 수시로 압력을 가했다. “이 기사는 좀 줄여주고 저 논평은 이렇게 누그러뜨려 달라”는 식이었다. 내근을 하면서 날마다 그런 꼴을 보아야 하는 젊은 기자들 가운데는 말로 항의를 하지는 못하고 속으로 울분을 삭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초년 기자의 잊지 못할 기억들

수습 교육을 마친 나는 1971년 1월에 사회부 기자로 발령을 받고 영등포경찰서에 ‘2진’으로 나가게 되었다. 4월 말 어느 날 오후 기자실로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 한 분이 들어섰다. 다른 기자들은 포커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 할머니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동아일보 기자를 찾았다. 나는 경찰서 정문 옆의 다방에 가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고 남편과 함께 수원의 한 양로원에 얹혀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남자 노인 여러 명이 젊은 여자의 호적을 고쳐 ‘노인’으로 만들고는 양로원에 불러들여 부부처럼 동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양로원에 기부되는 물품을 나누어 줄 때 원장이 할머니들에게 뜀박질 시합을 시키는데, 그 ‘젊은 할머니들’이 늘 상품을 독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취재차를 타고 수원으로 가서 그 양로원의 실태를 자세히 알아보았다. 모두가 할머니의 말 그대로였다. 5월 초 ‘보훈의 날’에 그 기사가 동아일보 사회면에 크게 나간 지 며칠 뒤 할머니가 영등포서 기자실로 나를 찾아왔다. 할머니는 “김 기자님 덕분에 양로원이 정상으로 돌아갔다”며 내 손을 잡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헤어지기 전에 할머니는 허리춤에 매단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5백원짜리 지폐 한 장이었다. “양로원 사람들이 그러는데 기자님들한테는 기사비를 꼭 드려야 한다면서요.”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했다. 대부분이 20대 후반인 경찰서 출입기자들이 포커나 고스톱을 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형사과장이나 경무과장, 심지어는 경찰서장한테 가서 “돈좀 빌려 달라”고 대수롭지 않게 부탁을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 빚을 나중에 갚는 기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길지 않은 나의 사건기자 생활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1971년 초겨울에 일어났다. 그해 8월 10일 서울 외곽의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에서 박정희 정권의 무책임한 집단 이주 정책에 분노한 주민 3만여 명이 곡괭이와 몽둥이를 들고 ‘봉기’ 비슷한 투쟁에 나섰다. 정부와 다수 언론은 ‘폭동’이라고 매도했지만 그들의 항거는 정당했다. 나는 그 사건의 여파를 연말특집으로 심층취재 하라는 데스크의 지시를 받고 광주대단지로 가서 현장을 이곳저곳 살펴보다가 남한산성 중턱의 한 마을로 올라갔다. 말이 ‘마을’이지 공중변소도 없고 쓰레기투성이인 천막촌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데 이르러 보니 어른이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군용 텐트 하나가 서 있었다. 그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 70대 중반의 할머니가 열 살쯤 된 증손자와 살고 있었다. 허름한 이부자리와 찬장으로 쓰는 사과궤짝이 살림살이의 전부였다. 내가 기자라고 밝히자 그 할머니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면서 하소연을 했다. “저 아래 동네 사람들한테는 정부가 생활보조금도 준다는데 나는 한 푼도 받지를 못해요. 이제 겨울이 오면 이 아이하고 굶어 죽을 판이라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채 얼이 빠진 사람처럼 할머니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돌아서서 비탈길을 내려가는 내 등을 향해 할머니가 울부짖었다. “기자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나는 차마 뒤돌아 볼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런 소리가 울려 펴지고 있었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해 언론인은 과연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인촌 김성수의 ‘친일 행적’을 알고 충격을 받다

1972년 봄에 나는 내근부서인 편집부로 가라는 인사발령을 받았다. 편집부는 취재부서들에서 작성한 기사들을 받아 정리해서 지면을 구성하는 일을 한다. 외근을 하던 때는 회사에 저녁에 들어가기 때문에 보지 못하던 ‘기관원’이 바로 편집부에서 상근을 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당시 석간이던 동아일보의 편집대장(신문 지형을 뜨기 직전의 초쇄)이 나오는 오전 11시쯤이 되면 그 자가 어김없이 편집부 부장이나 차장 옆에 서서 “이 기사는 정부에 비판적이니 빼야 하고 저 기사는 너무 크니 줄여야 한다”는 식으로 주문 아닌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부·차장 중 결기가 있는 사람이 부정적 반응을 보이면 바로 코앞에 있는 편집국장한테 가서 기어코 자기 뜻을 관철하곤 했다. 그것이 그 시절 전국 모든 신문사와 방송사의 전형적 ‘풍경’이었다.

