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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퇴양난, 어버이연합의 두 모습

 

전경련 5억 지원설, 사무총장 잠적, 건물주 퇴거 명령...안보강연은 계속

16.04.25 21:39l최종 업데이트 16.04.25 21:39l
글·사진: 소중한(extremes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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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버이연합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묘광장공원에서 회원들을 상대로 안보강연을 하고 있다. 이종문 부회장이 트럭에 마련된 무대에 올라 발언하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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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언론)들이 우리 어르신들을 돈 2만원 받고 끌려다니는 사람으로 폄훼하고 있어요. 유언비어에도 흔들림없이, 오직 나라를 위해 애국해야 합니다. 여러분, 맞죠?"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묘광장공원. 양복을 입은 한 중년 남성이 트럭에 마련된 무대 위에 올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뿜고 있었다. 이른바 '안보강연'이었다.

트럭에는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아래 어버이연합)'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큰 글씨로 '자유대한민국을 위하여 뭉치자! 싸우자! 이기자!'라고 적힌 플래카드에는 '종북좌파세력 척결, 전교조 해체, 현대사 바로세우기'라는 글귀도 담겼다. 트럭 한 편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할 때 사용하는 '부엉이 바위'라는 글자도 새겼다.

현재 어버이연합은 전국경제인연합회(아래 전경련)에서 자금 지원을 받아 집회에 노인, 탈북자 등을 동원한 의혹을 받고 있다. 어버이연합의 자금을 책임지고 있는 추선희 사무총장은 "25일 (어버이연합 문제를 보도한) JTBC 사옥 앞 항의 집회를 열겠다"고 예고했지만, 이날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출입금지' 사무실, 홈페이지도 먹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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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어버이연합 사무실을 찾았다. 추 사무총장이 쓰는 건물 3층 사무실은 굳게 잠겨 있었다. 2층 직원들이 사용하는 사무실 문엔 '外部人 出入禁止(외부인 출입금지)'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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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위 안보강연의 주인공은 이종문 어버이연합 부회장이다. 1시간 30분 가량 강연을 한 뒤 트럭에서 내려온 이 부회장은 <오마이뉴스> 기자에게 "3일 째 추 사무총장과 연락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전화를 해도 안 받고, 문자를 남겨도 답이 없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 추 사무총장과 연락이 잘 안 된다고 들었다.
"연락이 안 돼, 지금... 나도 한 3일 째 연락을 못했어. 금요일 이후론 연락이 안 돼."

- 지방에 내려갔다는 말도 있던데.
"그것도 모르겠다니까. 우리와 일체 연락을 안 하고 있어. 오늘 사실은 거기(JTBC 사옥)에 가려고 했던 건데, 연락이 안 되니까 (갈 수가 있나). 보류가 된 거지. 다시 (추 사무총장이 돌아오면) 바로 JTBC 가야지."

앞서 어버이연합 사무실을 찾았다. 추 사무총장이 쓰는 3층 사무실은 굳게 잠겨 있었다. 2층 직원들이 사용하는 사무실 문엔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안보강연을 위해 직원들이 현장에 나간 탓에, 사무실 문은 잠겨 있었다. 사무실 주변 곳곳에는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집회 때 사용하는 손팻말이 박스에 담긴 채 놓여 있었다. 

3층 식당에서 만난 한 어버이연합 회원은 "요새 분위기가 통 안 좋다"라며 "추 사무총장도 통 만날 수가 없다. 전화를 해도 먹통이란다"라고 말했다. 

25일 기자가 추 사무총장과 통화를 시도했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고객의 요청으로 착신이 정지된 상태"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어버이연합 인터넷 홈페이지도 먹통이었다. 'Forbidden(금지된)'이란 글자만 뜬 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건물주가 6월 30일 이후 나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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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버이연합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묘광장공원에서 회원들을 상대로 안보강연을 하고 있다. 이종문 부회장이 트럭에 마련된 무대에 올라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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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JTBC는 전경련이 2014년 9월부터 넉 달 동안, 어버이연합의 차명계좌로 의심되는 계좌에 1억2000만원을 입금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25일 JTBC의 추가 보도에 따르면, 전경련은 2012년 2월 1800만 원을 시작으로 2014년 연말까지 총 20차례에 걸쳐 5억2300만원을 벧엘선교복지재단 계좌에 입금한 것으로 확인됐다.

<오마이뉴스>는 25일 이 부회장에게 이와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 전경련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보도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데.
"우린 돈에 대한 건 전혀 모른다. 왜 모르냐, 우리는 행사장(집회) 나가고, 그때 외엔 평상시 교육하는 거 밖에 없다. 어디에서 무슨 돈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전혀 모른다. (자금과 관련해선) 어떤 하달도 없다."  

- 전경련과의 관계도 전혀 모른다는 건가.
"모른다. 벧엘(선교복지재단)인가 뭔가하는 그것도 잘 모른다. 그런데 가령 돈이 정말 들어왔다고 치자. 솔직히 어르신 200명 하루 식사비가 한 달이면 몇 백만원이다. 솔직히 말해 회비 1, 2만원이랑 파지 좀 주워서 돈 모아봐야 집세(사무실 임대료) 내기도 힘들다."

- 임대료가 좀 밀렸다고 하던데.
"많이 밀렸어."

- 건물 주인은 뭐라고 하나.
"나가라고 해. 6월 30일까지만 있다가."

- 앞으로 (사무실 유지는) 어떻게 할 건가.
"당신들이 좀 도와주셔야지(웃음)."

"언론들 개소리, 어르신들이 대한민국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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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어버이연합 사무실을 찾았다. 추 사무총장이 쓰는 건물 3층 사무실은 굳게 잠겨 있었다. 2층 직원들이 사용하는 사무실 문엔 '外部人 出入禁止(외부인 출입금지)'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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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도 어버이연합은 매일 안보강연을 진행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날 안보강연에서 이 부회장은 "모든 신문들이 난리를 치고 있다"며 "우리 어르신들이 이 나라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알면서도 언론은 그 연륜을 일거에 말살시키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 부회장은 언론을 향해 "편파적이어도 이렇게 편파적일 수 없다", "보수신문이라고 생각했던 조중동도 전부 미쳤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놈(언론)들은 개소리하고 있지만, 여기 나오신 어르신들이 대한민국을 지켰다. 이 나라를 만드셨다. 후세들에게 튼튼한 미래, 아름다운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이 자리 나오신 거 아닌가. 흔들림 없으셔야 한다."

공원을 찾은 어버이연합 회원 200여 명은 이 부회장의 발언에 손을 높이 들고 박수를 치거나 "옳소"라고 외치며 호응했다. 강연을 끝낸 뒤에는 이 부회장의 선창에 따라 "자유대한민국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싸우자! 이기자! 자유대한민국 만세! 어버이연합 만세!"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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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버이연합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묘광장공원에서 회원들을 상대로 안보강연을 하고 있다. 이종문 부회장이 트럭에 마련된 무대에 올라 강연을 진행하고 있고(왼쪽 끝), 노인들이 그늘을 따라 줄지어 의자에 앉아 강연을 듣고 있다. 중간에 큰 스피커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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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어버이연합, 청와대도 TV조선도 버렸다

 

시사저널·JTBC 반박 기자회견, 정작 질문은 안 받아… “이 사람들 장난하나” JTBC 기자들 거센 반발

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2016년 04월 25일 월요일
 

청와대가 어버이연합 집회를 지시했다는 주장이 나오며 ‘어버이연합 게이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어버이연합은 지난주 서울 용산구 시사저널 사옥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고 JTBC 앞에서의 집회도 예고했다. 어버이연합식 ‘언론과의 전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을 선포한 어버이연합은 고립되고 있다. KBS 라디오에서 어버이연합 인용 보도를 했던 기자가 교체되는 등 공영방송 침묵은 계속되고 있으나 TV조선 등 보수 언론들은 ‘태세 전환’ 중이다.

TV조선은 지난 22일 리포트 “‘물리력 앞세워 지원 요구’”를 통해 “TV조선 취재 결과, 탈북자들을 시위에 동원하고 전경련 지원금을 받아 논란에 휩싸인 어버이 연합이 전경련뿐 아니라 대기업들과 정부에도 지원금을 요청하고 또 실제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 TV조선 22일자 리포트.

MBN도 같은 날 메인뉴스에서 “어버이연합은 (기자회견에서) 일방적인 입장만 밝히고 취재진 질문에는 거의 답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고 보도했다. 

 

채널A도 21일과 22일에 걸쳐 메인뉴스에서 관련 소식을 전했다. 조선‧중앙도 이날 사설을 통해 전경련-어버이연합 유착 의혹을 지적했다.

극단적 행동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단체를 ‘보수단체’로 적당히 포장하며 두둔해왔던 보수 매체들도 반발 여론을 반영해 어버이연합을 도마 위에 올리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홍위병’ 역할을 자임했던 어버이연합이 자신들의 의혹을 해소하지 못하고 날뛰면 날뛸수록 현 정부는 부담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보수 언론 입장에서도 어버이연합을 고립시키며 정부에 해법 마련을 주문할 필요성이 있다.

쏟아지는 비난 여론에도 어버이연합은 JTBC 항의 집회를 예고하며 ‘무데뽀’(일본식 단어인데 어버이연합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용어라 사용한다.) 정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 어버이연합은 지난 22일 시사저널과 JTBC 보도를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열고도 질문을 받지 않아 취재진의 항의를 받았다. (사진=이치열 기자)

한편, 지난 22일 어버이연합 기자회견장에서 JTBC 취재진과 어버이연합간 신경전이 벌어져 SNS상에서 주목받고 있다.

 

미디어몽구가 24일 공개한 영상을 보면, JTBC 기자들은 이날 어버이연합 기자회견에서 “벧엘을 통해서 지원받은 기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고, 1억2000만원 이외도 추가로 받았는지 밝혀달라”(JTBC 강버들 기자)는 등의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은 “까놓고 얘기해서 JTBC 질문 자체도 받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여러분들은 말 그대로 불법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강 기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추 총장은 “저희는 월요일(25일)부터 JTBC 집회에 나간다”며 “JTBC가 공개한 내용은 다 거짓이고 허위”라고 답했다.

박창규 JTBC 기자는 취재진 질문을 받지 않는 어버이연합을 향해 “기자들 왜 모았나. 길에서 (기자회견문) 읽고 말지”라며 “이 사람들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으면 질문을 받아야 할 거 아니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취재진의 열기는 ‘어버이연합 게이트’ 의혹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고 어버이연합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단체 출범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 미디어몽구가 24일 공개한 어버이연합 기자회견 영상. (사진=미디어몽구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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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입체전적 지휘로 1달만에 신형 SLBM 성공시킨 듯

김정은, 입체전적 지휘로 1달만에 신형 SLBM 성공시킨 듯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4/25 [01:4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북의 신형 대출력고체연료엔진을 사용한 새로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극성이 바닷속에서 솟구쳐 올라 창공으로 수직 비상하는 모습     ©자주시보

 

북 국방위원회 김정은 제1위원장이 23일 전격 시험발사하여 성공시켰다고 하는 전략잠수함탄도미사일(SLBM)에 사용된 신형 대출력고체연료엔진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데 국방과학자, 기술자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고 북에서 보도하였다.


[피타는 사색과 탐구 헌신과 열정으로 주체조선의 핵공격 능력을 비상히 강화해 나가는 길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전략잠수함)탄도탄수중시험발사에 눈부신 성공을 또 다시 이룩해냈습니다.
……
바람세찬 바닷가 발사장에 달려온신 원수님을 맞이하는 국방과학자 기술자들은 탄도탄 개발의 나날 자기들과 함께 피끓는 심장은 내대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시며 창조적 지혜와 힘을 주시고 열정을 깡그리 바쳐오신 원수님에 대한 다함없는 고마움에 솟구치는 격정을 누르지 못했습니다.]-24일 조선중앙텔레비젼 방송 보도 중에서


24일 조선중앙텔레비젼의 이 보도 내용을 보면 김정은위원장이 이번 신형 SLBM을 개발하는데 얼마나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짐작이 간다.


북이 김정은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한 신형 로켓용 대출력고체연료발동기(엔진) 시험성공 장면을 공개한지 정확히 1달만에 이 로켓을 이용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에 성공하였으니 가히 기적적인 속도로 개발한 것이 아닐 수 없다.

 

▲ 북의 신형 고체연료엔진로켓으로 개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사출 캡슐  뚜껑이 수중에서 열리는 모습    © 자주시보

 

▲ 북의 신형 고체연료엔진로켓으로 개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사출 캡슐이 바닷물 속에서 열리는 모습     © 자주시보

 

▲ 북의 신형 고체연료엔진로켓으로 개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사출 캡슐에서 탄도미사일이 사출되어 바닷물 속을 수직 부상하는 모습     © 자주시보

 

▲ 북의 첫 고체연료로켓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심험발사 장면 중 바다 속에서 물위로 솟구치는 장면  이 솟구치는 힘은  증기발생기나 고압의 압축공기시스템으로 만들어 낸 사출캡슐의 고압의 압축공기에서 나온다. ©자주시보

 

▲ 2016년 4월 23일 시험발사를 단행한 북의 첫 대출력 고체연료로켓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 바닷속에서 솟구쳐 올라 1단로켓엔진 점화에 성공하는 장면   ©자주시보

 

▲ 북의 대출력 신형 고체연료로켓을 이용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 점화후 본격적으로 화염을 내 뿜으며 수직 비상하는 장면, 2016년 4월 23일 단행     ©자주시보

 

▲ 북의 첫 고체연료로켓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심험발사 장면 중 높은 창공으로의 비상 장면     ©자주시보

 

 

✦대출력 고체연료로켓엔진 개발 1달만에

 

3월 24일 연합뉴스는 김정은제1위원장이 대(고)출력 고체로켓 발동기(엔진) 관련 시험 성공을 보면서 "적대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조겨댈(때릴) 수 있는 탄도로케트(로켓)들의 위력을 더욱 높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면서 김정은 제1위원장은 "로켓공업발전에서 새로운 도약대를 마련하였다. 영원히 잊지 못할 날, 역사적인 날"이라며 "(앞으로) 원쑤(원수)들에게 무서운 공포와 전율을 안기는 국방과학기술성과들을 다계단으로 연이어 이룩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북 언론보도를 소개한 바 있다.


김정은위원장은 이때 이미 대출력 고체연료로켓엔진으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도 만들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다계단으로 연이어 개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은위원장이 국방과학자, 기술자들과 함께 피끓는 심장을 내대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이 신형 SLBM을 개발했다는 이번 보도를 보니, 그 계획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실현시켜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신형 SLBM개발에 적용하여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북의 인적 물적 자원을 가장 빠르게 이동 배치 투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김정은위원장이 이 사업을 틀어쥐고 지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북극성 신형 고체로켓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과 시험발사를 단행한 사람들과 시험성공을 함께 기뻐하는 김정은 제1위원장     ©자주시보

 

 

✦ 김정은위원장의 입체전적인 총지휘 능력


더불어 동시에 여러 작업을 진행하는 입체전을 폈던 것도 이런 기적적인 속도를 가능케 했던 것으로 보인다.


3월 22일 ‘워싱턴 프리비컨’이 복수의 미 국방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조선이 고래급 잠수함과 KN-11 미사일을 개발 중인 동해 신포조선소 해안가에서 지난 16일 사출시험을 실시했다고 보도한 바 있는데 신형 대출력고체연료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개발과 동시에 액체연료미사일보다 몸통이 더 큰 이 미사일을 잠수함에서 쏘아올릴 새로운 사출장치를 제작하여 지상시험을 단행했던 것 같다.


15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합동참모본부 관계자는 "북한이 오늘 새벽 5시 30분께 동해안 지역에서 (무수단 KN-08)미사일 1발 발사를 시도한 것으로 보이며 실패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는데 공중폭발 등 확실한 실패 정황을 포착해서 내린 결론이 아니라 "미사일이 정상 궤적을 비행하지 않았을 때 발사 실패로 판단한다"는 이유로 실패로 규정했던 적이 있다. 
북은 요격회피를 위해 비정상적 궤적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본지에서는 이를 실패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분석 보도한 바 있다.

 

▲ 북의 대형 고체연료 로켓엔진 분출시험 성공 장면, 이 시험에 성공한 지 단 1개월만에 이를 이용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개발 시험발사에 성공한 것은 가히 기적과 같은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자주시보


아마 이때 시험발사한 일명 무수단미사일이 바로 대출력고체연료로켓엔진으로 만든 신형 중거리 탄도미사일이었던 것 같다. 무수단 미사일은 미사일 하부에 날개가 없어 지상발사용을 거의 변형없이 바로 잠수함발사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미사일이다. 원래 잠수함발사용으로 개발하였고 이를 지상발사에서도 이용한 미사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북은 총알과 총을 동시에 입체적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총알인 신형 대출력고체연료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과 그것을 쏘아올릴 총인 잠수함의 발사장치(사출장치) 개발을 동시에 내밀어 짧은 기간에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북은 최근 여명거리 건설 과정에서도 여러 작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입체전적 방식으로 공사를 내밀고 있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고 백두산 영웅청년3호발전소도 그 입체전으로 공사를 추진하여 기일을 앞당겨 준공했다고 보도하는 등 여기저기서 입체전이 대유행이다.


