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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구 선생 회고록3권 ‘수학자의 삶’

안재구 선생 회고록3권 ‘수학자의 삶’1952년 대학입학과 4.19혁명의 격동기 기록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3권 ‘수학자의 삶’을 연재한다. 1권 ‘가짜 해방’, 2권 ‘찢어진 산하’에 이어진다. 1952년 대학 입학과 재학시절, 그리고 4.19혁명의 격동기에 대한 기록이다. 이 회고록을 통해 독자들은 친일잔재와 분단이 남긴 비극을 한 대학생의 고뇌를 통해 읽게 된다. 특히 군 복무 시기에 맞은 4.19혁명을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 게재된다.[편집자]

 

전쟁의 한가운데서 대학생이 되어

새 냇가 새 바위에 푸른 숲속에 피 끓는 젊은 넋이 자라는 전당

이상은 하늘같이 높기도 하고 정성은 바다처럼 가득도 하다

경북대학교는 우리의 자랑 경북대학교는 세계의 자랑

1952년 5월 28일.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부속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학생합창단의 목소리가 기념식장(지금의 경북대학교 본관 터)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로 경북대학교 개교의 노래다. 고운 물색의 겨레 옷을 입은 여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따라 곱고 어린 음색의 노래와 풍금소리가 늦은 봄날의 기념식장을 은은하게 채웠다. 또한 기념식장을 둘러싼, 학교의 교색으로 지정받았다는 자금(紫金)의 빛이라는 익은 감 빛깔의 천이 노랫소리에 따라 춤을 추듯 펄럭이고 있었다.

개교라는 정다움을 더욱 따뜻하게 감싸주는 자금의 장막은 이 땅의 허리를 잘라놓은 외세의 꼬드김으로 서로 죽일 내기에 정신이 빠져있는 세월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입학 축전의 이 순간에도 조국 반도의 허리를 남과 북으로 자른 전선에서는 이곳 봄날의 ‘자람의 잔치’와는 상극되는 ‘살육의 전쟁판’으로 밤낮이 없었다. 그러니 우리들에 대한 이 축복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석단의 중심에는 당시 문교부장관이었던 백낙훈(白樂薰) 박사와 대구의과대학(경북대 의대의 전신) 학장으로 초대 경북대 총장에 선임된 고병간(高秉幹) 박사가 그 권위를 상징하듯 박사학위 정복에 금빛수실이 찬란한 학위모를 쓰고 앉아 있었다. 또한 도지사와 대구시장을 비롯해 많은 하객들이 함께 그 지위에 따라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는 이 대학교의 첫 신입생으로서 주석단 앞의 넓은 공간에 내놓은 강의실 학생용 의자에 앉아 있었다. 참으로 감개가 무량했다. 두어 해 전, 어린 우리 청소년들까지 목숨을 담보하고 겨레의 분단을 반대하여 싸웠던 2.7투쟁과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투쟁의 세월. 오늘 축복의 자리에 선 내가 과연 그 세월의 내가 맞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기가 어려웠다. 무릉동 학습조의 동무들과 박철환 선생님의 안부는 어떤지, 손기용 선생님의 그 처참한 주검과 구정식 선생님의 생사는 또 어떤지……. 기억이 여기까지 이르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는 눈이 아픈 양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제는 모두 만날 수 없는 스승과 동무들이었다.

당시 경북대학교는 일제 때 관립학교로 설립된 대구사범학교, 대구의학전문학교, 대구농림전문학교가 8·15해방 이후 대구사범대학과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으로 승격된 뒤 이 세 대학을 합쳐 1951년 10월 경북대학교로 개편했다. 여기에 문리과대학과 법정대학을 신설해 1952년 모두 다섯 개의 단과대학으로 정식 개교한 것이다.

학교 이름에 거창하게 도명을 붙인 경북대학교는 1951년 가을부터 도민들한테서 설립기금을 모금해왔다. 이 기금은 농가마다, 월급쟁이는 월급봉투마다에서 떼 내어 모은 것이다. 도민들은 후대를 위한 교육이라는 취지에 군소리 한 마디 없이 기성회비라는 이름으로 돈을 모아나갔다. 이 돈으로 산격동 공동묘지 일대를 부지로 사들였다. 그 터전 위에 강의실과 도서관, 그리고 연구실을 세워 나갔다.

명색이 대학교라지만 그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미군 부대에서 쓰다 남은(나중에는 이것들조차 원조라며 모두 높은 값을 쳐서 갚아야 했다.) 허드레 각목과 판자, 아스팔트 루핑과 창문용 셀룰로오스 철망 등으로 후다닥 지은 판잣집이 교사(校舍)였다. 그렇게 강의실과 연구실을 대충 맞추어 나갔다.

하지만 개교 기념식이 열린 당시만 해도 공동묘지의 묘를 연고자들이 이장하고 난 직후라 험상궂은 교정 곳곳에는 황토가 벌겋게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운동장도 그냥 터만 대충 불도저로 밀어놓아 그 바닥에 잡석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굴러다니는 공터였을 뿐이다.

