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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를 아시나요?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8/13 08:12
  • 수정일
    2015/08/13 08:1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조현 2015. 08. 12
조회수 141 추천수 0
 

 

 암살-.jpg 

영화 <암살>

 

 

 김원봉-.jpg 약산과 김구-.jpg 

영화 <암살>에서 친일파 척결에 나선 안옥윤 속사포 황덕삼(위 왼쪽), 

고량주를 따라 죽은 지사들을 추모하는 약산 김원봉(위 오른쪽), 약산 김원봉과 백범 김구(아래)

 

영화 <암살>에서 일제가 항복한 날, 약산 김원봉은 백범 김구 앞에서 고량주에 불을 붙여 동지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너무 많이 죽었다’면서 “잊혀지겠지요. 미안합니다”라며 비탄한다.

 

 그러나 미안한 것은 조국 동포를 위해 헌신한 그들이 아니다. 영화 속 염석진보다 더 악랄하게 독립군들을 잡아 고문했던 노덕술 같은 친일파에게 약산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후 고초를 당하게 한 이 나라다. 이 나라는 해방 후에도 이강국과 염석진과 노덕술의 나라였다.

 

 외세에 기생해 영화를 누린 게 그 개인들만은 아니다. 조선시대에 소외됐던 불교는 일제 때를 반전의 기회로 삼았다. 백용성, 한용운 같은 지사들도 있었지만, 불교 중흥을 명분으로 전투기까지 헌납하며 친일한 이들이 많았다. 3·1운동의 주축이었다가 일제 말 주요 교단들이 신사참배로 생존을 꾀한 개신교는 미군정 이후 미국을 등에 업고 이 땅을 개신교 국가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 일제에 가장 협조적이던 가톨릭도 미군정의 수혜로 교세 확장에 열중했다.

 

그들은 민족이나 나라보다 더 보편적인 진리를 앞세웠다. 그러나 민족 동포와 나라를 버린 채 진리만을 내세운 종교가 있던가. 2천년 전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보면, 알렉산더가 북인도에 침략했을 때 세속을 버리고 나체로 살아가던 고행승마저 격렬하게 저항한다. 로마가 가톨릭을 공인한 것도 국가 지배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고, 루터가 교황에 맞서 개신교를 열 수 있었던 것도 독일 민족주의의 호응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땅에선 단재 신채호가 “왜 조선의 공자, 조선의 석가, 조선의 예수가 되지 못하고 공자의 조선, 석가의 조선, 예수의 조선이 되느냐”고 비판한 ‘식민 종교’가 주류였다. 민족 동포의 해방을 외면한 이기적 종교들이 득세했다.

 

김구와 김창숙-.jpg 

해방 뒤 백범김구와 함께 한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김수환 심산-.jpg 

심산 김창숙 유택에 큰절을 올리는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사진 심산사상연구회 제공

 

  

 2000년 김수환 추기경이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의 묘소를 찾아 큰절 6번을 올렸다. 일제의 고문으로 하반신 불구가 됐던 심산은 백범 암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이승만에게 서릿발 같은 하야 경고문을 발표했던 선비다. 추기경의 절은 종교 간 금기를 깬 행동으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그건 친일 천주교의 참회의 절이 아니었을까. 김 추기경은 나중에 심산연구회의 살림이 어렵자 상금 700만원에 300만원을 더 보태 기부했다.

 

 그런데 일제와 미국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 종교들이 미안해야 할 종교는 따로 있다. 무려 10만여명이 일제에 의해 순교당해 아예 뿌리가 잘린 대종교다. 대종교를 연 홍암 나철은 구한말 장원급제를 한 당대의 사상가였다. 일제가 이 땅을 삼키려는 을사조약을 맺자 가장 먼저 을사 5적의 ‘암살’을 꾀한 이가 그다.

 

홍암 나철-.jpg 

1909년 대종교를 연 홍암 나철. 구한말 과거에 장원급제한 그는 1905년 일제와

친일 대신들이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을사5적의 암살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자

대종교를 중광(다시 열다)시켰다.

 

서일등-.jpg 

청산리대첩을 이끈 대종교인들의 북로군정서. 왼쪽부터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북로군정서-.jpg 

청산리대첩을 이끈 북로군정서. 앉아있는 이가 대종교인 백야 김좌진

 

대종교 3인묘 참배-.jpg 대종교묘지 절-.jpg 대종교묘지에 대중절-.jpg 대종교묘지에서 합장-.jpg 

21년째 항일독립운동 유적지순례를 하면서 연변 회룡시 들판에 방치된 홍암 나철, 서일, 김교헌 대종교 세지도자의

묘지를 찾아 벌초를 하고, 참배를 하는 정토회 법륜 스님을 비롯한 순례단.

 

김동삼-.jpg 김좌진-.jpg 신채호-.jpg 우덕순-.jpg 이동녕-.jpg 이병기-.jpg 이상설-.jpg 이시영-.jpg 이회영-.jpg 장지연-.jpg 정인보-.jpg 주시경-.jpg 지청천-.jpg 최현배-.jpg 홍명희-.jpg 홍범도등-.jpg 

대종교의 항일 지사들. 위 왼쪽부터 김동삼, 김좌진, 신채호, 우덕순, 이동녕, 이병기, 

이상설, 이시영, 이회영,장지연, 정인보, 주시경, 지청천, 최현배, 홍명희, 홍범도.

 

그는 국가 패망의 원인을 기득권의 사대주의로 보았다. 강한 외세가 밀려오면 민족과 국가를 수호하기보다는 힘센 외세에 붙어 자신의 영화와 출세만을 추구하고, 세력을 확장해가는 데만 급급한 기회주의가 멸망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가 민족정신을 되찾기 위해 1909년 대종교를 열자, 5년 만에 30여만명이 몰렸다. 대종교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자 일제의 탄압이 집중됐다. 나철이 1916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절로써 항거하자 지사들이 더욱더 대종교로 모여들었다.

 

 나철의 뒤를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석학인 김교헌이 이었다. 그는 동만주에 군관학교를 열어 독립군을 양성했다. 3·1운동에 불을 지핀 1918년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39인의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이어 1920년 백포 서일과 김좌진, 이범석 등 대종교인들의 북로군정서는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참혹한 보복을 당했다. 독립운동사는 대종교를 빼고 얘기할 수 없다. 그러나 해방 뒤 이승만은 대종교 독립지사들 대부분의 단물만 빼먹고 버렸다.

 

친일·친미의 종교들이 해방 조국의 안방을 차지한 사이 나철과 서일, 김교헌은 죽어서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민족 동포를 위해 살신성인한 3인의 무덤은 중국 연변 화룡시의 야산에 여전히 방치돼 해방을 기다리고 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은 종교다움의 첫걸음이다. 참회 없는, 참된 종교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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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여판사의 죽음에 법관들 "또 누가 이런 일 당할지"

 

[간추려서 단 번에! 한 주간 법조계 소식 1]15.08.12 19:01l최종 업데이트 15.08.12 19:01l김용국(jundorapa)매일 쏟아지는 판결 기사, 법조계 소식. 하지만 흥미 위주의 기사로는 내막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최신 법조계 소식을 쉽게 정리해서 소개합니다.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 법률, 법원·검찰 관련 소식 등 누구나 알아야 할 법률 정보를 알려드립니다. <간추려서 단번에 한주간 법조계 소식>, 줄여서 <간단한 법>이 법을 보는 올바른 눈을 갖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기자 말

① 대법관 후보자,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② 한국 사법신뢰도 27%, 그래도 할 말은 있다?
③ 30대 여성 판사의 안타까운 죽음 
④ 채팅남 잔혹하게 살해한 30대 여성, 법원 판결은? 

대법관 후보자,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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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택(56·14기) 대법관 후보자.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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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를 나온 50대 남자 판사. 

법조계 주변에선 대법관이 되려면 적어도 이런 조건은 되어야 명함을 내민다고 했다. 이번에도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다음달 임기가 끝나는 민일영 대법관의 후임으로 이기택 서울서부지방법원장을 임명 제청(임명해 달라고 요청하는 행위)했다. 헌법(104조 2항)을 보면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되어 있다. 현행 대법관 선발은 ①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후보자 3인 추천 ② 대법원장의 임명제청 ③ 국회 인사 청문회 ④ 대통령 임명 등의 절차를 거치게 된다.  

이 후보자는 민법 분야 이론가이며 지적재산권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대법원이 그동안 약점으로 끊임없이 지적받아 온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충족 시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최근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과 변호사 성공보수금 사건 등에서 대법관 13명 전원일치 판결을 내렸다. 두 가지 사건 모두 일도양단으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복잡한 사건인데도 모든 대법관들이 한 목소리를 냈다는 것은 현 대법원의 '성향'을 가늠케 한다. 이 후보자가 기존 대법관과 다른 의견을 내거나 소신있는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서울대 법대 출신 50대 법관이 또 다시 대법관이 된다면 대법원이 시대 변화나 치열한 논쟁보다는 안정을 선호한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최근 대법원은 상고법원 도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기존에 대법원이 담당했던 상고심(3심) 재판을 별도의 법원을 만들어 처리하겠다는 취지다. 대신 대법원은 국민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건만을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상고법원이 도입되면 다양한 가치관 반영, 충분한 심리,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국민권리 보호에 충실해진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대법원 구성으로는 사회갈등 해소도 다양한 가치관 반영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소수와 다수가 조화를 이루고, 보수와 진보(또는 개혁)가 공존하는 대법원 구성이 먼저다.

한국 사법신뢰도 27%, 그래도 할 말은 있다?

당신은 이 나라의 사법제도와 법원을 신뢰합니까?

지금 누군가 이렇게 당신에게 물었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대체로 부정적인 답변이 예상된다. 한국과 다른 나라를 비교해보면 어떨까. 한 마디로 '처참한'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공개한 
'한눈에 보는 정부 보고서'가 단적인 근거다. 2년마다 내놓는 이 보고서에는 사법제도와 관련된 평가가 포함돼 있다. OECD는 갤럽을 통해 42개 나라에서 일반인 1천 명에게 '사법제도와 법원을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한국에선 27%만이 "예"라고 답했다. 조사 대상 42개 나라 중에서 39등이다.    

덴마크(83%), 노르웨이(83%), 스위스(81%)와 같은 선두권과는 비교할 엄두도 못낼 뿐 아니라, OECD 평균(54%)에도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다. 역으로 보면 시민 10명 중 7명은 사법제도나 법원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10일 공식자료를 통해 이번 조사에 대해 "단순히 국민의 주관적 인식을 조사한 것으로 재판의 객관적인 수준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애써 의미를 축소했다. 또한 "사법제도는 재판, 검찰·경찰 등의 수사, 협의 집행 등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임에도 사법제도와 법원을 분리하지 않고 묶어서 질문하였다"며 법원으로서는 다소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과연 억울한 일일까. 같은 조사에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신뢰도(34%로 26위)도 OECD 평균(42%)보다 낮게 나왔지만 바닥에 떨어진 사법 불신보다는 오히려 나은 수준이었다. 10명 중 7명이 믿지 못한다니 반성과 성찰부터 하는 게 어떨지.  

30대 여성 판사의 안타까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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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 위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오른손에 천칭저울을 글고 왼손에는 법전을 안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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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여성 판사가 자택에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판사는 과도한 업무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지난 5일 서울남부지법 소속인 이아무개 판사(37)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이 판사는 3주 전에도 안면마비 증세가 나타났지만 업무량이 많아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판사는 재판업무 외에도 협의이혼, 각종 위원회 활동과 멘토링, 강의 준비 등도 맡아 격무에 시달려왔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전언이다.  

법원 내부 게시판에는 고인을 추모하고, 법관들의 근무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게시물이 이어졌다. 이 판사의 부고글에는 8백여 개의 댓글이, 추모글에는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렸다. 그 중에는 판사들이 자신의 심경을 담은 글도 적지 않다. 

40대 초반의 C판사는 "(이 판사가) 어린 아들과 딸을 두고 가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텐데 가슴이 아프다"면서 이 판사를 추모하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C 판사는 "장시간의 고강도 근로, 불규칙한 퇴근, 주말근무, 야근의 만성화 등이 당연시되는 현재의 업무환경에서는 언제 누구에게 또 이런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며 "이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다. 

직원 D씨도 "법원 수뇌부는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병들고 힘들어하면서도 자신들의 권리주장조차 못하는 법관들이 다수인 현실을 직시하여야 한다"며 "더 이상 법관들의 근로조건과 처우개선을 외면한 채 폭주하는 사건 해결에만 판사들을 내모는 현실을 개선하라"고 촉구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유명한 법언이 있다. 권리구제 기관인 법원은 정작 내부 구성원들의 권리를 잠재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채팅남 잔혹하게 살해한 30대 여성, 법원 판결은? 

2014년 5월 인천 남동공단 근처 한적한 골목길에서 가방이 발견됐다. 그런데 무심코 그 가방을 열어 본 이는 경악했다. 사람의 상반신 사체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파주시 농수로에서는 하반신 사체가 발견됐는데, 두 사람은 동일인으로 밝혀졌다. 그는 50대 남성 B씨로, 가족들은 가출신고를 해놓은 상태였다. 

