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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가 성주를 방패 삼으라 카는 주문 아이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8/21 11:26
  • 수정일
    2016/08/21 11:2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등록 :2016-08-20 09:51수정 :2016-08-20 11:18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성주 배치 발표(7월13일) 한 달 만에 ‘대체부지 공세’가 ‘사드 반대’로 뭉친 성주군민들을 때리고 있다. 한민구 장관의 성주 방문(17일) 전후로 국방부가 롯데스카이힐 성주컨트리클럽(초전면)을 급격히 띄우고 있다. 지켜야 할 국민으로부터 희생돼야 할 성주군민을 떼어낸 정치가 이젠 “군민이 합의하면 관내 다른 부지 검토”를 흘리며 성주군민과 성주군민을 쪼개려 한다. 확정 부지인 성산에 대체부지(염속산, 까치산, 칠봉산, 롯데스카이힐 골프장)로 거명된 장소까지 더하면 성주 내 사드 후보지만 5곳이다. 성주의 이름 있는 모든 산들이 사드 앞으로 끌려나오고 있다. 1967년 성산에 포대를 놓은 건 박정희 정권이었다. 그 포대에서 흘러내린 지뢰가 가난한 주민들의 삶을 끊었다. 사드 대체부지 논란은 박근혜 대통령이 성주를 상대로 한 ‘지뢰 돌리기’와도 같다. 성주군민들은 성산을 “잃어버린 땅”이라고 표현한다. 성주 역사의 시원이면서 눈물의 뿌리다. 성산으로부터 확장하고 있는 ‘사드의 길’을  토요판이 따라갔다. 정부가 필사적으로 놓고 있는 그 길 위에서 성주가 빼앗긴 것들과 빼앗길 것들이 선연하다. 만화가 최호철씨가 성산을 중심으로 ‘사드 사태’가 장악해버린 성주를 그렸다. 대체부지 후보 중 성산 서남쪽에 위치한 까치산과 칠봉산은 그림 구도 때문에 표시하지 못했다.  성주/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그림 최호철 homi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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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성주 배치 발표(7월13일) 한 달 만에 ‘대체부지 공세’가 ‘사드 반대’로 뭉친 성주군민들을 때리고 있다. 한민구 장관의 성주 방문(17일) 전후로 국방부가 롯데스카이힐 성주컨트리클럽(초전면)을 급격히 띄우고 있다. 지켜야 할 국민으로부터 희생돼야 할 성주군민을 떼어낸 정치가 이젠 “군민이 합의하면 관내 다른 부지 검토”를 흘리며 성주군민과 성주군민을 쪼개려 한다. 확정 부지인 성산에 대체부지(염속산, 까치산, 칠봉산, 롯데스카이힐 골프장)로 거명된 장소까지 더하면 성주 내 사드 후보지만 5곳이다. 성주의 이름 있는 모든 산들이 사드 앞으로 끌려나오고 있다. 1967년 성산에 포대를 놓은 건 박정희 정권이었다. 그 포대에서 흘러내린 지뢰가 가난한 주민들의 삶을 끊었다. 사드 대체부지 논란은 박근혜 대통령이 성주를 상대로 한 ‘지뢰 돌리기’와도 같다. 성주군민들은 성산을 “잃어버린 땅”이라고 표현한다. 성주 역사의 시원이면서 눈물의 뿌리다. 성산으로부터 확장하고 있는 ‘사드의 길’을 토요판이 따라갔다. 정부가 필사적으로 놓고 있는 그 길 위에서 성주가 빼앗긴 것들과 빼앗길 것들이 선연하다. 만화가 최호철씨가 성산을 중심으로 ‘사드 사태’가 장악해버린 성주를 그렸다. 대체부지 후보 중 성산 서남쪽에 위치한 까치산과 칠봉산은 그림 구도 때문에 표시하지 못했다. 성주/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그림 최호철 homix@naver.com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토요판] 성주 ‘사드 길’ 답사기

