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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데까지 가는 권력, 오를 데까지 오르는 분노

갈 데까지 가는 권력, 오를 데까지 오르는 분노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씨의 연설문 수정과 관련해 대국민사과를 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씨의 연설문 수정과 관련해 대국민사과를 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정부가 사실상 ‘식물 상태’로 접어들었다. ‘최순실 게이트’ 관련 메가톤급 의혹이 하나둘씩 사실로 드러나면서 1년4개월 잔여 임기조차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곳곳에서 대통령의 ‘하야’ ‘탄핵’ 같은 단어가 쏟아져나오는 상황이다.
 

10월 26일 야당은 JTBC의 저녁 뉴스 보도에 잔뜩 기대를 걸었다. 이미 국회에는 특정 사건 관련 보도가 있을 것이라는 카톡 지라시가 나돌았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은 향후 정국에 대한 질문에 “저녁에 메가톤급 기사가 나온다고 하는데, 월요일(10월 24일) 최순실 연설문 보도처럼 새로운 국면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의원은 “이걸 지켜봐야 정국의 향방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측 한 관계자는 “월요일 보도와 같은 내용이 한 건만 더 나오면 사실상 박근혜 정부는 끝이 난다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최순실 게이트로 하루아침에 정권의 운명조차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종편채널의 보도에 온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 보도에 박근혜 정부의 명운이 걸렸다고 여길 만큼 하루살이 인생으로 추락한 것이다.

이날 JTBC에서는 월요일만큼의 메가톤급 보도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지난 9월 말 촉발된 최순실 게이트 보도는 지금까지 한 달 넘게 봇물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다. 그동안 각 언론사에서 진행해오던 의혹 확인작업들이 단독·특종 경쟁을 통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형국이다.

때문에 앞으로 또 어떤 메가톤급 보도가 나와 박근혜 정부의 운명을 결정지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박근혜 정부를 엄습하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하지만 헌정 중단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헌정 중단을 우려해야 할 만큼 박근혜 정부는 큰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도덕성과 권위, 정당성을 모두 잃어 버렸다. 문제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사실상의 파산 선고가 이미 내려졌지만 정작 박근혜 정부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각 총사퇴, 청와대 비서진 총사퇴, 중립내각 구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청와대는 피상적인 사과와 진정성 없는 해명으로 국면만 피해나갈 뿐이다. 문제 인사에 대한 즉각 사퇴도 이뤄지지 않았고, 참신한 인사로 국면을 새롭게 전환하려는 시도도 곧바로 하지 않았다.

 

이 사이 국민들의 분노는 높아졌다. 대학가에서는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드러난 국정농단 사실만으로도 하야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SNS에서는 하야와 탄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촛불집회도 열리고 있다. 정의당은 10월 27일부터 박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국민행동을 시작했다. 여당의 비박 쪽 한 관계자는 “세간에는 이미 탄핵이나 하야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는 어떤 상황이 와도 헌정 중단이라는 카드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관계자는 “야당은 이런 국면을 오히려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사과를 한 뒤 돌아서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사과를 한 뒤 돌아서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지지율 곤두박질, 대통령 직무 부정률 78%

여권에서는 2006년의 재판(再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집권 4년차 3분기에 16%까지 지지율이 떨어졌다. 4분기에는 12%까지 추락했다. 대선을 앞두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큰 위기를 맞았다. 여당은 2006년 5월의 지방선거에서 참패했고, 7월과 10월의 재·보선에서도 패배했다. 당내에서는 청와대를 옹호하는 친노 측과 청와대를 비판하는 반노 측이 갈등했다. 결국 2007년 초 의원들이 하나둘 탈당해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이라는 교섭단체를 꾸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과 갈등 끝에 탈당했다. 2007년 탈당파와 열린우리당 잔류파, 손학규계 등이 모여 ‘대통합민주신당’이 만들어졌다. 이 해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무려 500만표 차이로 패배했다.

여당의 한 관계자는 “지금대로라면 새누리당이 열린우리당의 길을 가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여당 내 청와대 충성파의 건재-당내 내분-재·보선 패배-대통령 탈당-일부 의원 탈당-분당-대선 패배 등의 행로가 2006년과 비슷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당 내부에서는 친박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친박 일색으로 꾸린 새누리당 지도부는 특별검사 도입을 맨처음에는 거부했다. 이정현 대표는 10월 25일 최순실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을 미리 받아봤다는 사실에 대해 “나도 연설문을 작성하기 전에 친구 등 지인에게 물어보고 쓴다”고 답변해 화제가 됐다. 이 같은 답변은 결국 당내에서도 지도부가 사퇴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발을 가져왔다. 10월 26일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은 청와대를 비판하면서 특검 수용을 압박했다. 이런 과정에서도 일부 친박 의원에게는 청와대 엄호 발언을 해달라는 요청이 위에서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몇몇 친박 의원이 청와대의 입장에 서서 발언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일부 친박 의원은 비박 중진 의원들에게 각별한 인사를 나눔으로써 기자들의 입방아에 오려내렸고, 일부 친박 의원은 곤란한 입장 때문인지 다른 일정을 내세워 의총에 불참했다. 어떤 친박 의원은 비박 차기 대권주자에게 서서히 발길을 돌리려 한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갈 데까지 가는 권력, 오를 데까지 오르는 분노