이렇게 여러 작업을 동시에 입체적으로 진행하려면 더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한다. 예상치 못한 난관이 더 많이 발생할 수 있고 자칫하다가는 한 분야의 문제 때문에 다른 분야의 진행 내용도 무용지물이 되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치명적인 문제점도 야기할 소지가 있다.


그래서 입체전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연결시켜 분석 종합할 수 있는 비상한 창조적 두뇌를 가진 총지휘자가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김정은위원장이 그런 입체전 지휘능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더불어 입체전을 진행하려면 풍부한 경험을 가진 높은 수준의 전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북에 탄도미사일과 잠수함발사미사일개발 관련 과학자, 전문가들이 많고 그 경험이 풍부하리라는 것도 이번 시험을 통해 확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경험 많고 실력이 높은 많은 과학자, 기술자가 없이는 12.5%정도 미사일 원통 지름이 더 커졌고 엔진도 새로운 고체연료형식의 신형 탄도미사일을 단 한 달만에 개발하고, 즉각 전략잠수함 수중 시험발사를 단행하여 단방에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북은 이미 전략무기 개발과 관련된 많은 기술과 경험을 축적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김정은 제1위원장은 그 역량을 총지휘할 수 있는 비상한 두뇌와 열정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더욱 무서운 무기를 속속 개발 실전배치할 것이 확실시 된다.

 

▲ 조선이 시험 발사한 신형 대구경 방사포는 초정밀 유도장치가 내장되어 있어 200KM 거리의 목표를 1미터 오차 안에서 정확히 타격하는 놀라운 명중율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남측의 방사포 대응 무기들이 대부분 무력화 되고 말았다.  SLBM은 중, 장거리 미사일이라 남측에서 대응무기 개발 자체가 불가능하다. 돈이 있다고 쉽게 사올 수도 없다. 전략무기이기 때문에 수출이 되지 않는다. 선진국도 방어 무기 개발을 못하고 있다. 사실 잠수함을 잡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SLBM은 사드로도 막기 어렵다는 전문가들이 지적이 있어 보복무기는 개발해도 요격무기는 사실상 개발이 어렵다.

 

 

✦ 유일한 실효적 대책은 남북관계 개선 뿐

 

사실 김정은정권 들어서서 지금까지 북이 공개한 위력적인 첨단무기들만 봐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다. 정말 상황이 심각하다.

정부는 당장의 민심 혼란을 막기 위해서인지, 아니며 자신들의 심리적 안정감을 갖고 싶어 그런지는 몰라도 별 이유도 없이 작은 꼬투리를 잡아 무조건 북의 신형 무기 시험을 실패라고 규정짓기 바쁜데 진짜 혼란은 진실이 드러났을 때이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이제는 실체적 진실을 숨기는 데도 한계가 있다. 북이 자신들 무기의 위력을 실제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보여주게 되었을 때 전 국민적 혼란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연평도 포격전으로 북 방사포의 위력을 국민들은 실제 체감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북 방사포를 정확도가 한참 떨어지는 구닥다리 무기라고 폄하하지 않는다. 뉴스에서도 북 방사포의 심각성에 대해 연일 지적하며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 수입한 에이태킴스미사일과 다련장로켓(MLRS), 천무 국산 다련장로켓, 수입한 슬램ER 공중타격순항미사일 실전배치에 이어 120KM 지대지유도미사일 개발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이 300KM 대구경 초정밀유도방사포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위의 무기들 대부분이 무의미해지기는 했지만 대응 무기를 모색이라도 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북의 저 엄청난 군사력을 군사력 균형으로 막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북 방사포 하나 대응 체계 구축에 지금까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는데 북의 300미리 대구경 초정밀유도 방사포 개발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북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에 대한 대응체계 개발이나 도입은 더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다. 비용도 문제이지만 중거리미사일은 미국에서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아예 개발이 불가능하다. 군권은 민족의 생명권인데 한국의 핵심 군권은 미국 손아귀에 꽉 잡혀있는 현실이다.


미국이 모든 분야의 무기개발에 대해 허락해준다고 해도 현재 북의 무기에 대항하는 것은 역부족이다. 온 국민의 세금을 다 국방비에 투여해도 미국과 맞서 이길 무력을 개발하고 있는 북에 대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보다 더 많은 국방비를 투자하는 것이 과연 우리나라에 가능한 일인가!


그래서 가장 실질적인 한반도 평화체제를 확보하는 비결은 남북관계 개선에 있다고 본다.


대만은 핵도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도 없지만 그것을 다 가지고 있는 대만 국민들은 중국에 대해 큰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은 민족으로 서로 교류협력을 하며 살아가다보니 중국에 대만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있고 대만에 중국 관광객들이 물 밀들이 들고 있으며 대만과 중국인들 사이에 결혼도 빈번하게 이루어져 아예 근본적으로 중국의 무기가 대만을 위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회체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다르지만 같은 민족으로 서로 교류하며 살아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이다.


이제는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개선을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6.15남북공동선언과 10.4선언만 잘 이행했다면 한반도도 대만과 중국처럼 교류협력이 이미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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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주문하고 김종인이 답한 '구조 조정'!

 
[서리풀 논평] '구조 조정'의 고통은 필연인가?
 
시민건강증진연구소| 2016.04.25 07:13:00
'구조 조정'의 고통은 필연인가?

이런 것이야말로 '기시감(데자뷔)'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1998년 경제 위기 때 그랬고, 2008년 금융 위기 때도 그랬다. 아니, 정확하게는 1998년 이후에는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졌다(예를 들어 쌍용자동차의 정리 해고). 이른바 '구조 조정'이라는 익숙한, 그러나 실체를 잘 알 수 없는 폭력.

그 구조 조정이 다시 등장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조선 산업이라는 것, 그리고 정부가 몇 번 변죽을 올리기는 했으되 선수를 뺏겼다는 점이 정도다. 선거를 통해 엉겁결에 제1당이 된 야당이 구조 조정이 필요하다고 시동을 건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경제와 정치가 뒤범벅이 되어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우선, 우리는 이 말을 해체하고 재구성할 것을 주장한다. '구조 조정'은 비겁한 표현이다. '요금 현실화'나 '정상화', 또는 '정치적 올바름'과 마찬가지로, 중립을 앞세우며 진실을 숨긴다. 현실 정치인과 관료의 특기이기도 하다. 그 어떤 정책과 조처가 '구조'와 무관한 것이 있던가. 언제는 조정이 없던 때가 있는가. 

게다가 폭력적이다. 구조를 앞세우면, 급진적 변화 그리고 이를 위한 시장 개입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비틀어진 '구조'를 새로운 상황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는데,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근본 문제를 제기하면 수구 꼴통이나 극단적 이기주의자로 몰리기 십상이니, 기껏해야 '조건부' 반대가 최선이다. "신중하게, 부작용이 적게, 대책을 마련하면서" 또는 "고통 분담". 구조 조정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처음이 아니니, 1997~1998년의 경제 위기와 구조 조정을 뒤돌아보는 것이 당연하다. 경제 위기를 극복한다는 이유로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를 수용했고 기업은 물론 공공 부문까지 큰 변화를 겪어야 했다. 한보철강, 삼미그룹, 진로, 대농그룹, 한신공영, 기아자동차, 쌍방울, 해태, 뉴코아, 한라 등의 대기업이 해체되거나 사라졌다. 또한 '5대 그룹' 빅딜이란 이름으로 전자와 반도체, 석유화학, 자동차 회사가 합치거나 없어졌다.

구조 조정은 공공 부문까지 밀어닥쳤다. 한국중공업, 한국통신, 한국전력, 담배인삼공사, 한국가스공사 등의 공기업을 민간에 팔았고, 공공 부문 전체 인력의 20% 가량을 감원했다. 심지어 '철밥통'이라는 공무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월간 참여사회> 1998년 10월호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관련 기사 : 공무원 조직 및 인력 감축의 허와 실)

"행정자치부가 내놓은 '공무원 조직 및 인력 감축 지침'에 따라 공무원 사회에도 '감원, 퇴출'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행정자치부 자료에 따르면 올해 안에 전국적으로 3만여 명의 지방공무원을 감원한다. 더 나아가 2002년까지 정원의 30%인 8만7300여 명을 연차적으로 감축할 계획이다. 공무원이야말로 안정적인 '평생 직장'이라는 믿음이 여지없이 깨져버린 셈이다." 

지나간 뉴스는 구조 조정의 구조와 과정, 그 결과를 인격이 없는 기록으로 남기지만, 그 흔적은 각 사람 개인에게 쉽게 없어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때로 그 상처는 회복할 수 없는 것들이다. 정리 해고와 감원으로 공식 실업률만 7~8%에 이르렀고(외환 위기 이전에는 2~3%), 실제 실업률은 20%를 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인당 국민 소득은 1만 달러에서 6000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삶의 한 요소로, 질병과 죽음도 완연했다. 가장 명확한 지표는 자살이다. 1990년대 말의 경제위기는 높은 자살률이 굳어지는 데에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다. 다음과 같은 연합뉴스의 기사. (☞관련 기사 : 하루 40명꼴 자살…고령화, 경제난 탓)

"한국의 자살률이 과거에도 이처럼 높았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만 해도 자살률은 8.8명으로 당시의 일본(17.5명)과 독일(17.1명)의 절반을 밑돌았다.

한국의 자살률은 1997년 외환 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거치며 급증했다. 한국의 자살률은 2000년 13.6명으로 는 데 이어 2003년 22.6명으로 껑충 뛰었다. 2009년 31.0명, 2010년 31.2명, 2011년 31.7명으로 가파르게 올라갔다가 2012년 28.1명으로 줄어든 이후 2013년 28.5명으로 다시 상승했다." 

이것이 무감각한 숫자라면, 더 생생한 증언도 있다. 2002년 프레시안이 보도한 여러 사례들에는 해고, 실직, 부도, 사채 등이 빠지지 않는다. (☞관련 기사 : IMF 자살일지, "그 때를 아십니까?") 움직일 수 없는 인과관계는 이런 것이다. 

"실업자가 되면 처음에는 퇴직금과 명예금,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 생활을 합디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다음에 집에 손을 댑니다. 집을 팔아 전세로 옮기고 그 다음에는 전세를 월세로 옮긴 뒤 남은 돈으로 생활을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돈을 만들 길이 없으면 거리로 나앉아 노숙자가 되거나 자살을 하곤 했어요. 공황 발발에 따른 자살은 사회적 타살인 것입니다." 


건강과 질병, 사망 효과는 구조 조정이 사회에 남기는 그 많은 상처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지만(가족 해체나 범죄, 그 밖의 수많은 상처들!), 유난히 불평등에 민감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교육이나 직업적 지위, 소득 수준에서 불리한 사람들이 더 많이 병들고, 다치고, 죽음에 이른다. 

지난 시기 구조 조정의 효과를 분석한 여러 가지 연구 결과를 다시 동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조 조정은 사람을 차별한다는 점만 확인해 두자. 그리고 한 가지 더, 병이나 죽음의 불평등이 이 정도니, 그것은 다른 불평등이 깊어지고 심해져서 견딜 수 없어 터져 나온 것이다. 생활의 물질적 조건, 불안과 스트레스, 가족 관계, 자존감 등등. 온갖 고통은 차별적이다. 

모든 것을 구조 조정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터. 특히 1998년의 경제 위기에서는 경제 위기와 구조 조정의 효과가 겹쳐 있다. 하지만, 경제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사회와 개인에 대한 효과도 달라진다. 다르게 표현하면, 어떤 구조 조정인가에 따라 위기의 의미가 다르고 삶과 죽음이 나뉜다. 

이런 사실 또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이다. 2008년의 금융 위기와 유로존의 경제 위기에서 배운 것이 크지만, 특히 그리스와 아이슬란드의 대조적 구조 조정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두 나라가 갔던 길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와는 사정이 많이 다르고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원칙은 다를 리 없다.

데이비드 스터클러와 산제이 바수가 쓴 <긴축은 죽음의 처방전인가>(안세민 옮김, 까치 펴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관련 기사 : 긴축이 불황의 특효? 건강해야 경제도 낫는다!) 

"경제 위기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 [아이슬란드는] 정부 지출을 오히려 늘렸고, 공중 보건 예산을 줄이지 않았다. 아울러 음식, 일자리, 주택을 보장하는 사회 보장 체계를 계속 유지했다."

"무슨 다른 대책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떤 이는 구조 조정의 불가피성과 대책의 중립성을 강변한다.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백 걸음을 양보해 이른바 '구조 조정'을 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선택할 길은 '주어져' 있지 않고 개방적이다.

'공적' 자금은 왜 회사와 은행에만 투입되어야 하는가? 실직자를 보호하기 위한 '특별법'과 그 재정은 왜 불가능한가? 고통 '분담'인가 고통 '전담'인가? 무슨 고통을, 어떻게 나누자는 말인가? 다르게 상상하고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 

그 어떤 정책과 조처에도 (그 알량한 통계가 아니라) 사람과 그의 살아있는 삶이 첫 째 기준이 되어야 한다. 기업과 경제를 살린다고 하지 말고 사람을 살리라! 눈과 기준을 이렇게 맞추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몫이다. 다시 아이슬란드와 그리스에서 배우는 교훈으로 돌아간다. 

"현실에서는 정책의 관점과 그를 둘러싼 권력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아이슬란드가 국민투표를 통해 '민주적'으로 긴축 정책을 거부한 것이 또 다른 좋은 예다. (…) 사회 구성원 전체를 위해, 또는 정책에 의해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을 집단과 피해의 성격을 '정치적'으로 고려했다. 

아이슬란드와 그리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의 예에서 보듯, 흔히 정책적 대응을 결정하는 것은 (개별 증거를 넘는) 한 국가의 기본적인 정책 기조다. 그리고 그런 정책 기조가 더 크고 넓은 범위에서 정치적, 경제 사회적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 위기와 그 대응이라는 면에서 볼 때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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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AP통신,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탐사 보도

 
 
복지원의 정치적 목적, 그리고 박인근 원장이 챙긴 부당이득 사례도 밝혀
 
뉴스프로 | 2016-04-24 13:14:1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미 AP통신,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탐사 보도
– 피해자 증언과 정부 자료 근거로 구타, 강간, 노예노동 등 인권침해 사례 적시
– 형제복지원의 정치적 목적, 그리고 박인근 원장이 챙긴 부당이득 사례도 밝혀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그야말로 ‘최악’으로 기억될 인권침해 사건이다. 형제복지원은 박정희 정권 때 시작됐고, 뒤이은 전두환 정권이 거리 ‘정화’를 명분으로 부랑자, 고아 등을 수용하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 하사관 출신인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조직을 군대식으로 편성하고, 원생들에게 온갖 가혹 행위를 자행했다. 그 가혹 행위 수준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SBS <그것이 알고싶다> 같은 공중파 시사고발프로그램에서 자주 다뤄졌다.

미 AP통신은 형제복지원 피해자 인터뷰와 단독으로 입수한 수백 건의 정부 자료를 근거로 약 11장 분량의 탐사보도를 내놓았고, 영국 데일리메일은 18일 이를 받아 보도했다.

AP통신의 보도 내용은 그동안 한국 언론에서 다뤄진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롭게 밝혀진 내용도 많다.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부랑자나 걸인, 고아는 물론 반정부 유인물을 소지한 대학생도 형제복지원 입소대상이라고 했다. 즉, 이 시설이 체제 반대자를 수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형제복지원이 대우 등과 같은 기업과 유착을 맺고 막대한 이익을 챙겼으나 원생들에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도 AP통신은 밝혀냈다. 그동안 한국언론 보도는 형제복지원에서 자행된 인권침해에 중점을 뒀을 뿐, 박인근 원장이 챙긴 이익에 대해선 별반 주목을 하지 않아 왔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당대 권력이 비극의 씨앗을 뿌리고 은폐한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울산지검 김용원 검사(현 변호사)는 이 사건을 처음 인지하고 수사를 펼쳤으나 상관이던 부장검사는 이를 축소했다. 그 사람이 바로 국회의장을 지낸 박희태였다. 사실 박희태는 정권의 뜻을 집행한 데 불과하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불거지던 당시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고, 그래서 정권의 치부가 될 또 다른 사건인 형제복지원 사건이 부각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AP통신 보도 역시 이 사건이 정권의 필요에 따라 은폐됐음을 폭로한다. 이런 맥락에서 AP통신 보도는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을 파헤친 <보스턴글로브>지의 탐사보도에 견줄 만하다.