편집부에 근무하던 3년 동안, 신문 가판이 나오는 오후 2시 이후는 자유시간이었다. 그것이 내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부족한 지식을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편집국의 외딴 방에 자리잡은 조사부를 자주 찾아갔다. 어느 날 서가를 둘러보다가 임종국 선생이 지은 <친일문학론>을 발견했다. 470쪽이 넘는 그 두툼한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내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4년 동안 교수나 선배한테서 한 마디도 듣지 못한 역사적 사실들이 그 책에 셀 수도 없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동인, 김동환, 김안서, 노천명, 모윤숙, 백철, 유진오, 이광수, 이효석, 정비석, 주요한, 최남선, 서정주 등이 모조리 친일문학인들이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동아일보사는 물론이고 언론계와 교육계에서 가장 훌륭한 민족운동가로 떠받드는 인촌 김성수가 친일을 넘어 부일(附日)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조선 청년들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전쟁에 내보내는 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일본의 침략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찬양했다.

나중에 최민지(본명 최옥자) 선생의 책 <일제하 민족언론사론>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동아일보가 처음 실었다는 주장도 거짓이었다. 동아일보보다 11일이나 앞서 몽양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그런 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일장기를 지운 기자를 비롯한 사원 13명을 강제해직한 뒤 조선총독부에 애걸하다시피 해서 겨우 무기정간에서 풀려났다. 동아투위가 결성된 1975년보다 39년 전에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동아일보가 민족의 대변지’라고 굳게 믿던 것이 ‘미신’이었음을 깨달은 나는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 폭발하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이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그 해 여름에 ‘7·4 남북공동성명’으로 통일 열기를 한껏 고조시킨 지 석 달만에 영구집권을 위해 철권통치체제를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특별담화’라는 편법을 통해 국회를 해산하면서 비상국무회의가 그 기능을 대신하게 한 ‘헌정쿠데타’였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그동안 잔뜩 오그라들어 있던 언론은 아예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박 정권은 10월 27일 대통령종신제를 기조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발표했다. 그날 동아일보 1면 머리에서는 ‘헌법개정안 찬반 토론 금지’라는 굵직한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정부가 배포한 ‘보도 문안’에서 그대로 인용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가판이 나온 직후인 그날 오후 3시쯤 1면 편집당당자인 선배기자가 ‘남산’(중앙정보부)으로 끌려갔다. 결혼식을 며칠 앞둔 그는 ‘불순한 제목’을 달았다는 이유로 이틀 동안이나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풀려났다. 수사관들이 발바닥을 세게 때리면서 “불구자로 만들어 결혼생활을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벌한 상황에서 기자들이나 논설위원들이 박정희를 비판하는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무엇 하러 이런 신문을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자괴감에 빠진 젊은 기자들은 점심때부터 소주를 마시고 당구장이나 극장으로 몰려갔다.

박정희가 유신독재체제를 굳혀 가던 1973년 가을까지 재야의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은 완전히 침묵에 빠져 있었다. 언제 누가 무슨 일로 잡혀 가서 극형에 처해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해 10월 2일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오전 11시께 서울대 문리대 학생 500여 명이 교정의 ‘4·19 기념탑’ 앞에서 ‘10월 유신’ 이후 처음으로 집회와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그들은 “박정희 정권의 정보·파쇼 통치가 자유민주주의의 신념을 철저히 말살하고 입법부의 시녀화와 사법부의 계열화를 가져왔으며, 학원과 언론에 대한 탄압을 가해 영구집권을 기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학생들이 발표한 선언문에는 ‘대일 예속화 중지, 중앙정보부 해체, 김대중 납치 사건 진상 규명, 정치인과 언론인의 각성’ 등 요구사항이 들어 있었다. 박 정권이 서울대 문리대 집회·시위 주동자 20명을 구속했지만 반유신체제 운동은 전국의 대학으로 번져나갔다.

서울대를 출입하던 동아일보사 기자가 써낸 ‘서울 문리대 10·2 데모’에 관한 기사는 휴지통으로 들어가버렸다. 법대와 상대의 시위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는 10월 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서울대 시위를 7면(사회면) 한 구석에 1단으로 실으려고 시도했지만 인쇄 과정에서 깎여버렸다. 동아일보사에 상주하던 ‘기관원’의 압력에 경영진이 굴복한 것이었다.

