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관 9인의 관계망을 분석해봤다
16.12.12 09:51l최종 업데이트 16.12.12 09:52l
주권자가 해냈습니다. 지난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습니다. 시민들이 앞장서 정치권과 언론을 이끌어주셨습니다. 불과 40여 일 전만 해도 탄핵까지는 어려우리라는 전망이 가능했지만, 양파처럼 끝없이 드러나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모에 민심의 분노 게이지는 치솟았습니다. 시민들께서는 광장에 나와 '우리가 주권자'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주권자들이 아니었다면 2016년 12월 9일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성과만으로도 훗날 역사 책에 '시민 혁명'으로 기록될만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아직 이뤄낼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이 남았습니다. 우선 180일 안에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 심판에 대한 인용 혹은 기각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헌법재판관 9명 중 6명 이상이 '인용' 의견을 내야 박 대통령은 최종 탄핵됩니다.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의 세 가지 포인트를 짚어봤습니다.
첫째, 재판관들은 연결될수록 강합니다
아래 연결망은 박한철 헌재소장의 임기 시작인 2013년 4월부터 2016년 10월까지 헌법재판관 9인의 주요 결정 100건의 의견일치도를 바탕으로 추출한 겁니다. 연결망 상에서 점과 점이 연결된 선이 굵을수록 재판관끼리 의견일치도가 높다는 뜻입니다. 점이 클수록 아이겐벡터 영향력 지수란 게 높다는 뜻입니다. 이 지수는 위세 중심성이라고도 불립니다
위세 중심성은 한 점이(A) 다른 점들과(B, C, D...) 강하게 연결될수록, 혹은 다른 점들과(F, G, H...) 강하게 연결된 점과(E) 강하게 연결될수록 높습니다. 복잡한 설명을 걷어내면, 위세 중심성이 높은 재판관이 '인용'을 내면 탄핵 통과 가능성이 조금 높아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래 결과로 보면 서기석 재판관이 위세 중심성이 제일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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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괄호 안의 숫자는 소수 의견을 낸 횟수입니다. 위세 중심성(아이겐벡터 영향력)이 높을수록 점이 크게 표시됩니다. 재판관 사이의 선을(의견일치) 모두 표시하지는 않고 평균을 상회하는 관계만 표시했습니다. |
ⓒ 하지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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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석 재판관이 인용 의견을 내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 가능성도 높아지겠군요. 그럴만합니다. 서기석 재판관은 평소에 '다수 의견' 편에 가장 많이 서는 재판관입니다. 헌재는 주요 사건 100건에 관하여 140번 법리 판단을 내렸는데(같은 사건이라도 A부분은 위헌, B부분은 합헌, C부분은 각하 식으로), 서 재판관은 소수 의견을 재판관 중 가장 적은 10번만 냈습니다.
반면에 김이수 재판관은 소수 의견을 재판관 중 가장 많은 48번을 냈네요. 소수 의견을 많이 낸다고 꼭 진보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법조계에서도 김 재판관이 5기 헌재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데 큰 이견은 없어 보입니다. 연결망 내 위세는 약한 편이라 가외에 고립돼 있군요. 안타깝습니다. 헌재가 다소 보수 쪽으로 기울어있다는 평은 대체로 진실 같습니다.
다만 주의하셔야 할 것은 이 연결망은 참조용일뿐 엄밀한 예측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헌법은 특정 사건에 대한 사실판단뿐 아니라 가치판단도 중요한 영역입니다. 헌법재판관들이 나름의 가치관들을 갖고 판단하는 사건은 다양한데, 대통령 탄핵은 판례가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헌재가 누리집에 공개하는 다른 주요 판례들을 간접 데이터로 활용했습니다.
이제까지 재판관들이 다른 사건들에서 의견일치도가 높고 낮았음을 근거로 탄핵 심리에서도 그러리라 단정은 어렵습니다. 이 자료는 지난 10월 20일 치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활용한 데이터를 재가공해 제작했습니다. 데이터로 활용한 주요 판례들의 목록, 재판관 성향, 관계 추가 정보는 관련 기사를 참조하세요(관련 기사: 기울어진 '헌재', 7년 후를 기약해야 할까).
둘째, 박한철 헌재소장과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가 곧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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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2] 5기 헌법재판소 구성 |
ⓒ 고정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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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의 의결은 재판관 9명 중 7인 이상의 참석과 6명 이상이 의견일치를 볼 때 가능합니다. 6명이 인용 의견을 내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재판관들의 지명자를 주목해주십시오. 9명 중 6명이 보수 성향입니다. 과거 민주통합당이 지명한 김이수 재판관, 노무현 정부가 지명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지명한 이정미 재판관, 여야 합의 지명의 강일원 재판관을 제외하고요.
물론 과한 선입견을 가질 것까지는 없습니다. 김이수 재판관이라고 늘 진보적 의견만 내는 것도, 조용호 재판관이라고 늘 보수적 의견만 내는 것도 아니니까요. 과거에 이진성 재판관을 보수 성향일 것으로 예측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김이수 재판관과 의견일치도가 84.29%로 평균 77.72%보다 높습니다. 한편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의 주장도 들어볼만합니다.
