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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들이여 단결하라!


김남수 박사의 사회경제론

이 시대 경제학은 1%를 옹호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옹호가 사실 경제학의 보수성을 상징하고 있다. 필자는 경제학에 붙어 있는 보수적 학문이란 오명을 벗어던지고자 한다.

우리는 진보의 생명이 항상 근로대중과 함께하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특수성과 연관되어서는 전쟁 반대와 평화체계 구축에 그 의의가 있다. 한국전쟁의 기억은 전쟁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 땅의 근로대중이 쌓아온 노동력 산물을 지켜야 할 우리 사회 진보의 과제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현재 미국화되어 나타나는 경제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미국 경제학이 어떻게 보수화되어갔는지 역사적 이해를 통해 미국 경제학이 우리나라에 천착되어가는 과정과 식민화의 역사를 고찰하고, 현시대 전 세계에 횡행하는 보수주의 흐름에 반대하고자 한다.[필자서문]

새해 첫 주, 누구나 희망과 설렘으로 맞이하는 기간이다. 미국 곳곳의 연구중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인 젊은 경제학도들의 몸과 마음도 바빠진다. 회원 수 2만에 이르는 전미경제학회(AEA) 연례학술대회 기간을 이용해 자신을 소개하고 취업을 결정하는 ‘잡 마켓’이 열리기 때문이다.

올해도 전미경제학회의 1만3000 회원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연례학술대회에 참석했다. 그렇지만 그들 가운데 올해가 전미경제학회 창립 131주년이 되는 해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전미경제학회의 1885년 선언에 대해 아는 사람 역시 거의 없다시피하다. 이 학회는 경제연구의 진작과 ‘경제학 토론에서 완전한 자유’ 구현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미경제학회 홈페이지 캡쳐

“우리는 국가를 인류 진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교육적이고도 윤리적인 기관이라 여긴다. 노동생활에서 개인적인 주도성이 필요하다고 여기지만 자유방임이라는 원칙은 정치적으로 불충분하고, 도덕적으로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유방임 원칙으로는 국가와 시민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부적절한 설명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 세대의 정치경제를 통해 이뤄진 최종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다.… 노동과 자본간 갈등이 수많은 사회문제를 가져오고 거기에 대한 해법은 교회, 국가, 그리고 학계의 통일된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고상하지만 그 얇은 금박 밑으로 도덕의 실종, 배금주의, 부정부패와 같은 추한 모습을 감추고 있던 19세기 후반 미국을 상징하는 ‘도금시대’의 경제학 통설에 반대한다는 선언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정치경제’에 대한 기존 주장자들은 전미경제학회를 비난하였다. 과연 윤리적 기관으로서 국가가 지원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인가? 노동과 자본 간의 갈등은? 나중에 자유방임주의에 대해 “정치적으로 불충분하고 도덕적으로도 부적절하다”고 한 표현은 최종 문구에서 빠졌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새로 출범하는 학회가 과학적 연구발전을 넘어서는 다른 동기를 가져야하기 때문에 이 학회의 임무를 단순하게 하기 위해 문구를 뺀 것이다. 그렇지만 전미경제학회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로 이해될 수 있다.

전미경제학회는 학계나 공공영역 모두에 대해 과학적으로 연구하면서 개혁을 위한 주장을 하는 단체로 설립되었다. 전미경제학회가 출범하면서부터 이런 두 가지 임무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기존 경제학은 추상을 통한 이론모형에서 도출된, 부를 분배하는 불변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전미경제학회 설립자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경제적 사실을 연구하는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소득, 부, 노동, 임금, 경기침체, 무역 등을 다루면서 사실의 추상화보다는 현실에 적절한 정책으로 결론을 도출하려고 했다. 이런 그들의 결론은 종종 이른바 ‘계급입법’을 반대하는 정치적 집단과 충돌하였다.

전미경제학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터키 출신의 리차드 엘리(Richard Theodroe Ely)로 그는 31살 나이에 이미 존스홉킨스대학의 교수였다. 엘리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종교운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적 교훈과 그 사회생활에의 적용을 강조했던 ‘사회복음’ 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전문 학계를 근대화하는 것에도 야심이 있었다. 그는 이런 전통적 가치와 근대적 가치의 연결을 통해 일반대중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경제학을 고용주를 옹호하는 학문이 아닌 일반대중의 친구로 자리매김하려했다.

▲ 출처 : 전미경제학회 홈페이지

당시 정치경제라고 불리던 기본전제와 점점 더 계층화되는 미국사회의 민중 투쟁에 이를 적용하려는 엘리의 ‘두 가지 혁명’은 당시 말쑥하게 차려입은 경제학 전문직과 불화를 가져왔고 복잡한 동맹관계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개인 재산을 기부 받거나 연방법에 따른 기부를 받던 환경에서 더 복잡해지게 된다.