뉴스프로는 AP통신 보도가 높은 가치가 있다는 판단 아래, 기사 전문을 번역한다.
번역 감수 : 임옥

기사 바로가기 ☞ http://dailym.ai/1SWGahA

‘Hell within Hell’: Children raped daily for years, forced to pick maggots out of open wounds and watch inmates being tortured and stamped to death at ‘evil’ South Korean labour camp

‘지옥 속의 지옥’: 수년간 아동들이 매일 성폭행을 당하고, 상처에서 구더기를 골라내야 했고, 수용자들이 고문당하고 맞아 죽는 것을 봐야했던 ‘악마’같은 한국의 강제 노동수용소

• Brothers Home, in Busan, South Korea, had more than 20 factories at peak
• Ex inmates claim children were raped and many prisoners beaten to death
• Thousands ’rounded up off the streets ahead of the 1988 Seoul Olympics’
• Busan city officials said facts are difficult to confirm now because facility closed 30 years ago

• 한국 부산 형제복지원, 전성기 때 20개 넘는 공장 소유
• 전 원생들, 빈번한 아동 성폭행, 다수의 수용자들 맞아 죽었다 주장
•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앞두고 수천 명 거리에서 잡혀가
• 부산시 관계자, 형제복지원 30년 전 문 닫아 사실 확인 어렵다 전해

By Associated Press
Published: 12:06 GMT, 18 April 2016 | Updated: 12:50 GMT, 18 April 2016

The 14-year-old boy in the black school jacket stared at his shoes, his heart pounding, as the policeman accused him of stealing a piece of bread. Even now, more than 30 years later, Choi Seung-woo weeps when he describes all that happened next.

검정색 교복을 입은 14세 소년은 빵 한 조각을 훔쳤다고 경찰관이 추궁하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려 신발만 쳐다보고 있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최승우 씨는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린다.

The policeman yanked down the boy’s pants and sparked a cigarette lighter near Choi’s genitals until he confessed to a crime he didn’t commit.

경찰관은 소년의 바지를 잡아내리고 생식기 가까이에 라이터 불을 켜서 최 씨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백하게 했다.

Then two men with clubs came and dragged Choi off to the Brothers Home, a mountainside institution where some of the worst human rights atrocities in modern South Korean history took place.

그런 다음 곤봉을 든 두 남자가 와서, 현대 한국사에서 최악의 인권 유린이 행해진 산비탈의 수용시설, 형제복지원으로 최 씨를 끌어갔다.

Nobody has been held accountable to date for the rapes and killings at the Brothers compound (pictured) in Busan, South Korea, an investigation has claimed. Children are pictured at the camp
한국 부산 형제복지원 시설 내(사진)에서 일어난 성폭행 및 살인에 대해, 수사가 요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아무도 책임을 진 적이 없다. 형제복지원에 있는 사진 속 어린이들.

A guard in Choi’s dormitory raped him that night in 1982 – and the next, and the next. So began five hellish years of slave labour and near-daily assaults, years in which Choi saw men and women beaten to death, their bodies carted away like garbage.

1982년 그날 밤, 최 씨는 기숙사에서 한 직원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이후 다시, 그리고 또 다시 그렇게 당했다. 그렇게 해서 노예 노동과 거의 매일의 폭행에 시달렸던 지옥같은 5년의 세월이 시작됐고 최 씨는 폭행으로 사망하는 남녀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그들의 시체를 보았다.

Choi was one of thousands – the homeless, the drunk, but mostly children and the disabled – rounded up off the streets ahead of the 1988 Seoul Olympics, which the ruling dictators saw as international validation of South Korea’s arrival as a modern country.

최 씨는, 당시 정권을 잡은 독재자들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한국이 현대적 국가로서 국제적 검증을 받게 될 기회로 보고 그 개최에 앞서 거리에서 치워버린 수천 명의 노숙자, 취객, 그러나 대부분 어린이와 장애인들 중 한 명이었다.

An Associated Press investigation shows that the abuse of these so-called vagrants at Brothers, the largest of dozens of such facilities, was much more vicious and widespread than previously known, based on hundreds of exclusive documents and dozens of interviews with officials and former inmates.

단독으로 입수한 수백 건의 문서들, 그리고 수용시설 관계자 및 전 수감자들과의 수십 차례 인터뷰에 근거한 AP통신의 조사는, 이와 비슷한 수십 개의 수용시설 중 최대 규모인 형제복지원에서 소위 부랑자에 대한 학대는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잔학하고 광범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Yet nobody has been held accountable to date for the rapes and killings at the Brothers compound because of a cover-up orchestrated at the highest levels of government, the AP found.

그러나 정부 최고위급에서 사건이 조직적으로 은폐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아무도 형제복지원 수용시설 내의 성폭행과 살인에 대한 책임을 진 적이 없다.

Two early attempts to investigate were suppressed by senior officials who went on to thrive in high-profile jobs; one remains a senior adviser to the current ruling party. Products made using slave labour at Brothers were sent to Europe, Japan and possibly beyond, and the family that owned the institution continued to run welfare facilities and schools until just two years ago.

앞선 두 번의 수사 시도는 당시 정부 고위 관료들에 의해 좌절되었고 이들 관료들은 그 후 고위직으로 승승장구했으며, 한 명은 현 집권당의 상임고문으로 있다. 형제복지원에서 노예노역으로 만든 제품은 유럽과 일본, 그리고 아마 그 외 다른 나라들로 수출됐고 수용시설을 소유한 가족은 불과 2년 전까지 복지시설과 학교를 계속 운영했다.

Even as South Korea prepares for its second Olympics, in 2018, thousands of traumatized former inmates have still received no compensation, let alone public recognition or an apology. The few who now speak out want a new investigation.

대한민국 정부가 2018년 개최될 한국의 두 번째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아직까지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수천 명의 전 원생들은 여전히 공개적 인정이나 사과는커녕 보상조차 받지 못했다. 지금 목소리를 내는 몇몇 피해자들은 새로운 수사를 원한다.

Thousands of children and the disabled were rounded up off the streets (pictured) ahead of the 1988 Seoul Olympics and sent to camps such as the Brothers Home in Busan, South Korea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수천 명의 어린이와 장애인들이 거리에서 잡혀갔고(사진) 한국 부산 형제복지원과 같은 수용소로 보내졌다.

The current government, however, refuses to revisit the case, and is blocking a push by an opposition lawmaker to do so on the grounds that the evidence is too old.

그러나 현 정부는 사건의 재조사를 거부하며, 증거가 너무 오래됐다는 이유로 야당 의원의 재수사 요구를 막고 있다.

Ahn Jeong-tae, an official from Seoul’s Ministry of the Interior, said focusing on just one human rights incident would financially burden the government and set a bad precedent.

안정태 한국 행정자치부 과장은 하나의 인권유린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정부에 재정적으로 많은 부담을 주고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고 말했다.

The Brothers’ victims, he said, should have submitted their case to a temporary truth-finding commission established in the mid-2000s to investigate past atrocities. ‘We can’t make separate laws for every incident and there have been so many incidents since the Korean War,’ Ahn said.

안 과장은 또한, 형제복지원의 피해자들은 2000년대 중반에 과거의 잔혹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한시적 피해사건진상규명위원회에 사건을 제출했어야 했다며, ‘각 사건에 대해 별도의 법을 제정할 수는 없으며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Former inmates, however, cannot forget. One spent months standing quietly in front of the National Assembly with a signboard demanding justice. Choi has attempted suicide several times and now attends weekly therapy sessions.

그러나 피해 원생들은 잊지 못한다. 한 피해자는 몇 달 동안 국회 앞에서 정의를 요구하는 팻말을 들고 침묵의 일인시위를 벌였다. 최 씨는 수차례 자살시도를 했고 지금은 매주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The government has consistently tried to bury what happened. How do you fight that? If we spoke up, who would have heard us?’ he asked. ‘I am wailing, desperate to tell our story. Please listen to us.’

“정부는 당시 있었던 일을 지속적으로 은폐하려 시도해왔다. 어떻게 정부와 싸우겠는가? 만약 우리가 목소리를 내면 누가 들어줄까?”고 그는 묻는다. “나는 우리 이야기를 꼭 하고자 눈물로 호소한다. 제발 우리 말을 들어달라.”

Once an orphanage, Brothers Home at its peak had more than 20 factories churning out woodwork, metalwork, clothing, shoes and other goods made by mostly unpaid inmates.

한때 보육원이었던 형제복지원은 전성기에는 20개 이상의 공장을 운영하며 무급으로 원생들을 착취해 목재, 철재, 의류, 신발, 그리고 기타 제품을 제조했다.

The sprawling compound of concrete buildings rose above the southern port city of Busan, its inmates hidden from view by tall walls and kept there by guards who carried bats and patrolled with dogs.

남부 항구도시 부산에 여러 채의 콘크리트 건물로 세워진 형제복지원은 높은 담을 세워 외부의 시선을 차단했고 경비원들은 목봉과 경비견을 끌고 다니며 감시했다.

The horrors that happened behind those walls are inextricably linked to South Korea’s modern history.

담장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은 한국의 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The country at the time was still recovering from the near-total devastation of the 1950-53 Korean War, which followed nearly four decades of brutal Japanese colonization.

당시 한국은 40년에 가까운 일본의 식민지배에 이어 50-53년의 한국전쟁의 황폐함에서 아직 회복 중인 시기였다.

Once an orphanage, Brothers Home at its peak had more than 20 factories churning out woodwork, metalwork, clothing, shoes and other goods made by mostly unpaid inmates.
한때 보육원이었던 형제복지원은 전성기에는 20개 이상의 공장을 운영하며 무급으로 원생들을 착취해 목재, 철재, 의류, 신발, 그리고 기타 제품을 제조했다.

From the 1960s until the 1980s, before democracy, it was ruled by military dictators who focused overwhelmingly on improving the economy.

1960년대로부터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80년대까지 한국은 경제 발전에 지나칠 정도로 집중했던 군사독재자들이 지배했다.

In 1975, dictator President Park Chung-hee, father of current President Park Geun-hye, issued a directive to police and local officials to ‘purify’ city streets of vagrants.

1975년, 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은 거리에서 부랑자들을 없애고 ‘정화’시킬 것을 경찰과 지역 관료들에게 지시했다.

Police officers, assisted by shop owners, rounded up panhandlers, small-time street merchants selling gum and trinkets, the disabled, lost or unattended children, and dissidents, including a college student who’d been holding anti-government leaflets.

경찰은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걸인, 껌이나 잡동사니를 파는 잡상인, 장애인, 길을 잃었거나 혼자 있는 아이들, 그리고 반정부 유인물을 갖고 있던 대학생을 포함한 반체제인사들을 잡아들였다.

They ended up as prisoners at 36 nationwide facilities. By 1986, the number of inmates had jumped over five years from 8,600 to more than 16,000, according to government documents obtained by AP.

그들은 전국의 36개 수용 시설에 감금됐다. AP가 입수한 정부문서에 따르면, 1986년에는 수용 인원이 오년 전 8,600명에서 16,000명으로 급증했다.

Nearly 4,000 were at Brothers. But about 90 percent of them didn’t even meet the government’s definition of ‘vagrant’ and therefore shouldn’t have been confined there, former prosecutor Kim Yong Won told the AP, based on Brothers’ records and interviews compiled before government officials ended his investigation.

거의 4,000명이 형제복지원에 있었다. 하지만 그중 90% 정도는 정부가 정의한 “부랑자” 범주에 들지 않는, 그래서 그곳에 수용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전 검사 김용원 씨가, 형제원 기록과 또한 정부 관계자들이 수사를 중단시킬 때까지 자신이 행한 심문을 토대로 AP통신에 말했다.

The inner workings of Brothers are laid bare by former inmate Lee Chae-sik, who had extraordinary access as personal assistant to the man in charge of enforcing the rules. The AP independently verified many of the details provided by Lee, now 46, through government documents.

형제복지원에서 규율을 집행하던 인물의 보조로 일하며 내부를 접할 특별한 기회를 가졌던 이전 원생, 이채식 씨에 의해 형제복지원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운영됐는지가 밝혀졌다. AP통신은 정부문서 열람을 통해 이제 46세가 된 이 씨가 밝힌 다수의 세부 사항이 사실인지 독립적으로 검증했다.

Lee was sent to Brothers at 13 after trouble at school. His first job was in a medical ward. Twice a day, Lee and four others, none of whom had medical training, would try to care for patients, often dousing their open wounds with disinfectant or removing maggots with tweezers.

이 씨는 13살 때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켜 형제원에 보내졌다.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일은 의료반이었다. 의료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이 씨와 다른 네 명은 하루에 두 번씩, 살균제를 상처에 바르거나 족집게로 구더기를 집어내는 식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People screamed in pain, but we couldn’t do much,’ Lee said. ‘It was a hell within a hell. The patients had been left there to die.’

‘환자들은 아파서 비명을 질렀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며 이 씨는 “그건 지옥 안의 지옥이었다. 환자들은 그냥 죽게 방치됐다”고 말했다.

Stronger inmates raped and beat the weak and stole their food, he said. Lee attempted suicide after a guard at the medical ward raped him.

힘이 센 원생들은 힘이 약한 자들을 강간하고 때리고 음식을 빼앗았다고 그가 말했다. 의료실의 경비원에게 강간을 당한 후 이 씨는 자살을 시도했다.

A year later, he was made personal assistant to chief enforcer Kim Kwang-seok, who like other guards at Brothers was an inmate raised to power by the owner because of his loyalty. Many former inmates remember Kim as the facility’s most feared man. The AP tried repeatedly to track Kim down but could not find him.

1년 후 이 씨는 경비대장 김광석의 보조로 일하게 되는데, 김광석은 형제원의 다른 경비원들과 마찬가지로 원생으로 들어왔다가 원장에게 충성심을 보여 권력을 쥐게 된 사람이었다. 많은 원생은 그를 수용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으로 기억한다. AP통신은 김 씨의 행방을 여러 차례 추적했으나 알아낼 수 없었다.

Adults worked on construction jobs, both at Brothers and off-site. Children sometimes hauled dirt and built walls, but mostly they assembled ballpoint pens and fishing hooks
성인들은 형제원 안팎에서 건설일을 했다. 아이들은 흙을 나르고 담을 쌓는 일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볼펜이나 낚싯바늘을 조립하는 일을 했다.

Lee said he was present when Kim, a short, stocky man with sunburned skin, led near-daily, often fatal beatings at the compound’s ‘corrections room.’ Lee accompanied Kim as he compiled a twice-a-day tally of the sick and dead for the owner; four or five daily deaths were often on the list.

이 씨는 작고 다부진 체격에 햇볕에 그을은 김 씨가 거의 매일 수용소의 “교화실”에서 원생을 죽도록 두들겨 팰 때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씨는 김 씨가 하루에 두 번씩 원장에게 환자와 사망자 수를 보고하러 갈 때 그와 함께 갔다; 매일 4-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곤 했다.

A scene recounted by Lee provides a first hand account of the efficient, almost casually evil way the facility worked.

이 씨가 묘사하는 장면은 이 수용소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그리고 거의 일상적으로 악랄하게 운영되었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One morning, Kim approached owner Park In-keun on his daily jog to report that yet another inmate had been beaten to death the night before. The boy heard Park order Kim to bury the body in the hills behind the compound’s walls.

어느 날 아침, 김 씨는 전날 밤 또 한 명의 원생이 구타로 숨졌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해 조깅을 하고 있던 원장 박인근에게 다가갔다. 이 씨는 박 원장이 시체를 담장 바깥쪽 언덕에 묻으라고 지시하는 것을 들었다.

The violence at Brothers happened in the shadow of a massive money-making operation partly based on slave labour.

형제복지원에서의 폭력은 일정 부분 노예노역에 의존한 대규모 돈벌이 작업의 비호하에 일어났다.

The factories were ostensibly meant to train inmates for future jobs. But by the end of 1986, Brothers saw a profit from 11 of them, according to Busan city government documents obtained exclusively by the AP.

공장들은 표면적으로는 원생들의 직업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AP통신이 부산시로부터 단독으로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1986년 말까지 형제복지원은 그들 중 11개의 공장으로부터 이윤을 남겼다.

The documents show that Brothers should have paid the current equivalent of $1.7million to more than 1,000 inmates for their dawn-to-dusk work over an unspecified period.

문건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은 확인되지 않은 기간 동안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노동을 한 데 대해 1,000명 이상의 원생에게 현 시세로 170만 달러를 지급했어야 했다.

However, facility records and interviews with inmates at the time suggest that, instead, most of the nearly 4,000 people at Brothers were subject to forced labour without pay, according to prosecutor Kim.

그러나 김 검사에 따르면 시설 기록과 당시 원생과의 인터뷰 결과 거의 4,000명에 이르는 원생들이 무임금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Another probe at the time, quickly scrapped by the government, showed that ‘nearly none’ of about 100 inmates interviewed received payment. None of 20 former inmates interviewed by the AP received money while at Brothers either, though three got small payments later.

