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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_WARNING

 

 

               

                                                        

                                              

                                                                     

 

 

                

                                   

  

                                  

                                  

 

 

                                

                       

                           

 

 

                         

                        

                        

                        

                        

 

 

 

                  

                 

                

 

 

 

                         

                        

                        

                        

                        

 

 

                                              

                                 

                                 

        

                                               

                                           

 

 

 

 

 

"g"가 젤루 맘에 든다^^

 

네게 경고 한 번 쏴주고퐜다! 흐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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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란

 

 

 


신자유주의/2005년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그냥 함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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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_부분과 전체


 

 

단절_부분과 전체/2005년

 

 

 

 

애니메이션 감독 피터 정의 캐릭터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분?(영감님~)이 오시는대로 아이디어 스케치에서 컴작업까지...

습작수준들이다.

 

 

두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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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


단절1/Photoshop, Imageready/2005년

 

 

단절.

 

그녀들에게...

 

 

 

 

봄이 온다.

 

 

 



 

 


단절2/Photoshop, Imageready/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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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원_가구&인테리어 디자이너

 

디자인정글에서 이미지 퍼오다

 

 

핀란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송희원 이라는 가구&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실내 디자인 부분이다.

 

디자인정글 에서 우연히 들렀다 눈이 동그래졌다.

일단 정신차리고...가끔 멋진 예술품을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정신을 못차린다.

 

인테리어이긴 한데 인공적인 영화속 미술처럼 보이기도 하고 화려한 문양이

공간 전체를 장식하고 있지만 조명을 시선의 아래에 두어 왠지 음울한 죽음을

연상시키는 잘꾸며진 '무덤'처럼 보이기도 한다.

 

멀리보이는 빨간배경의 공간이 어떤 용도인지 어떤 디자인으로 이루어졌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산업적 차원에서 디자인을 양성 장려하려는 분위기이다.

디자인정글의 기획 타이틀 자체가 국가급 유명디자이너 키우기라니...그래..

어떻게든 경제을 튼튼하게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지...헐~

문화는 온데간데 없고...산업만 강조하는...

 

멋지다! 멋찌다!

저런 디자인감각을 지니지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미갱 지금 좌절중이다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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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형의 예술작품_가우디2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교회/1882년~

 

 

"나에게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슬프게도 내 손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La Sagrada Familia)교회를 완성시키지 못할 것이다. 뒤를 이어서 완성시킬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장엄한 건축물로 탄생하리라. 시대와 함께 유능한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렇게 해서 아름다움은 빛을 발한다."
 

<안토니 가우디_공간의 환상>    

 

 

1883년 31살의 젊은 나이에 사그라다 파밀리다 교회의 공사감독을 맡은 그는 1926년 죽기전까지 43년간동안 이 교회건설에 예술의 혼을 담았다. 그의 예술적 인내심에 경외감과 숭고함까지.. 머리가 저절로 숙여지는건 비단 나뿐이 아닐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아름다운 빛에 한번 빠져봅시닷~ 

 


아래에서 바라본 대성당 첨탑

동굴의 종유석이 느껴지지 않는가? 아님 새의 날개짓처럼도 보이고...여러가지 해석을

드러내는 건축물이 많은건 아닐 듯...

 


대성당의 외부장식_<탄생의 파사드>부분

 

 

 

 



상단에서 본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교회

건물 외벽의 색깔톤이 현재 짓고 있는 부분과 지어진 부분의 시간차를 보여주고 있다.

가우디가 제작한 자세한 건축설계도를 토대로 지어지고 있는건지 아니면 기법을 분석하며

 끼워맞춰 만들어가고 있는지는 정확한 정보가없어서 모르겠으나 스페인 사람들..

대단해 보인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로 불리울만큼 거리의 가로등에서부터 주택, 공원, 대성당에 이르기까지 가우디의 건축물로 넘쳐난다고 한다. 1936년 스페인 내란 당시 가우디가 제작한 대부분의 설계도가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 성당만은 파괴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하는데 바르셀로나시 뿐 아니라 예술로서의 건축물을 즐기고픈 관람자의 한명으로서도 천행중의 하나라 사료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20세기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고 사실 그렇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으로 바르셀로나가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이건 과장이 아니다.
바르셀로나의 도시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대성당은 바로셀로나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었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바르셀로나 시의 문화, 관광정책에 영향을 미친다.