 

 

▶ 정부가 성주에 ‘사드 대체부지 카드’를 던지며 판을 바꾸고 있습니다. 사드 철회가 아닌 대체부지 검토는 ‘성주 내 새 희생양 찾기’로 귀결될 우려를 보입니다. 누군가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삶터와, 그 삶터에서 살아온 시간과, 그 삶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숫자와 지명과 지도에선 확인되지 않습니다. “애국과 안보를 말하기 앞서 와서, 보고, 들어보라”고 성주군민들은 호소합니다. ‘사드 후보지’에 가려진 땅의 역사와 그 땅 사람들의 눈물의 역사를 만났습니다.

 

 

“저거 쳐다보믄 우떻노?”

 

설칠덕(78)씨가 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

 

유임이 할머니(84)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설칠덕씨가 목소리를 돋웠다.

 

“마음이 우떻노 말이다.”

 

할머니는 소리가 아니라 소리가 나온 얼굴에서 소리의 뜻을 읽으며 되물었다.

 

“뭐시라?”

 

설칠덕씨가 손가락으로 산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사수골(경북 성주군 용암면 중거리) 계곡에 부딪힌 목소리가 개울을 건너 밭 언저리를 쩌렁하게 울렸다.

 

“저거 보믄 가슴 안 아프나?”

 

손가락 저편에서 성산 ‘만데이’(꼭대기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가 할머니의 참깨밭을 내려다봤다. 성산포대(공군8129부대·사드 배치 예정지)의 하얀 시설물이 바위와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거나 감추었다. 손가락을 따라간 눈길이 포대에 이르러서야 할머니는 소리의 끄트머리를 붙들 수 있었다. 그도 소리를 질렀다.

 

“한이 맺힌다.”

 

사수골 개울물은 소떼처럼 몰려가지 않고 콧물처럼 천천히 흘러 가뭄을 다독인다고 했다. 개울 옆의 우거진 감나무 가지를 헤치고 기어들어야 나오는 옴팍한 땅에서 할머니의 참깨밭이 호미를 받고 서걱거렸다. 허리 굽은 할머니가 쪼그려 앉으면 상·하반신이 종이처럼 접혔고 가슴과 무릎과 겨드랑이가 풀칠한 것처럼 한데서 붙었다. 할머니는 밭을 매다가, 성산을 쳐다보다가, 밭을 매다가, 띄엄띄엄 말했다.

 

유임이(84·성주군 용암면 중거리) 할머니가 성산에서 지뢰를 밟고 20여년간 고통을 받다 올해 1월 사망한 아들(52)의 영정을 꺼내 보이고 있다. 성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유임이(84·성주군 용암면 중거리) 할머니가 성산에서 지뢰를 밟고 20여년간 고통을 받다 올해 1월 사망한 아들(52)의 영정을 꺼내 보이고 있다. 성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뭐하러 산에 기어올라가서….” 1995년 아들 조경수(가명·52)는 성산포대가 매설한 발목지뢰를 밟았다. “내 아들 고생고생 말도 몬 한다….” 하루 동안 발견되지 못한 그는 산에서 밤새 혼자 피를 흘렸다. “그냥 다리를 안 끊어 버렸나….” 대학을 졸업하고 “머리가 좋아 시험에 다 붙었던”(어머니) 아들의 인생도 그날 이후 다리처럼 잘려나갔다.

 

피해 보상 대신 책임 무마가 있었다. “사고 직후 대대장이 병원으로 찾아와 치료비 하라며 아버지에게 30만원을 주고 갔을 뿐”이라고 형 조형수(가명)는 기억했다. “다리가 절단 났는데도 아무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그들은 살아왔다. 고무 의족에 얹은 조경수의 다리는 썩어들어갔고, 억울함이 쌓인 그의 마음은 부서졌다. “괴로우니까 집에서 난동도 부리고 병이 깊어져” 조경수는 20년을 정신병동에서 살았다.