결국 엘리와 그의 동료들은 도금시대의 견고한 사회적 틀에 대한 개혁을 포기하고 경제학 교수 지위를 받아들이면서 경제적 행태에 관한 연구에서 과거의 심리적이고 불변적인 틀을 벗어나 제도적이고 역사적인 접근법을 택하게 된다. 그들의 이런 태도는 전미경제학회가 결국 특정계급 지지의 입장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학자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그들의 반대에도 경험적인 성공이 아닌 당시 권력자에게 순종한 결과로 자유방임주의는 살아남았다.

사실 ‘자유시장’이라는 통설이 가져다준 특권과 존중으로 인해 오늘날 민주주의의 심장을 갉아먹는 경제 불평등이 존재하게 되었고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갖게 하였다. 노동자 편에 서고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 도덕적인 학자라고 본 엘리의 경제학적 견해와 신념의 퇴보는 전문 경제학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더 넓은 관점에서 볼 때 대학교육에서 현상에 대해 도전하지 않는 중립적인 학자들은 왜 침묵하는가?

이 학회가 창립되던 해부터 미국사회는 양극화시기에 직면하게 된다. 1885년과 1886년 사이에 두 개의 경쟁적인 전국노동조직이 존재하였는데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와 전미노동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으로 수십만의 회원을 가진 조직들이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 자유진입 정책을 옹호하는 기사단은 다소 느슨하게 정의된 ‘생산자’를 연합하는 협동경제를 선호한 반면에 전미노동연맹은 백인 숙련노동자 조합이 새로운 산업질서가 만든 ‘파이’의 큰 부분을 가져야 한다는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조합주의’를 추구하였다. 두 조직 모두 현 상황을 지키려고 하였다.

1886년 5월3일 ‘헤이마켓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틀 전인 5월1일 8시간 노동제 도입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5월3일 시카고의 헤이마켓 시위에서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하면서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다음날 이에 항의하는 집회가 벌어졌는데 누군가 던진 폭탄으로 7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쳤다. 이에 분노한 경찰이 단순 구경꾼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여 2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또 경찰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을 벌여 수백 명을 구금하고 증거 없이 급진적인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을 언도한다. 이 사건이 ‘메이데이(노동절)’의 기원이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헤이마켓 사건을 그린 삽화[출처 : 위키백과]

8명의 아나키스트들 가운데 4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유죄임을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 헤이마켓 사건은 미국을 적색공포로 몰아넣게 된다. 전미경제학회 창립시 가장 두려웠던 것은 폭탄 투하를 통해 나타난 계급전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헤이마켓 사건 3개월 뒤 엘리는 <미국노동운동(The Labor Movement in Amercia)>을 발간하였다.

그 책에서 엘리는 노동시장에서 적절하고 인간적인 면을 보장하기 위한 노동조합이 없다면 경제성장의 성과는 오직 부자들에게만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당시 노동조직인 기사단이나 전미노동연맹 어디에서 속하지 않았지만 그의 견해의 많은 부분은 전미노동연맹과 꽤 유사하였다. 그는 ‘자유로운 노동’과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적 이동성을 갖는다는 것이 모호한 표현이라고 보았다. 그보다는 고용주가 극단적으로 비타협적 태도를 견지할 때 협동하는 운동과 단체협상을 통해 노동자다운 노동자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파업이나 보이콧과 같은 노동쟁의행위가 노동조합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미국노동운동>이란 책은 엘리의 견해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엘리트 보존보다는 노동자동맹을 사회과학적 차원에서 대중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의 동료 연구자들 중 몇 사람은 엘리를 옹호하였지만 그것은 엘리의 입장이 명백히 기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데이터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소 논쟁은 있었지만 이 책은 엄청난 통찰력을 제공하였다.

이런 역사는 1960년대 다시 반복된다. 미국의 대학사회에 반전(反戰)운동과 빈곤퇴치운동이 발생하면서 학내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대학 교수들에 대한 평가가 진행된다. 이렇듯이 미국사회는 도금시대 민간자본에 의한 감시와 1960년대 매카시즘으로 대표되는 감시를 받았다.

우리 사회도 다르지 않다. 1980년대 해직교수들이 국가권력의 감시를 받았듯이 오늘 대학 구성원은 대학 구조조정이라는 일상적인 감시를 받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객관성’을 과학적 접근으로 포장하려는 경제학자들의 노력이 한편으론 가련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이제는 떨쳐버려야 한다. 사회가 좀 더 나은 사회로 변화되기 위해 ‘전 세계 경제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치고 싶다.

그러나 필자 또한 이 학문에 몸담고 있기에 비판은 쉽지만 구체적인 대안 마련을 위해 우리 모두 성찰하고 반성하며 경제학의 부활을 꿈꿔본다.

킨의 표현대로 이제는 사회과학의 벌거벗은 임금님 신분을 벗어던지자.

 

* 김남수 박사는 고려대에서 논문 ‘홀드업문제에 대한 일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고려대 경제학과 강사로 있다. 번역서로 <만화로 읽는 경제학의 모든 것>이 있다.

김남수 박사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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