 


대성당 내/외부의 여러장식들

꽃잎 모양을 닮은 창, 문자로 이루어진 벽면, 아치형의 둥근 창틀, 조개를 닮은 기둥. 자연을 닮은 건축기법은 대성당안밖에서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다.

 


<탄생의 파사드>천정 부분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탄생의 파사드 탑> 부분

 

 

모데르니시모(Medernismo)양식의 대성당은 예수를 상징하는 첨탑을 중심으로 12사도를 의미하는 12개의 첨탑부분이 현재 진행중이고 건축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대로라면 앞으로 100년은 족히 더 걸린다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애정과 문화에 대한 안목, 현명한 도시정책으로 예술의 오랜 여정은 이어지며 하나둘 쌓아내고 있는 것이다.


눈깜짝하고 나면 들어서고 사라지는, 도시환경과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 시각공해처럼 보이는 우리네 건축물들을 생각하면 바르셀로나시의 도시정책과 문화에 대한 안목으로 절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대성당 건축물은 실로 놀랍고 놀랍다.
2002년(스페인정부는 가우디탄생 150년을 기념하여 가우디의 해로 지정)을 기준으로 2백만명이 이상의 방문자가 이 곳을 다녀갔고, 대성당 건축예산의 대부분인 95%가 관광수입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관광수입을 원천으로 예술은 명맥을 잇고 또 이어간다.

이는 분명 '예술에 대한' 애정이 '각별함'을 느낄 수 있는 성공한 정책으로 보이는데... 나만 그러한가?

 


<탄생의 파사드> 부분 설계도


<탄생의 파사드> 세부

 

 

" 원래는 좌파 성향의 공화파에 무신론자에다 개혁적 성향이었으나 현실과 타협하는 기독교 사회주의로 바뀌었다. 그러나 항상 경제적ㆍ종교적 권력자들보다는 가난한 자, 불우한 자들 편에 섰다. 코미야스(Comillas) 후작과 에우세비오 구엘, 그리고 카탈루냐 지방 고위 사제들과 친분을 맺은 것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된 덕분이었다. 재력가들을 후원자로 둔 덕분에 그의 재능과 실력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황수현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연구원의 글중에서  

 

예술가에겐 후원자가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는 말년 교통사고로 어이없이 사망했고 당시 그의 행색은 부랑자의 모습이었다 하는데...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미혼이었다하고..자세한 말년의 이야기를 접해듣고 보진 못했으나 왠지 씁쓸해진다.
세상을 바꾼 예술가도 늙고 병들면 외롭고 쓸쓸하다는 거.

"예술가는 사라지고 예술품만 남는다"
갑자기 센티멘탈조로 변하고 있군...쩝..

 

 

현대의 건축물 중 벽돌재료를 이용한 건축기법의 기원은 가우디로부터 나온 것이다.
또한 탑처럼 돌을 쌓아올린 기법, 곡면조형의 기법 등 오늘날 우리 주변 곳곳에서 접했던 건축물들의 처음 시작을 그가 창조해내었다 생각하니 왠지 그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우리옆에서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거장들은 한발 앞서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만드는 모태적 에너지인 것이다.
그의 건축물 안에서 그 기운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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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조각하다_이윰 작


매난국죽-黑梅 The Four Gracious-black orchid/1998년

사군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사진작업.
백의 사군자 시리즈와 흑의 사군자 시리즈 총 8점 대형 라이트 박스위에 설치.
이때의 전시 포스터 작업
(이미지는 이윰홈피에서 퍼오다)

 

이윰.

현대한국작가중 가장 독특한 자기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작가라 평하고 싶다.

최근작들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어제 EBS TV프로를 보다 <오리엔탈의 빛>에서

일본의 현대미술작가 "마리코 모리"를 보면서 이윰이 떠올랐고 오늘은 인터넷을 뒤적이다

그녀의 홈피까지 접하게 되었다.

