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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최초 점거운동 다룬 다큐 <192-399 더불아사는 집 이야기>

추적하지 않는다, 다만 지켜볼 뿐
노숙인 최초 점거운동 다룬 다큐 <192-399 더불아사는 집 이야기>
텍스트만보기   이도훈(mathoon) 기자   
 
 
 
▲ <192-399 더불어 사는 집>
ⓒ 서울영상집단
 
한국 영상자료원에서는 매달 독립영화를 한 편 선정하여 상영과 함께 관객과 감독의 만남을 주선해왔다. 2월 1일 올해 그 첫 작품으로 이현정 감독 작품이 관객과의 만남을 가졌다.

2006년 서울 독립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이현정 감독의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된 노숙인들의 빈집 점거 운동을 다룬 영화다.

 
 
 
점거(squat)는 외국에서 예술가들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을 확보하는 형태로 종종 이루어져왔던 방식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2005년 5월부터 8개월간 촬영된 것이다.

주된 내용은 청계천 8가 삼일 아파트 노숙인 단체 '더불어 사는 집'의 삶과 노숙인들의 얼굴을 담고 있다. 그와 함께 노숙인들이 자활적으로 생계유지와 점거운동(squat)을 시도하였다는 기념비적인 사건을 기록한 영화다.

우리의 생계가 위협받는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것은 가슴 아프다. 서울역 및 청량리 일대의 노숙자들이 한 겨울 시린 바닥에서 동사하는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배를 곯아가면서 가난과 싸워나가고 있다.

동시에 그 가난보다 동정의 시선과 냉대는 그들을 더 버겁게 만든다. <더불어 사는 집>은 그런 노숙인들의 소외된 모습과 척박한 환경에서의 자활의지를 다룬 영화이다. 출발은 그렇다.

 
▲ 이현정 감독
ⓒ 이도훈
헌데 이 영화는 점거운동 및 점거의 시도를 다룬 부분에서 끝내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고 30분이 넘어서면서 삼일 아파트가 철거되려 하고, 성북구 정릉의 비어있는 임대아파트를 새벽에 기습점거한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혁명을 완성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는 축제 분위기로 일변한다.

아마도 여타의 감독들이라면 그 부분에서 극적 연출을 조장하거나 혹은 그 부분만으로도 한국 노동사와 운동사에 역사를 썼다며 자축하면서 이들의 앞날에 희망의 빛을 보냈을 것이다. 헌데 이현정 감독은 그 역사적 시도를 지켜보았는데도 카메라를 공간에서 이탈시키지 않는다.

카메라는 여전히 청계천 8가와 정릉에 있는 '더불어 사는 집' 구성원들을 담는다. 이현정 감독은 '그래도 삶은 지속 된다'는 의지와 시선으로 그들을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카메라가 떠나지 못하는 것은 감독 스스로 그들에게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과 동시에 노숙인들에 대한 애정과 걱정의 시선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부분에서 영화를 끝마친다면 영화는 기록의 의의를 가진 다큐가 되었을 것이다.

감독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 영화가 끝나면 노숙인 아저씨들의 다음 생은 어떻게 될까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감독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며 기록을 멈추지 않는 이유가 된다.

영화 후반부는 외부와의 투쟁이 아니다. 공권력이나 사회집단 혹은 복지시설과의 대화와 타협보다는 내부적인 문제로 나아간다. '더불어 사는 집'을 조직하고 이끌어나가는 양고문은 전형적인 민중투사이며 다혈질적인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에 공격적이고 급하게 일을 처리하며 입버릇처럼 "각을 세우라"고 말한다.

그의 눈에는 자기 일이 가장 급하고,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야 했다. 그런 양고문은 민노당의 승인과 지원 없이도 시청 앞에서 난동을 부리며 조직력 없는 시위를 벌이게 된다.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대처하는 그에게 과연 노동의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양고문은 노동운동에서 필요한 리더십이 결여되어 보이며 스스로 혁명가의 꿈에 도취되어 있는 인물이다.