대학은 2월 20일경에 수강신청을 시작했고, 3월부터 강의도 시작됐다. 이때는 대구 시내 경북도청 옆 대구야간대학에서 낮 시간 동안 강의실을 빌려 수업을 했다. 그러다 개교 직후인 6월부터 비로소 산격동 교정으로 강의실이 옮겨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범대학 수학교육과에 입학한 나는 3월에 들어 강의시간표에 나온 시간에 맞춰 지정된 교실로 찾아들어갔다. 그런데 강의 시작을 기다려도 교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강의시간에 맞춰 교실을 찾아온 2학년 선배학생들이 한 10분쯤이나 앉아 있었을까,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때쯤 온 다른 학생들도 창문 너머로 강의실을 힐끗 들여다보고는 그냥 지나쳐 갔다. 나는 도대체 영문을 몰랐다. 나의 이 황당한 모습을 보고 있던 한 선배학생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신입생입니까?”

“예, 선배님. 오늘 강의는 안 합니까?”

“보아 하니 아마 휴강인 것 같소.”

하고 빙그레 웃는 것이었다.

“대학이 원래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 이 교수는 다다음 주쯤 되어야 강의를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는 먼저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텄다.

“나는 2학년인데 신진숙이라 합니다. 근데 어째 신입생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말씨에 김천 지방의 억양이 묻어 있었다.

“아닙니다. 신입생 맞습니다. 저는 안재구라고 부릅니다. 선배님, 인사드립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교사 경력을 가진 내게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참 냄새가 나지 않은 듯싶었다.

“이 강의를 하는 박 교수는 휴강하기로 유명합니다. 한 학기에 강의실에 세 번 오면 보통이고, 때로는 두 번만 강의하고 학기가 끝날 때도 있습니다.”

“아니 그러면 학점은 어떻게 줍니까?”

“학점이야 리포트라고 시험지 2, 3매를 적당히 써서 내면 됩니다. 물론 이 교수가 좀 심한 편이기는 하지만 대학 강의라는 게 다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나는 도무지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둘이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학생 몇 명이 강의실 문을 열고 고개를 드밀었다가 가곤 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신진숙 선배로부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착실히 받고 있었던 셈이다.

“선배님, 그런데 교수님이 강의는 잘 하시는가요?”

“나야 뭐가 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잔뜩 영어에다가 독일어에다가 흑판에 열심히 써나가는데 당최 구름 잡는 것만 같아서…….”

“수학에 무슨 영어고, 독일어는 뭐지요?”

“글쎄, 내가 압니까?”

“그러면 질문해서 뭣인지 설명해달라고 하시지요?”

“그러다가 잘못 보이면 학점도 못 따고 졸업도 못하려고?”

박 교수는 서울대학교에 다니다가 ‘국대안 반대투쟁’이 거세어지면서 학교를 중퇴하고 대구사범대학에 강사로 왔다고 한다. 전쟁 이전부터 국대안 반대투쟁의 여파로 실력 있는 교수들이 대거 북으로 가면서 남쪽에는 대학 교수가 절대 부족했다. 일본의 구제(舊制)고등학교(대학 예과에 해당)를 졸업한 실력쯤 되면 대학 교수로 환영을 받는 시대였다. 이런 정도의 학습능력을 갖춘 사람조차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던 것이다.

안재구 선생 약력

아버지 안의환(安義煥), 어머니 김태숙(金兌淑) 두 분의 장남으로 1933년 10월 24일 달성군 구지면 외갓집에서 출생. 고향 밀양에서 항일혁명가이신 할아버지 우정(于正) 안병희(安秉禧) 선생 슬하에서 성장

1940년 밀양제이심상소학교에 입학,

1946년 밀양중학교 입학

1947년 밀양중학교 1학년 때 노동절집회 참가사건으로 퇴학.

1949년 대구시 달성군 구지국민학교 교사

1952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과 입학

1956년 경북대 수학과 강사. 영남고등학교 교사, 1961년 2월까지 근무

1958년 경북대학교 대학원 수학과 석사과정 졸업

1956년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에서 강사,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역임.

1976년 ‘국가관 미확립’과 ‘학생운동’ 동정을 이유로 경북대 교수직 재임용 탈락

1976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 중앙위원, 교양선전선동부책, 통일전선부책

1977년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 교수로 임명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조직노출로 검거. 1심에서 사형. 세계수학자들의 항의와 진정으로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1988년 만 9년 2개월의 징역을 살고 가석방

1990년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를 출간함

1991년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와 수원캠퍼스에서 교양학부 강사.

1994년 구국전위 전위조직사건으로 재구속 무기징역 선고

1999년 형집행정지로 석방

[저서]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광야, 1989),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죽산, 1990), <수학문화사>(일월서각, 1990),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돌베개, 1996),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아름다운사람들, 2003), <끝나지 않은 길>(내일을 여는 책, 2013), 기타 수학에 관한 교양서적 다수

편집국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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