 

그녀의 작품들을 몇개 소개해본다.

 

대학시절 곱고 착하게만 생겼던 그녀가 졸업후 열었던 첫개인전을 본 난 엄청난 충격이었다.

청순가련?의 외형안에는 또다른 그녀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작품과 함께 나비가 허물을

벗듯 껍질을 깨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버리는...

생각지도 못했다가 뒷골이 오싹한 정도의 엄청한 여파의 충격을 주는 호러물을 본 듯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된다는 걸 또한번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빨간블라우스展 브로셔/제 1회 개인전/1995년


살아있는 조각 이윰 living sculpture - ium/1998년

나무와 자개로 만든 의상, 시바크롬 필름을 라이트 박스위에 설치/제 2회 개인전 작품


The lost continental Mu/performance/2002년

마야씨어터의 첫번째 공연 The lost continental Mu (총감독:Maya Kim)
코엑스 앞 설치된 야외스테이지에서의 공연에 출연함.
이미지씨어터의 작업파트너였던 김동섭과 이 무대에서 호흡을 맞추었다.
제 5막 중에서 이윰의 솔로 보이스 퍼포먼스.

 

 

"Living sculpture는 이윰의 아티스트 퍼스널 브랜드이다."

 

<홈피에서의 작품소개글>                          

 

자신을 조각화해버리는 작가.

그녀의 작품을 대하다 보면 어릴적 종이 인형을 사다 인형의 옷이 맘에 들지 않아 스스로 그려서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인형들이 그녀의 얼굴과 오버랩되면서 가지고 놀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게한다.

 

 

무표정과 정지된 포즈, 현실에는 없는 가상세계인 꿈, 영화, 소설안에서 튀어나온 듯한

패션과 스타일로 자신을 조각화하는 작가.

저게 뭐야? 저게 무슨 예술이야? 얼핏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를 창출해내는 그녀의 작품세계.

잼있다.

가지고 놀다 버려질 일회성, 영상으로 재편집되어 새로운 매체로의 변이, 국적불명의

미아처럼 보이는 그녀의 작품들은 익숙하지 않으나 익숙한, 사랑스럽지 않으나 사랑스러운,

어디서도 본적없는 듯하지만 본것같은, 완성된듯하나 미완성으로 보이는...그렇다.

 

좀더 그녀의 작품들을 기다려보련다.

 

 이윰의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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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남자들_정희진/펌글

여성학자 정희진씨의 임상수감독 영화<그때 그 사람들>읽기~

 

잼나는 글이라서 그냥 한번 긁어와 보았다.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 (참 나... 놀구들 자빠졌네) 은 직업에 맞는 실랄한

감성적 글쓰기였다면 이 글은 여성학자로서의 시각이 잘 보여진다.

법원의 영화삭제명령에 대해 정희진씨만큼 명쾌하게 평가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찬찬히 다시 한번 읽어보련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조만간에 보긴 해야겠지?


씨네21에서 이미지퍼옴

 