양고문과의 갈등은 양고문이 구성원들을 동지가 아니라 혁명의 소모품이자 전리품 정도로만 취급해 왔기 때문이다. 노숙인들을 위하는 행동과 실천의 의의는 인정할 수 있지만 양고문의 무소불위, 독단성은 눈뜨고 지켜볼 수가 없다. 구성원들은 양고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양고문으로 인해 오히려 주거공간이 불편해지게 된다. 운동권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동시대적 고민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것이다.

이현정 감독은 최근 독립영화 다큐멘터리의 도식과도 같은 일인칭 작가주의를 피했다. 이 영화는 감독이 개입하는 부분을 최소화하고 있으며, 의도적인 인터뷰를 기피한다. 그리고 집요한 추적보다는 집요한 '머무름' 쪽을 선택한다. 영화는 여타의 다큐멘터리가 시간을 추적하거나 인물을 추적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다큐에서 맛볼 수 있는 카메라의 진정성을 몸소 느끼기 어렵다. 손에 들고 있는 카메라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점점 고정되어 있다는 의식이 들기 시작한다. 그런 지점에서 카메라는 눈이 아니라 공간 그 자체에 동화되어 간다.

카메라가 공간이 된다는 것은 이 카메라가 노숙인들의 생활 터전인 청계천의 한 아파트가 되고 정릉의 다세대 주택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으며 또 빈번히 드나드는 노숙자들에 질문을 던지거나 그들의 터전 밖에서 삶을 추적하지 않는다.

영화는 눈물이 메말라 있다. 이현정 감독은 비극적 요소를 추적하고 촬영할 수 있음에도 과감히 그 방식을 거부한다. 현숙이 집을 나갔을 때 현숙의 처지를 궁금해하지 않는 카메라, 아들이 죽어가고 있어 병원에 내려간 아저씨를 뒤쫓지 않는 카메라, 집을 떠나가는 사람들의 근황은 내래이션으로만 처리될 뿐이다.

 
▲ 이현정 감독(좌),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 이도훈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인물들은 노숙자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엄연히 가족은 있으며 언젠가는 마지막에 돌아갈 곳이 '가족'이 있다. 중간 중간 몇 몇 인물이 부모 때문에 돌아가고 죽어가는 이들 때문에 돌아가지만 감독은 그들을 뒤쫓는 것을 포기하고 '더불어 사는 집'에 머물면서 남은 자들을 관찰하게 된다.

감독 스스로 고민을 하였다고 하는 이 부분은 사실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대한민국의 노숙자들의 경향은 유럽과 다르게 가족 단위가 아니라(가족 단위의 노숙인을 다룬 영화는 근작으로 다른덴 형제의 <더 차일드>가 대표적이다) 단신인 경우가 많다.

남성들의 경우는 대부분 그 가정으로 돌아갈 목표가 있거나 가장 최후의 보루이다. 그래서 남은 자들은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최후의 안식처는 가정이기에 떠나는 자들을 말리지도 않으며 떠나는 것을 묻지도 않는다. 이현정 감독은 후반부로 갈수록 노숙인들과 하나가 되거나 동화되어간다. 어쩌면 다른 다큐에서 볼 수 없는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을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결국 이 영화는 두 가지를 모두 잡는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최초의 점거시도를 기록한 영화이자, 형식적인 측면에서 최근의 한국 다큐멘터리들이 고집스럽게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기록영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반대편에 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현정 감독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현정 감독은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화두를 던진다. 동시에 우리의 시선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세상과 다투고 그들 안에서 불협화음을 가지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본다. 그녀의 고민은 최초 공개된 영화 마지막에 에니메이션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통해 담아내었다. 에니메이션이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시선을 가져달라는 요구와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감독 스스로의 따뜻한 다짐이었다.

비록 그 부분은 재편집 과정에서 철저히 객관적 거리 두기로 제외되었지만, 기록은 끝났으나 삶은 계속되고 있으며 아직도 희망을 위한 날갯짓은 이어지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의 따뜻한 시선과 관심이며 감독이 바라는 것은 그들의 자활적 운동이 하나의 연대를 통하여 동일한 목소리를 갖는 것이다.

노숙자들의 진심과 감독의 진심이 세상과 소통하는 그날이 왔으면 한다.
 
 
2007-02-02 10:20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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