당시의 또 다른 조사는 -정부에 의해 신속하게 폐지되긴 했지만- 인터뷰를 한 100명가량의 원생 중 ‘거의 아무도’ 돈을 받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AP통신이 인터뷰한 20명의 이전 원생들 중 누구도 형제복지원 수용기간 동안 돈을 받지 못했으나, 그중 세 명은 후에 약간의 돈을 지급받았다.

Adults worked on construction jobs, both at Brothers and off-site. Children sometimes hauled dirt and built walls, but mostly they assembled ballpoint pens and fishing hooks.

성인들은 형제복지원 안팎의 건설일에 투입됐다. 아동들은 때로 흙을 나르거나 담쌓는 일을 했으나 대부분은 볼펜과 낚싯바늘을 조립했다.

Choi Seung-woo (left) and Lee Chae-sik (right) talk as they examine what they say was a water tank left from the Brothers Home, a mountainside institution where some of the worst human rights atrocities in modern South Korean history took place, in Busan, South Korea
최승우(왼쪽) 씨와 이채식(오른쪽) 씨가 형제복지원 왼쪽 물탱크가 있던 자리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 부산 산 중턱에 위치한 형제복지원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최악의 인권침해가 자행됐던 곳이다.

Some products were tied to other countries. For example, dress shirts made at Brothers’ sewing factory were sent to Europe and inmates were trained by employees at Daewoo, a major clothing exporter during the 1980s to the United States and other markets, according to the owner’s autobiography.

몇 가지 상품은 다른 나라와 연계돼 있었다. 예를 들어 박인근 소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내 재봉공장에서 만든 와이셔츠는 유럽으로 보내졌으며, 1980년대 미국이나 다른 주요 시장에 의류를 수출하던 주요 회사인 대우의 직원들이 원생들을 교육시켰다.

Park, the owner, said officials from Daewoo had toured the facility before offering a partnership. Daewoo International spokesman Kim Jin-ho said it was impossible to confirm such details because of a lack of records from the time.

소유주인 박 씨는 파트너쉽을 제안하기 전에 대우 간부들이 공장시설을 둘러봤다고 회고했다. 대우 인터내셔널의 김진호 대변인은 당시 기록이 없어 이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Inmates during the 1970s recounted spending long hours tying fishing lines to hooks for packages with Japanese writing on them, for export to Japan.

1970년대 수용됐던 원생들은 일본 수출용으로 포장에 일본어가 적힌 상품에서 낚싯줄을 후크에 매는 작업에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Kim Hee-gon, an inmate at Brothers for eight years, said he and his colleagues were beaten severely in the early 1970s after thousands of such packages shipped to Japan were returned because they were faulty or missing hooks.

형제복지원에 8년 동안 수용돼 있었던 김희곤 씨는 1970년대 초 일본에 보낸 상품 중 하자가 발견됐거나 후크가 빠져 있어 수천 개가 반품되자 그와 동료들이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했다.

Park Gyeong-bo, who was confined at Brothers from 1975 to 1980, remembered sneaker bottoms produced with the logo of Kukje Sangsa, a now-defunct company that manufactured shoes for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in the 1970s and 80s.

1975년부터 1980년까지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박경호 씨는 1970년대에서 80년대 사이 미국과 유럽에 신발을 제조 수출했던, 지금은 없어진 국제상사의 로고가 붙은 운동화 밑창을 기억했다.

The operation thrived because everybody benefited, except the inmates.

원생들은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익을 얻었기에 이 일은 번창했다.

Local officials needed somewhere to put the vagrants they were charged with corralling, so each year they renewed a contract with Brothers that required an inspection of how the inmates were treated and of how the facility was financially managed.

지방 관료들은 부랑자들을 수용할 수용시설이 필요했고, 따라서 이들은 매년 형제복지원과의 계약을 갱신했고, 이를 위해 원생들이 어떤 처우를 받는지, 복지원의 재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해 복지원을 감사할 필요가 있었다.

Brothers got government subsidies based on its number of inmates, so it pushed police to round up more vagrants, the early probe found. And police officers were often promoted depending on how many vagrants they picked up.

형제복지원은 원생 숫자에 따라 정부 보조금을 지급받았으므로 더 많은 원생을 붙들어오도록 복지원이 경찰을 압박했음을 초기 조사는 밝혀냈다. 그리고 경찰관은 얼마나 많은 부랑인들을 잡아들였냐에 따라 승진을 하곤 했다.

Two Busan city officials would say only that the facts are difficult to confirm now because the facility closed three decades ago. Heo Gwi-yong, a spokesman for the Busan Metropolitan Police Agency, said he couldn’t confirm any details for the same reason.

두 명의 부산시 관계자는 형제복지원이 30년 전 폐쇄됐기에 이 같은 사실들을 확인해주기 어렵다는 말만 했다. 부산경찰청 허귀영 대변인도 같은 이유를 들어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The owner of Brothers, Park, received two state medals for social welfare achievements and sat on a government advisory panel. His version of his story even inspired a 1985 television drama about a man’s heroic devotion to caring for what were called ‘bottom-life people.’

소유주 박 씨는 사회복지 공로를 인정받아 두 개의 국가훈장을 수여 받고 정부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그리고 그의 자전적인 스토리는 ‘밑바닥 인생’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영웅적인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1985년의 텔레비전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졌다.

Brothers Home owner Park In-keun (right) shakes hands with former South Korean dictator Chun Doo-hwan.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오른쪽)이 한국 전 독재자 전두환과 악수하고 있다.

Park eventually served a short prison stint for embezzlement and other relatively minor charges, but not for the abuse at Brothers. When the facility was at last raided in 1987, investigators found a vault in Park’s office filled with the current equivalent of about $5 million in U.S. and Japanese currencies and certificates of deposit.

박 씨는 횡령 혐의 및 비교적 가벼운 다른 혐의로 짧은 기간 옥살이를 했지만 형제복지원에서의 가혹 행위로 처벌받은 적은 없다. 마침내 1987년 수사관들이 형제복지원을 압수수색했을 때, 수사관들은 박 원장의 사무실에 있는 저장고에서 현시세로 500만 달러에 이르는 미화 및 일본 화폐, 그리고 예금증서들을 발견했다.

In his autobiography, in court hearings and in talks with close associates, Park has denied wrongdoing and maintained that he simply followed government orders. Repeated attempts to contact him through family, friends and activists were unsuccessful.

박 씨는 자서전과 법원 청문회,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잘못을 부인했고, 자신은 정부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가족, 친구, 활동가들을 통해 그를 접촉하고자 계속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The AP, however, tracked down the former second-highest management official at Brothers, Lim Young-soon, who bristled in a telephone interview at descriptions of corruption, violence and slavery at the facility.

그러나 AP통신은 형제복지원에서 2인자로 불렸던 임용순을 찾아냈고,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형제복지원이 부패, 폭력, 노예노동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것에 분개했다.

Lim, a Protestant pastor now in Australia who is the brother of Park’s wife, said Park was a ‘devoted’ social worker who made Busan better by cleaning its streets of troublemakers. He said Brothers’ closure ‘damaged national interests.’

박 원장의 처남이며 호주에서 목사로 활동 중인 임 씨는 박 원장이 거리의 말썽꾼들을 없애 부산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 ‘헌신적인’ 사회사업가라고 주장했다. 임 씨는 또 형제복지원 폐쇄가 ‘국익을 해쳤다’고 주장했다.

Lim acknowledged beating deaths at Brothers, but said they were caused by clashes between inmates. He attributed the facility’s high death toll to the many inmates he said arrived there in poor physical and mental health.

임 씨는 형제복지원 내에서 구타사망 사건이 있었음은 인정했지만 이는 원생끼리의 싸움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복지원의 높은 사망률은 원생들 다수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 상태가 나쁜 상태로 복지원에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These were people who would have died in the streets anyway,’ Lim said.

임 씨는 ‘그 사람들은 거리에서 죽었을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On his second day at Brothers, still dazed from his brutal rape the night before, Choi waited with other children to be stripped and washed.

형제복지원 입소 둘째 날, 최 씨는 전날 잔혹한 강간으로 여전히 멍한 상태에서 다른 원생들과 함께 옷이 벗겨지고 씻겨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He said he watched a guard drag a woman by her hair and then beat her with a club until blood flowed from her head.

그는 경비원이 한 여성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간 다음 머리에 피가 날 때까지 곤봉으로 때리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I just stood there, trembling like a leaf,’ Choi, 46, said. ‘I couldn’t even scream when the platoon leader later raped me again.’

46세인 최 씨는 “난 그저 거기에 서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소대장이 그날 오후 다시 날 강간할 때도 난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고 말했다.

Ex-inmates Choi and Lee Chae-sik stood on a concrete-covered former water reservoir that they think is the only remaining physical trace of Brothers
형제복지원 원생이었던 최 씨와 이채식 씨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형제복지원 건물의 흔적이라고 여기는 콘크리트로 덮힌 옛 배수지 위에 서 있다.

Another time, Choi recalled, he saw seven guards knock down a screaming man, cover him with a blue blanket and stomp and beat him. Blood seeped through the blanket. When it fell away, the dead man’s eyes had rolled back into his head.

또 한 번은 7명의 경비원들이 소리를 지르는 한 남성을 쓰러뜨려 그에게 파란 담요를 씌우고 발로 짓밟고 때리는 것을 봤다고 최 씨는 회상했다. 피가 담요 밖으로 스며 나왔다. 담요가 벗겨지자 죽은 남성의 눈이 뒤집혀져 있었다.

Death tallies compiled by the facility claimed 513 people died between 1975 and 1986; the real toll was almost certainly higher. Prosecutor Kim interviewed multiple inmates who said facility officials refused to send people to hospitals until they were nearly dead for fear of escape.

형제복지원이 제공한 사망자합계에 따르면 1975년과 1986년 사이에 513명이 사망했다고 하지만 실제 사망자 수는 더 높았을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김 검사는 형제복지원 간부들이 탈출에 대한 우려 때문에 거의 사망에 이르게 될 때까지 사람들을 병원에 보내지 않았다고 말한 다수의 원생들을 인터뷰했다.

‘The facility was Park’s kingdom, and violence was how he ruled,’ Kim said of the owner. ‘When you are confined to a place where people are getting beaten to death every day, you aren’t likely to complain too much about forced labor, abuse or getting raped.’

‘형제복지원은 박인근의 왕국이었고 폭력은 그의 통치 방법이었다’고 김 검사는 형제원 소유주에 대해 말했다. ‘사람이 매일 맞아 죽어 나가는 곳에 갇혀 있다면, 강제노동, 학대 또는 강간에 대해 특별히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Most of the new arrivals at Brothers were in relatively good health, government documents show. Yet at least 15 inmates were dead within just a month of arrival in 1985, and 22 in 1986.

형제복지원에 들어오는 새 입소생들 대부분은 비교적 건강했다고 정부 문서는 말한다. 그러나 1985년에 최소 15명, 그리고 1986년에 22명이 입소한 지 겨우 한 달 내에 사망했다.

Of the more than 180 documented deaths at Brothers in 1985 and 1986, 55 of the death certificates were issued by a single doctor, Chung Myung-kuk, according to internal facility documents, interviews and records compiled by Kim. Chung, now dead, mostly listed the cause of death as ‘heart failure’ and ‘general weakness.’

김 검사가 제공한 형제복지원 내부 문서와 인터뷰,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1985년과 1986년 사이에 형제복지원의 180건의 사망기록 중 55건의 사망증명서가 정명국이라는 한 명의 의사로부터 발급됐다. 이미 사망한 정 씨는 사인을 대부분 ‘심부전’과 ‘쇠약’으로 적었다.

Life at Brothers began before dawn, as inmates washed and got ready for mandatory 5:30am prayers, transmitted by loudspeaker from the facility’s Presbyterian church. After a morning run, they ate breakfast and then headed to factories or construction sites.

형제복지원의 생활은 해뜨기 전에 시작되어 원생들은 세안 후 5시 30분 대형 확성기를 통해 전해지는 형제복지원 장로교회의 의무적인 예배에 참여했다. 아침 달리기 후, 원생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공장이나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When city officials, foreign missionaries or aid workers visited, a select group of healthy inmates worked for hours to prepare a sanitized version of Brothers for the guests. Guards locked everyone else in their dormitories. Choi said inmates watched hopelessly as these clueless do-gooders trooped through.

공무원이나 해외 선교사들 또는 구호자들의 방문이 있을 때에는 선택된 일련의 건강한 원생들이 손님들을 위해 형제복지원을 깨끗하게 치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경비원들은 나머지 원생들을 기숙사에 가뒀다. 최 씨는 원생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 자선가들이 지나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봤다고 말했다.

On his second day at Brothers, still dazed from his brutal rape the night before, Choi waited with other children to be stripped and washed
형제복지원에서의 둘째 날, 전날 밤의 끔찍한 강간 때문에 여전히 멍한 상태였던 최 씨는 발가벗겨져 씻겨지기 위해 다른 아이들과 기다렸다.

On one occasion, Choi (left) recalled, he saw seven guards knock down a screaming man, cover him with a blue blanket and stomp and beat him
한번은 7명의 경비원들이 소리를 지르는 한 남성을 쓰러뜨려 그에게 파란 담요를 씌우고 발로 짓밟고 때리는 것을 봤다고 최 씨(왼쪽)는 회상했다.

‘We were trapped in a prison. But who could help us? No one,’ Choi said.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누가 우리를 도울 수 있었겠나? 아무도 할 수 없었다’고 최 씨는 말했다.

Once the doors were locked at 6pm, Choi said, the guards unleashed ‘uncontrolled violence’ upon the 60 to 100 kids in his dormitory, including frequent rapes.

최 씨는 일단 6시에 문이 일단 잠기면 경비원들이 자신의 기숙사에 있던 60명에서 100명에 이르는 아이들에게 잦은 강간을 포함하여 ‘통제 불능의 폭력’을 자행했다고 말했다.

A principal at a Busan school who once taught at Brothers acknowledged that inmates were held against their will, and even called the facility a massive concentration camp.

형제복지원에서 가르친 적이 있는 부산에 있는 한 학교의 교장은 원생들이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붙잡혀 있었다고 인정했으며 심지어 형제복지원을 대형 집단수용소라고도 불렀다.

However, the principal, who spoke on condition of anonymity because he was worried about his reputation, staunchly defended its practices.

그러나 자신의 평판에 대한 우려에서 익명의 조건으로 말한 그 교장은 형제복지원의 운영 방식을 단호하게 옹호했다.

He said severe violence and military-style discipline were the only ways to run a place filled with thousands of unruly people who didn’t want to be there.

그는 무자비한 폭력과 군대식의 규율만이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아 했던 수천 명의 제멋대로인 사람들로 가득한 형제복지원을 운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Park Sun-yi, who had been snatched by police at age nine from a Busan train station in 1980, was one of the few to escape.

1980년 부산 기차역에서 9살의 나이에 경찰에게 끌려온 박선이 씨는 몇몇 탈출자 중 한 명이었다.

She had watched as the guards reserved their most ruthless beatings, the kind where inmates sometimes didn’t recover, for those who tried to run. But after five years, she said, she became ‘consumed with the thought that my life might be like this forever and that I might die here.’

박 씨는 경비원들이 도망치려는 원생들에게 가하는 가장 무지막지한 폭력을(그것은 원생들이 때로는 회복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지켜봤다. 그러나 5년이 지나자 박 씨는 ‘내 인생은 영원히 이런 식이다가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됐다고 말했다.

She and five other girls used a broken saw from the ironwork factory to file away bars on a second-floor window at night, little by little, reattaching them with gum each morning. At last, they squeezed themselves out, scaled a wall embedded with broken glass and fled into the hills.

박 씨와 다른 5명의 소녀들은 철 작업 공장에서 가져온 망가진 톱을 사용, 밤에 조금씩 2층 창문의 빗장을 잘랐고 매일 아침 껌으로 그 빗장을 다시 붙였다. 마침내, 그들은 좁은 창문으로 가까스로 나와 깨진 유리가 박힌 담장을 넘어 언덕으로 도망쳤다.

When she finally walked through the door of her family home in Munsan, she said, her father fainted.

박 씨가 마침내 문산에 있는 그녀의 집 문으로 들어서자 박 씨의 아버지는 까무러쳤다고 그녀는 말했다.

While pheasant hunting, Kim, then a newly appointed prosecutor in the city of Ulsan, heard from his guide about men with wooden bats and large dogs guarding bedraggled prisoners on a nearby mountain.

당시 울산에서 막 검사로 임명된 김 씨는 꿩을 사냥하던 중에 자신의 안내원으로부터 근처에 있는 산에서 나무 곤봉과 큰 개들을 데리고 후줄그레한 죄수들을 감시 중인 남자들에 대해 듣게 됐다.

When they drove there, the men said they were building a ranch for the owner of the Brothers Home in nearby Busan. Kim knew immediately, he said, that he’d stumbled onto ‘a very serious crime.’