 

늙은 어머니가 지난 10일 마루 선반에서 노끈으로 동여맨 아들을 내렸다. 겹겹으로 싼 달력 종이와 신문지를 벗겨내자 아들이 나왔다. 주민등록증 사진을 확대한 듯 아들의 영정 얼굴은 밀도 없이 흐리고 뿌옜다. “허파에까지 고름이 차서”(형) 그는 올해 1월 병원에서 사망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아들의 얼굴은 사진처럼 희미해져갈 것이나, 아들의 다리를 앗아간 포대는 매일 선명한 형상으로 어머니의 남은 생을 대면할 것이었다.

 

“간첩 잡는다던 지뢰가 동생을 잡았는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누굴 잡을지 어떻게 아나.” 형은 “울화”가 터졌다. 포대 자리에 사드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어머니는 몰랐다. 청력을 소진한 그는 소란스런 외부세계와 단절돼 살았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귀를 닫은 그가 평화로울지 홀로 격렬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무음의 세계에서 어머니는 일만 했다. 몸의 상반신을 유모차에 싣고 날마다 밭에 나가 호미질을 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새벽 첫차를 타고 장에 가서 깻잎, 도라지, 고추를 소쿠리에 쌓아두고 팔았다.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지 못했을 한 맺힌 평생”을 마을 사람들은 다 알았다.

 

 

95년 성주 성산서 지뢰 밟은 아들
정신병동에 20년 있다 올 1월 사망
공군은 피해 보상 대신 책임 무마
청력 잃은 어머니는 무음 속에서
날마다 밭일하며 괴로움과 싸워

 

 

사드 부지 성산에 지뢰 2229발 매설
파악된 인명 사고만 최소 3차례
50년 간격으로 같은 자리에
부녀 대통령이 심는 눈물의 뿌리
공군을 육군과 경찰이 지키는 상황

 

 

지뢰가 끊은 삶

 

“성산의 치마폭을 적시며 굽이굽이 낙동강 지류가 흘러 만든 비옥한 땅에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농사를 짓고”(8월15일 성주군민 ‘사드철회 평화촉구 결의문’) 살았다. 사람들은 성산을 중심으로 성주에 깃들었다. ‘별뫼’ 성산은 ‘별고을’ 성주에서 바다로부터 389m 높이로 솟아 있다. 성산은 성주에서 “성스러운 땅”으로 불렸다. 성산을 중심으로 성산가야(6가야 중 하나)는 태동하고 소멸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삶의 흔적들이 산 주위에 남아 성산의 “어머니산”(성주의 주산은 금산리의 연산)됨을 증언했다.

 

1967년 성산 300m~375.4m 지점에 육군 방공포대가 창설됐다. 1991년부턴 공군이 관할하는 호크 미사일부대(1방공포병여단 예하 8129부대)로 바뀌었다. 방공포대 창립 당시 부대 경계를 이유로 KM14A1 대인지뢰(1974년까지 미국에서 생산된 M14를 한국에서 면허 제조한 발목지뢰) 2229발을 산에 심었다. 금속탐지기에도 잡히지 않는 플라스틱 지뢰는 작고 가벼워 빗물에도 쉽게 유실됐다. 성산에서도 최소 세 차례(1982년, 1988년, 1995년)의 인명 사고가 발생했다. 2006년이 돼서야 수거작업이 이뤄졌으나, 91발은 행방이 불명한 채 성산에 뿌려져 있다.

 

용암면 사수골에서 905번 지방도로를 타고 성주읍으로 넘어가면 성산에서 이름을 얻은 성산리가 나온다. 성산을 싸고 오른쪽에 성산3리가 있다. 성산포대의 서쪽 아랫마을이다. 마을은 포대가 들어서기 전부터 존재해왔으며, ‘살망태’(행정명 부여 전 지명)는 포대가 없던 시절 성산 정상의 기억을 품고 있다. 성산포대 자리엔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다. 조선의 5개 봉수로 중 성주는 동래 다대포→경상도→충청도→경기도→성남 천림산으로 이어지는 경로에 속했다. 봉수대를 관리하는 봉군들이 산막을 친 마을이어서 ‘산막터’라 불리다 살망태가 됐다. 별티고개(살망태에서 선남면 장학리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 청동기 지석묘 근처에서 살망태 주민 고정학(가명·80)은 수대째 살아왔다.