누가 왜 그랬을까. 경찰 조사 결과는 뜻밖이었다. 30대 여성 A씨가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것이다. 1년여간의 재판도 "A씨가 B씨를 살해했다"고 결론이 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A씨와 B씨는 채팅사이트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반가워요. 비도 오고 일요일인데 뭐 하시나요"라고 인사말을 건네던 A씨는 B씨에게 만남을 제안했다. 

"우리 서로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애인하기로 해요."

당일 두 사람은 파주에서 만났다. 검정색 투피스와 자켓, 모자를 착용한 A씨는 B씨와 함께  모텔로 향했다. 그런데 그 후 B씨가 모텔에서 나오는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B씨의 카드 사용내역이 확인되었다. 어찌된 일일까. 탐문 수사 결과, 경찰은 카드를 사용한 사람이 "검정색 투피스에 모자를 착용한 여성"이라는 진술을 확보했다. A씨의 인상착의와 동일했다.

A씨는 B씨의 카드로 액세서리 구입을 시도하고 모텔비, 주유비 등을 결제했다. 그뿐 아니었다. A씨가 고양시 일산에서 여행가방과 전기톱을 구입한 사실이 CCTV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그리고 A씨의 차량이 집을 나와 사체가 발견된 장소 주변에서 배회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영상이 잡혔다. 그 무렵 A씨의 휴대전화에서는 인천과 파주 등지를 검색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법원은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A씨는 모텔에서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칼로 B씨를 41회 찔러 살해하였다. 그리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전기톱을 이용하여 사체를 절단하고 여행용 가방을 구입하여 상반신은 인천에, 하반신은 파주에 유기하였다.' 

살인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초기 수사 때 범행을 시인하던 A씨가 입장을 바꿔서 "나는 B씨를 알지 못하고 살해한 적도 없으며, 휴대전화나 채팅 사이트의 명의는 도용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징역 30년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A씨가 범행을 모두 부인하였고 반성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피해자 B씨는 참혹한 고통 속에서 고귀한 생명을 빼앗겼고 피해자의 유족들은 평생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며 "그럼에도 아무런 피해회복도 이루어지지 않은 점 등에 비추어 엄벌이 불가피하다"고 양형이유를 밝혔다. 대법원도 "징역 30년이 부당하지 않다"며 A씨의 상고를 기각, 원심을 확정했다. 

A씨는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법원의 정신 감정결과 A씨는 '히스테리성 인격장애'라는 진단이 나왔다. 스트레스를 당하면 신체증상이 나타나고 부인, 투사(자신의 잘못을 남탓으로 돌려 자신을 보호하는 경향), 정서의 과장된 표현, 합리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기중심적이고 불안정감이 많다는 것이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임이 틀림없다.   


○ 편집ㅣ박순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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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관광객이 찍은 평양의 모습

[영상으로 보는 최신북한5] 외국인 관광객이 찍은 평양의 모습
 
 
 
김혜민 기자 
기사입력: 2015/08/13 [00:59]  최종편집: ⓒ 자주시보
 
 

최근 백두산마라톤 등의 다양한 북한 관광 상품들이 등장하여 화제를 모우고 있습니다.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인 방문객들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에 있는데요,

외국인들이 북한에 가서 찍은 영상, 사진들이 인터넷 공간에 많이 올라와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영상은 바로 외국인의 눈에 비친 평양의 모습입니다. 

HD화질로도 볼 수 있는 영상(영상 아래쪽 설정 버튼을 통해 조정 가능합니다.) 은 개선문부터 시작하여, 주체사상탑, 차가 늘어난 평양 시내, 탑에서 바라본 평양의 해질녘의 모습, 호텔에서 식사하는 모습, 웨딩촬영하는 모습, 김일성광장, 만수대 언덕, 대동문, 옥류관, 인민대학습당, 놀이동산, 판문점 등의 다양한 장소와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각의 장면을 소개합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그 순간의 장면을 보여드립니다.

 

<북한 주민들이 춤을 추면서 노는 모습>

02

 

<개선문과 김일성광장 등 평양시내>

개선문은 광복을 기념하여 제작되었으며, 김일성 주석의 독립운동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북한 안내원이 영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외 김일성 광장, 인민대학습당, 정부 건물, 주체사상탑 등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평양시내의 사람들>

평양 시내의 모습. 버스, 북한 주민들, 교통경찰, 노동신문사 등의 건물이 보입니다.

세번째

 

<탑에서 내려다본 평양의 모습>

영상에서 2차례에 걸쳐 나옵니다.

네번째

 

<웨딩촬영하는 모습>

결혼하는 남녀가 웨딩촬영을 하는데 주변에서 웃으라고 난리입니다.

다섯번째

 

<북한 주민들>

가수들이 한복을 입고 남문에서 공연하는 모습, 공연에 맞춰 사람들이 춤추고 노는 모습, 놀이동산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 북소리에 맞춰 춤추는 할머니들의 모습, 외국인 관광객들도 함께 춤을 추는 모습, 바베큐 먹는 모습 등이 담겨 있습니다.

여섯번쨰

 

 <판문점>

 일곱번째

 

<개성의 모습>

여덟번째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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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선언 계기로 만남을 제안하고 싶다”

 이창복 광복70돌 준비위 상임대표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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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12  17: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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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민족공동행사가 무산된 11일 오후, 이창복 광복70돌 준비위 상임대표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평양 등에서 열리는 8.15민족공동행사에 참가할 남측 대표단 선발대를 11일 정오까지 초청해달라는 제안에 북측이 호응하지 않자 이창복 상임대표는 “우리 민족의 하나됨의 길이 정말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창복 ‘광복 70돌, 6.15공동선언발표 15돌 민족공동행사 준비위원회’(이하 광복70돌 준비위) 상임대표는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 사무실에서 8.15민족공동행사가 무산된 직후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현안들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창복 상임대표는 “어제(10일) 우리는 운영위원과 상임공동대표 연석회의를 해서 8.15민족공동행사에 대한 마지막 방침을 결정했다”며 “마지막 선발대 파견 제의를 오늘 12시까지 해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실무회담을 통해 협의하려 했는데 성사되지 않으니까 ‘우리라도 직접 평양에 가서 행사를 논의하겠다’고 의논하고 있는 터에 ‘시간이 더 없다. 마지막 한 번 더 북에 제안 해봐서 이뤄지지 않으면 그냥 서울 통일민족대회를 충실하게 준비하는 것으로 한다’ 이렇게 결정했다”는 것.

그는 이같은 결정이 내려진 배경에 대해 “우리 내부에서는 북의 계획된 프로그램에 의해 진행된 행사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다”며 “그래서 우리는 ‘대표단 선발대가 가서 협의해서 이뤄지는 행사라야 민족공동행사 아니냐’는 주장도 있어서 수정이 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 결정에 대해 “퍽 잘한 결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 내부 이견도 있고 그래서 조율한 결과”라고 아쉬움을 에둘러 표현했다.

결국 이날 정오까지 북측의 답은 오지 않았고 8.15민족공동행사는 무산돼 분산개최가 기정사실화 됐다. 그는 “상당히 자괴감도 없지 않아 있고, 속상하다”며 “이렇게 진행이 안 되는 게 우리의 정성 부족도 있겠지만 ‘양쪽 당국의 소통이 풍부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구나’하는 것을 느낀다”고 첫 소회를 밝혔다.

또한 “정부 당국자 간에는 서로 충돌도 있고 티격태격 하더라도 민간의 교류는 터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민간차원의 활동은 더 과감하게 풀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광복 70년을 맞이하는 민족통일대회는 비록 서울에서만 개최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남과 북이 함께하는 바탕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고 애써 자위하며 “이번 민족공동행사는 종단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비롯한 민중세력들이 함께 할 것이고 시민사회단체도 힘을 상당히 실어줄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15일 오후 3시 서울 마로니에공원에서 개최할 8.15민족통일행사에서는 △정전협정 폐기와 평화협정 체결,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보유 추진 반대, △미국의 한반도 내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반대 등의 내용을 담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민족자주의 원칙이 남북 간의 확고한 기본이념으로 자리잡고 활동의 기준이 돼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민족자주’에 방점을 찍었다.

아울러 북측 파트너인 김완수 ‘6.15공동선언 발표 15돌, 조국해방 70돌 민족공동행사 북측 준비위원회’ 위원장에게 “김완수 위원장도 얼마나 고심이 클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10.4선언을 계기로 해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하면서 만남을 제안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참 안타까운 것은 통일운동에 뜻을 가지고 열심히 해왔던 젊은이들이 남북공동행사를 위해서 열심히 뛰다가 ‘공동행사가 안 된단다’, ‘분산개최 된단다’ 이러니까 그 동력이 뚝뚝 떨어진 거다”며 “우리들의 노력은 계속돼야 할 것이고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 이루어질 그날까지 우리의 행보는 멈출 수 없다”고 격려했다.
 

   
▲ 광복70돌 준비위는 12일 오전 기자회견을 갖고 8.15민족공동행사 무산에 따른 입장을 밝히고 '광복 70돌, 평화와 통일선언'을 발표했다. 이창복 상임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창복 상임대표는 12일 오전 11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8.15민족공동행사 무산에 따른 입장을 밝히고 '광복 70돌, 평화와 통일선언'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라며, 인터뷰는 기자회견 이후에 보도해달라고 당부했다.

 

다음은 11일 오후 3시 40분부터 광복70돌 준비위 사무실에서 이창복 상임대표아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마지막 제안, “답이 없었다”

□ 8.15가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광복 70주년 민족공동행사를 추진해온 것으로 아는데, 경과와 결과를 알려달라.

■ 우리는 작년 하반기부터 금년이 분단 70년, 광복 70년이 되는 해이고, 또 6.15공동선언 발표 15돌이고, 6.15공동위원회 조직을 만든 것이 10년 된 해이니까 금년을 특별한 해로 설정해서 6.15민족공동행사라든지 8.15민족공동행사를 성대하게 치르자고 남북 간에 합의해서 추진해왔다.

그래서 남북.해외 3자가 합의해서 열심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난 5월 5일 심양에서 3자 위원장단회의를 했다. 거기서 장소 문제 때문에 조금 논란이 있었지만, 내용적으로는 6.15공동행사는 서울에서, 평양에서는 8.15민족공동행사를 하는 걸로 다 합의가 된 상태였다.

다만, 8.15민족공동행사를 평양에서 할 때 남쪽에서 대표단이 가는 것과 동시에 북쪽에서도 몇 사람이라도 대표단을 보내줘서 남쪽에서 개최되는 민족통일대회를 격려하고 참여해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는데 그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로 쭉 왔다.

그러다가 61.5공동행사 추진 과정에서 5월 중순에 결국 우리 정부와 북한 당국 간에 서로 공격적 언사들을 주고받은 결과 실무회담 개최가 어려워졌고, 또 실무회담을 못함으로 인해서 6.15민족공동행사가 분산개최 됐다.

우리가 6.15민족공동행사를 열심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5월 하순에 민족공동행사가 결국은 분산 개최로 가닥을 잡게 되니까 동력이 뚝 떨어졌다. 메르스라는 전염병 우려도 있었고, 대회가 취소되는 분위기였지만 우리는 축소해서 수운회관 교당과 앞마당을 빌려서 3천명이 모여서 민족공동행사를 치르게 됐다.

그 이후에 8.15민족공동행사를 포기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남북 간에 조율을 하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결국 실무회담을 개최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까지 끌어 온 거다.

어제 우리는 운영위원과 상임공동대표 연석회의를 해서 8.15민족공동행사에 대한 마지막 방침을 결정했다.

그 결정이 퍽 잘한 결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 내부 이견도 있고 그래서 조율한 결과가 마지막 선발대 파견 제의를 오늘 12시까지 해달라고 했다. 만약에 이것이 안 됐을 경우에 서울에서 개최되는 민족통일대회를 열심히 준비해서 추동해 나간다고 결정했다.

물론, 가능하면 공동호소문을 공동으로 발표했으면 좋겠지만 결국 남쪽 만의 행사가 될 것이다.

북쪽은 해외에서 일부 들어갈 터이니 해외와 함께 행사를 치르게 될 텐데, 우리 내부에서는 북의 계획된 프로그램에 의해 진행된 행사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표단 선발대가 가서 협의해서 이뤄지는 행사라야 민족공동행사 아니냐’는 주장도 있어서 수정이 된 셈이다.

그렇게 열심히 입만 열면 ‘민족공동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자’고 이야기해 왔는데, 결국 그렇게 안 된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의 하나됨의 길이 정말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길게 보고 가야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 이희호 여사의 방북에 일말의 기대도 있었을 것 같다.

■ 수행단장이었던 김성재 전 장관이 광복70돌 준비위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특별히 주문을 하지 않아도 민족공동행사에 대한 의견을 나눌 수는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회가 오면 좋은 이야기를 해줄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 백낙청 명예교수가 6.15남측위원회 초대 상임대표를 역임했기 때문에, 기회만 주어지면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었을 텐데.

■ 백낙청 명예교수와도 특별히 면담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신전심으로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성사되도록 도와줄 분이라고 생각했다.

□ 선발대 파견 시한을 제시한 것은 이희호 여사 방북 결과를 보고 시간이 촉박해서 판단한 것인가?