김 검사와 안내원이 그곳으로 갔을 때 그 남성들은 자신들이 근처 부산에 있는 형제복지원의 소유주를 위해 목장을 짓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김 검사는 즉시 자신이 ‘매우 심각한 범죄’와 맞닥뜨렸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Former inmate Lee Chae-sik (pictured) walks up a hill behind a row of apartments at the former location of the Brothers Home – an area where he says bodies were buried
전 형제복지원 원생 이채식(사진속) 씨가 전 형제복지원 자리에 줄줄이 들어선 아파트 뒤 언덕에 오르고 있다- 이 씨는 이곳에 시신들이 묻혔다고 말한다.

Choi said that on one occasion, guards unleashed ‘uncontrolled violence’ upon the 60 to 100 kids in his dormitory. Residents exercise at a school near an apartment complex at the former location of the Brothers Home
최 씨는 한 번은 경비원들이 기숙사에 있는 60-100명에 달하는 아이들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휘둘렀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 근처 학교에서 주민들이 운동하고 있다.

On a frigid January evening in 1987, Kim led 10 policemen in a surprise raid past the facility’s high walls, imposing steel gates and gape-mouthed guards. Inside, he found battered and malnourished inmates locked in overcrowded dormitories. The inmates gave the unexpected visitors crisp, military-style salutes.

1987년 1월의 몹시 추었던 어느 저녁 김 검사는 10명의 경찰을 이끌고 형제복지원의 높은 담장과 무시무시한 철문, 그리고 깜짝 놀라 입이 벌어진 경비원들을 통과해 기습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다. 내부에서 그는 얻어맞고 영양실조에 걸린 수용자들이 초만원의 기숙사에 감금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원생들은 예상치 못한 방문자들에게 딱딱한 군대식 인사를 했다.

‘I remember thinking, “This isn’t a welfare facility; it’s a concentration camp,”‘ Kim, now 61 and a managing partner at a Seoul law firm, said. People lay coughing and moaning in a squalid sick ward, ‘just waiting to die.’

‘나는 “여기는 복지시설이 아니라 강제수용소다”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서울에 있는 한 법무법인의 경영 파트너인 전직 검사 김 씨(현재 61세)는 말했다. 사람들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면서’ 불결한 병동에서 기침하고 신음하며 누워 있었다.

After the owner was arrested, he demanded a meeting with Kim’s boss, the chief Busan prosecutor, who then supervised Ulsan.

체포되고 난 뒤 복지원 원장은 김 검사의 상사로서 당시 울산을 담당했던 부산지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A day later, Busan Mayor Kim Joo-ho, who died in 2014, called Kim to plead for Park’s release. Kim said he politely declined and hung up.

그 다음 날 2014년에 사망한 김주호 부산시장이 김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박 원장을 풀어주라고 간청했다. 김 검사는 공손하게 이를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말했다.

At every turn, Kim said, high-ranking officials blocked his investigation, in part out of fear of an embarrassing international incident on the eve of the Olympics.

부분적으로는 88올림픽 직전에 수치스러운 국제적 사건이 터지는 것을 두려워해서 고위 관리들이 그의 조사를 매번 막았다고 김 검사는 말했다.

President Chun Doo-hwan, who took power in a coup after Park Chung-hee was assassinated, didn’t need another scandal as he tried to fend off huge pro-democracy protests.

박정희가 암살당한 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은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막아내기도 바빠 다른 추문을 상대할 겨를이 없었다.

Internal prosecution records reveal several instances where Kim noted intense pressure from Chun’s office to curb his probe and push for lighter punishment for the owner. Kim had to reassure presidential officials directly and regularly that his investigation wouldn’t expand.

검찰 내부 수사기록물은, 김 검사가 수차례에 걸쳐 수사를 축소하고 복지원 소유주에 가벼운 처벌을 내리라는 심한 압박을 청와대로부터 받았음을 보여준다. 김 검사는 수사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을 것임을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알려 안심시켜야 했다.

Park Hee-tae, then Busan’s head prosecutor and later the nation’s justice minister, relentlessly pushed to reduce the scope of the investigation, Kim said, including forcing him to stop his efforts to interview every inmate at Brothers.

당시 부산지검 부장검사이자 후에 법무장관을 지낸 박희태는 김 검사가 형제복지원의 모든 원생들을 인터뷰하려는 것을 강제로 중단시킨 것을 포함해 수사범위를 축소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김 검사는 말했다.

Park, a senior adviser to the current ruling party, has repeatedly denied AP interview requests. His personal secretary said Park can’t remember details about the investigation.

현 집권당인 새누리당의 상임고문인 박희태는 AP통신과의 인터뷰 요청을 수차례 거부했다. 그의 비서관은 박희태가 수사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A prosecutor collected bank records and financial transactions indicating that, in 1985 and 1986 alone, the owner of Brothers embezzled what would be the current equivalent of more than $3million. Choi Seung-woo examines a lock on what he says was a water tank left from the Brothers Home
한 검사는 형제복지원의 소유주가 1985년과 1986년에만 현재 가치로 3백만 달러 이상을 횡령한 은행거래 내역과 자금이체 내역을 밝혀냈다. 최승우 씨가 형제복지원에서 사용했던 수조라고 말하며 그 자물쇠를 살펴보고 있다.

Despite interference, Kim eventually collected bank records and financial transactions indicating that, in 1985 and 1986 alone, the owner of Brothers embezzled what would be the current equivalent of more than $3million.

그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김 검사는 형제복지원의 소유주가 1985년과 1986년에만도 현시세 3백만 달러에 맞먹는 금액을 횡령했음을 보여주는 은행거래내역서와 금융이체내역서를 찾아냈다.

That came from about $10million of government subsidies meant to feed and clothe the inmates and maintain the facilities.

이 돈은 원생들을 먹이고 입히며 수용소를 관리하도록 정부가 제공한 1천만 달러의 정부보조금의 일부였다.

However, Kim said, the chief Busan prosecutor forced Kim to list the embezzlement as nearly half the amount he had actually found so that a life sentence couldn’t be pursued under the law at the time.

그러나 김 검사는 현행법에 따라 무기징역을 피하도록 자신이 실제 찾아낸 액수의 거의 절반만 횡령으로 기입하도록 부산 지검장이 자신에게 강요했다고 말했다.

Kim said his bosses also prevented him from charging the owner, Park, or anyone else for the suspected widespread abuse at the Brothers compound, and limited the prosecutor to pursuing much narrower abuse linked to the construction site Kim found while hunting.

김 검사는 소유주 박 씨나 그 누구도 형제복지원에 만연했던 인권유린의 혐의로 기소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상사들이 자신을 막았고, 이 혐의를 자신이 사냥 중 직접 목도한 건설 현장과 관련시켜 훨씬 축소하도록 제한했다고 말했다.

Kim demanded a 15-year prison term for Park. After a lengthy battle, the Supreme Court in 1989 gave Park 2 years in prison for embezzlement and violations of construction, grassland management and foreign currency laws.

김 검사는 박 씨에게 15년 징역형을 구형했다. 긴 법정 공방이 있은 후 1989년 대법원은 박 씨에게 횡령과 건축법, 초지 관리법과 외환법 위반으로 2년 징역형을 확정했다.

He was acquitted of charges linked to off-site abuse. Only two guards received prison terms, one for 1 years and another for eight months.

그는 수용소 밖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무죄선고를 받았다. 두 명의 경비원만이, 한 명은 1년, 다른 한 명은 8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After prison, Park continued to earn money from welfare facilities and land sales. The Brothers site was purchased in 2001 by a construction company for what would now be about $27million, according to a copy of the land sale shown to the AP.

출소 후에 박 씨는 복지시설과 부동산 부지 매매로 계속 돈을 벌었다. AP통신이 받은 토지거래 내역서를 보면 형제복지원 부지는 2001년 현시세 2천7백만 달러에 건설회사에 매각됐다.

One of Park’s daughters operated a school for troubled kids that closed in 2013. His family in 2014 sold a home for the severely disabled.

박 씨의 딸 중 한 명은 문제 아동을 위한 학교를 운영했다가 2013년에 문을 닫았다. 2014년에 그의 가족은 중증장애인 수용시설을 매각했다.

Kim Yong Won, the former prosecutor who was in charge of the Brothers Home case, speaks during an interview at his office in Seoul
형제복지원 사건을 담당했던 전 검사 김용원 씨가 서울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 말하고 있다.

It finally closed its gates in 1988. In the 1990s, construction labourers dug up about 100 human bones on the patch of mountain just outside where it stood, according to one of the workers who found the bones, Lee Jin-seob.

1988년 형제복지원은 마침내 문을 닫았다. 1990년대에 건설 노동자들이 땅을 파다가 시설이 있던 곳에서 머지않은 산 쪽에서 100구가량의 시신을 찾았다고 시신들을 발견한 노동자 중 한 명인 이진섭 씨가 말했다.

Blankets covering the bones and the lack of burial mounds made Lee think they’d been buried informally and quickly. It’s unclear what happened to the remains.

뼈가 담요에 싸여 있거나 봉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비공식적으로 재빨리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이 씨는 생각했다. 시신 잔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On a recent trip to the site, which is now covered with tall apartment buildings, ex-inmates Choi and Lee Chae-sik stood on a concrete-covered former water reservoir that they think is the only remaining physical trace of Brothers. Both recalled the sight of guards carrying corpses into the woods.

지금은 높은 아파트가 들어선 그 현장을 최근 방문한 전 원생 최 씨와 이채식 씨가 형제복지원에서 유일하게 남은 흔적이라고 말하며 콘크리트로 덮인 예전 수조 위에 서 있다. 두 사람 모두 경비원들이 시신을 숲으로 나르는 것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There could be hundreds of bodies still out there,’ Lee said, pointing toward the steep slopes.

‘아직 저곳에 수백 구의 시신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파른 경사지를 가리키면서 이 씨는 말했다.

Inmates released from the facility ended up homeless and in shelters and mental institutions; many struggle with alcoholism, depression, rage, shame and poverty.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원생들은 결국에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보호소와 정신병원에서 들어갔고, 많은 이들이 알코올중독과 우울증, 분노, 수치 및 빈곤과 싸우고 있다.

Choi, whose back is covered by a large tattoo from his time in a gang after he left Brothers, was imprisoned for assaulting a policeman.

형제복지원을 떠난 후 범죄조직에서 지내던 시절, 등에 큰 문신을 새긴 최 씨는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The few former inmates who have begun speaking out want justice: an apology and an admission that officials encouraged police to kidnap and lock away people who shouldn’t have been confined.

목소리를 내어 말하기 시작한 몇 명의 제소자들은 정의를 원한다. 이들은 사과를 받고자 하며 정부 관료들이 경찰을 시켜 구금해서는 안 될 사람들을 납치하고 가두도록 부추긴 사실을 인정하기를 원한다.

‘How can we ever forget the pain from the beatings, the dead bodies, the backbreaking labor, the fear … all the bad memories,’ Lee, who now manages a lakeside motel, said. ‘It will haunt us until we die.’

현재는 호수가 근처에서 모텔을 관리하고 있는 이 씨는 ‘구타, 사체들, 뼈 빠지는 중노동, 공포…그 모든 나쁜 기억들로부터의 고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며 ‘죽을 때까지 그 고통은 우리를 계속 괴롭힐 것이다’라고 말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9&table=c_sangchu&uid=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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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수용, “미 군사연습 중단하면 핵실험 중단”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6/04/25 07:18
  • 수정일
    2016/04/25 07:18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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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4.24  10: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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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수용 외무상이 23일(현지시간)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에서 AP통신과 인터뷰 했다. [AP통신 기사 캡쳐]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전쟁 연습을 중단하라. 그러면, 우리도 핵실험을 중단할 것이다.”

북한이 5차 핵실험을 준비 중인 징후가 포착된 가운데, 뉴욕을 방문 중인 리수용 북한 외무상이 23일(현지시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 대결의 경로를 계속 간다면, 두 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도 매우 파국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며 이같이 제안했다. 

북한이 지난해 1월 공식 제안했으나 미국으로부터 퇴짜 맞은 ‘연합군사연습-핵실험 연계 제안’을 거듭 꺼내든 것이다. 

리 외무상은 한.미연합군사연습이 “상당 기간, 수 년 동안” 중단된다면, “두 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도 새로운 기회가 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캐티나 애덤스(Katina Adams) 미국 국무부 동아태국 대변인은 "이러한 군사연습들은 한미동맹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보여주고, 전투 준비와 적응성, 동맹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리 외무상의 요구를 에둘러 거부한 셈이다.

애덤스 대변인은 “우리는 북한이 지역 내에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언행을 자제하고, 국제 의무와 약속을 이행하는 구체적 조치에 초점을 맞추기를 거듭 촉구한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협상에 앞서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북한과 미국이 각자 제 갈 길을 가며, 명분쌓기를 하는 모양새다. 

리 외무상은 제재는 북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정말 제재로 우리는 좌절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전적으로 실수하는 것”이라며 “그들의 압력이 더 강해질수록, 우리도 그에 맞서 더 강하게 반응할 것”이라고 했다.

<AP통신>에 따르면, 미국이 북한을 자신의 안보와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이라고 말하는 데 대해, 리 외무상은 “우리와 같이 작은 나라는 미국이나 세계에 위협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가 미국과 미국 정부를 향해 한반도에서 더 이상 군사연습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런데 미국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나라가 단 하나도 없다”고 했다. 

나아가 “이들 대국들은 우리더러 조용히 있으라고 말한다”며, “우리에게 있어 이 말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주권을 포기하라는 선고와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국들'은 중국과 러시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AP통신>은 이날 인터뷰가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에서 이뤄졌다고 전했다. 북한은 이 인터뷰 수 시간 전에 동해상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를 단행했다. 24일자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대성공”이라고 자축했으나, 한국 합참은 “실패”라고 평가했다.

(추가,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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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여론조사 제도 국민 수준에 못 미처…국민 알권리 제한 없애야”

 

[이영광의 발로GO 인터뷰 51]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이영광 기자  |  kwang3830@hanmail.net
 

20대 총선 투표 결과가 나오기 전 새누리당의 과반을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새누리당에서 선거 막판 과반이 위험하다고 했을 때에도 대부분은 엄살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야권이 분열한 상태였고 여론조사 결과 또한 새누리당에 유리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더불어민주당이 123석으로 원내 1당을 거머쥐었고 새누리당은 그보다 1석이 적은 122석을 얻어 원내 2당이 되었다. 이 때문에 기존 여론조사에 대한 불신과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이 때문에 총석 직후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빗나간 여론조사 결과와 관련 사과문을 올리기도 했다.

지난 19일 이택수 대표를 리얼미터 사무실에서 만나 사과문을 올린 이유와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여론조사의 문제점과 개선책 등을 짚어보았다. 다음은 이 대표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했다.

   
▲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

“여론조사 오차 줄이려면 휴대전화 조사 병행돼야”

- 총선 결과가 여론조사와 큰 차이를 보여 비판이 일자 이 대표께서는 페이스북에 사과문까지 올렸던데.

“선거 전에 페이스북에 총선 관련된 의석 범위 예측치를 먼저 올렸어요. 그런데 선거 후 개표결과와 많이 차이가 나서 페이스북 친구들이나 팔로워들에게 그것에 대해 사과를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고, 왜 차이가 났는지 이유를 설명을 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대통령 선거처럼 전국 단위의 조사는 휴대전화를 사용해요. 그러나,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에서 기초단체장 선거 등 소지역 단위 선거의 경우에는 유선전화밖에 못 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에요.

사실 페이스북에 올릴 때는 기사화될 것을 생각하지는 못했어요. 왜냐면 기사화가 되길 바랬다면 팔로워가 많은 트위터에 올렸을 거예요. 아무래도 트위터는 팔로워 외에도 불특정 다수가 보잖아요. 하지만 페이스북은 평상시 아는 분들하고만 친구 관계를 맺어서 친구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 개인적인 의견을 올린 건데, 페친들 중에 기자들이 있다 보니, 그게 기사화된 거죠.”

- 반응은 어땠나요?

“반응은 바로 오더라고요. 처음에는 여론조사 업계에서 유일하게 사과했다는 것 자체가 큰 주목을 받은 것 같아요. 제가 한국정치조사협회에서 상임이사를 맡고 있지만, 협회를 대표해서 얘기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리얼미터 대표입장과 개인 입장에서 입장표명 한 건데 그게 마치 업계를 대표해서 한 것처럼 보일 수가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여론조사기관을 대신해서’라는 표현을 썼는데, 저 외 아무도 업계에서 사과표명이나 입장표명을 한 사람이 현재까지도 없어서, 언론에서 많이 인용보도가 된 것 같아요.”

- 선거가 끝나면 늘 여론조사가 논란이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 특히 비판을 받는 이유 뭐라고 보세요?