 

그는 집 앞 성산을 올려다볼 때마다 경운기에 흥건하게 고인 아들의 붉은 피가 떠올랐다. 1982년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들은 착했다. 아버지는 가난해서 비닐하우스를 세울 파이프나 대나무를 사 쓰지 못했다. 아버지를 돕고 싶었던 열여섯살 아들은 성산에 올라 지지대로 쓸 나무를 했다. 성산 칠·팔부 능선에 설치된 포대 철조망 아래쪽이 빗물로 무너져 있었다. 나무를 자르며 발에 힘을 주는 순간 발뒤꿈치가 날아갔다. 폭발 소리를 듣고 산으로 올라간 형이 동생을 업고 내려와 경운기에 실었다. 장에 나가 있던 아버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땐 아들의 왼쪽 다리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큰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아들을 둘러업은 그의 앞을 포대 군인들이 막아섰다. “간첩일지 모르니 조사부터 해야 한다”며 총을 겨눴다. 의사는 무릎 15㎝ 아래로 아들의 다리를 잘랐다. “군수와 포대장, 농협조합장, 읍장이 병원으로 찾아와 봉투를 내밀”었다. 군수는 “포대장이 승진에 문제 되지 않도록 신고하지 말라”며 그의 약속을 받아 갔다.

 

“지금 벌어진 일이어도 신고 몬 해요.”

 

고정학은 고개를 숙였다. 변호사 살 돈이 없었던 그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의족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해 걸을 때마다 나자빠지는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내 팔자”를 탓하며 혼자 울었다.

 

공군 관계자는 “1982년 사고는 국방부에서 이미 보상을 완료했다”고 <한겨레>에 설명했다. 지난해 시행된 ‘지뢰피해자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피해자 본인이 신청하고 심사를 거쳐 지급받은 돈(사고 당시의 월급액·월실수입액 또는 평균임금으로 계산)이 ‘33년 만의’ 그 보상이었다. 아들 고철진(가명·53)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했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누구도 관심 갖지 않던” 그의 고통을 그 돈은 보상해주진 못했다. 1988년과 1995년의 지뢰 피해자들은 법 시행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마을 다니믄서 들은 소문으로 치믄 드러나지 않은 지뢰 피해자까지 수십 명은 될 거라고.”

 

설칠덕씨는 성주 전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며 집집의 사정을 꿰었다. 공군 쪽은 “피해자들이 증언하는 사고 무마 정황은 공식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다”고만 했다. 평생 가난을 숙명처럼 알고 권력과 권위에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을 국가는 그렇게 대해왔다. ‘지뢰 경고’ 표지판이 산 밑에서부터 능선을 타고 바늘처럼 꽂혀 성산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들의 다리를 앗아간 산을 떠나지 못했던 아버지는 사드가 들어오는 그 산 밑도 떠나지 못한 채 살망태에서 살아갈 것이었다.

 

사드 배치 발표 이후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산포대(공군 8129부대) 앞은 경찰과 육군이 지키고 있다. 초소 뒤로 지뢰 경고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성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사드 배치 발표 이후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산포대(공군 8129부대) 앞은 경찰과 육군이 지키고 있다. 초소 뒤로 지뢰 경고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성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성산은 ‘잃어버린 땅’

 

산은 진입로에서부터 막혔다. 성산포대로 오르는 길을 경찰이 경비했다. 사드 배치 발표 이후 포대에 닿는 길까지 겹겹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검문했다. 부산지방경찰청이 기동대 3개 중대를, 경남청과 울산청이 1개 중대씩을 보내 돌아가며 지켰다. 30명이 근무를 서고 60명이 대기했다.