그 사건은 언론인이라는 이름만 지닌 채 살아가던 동아일보사의 젊은 기자들이 과감하게 떨쳐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0월 7일 저녁 공채 10~13기 출신 기자 50여 명이 ‘마땅히 보도해야 할 기사를 누락시킨 데 항의’하는 뜻으로 편집국에서 밤샘 농성을 시작했다. 유신체제가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신문사에서 언론 탄압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기자들은 편집국 한 가운데 있는 사회부 책상을 에워싸고 자리를 잡았다. 나는 책상 위에 널려 있는 ‘보도되지 못한 사진들’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4·19 기념탑 앞에 가마니를 깐 채 무릎을 꿇고 앉아서 비장한 표정으로 ‘정보·파쇼 통치 중단’을 외치는 모습이었다. 충격은 전율을 넘어 억누를 수 없는 감동으로 바뀌었다. ‘이 살벌한 유신독재 아래서 박정희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저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솟아난 것일까?’

젊은 기자들의 밤샘 농성 투쟁 결과로 10월 11일자 동아일보 1판 사회면에는 ‘경찰 교내 투입’이라는 기사가 1단으로 실렸으나 2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기관원의 압력 때문임이 분명했다. 기자들은 낮에 근무를 마치고 밤에는 무기한 밤샘 농성을 계속했다. 동아의 언론자유 되찾기 운동은 10월 하순부터 11월 중순까지 전국의 신문·방송사로 확산되었다.

11월 5일에는 그 동안 침묵을 지키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가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재준, 함석헌, 천관우, 지학순 등 재야운동 지도자들은 ‘시국선언’을 통해 “민주체제를 근간부터 재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1월 들어 ‘유신 반대 투쟁’이 전국의 대학은 물론이고 고등학교까지로 번지자 박정희는 유화책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2월 7일,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고 처벌을 백지화하라고 문교부장관에게 지시했다.

긴급조치 속의 동아일보사 노조 결성

1973년 12월 24일 유신독재체제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민수협 소속의 장준하, 함석헌, 법정, 김재준, 김수환, 천관우, 계훈제, 백기완 등이 ‘개헌청원국민운동본부’를 창설하고 국민의 서명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유신헌법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제1야당인 신민당까지 서명운동에 가세하자 ‘유신’ 선포 이후 최대의 위기에 부닥친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를 발표하면서 유신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했다. 1월 14일 서명운동을 주도하던 장준하와 백기완이 구속되었다.

언론은 다시 암흑 속에 빠졌다. 만일 어떤 기자가 개헌청원서명운동에 관해 쓴 기사를 데스크가 점검한 뒤 편집국장에게 보이고 활자화하거나 방송기자가 같은 절차를 거쳐 그런 내용을 전파에 실어 보낸다면, 그들은 구속되어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15년 이하의 실형을 선고받게 될 것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종신집권에 도전하는 민주화운동세력을 ‘적군’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1973년 말에 나는 동아일보사 방송국 사회문화부로 인사발령을 받았다. 언론계의 통념상 가장 고달프고 빛이 안 난다는 곳이었다. 석간신문 기자가 오전 11시 마감시간이 끝나면 대체로 자유로워지는 것과 달리 방송의 사건기자는 종일 시간 단위로 뉴스를 보내야 했다. 그래서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그곳을 유배지라고 불렀다. 나는 회사 경영진에게 ‘미운 털이 박힌 기자’ 몇 명과 함께 거기에서 말없이 일을 했다.