잇따르는 대통령 하야 요구 시국선언

일부 친박의 이탈 조짐에도 불구하고 친박은 여전히 정국 운영권의 키를 쥐고 놓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친박 일색의 지도부는 비박의 지도부 사퇴론을 애써 무시했다. 친박을 중심으로 당에서는 이번 사태의 원인을 대통령제의 문제점으로 돌려, 개헌이 필요한 적기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10월 24일 발표한 개헌 추진의 블랙홀을 최순실 게이트 블랙홀이 삼켜버린 상황에서 개헌의 불씨를 살려나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가운데 차기 대권주자인 김무성·유승민 의원과 남경필 경기도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을 중심으로 박근혜 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정병국·나경원·김용태·김성태·하태경 의원 등 비박 의원들은 청와대와 당 지도부에 각을 세우고 있다. 여당의 한 관계자는 “지금 대통령과 청와대·정부·여당은 국민에 대해서 권위를 잃어버렸다”면서 “권위를 가진 정치지도자가 나타나 이 국면을 수습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야당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 ‘탄핵’의 ‘탄’자도 꺼내지 않는 상태다. 2004년 노무현 탄핵사태를 겪은 후 정치권은 ‘탄핵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10월 26일 민주당 의총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 이뤄졌다. 한 의원이 ‘탄핵’과 ‘하야’ 의견을 꺼냈지만 동조하는 의원은 없었다고 한다. 의총에 참석한 다른 한 의원은 “대부분의 의원은 지금 국면에서 탄핵과 하야를 언급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특검과 국정조사라는 투트랙 전략을 내세웠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민주당과 달리 특검을 반대했다. 두 야당의 상반된 입장에 대해 한 민주당 관계자는 “박지원 비대위원장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만 민주당의 전략이 더 낫다고 본다”면서 “특검을 지켜본 후 국정조사를 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우상호 원내대표가 전략을 잘 이끌어가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전략은 내년 대선에 맞춰 호시우행(虎視牛行·호랑이처럼 보고 소처럼 행동한다)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최순실 게이트를 계속 물고늘어져 대선국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제1당과 2당인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특검 협상에 들어갔지만 특검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비를 넘어야 한다. 추천위가 특검을 추천하는 상설 특검과 국회가 특검을 임명하는 별도 특검의 논란부터 시작해 청와대를 수사대상으로 넣을 것인지, 아니면 뺄 것인지 등이 논란거리다. 특검의 시기도 논란이 되고 있다. 여당 특히 친박 쪽에서 특검에서도 새누리당에 유리한 조건을 내세우자, 민주당은 협상 잠정 중단을 결정하고 야권 공조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하고 있는 국민들의 정서상 특검 협상에서 야당이 불리할 것이 없다는 게 민주당의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국정조사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여소야대가 된 만큼 국회 차원의 조사만이 게이트의 의혹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야권이 정국주도권을 틀어쥐고 있는 모양새다.

또 하나의 국면은 거국 중립내각에서 전개되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로 타격을 입은 박근혜 정부가 뒤로 물러나고 여야 정당이 거국 중립내각에 참여해 정국을 이끌어나가자는 이야기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가 이 제안을 들고 나섰고, 또 다른 대권주자인 김부겸 의원 역시 거국 중립내각을 주장했다. 여권에서는 김무성 전 대표·남경필 경기도지사가 거국 중립내각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이미 박근혜 정부는 정국을 이끌어 나갈 동력이 없다”면서 “국민에게서 부여받은 권위·도덕·정당성이 다 무너졌기 때문에 거국 중립내각을 통해 외부에서 동력을 얻어 끌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평론가는 “대통령은 국가를 상징하는 일만 하고 행정은 중립내각이 맡기 때문에 실질적인 이원집정부제가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거국 중립내각이 실제로 운용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다. 전임 대통령의 레임덕 시기에 주장만 난무했지 실제로 가동된 예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거국 중립내각은 박근혜 정부에는 ‘정치적 탄핵’이나 다름없다. 박근혜 정부는 개각·국면 쇄신 등으로 근근이 버티면서 식물 상태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그 상태를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한다면 박근혜 정부가 최후에 선택하는 마지막 카드가 결국 거국 중립내각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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