 

“우리가 왜 군인을 지키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공군 8129부대 앞에서 한 경찰은 말했다. 바리케이드를 모두 통과하면 도착하는 포대 앞 초소는 지역에 주둔한 육군이 올라와 경계했다. 미군의 사드가 배치될 공군 포대를 한국 경찰과 육군이 지키는 기묘한 풍경이 ‘지뢰 경고’와 뒤엉키며 성산의 과거 50년을 소환해 현재에 포갰다. 50년 간격으로 같은 자리에 ‘눈물의 뿌리’를 심으면서도 부녀 대통령은 한결같이 성주군민의 뜻을 묻지 않았다.

 

성산을 새긴 군민들의 기억도 바리케이드에 막혔다. 그들의 기억은 수십 년 전에 멈춰 있었다. “1960년대 초등학교 소풍으로 산을 올랐을 때 가야 고분이 도굴된 채 열려 있었다”고 도일회 성주문화원장은 떠올렸다.

 

성산포대 부지엔 봉수대 말고도 성산가야의 산성이 있었다. 2008년 9월 문화재청이 공군 8129부대 안의 문화재를 조사했다. 성벽으로 추정되는 흔적과 표지석만 확인했을 뿐 산성은 이미 훼손된 상태(‘2008 군부대 문화재 조사보고서’)였다. 1963년 1월 사적 제91호로 지정된 성산산성은 3년 만인 1966년 12월 지정 해제됐다. 방공포대의 연결도로로 사용되면서 중요문화재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이유였다. “위치가 성산의 정상부이거나 부대의 북서편 모서리일 가능성이 높다”던 봉수대도 “정상부는 완전히 삭평되고 북서편 모서리는 참호 조성과 경계 철책, 본부 건물이 조성되면서 지형이 대부분 훼손됐다”고 보고서는 기록했다. 수천 년의 역사가 군부대 철조망에 갇혀 증발했다. 회수되지 않은 지뢰는 제거되지 않는 공포인 동시에 ‘잃어버린 땅’의 표시엿다. 성주군에서 발행하는 문화재 안내 자료에서도 산성과 봉수대는 사라졌다. 사드가 터지기 전까지 성주군민들에게 성산은 “서명운동을 해서라도 반환받아야 할 땅”(도일회)이었다.

 

사드 배치 예정지인 성산포대(성주군 성주읍 성산리)에서 1㎞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밀집 분포하는 성산가야 고분군. 성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사드 배치 예정지인 성산포대(성주군 성주읍 성산리)에서 1㎞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밀집 분포하는 성산가야 고분군. 성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여기가 죄다 집 있던 자리 아입니까.”

 

성산4리 배상권(54) 이장이 고분군을 가리켰다. 3리를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성산4리를 만난다. 성산의 동쪽 아래에 있으며, 성산포대와 가장 가까운 동네다. 임진왜란 때 왜장 구로다의 군사 2600여명을 섬멸한 장소여서 ‘승왜리’라고도 했다. 가야는 고분과 산성을 짝으로 묶어 배치했다. 성산 위의 산성과 아래의 고분군은 가야 양식의 특징을 대표했다.

 

새알 절반이 땅에 묻힌 듯한 고분들이 성산 허리에서 밀집(사적 제86호·지정면적 72만6261㎡)했다. 무너진 집터가 고분들과 섞여 성산4리를 이뤘다. 본래 산이 있었고 고분은 산의 형상에 맞춰 자신을 앉혔다. 산 밑에서부터 생겨난 고분(321기가 산재해 있으나 장학리·명포리 등에 분포한 것을 합치면 500여기 추정)은 숲 사이를 파고들며 한 기씩 늘어나 산 위까지 기어올랐다. 목숨이 다한 성산가야의 수장들이 고분을 만들고 들어가 누웠다.