당시 언론계에서 가장 근무조건이 낫다는 동아일보사의 기자들이 가장 불만스럽게 여기던 것은 사주와 경영진이 사원들을 ‘마름’이나 가속(家屬)처럼 다룬다는 사실이었다.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사용자와 노동자가 아니라 봉건적인 상하관계가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젊은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운동조차도 경영진과 편집간부들이 상명하복의 군대식으로 제압하려 드는 일이 잦았다. 그런 상황에서 1974년 3월 5일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전례 없이 불합리한 인사발령을 냈다. 방송국 소속 기자 3명을 프로듀서나 영업직 사원으로 보낸 것이었다. 젊은 기자들은 그 부당한 인사의 표적이 사회문화부에서 일하던 고준환 기자라고 보았다. 그는 1월 18일자 <기자협회보>에 “경영자와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려면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쓴 바 있었다. 동아일보사는 물론이고 한국의 모든 언론사는 노동조합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불온조직’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노조를 창립하려는 기자나 사원은 가차없이 해직을 당하거나 구속되어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세 기자가 부당한 인사발령을 받은 3월 5일 저녁 동아일보사 방송국 사회문화부 기자들은 회사 부근 무교동의 한 식당에서 송별회를 열었다. 나도 그 자리에 참여했다. 술잔이 오고가던 가운데 한 기자가 “노조를 만들지 않으면 이런 사건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회식의 좌장 격이던 사회문화부의 차장도 그 말에 동조했다. 순식간에 의기투합한 젊은 기자들은 당장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회문화부 기자 몇 사람이 언론자유수호운동의 주역인 동료들에게 긴급히 전화를 걸었다. 마침 그 식당의 옆방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편집국의 조학래·박순철·박종만 기자와 출판국의 양한수 기자가 합류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약수동의 김두식 기자 집에 12명이 모였다. 노조 발기에 합의한 기자들은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노조를 결성하기로 했다. 3월 6일 노조 발기인 모임에 참여한 인원은 기자 33명이었다. 조학래 기자를 위원장으로 집행부를 구성한 발기인들은 3월 7일 아침 비밀작전 하듯이 서울시청에 설립신고서를 제출했다. 당시의 법에는 전국출판노조로부터 인준필증, 서울시청으로부터 신고필증을 받으면 노동조합이 자동적으로 설립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발기인 33명이 3월 7일 오전부터 동아일보사 안의 편집국, 방송국, 출판국을 돌며 가입원서를 돌리자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 103명이 열렬히 호응해서 조합원이 되었다. 9일까지 조합원 수가 173명으로 늘어나서 가입 대상자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방공간 이후 최초의 언론인 중심 노조는 그렇게 태어났다.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노조가 설립신고서를 낸 이튿날인 3월 8일, 당사자들의 진술도 듣지 않은 채 조학래 위원장 등 노조 임원 11명과 박지동·심재택 기자를 해고했다. 봉급생활자에게는 사형이나 다름없는 조치를 일방적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박지동 기자와 심재택 기자는 언론자유수호운동의 주역으로서 ‘덤터기’를 쓰고 회사에서 쫓겨났다.

노조가 조합원 13명으로 ‘부당해임대책위원회’를 구성하자 경영진은 그 가운데 6명을 해고하고 6명을 무기정직 시켰다. 노조는 서울민사지방법원에 해고효력가처분신청을 냈다. 그 신청에 대한 심리를 며칠 앞둔 4월 12일 김상만 사장은 ‘특별담화문’을 통해 “두 차례에 걸친 징계를 4월 13일자로 향후 모두 사면한다”고 발표했다.

동아일보사 노조는 서울시청으로부터 신고필증을 받지 못해 ‘법외노조’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지만, 끈끈한 동지애와 단결력을 과시하며 마침내 1974년 10월 24일 역사적인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주체로 나서게 된다. ‘10·24 선언’의 탄생 배경과 실천 과정, 동아일보사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광고 탄압과 민중의 격려광고, 폭력배들을 동원한 언론인 축출, 동아투위 결성과 활동에 관해서는 이 연재기획에 여러 선배·동료들이 상세히 기록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세상을 떠난 열여덟 분의 영정 앞에서

1975년 3월 18일 동아투위가 결성된 이래 현재까지 위원 113명 가운데 열여덟 분이 별세했다. 동아투위는 ‘자유언론실천선언’ 37주년 기념일인 2011년 10월 2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그때까지 돌아가신 분들의 영정을 모시고 추모행사를 열었다. 그 이후에 작고한 분들까지 포함한 명단과 이력은 아래와 같다.(가나다 순)