김 전 재판관은 지난 11월 22일 CBS라디오 <김현정 뉴스쇼>에 출연, "공직자들은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본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이 사건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는 것이 아닌 애국과 비애국으로 갈라야 한다고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5기 헌재의 생각도 김 전 재판관 생각과 같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재판관 성향만큼이나 골치 아픈 문제가 있을지 모릅니다.
바로 박한철 헌재소장,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입니다. 두 사람의 임기는 각각 내년 1월, 3월에 끝납니다. 탄핵 심판이 길어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심리 정족수는 최소 7명입니다. 헌법재판소장 지명권자는 대통령인데 직무가 정지됐으니 황교안 총리가 지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 총리가 어떤 성향의 재판관을 지명할지는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헌재소장은 야당이 동의 안 하면 임명이 힘듭니다. 이렇게 되면 8명이 남는데,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도 3월에 끝납니다. 이때까지 헌재 결정이 안 나오면 이 재판관의 후임자를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명합니다. 국회 동의는 필요 없고 인사청문회만 거치면 됩니다. 그런데 청문회가 늦어져 재판관 7명이 탄핵 심판을 진행해야 할 수도 있죠. 7명 중 한 명이라도 '나 심리 못 하겠다' 곤조를 부리거나 두 명만 반대해도 박 대통령 탄핵 심판은 기각됩니다.
셋째,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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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 깃발 찢는 시민들 박근혜 대통령 즉각 퇴진과 국회의 탄핵안 가결을 요구하는 6차 촛불집회가 예정된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 모인 시민들이 새누리당 해체를 외치며 새누리당 대형 깃발을 찢고 있다. |
ⓒ 남소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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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가 탄핵 심판을 끝내는 시기에 따라 정국 상황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권에서는 내심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귀국해 대선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는 시기, 지지율 추이에 따라 유리한 시기에 헌재의 결정이 내려지길 바랄지도 모릅니다. 야권의 생각도 복잡해지겠죠. 하지만 이러한 정치 공학적인 이야기를 다 떠나 중심을 잡아야 할 것은 결국 '민심'입니다.
요즘 정치권과 언론에서 개헌 이야기가 자주 흘러나오지만, 마음이 콩밭에 가지는 않도록 주권자가 정치적 상상력을 지구력 있게 발휘할 필요가 있겠죠. 한 나라의 골격 구조인 헌법이 어떻게 설계되느냐에 따라 시민들의 삶이 달라지니까요. 의회는 시민들과 충분한 논의 없이 개헌을 시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의 결재가 없으면 개헌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국회 의석은 새누리 129석, 더민주 121석, 국민의당 38석, 정의당 6석, 무소속 6석입니다. 개헌안도 탄핵안처럼 의원 과반이 발의하고 200명 이상이 찬성하면 됩니다. 이후 국민 과반의 지지를 얻어 확정됩니다. 새누리는 이미 당론으로 개헌을 한 번 노렸었고, 야권 비문계가 이에 동조하고 대권주자들이 개헌 공약을 던지며 민심을 흔들면 정국 전환도 가능합니다. 이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민심'이 얼마나 중심을 잡을 수 있는가 정도입니다.
촛불의 놀라운 힘이 한 겨울의 추억으로 남지 않으려면 한국이 강한 시민, 교양 시민의 나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의회 엘리트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헌법적 가치를 토론할 수 있는 '가치관이 분배된 사회'를 꿈꿔봅니다. 이러한 생각은 반지성주의보다는 지성주의에 가깝습니다. 성찰과 정치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성찰과 정치의 가능성이 평등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헌법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변화의 기반을 다지는 것은 교육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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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 뉴스 건수만 데이터로 수집했을 뿐 실제로 독자들이 얼마나 기사를 읽었는지 페이지 뷰까지는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까지 반영하면 훨씬 끔찍한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
ⓒ 하지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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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은 단순한 팩트가 아닌 인류애적 가치를 논하는 영역입니다. 정치철학과 윤리학의 문제와 맞닿습니다. 무엇이 상식이 될만한 가치가 있는지 토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의 기회가 공정하게 분배돼야 할 것입니다. 상식을 배우는 중고등학교에 철학 교사가 필요하고 대학 서열은 혁파돼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근거 없는 편견들이 지역 학생들의 정치 참여를 위축시키고 공론장 진입을 가로막고 자기효능감을 경험할 기회도 뺏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지난 11월 25일 <오마이뉴스>를 통해 국내 195개 4년제 일반대학 학생들의 시국선언 보도 경향에 관한 기사를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수도권대든 지방대든 학생들은 모두 '우리가 주권자다'라는 헌법의 기본 가치에 대해 똑같이 말했지만, 여론은 이른바 명문대라는 대학들 위주로 관심이 집중돼 있는 문제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자주 쓰는 '로렌츠 곡선'과 '지니계수'를 통해 지적했습니다(관련 기사: 대학 서열의 정치학, 우리 안의 나향욱).
전문대, 고졸 이하 학력자 등도 감안하면 묻혀있던 목소리가 더 많이 존재할 것입니다. 대중 정치, 풀뿌리 정치를 복원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뜻이 의회에 전달되는 사회를 지속시키려면 할 일이 앞으로 많습니다. 헌재에서 인용 걸정이 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시민이 헌법적 가치를 상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자는 물고기를 잡지만 후자는 물고기 잡는 법을 익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섣부른 개헌보다 헌법적 가치의 '분배'를 말하는 대선 주자가 누구인지 주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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