 

어린 시절 배상권은 고분에 올라가 미끄럼을 탔다. 어른들은 고분에 고추를 널어 태양초를 말렸다. 집 옆에 고분이 있었고 고분 사이에 집이 있었다. 청년이 된 배상권은 1986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이 대형 고분 5기를 발굴할 때 현장감독으로 작업을 지켜봤다. 산과 고분과 사람은 서로 지배하지 않고 섞여야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을 건너며 익혀왔다. 고분 정비사업(예산 194억원 들여 전시관 건립, 탐방로 조성 등)으로 고분과 섞여 있던 집들이 이주하고 고분과 떨어져 있던 집들(38가구)은 남았다. 군사기지는 본래 있던 것들을 목적에 따라 뒤바꿨다. 성산고분군은 포대로부터 직선거리 1㎞ 안에 있었다. 성산에 사드가 배치되면 고분군도 ‘잃어버린 땅’에 속할 것이라고 군민들은 근심했다.

 

 

사드 성주 배치 발표 한 달 만에
성주군민 때리는 ‘대체부지 공세’
박근혜 대통령 발언으로 본격화
한민구 국방장관 성주 방문 직후
롯데골프장 띄우며 거센 여론몰이

 

 

대체부지 저울질은 ‘지뢰 돌리기’
‘성산 외엔 안 된다’던 국방부는
‘성주면 된다’는 태도로 급선회
지역 주민 건의 형식 요구하며
어디선가 지뢰 밟아주길 기다려

 

 

성주군농업기술센터(성주군 성주읍 대흥리) 저급과수매장 퇴비사에 사드 배치 발표 이후 팔리지 않는 성주 참외들이 버려지고 있다. 성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성주군농업기술센터(성주군 성주읍 대흥리) 저급과수매장 퇴비사에 사드 배치 발표 이후 팔리지 않는 성주 참외들이 버려지고 있다. 성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벌써부터 ‘사드 참외’라 안 카요”

 

성산3리 들머리엔 밀어버린 참외밭이 있다. 사드의 성산 배치에 항의하며 성산리 농민들이 갈아엎었다. 성산리(1~4리 합쳐 500여가구) 주민 90% 이상이 참외 농사를 지었다.

 

“사드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사드 참외’라 안 카요.”

 

배상권은 격분했다. 참외 값이 폭락해 그는 “미칠 노릇”이었다. 성주 참외(전국 참외 생산량의 75%)의 시세가 평소 가격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지난해 추수한 쌀을 대구에 팔러 간 한 농민은 “사드 쌀 안 산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달아오른 마음을 뱉었다. “전자파는 고사하고 농사 망해 죽게 생겼다”고 배상권은 토로했다. 현실화되지 않은 사드가 이미 성주군민의 생계를 조이고 있었다. 8월초 참외 농가 대부분이 “넝쿨을 뽑고 밭을 놓아” 버렸다. ‘성주에 성주 참외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참외 수확을 해봐야 인건비만큼 손해보는 상황”이라고 여성 농민 백선화(56)는 말했다. “참외를 버리려고 트럭들이 (성주군농업기술센터 안 저급과수매장 앞) 도로에서 2시간 동안 줄지어 기다렸다”고 전했다. 지난 10일 수매장에 딸린 퇴비사에선 지게차가 쏟아부은 참외를 포클레인이 뒤섞고 있었다. “사드 저 카고 나서 참외 값이 떨어져 버리는 물량이 작년보다 15~20%(1천여톤) 늘었다”고 수매장 직원은 말했다.

 

성산포대로부터 1.5㎞ 지점에 성주군청이 있다. 매일 밤 1500여명의 군민이 군청에 모여 ‘한반도 사드 배치 철회를 위한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 문화제 때마다 그들은 서울 광화문을 떠나지 못하는 세월호 유족들과, 해군기지에 평화로운 바다를 빼앗긴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과, 경찰의 직사 물대포를 맞고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백남기 농민을 기억하며 묵념한다. 국민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비통을 성주군민들은 날마다 체득하고 있었다.