■ 선발대로 특사를 보낸다는 것은 그전부터 이야기돼 왔던 것인데, 답이 없었다. 마지막 제안이었다.

그러니까 실무회담을 통해 협의하려 했는데 성사되지 않으니까 ‘우리라도 직접 평양에 가서 행사를 논의하겠다’고 의논하고 있는 터에 ‘시간이 더 없다. 마지막 한 번 더 북에 제안 해봐서 이뤄지지 않으면 그냥 서울 통일민족대회를 충실하게 준비하는 것으로 한다’ 이렇게 결정했다.

□ 아쉬움이 컸겠다.

■ 그래서 상당히 자괴감도 없지 않아 있고, 속상하다. 이렇게 진행이 안 되는 게 우리의 정성 부족도 있겠지만 ‘양쪽 당국의 소통이 풍부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구나’하는 것을 느낀다.

‘민족자주의 원칙’이 기본이념, 활동기준 돼야

 

   
▲ 이창복 상임대표는 '민족자주의 원칙'에 방점을 찍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이제 남측 8.15민족통일대회에 집중하겠다는 입장인데, 이 대회에 대해 설명해달라.

 

■ 광복70년을 맞이하는 민족통일대회는 비록 서울에서만 개최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남과 북이 함께하는 바탕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여건으로 인해 분산해서 대회를 치르는 것이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같은 생각이고 배경이다. 그런 점에서 당위성을 찾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민족공동행사는 종단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비롯한 민중세력들이 함께 할 것이고 시민사회단체도 힘을 상당히 실어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율하는 과정이 상당히 시간이 걸렸고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 남쪽 대회를 두고도 이견이 있나?

■ 스펙트럼이 다양하니까 같은 민족통일대회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 다르다. 그것을 조율해 내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았다.

□ 8.15민족통일대회의 구상은?

■ 15일 오후 3시에 마로니에 공원에서 진행하고, 우리사회에서 민족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모든 세력이 함께하는 대회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한 것은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70년 동안 유지돼 온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평화협정으로 대치하는 운동이 확산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다음에 분단이 이루어진 것은 일본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일본이 최근에 미.일 가이드라인(방위협력지침) 개정을 통해 자위대의 활동 영역을 넓히고 집단적 자위권 보유를 추진하는데 반대하는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발동 때 한국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이런 것이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다. 미군 가는 곳에 일본 자위대가 따라가게 돼 있고, 미국 요청으로 자위대를 파견한다면 우리 정부가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상당히 불행한 일이다.

한편으로 미국이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를 간간이 이야기했다. 실제 그 무기체계가 만들어져 있는 건지, 성능이 확인된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사드를 한국에 배치하려는 점이 중국을 긴장시키고 러시아에게 불안한 마음을 줄 수 있다.

물론, 북한 미사일에 대항해서 배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레이더 탐지 거리가 3,700㎞까지 미쳐 중국 전역을 커버할 수 있다. 중국이 긴장하게 될 것이고, 우리 정부에 대해 배치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이 문제는 미국.일본과 중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가 상당히 외교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돼 있다. 이럴 때일수록 남북 간의 자주적 교류와 협력으로 우리 민족의 생존을 확보해야 하고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나아가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민족자주의 원칙이 남북 간의 확고한 기본이념으로 자리잡고 활동의 기준이 돼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가 이번 8.15를 겪으면서 이 점을 깊이 생각해 가면서 활동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결국 통일방안 문제인데, 6.15공동선언의 1항과 2항이 결국은 중요한 원칙이다. 1항은 민족자주의 원칙이고 2항은 연방제와 연합제의 공통점이 많으니 그런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2항을 북의 연방제를 일방적으로 지지해준 것으로 보고, 매도하는 사람들조차 없잖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설득하고 이해시켜 나가야 한다.

□ 6.15공동선언 2항은 양쪽 입장을 절충했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북쪽 입장보다는 남쪽 입장을 더 많이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문익환 목사와 허담 조평통 위원장이 합의한 ‘4.2 합의서’에서 낮은 단계 연방제 이야기가 나왔다.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의 담판 속에서 연방제를 점차적으로 할 수 있다고 했고, 이렇게 유연하게 해석한 것이 6.15공동선언을 통해 확인됐다고 생각한다.

□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도 떨어지고 남남갈등은 커지는 시류인 것 같다. 이번 8.15행사를 통해 이런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려고 하나?

■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관심이나 열기는 있다. 그러나 표출이 어렵다. 남북관계가 좋아질 때는 그런 지향들이 다 분출돼서 열기가 차는데 지금 남북관계가 얼어붙으니까 그런 의견들이 표출 안 되고 침전돼 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공동행사를 통해 열기를 불러일으키려고 시도를 했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그렇지만 남한 내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대한 통일 열기를 고양시키는데 좋은 기회로 삼고 대회를 준비하려고 생각했다.

이런 통일에 대한 의지나 열기를 고양시키는 것은 계기적인 것도 있겠지만 지속적 반복적 활동 통해서 쭉 해나가야 할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집중적으로 8.15를 통해서 좀더 열심히 해보자는 것이다.

□ 8.15통일대회에 참석할 주요인사는?

■ 아직 더 확인해야 할 형편이다. 적어도 광복70돌 준비위원회의 명예대회장, 상임대표, 공동대표들은 다 참석해 주실 것을 요구하고 있고, 많이들 참석하실 거라 기대하고 있다.

자승 총무원장 스님, 김희중 대주교, 한양원 민족종교협의회 회장, 박남수 천도교 교령, 김영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이런 분들이 참석하실 것이다. 또 민족단체와 시민사회단체들도 조직적으로 많이 참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그날까지 “멈출 수 없다”

 

   
▲ 이창복 상임대표는 북측 파트너인 김완수 위원장에게 오는 10.4선언 계기로 만남을 갖자고 제안했다. 사진은 2013년 7월 베이징에서 열린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단 회의에서 공동보도문을 발표할 때의 모습. 왼쪽부터 김완수 6.15북측위 위원장,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곽동의 6.15해외측위 위원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북측 파트너인 김완수 위원장에게 한말씀 전한다면?

 

■ 김완수 위원장도 얼마나 고심이 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을 기약하며, 가까운 시일 내에, 10.4선언을 계기로 해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하면서 만남을 제안하고 싶다.

□ 우리 정부나 북측 정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정부 당국자 간에는 서로 충돌도 있고 티격태격 하더라도 민간의 교류는 터줄 수 있지 않느냐. 그런데 이걸 정권의 정책에 반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그것마저 꽉 막고 있다. 이게 얼마나 경직된 정치를 하고 있는 건가.

2000년도인가 서해교전이 발생했지만 동해안에서는 유람선이 운행하고 있었지 않나. 그게 정치다. 그런 멋이 좀 있어야 하는데, 너무 꽉 틀어막고 있으니까 참 힘들다 이런 생각을 한다.

꽉 틀어막는다 하더라도 비정치적인 일, 특히 체육교류 이런 것은 조금씩 터놓는 모양인데, 다행은 다행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민간차원의 활동은 더 과감하게 풀어줬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남북 양쪽 다 그렇게 해야 한다.

□ 주무부처인 통일부에 대해 한말씀 한다면?

■ 통일부는 주관부서로서 보다 소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검토하고 고민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또 대안도 제시해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설령 이번 같은 케이스에 북의 초청장을 받지 않아도 우린 보내겠다’ 이렇게 선명하게 나오면 북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건 왜 생각하지 않는지.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통일정책에서 보다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정책으로 전환되기 바란다.

□ 오랜 기간 재야활동을 하면서 늘 어려움을 겪었겠지만 이번 과정을 겪은 소회는?

■ 왜 이렇게 민족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는지, 이것도 운명인지 잘 모르겠다.(웃음)

결국 우리가 좋은 지도자를 만나야겠다. 특히 통일지향적인 지도자를 만나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박근혜 대통령이 입만 열면 통일문제, 남북문제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 많이 하는데 하나도 실천되는 게 없다. 그래서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없잖아 있다.

참 안타까운 것은 통일운동에 뜻을 가지고 열심히 해왔던 젊은이들이 남북공동행사를 위해서 열심히 뛰다가 ‘공동행사가 안 된단다’, ‘분산개최 된단다’ 이러니까 그 동력이 뚝뚝 떨어진 거다. 그때 느끼는 그런 참담함은 참 감당하기 어려운 그런 기분이었다.

그것을 다시 추슬러서 ‘열심히 하자’고 내부 캠페인을 하고 있다. 우리가 열심히 뜀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으면 그게 우리가 오늘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70년 동안 안 됐던 것이 몇 달 동안에 된다면 그건 기적 같은 이야기다. 우리들의 노력은 계속돼야 할 것이고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 이루어질 그날까지 우리의 행보는 멈출 수 없다. 그것이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이고, 민족의 번영을 보장 하는 길이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8.15 민족공동행사가 성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젊은 동지들, 특히 활동가들이 좌절하지 말고 계속해서 굳은 의지를 가지고, 열망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투신해주기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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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달지 않으면 ‘애국자’가 아닌가요?

 
[포토뉴스] 태극기를 달지 않으면 ‘애국자’가 아닌가요?
 
 
 
임병도 | 2015-08-12 10:02:0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광복 70주년’을 기념한다고 거리 곳곳에 태극기가 걸려 있습니다. 태극기 제작업체가 2002년 이후 처음으로 호황을 맞고 있을 정도랍니다. 관공서 건물은 물론이고 관용차에도 태극기가 부착됐습니다. 지하철 손잡이에도 태극기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도 태극기가 걸려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도 태극기 달기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군부대와 지자체는 태극기 조형물이나 태극기 동산을 조성했습니다.

기업들의 사옥마다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습니다. 한화그룹은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는 ‘창조’를 내세웠고, 기업 이미지가 하락된 롯데그룹은 ‘광복 70주년이라 국내에서 가장 높은 롯데월드타워 70층에 태극기를 내걸었다’고 밝혔습니다.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태극기 마케팅에 돈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태극기를 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로 몰려 몽둥이로 맞아 죽거나 총살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태극기는 생존을 위한 도구이자 공포의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애국심은 우러나오는 것이지 강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극기를 달았다고 모두가 애국자가 아니며 태극기를 안 달았다고 모두가 애국자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요즘처럼 비상식적인 세상에서라면 한국전쟁 당시처럼 ‘너는 태극기를 달지 않았느니 애국자가 아니다’ 라는 말이 나올 것 같습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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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기로 맹독 주입 신종 개구리 발견

박치기로 맹독 주입 신종 개구리 발견

조홍섭 2015. 08. 11
조회수 5407 추천수 0
 

머리뼈에 밤송이처럼 돋은 가시로 살모사 25배 강력 독물 주입

나무구멍에 숨을 때 독가시 무장한 머리만 내놓고 천적 방어

 

fr2_CARLOS JARED_BUTANTAN INSTITUTE.jpg» 살모사보다 25배 강력한 독물을 주입할 수 있는 신종 개구리(학명 Aparasphenodon). 납작한 머리와 길고 유연한 목으로 피부 밑에 숨긴 독가시로 상대를 찌른다. 사진=카를루스 자리드

 

열대숲에는 독개구리가 많다. 포식자의 공격을 받으면 피부에서 역겹거나 치명적인 독을 분비한다. 

이런 개구리가 포식자에게 끔찍한 기억을 남기겠지만 독사나 전갈처럼 독물을 상대에게 주입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기존 독개구리와 달리 능동적으로 독을 상대에게 주입하는 개구리가 발견됐다.
 
카를루스 자리드 브라질 부탄탕연구소 생물학자는 대서양 연안인 브라질 동북부의 건조한 숲에서 양서류를 조사하다가 손을 무언가에 물렸다. 팔까지 번진 극심한 통증은 5시간이나 지속됐다.

 

fr1_Corythomantis greeningi_Carlos Jared_Butantan Institute.jpg» 자리드가 발견한 또 다른 독물 주입 개구리(학명 Corythomantis greeningi). 다행히 자리드는 독성이 덜한 이 개구리에 찔렸다. 사진=카를루스 자리드 
 
채집하던 개구리에게 찔렸으리라고는 당시에 상상도 못했다. 나중에 자세히 조사했더니 이 개구리는 개구리 가운데 처음으로 독물을 적극적으로 상대에 주입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연구진은 과학저널 <커런트 바이올로지> 17일치에 실린 논문을 통해 맹독성 독물을 주입하는 신종 개구리 2종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나무에 서식하는 청개구리의 일종인 이 개구리를 손으로 쥐자 끈끈한 분비물을 내면서 동시에 유난히 긴 머리를 전후좌우로 휘두르며 가시로 찌르고 비비려는 행동을 했다.

 

fr4.jpg» 독물 주입 개구리 2종의 성체, 두개골, 가시 부위 모습. A가 독성이 더 강한 A. brunoi, B는 C. greeningi 사진=카를루스 자리드 외 <커런트 바이올로지 
 
주사전자현미경으로 확인한 결과 두개골 가장자리에는 뼈가 밤송이처럼 뾰족하게 피부 밖으로 돌출돼 있었고 이들은 독샘과 연결돼 있어 독을 주입하게 되어 있었다.
 