“이번에는 특히 더 많이 틀렸기 때문이죠. 이전에도 선거 여론조사는 자주 틀렸었어요. 대통령 선거처럼 전국 단위의 조사는 틀린 적이 많지 않아요. 그러나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의 기초단체장 선거는 지역 단위의 민심을 파악하려면 휴대전화 조사가 필요한데, 현실적인 법, 제도적 문제로 휴대전화 조사를 거의 못했어요. 왜냐면, 안심번호 경선여론조사를 당내 경선에서는 쓸 수가 있는데 일반 언론사 여론조사에서는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 유선전화로만 이루어진 조사가 최근까지는 사실 그다지 많이 틀리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예측이 실패할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 했어요.

근데 이번 선거에서는 2년 전 지방선거에 비해서 유선전화보다는 휴대전화 가입자가 많이 늘어났고 응답률이 낮아지다 보니 실제 민심이 다 반영이 안 되어 포함 오차 (Coverage Error)가 있어요. 전체 유권자들을 다 포함을 시켜서 조사해야 하는데 유선전화로만 하다 보니 휴대전화를 주로 사용하는 야권 지지층이 상당 부분 조사에서 배제된 것으로 오차가 상당하다는 것을 이번 선거에서 처음 확인 된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휴대전화 조사가 병행되어야한다는 명확한 계기가 된 선거였어요.”

“인구통계 보정만으론 실제 유권자 여론지형 파악 어려워…”

- 보정 작업을 거치잖아요. 그런데 그게 효과가 없나요?

“보정 작업이란 최근까지는 성, 연령, 지역별 인구통계보정만 해왔어요. 그러나 2014년도부터 응답률이 낮아지는 것을 보고 인구통계 가중보정으로만 하면 실제 유권자들의 여론 지형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체감하게 됐어요. 그래서 최근에 이루어졌던 선거에 의한 결과를 반영시키는 그 선거통계를 적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2016년 2월 말부터 각 지역에 있는 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에서 선거통계 가중을 부여하지 말라는 연락을 갑자기 받기 시작해서 3월부터는 선거통계를 부여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인구통계에 선거통계를 추가 부여하면 좀 과다하게 표집이 되는 여당지지층을 가중치 과정에서 보정해줄 수가 있는데 그걸 제지당하게 된 것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실제 여당이 잘 나오는 결과만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죠. 왜냐면, 저희가 계속해서 선거통계를 반영한 결과를 발표하면 과태료를 계속 부과한다고 선관위 직원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과태료를 무한으로 내면서 이의제기를 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계속 문제를 제기했고, 야당 후보들에게 불리한 만큼 야당에도 얘기했는데, 선거를 앞두고 선관위에 야당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부담된다고 하여 야당에서도 사실 공식대응을 하지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결과가 더 큰 오차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응답률을 얘기하잖아요. 응답률이라는 게 예를 들어 1,000명에 5%라면 50명이 응답했다는 게 아니라 25,000명을 전화했지만, 1,000명이 답한 것이잖아요. 그러나 이걸 50명이 응답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아요. 그래서 꼭 응답률 밝히는 게 필요한지 의문입니다.

“응답률 표기는 공직선거법에 표기하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근데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응답률 표기 의무조항이 없어요. 그래서 미국의 여론조사 보도를 보면 응답률이 표기가 안 되어있는데, 응답률이 높으면 ‘신뢰도가 높을 것이다’라고 추정은 할 수 있으나, 응답률이 높다고 해서 더 정확한 조사결과라고 아직 학문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어요.

물론 응답률이 낮아지니까 점차 모집단을 대표하는 대표성이 떨어질 가능성은 증가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률이 낮다고 해서 조사결과가 정확하지 않다고 입증된 바는 없고, 실제 이번 여론조사들이 많이 틀렸는데 응답률이 낮은 것과 높은 것을 비교하면 응답률이 높은 것도 많이 틀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건 여전히 입증할 수 없고, 결국에는 포함 오차, 즉 휴대전화를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던 오차. 그게 더 크다는 것이에요. 그 문제를 더 집중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게 제가 페이스북에 올린 얘기입니다.”

- 그럼 외국의 여론조사는 어때요?

“미국도 그렇고, 선거 여론조사는 해외에서도 많이 틀리죠. 최근의 추세는 조사기관 수십 개가 발표를 하면, 그것들을 종합해서 예측하는 연구기관들이 생겼어요. 조사기관 한 군데 것만 신뢰하기에는 워낙 오차들이 있으니까 좀 신뢰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여러 군데 조사기관들의 결과를 취합해서, 일종의 빅데이터 분석 방식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하는 것이에요.”

   
▲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 <사진제공=뉴시스>

“선거 여론조사 제도 국민 수준에 못 미처…국민 알권리 제한 없애야”

- 선거 여론조사 발표 기간 문제도 제기하셨던데.

“그 문제도 역시 한국에만 있는 법규제인데, 해외에는 대부분 없거나 있어도 하루 이틀 공표보도를 못 하게 해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선거 6일 전부터 조사결과를 발표하지 못하게 하면서, 결국에는 7일 전까지 조사된 것으로 선거결과와 비교하는 것이죠. 그러나 요즘은 사실 하루가 다르게 민심이 변하기 때문에, 실제 여론조사가 잘못된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6일 사이 민심이 변했을 수도 있는 것이에요.

따라서 7일 전의 조사를 갖고 개표 결과와 차이가 났기 때문에 ‘이건 엉터리’라고 하는 것도 사실 무리한 추론일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러한 무리한 추론을 없애려면 공표보도 금지 제한을 없애거나 줄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번 선거 결과에도 나타났지만, 정치권의 예상과 완전히 다르게 실제 국민들은 준엄하게 황금분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여당은 딱 한 석 차이로 2당으로, 더민주당은 1당이 됐지만 과반을 얻지 못하고 더욱이 호남에서는 국민의당한테 완패했고, 또 국민의당은 호남의 벽을 넘지 못하는 등 국민들은 전문가들이나 언론의 예상과는 다르게 굉장히 황금분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국민들의 눈높이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얘기예요. 반면 선거 여론조사 제도는 국민들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요. 국민들의 알 권리를 제한하는 이런 부분들은 없어져야 됩니다.”

   
▲ 1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친 정당별 의석수는 더불어민주당 123석, 새누리당 122석, 국민의당 38석, 정의당 6석, 무소속 11석으로 집계됐다. <사진제공=뉴시스>

- 하지만 국민은 사표방지 심리가 있어 밴드 웨건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걸 우려하는 부분도 있는데.

“밴드 웨건 효과도 분명히 있고, 언더독 효과도 있어요. 언더독 효과를 예로 들면, 특정 후보가 굉장히 근소하게 열세라고 발표하면, 그 열세인 후보들의 지지자들이 투표하러 많이 나가게 되죠. 밴드 웨건 효과나 언더독 효과는 분명히 지역구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고, 어느 효과가 더 크게 작용하는지는 지역구 사정을 면밀히 살펴봐야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공표, 금지 기간 동안 떠돌아다니는 유언비어성 여론조사 결과들입니다. SNS를 통해 허위 조사결과들이 막 돌아다녀서 공표 금지 조항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에요.

국민들이 현재의 변화된 여론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굉장히 많은 변화가 있을 수도 있지만, 국민들은 여론이 7일 전 여론으로 고정된 것으로 믿고 투표를 하게 되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여론이라는 것이, 본인 생각도 중요하지만 생각을 정하지 못한 부동층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선거 공보를 보거나 뉴스를 보고 다른 사람은 어떤 판단을 했는지를 알면 자신의 입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조차 모르게 한다는 것은 국민들의 알 권리 침해가 될 수 있어요.”

- 여론조사 업체에서는 여론조사를 참고자료로 이용하라고 하지만 국민은 참고자료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 같아요.

“맞아요. 이번 선거에서 많은 지역 당선자 예측이 실패했어요. 물론 더 많은 지역에서 선거결과와 여론조사 결과가 맞기는 했죠. 그런데 그런 지역들도 보면 조사기관별로 차이가 컸어요. 기본적으로 내포되어있는 표집오차, 포함 오차, 비표집오차 등이 내재가 되어있기 때문에 참고자료로만 쓰라고 얘기해요. 그런데도, 실제 경선 여론조사 등 여론조사가 실제 후보를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참고자료로만 쓸 수가 없죠.

그래서 선거 본선에서는 여론조사 영향이 크진 않지만, 경선 여론조사에서는 여론조사로 후보를 결정하기 때문에, 특히 영남이나 호남권에서는 공천이 곧 당선인 지역들에서는 여론조사가 결국에는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유권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큰 것이에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선 여론조사에서는 안심번호 형태로 휴대전화 조사가 포함됐다는 것입니다.”

“여론조사 기관, 모집조사 하는 정도의 역할이 적절”

- 여론조사를 어떻게 활용하는 게 현명한 방법일까요?

“ 국민참여경선의 모집인 조사 등의 제한적 역할로 여론조사 기관들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이 맞다고 보는 건데, 아직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기득권을 지키는 데 유리한 도구가 여론조사이기 때문에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국민참여경선이나 오픈프라이머리는 조직 선거의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현역의원들에 역시나 유리한 측면도 있는데, 장기적으로는 그러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고, 그러한 제도를 위해 여론조사 기관들이 모집조사를 하는 정도의 역할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안심번호, 언론사 여론조사 포함되면 유권자 혼란 막을 수 있다”

- 정치권에 3가지 제도 개선을 요구했는데 그게 개선되면 여론조사의 정확성이 높아지나요?

“안심번호 휴대전화 조사가 가능하다고 하면 정확도를 상당히 높일 수 있어요. 저희가 이번에 당내 경선은 모두 안심번호로 다 했는데, 그 이외의 언론사 여론조사를 안심번호로 못했으나, 비공개로 했던 더민주당 충남도당 의뢰 조사에서 안심번호를 50대 50으로 섞어서 한 지역이 있는데, 실제 선거 결과와 거의 비슷한 결과가 도출됐습니다. 안심번호를 써보고 그 정확성을 알게 됐고 그래서 제도개선을 주장하는 것이에요. 안심번호가 언론사 여론조사에 포함되면 유권자들의 혼란을 막을 수 있어요.

그리고 블랙아웃, 혹은 블랙박스 기간이 줄거나 사라지면 그사이의 추이를 유권자들이 알게 되어 7일 전 여론과 다른 결과를 보고 충격을 받는 일들도 사라질 거예요.”

- 마지막으로 <GO발뉴스>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선거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서 비판을 하면서도 대안을 찾지 않는 언론이 다수인데 <GO발뉴스>에서 여론조사의 문제점과 아울러 대안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셔서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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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그리스 사진작가들이 포착한 난민 사진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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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ugee kissing his daughter

로이터와 뉴욕타임스 사진가들이 그리스 난민 위기를 촬영한 사진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 야니스 베라키스의 이 사진은 그리스-마케도니아 국경으로 걸어가며 딸에게 키스하는 시리아 난민을 담았다.

뉴욕타임스와 로이터스의 사진가 두 팀이 이민자와 난민들의 여정을 기록한 사진들로 퓰리처 상 브레이킹 뉴스 사진상을 받았다.

이들은 작년에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에서 유럽으로 간 수십만 명을 촬영하며 피난의 힘겨운 현실과 희망과 절망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담아냈다.

로이터에서 일하는 세 명의 그리스인 사진가 야니스 베라키스, 알키스 콘스탄티니디스, 알렉산드로스 아브라미디스는 그리스 안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난민들의 사진으로 상을 받았다. 그들은 에게해의 섬부터 피라에우스의 항구, 그리스-마케도니아 국경까지 누비며 사진을 찍었다.

로이터의 그리스 사진 팀장인 베라키스는 페이스북에 그리스가 퓰리처 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적었다. 자기의 학생으로 여기는 두 젊은 동료와 함께 상을 타서 자랑스럽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에게해의 작은 섬을 마지막 희망으로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길 원했다. 많은 개인적 희생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성취했다. 이 섬들의 사람들은 그들을 환영했고 사랑을 보여주었다. 섬에 아주 오래 있었던 우리 언론인들은 마침내 그들의 구명 조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우리의 사진과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퓰리처 상을 탄 이들의 사진들이 아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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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exandros Avramidis/Reuters
    그리스의 국경 도시 이도메니에서 마케도니아 경찰이 이주자가 마케도니아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곤봉을 치켜 든다. 2015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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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nis Behrakis/Reuters
    모터가 고장 난 과적 래프트가 시리아 난민들을 태우고 그리스의 코스 섬 앞을 떠다니고 있다. 2015년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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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nnis Behrakis/Reuters
    아프가니스탄 이주자가 과적 래프트에서 그리스 레스보스 섬으로 뛰어 내리고 있다. 2015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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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nnis Behrakis/Reuters
    작은 배를 타고 터키에서 그리스 레스보스 섬으로 건너온 시리아 난민이 배에서 내려 아이들을 안고 걷고 있다. 2015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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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nnis Behrakis/Reuters
    시리아 알레포에 살았던 70세 시각 장애인 아문이 40명과 함께 그리스 코스 섬에 착륙한 직후 해변에서 쉬고 있다. 2015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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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nnis Behrakis/Reuters
    아프가니스탄 이주자가 그리스 피라에우스 항구에 도착한 뒤 버스에서 창 밖을 보고 있다. 그를 포함한 이주자 2,500명이 레스보스 섬에서 여객선을 타고 피라에우스로 왔다. 2015년 10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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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nnis Behrakis / Reuters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그리스 이도메니에서 이주자와 난민들이 마케도니아 경찰에게 국경을 건너가게 해달라고 빌고 있다. 2015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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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nnis Behrakis/Reuters
    시리아 난민들이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로 국경을 넘어가며 진창을 걷고 있다. 2015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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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nnis Behrakis/Reuters
    폭풍우 속에서 그리스-마케도니아 국경으로 걸어가며 딸에게 키스하는 시리아 난민. 2015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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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kis Konstantinidis/Reuters
    그리스 레스보스 섬 앞에서 고무 보트의 바람이 빠지자 시리아 난민이 아이를 안고 해안으로 헤엄치고 있다. 2015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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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kis Konstantinidis/Reuters
    시리아 난민이 그리스 코스 섬 스타디움에서 등록하러 줄 서 있다. 2015년 8월 12일

 

허핑턴포스트US의 Greek Photographers Win Pulitzer Prize With These Haunting Images Of Refugee Crisis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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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전향서 대신 33년 감옥을 선택했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⑫
 
| 2016.04.24 08:18:51


 

1970년대 초 '떡봉이'를 아시나요?

1973년 8월 2일 법무부 예규 108조 '좌익 수형수 전향 공작 전담반 운영 지침' 시달과 함께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전향 공작을 직접 통제, 관리하기 시작했다. 또 중정과 법무부 등이 합동 전담반을 꾸려 대대적인 공작을 전개하기도 했다. '떡봉이'가 생긴 것도 이즈음이다.


국가는 폭력배 출신의 강력범들로 하여금 강제 전향을 지시했다. 성과에 따라선 가출소 등의 특혜가 주어졌다. 일부 장기수에 따르면 전향 공작 담당 반원은 전향서 한 장당 얼마 만큼의 수고비가 따랐다고 전한다.


떡봉이는 감방 열쇠와 '사랑몽치'라 불리는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수시로 좌익수들을 불러냈다. 그리고 국가의 동조 아래 살인적인 폭행과 고문, 학대가 이뤄졌다. 일부 수형자들은 떡봉이의 구타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1974년 좌익수 박융서는 특별사동에서 온갖 구타와 함께 바늘로 찔리는 고문을 받은 뒤 이튿날 유리창 창살에 끼어있는 유리 파편으로 자신의 동맥을 절단해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 감방 벽면에 "전향 강요 말라"는 혈서를 남기기도 했다. 박융서는 생전 동료들에게 "북에 처자식이 있어 전향을 못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방규는 박정희 정권 당시 행해진 전향 공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정희 정권은 비전향 장기수들을 상대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을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실천에 옮겼다. 고문하고 때려죽이고, 찬바람에 얼어 죽게 방치하고, 단식할 경우 강제로 밥을 먹여 죽였다. 또 고통을 못 견뎌 자살하도록 몰아갔으며, 병 들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전향하면 약을 주겠다'고 강요하며 죽도록 내버려뒀다." 

 

 

▲ 한국 전쟁 당시 빨치산을 활동한 임방규 씨가 수감 생활에 대한 애기를 털어놓고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20년 만기 출소와 사회안전법 
 

 

이에 앞서 1972년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 진영 간 긴장 완화가 실현됐다. 이른바 데탕트다. 닉슨 미(美) 대통령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방문하고, 국제 정치는 이데올로기보다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대화에 나선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천명한 통일과 관련한 최초의 남북 합의문이다. 하지만 "김일성이 웃으면서 뒤에선 칼을 갈고 있다"고 한 박정희의 말처럼 음지에서 행해진 전향 공작은 여전히 참혹했다.


1972년 늦여름, 대전교도소 특별사동에 수감된 임방규가 간수의 지시를 받으며 충청남도 경찰국으로 향했다. 만기 출소를 앞둔 취조였다. 보안과 경찰이 마지막으로 묻겠다며 '전향서'를 내밀었다. 임방규가 비실댔다. 
 