 

한민구 국방장관이 17일 오후 경북 성주군청에서 사드배치 철회 투쟁위원회와 간담회를 마친 뒤 총리실 경호원들과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건물을 나서고 있다. 성주/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한민구 국방장관이 17일 오후 경북 성주군청에서 사드배치 철회 투쟁위원회와 간담회를 마친 뒤 총리실 경호원들과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건물을 나서고 있다. 성주/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한민구 국방장관이 지난 17일 군청을 찾아 투쟁위원회와 면담했다. 면담 뒤 국방부는 보도자료를 내어 “최근 언론에서 제기하고 있는 제3후보지와 관련해 ‘국방부가 조속히 대안을 마련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 장관이 ‘지역 의견으로 말씀을 주시면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도 했다.

 

“언론이 제기하는 장소”로 국방부가 지목한 제3후보지는 롯데스카이힐 성주컨트리클럽(초전면)이다. 언론 보도는 국방부가 롯데골프장을 방문(8월9~11일)해 대체부지 가능성을 검토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나왔다. 장관의 성주 방문 전날 문상균 국방부 대변인은 ‘롯데골프장 검토에 성주군민들의 요청이 있었는지’ 묻는 질문에 “없었다”고 답했다. 대체부지 논란 속으로 롯데골프장을 끌어들인 국방부가 언론과 ‘지역 의견’ 뒤에 숨어 몸을 감추고 있다.

 

사드 배치 발표(7월13일) 뒤 거센 반발에 부딪힌 정부가 ‘대체부지’란 예리한 칼날을 세워 성주를 찌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체부지 검토 가능” 언급(8월4일 대구경북 새누리당 의원 면담) 이후 본격화됐다. 국방장관의 성주 방문 이틀 전(8월15일) 국방부가 롯데골프장을 찾은 사실이 보도되고, 하루 전엔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나라의 안위”를 앞세워 제3후보지 검토를 공식 제안(8월16일 호소문)했다. 그의 호소문을 받아 성주 지역 안보단체 등이 ‘관내 이전’을 요구하고, 면담 직후 국방부는 대체부지 검토 요청이 있었음을 부각했다. 장관이 성주를 다녀간 뒤부터 국방부는 롯데골프장을 급격히 띄우고 있다. 방문 하루 만에 “성주 내에서라면 (성산이 아니어도) 사드 효용성은 큰 차이가 없다”(대변인)는 발언까지 나왔다. 성주군민들은 ‘한반도 사드 반대’를 이미 공표했으나 국방부는 ‘대체부지 이전 요청’을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다. “국방부의 태도는 ‘성주가 성주를 방패 삼으라’는 주문”이라고 한 투쟁위원은 해석했다.

 

성주읍에서 905번 지방도로를 따라간 뒤 초전면(7월 기준 2365가구 4992명) 면사무소를 지나 913번 도로로 갈아타면 롯데골프장(680m) 주변에 이른다. 골프장이 있는 소성리는 성주군의 최북단이다. 김천시와 경계 지역으로 달마산이 감싼다. 골프장은 소야(달마산 밑 두 마을 중 아랫마을)로부터 1㎞ 떨어진 진밭마을에 18홀로 조성돼 있다. 성주군청에서 북서쪽으로 직선거리 18㎞ 떨어져 있고, 산봉우리를 새로 깎지 않아도 되며, 기반시설이 갖춰져 있다는 ‘장점’이 거론된다. 롯데가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부지 매입 과정에서 정부 협상력을 높일 것이란 전망도 있다.

 

 

“우리를 와 이리 무시하노”

 

소성리엔 원불교 성지가 있다. 2대 종법사인 정산종사가 탄생(1900년 8월28일)한 생가와 성장·구도한 장소가 보존돼 있다. 원불교 대각전과 원불당이 직선으로 1.9㎞ 거리에서 롯데골프장과 인접한다.