발견한 2종의 개구리가 모두 맹독성 독물을 주입하는 구조를 보유했는데, 한 종은 그 지역에 서식하는 살모사보다 25배나 강한 독물을 분비했다. 자리드를 찌른 개구리는 독성이 덜했지만 역시 살모사의 2배 독성이었다.

 

fr5.jpg» A. greening의 피부 확대 모습. 별표한 부분이 피부를 뚥고 가시처럼 돌출한 뼈 돌기이다. 사진=카를루스 자리드 외 <커런트 바이올로지>

 

fr6.jpg» A. brunoi(B와 C), C. greening(D와 E)의 피부 독물분비샘과 가시 모양의 돌기(별 모양) 주사전자현미경 모습. 사진=카를루스 자리드 외 <커런트 바이올로지
 
이들 개구리가 맹독을 분비하는 독특한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은 건조한 서식지에 적응하기 위해서일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했다. 수분 손실을 막기 위해 건기 동안 이 개구리들은 구멍 속에 틀어박히는데, 머리를 마개처럼 이용한다. 
 
두개골의 윗부분은 뼈들이 뭉쳐 병뚜껑처럼 납작한 형태다. 천적이 구멍에 숨은 이 개구리를 공격하려고 머리에 입을 들이대다간 끔찍한 독물 세례를 받도록 돼 있다. 특별히 길고 유연한 목으로 휘두르는 이 개구리의 머리는 치명적인 무기다. 
 
연구자들은 “독물을 주입하는 개구리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독성이 강하고 더 흔할 가능성이 있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Jared, Mailho-Fontana, Antoniazzi, Mendes, Barbaro, Rodrigues & Brodie. 2015. Venomous Frogs Use Heads as Weapons. Current Biology http://dx.doi.org/10.1016/j.cub.2015.06.061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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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친일파의 후손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을 제 때 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
 
정운현 | 2015-08-11 19:45:4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사람이 제 맘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조국과 조상이다. 자신이 태어날 땅을 제 맘대로 선택할 수 없으며, 부모를 가려서 태어날 수도 없다. 한날한시에 태어나도 한국 땅에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반대편 남미 땅에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또 부잣집 맏이로 태어나기도 하고 찌들게 가난한 집 막내로 태어나기도 한다. 누구도 그 연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불가의 인연법을 수긍할 따름이다.

친일파 후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원해서 친일파의 아들딸로 태어났다고 볼 순 없다. 태어나고 보니 그들의 부모가 친일파였을 뿐이다. 따라서 친일파 후손들을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친일파 후예들은 그들의 조상과 함께 비난의 대상이 돼 왔다. 그 이유는 후손들의 태도 또한 조상들에 못지않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부끄러운 반민족 행각을 비호, 왜곡하는 것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인호 현 KBS 이사장 같은 사람을 들 수 있다.

최근 <뉴스타파>에서 해방 70년 특별기획물로 ‘친일과 망각’ 4부작을 야심차게 내놨다. 지난 6일 1부 ‘친일후손 1177’을 선보였는데 8개월 동안의 작업성과라고 한다. (2부는 10일 공개) 이들은 참여정부 시절 ‘제2의 반민특위로 불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확정 발표한 친일인사 1,006명의 후손들이다. ‘국가공인 친일파’ 1,006명은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귀족,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 군수급 이상의 고위 관료, 친일단체 주요간부, 저명 언론인·예술인 등 일제 강점기 최고 엘리트들이다.

▲<뉴스타파> 화면 캡쳐

그간 친일파에 대한 조사 및 연구 작업은 더러 있어 왔다. 일생을 친일파 연구에 몸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을 필두로 그 후학들이 거둔 성과가 그것이다. 그러나 친일파 후손들에 대해서는 그간 이렇다 할 만 한 조사가 진행된 적이 없다. 그 주된 이유는 당사자가 아닌 후손을 거론할 경우 자칫 연좌제로 오해받을 수 있는데다 첫머리에서 언급한 ‘조상선택 불가론’도 한 몫을 했다.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친일파 후손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치인, 고위관료, 대학교수, 기업인, 언론사주 등 우리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일 뿐 따지고 보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부와 권세를 거머쥔 부모 밑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심지어 해외유학까지도) 다시 사회에 나와서는 앞에서 끌어주고 옆에서 밀어주니 쑥쑥 크는 것은 당연지사다. 친일기업인들의 재산은 고스란히 후손들에게 대물림됐으며, 이를 물려받은 후손들은 지금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10여 년 전 필자는 대표적인 친일문인 파인 김동환의 3남 김영식 씨(2008년 작고)와 교류한 적이 있다. 총경 출신의 김 씨는 은퇴 후 십 여 년에 걸쳐 전국을 돌며 부친과 관련한 자료를 모았다. 이를 토대로 <파인 김동환 전집>(전5권), <삼천리 영인본>(전 32권), <파인 김동환 문학연구>(전 30권), <언론인 파인 김동환 연구-신문기자. 잡지인>(전 15권) 등을 펴냈다. 2001년 파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는 음악회, 전시회 등 무려 7회의 행사를 개최했는데 이는 한 개인이 하기에는 벅찬 일들이었다.

필자가 그를 주목한 것은 부친에 대한 효성만이 아니었다. 그는 94년 부친의 일대기를 펴내면서 그 서문에서 부친의 친일행각에 대해 부친을 대신해 사죄했다. 이후 김 씨처럼 조상의 친일 행각을 사죄하는 후손이 더러 나타나긴 했지만 그 시작은 김 씨였다. 비단 사죄의 글만이 아니었다. 친일파 관련 토론회 등 각종 행사에 참석해 증언을 하는 등 사죄의 마음을 행동으로도 보여주었다.

다시 첫머리로 돌아가 보자. 조상을 내 맘대로 선택할 수 없는 이상 후손들에게 조상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조상이 친일의 대가로 형성한 기득권을 그 후손이 향유하고 있다면 일말의 책임은 있다고 본다. 그들에게 김영식 씨와 같은 처신을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정부를 상대로 조상 땅찾기 소송을 하는 것까지를 봐줄 순 없는 노릇이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을 제 때 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일 따름이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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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년간 매월 보상금 수령 '가짜' 독립운동가 유족이 사는 법

 

'대전 김태원' 후손들의 이해 못할 행적

15.08.12 08:05l최종 업데이트 15.08.12 08:0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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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김태원 공훈 의혹 진실규명 시민 공동조사단'(공동대표 이순옥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이하 공동조사단)가 지난 6월 24일 오후 2시 대전지방보훈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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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립운동가 유족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대전 김태원'의 후손은 수십 년간 독립유공자 유족 보상금을 받은 것 외에도 생가터와 어록비, 묘지 등 각종 시설물을 남겨 놓았다. 여기에는 여러 허위기록까지 담겨 있다(관련기사: '대전 김태원' 후손, 독립운동가 유족 아니었다).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는 최근 심사를 통해 대전 출신 김태원(金泰源, 1900~1951)의 유족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정부가 건국훈장 독립장(3급)을 추서한 인물은 평안북도 출신 김태원 선생(金泰源, 1902~1926)인데 동명이인인 대전 출신 김태원의 후손이 유족으로 등록됐다는 것이다.

50년 가까이 매월 유족 보상금... 환수는 5년 치만 가능

결국 '대전 김태원'의 후손들은 남의 독립운동 행적을 이용해 수십 년 동안 보훈혜택을 받아온 것이다. 후손들은 약 50년 가까이 매월 독립유공자 유족 보상금을 받아왔다. 유족 보상금은 올 8월 기준 월 181만 8000원이다. 하지만 관련법에는 허위인 경우에도 지난 5년간 받은 보상금(1억여 원 상당)에 대해서만 환수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자녀와 손자녀에게는 중학교 학습보조비 지급, 고등학교 입학금-수업료 전액 면제, 대학 독립유공자 특별전형 응시 수혜와 입학금-등록금 면제 혜택을 준다.  또 취업지원과 교사나 기업체, 공무원 채용시험 시 가산점 혜택도 부여한다. '대전 김태원'의 유족으로 등록된 아들 김아무개(80)씨의 경우 8명의 자녀를 두었다. 사정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김씨 자녀들이 모두 독립유공자 혜택을 받고 학교를 다녔다고 말했다. 

김태원 묘지가 국가지정문화재? 문화재청 "그런 사실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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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동구 상소동에는 김태원의 묘지와 묘지 앞 표지석. 묘지 표지석에는 지난 1977년 12월 1일 자로 당시 문화재 관리청(지금의 문화재청)이 묘지를 문화재로 지정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문화재로 지정한 사실이 없다고 11일 밝혔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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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동구 상소동에는 김태원의 묘지가 있다. 보훈처는 묘소 단장비 등 일부를 지원한다. 그런데 묘지 표지석에는 지난 1977년 12월 1일 자로 당시 문화재 관리청(지금의 문화재청)이 묘지를 문화재로 지정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관리번호까지 쓰여 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김태원의 묘지를 문화재로 지정한 사실이 없다고 11일 밝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김태원의 묘지를 문화재로 지정한 사실이 없고, 1977년은 조직명칭도 '문화재관리청'이 아닌 '문화재관리국'이었다"며 "묘지를 문화재로 지정했다는 표지석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후손들이 묘소를 단장하면서 임의로 표지석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문화재청은 애국지사 등 독립유공자의 묘지를 문화재로 지정한 사례가  없다.

생가터 문화재 자료 지정한 대전시, 인근 주민들 "이곳에서 산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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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시가 1997년 문화재자료로 지정한 대전 김태원 생가터와 설명문. 하지만 인근 주민들은 김태원이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산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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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는 홍도동에 있는 김태원의 생가 유허(터)를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해(1997) 관리중이다. 대전시는 "김태원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라고 설명한다. 안내문에도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은 "김태원이 사망한 지 수년 뒤에 그의 아들이 지은 집"이라며 "김태원이 생전에는 이곳에서 단 하루도 산 적이 없다"고 말한다. 생가터가 아닌 곳을 엉터리 고증으로 문화재자료로 지정했다는 얘기다.

대전시 관계자는 "유족들이 생가터라며 문화재자료로 신청해 지정한 것으로 안다"며 "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 유족이 아니라는 관련 서류가 넘어오면 사실 확인 후 문화재심의위원회를 열어 지정 취소 절차를 밟겠다"고 말했다.

보훈처 어록비 현충시설 지정... 안내문에는 허위사실 '수두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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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8년 10월, 대전지방보훈청이 대전 대덕구 쌍청공원 내에 소재한 김태원 선생 어록비에서 정화 활동을 벌이고 있다.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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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대전 대덕구 쌍청당(조선 시대 학자 송유선생의 별당) 앞에 있는 김태원의 어록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해 관리중이다. 이 시설물은 대전애국지사숭모회가 1997년 설치했다. 

이 시설물 안내판에는 '김태원이 1918년 김용원 선생과 중국에 망명하여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임시정부 내무부 국내 특파 충청도 책임자로 임정의 자금조달을 담당하였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대전 김태원'은 황포군관학교를 다닌 사실이 없다. 임시정부 충청도 책임자를 역임한 인물은 '대전 김태원'이 아닌 '안성 김태원 선생'이다. 보훈처가 가짜 독립운동가의 어록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한 것도 어이없는 일이지만 공훈록에 허위사실이 기록돼 있는 데도 전혀 수정하지 않은 것이다. 

'대전 김태원'의 유족은 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 결정에 불복해 이의 제기를 하겠다는 입장이어서 문화재 지정 취소와 시설물 철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관련기사: '훈장'까지 받은 독립운동가, 행적이 의심스럽다).

한편 '독립운동가 김태원 공훈의혹 진실규명 시민공동조사단'(단장 이순옥)은 12일 오전 10시 대전지방보훈청 앞에서 '김태원 유족 허위등록 보고 및 김정필 유족 양심선언에 따른 사실 확인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할 예정이다(관련기사: "제 증조부 김정필은 독립유공자가 아닙니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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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몸 아파도 쉴 수 없게 만드는 광복 70년’


[참가기] 광복 70년, 8.15반전평화 시국행동 2일차 농성장을 다녀와서
홍휘은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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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11  18:5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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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에도 계속된 8.15반전평화 시국행동 2일차 농성장. [사진-통일뉴스 홍휘은 통신원]

시원한 냉커피를 마시고도 갈증이 나는 8월의 광화문 거리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과 근처 빌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간혹 서서 농성장의 발언과 피켓의 문구를 지켜보았지만, 많은 관심은 두지 않는 듯 무심히 지나쳐 갔다.

버스마다 붙여진 광복 70주년 기념광고판, 가로등마다 휘날리는 태극기, 빌딩마다 대형 태극기가 광복 70년을 홍보하지만 정작 8.15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 2일차 농성장엔 민가협 어머니들이 함께 자리를 해 주셔서 더욱 풍성한 느낌이 들었다. [사진-통일뉴스 홍휘은 통신원]

8.15반전평화 시국행동 2일차 농성장. 11일, 오늘은 민가협 어머니들이 함께 자리를 해 주셔서 더욱 풍성한 느낌이 들었다.

민주화를 위해, 통일을 위해 늘 앞장서서 투쟁의 현장을 지키는 어머니들은 이젠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지만, 이 정권은 ‘나이 들어 몸이 아파도 쉴 수도 없게 만든다’고 하신다.