그러자 한 정보과장이 다가오더니 "허튼소리 말아라. 감옥에서도 전향하지 않은 사람이 이제 와서 전향하겠느냐"며 직원을 다그쳤다. 정보과장의 얼굴은 어딘지 낯이 익었다. 한참 기억을 떠올려보니 전북 고창에서 활동한 빨치산 출신 인사로 회문산에 있을 때 일면식이 있는 얼굴이었다. 


한국 전쟁 당시 산속 생활에 신물을 느낀 이들은 신분을 바꿔 국군에 재입대하거나 경찰이 되어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1951년 10월 빨치산 귀순자로 창설된 '보아라 부대'(지리산 지구 전투경찰사령부 사령관 직속 특별부대)가 그랬고, 군경의 회유 등으로 각지에서 활동한 '빨치산 변절자'들이 그랬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군이나 경찰에 남아 활동했다. 충남도경의 그 정보과장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였던 게다.
 

▲ 비전향 장기수인 임방규 씨는 석방과 재수감을 반복하며 33년을 옥중에서 보냈다. 그는 취재진에게 지난날을 회고하며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커버리지(정찬대)

1972년 9월, 20년을 복역한 뒤 임방규가 출소했다. 자그마치 20년의 세월이다. 스무 살 나이에 체포돼 어느덧 마흔을 넘어섰다. 청년 임방규는 뼈만 앙상한 초췌한 모습의 중년으로 늙어 있었다.

 


임방규는 출소 후 서울로 올라와 페인트공이 됐다. 총을 들던 손은 솔을 들었고, 산속을 헤매던 두 발은 산업화의 상징인 콘크리트 건물 위에 서있었다. 그는 붉은 빛을 지운 채 남은 인생을 색칠했다. 가끔 철탑에 올라 산업화와 도시화의 고도성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20년간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세상은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군사 독재 정권의 폭압 정치, 도시 빈민 문제, 자본주의 논리 아래 횡행하는 부패와 사회 부조리…. 무등(無等)을 꿈꾸던 20대 청년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1972년 10월 선포된 유신헌법으로 공포 정치를 단행한 박정희는 반유신 세력에 대한 탄압 도구로 무소불위의 긴급 조치를 악용했다. 

 

그리고 그 결정판이던 긴급 조치 9호 선포(1975년 5월13일)와 함께 1975년 7월16일 법률 제2769호로 제정된 사회안전법이 공포된다. 

 

전향을 거부한 임방규는 이 법에 따라 1976년 9월 체포돼 또 다시 청주보안감호소에 수감됐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그가 사회에 돌려보내진 지 불과 4년 만에 재입소한 것이다. 그해 4월 결혼한 임방규는 체포 당시 부인이 임신 중인 상태였다. 국가는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던 그를 결코 그냥두지 않았다.

청주보안감호소, 그리고 0.7평의 세상 

청주보안감호소는 팻말도 존재하지 않는 '비밀스런' 곳이다. 엄청난 크기의 청주교도소 옆에 외딴 섬처럼 감호소가 설치됐다. 153명의 비전향자들은 이곳에서 철통같은 감시를 받으며 생활했다. 


감방 문고리의 열쇠가 보통 하나인데 반해 청주보안감호소는 위아래 두 개가 채워졌고, 창도 일반 교도소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밖을 보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전향하지 않은 이들은 더 엄혹하고, 잔인하게 다뤄졌다.
 

여느 교도소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먹을 것은 늘 부족했다. 밥을 퍼 담는 목기에 따라 특등식부터 일, 이, 삼, 사, 오등식까지 여섯 단계로 나뉘는데, 이들은 가장 작은 양의 오등식이 주어졌다. 밥을 네 쪽으로 나누면 적당한 크기의 한입거리가 되고, 세 쪽으로 나누면 한 가득 밥술이 들어간다. 식사량이 너무 작아 이들 사이에선 '궁짝' 또는 '아스피린'이라고도 불렸다. 

 

▲ 순창에서 만난 김창근 씨는 10년을 복역한 끝에 자유의 몸이 됐다. 하지만 그는 1980년대 말까지 형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해야만 했다. ⓒ커버리지(정찬대)


보안감호소는 독방으로 이뤄져 있다. 일반 교도소(0.75~1평)보다 작은 0.7평 공간은 임방규가 내몰린 세상의 끝인 동시에 그가 누린 세상의 전부였다. 수감 2년 뒤 담당 검사와 마주할 때 빼고는 대부분을 독방에서 생활했다.

 


청주보안감호소는 담당 검사가 전향 여부를 묻고 비전향할 경우 또 다시 2년을 복역하게 된다. 10년이고, 20년이고, 그렇게 계속 2년씩 갱신되는 구조인 셈이다. 전향하지 않고선 결코 감호소 밖을 나설 수 없었다. '시계를 거꾸로 매달아도 시간은 간다'는 말은 적어도 이곳에선 통영돼지 않았다.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다. 분단에 창살에 갇힌 이들은 그렇게 시간을 겯질렀다. 
 

"끝도 없이 감옥이 가둬놓고, 2년 갱신, 2년 갱신 그렇게 14년을 살았다. 전향하기 전에는 살아 나갈 수 없었다. 전향서에 사인만 하면 됐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념의 문제라기보다는 한 인간이기에 이를 더더욱 거부한 것이다." 


그 오랜 고통과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도 임방규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이념적 사고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짐승과 같은 이들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싶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거부에 앞서 인간의 폭력성을 거부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고, 선이었다. 

33년 '영어(囹圄)의 몸'에서 풀려나다 

1987년 한국 사회는 커다란 혁명적 변화를 맞게 된다. 민중의 힘으로 군부독재를 끌어내렸고, 그간 움츠렸던 민주주의는 동토의 땅을 뚫고 싹을 밀어 올렸다. 그리고 민주화의 열기는 그간의 악습과 악법의 폐지를 부르짖었다. 문익환 목사 등을 중심으로 한 재야에선 사회안전법 폐지 추진위가 발족됐고, 국회에서도 이에 대한 내용의 법안이 제출됐다.

 

그 결과, 1989년 3월 사회안전법(이후 대체 법인 보안관찰법이 발효됨)이 폐지됐다. 그리고 법안 폐지에 따라 보안감호소에 수감된 비전향자 모두가 석방됐다. 임방규가 십오 척 담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도 법안 폐지 이후인 1989년 7월이다. 석방과 재수감을 거치며 무려 33년(22년 6개월)의 시간 동안 '영어(囹圄)의 몸'으로 지내왔다. 조국은 그를 한 평생 가둬놓고 이념과 사상을 말살시켰으며, 자그마한 육신은 짓이겨졌고 존엄은 파괴됐다.
 

▲ 임방규(좌) 씨와 김창근(우) 씨는 한국 전쟁 당시 회문산 등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대전형무소 특별사동 병사에 '감방 동기'로 처음 만나 서로를 알게 됐다. ⓒ커버리지(정찬대)


1976년 청주보안감호소에 재수감된 비전향자는 153명이다. 이 가운데 51명이 법안 폐지와 함께 최종 석방됐다. 86명은 모진 고문에 못 이겨 전향했고, 16명은 숭고한 이념 앞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단식 투쟁하던 변형만의 경우 간수들이 고무 호스를 식도에 집어넣어 왕소금을 잔뜩 푼 소금물을 강제 급식하는 과정에서 숨을 거뒀다.

 


국가는 이후에도 일반 교도소에 수감된 좌익수들을 사회안전법의 대체인 보안관찰법을 통해 끝까지 옭아맸다. 1995년에는 인민군 출신 김선명 씨가 광복절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면서 자유의 몸이 됐다. 김 씨는 무려 45년을 복역, 세계 최장기수로 기록됐다. 그를 비롯해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에 의해 '마음의 고향'인 북녘으로 돌아갔다. 


좌익 사상범들은 보안 관찰 대상자로 묶여 지금도 국가의 감시를 받고 있다. 수십 년 옥고를 치른 뒤 얻은 마지막 정리의 시간도 이들에게는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 생을 마감한 뒤에야 비로소 끝날 것이다. 분담의 아픔과 처절한 고통을 맨몸으로 마주한 빨치산은 우리가 만들어낸 슬픈 역사이자 또 다른 자화상이다. 

 

▲ 지난 1월 임방규 씨와 김창근 씨가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손을 맞잡은 채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했다. ⓒ커버리지(정찬대)


지난 1월 27일 취재진의 도움으로 임방규와 김창근이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손을 부여잡은 채 한참을 놓지 않았다. 풍파를 견뎌온 거친 손마디가 그간의 모진 세월을 말해줬다.

 


"우리가 만난 지도 꼬박 55년이 됐구만…." 
"…." 


회한이 담긴 임방규의 한 마디에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주름진 표정의 눈망울엔 어느새 한스런 탄식과 설움이 가득 차 있었다. 구순(九旬)의 세월, 굽이굽이 애달픈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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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신형 고체연료SLBM 성공, 미국 뒤통수에 비수 꽂게 됐다

북, 신형 고체연료SLBM 성공, 미국 뒤통수에 비수 꽂게 됐다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4/24 [07:5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이 사진은 2015년 12월 21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관측선박에 탑승하여 참관하는 가운데 함경남도 신포 앞바다에서 진행된 잠대지탄도미사일 수중발사시험 중에 전략잠수함이 수중에서 발사한 북극성-1호가 화염을 뿜으며 하늘 높이 솟구쳐오르는 상승비행장면이다. 미국 군부는 2015년 5월 8일에 진행된 수중발사시험에서 북극성-1호를 발사한 잠수함을 신포급 잠수함이라고 지적했었는데, 2015년 12월 21일에 진행된 수중발사시험에서는 고래급 잠수함이 그 미사일을 발사하였다고 밝혔다. 고래급 잠수함은 이번에 처음 그 이름이 알려진 잠수함이다. 조선에서는 신포급이니 고래급이니 하는 분류명칭을 쓰지 않으므로, 미국 군부가 자의적 분류명칭을 달아놓은 신포급 잠수함과 고래급 잠수함이 어떻게 다른지 알기 힘들다. 미국 군부는 북극성-1호를 수중에서 발사한 조선의 전략잠수함이 신포급 잠수함인지 고래급 잠수함인지 헷갈리고 있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북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에 또 다시 눈부신 성공을 이룩해냈다고 보도하여 어제 합동참모본부에서 포착한 북의 동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시험(합참에서는 실패라고 주장함)이 사실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합참에서 발표한 '수분간 비행'이라는 정보를 통해 북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 우주공간까지 비행했을 것이라는 본지의 추리도 정확한 것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동지께서 전략잠수함 탄도탄수중시험발사를 현지에서 지도하시였다"에서 이번엔 새로 개발한 대출력 고체로켓엔진으로 만든 잠수함탄도탄을 사출, 비행, 타격목표 상공에서의 기폭장치로 폭발시키는 전 과정을 완벽하게 성공시켰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중앙통신은 "이번 시험발사를 통하여 우리 식 수중발사체계의 믿음성이 완전히 확증, 공고화되였으며, 모든 기술적 지표들이 주체적인 수중공격작전실현을 위한 요구조건을 충분히 만족시켰다"고 밝혔다.

통신은 "(시험발사가) 최대발사심도에서의 탄도탄랭발사체계(콜드런칭) 안정성과 새로 개발한 대출력고체발동기를 이용한 탄도탄의 수직비행체제에서의 비행동력학적특성, 계단열분리의 믿음성, 설정된 고도에서 전투부핵기폭장치의 동작정확성을 확증하는 데 목적을 두고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김 제1위원장은 "이번 시험발사의 대성공으로 하여 우리 해군의 수중작전능력이 비상히 강화되게 되였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남조선 괴뢰들과 미제의 뒤통수에 아무때나 마음먹은대로 멸적의 비수를 꽂을 수 있게 되였다"고 말했다.

 

이런 북의 발표를 보면 이번에 북에서 발사한 잠수함탄도탄은 최대발사심도 즉, 가능한 가장 깊은 바다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으며 탄도탄랭발사체계 즉, 콜드런칭 사출기술의 안정성을 확보한 시험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북은 벌써 세번째 공개적인 콜드런칭 사출시험을 진행해오고 있는데 모두 완벽하게 성공했다며 그 관련 사진을 공개해왔다. 처음엔 사출 직후 낮은 고도에서 점화에 성공하여 비상하였다. 두번째는 그보다 훨씬 높은 고도까지 솟구쳐올라 점화하여 비상하였다. 이번 세번째 영상은 아직 남쪽에 공개가 되지 않았다.

 

SLBM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군사기술 강국만 보유하고 있는 무기로써 특히 이 깊은 바다 속에서 사출시키는 기술의 어려움 때문에 기술 강국에서도 쉽게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0의 개념을 만들어 수학사에 있어 일대 혁명적 발전을 이루어 낸 인도여서 그런지 요즘 신흥 전자기술 강국, 정보통신기술 강국으로 발돋음하고 있지만 그 인도도 SLBM 바닷속 사출시험만은 현재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것만 봐도 이게 얼마나 어려운 기술인지 미루어 짐작이 된다. 북은 이번에 그 사출시험을 세번째 성공시켜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최대발사심도에서 성공한 것이다.

 

북은 탄도미사일의 단분리 기술이나 전투부(탄두부)의 기폭장치조정능력 등은 이미 지대지 미사일을 통해 충분히 확보해둔 상태이기 때문에 이 사출시험의 안정성만 확보했다면 사실상 중장거리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개발을 완성한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이번 시험에서 상승비행시험과 단분리, 기폭장치 시험을 진행한 것은 새로 개발한 대출력고체연료로켓을 처음으로 이 잠수함 발사용으로 개발하여 시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로켓을 이용한 탄도미사일의 수직비행체제에서의 비행동력학적특성, 계단열분리의 믿음성, 설정된 고도에서 전투부(탄두부)핵기폭장치의 동작정확성을 확증하는 데 목적을 두고 진행됐다"는데 대성공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진으로 공개된 북의 SLBM 북극성-1호는 무수단 지대지미사일을 잠수함발사용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이 미사일은 사거리 3,000km 러시아 R-27 액체연료미사일을 개량하여 사거리 4,000km로 늘린 것이라고 미국과 서방에서는 주장하고 있고 위키디피아에도 그렇게 소개되어 있다.

 

북이 사용하는 적연질산이라는 산화제는 담고 있는 탱크를 부식시키기 때문에 발사전에 주입해야하는 데 극저온 초고압상태에서만 액체상태를 유지하는 산화제라 조심스럽게 주입해야 한다. 보관도 쉽지 않다. 이 산화제와 함께 히드라진과 같은 액체연료도 함께 각기 다른 통에 주입해야 하는데 각 단마다 각각 채워주어야 한다. 하여 이 연료주입에 최소 몇 시간이 필요하며 단이 많고 크기가 크면 2-3일이 걸릴 수도 있다. 상대의 공격징후가 보일 경우 즉각 선제타격으로 제압해야 하는데 그런 즉각 대응이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SLBM을 개발하려면 반드시 중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대출력 고체연료로켓엔진이 필요한 데 이번 시험에서 그 고체연료미사일 시험발사를 진행하여 완벽하게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북은 고체연료미사일을 장착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관련 모든 기술을 확보한 셈이다. 이제 실전배치만 남은 상황이다.

 

북 국방위원회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이번 세번째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발사시험 완전 성공 모습을 지켜본 후 "이제 미제의 뒤통수에 아무때나 마음먹은대로 멸적의 비수를 꽂을 수 있게 되였다"고 거침없이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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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간 걸려 달려간 팽목항 "보고 싶다", "미안하다"

 

[현장] 사고해역 찾은 세월호 유가족 "진상규명 이제 시작"

16.04.23 21:08l최종 업데이트 16.04.23 21:08l
글·사진: 선대식(sundai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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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오후 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사고해역을 찾은 해양 경비정 위에서 오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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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오후 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사고해역에서 세월호 인양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대형 바지선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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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숙님, 권재근님, 혁규야, 고창석 선생님, 양승진 선생님, 영인아, 현철아, 은화야, 다윤아, 빨리 보고 싶습니다."

23일 오후 세월호가 침몰한 바다 위에서 실종자 9명의 이름이 하나씩 불려졌다. 해경 경비정 두 대에 나눠 타고 사고해역을 찾은 유가족들의 외침이었다. "반드시 돌아오실 수 있도록 힘을 모으겠다"라고 외쳤다. 이어 유가족들은 먼저 떠난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국화를 바다에 던졌다.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보고 싶다", "사랑한다", "미안하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경비정은 30분간 이곳에 머무른 후 세월호 인양작업을 준비하는 대형 바지선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정부는 세월호를 오는 7월까지 인양할 예정이다. 4·16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장인 장훈씨(고 장준영군 아버지)는 마이크를 잡고 "많이 울고 제대로 싸우자, 그래야 엄마아빠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방문은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이뤄졌다. 유가족들은 당초 참사 2주기 이튿날인 지난 17일 사고해역을 방문하려 했지만, 기상상황 때문에 이날로 미뤘다. 유가족들이 대거 사고해역을 찾은 것은 1주기 때 이후 1년만이다. 사고해역 인근 동거차도에서는 유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인양작업을 감시하고 있다. 