 

“평화의 성자가 나신 곳에 전쟁 무기가 와서 긴장을 유발해선 안 됩니다.”

 

성주성지 관계자는 “사드가 배치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원불교는 성주군청에 ‘사드 반대’ 천막을 치고 촛불문화제에 결합할 뜻을 전했다. 골프장과 가까운 김천 시민들(김천혁신도시와 7㎞ 거리)도 반대운동에 나섰다. 김천시와 시의회가 롯데골프장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공동성명(18일)을 냈고, 전날 농소면사무소에선 긴급 간담회가 열렸다.

 

조선시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성주 성산. 대동여지도
조선시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성주 성산. 대동여지도
성산에서 뻗기 시작한 ‘사드의 길’은 염속산(금수면·700m)과 까치산(571m)과 칠봉산(용암면·517m)을 거쳐 롯데골프장까지 닿았다. 성산까지 합하면 5군데의 산과 고지가 사드 예정지·후보지로 호명됐다. 성주의 이름 있는 모든 산들이 사드 앞으로 차출당하고 있다.

 

까치산은 수륜면에서 불려나왔다. 성주읍에서 33번 지방도로를 따라 서남쪽으로 내려가다 대가면사무소에서 913번 도로로 좌회전한다. 서남행을 계속하다 33번 국도와 다시 만나는 곳에 성주에서 가장 큰 수륜면(87.92㎢)이 있다. 까치산은 크고 작다. 수륜리의 토실마을 동북쪽엔 큰까치산이, 모방골마을 서쪽엔 작은까치산(449m)이 있다. 김정례(81) 할머니는 21살에 임천마을로 시집와 까치산을 바라보며 60년을 살았다. 까치산이 사드 대체부지로 거론됐다는 소식에 할머니는 화가 났다.

 

“우리는 사람도 아이가. 거기(성주읍)에서 반대하믄 아예 안 해야지 왜 (사드를) 우리한테 보내노. 아무리 골짜기에 산다 그래도 우리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여기 사람이 적다고 그러나, 땅 꼬랑뎅이 긁어 묵고 산다고 그러나. 우리를 와 그리 무시하노.”

 

정부의 사드 대체부지 저울질은 ‘지뢰 돌리기’에 가깝다. 50년 전 성산에 매설돼 누군가의 삶을 잘라낸 지뢰는 50년 뒤 사드로 되돌아왔다. 어디 있는지 몰라 무서운 발목지뢰가 아니라, 어디 있는지 알아서 공포스러운 최첨단 무기다. ‘성산 외엔 안 된다’던 국방부는 ‘성주이기만 하면 된다’는 태도로 급선회했다. 성주에 사드를 던진 정부는 ‘당신들의 의견을 모아 달라’며 어디선가 지뢰를 밟아주길 기다리고 있다.

 

“우리 4만5천명 성주군민이 바로 대통령께서 지켜내어야 할 국가입니다. 성주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해서 지켜야 할 국가 안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 15일 908명이 성밖숲(성주읍 경산리)에 모여 집단 삭발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사드를 받으라는 대통령 앞으로 성주군민들이 글을 써서 읽었다. 참외를 제외하면 성주는 정치의 뇌리에도 없던 고장이었다. 남한 전체 면적(9만9720.00㎢) 0.61%의 땅(616.14㎢)에 남한 전체 인구(7월 기준 주민등록통계 5163만4618명) 0.08%의 사람들(4만5233명)이 산다. 이 작은 공간과 이 적은 사람들을 위험에 몰아넣어 99.39%의 땅과 99.92% 인구의 안전을 얻는 것이 애국이라고 대통령은 말한다.

 

“우리도 국민”이란 성주군민들의 간절한 호소를 정부와 사드 찬성론자들이 지역이기주의로 몰고 있다. 보호받아야 할 국민과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돼야 할 국민을 나누는 ‘잔인한 정치’가 성주를 몰아치고 있다.

 

성주/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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