민가협 조순덕 회장께서는 “올해 8.15는 더 암울하다”며 “박근혜 정권은 군사 정권 때보다 더 악랄하게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 유선근 사월혁명회 공동대표(여성). [사진-통일뉴스 홍휘은 통신원]

사월혁명회 유선근 공동대표도 “올해 8.15 공동행사를 치르지 못하게 된 점이 안타깝고, 더구나 진보민주진영이 더 단단하게 뭉치고 단결하게 하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의 역할”이라고 말씀하셨다. 통일은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될 때만이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하시는 고언이었다.

마이크를 잡고 광화문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에게 발언을 하는 시간도 가졌다.

   
▲ 몸 자보를 부착하고 ‘우리 민족끼리’의 통일을 선전하시는 장기수 김영식 선생님. [사진-통일뉴스 홍휘은 통신원]

지하철에서 몸 자보를 부착하고 ‘우리 민족끼리’의 통일을 선전하시는 장기수 김영식 선생께서는 전철에서 만난 한 어르신이 “일제 36년 끝내고, 다시 외세가 들어 왔는데 그게 어떻게 광복이고 그게 좋다고 태극기를 휘날리고 만세 부르고 난리야~~?”라고 했다고 전하시며 “우리 민족끼리 통일합시다” 하셨다.

가장 쉽고 간단한 구호지만, 어렵게만 느껴졌던 이 말이 오늘은 가슴에 큰 울림이 되어 남는 것은 왜일까.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께서는 “해방 70돌, 분단 70돌이 우리의 의지가 아닌 외세에 의해 통한의 70년이 되었으며, 아직도 미군이 70년간 이 땅을 강점하는 현실에서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은 미국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이 모든 상황의 극복은 우리 끼리 통일하는 하나의 방법밖에는 없다”고 하시며 “자주적으로 통일 세상을 이루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하셨다.

아울러 박근혜 정권의 방해 책동으로 8.15 공동행사를 치르지 못하게 된 점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다.

   
▲ 시국행동 2일차 농성에 앞서 공안탄압저지시민사회대책위원회(준) 주최로 ‘박근혜폭압정권퇴진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사진-통일뉴스 홍휘은 통신원]

시국행동 2일차 농성에 앞서 공안탄압저지시민사회대책위원회(준) 주최로 ‘박근혜폭압정권퇴진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하늘도 찌뿌둥하게 흐린 8월 둘째 주 화요일, 민족의 진정한 해방과 자주적인 통일을 염원하는 외침이 광화문에 울려 퍼지길 바라며 떠 오른 노래 가사.

“... 하나가 되자, 하나가 되자. 이 기쁨을 누구에게 전할까~ 이 노래를 이 꿈을 희망을, 내일의 우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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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함지뢰 폭발사고, 왜 ‘북한 소행’을 숨겼는가?

 
 
MBC,SBS.JTBC 등 대부분의 언론은 ‘목함지뢰 폭발 사고’를 보도하지 않았다
 
임병도 | 2015-08-11 10:07:2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8월 4일 오전 7시 40분 경기도 파주 육군 1시단  DMZ에서 북한군이 매설해 놓은 목함 지뢰가 폭발했습니다. 이 사고로 부사관 2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고 직후 김모 하사 등 부사관 2명은 헬기로 군 병원에 이송됐습니다. 부사관 2명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다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당시 김모 하사 등 10여 명은 군사분계선 이남 440m 지점의 우리 군 수색정찰로 상에 있는 통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국방부가 공개한 영상을 보면 우리 병력이 통문을 지나는 순간 지뢰가 폭발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한국군 통문 지역에 목함지뢰를 설치해 아군 2명이 부상한 것은 북한의 고의적인 살상 행위이자 침투작전으로 봐야합니다. 북한군의 군사도발, 심각한 정전협정 위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건을 돌이켜 볼 때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왜 8월 4일 사고가 지금에서야 공개됐느냐는 부분입니다.


‘유실된 지뢰 vs 북한군 소행’

북한소행 목함지뢰 폭발 사고가 났던 8월 4일, 대부분의 언론은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KBS뉴스, 그것도 경인방송의 지역 소식에서만 보도됐습니다.

8월 4일 KBS9 경인에서는 ‘서부전선 DMZ 지뢰 추정 폭발… 부사관 2명 부상’이라는 뉴스를 보도했습니다. ‘뉴스9 경인방송’에서는 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원인이 확인되지 않은 폭발 사고’가 일어났으며 ‘폭우 등으로 유실된 대인지뢰나 부비트랩을 밟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KBS9 경인방송은 군 당국이 폭발에 북한이 연루됐을 가능성은 낮다고 밝혔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MBC,SBS.JTBC 등 방송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언론은 ‘목함지뢰 폭발 사고’를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매체에서도 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북한제 지뢰’는 아니며 ‘폭우로 유실된 지뢰’라고 보도했습니다.

모든 언론이 침묵하거나 ‘폭우로 유실된 지뢰’라고 보도한 상황에서 김광진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폭발된 지뢰는 북측의 목함지뢰이며, 유실이 아닌 매설’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김광진 의원이 주장한 ‘유실이 아닌 매설’의 파문은 컸습니다. 우리 병사들이 다니는 통문과 수색로에 북한군이 지뢰를 매설했다는 사실은 고의적인 도발행위이자 군사도발이기 때문입니다. 김광진 의원의 주장을 오마이뉴스가 8월 9일 오후 5시 2분 ‘DMZ 또 뚫렸나..터진 지뢰는 북한제’라며 보도했습니다.

조선닷컴도 8월 9일 오후 5시 30분 “野 김광진 ‘DMZ 지뢰 폭발 사고, 北이 매설한 목함지뢰’ 주장”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가 삭제하기도 했습니다. 일부에서는 김광진 의원의 주장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국방부는 북한군 소행임을 알았다’

‘유실된 지뢰’이거나 ‘북한군 소행 가능성은 낮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국방부는 이미 8월 5일부터 북한군 소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국방부는 8월 6일 출입기자단에 ‘북한제 목함지뢰가 폭발한 것 같다’고 공개했습니다. 그러나 8월 10일 오전 10시 30분까지 이 사실을 보도하지 말라는 ‘엠바고’를 걸었습니다. (엠바고는 취재한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일정 기간 미루기로 약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방부는 이미 사고 지점이 통문이자 북한 쪽 지형보다 높아 유실된 지뢰가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나, 수거된 지뢰 잔해가 녹슬지 않았던 점 등을 통해 북한군 소행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북한소행 목함지뢰 폭발사고, 엠바고를 걸어야 했나?’

국방부는 정밀 조사가 끝나면 공개하라는 엠바고를 걸었지만, 과연 엠바고가 필요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가장 큰 이유는 조사 이후의 공백입니다.

8월 6일부터 7일까지 ‘국방부 전비태세 검열단’과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특별조사팀’은 합동으로 폭발사고 현장조사를 했습니다. 정밀조사를 통해 합동참모본부는 유실지뢰일 가능성은 희박하고, 오히려 북한군이 의도적, 불법적으로 군사분계선을 침범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8월 7일 조사가 끝났는데, 왜 국방부는 8월 8일이 아닌 8월 9일 오후 2시에 기자를 상대로 브리핑하고 현장 방문을 했을까요? 또 국방부 출입기자단은 8월 9일이 아닌 8월 10일에 보도했을까요?

①  작전도 아닌 조사에 엠바고를?

엠바고는 필요합니다. 군사 작전이 시작될 시간과 규모 등이 사전에 공개한다면 당연히 안 됩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작전이 아닌 조사입니다. 벌어질 사건이 아닌 벌어진 사건, 충분히 북한소행임을 알 수 있는 증거가 사전에 나왔는데도 엠바고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 듭니다.

② 주말이라 엠바고를?

국방부는 8월 10일 월요일 브리핑을 했고, 모든 언론이 일제히 ‘목함지뢰 북한 소행’이라는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금요일에는 국민이 쉬어야 하니 엠바고를 걸고 월요일에 보도하는 친절함을 보였을까요? 과거 국방부나 검찰 등의 정치적 사건의 민망한 중대발표가 금요일에 있던 적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③ 전쟁에는 주말이 중요치 않다.

아이엠피터가 이번 사건에 왜 엠바고가 필요했냐고 반문하는 이유는 북한의 도발에 우리 군이 어떻게 대응했느냐 때문입니다. 북한이 아군 지역까지 침투하여 지뢰를 매설했다면 DMZ 전 지역의 통문이나 수색로에 대대적인 지뢰 수색 작업을 벌었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합동참모본부의 발표에는 ‘DMZ 경계 작전 태세를 재점검하겠다’라는 보도자료 뿐이지 전군의 수색 작업 결과는 없었습니다.

북한군이 침투해 아군이 부상을 당한 사건이 벌어진 군사도발에 대한민국 국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와 ‘남남갈등 조장 의도’라는 분석뿐입니다. 아이엠피터는 군당국이 ‘목함지뢰’를 매설한 북한군의 도발 원인이 왜 ‘남남갈등’을 불러일으킨다고 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북한이 아군 통문 지역과 수색로까지 와서 지뢰를 매설했는데도 몰랐다는 ‘경계 부실’과 전군 DMZ에 얼마나 지뢰 매설과 같은 군사도발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수색하고 조사’하는 일입니다. 또한 군사도발에 대한 대한민국의 ‘군사적 대응’입니다.

고작 대북 확성기 방송뿐인 국군이 어떻게 ‘단호한 대처’를 할지 자못 궁금해지면서, 오히려 국방부가 북한군의 군사도발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모습에 실망감이 듭니다. 안보만큼은 ‘새누리당 박근혜’라고 주장했던 대통령에게 어떤 강력한 군사대응 작전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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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만의 귀환…15살 인민군 포로의 기구한 운명


등록 :2015-08-11 09:54수정 :2015-08-11 10:04


 

‘소설 같은 인생’ 김명복씨 귀국
북한 못가고 한국에 온 김명복씨. 사진 이정용 기자
북한 못가고 한국에 온 김명복씨. 사진 이정용 기자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중립국으로 가는 석방 포로를 실은 인도배 타고르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삼천 톤의 몸을 떨면서, 물건처럼 빼곡히 들어찬 동지나해의 공기를 헤치며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0)은 한국전쟁 이후 인천항을 떠나 중립국 인도로 가는 배에서 시작한다. 배에는 주인공 이명준 등 본국 송환을 거부하고 ‘제3국행’을 택한 한국전쟁 포로들이 타고 있다.

 

 

15살 때 인민군 징집됐다 
한달 만에 포로로 붙잡혀
남도 북도 아닌 인도 거쳐 브라질로

 

 

고향 찾는 과정 그린 ‘리턴 홈’
주인공으로 지난달 한국 입국해
“고향 평북 땅 생전에 밟아봤으면”

 

 

1954년 2월의 현실은 소설과 같았다. 한국전 당시 제3국행을 택한 전쟁 포로 77명(중국인 포함 88명)이 인천항에서 ‘아스투리아스호’를 타고 실제 인도로 떠났다. 이 가운데 55명이 다시 브라질로, 9명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김명복(80·사진) 할아버지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젊은 시절 김명복 할아버지. 영화사 아침해놀이 제공
젊은 시절 김명복 할아버지. 영화사 아침해놀이 제공
김 할아버지는 최근 고향인 평안북도 룡천을 떠난 지 65년, 인도를 거쳐 브라질로 떠난 지 61년 만에 남한 땅을 다시 밟았다. “15살 여름에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군인들이 들이닥쳐 무작정 다들 트럭에 타라고 하더라고. 그렇게 ‘인민군 쫄병’으로 징집이 됐지. 돌아오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누가 알았겠나?”

 

10일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할아버지의 눈은 허공을 향했다. 그렇게 참전한 한국전쟁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참전 한 달도 안 돼 포로가 된 그는 이후 부산에서 거제, 영천, 마산, 중립지대(판문점) 수용소까지 여러 곳을 전전하며 3년을 보냈다. 그리고 휴전이 됐다.

 

그가 평생 들어왔을, 그리고 스스로도 자문했을 질문을 던졌다.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남한에 남을 수 있지 않았냐고. 한참 뜸들이던 할아버지는 판문점 수용소에서 겪은 일화를 들려줬다. “한 텐트에서 지냈던 동료가 ‘고향에 가고 싶다’는 잠꼬대를 했다가 맞아 죽었어. 한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포로가 되는 것 자체를 죄로 여기던 북한도, 고향 가고 싶단 말에 맞아 죽는 남한도 선택할 수 없었지.”

 

그는 자신을 받아줄 나라를 기다리며 인도에서 2년을 머문 뒤 1956년 브라질로 갔고, 최대 도시 상파울루에서 1000㎞ 넘게 떨어진 ‘오지’ 마투그로수주 쿠이아바에 정착했다. 말조차 통하지 않는 신산한 삶이었지만, 착한 브라질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 둘, 딸 둘을 낳았다. 농사를 지어 자식들 대학교육까지 시켰다.