"실종자들, 가족 품으로 돌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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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오후 세월호 참사 유가족인 김정해씨가 국화를 사고해역에 던지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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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서 사고해역까지는 먼 길이었다. 유가족 42명은 오전 6시 10분께 안산에 있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 앞에서 버스를 탔다. 진도에 도착해 세월호 기억의 숲에 들른 뒤, 팽목항에 닿았다. 유가족들은 팽목항에서 100톤과 60톤짜리 해양 경비정에 몸을 실었다. 가끔 너울성 파도가 쳤지만, 바다는 대체로 잔잔했다. 

유가족들은 경비정 위에서 말을 잃고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봤다. 대형 바지선이 보이는 사고해역에 가까워지자, 유가족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경비정이 1시간 동안 32km 내달려 사고해역에 닿은 것은 오후 3시였다. 

경비정 위에서 안주현군의 어머니 김정해씨가 유가족들을 대표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눈물 때문에 종종 말을 잇지 못했다. 

"예쁜 꽃이 된 아이들이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갈 곳을 잃어 바다가 되었다. 바다는 어서 아이들을 돌려주고 싶어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의 무게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 배안에서의 외침이 침묵이 되는 사회에 아이들이 다시 온 힘을 모아 소리쳐 보지만 대한민국은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

배 안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9명의 실종자가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길 기다리고 있다. 내 아이, 아이들의 선생님, 아이의 엄마 아빠였을 그들이 어둠 속에 있다. 따뜻한 손길에 힘을 내어 나오라고, 좀 더 손을 내밀며 나오라고 하지만, 어두컴컴한 곳에 돈의 무게에 내려앉아 빛을 받지 못하고 주저앉아있다. 이곳에 진실의 빛으로 길을 알려 주어 나오라 목놓아 외치고 외쳐본다.

이 아이들의 꿈은 배와 함께 가라앉고, 아이들이 꿈을 키우며 소중하게 다루던 물건들은 진실과 함께 사라지려 한다. 소중하고 예쁜 아이들의 꿈을 짓밟고 내 아이의 손길이 닿은 물건들도 사라져가려 하고, 그 예쁜 아이 물건이라도 부모의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서라도 아이를 품에 안고 싶다. 진실마저 짓밟게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김씨는 "부모들은 아이들과 같이 함께함을 느끼며, 오로지 아이들만을 생각하며 걸음을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갈 것이다, 인양은 진실의 발걸음에 한걸음 더 간 것이며 실종자에 대한 나라의 예의인 것"이라면서 "세월호를 꼭 온전하게 인양하여 미수습자 9명이 가족품으로 돌아올수 있기를 부탁드린다"라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이어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며 손에 쥔 국화를 바다에 던졌다. 허재강군의 어머니 양옥자씨는 한동안 흐느꼈다. 양씨는 "이곳에 오면 사고에 대한 기억 때문에 힘들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낀다"면서 "재강이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라고 전했다.

유가족들은 9시간의 여정 끝에 사고해역에 도착했지만, 이곳에서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에 불과했다. 곧 유가족을 실은 경비정은 뱃머리를 팽목항으로 돌렸다. 

"진상규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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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오후 세월호 참사 유가족인 김정해씨가 팽목항 인근 세월호 기억의 숲에서 아들인 안주현군을 상징하는 은행나무를 껴안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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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 장훈씨는 기자에게 "진상규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오는 6월까지만 진상규명 활동에 나선다. 특조위 설립 근거인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 특별법)에 따르면, 진상규명을 위한 특조위의 활동기한은 최대 1년 6개월이다. 정부는 지난해 1월 특조위가 구성됐다면서 6월까지만 예산을 배정해놓았다. 

장훈씨는 "제대로 된 조사도 못했는데 6월에 특조위 활동을 끝내는 것은 잘못됐다"면서 "참사의 직접적인 증거인 세월호를 인양해 조사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장씨는 "2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유가족들을 도운 박주민 변호사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집권여당은 과반의석을 달성하지 못했다"면서 "이번 선거에서 국민이 유가족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상이 하루 빨리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다"라고 말했다.

야당들은 여소야대인 20대 국회에서 세월호 특별법을 개정해 특조위 활동 기한을 연장하겠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에 장씨는 "지금까지 정부의 행태를 보면, 호락호락 진상규명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면서 "국민 여러분의 관심이 필요하다. 그렇게 된다면 진상규명에 가까워질 것이다, 진상규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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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사관앞 철야1인시위 54일째 ...

  • <독수리연습중단! 북미평화협정체결! 박근혜정권퇴진!>
  • 임진영기자
    2016.04.23 15:10:38
  •  

    22일, 코리아연대(자주통일민주주의코리아연대)는 광화문 미대사관앞에서 <독수리연습중단·핵전쟁연습중단·북미평화협정체결·박근혜정권퇴진>을 촉구하며 54일째 철야1인시위를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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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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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라디오서 어버이연합 보도한 기자 다음날 교체

 

KBS 간부 “철저한 중립성 지켜야”…“눈감는 것이 KBS 입장인가”

이하늬 기자 hanee@mediatoday.co.kr  2016년 04월 23일 토요일
 
KBS가 전경련과 어버이연합 관련 의혹을 라디오에서 전달한 기자를 갑자기 교체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를 두고 KBS 라디오2국 관계자는 복합적인 이유로 인한 교체라고 밝혔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관계자는 “본질을 흐리는 이야기”라고 비판했다. 
 
KBS라디오2국이 지난 22일 ‘황정민의 FM대행진’에서 ‘간추린 모닝뉴스’를 진행하던 이재석 국제부 기자를 급작스럽게 교체해 방송이 불방되는 일이 벌어졌다. 황정민 앵커는 이날 방송에서 “오늘 간추린 모닝뉴스는 하루 쉽니다”라고 전했다.
 
이 기자가 교체된 결정적인 이유는 지난 21일 방송 때문이다. 이 기자는 이날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대한민국어버이연합(어버이연합)이 주인으로 추정되는 계좌에 1억2000만원의 거액을 지원했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파문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 KBS라디오 '황정민의 FM대행진' 홈페이지 캡처
이 기자는 해당 소식을 전하며 “JTBC와 시사저널을 비롯한 몇몇 언론보도를 종합해보면 일단 전경련이 돈을 보낸 사실 자체는 확인이 되는 것 같다”며 “(사실로 확인될 경우) 전경련이 사실상 집회를 은밀하게 지원하고 동원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자의 교체는 이수행 2라디오 국장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해당 프로그램이 속한 2FM의 김병진 부장은 23일 통화에서 “국장께서 월요일이 개편이니 기획을 새로 시작하면 좋겠다, 그런 결정을 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국장이 전화로 교체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김 부장은 이번 어버이연합 보도에 대해 “해당 코너가 ‘간추린 모닝뉴스’이기 때문에 팩트 정도만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면 좋은데 추측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며 “시사프로그램도 아닌데 약간 한쪽으로 치우친 듯한 경우가 있어서 예전에도 ‘중립적인 입장’을 주문했다”고 말했다. 
 
김 부장은 다른 매체를 인용보도한 것 역시 문제라고 말했다. 김 부장은 “KBS 기자를 쓴다는 건 우리 회사의 입장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보도를 하지 않는다는 기대가 있는 것”이라며 “하지만 이 기자는 이전에도 다른 매체 인용보도를 수차례했고 이는 저희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했다. 
 
김 부장은 이어 “월요일에 개편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분도 염두에 둔 것”이라며 “지금까지는 해당 프로그램 PD가 알아서 기자를 섭외했다면 이제는 라디오국과 보도국에서 공식절차를 밟아서 기자를 섭외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해당 코너는 김기환 사회부 기자가 맡을 것으로 보인다.
 
▲ 21일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시사저널 건물을 찾아 항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러나 이에 대해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와 KBS기자협회는 비판적인 입장이다. 성재호 KBS본부 위원장은 23일 통화에서 “본질을 흐리는 이야기”라고 못 박았고 이어 개편과 관련한 교체에 대해서도 “국장이 이런 식으로 코너 출연자를 바꾸는 경우는 없다”고 지적했다. 
 
성 위원장은 이어 “인용보도가 문제라면 외신 기사는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이고 타매체 기자도 KBS에 나오면 안된다”며 “가정법을 사용한 것 역시 ‘추측성 보도’가 아니라 기자가 신중한 것이다. 이런 식의 보도는 어느 언론사나 많다”고 말했다.
 
성 위원장은 ‘KBS 입장’ 이라는 부분에 대해 “어버이연합 관련 보도를 하지 않는 것이 KBS의 입장인가”라며 “어버이연합이 기자회견을 하고 청와대가 입장을 내놓았는데도 눈을 감고 있는 건 국민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KBS는 메인뉴스에서 관련 뉴스를 다루지 않았다. 
 
또 다른 KBS본부 관계자도 “보도국 기자 입장에서는 아이템이 나가냐, 안 나가냐가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KBS본부와 KBS기자협회는 이번 주말 입장을 정리해 25일 성명서를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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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가려나 탈북종업원 가족면담요구, 정부 수용 거부

파국 가려나 탈북종업원 가족면담요구, 정부 수용 거부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4/23 [03:4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평양에서 진행된 CNN방송과의 대담에서 " 북 여성 종업원들 중 누구도 김정은 제1위원장을 떠날 사람은 없다"고 말하며 눈물짓는 탈북했다는 북 종업원의 동료     ©자주시보

 

북측 접십자회에서 지난 7일 집단탈북했다는 북 식당 종업원들 서울 가족 면담을 연 이틀째 통지문을 통해 남측에 요구했다는 북 중앙통신 보도가 나왔는데 통일부에서는 수용 불가 입장을 거듭 밝히고 나아가 통지문 자체를 받은 바 없다고 부인하고 나서서 북의 강경한 반발이 예상된다.

 

북 리충복 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최근 탈북했다고 하는 북 식당 종업원들의 가족들을 서울로 보내겠다는 내용의 통지문을 우리측으로 보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1일에 이어 22일에도 보도했다고 22일 연합뉴스가 전했다.

 

리 위원장은 김성주 대한적십자사 총재에게 보내는 통지문에서 "우리측에서 가족들의 절절한 요청에 따라 그들을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내보내기로 하였다는 것을 다시금 엄중히 통지하는 바"라면서 "범죄행위를 은폐하려 할 것이 아니라 적십자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우리측 가족들이 판문점을 통해 서울에 나가 자식들과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필요한 실무적 조치를 즉각 취하여야 할 것"이라며 "귀측 당국이 집단 탈북이니 자유의사니 뭐니 하면서 우리 공민들을 강제로 억류시켜놓고 그들을 송환할 데 대한 우리의 정당한 요구마저 전면부정하고 있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이며 숭고한 인도주의에 대한 모독"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통일부는 "이번 북한 해외 식당 종업원의 집단 귀순은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으로, 북한이 4월 22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개한 북적 중앙위 위원장 명의의 통지에 따른 가족 대면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며 가족 면담 거부 의사를 거듭 밝혔다.

 

통일부 당국자는 남측에 통지문을 보냈다는 조선중앙통신의 보도에 대해서도 "북한에서 (우리 정부로) 통지문을 보낸 것이 없고, 대한적십자사에도 북측의 통지문이 온 것은 없다"고 부인했다.

 

앞서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회는 지난 21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서도 북한 식당 종업원들의 집단 탈북을 자발적 귀순이 아닌 납치라고 주장하면서 "사랑하는 딸들을 백주에 유인 납치당한 우리 가족들은 지금 한시바삐 꿈결에도 보고 싶은 자식들과 직접 대면시켜 줄 것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에도 정부는 국제관례에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입장을 밝혔었다.

 

문제는 북측이 "만약 우리의 직접대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우리 공민들을 억류하고 송환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미 경고한대로 납치만행의 주모자인 청와대를 포함해 역적패당에 대한 복수전이 다양한 방법으로 강도높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점이다.

물론 참수작전으로 수뇌부를 존엄을 건드린 청와대를 잿가루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식의 경고가 지금까지는 모두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았기에 이번에도 북의 경고가 실행에 옮겨질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아직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채 끝나지도 않았고 5차핵시험설까지 나오면서 북미사이의 긴장까지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번 사건이 어떻게 비화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김정은 제1위원장은 연평도 포격전을 전격적으로 명령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북의 경고를 그저 말로만 반복될 엄포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북이 평양에서 귀국한 북 식당 동료 종업원들과 CNN 대담을 즉각 추진하여 납치극이란 점을 동료들이 직접 증언하게 했다.

가족들과 서울 면담도 이틀째 연이어 요구하고 있는데 이번 요구는 아예 대놓고 내리는 명령조의 강경한 어조였다.

 

북이 이번 사건 대해서는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다. 남측을 압박해들어오는 잡도리를 보니 전에 없는 엄중함이 느껴진다. 특히 2차 면담요구는 명령조이기는 했지만 '귀측', '숭고한 인도주의' 등의 최고의 격이 있고 공식적인 외교용어를 사용하여 발표하고 있는데 그런 표현에도 자국민을 납치한 것에 대한 국제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서슬퍼런 기운이 느껴진다.

 

정부는 자유의사에 따라 귀국했다고 하면서 왜 북측 가족들 면담을 거부하는지 사실 납득이 되지 않는다. 탈북한 여성들의 의사가 확실하다면 북측 가족과 면담을 못하게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면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자유의사를 방송에다가는 내볼 수는 있을 것이고 이전 김신조나 이광수, 황장엽 등 관행을 놓고 봐도 바로 방송에 내보냈었는데 왜 이번엔 보름이 넘게 탈북했다는 여성들을 꽁꽁 숨겨놓고 머리카락 한 올도 비추어주지 않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점점 남북관계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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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치 않게 "사실무근" 靑 입장을 반박해버린 놀라운 인물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4/23 16:46
  • 수정일
    2016/04/23 16:4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게시됨: 업데이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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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어버이연합 집회의 배후가 청와대'라는 의혹에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집회를 지시한 배후로 지목받은 허현준 선임행정관은 정정보도 청구와 함께 '시사저널 출간 배포금지 가처분신청'까지 제기했다.

그런데, 이런 청와대의 확고한 입장을 반박한 인물이 있다.

바로 어버이연합의 핵심 실세인 추선희 사무총장이다.

22일 시사저널에 따르면, 추 사무총장은 '청와대의 지시를 받아 집회를 한 적이 없다'며 아래와 같은 말들을 했다. 청와대 지시설을 반박하다가 도리어 청와대 행정관이 집회를 요청한 사실을 실토한 모양새다.

"허 행정관이 한·일 위안부 합의안 체결과 관련한 집회를 월요일(1월 4일)에 열어달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우리는 월요일보다 위안부 수요집회가 있는 수요일(1월 6일)에 집회를 갖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이를 따르지 않았다"

 

"월요일에는 다른 단체가 집회를 가졌고 우리는 수요일에 했다"

 

"지시가 떨어지면 (단체들 사이에서) 경쟁이 붙는다. 서로 먼저 집회에 나가려고 한다"

 

노컷V

추 총장은 시사저널의 어버이연합 기사가 최초로 나오기 직전 허 행정관으로부터 전화도 받았다고 시사저널에 전했다.

"4월 20일 오후 시사저널의 '청와대 지시' 기사가 나오기 전에 허 행정관이 전화를 걸어 '시사저널이 기사를 내려고 한다. 총장님이 나서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오히려) 내가 기사가 없는데(나오지도 않았는데) 뭘 어떻게 나서느냐고 말했다"

 

이때는 기자가 허 행정관에게 관련 사실을 확인 요청한 직후였다.


(중략)


그런데 (행정관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는 ‘허 행정관님이 보수단체에 집회를 지시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을 듣고자 전화드렸습니다’라는 내용만 담겨 있었다. 어버이연합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도 하지 않았다. (시사저널 4월 22일)

 
 

결국, 어버이연합은 오늘 기자회견까지 열어 청와대와의 연관성을 부인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걸 털어놓은 하루를 보낸 셈이다.

이날 기자회견은 추 사무총장이 성명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는 성명서에서 “우리 어버이연합은 기본적으로 노인복지단체”라며 “다른 노인복지단체와 다른 점은 어르신들께 단순히 급식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애국활동을 할 수 있게 지원하는 단체란 점”이라고 밝혔다. 또 “우리가 해온 일련의 활동은 모두 나라를 위한 것”이라며 “세월호 사태에 맞대응한 것 역시 불순세력과 정치·이념적 색채가 뚜렷한 일부 유족들이 세월호 참사를 빌미로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는 판단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경향신문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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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연합, '국정화 반대' 서명운동 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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