<그때 그 남자들>

정희진/서강대 강사
 


<그 때 그 사람들>을 보고 나서, 왜 박지만씨 진영이 이 영화에 분노하며 재판까지 벌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박정희 역의 배우 송재호는 독재자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영화에서 박정희는 유머스럽고, 낭만적일 뿐 아니라 심지어 인자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봐도 “명예를 훼손한” 흔적이 없다. 이 영화가 보수 세력의 화를 부른 실제 이유는, “역사 왜곡”이나 “정치적 의도”가 아니라 ‘여자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의 ‘치적’이라는 경제 발전 주장은, “유신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이 이룬 것”이라고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래서 섹스 문제는 그를 평가하는 키워드가 된다. 사람들은 대통령의 섹스를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정당성과 도덕성의 징표로 이해한다. 물론, ‘영웅은 호색이지만’, 그것은 들키지 않았을 때 얘기다. 남녀 간의 일대일 섹스를 원칙으로 하는 가족주의 규범이 강력한 한국사회에서, 최소 100여명의 여성이 대통령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는 역사는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악당을 죽인’ 김재규는 의인이나 영웅이 되지 못하고 다시 부하에게 잡혀 신문을 받는다. 자기가 죽인 상관과 똑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은 이 영화를 보수와 진보, 독재와 저항, 여야 대립 등 기존 남성 정치학을 뛰어 넘어, 남성 문화를 비판하는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남성은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평가받는(조롱받는) 인식의 대상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지만씨의 소송과 이에 동의하는 법원의 일부 장면 삭제 판결은, 보수 세력의 무지와 단견이 영화 예술의 가능성을 어떻게 제한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남을 것 같다. 영화가 비판하는 것은, 박정희 체제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남성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사람들’은 한국사회를 거울 앞에 세우는 매우 성찰적이고 성숙한 영화다. 이 영화를 10·26 사태를 재현한 ‘정치 영화’로만 보면 ‘그 때 그 사람들’은 과거로 사라졌지만, 남성성을 문제시하는 ‘젠더(성별) 영화’로 지평을 확대한다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당대의 텍스트다. 영화의 인물들은 ‘박정희 편’, ‘김재규 편’ 할 것 없이, 모두 쓸데없이 거칠고 요란스런 전투적 태도를 반복한다. 감독도 말했듯이, 이들은 “남자로서 한 몫 보려는 자들”로 “남자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다. 영화에서 남자들은 ‘완벽한’ 의사소통을 한다. 여기서의 소통은 명령을 하고, 명령을 따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런 종류의 소통은 군대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유신 파시즘은 사회 전체를 그렇게 만들었다. 영화 속 남자들은 죽음을 담보로 하는 상사의 허무맹랑한 명령을 저항 없이 따른다. 이러한 의사소통 체계에서, 사유하는 인간은 총살감이다. 박정희 정권이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철이나 장세동 같은 인물은 일상적 파시즘과 구조적 파시즘의 연결 고리다. ‘대통령보다 힘센 경호실장’은 과거 청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장보다 무서운 수위’, ‘시어머니보다 더한 시누이’ 때문에 고통받고 분노한다. 말할 것도 없이, 차지철의 권력은 박정희로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권력은? 그것은 신(God)으로 부터 나온다. 유신은 국민이 아니라 신을 대리했다. 그들은 “나는 하나님이 직접 만드셨고, 국민은 내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 사회 일각의 ‘박정희 향수’는, “제발, 갈비뼈에 불과한 우리를 화끈하게 지배해 주세요”라는 유아기로의 퇴행에 다름 아니다.

 

여성은 권력을 가진 남성의 동산(動産)에 불과하다는 믿음, 명령과 복종에 의한 ‘완벽한 의사소통’에의 갈망,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기득권층... 이거, 유신 시절만의 이야기일까. 이 영화에 대한 보수 세력의 불편한 심기는 자화상을 마주한 우리를 대변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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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_낯선 이들의 사랑

씨네21에서 이미지들 퍼옴.

 

Closer

감독 마이클 니콜스
주연 쥴리아 로버츠, 쥬드로, 나탈리 포트만, 클라이브 오웬

 

 

기운이 쏙 빠져서 영화관을 나왔다.
왜 그랬을까?

사랑에 대한 환상보다는 솔직한 사랑을 줄곧 세뇌시키듯 얘기하는 감독 마이클 니콜스때문인가? 남자들은 육체에 탐닉하고 정신적 사랑와 육체적 사랑중 육체적 관계를 좀더 우선시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정신적 사랑이 무시되는 건 또 아니고...여성은 자신보다 젊은 여성에게 남편을 빼앗기지만 성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알리스보다는 키크고 유명한 사진작가인 안나에게 댄과 래리는 빠져들고..


안나의 사진전에 전시된 알리스의 사진. 전시장의 분위기가 예술이다.

높은 천장의 커다란 공간, 절묘하게 사용된 조명, 시멘트의 차갑고 낯선 느낌을 주는 바닥 인테리어..등..


Stranger.

낯선사람과의 사랑이야기들.

 

사랑은 정말 낯설어보인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의학적으로 3년이다.