 

“먹고사느라 고향을 마음으로 그리워만 했어. 호랑이도 죽을 땐 고향을 찾는다는데…. 부모님은 돌아가셨겠지. 5살 터울 누이와 2살 터울 남동생은 혹시 살아 있을까? 일요일마다 다녔던 부평교회는 남아 있을까? 그냥 고향 땅만 밟아도 좋겠어.” 이내 김 할아버지는 눈물을 쏟았다. 흐느낌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5년 전 뎅기열에 걸려 삽관 치료를 받다 기도를 다쳐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말했다. “미안해. 다 늙어서 무슨 꼴이람. 미안해.”

 

브라질 농장에서 일하는 젊은 시절의 김명복 할아버지. 0078도 인도에서 찍은 젊은 시절의 김명복 할아버지. 영화사 아침해놀이 제공
브라질 농장에서 일하는 젊은 시절의 김명복 할아버지. 0078도 인도에서 찍은 젊은 시절의 김명복 할아버지. 영화사 아침해놀이 제공
그는 이번 방문길에 브라질에서 죽은 동료 김서국, 김창언의 유골을 안고 왔다. 죽어서라도 고향에 가고 싶다던 염원을 이뤄달라는 가족들의 부탁을 받은 터다. 하지만 고향에 갈 길은 아직 막연하다. 브라질 주재 북한 대사관과 북한 주재 브라질 대사관은 물론 한국 정부에까지 호소하고는 있지만, 다들 미온적이다. “이젠 시간이 없어.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 이번에 꼭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수밖에….”

 

자신과 동료 생존 포로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조경덕 감독이 찍고 있는 다큐영화 <리턴 홈>(귀향)이다. 조 감독은 2009년 중증 장애인의 성적 권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섹스 볼란티어>가 상파울루 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며 시상식을 위해 찾은 브라질에서 생존 포로들의 이야기를 처음 접한 뒤 6년째 이 영화 제작에 매달리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조 감독과 함께 지난 5월 브라질을 출발해 인도, 아르헨티나 등을 거쳐 7월말 한국에 입국했고, 이 여정은 영화에 담길 예정이다. “포로생활을 하던 부산·거제·양평 등을 다니니 많이 잊었던 한국말도 기억나고, 고향 생각도 더 간절해. 13일에 판문점에 가는데 멀리서나마 고향 땅을 볼 수 있을까?”

 

글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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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해킹 '역사와 진실 난도질'-민주국민행동 함세웅 신부

국정원해킹 '역사와 진실 난도질'-민주국민행동 함세웅 신부
 
 
 
주권방송 
기사입력: 2015/08/10 [19:54]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해킹의 원래 뜻은 ‘난도질하다’는 것.
국정원 해킹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불법권력이 역사와 진실, 국민을 난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 민주주의국민행동 상임대표 함세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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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바란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8/11 10:13
  • 수정일
    2015/08/11 10:1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칼럼> 김종수 새정치민주연합 통일전문위원
김종수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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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10  11:2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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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한반도 신뢰 독트린’ 밝히라

광복 70주년·분단 70주년의 광복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북주민들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과 한반도 평화·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이러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여전히 불신과 대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북당국자들의 몰역사적 인식과 무책임성에 유감을 표한다.

이번 달 중하순부터 한미 양국은 ‘을지프리덤가디언(UFG)’ 군사훈련을 시작한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에 대한 북한당국의 극렬한 대결적 반응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북한당국은 우리정부와 미국정부를 향해 ‘북침핵전쟁연습’을 한다면서 거친 비난을 매일 쏟아 낼 것이고 우리정부는 물론 민간차원의 대화도 거부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조선노동당 창당 70주년 기념일을 즈음하여 ‘장거리 로켓’ 발사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북한의 추가적인 도발 행위는 한반도 정세를 더욱 혼란하게 만들 것이 뻔하다. 국내 정치 일정을 보더라도 내년에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고, 2017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어 올해 내 남북관계의 정상적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현 정부 내에서 남북관계 발전은 요원해 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역대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중요한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 노력 방안 등이 제안되어 왔기에 광복 70주년을 맞는 광복절의 대통령 경축사는 더욱 주목받는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남북관계 개선의 마지막 기회는 광복 70주년 광복절의 대통령 경축사이다. 

대통령은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관계 개선,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2014년 3월 28일에 있었던 ‘드레스덴 연설’처럼 우리가 하고 싶은 말만 쏟아 내고 북에게 수용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서로 ‘공감’하는 내용을 진정성 있게 제안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정부는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의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다시 한 번 천명하여 북의 호응을 유도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북한당국에게 연설 전에 경축사 내용을 전달하여 충분히 검토하고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번 광복절 경축사는 남북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통일의 비전을 담은 ‘박근혜 한반도 신뢰 독트린’이라 불릴 수 있도록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남북 당국 상호 비방·중상 중단 이행을 통한 신뢰 구축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정부가 민간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적극적으로 규제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실천적 차원에서 대통령이 국회의장에게 국회 본회의에 계류 중인 ‘남북당국 상호 비방·중상 중단 이행 촉구 결의안’의 조속한 처리를 요청할 필요가 있다. 북한당국에게도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당국자에 대한 비난을 중단할 것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남북관계 정상화의 상징적·현실적 장애물인 5·24조치에 대한 철회를 선제적으로 밝혀야 한다. 우리국민의 방북 불허, 신규 투자 불허, 남북교역 전면 중단과 같은 조치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남북 교류협력 사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정부가 먼저 남북관계 정상화의 걸림돌인 5·24조치를 과감히 해제하여 남북관계 정상화의 토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남북관계 정상화 걸림돌을 제거한 후 북한당국에게 대화의 장으로 나올 것을 촉구한다면 북한이 거부하기에는 궁색한 입장이 될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남북 공동번영을 위해 북한의 경제특구에 우리정부와 기업들의 투자 의향을 적극 표명하고 특구공동 개발을 위한 남북 당국 회담 개최를 제안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북한이 특구 개발을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현실과 새로운 경제성장 동력을 찾지 못해 정체하고 있는 한국경제에게도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북한 경제특구에 대한 남북 경제협력사업은 유무상통 정신이 발휘되어 공동번영을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의 명절인 추석이 한 달 좀 넘게 남아있다. 이산가족 문제는 이념을 뛰어 넘는 인륜의 문제이다. 이산가족의 평생 소원인 북녘의 가족을 만나도록 해야 한다.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이산가족의 상봉 장소는 이산가족면회소가 있는 금강산이다. 금강산관광은 2008년 박왕자씨 피격 사망 사건 이후 장기 중단 상태이다. 남북이 서로 원하는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관광 재개를 패키지 묶어 해결하는 ‘남북 당국 이산가족상봉·금강산관광 재개 회담’을 제안하자.

이산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생사확인, 서신왕래, 화상 상봉, 상봉 정례화를 합의하고 금강산관광을 재개한다면 남북 간의 인도주의 문제는 큰 진전을 가져올 것이다. 북한당국도 장기 억류 중인 김정욱, 최춘길, 김국기, 주원문, 임현수씨 등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남북 간의 신뢰는 더욱 증진될 것이다.

만성적인 식량·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주민들에게 조건 없는 대북인도적 지원을 전면 재개한다는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 인도주의와 동포애를 발휘하여 북한주민의 마음을 얻어 통일의 기반을 갖추기 위해 대북 인도적 지원은 꼭 필요한 사업이다.

대통령이 ‘드레스덴 구상’에서 민생통로 등을 제안하고 인도적 지원을 밝혔지만 북한당국은 ‘드레스덴 구상’ 자체를 ‘체제전복’ 음모라고 하면서 여기서 언급한 인도적 지원 사업은 수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정부는 북한당국이 인도적 지원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굳이 ‘드레스덴 구상’을 내세우지 않고 보편적인 인도주의와 동포애를 명분으로 한다면 정상적인 인도적 지원 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의 핵심 우려 사항들에 대해 해결하기 위해 남북 간의 논의도 진척시켜 나가야 한다. 2008년 12월 이후 장기 중단된 6자회담을 재개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를 동시 병행하는 6자회담을 재개할 것을 관련국들에게 촉구할 필요가 있다.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는 북핵문제의 해결과 함께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사항을 협상하도록 되어 있다.

진정한 해방과 광복은 분단의 극복을 이룰 때까지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광복절은 통일한국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오늘의 분단 모순을 극복하는 시대적 과제를 제시해야 한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관계 개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방안이 제시되길 기대하고 촉구한다.

 

김종수 (새정치민주연합 통일전문위원)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나 동국대 북한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KYC(한국청년연합회) 평화통일센터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원회 통일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통일준비위원회 정치·법제도 분과위원회 전문위원, 인제대학교 통일학연구소 연구위원, 민화협 정책위원, 도산통일연구소 연구위원, 동국대학교 강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쓴 글로는 “대학통일교육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2015), “독일 ‘통일정책’의 한국적용 방안과 의미”(2015), “북한 제13기 최고인민회의 출범과 남북 국회회담 전망”(2014), “강원도 도지사 후보자 남북관계 공약 비교와 당선자 공약이행 전략연구”(2014), “북한 김정은시대 청년동맹 연구”(2013), 『북한 청년동맹 연구』(한울,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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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상떨지 말고 계좌번호" 댓글 하나에 쏟아진 '군자금'

 
[김종술 '투명카약' 선물 프로젝트③] MB 때문에 '개고생'하는 그를 위해

김종술 기자 쪽지보내기 | 15.08.10 21:39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김종술 투명카약 선물하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이틀도 안 돼서 300만 원 목표액이 달성됐습니다. 뜨거운 참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프로젝트 기사는 오는 31일 낙동강 현장 탐사 기획 보도가 마무리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계속 쌓이는 후원금은 김종술 기자의 취재비 등으로 사용합니다. 이 기획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과 환경운동연합의 공동 프로젝트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 김종술 기자의 '페친들'로부터 메시지가 쏟아졌습니다. 저도 당황했습니다. 총 15명이 "계좌번호를 보내달라"고 메시지가 왔습니다. ⓒ 고정미


"노트북이랑 카메라 고장, 돈도 없는데……."

지난해 9월 어느 날, 김종술 기자의 개인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입니다. 또, '짜는 소리'라고 짐작했습니다. 강에선 큰빗이끼벌레까지 먹은 '괴물기자'지만, 강 밖에선 '투덜이 스머프'였으니까요. 곧바로 "헤헤헤~" 하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페이스북에 재등장할 줄 알았습니다. 4대강 사업 후에 늘 힘든 상황을 초인적으로 이겨 온 그였으니까요.

"궁상떨지 말고 계좌번호 불러유"

 

▲ 김종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지난 6월 24일 오전 충남 공주시 공주보 상류 1km 지점에서 확인한 큰빗이끼벌레를 찾아 들어 올리고 있다. ⓒ 이희훈


그런데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다른 때와는 좀 달랐습니다. 수리비가 삶의 회한으로 이어진 것일까요? 전화통에 대고 그를 추궁했더니 4대강 사업 후 빈곤해진 주머니 사정을 슬쩍 비쳤습니다. 들을 때마다 기막히고 코가 막히는 사연입니다.

"됐고, 궁상떨지 말고 계좌번호 불러봐유."

'괴물기자'답지 않게 우물쭈물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쭈뼛거리는 이유를.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고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괜히 '승질'이 났습니다. 참다못해 한 마디 내질렀습니다.

"뭐, 잘못했슈? 누구처럼 사기 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닌디, 도움 좀 받으면 어떠나유."

흥분하니 충청도 고향 사투리가 튀어나왔습니다. 하지만 김종술 기자의 마음은 도통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당근과 채찍을 반복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결국 또 다른 지인으로부터 간신히 계좌번호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곧바로 적은 금액을 그의 계좌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일을 더했습니다. 그의 페이스북 글에 댓글을 달았습니다.  

댓글 하나에 후원금 우르르

"금강요정의 고장 난 '무기' 수리비를 모아 보지요. 저부터 적은 금액을 보냅니다. 혹시 도움을 주고 싶은 분들은 저에게 메시지를 보내 주세요."

호기롭게 글을 썼지만 망할 줄 알았습니다. 댓글 하나로 노트북 수리비를 모은다는 게 어이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김종술 기자의 '페친들'로부터 메시지가 쏟아졌습니다. 저도 당황했습니다. 총 15명이 "계좌번호를 보내달라"고 메시지가 왔습니다. 

한 페친은 "태어나서 처음 기자를 후원해본다"고 했습니다. 묵묵하게 금강을 지켜온 김종술 기자에게 저처럼 마음 빚을 졌던 분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김종술 기자에게 수리비가 전달됐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김 기자는 수리된 장비를 챙겨들고 또, 금강으로 향했는지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쏘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괴물기자다웠습니다.  

MB와 맞짱 뜨고 있는 김종술

 

▲ 지난 6월 24일 오후 4대강 사업 이후 금강 실태 취재에 나선 김종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충남 서천군 금강하구둑 부근에서 짙게 발생한 녹조를 병에 담은 뒤 강에 다시 붇고 있다. ⓒ 권우성


알고 계시나요? 그동안 MB와 맞짱을 뜨고 있는 김종술 기자의 활약상을. 그가 지금까지 쓴 4대강 기사는 무려 800개나 됩니다. 아마 김종술 기자는 몰라도 금강 물고기 떼죽음, 큰빗이끼벌레 창궐, 4대강 준설로 천년역사 공산성 붕괴 등은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 세상에 알린 이가 바로 김종술 기자입니다. 