·강정문: 방송국 사회문화부 기자. 강직하면서도 다정다감했다. 해직 뒤 광고업계에 들어가 나중에 대홍기획 대표이사로서 숱한 업적을 남겼다.
·김덕렴:방송국 아나운서. 중요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 해직 뒤 자영업을 하면서 동아투위 위원인 맹경순 아나운서와 결혼.
·김두식:방송국 사회문화부 기자. 노조 창립의 주역. 투위 동료와 함께 복덕방을 운영. 나중에 한겨레신문사 사장.
·김성균:출판국 사진부 기자. 중후한 체구에 겸손한 인품으로 사랑받음. 해직 이후 여러 업종을 돌며 가족 부양에 힘쓰다 별세.
·김인한:투위의 최연장자. 교열부 차장으로 제작거부 농성에 참여했다가 해직당함. 회갑을 넘긴 나이로 1988년 봄 한겨레신문 창간을 위해 일하다 창간호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다.
·김진홍:편집국 사회부 기자.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진보적 연구업적을 많이 남김.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돌연사.
·배동순:동아방송을 대표하던 여성 프로듀서. 많은 후배들의 존경을 받음.
·심재택:편집국 사회부 기자. 4월 혁명의 주역이자 동아일보사 언론자유수호운동의 선도자. 온갖 생활고를 겪다 안정을 찾던 무렵 중병으로 작고.
·안병섭:편집국 문화부 기자. 소설가 안수길 선생의 장남으로서 과묵하면서도 다감한 품성으로 창의적인 기사를 많이 썼음.
안성열:편집국 기획부 차장대우. 노조 결성과 자유언론실천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함.
·안종필:편집국 편집부 차장대우. 동아투위 제2대 위원장. 1978년 10월 ‘민주·인권일지’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수감생활을 하던 중 얻은 병으로 별세. 동아투위는 1987년에 그를 기리는 ‘안종필자유언론상’을 제정하고 2012년까지 24회에 걸쳐 시상함.
·우승용:편집국 외신부 기자. 해박한 지식으로 선후배와 동료들의 모임에 활기를 불어넣던 재사.
·이병주:동아방송 프로듀서. 인기 절정이던 라디오드라마 <정계야화> 연출자. 해직 후 광고업계에 종사하다 한겨레 창간을 주도하고 상무이사로 일함.
·이의직:출판국 출판부장. 동아일보사의 ‘기구 축소’로 억울하게 해직당했다가 복귀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거부하고 동아투위에 동참.
·이인철:편집국 외신부 차장대우. 특히 중국문제에 정통한 국제전문가. 해직 뒤 한겨레 논설위원을 거쳐 신용협동조합 사업과 일본과의 문화 교류에 전념.
·조민기:방송국 프로듀서. 정의감과 재능이 넘치던 방송인. 해직당한 뒤 부인과 함께 옷가게를 하다가 1977년 34세에 콩팥 질환으로, 동아투위 위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유명을 달리하다.
·홍선주:심의위원. 기구 축소로 해임된 뒤 동아투위에 합류. 남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는 등 생활고에 시달림.
·홍종민:편집국 편집부 기자. 안종필 위원장과 함께 ‘민주·인권일지’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됨. 1980년 전두환 일파가 일으킨 5·17쿠데타 이튿날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대중 내란음모’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강요당하며 심한 고문을 겪은 뒤 풀려남. 그 후유증으로 생긴 심장질환으로 돌연사.


살아남은 동아투위 위원들의 뇌리에서는 먼저 떠난 열여덟 분의 영정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은 80세 가까이 된다고 하는데, 그분들은 모두가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안성열, 이병주, 이인철 세 분만 고희를 넘겼을 뿐, 다른 분들은 30대 초반부터 환갑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옥고, 고문 후유증, 생활고, 난치병이나 불치병, 정신적 스트레스 등이었다. 그분들의 죽음은 하나같이 박정희 유신독재와 동아일보사 경영진의 야합이 빚어낸 강제해직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박정희는 죽음을 당한 뒤에도 생시처럼 끊임없이 동아투위 사람들뿐 아니라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싸워온 이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그가 자행한 쿠데타와 비상조치라는 초헌법적 행위들을 단죄하고, 인권 유린과 언론자유 탄압을 원천적으로 뿌리 뽑지 않는 한 민주체제가 수립될 수도 없고 평화로운 민족공동체가 이루어질 수도 없다고 확신한 사람들은 한 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그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가 김재규에게 죽임을 당한 뒤에도, 그의 분신이자 실질적 후계자인 전두환과 노태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수구보수세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제외하고는 ‘박정희 왕국’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마침내는 나라 안팎에서 ‘독재자의 딸’이라는 비난을 받던 박근혜가 그 왕국을 세습하게 되었다. 그래서 5·16 쿠데타가 ‘혁명’으로 다시 둔갑하고 박정희의 온갖 악정과 폭정이 ‘불가피한 선택’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올는지도 모른다.

동아투위 사람들뿐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모든 이들은 오늘 이 시점에서 ‘언제까지 박정희와 함께 살아야 하나’라고 생각하며 절망과 좌절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게 믿는다. 역사는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꾸준히 달려가는 사람들의 우애와 협력과 투쟁을 통해 결국은 발전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