호르몬 작용이라는 거다.

 

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정말 어렵고도 오묘하다. 
 

 

 

 



 

나이들어 점점더 배우로서의 안정감과 성숙한 여인으로의 매력을 발산하는 쥴리아~

 

오프라윈프리 쇼에 홍보차 불룩한 배를 안고 나온 쥴리아 로버츠는 이 영화가 사랑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사랑의 과정은 보여주지 않는 영화랬다.
원래 영화보기전 사전 지식없이 봐야 영화의 선입견과 신선함을 즐길수있는 지라 최대한 노력했지만 어쩌다 본 오프라쇼 때문에 영화보는 내내 쥴리아의 얘기가 머리속을 채우며 스토리를 짜맞추고 있었다. 이래서 사전정보는 해악인거이다. 헷!

 

이성(동성)의 사랑은 성적호기심으로만 충족되지 못하는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던져주는 듯하다. 하지만 사랑은 타이밍인 것이다(100%동의). 4년간의 애정은 남자의 불신과 집착으로 순간에 날라갈수도 있는 것이고, 동시에 여러명을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랑이며, 육체적 호기심은 정신적 사랑으로도 발전 가능하며, 사랑은 노력이며, 사랑의 유무는 눈(또는 오감)으로 감지될 수 있는 것이며...

 


 

재밌는 캐릭터는 피부과 의사인 중산층 래리이다.
겉으로는 다정하며 품위있는 인상의, 번듯하며 권위적인 중산층 의사의 직업을 지니고 있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서는 인터넷으로 변태적 성욕?을 과감히 드러내기도 한다. 맘이 떠나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안나에게 바람핀 남자와의 성적관계를 집요하고도 집요하게 캐묻는 이중적인 성격의 그는 상대방의 심리를 절묘하게 역이용하여 결국 아내를 꽃미남 쥬드로로부터 다시 빼앗아버리고 쥬드로의 연인 알리스과의 관계도 청산시켜? 버리며 쥬드로에게 실연의 아픔을 멋지게 되돌려주며 복수한다.

 


 

알리스의 본명은 제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4년을 동거하며 사랑한 댄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고 떠난다. 알리스와 댄은 진실이 말로 드러나면서 관계가 끝난다. 그녀의 과거가 무엇이었건간에 때론 추악한 진실보다 애정어린 거짓이 사랑에 유효할때가? 있다는 역설을 보여주는 중요한 설정이었다. 예를들면 기혼자의 바람은 상대방이 모르면 한때의 바람으로 지나가나

상대방이 바람을 피운 진실을 알게되면 그때부터 복잡해지는거...몰겠다..진짜 어렵자나..


세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섹스장면은 하나도 없는데 대사와 분위기만(배우의 표정과 옷, 행위, 공간, 텍스트 등)으로도 영화가 더 에로틱할 수 있다는 거. 이건 감독의 천재적 능력이다라고 생각.


둘째, 칭얼거리며 우는 남자는 정말 아니다라는거.
감성적인 남성의 눈물은 아름다울수 있지만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패배의 억울함으로 표현되는 울음은 정말 보기 어려웠다. 쥬드로가 래리에게 찾아가 안나를 놓아달라며 칭얼대는 눈물은 아무리 꽃미남 쥬드로이지만 아닌거다. ㅎㅎ


셋째,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참 좋았다는거.
남친의 애정이 자신이 아닌 낯선 여자 안나에게 향하고 있다는 진실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그 순간을 눈치챈 사진작가 안나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아름다운 예술로 변질?시켜 버린다. 안나의 사진전에서 래리가 알리스에게 질문한다. 진실을 얘기해보라고...
“누군가의 슬픔을 가져다 아름다운 예술로 만드는건 사기다. 이 전시는 사기로 가득찼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기를 좋아한다.” (대사는 정확하게 옮기지 못하겠지만 이런 류의 대사들이었다)

예술은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보는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마이클 니콜스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인거다.
그런데 사랑도 그렇다고 얘기한다.

 

머리가 어지러운건 도무지 사랑은 머리로 해석되지 않는거다라는거..에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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