두 발로 금강을 누빈 그에게 이번엔 두 손으로 금강을 휘젓고 다닐 수 있도록 투명카약을 선물하고자 합니다. 왜냐고요? 잘못된 대형국책사업의 실패를 똑바로 바로보지 않고 평가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제2의, 제3의 4대강 사업이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종술 기자에게 투명카약 선물하기>는 4대강 사업을 시민들의 힘으로 평가한 최초의 시도가 될 것입니다.   

'하수상'한 시대... 우리는?

 

▲ 4대강 공사 후 곰나루에서 본 금강 하류. ⓒ 이경호


시대가 하수상해서일까요? 우리사회의 모든 게 움츠리고 경직돼 있는 듯합니다. 카톡과 휴대폰, 인터넷... 하다못해 누군가를 돕는 좋은 일마저도 눈치를 보는 시대입니다. 정권의 입맛대로 후원을 결정하는 게 어느새 살아가는 방법이 된 세상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기를 희생해가면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숨어서 도와야 할까요? 과연 김종술 기자를 돕는 게 비밀에 부쳐야 하는 일인가요? 고작 돈 몇 만 원 보낸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이 많아집니다. 

정직한 기자, 언론다운 언론을 후원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혹시 누군가에게 비밀로 하고 있으신가요? 혹시 자신 있게 "내가 오마이뉴스 후원자다", "10만인클럽 회원이다"라고 말하지 못하시고 계신가요?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반가운 소식을 하나 전해드립니다. 최근 한국광고주협의회가 작성한 '2015년 유사언론 행위 피해실태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조중동도 유사언론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악의적인 기사를 대가로 기업에 광고, 협찬을 강요하는 등의 행위를 한 언론 리스트입니다. 대충 감이 오나요? <오마이뉴스> 홈페이지가 상대적으로 광고가 적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유사 언론'이 신문부수 1, 2, 3위

그런데 어찌된 영문일까요. 유사언론 리스트에 포함된 조중동의 유료부수가 엄청납니다. 한국ABC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2014년 조중동의 유료부수는 281만 부로 집계됐습니다. 나란히 1~3위를 기록했습니다. 이에 반해 유사언론에서 빠진 오마이뉴스의 10만인클럽 회원은 아직 9000명 정도입니다. 언론보다 유사언론이 언론지형을 장악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 더 용기를 내주셨으면 합니다. 따지고 보면, <김종술 기자에게 투명카약 선물하기>는 김종술 기자를 응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수상한 시대에 움츠린 독자들을 응원하는 일입니다. 어찌 보면 나의 신념과 가치를 세우는 일입니다. 좋은 세상을 위해 마음을 모으는 일입니다. 언론다운 언론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기레기를 넘어 언레기(언론 쓰레기)가 판치는 세상에 짱돌을 던지는 일은 정직한 기자, 언론다운 언론을 후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레기의 본질적인 문제도 언레기에 있습니다. 귀찮고 번거로운 후원하기를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당당히 "바보야 문제는 언레기야!"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그런데 간혹 이런 말을 하면, "그럼, 너는 얼마나 했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5일 첫 보도가 나오자마자 거금(?) 10만 원을 결제했습니다. 후원금을 내려고 클릭을 하니, 자꾸 '설치'하겠냐 묻고, 그것도 모자라 '동의'하냐고 짜증나게 캐묻는 가시장벽들을 헤치고 '이체'에 성공했습니다. 5분도 채 걸리지 않더군요. 물론 저 역시 김종술 기자처럼 매달 오마이뉴스에 '군자금'을 보내주는 10만인클럽 회원이기도 합니다.  

용기를 내서 짱돌 한 개 던져 봅시다

끝으로 독자여러분, 계란으로 바위치기면 어떻습니까.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면 또 어떻습니까. '하나마나 하는 짓'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기울어진 운동장과 침묵하는 세상을 향해 짱돌이라도 하나 던지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다"는 말처럼 녹조가 피고 큰빗이끼벌레가 창궐하고 실지렁이와 깔따구가 드글드글한 지금의 4대강처럼 변하지 않을까요. 우리, 용기를 내서 짱돌 하나씩 던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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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카약①] "밤길 조심해" 협박,폭행 당해도... 취재수첩 놓지 않았다
☞[투명카약②] 국토개조 아닌 '국토개판'... 시궁창이 따로 없습니다
☞ [탐사보도] <금강에 살어리랏다>
☞ [연재기사] <김종술, 금강에 산다> 10만인리포트
☞ [방송] EBS 하나뿐인 지구 : 금강에 가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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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

 
 
한호석의 개벽예감 <168>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5/08/10 [11:23]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1945년 8.15 이후 38도선 이남의 민심
2. 두 차례 연속 핵참화를 입고서도 즉각 항복하지 않은 일제
3. 일왕의 8.15 라디오방송은 항복방송이 아니었다
4. 미주리호 함상의 항복문서조인식은 희대의 기만극
5. 점령군 군용기편으로 귀국한 조선총독
6. 포츠담 회의에서 미국이 꾸민 음모
7. 미국을 위해 총을 쏘고, 미국인보다 앞서 피 흘리는 군사기지

 

▲ <사진 1> 이 사진은 1945년 8월 16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의 당시 명칭)에서 석방된 항일운동가들이 환영인파 속에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석방이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재홍의 말대로, 남조선에서 해방은 항일운동가들이 석방된 바로 그날 하루뿐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1. 1945년 8.15 이후 38도선 이남의 민심


올해도 어김없이 8.15가 다가왔다. 해마다 8.15를 맞는 한국인들은 일제식민통치로부터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주관적 믿음이지 객관적 사실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올해 70번째 8.15를 맞았으나, 한국에서 광복절이라고 부르는 8.15는 해방의 날이 아니다. 8.15가 해방의 날이라고 가르쳐온 주입식 역사교육에 의해 한국인들은 8.15를 해방의 날이라 믿는 것이지, 실제로 그날은 해방의 날이 아니었다. <사진 1>


8.15가 해방의 날이 아니었다는 말은 1945년 8월 15일이 해방의 날이 아니었으나 그날 이후 일정한 시기가 지난 뒤에 해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1945년 8월 15일로부터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여전히 해방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왜 그런 것일까?
아래에 인용하는 두 사람의 발언은 이제껏 8.15에 대해 알고 있었던 한국인들의 역사인식이 무지와 오해에 지나지 않았음을 드러내준다.


여기에 인용하는 첫 번째 발언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가로 활동하였고 8.15 직후 38도선 이남에서 우파정치인으로 활동하였던 안재홍이 남긴 말인데, 그는 “남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인용하는 두 번째 발언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2006년에 발굴한 2,000여 장의 편지들 가운데 어느 편지의 일절인데, 그 편지들은 1947년 8월 미국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사절단을 이끌고 서울을 방문했던 앨벗 웨드마이어(Albert C. Wedmeyer)에게 38도선 이남에 살던 일반인들이 보낸, 당시의 민심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자료다. 그 편지에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순간적으로 해방의 맛을 보았으나 이제 와서는 구속과 고통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고 쓰여 있다.


위의 두 인용문이 말해주는 것처럼, 1948년 8월 15일 38도선 이남에 분단정부가 세워지기 전 남조선이라 불렀던 지역의 민심은 8.15를 해방의 날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을 해방의 날로 여기지 않은 남조선의 민심은,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남조선이 여전히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1948년 8월 16일부터 오늘까지도 그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948년 8월 15일부터 오늘까지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려왔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8.15가 해방의 날이 아니라는 말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8.15가 해방이 아니라고 여겼던 70년 전 남조선의 민심이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서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지, 당시의 그런 민심은 8.15를 전후하여 복잡하게 전개된 사회정치상황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8.15를 전후하여 복잡하게 전개된 사회정치상황을 살펴보면, 8.15를 해방의 날로 여기지 않았던 당시 남조선의 민심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다.

 

 

2. 두 차례 연속 핵참화를 입고서도 즉각 항복하지 않은 일제


1945년 3월 10일 미국은 B-29 폭격기 344대를 동원하여 일본 도꾜를 맹폭하였다. 도꾜대공습으로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지만 일제는 ‘국체호지(國體護持)’를 외치고 발악하면서 순순히 항복하지 않았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핵탄을 투하하였고, 그로부터 사흘 뒤 일본 나가사끼에 두 번째 핵탄을 투하하였으나, 일제는 두 차례 연속 핵참화를 입고서도 즉각 항복하지 않았다. 미국의 핵탄투하에 놀란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기존 인식은 미국식 역사교육에 의해 주입된 착오다. 일제가 항복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핵탄투하가 아니라 소련의 대일전쟁이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내고 대일전쟁에 돌입하였는데, 2014년 9월 9일 일본 궁내청이 공개한 ‘쇼와천황실록’에 따르면, 일왕 히로히도(裕仁)는 1945년 8월 9일 오전 9시 37분 소련군이 대일전쟁을 개시하였다는 긴급보고를 받은지 18분 만에 다급하게 종전을 결정하였고 한다. 일왕 히로히도가 항복결정이 아니라 종전결정을 내렸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사진 2> 1945년 8월 9일 대일전쟁에 돌입한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며 일제관동군과 만주제국을 궤멸시켰고, 일제는 패주하고 투항하기에 바빴다. 이 사진은 1945년 8월 중순 만주해방전투에서 소련군에 투항한 관동군병사들이 무장해제를 당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대일전쟁에 돌입한 소련군은 만주방면과 한반도방면으로 각각 진격하였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진격이었다. <사진 2> 소련군 본대가 만주해방전투를 개시한지 이틀만인 1945년 8월 11일 소련군 선발대가 함경북도 라진에 상륙하였다. 조선의 역사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이 대일전쟁에 돌입하였던 1945년 8월 9일 김일성 사령은 조선인민혁명군에게 대일공격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은 라진에 상륙한 소련군 선발대와 함께 8월 12일 라진해방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소련군이 경성(서울의 당시 명칭)에서 북동쪽 직선거리로 약 370km 떨어진 라진에 상륙하였을 때, 미국군은 경성에서 남서쪽 직선거리로 약 780km 떨어진 일본 오끼나와를 점령하고 있었다.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속도를 가늠해보면, 라진에 선발대를 상륙시킨 소련군은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훨씬 전에 한반도를 종단, 남진하여 부산과 목포에 각각 도달할 수 있었다.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속도를 보고 다급해진 미국의 전쟁지휘부는 소련군 선발대가 라진에 상륙한 바로 그 날 미10군에게 조선을 점령하라는 긴급작전명령을 내렸다.


실제로 소련군이 한반도에 상륙한 날은 8월 11일이었고, 미국군이 한반도에 상륙한 날은 9월 7일이었다. 남조선점령군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가 지휘하는 제7상륙부대와 미해군제독 토머스 킨케이드(Thomas G. Kincaid)가 지휘하는 제7함대로 구성된 25척의 함대가 인천에 들어간 날은 1945년 9월 7일이었다. 만일 미국이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지 않았더라면 소련군은 부산과 목포까지 곧바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3. 일왕의 8.15 라디오방송은 항복방송이 아니었다


주목하는 것은, 조선인민혁명군과 소련군이 라진해방전투에서 승리한 1945년 8월 12일부터 일제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9월 2일까지 실로 급박하고 격동적이었던 그 기간에 일제가 취한 괴이한 행동들이다. 당시 일제가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왕 히로히도는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라디오방송을 통해 ‘대동아전쟁종결조서(大東亞戰爭終結詔書)’라는 것을 읽어 내려간 육성녹음을 내보냈다. 그것은 명백하게도 항복방송이 아니라 종전방송이었다. 일제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것은 무지가 빚어낸 인식착오다. 일제는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도꾜만에 정박해있던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는 왜 8월 15일에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티다가 9월 2일에 항복하였을까? 그 까닭은 미국군이 일본에 상륙하기를 기다렸다가 미국에게 항복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미국군 7,300명과 영국군 450명으로 구성된 미영연합함대가 일본 도꾜만에 있는 요꾜스까에 입항한 날은 1945년 8월 30일이었다. 


일왕 히로히도의 종전방송이 나오기 13시간 전인 1945년 8월 14일 오후 11시경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의 경성점령에 대비하는 비상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심야회의를 진행하였다. 심야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또 류사꾸(遠藤柳作)는 일왕의 종전방송이 나오기 6시간 전인 1945년 8월 15일 오전 6시 여운형을 급히 만났다. 일제가 패전하는 위기상황에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저명한 항일운동가 여운형을 급히 만난 까닭은, 만일 소련군이 경성을 점령하면 여운형을 내세워 전후처리문제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말에 일제의 초청을 받고 도꾜를 방문하는 중에 일제의 회유를 물리치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여 일본정계를 뒤흔들어놓았고, 1922년 초에는 동방민족대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련 모스끄바를 방문하는 중에 레닌을 만나 조선독립에 관한 소련의 지지를 이끌어낸 여운형의 특별한 경력 때문에 조선총독부가 위기상황에서 그의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엔또 류사꾸는 여운형에게 8월 17일 오후 2시경에 소련군 선발대가 경성에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고,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 여운형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는 미국군이 한반도 남단의 부산과 목포를 점령할 것이며, 소련군은 한반도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할 것이라고 말했다.


엔또 류사꾸가 여운형에게 그런 정보를 알려준 날, 일제가 괴뢰국으로 조작해놓은 만주제국의 수도 신경(오늘의 장춘)으로 진격한 소련군은 그 도시에 주둔한 관동군사령부를 점령하였다. 소련군이 진격해오자 사령부를 버리고 달아났던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또조(山田乙三)는 1945년 8월 23일 소련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 <사진 3> 이 사진은 일제가 1926년에 준공한 조선총동부 청사를 촬영한 것이다. 지금 광화문이 있는 자리에 이 건물이 있었다. 악랄한 식민통치의 총본산이었던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4일 밤 소련군의 경성점령을 예상하고 공포와 불안에 빠져들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만주에서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와 침략무력이 소련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에 접한 조선총독부는, 위에 인용한 엔또 류사꾸의 발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소련군이 경성을 점령하여 조선총독부의 항복을 받아내고 조선주둔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혔다. <사진 3>


미국의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 1959년 11월 2일부에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전후처리를 주도한 조지 마샬(George C. Marshall)이 노환으로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대담기록이 실렸는데, 마샬은 일제가 패전하기 직전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의 동향에 대해 이런 회고담을 남겼다.

“우리는 일본의 연락문을 감청하였다. 그 연락문은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이 그들의 본국에 있는 대본영으로 보낸 것이다. 연락문은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으로 밀려오고 있는 상황이므로, 미국이 조선을 공격할 때 미국군에게 항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워하였는데, 그것은 응당한 걱정이었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주둔일본군사령부가 소련군의 경성점령을 예상하고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속도를 보고 다급해진 일왕 히로히도는 1945년 8월 17일 미국이 제시한 항복조건을 수락하겠다는 항복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당시 필리핀 마닐라에 있던 미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자신의 밀사를 급파하였다. 원래 일왕 히로히도는 일제가 식민지로 강점한 모든 해외영토를 포기하되 자기들에게 식량과 자원을 보급해주는 조선과 대만은 종전대로 식민지로 보유하는 조건으로 항복함으로써 일제의 완전파멸을 방지하고 소련의 참전 이전에 종전한다는 조건부 항복의사를 미국에게 전달한 바 있었는데,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으로 전황이 자기들에게 매우 불리해지자 무조건 항복의사를 타진한 것이었다. 어째든 일왕 히로히도는 막전에서 종전방송을 내보내면서도 막후에서는 항복의사를 타진한 것인데, 그의 종전방송은 막후에서 은밀히 미국에게만 항복의사를 밝히려는 교활한 연막전술이었다. 

 

 

4. 미주리호 함상의 항복문서조인식은 희대의 기만극


소련군이 강원도 원산에 상륙하였던 1945년 8월 18일 일제가 괴뢰국으로 조작해놓은 만주제국이 멸망하였다.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속도를 보고 다급해진 맥아더는 바로 그날 일본군과 일제식민통치기구에게 “공인되지 않은 현지 세력에게 항복하지 말고, 기존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라”는 긴급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일제가 미국군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만주해방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이 1945년 8월 21일 만주 지린성 옌지(延吉)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해제협정을 맺기 하루 전날인 8월 20일 맥아더는 일본군 육군대장 가와베 또라시로(河邊虎四郞)를 단장으로 하여 16명으로 구성된 일제의 사절단을 만난 자리에서 그들에게 미국의 전략방침을 하달하였다. 그 전략방침은 미국이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할 것이므로, 미국군은 이남지역에서 조선주둔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게 되고 소련군은 이북지역에서 조선주둔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38도선 이남의 경성에 있는 조선주둔일본군사령부가 미국군으로부터 무장해제를 받게 되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맥아더를 통해 미국의 전략방침을 받고 안심하게 된 히로히도는 1945년 8월 28일 일본은 미국군의 “조속한 조선상륙을 열렬히 기다린다”는 내용의 전문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히로히도의 전문을 받은 맥아더는 미국군이 8월 30일 일본에 상륙하고, 9월 8일에 조선에 상륙할 것이므로, 8월 31일부터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이 조선에 상륙할 미국군사령관에게 직접 연락하라는 내용의 답신을 히로히도에게 보냈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 고즈끼 요시오(上月良夫)와 남조선점령임무를 맡은 미24군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 사이에서 40차례 이상의 비밀전문이 오갔다.

 

▲ <사진 4>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도꾜만에 정박한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 외상 시게미쯔 마모루가 점령군사령관 맥아더가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항복문서조인식은 소련에게 항복하지 않으려는 일제가 미국에게 항복하는 척하였던 희대의 기만극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적군의 조속한 상륙을 열렬히 기다리면서, 자국 영토를 무력으로 점령할 적군 사령관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은 일제의 행동은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으로 괴이한 행동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도꾜만에 정박한 배수량 45,000t급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 나타난 점령군사령관 맥아더 앞에서 패전국 외상 시게미쯔 마모루(重光葵)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것은, 소련에게 항복하지 않으려는 일제가 미국에게 항복하는 척하였던 희대의 기만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 미국과 일제가 미주리주 함상에서 연출한 기만적인 항복문서조인식은 그 두 나라가 더 이상 적대국이 아니며, 공동의 적인 소련과 대결하고 한반도의 통일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은밀한 결탁관계에 빠져들었음을 말해준 사건이었다. 

 

 

5. 점령군 군용기편으로 귀국한 조선총독


승전국 미국과 패전국 일제가 공동의 적인 소련과 대결하고 한반도의 통일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은밀히 결탁한 것은, 남조선점령군사령관이 조선총독의 식민통치권을 넘겨받는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1945년 9월 9일 오후 3시 45분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진행된 조인식이 바로 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조인식장에는 미24군사령관 존 하지, 미7함대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미70사단 사단장 아취볼드 아놀드(Archibold V. Arnold)가 참석하였고,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阿部信行),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 고즈끼 요시오, 경비사령관 야마구찌 기이찌(山口儀一)가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 조인식은 항복문서조인식이 아니라 일제식민통치권을 미국이 넘겨받는 통치권이양식이었다.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와 남조선점령군사령관 하지는 조선총독의 남조선 식민통치권을 남조선점령군사령관에게 넘겨주는 통치권이양문서에 서명하였다. 통치권이양식을 마친 남조선점령군과 조선총독부는 당일 오후 4시 35분 조선총독부 앞마당에서 국기교체식을 진행하였다.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 <사진 5> 1945년 9월 9일 오후 3시 45분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조선총독의 식민통치권을 남조선점령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통치권이양식이 진행되었고, 곧이어 4시 35분에는 조선총독부 앞마당에서 국기교체식이 진행되었다.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미군정 3년은 일제식민통치의 연장이었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권을 넘겨받은 남조선점령군사령관 존 하지는 1945년 9월 14일 총독을 비롯한 조선총독부 관리들을 사법처리하지 않고 해임하였고, 남조선 각 지방의 일제 관리들을 10월 17일에 해임하였다. 그런 까닭에 경성의 조선총독부에서는 일장기가 성조기로 교체되었어도 남조선 지방관청들에서는 10월 10일까지 일장기가 여전히 게양되어 있었다. 남조선점령군에게 식민통치권을 넘겨준 조선총독과 휘하 관리들은 남조선점령군사령관이 친절하게 마련해준 군용기에 몸을 싣고 9월 19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는 점령군 군용기를 타고 경성을 떠나면서 이런 끔찍한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우리가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우리 대일본제국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결국 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의 삶을 살 것이다. 과거의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오늘의 조선은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나 아베 노부유끼는 반도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남조선점령군사령관 존 하지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이양받은 식민통치권을 행사할 군정청이 설립된 날은 1946년 1월 4일이었는데, 명백하게도, 미군정 3년은 일제식민통치의 연장이었다.

 

 

6. 포츠담 회의에서 미국이 꾸민 음모


미국과 일제의 은밀한 반소반공결탁은 일제식민통치권이 미군정으로 이양된 것으로만 귀결되지 않았다. 미군정은 3년 만에 종식되었고 이 땅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미국과 일제의 반소반공결탁은 두 가지 비극적 사태로 귀결되었다. 첫째는 38도선을 가운데 두고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비극적 사태이고, 둘째는 38도선 이남지역이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된 비극적 사태다.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한 미국의 음모는,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2013년 서울에서 펴낸 책 ‘한반도 분할의 역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책에는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미국의 한반도 분할음모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실렸다. 그 새로운 자료는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중에 한반도 분할선을 구상한 미국군 작전국장 존 헐(John E. Hull)이 1949년 6월 17일 미국군 대령 해리스와 전화로 통화한 내용을 녹취한 것이다. 헐은 전화통화에서 이런 회고담을 늘어놓았다. “제임스 번스(James F. Byrnes)는 (미국이) 소련과 함께 조선을 분할하기를 원했다. 번스는 미국이 조선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항구를 주목했고, 이 중 2개의 항구(부산과 인천)를 우리쪽에 포함시켜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38도선을 따라 선을 긋는 것이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

 

▲ <사진 6>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미국, 소련, 영국이 동아시아와 유럽의 종전문제 및 전후처리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한 포츠담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사진은 포츠담 회의에 참석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 소련공산당 서기장 조셉 스탈린(왼쪽부터)이 회담장 출입구에서 악수하며 촬영한 것이다. 미국은 그 회담에서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당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는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을 수행하여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진행된 포츠담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위에 인용한 헐의 회고담은 포츠담 회의에서 미국이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려는 음모를 꾸몄음을 말해준다. <사진 6>


미국, 소련, 영국이 동아시아와 유럽의 종전문제 및 전후처리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한 포츠담 회의에서 8.15와 직결된 것은 1945년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이다, 그 선언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는데, 위에 인용한 헐의 회고담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서로 연결하여 생각하면 미국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속으로는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38도선 분할에 대한 기존 학설은 1945년 8월 9일 대일전쟁을 개시한 소련군이 관동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한반도를 향해 남진하자, 소련군의 진격속도에 놀란 미국 3부조정위원회 산하 전략정책단이 1945년 8월 11일 소련군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긴급대책으로 38도선을 그어 한반도를 서둘러 분할하였다는 것인데,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하기 훨씬 전인 1945년 7월 17일 포츠담 회의가 시작될 때부터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려는 음모를 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고 영구분단을 획책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38도선 분할은 미국이 주도하고 소련이 멋모르고 동의해준 것이라는 기존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착오다.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한 분단의 원죄는 미국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것이었음을 명백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이 민족의 염원과 요구를 짓밟고 폭력적으로 저지른 분단의 원죄는 70년 전 역사 속에 과거사로 박제화된 게 아니다. 분단의 원죄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분단체제로 고착되었고, 그렇게 고착된 분단체제는 이 민족을 말할 수 없는 불행과 치욕, 고통과 재앙 속에 빠뜨렸다. 
“남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는 안재홍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분단체제를 거부하고 자주통일위업을 실현할 때 8.15는 비로소 해방의 날로 될 것이다.

 

▲ <사진 7> 이 사진은 미국 군사고문단 청사를 촬영한 것이다. 미국 군사고문단은 38도선 이남지역을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키는 임무를 현지에서 직접 수행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7. 미국을 위해 총을 쏘고, 미국인보다 앞서 피 흘리는 군사기지


미국과 일제의 반소반공결탁은 38도선 이남지역을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켰다. 당시 38도선 이남지역을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키는 임무를 현지에서 직접 수행한 기관은 남조선국방경비대의 군사훈련을 지도한 임시군사고문단이었는데, 임시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벗츠(William L. Roberts)는 “미국을 위해 총을 쏘고, 미국인보다 앞서 피를 흘리게 하기 위해 우리가 자기들을 훈련시키고 있는지를 한국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윌리엄 로벗츠의 이 발언은 미국의 38도선 분할에 의해 38도선 이남지역이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되고 말았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 말이다. <사진 7>


<뉴욕헤럴드> 1949년 6월 5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1949년 10월 한국군 육군사령부에서 진행된 사단장회의에서 한국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단장 윌리엄 로벗츠는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수많은 공격은 자기 명령에 의해 수행되었고 앞으로 더 많은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많은 경우에 한국군 부대들은 제멋대로 공격하고 아무런 전과도 없이 막대한 탄약만 허비하였으며 치명적인 인명손실까지 입었다. 앞으로 38도선 이북에 대한 한국군의 진공은 군사고문단의 명령에 의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미국이 정전체제에 결박된 한국을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켜 대북군사대결로 끌어갔음을 말해주는 윌리엄 로벗츠의 이 발언은 위에 인용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가 경성을 떠나면서 내뱉은 저주발언과 일맥상통한다. 


70년 전 조선총독부에 게양된 성조기 아래서 조선총독으로부터 식민통치권을 이양받은 남조선점령군사령관은 용산미군기지에 게양된 성조기 아래서 한국군으로부터 이양받은 작전통제권을 틀어쥔 주한미국군사령관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남조선점령군사령관이 주한미국군사령관으로 교체되었다고 해서, 한국을 자기들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킨 미국의 지배정책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최근 미국 언론의 폭로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대로, 주한미국군은 존 하지로부터 물려받은 점령군의 군기 아래서 탄저균실험을 감행하며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세균전까지 준비해왔던 것이다.


“남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는 안재홍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한반도의 평화를 실현할 때 8.15는 비로소 해방의 날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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