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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부, "땅의 숨구멍" - 2012.5.24

페이스북에 쓴 글.

 

 

 

 

나도, 도시의 아스팔트, 시멘트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오늘 내 방 책꽂이에 오래 묵혀두었던 녹색평론(81호)을 한권 꺼내 시 한편을 읽었는데, 너무 마음에 와 닿아 옮겨본다.

마지막 부분을 혼자 소리내어 읽어보는데, 빗물이, 흙탕물이, 소금쟁이와 물방개가 외치는 격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___________________

땅의 숨구멍

권영부
...
매일매일 다져 밟고 사는 땅에는 숨구멍이 있다
봄비가 잔잔히 내리는 날에는
저 숱한 나뭇잎들이 걸러낸
맑은 빗물이 박하사탕처럼 싸하게 땅의 숨구멍을 타고 흘렀을 것이고,
제법 세차게 여름비가 내리는 날에는
농사꾼이 막걸리로 마른 목을 축이듯
땅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빗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은 것들은 철철, 논물로 흘러들어
가장 넓게 몸을 누이고 가슴팍에는 소금쟁이와 물방개를 키웠을 것이다
여름 볕의 사랑에 온 몸이 달아오른 논물은
슬그머니 논고랑을 빠져나와 개울을 타고 만경창파로 흘러들지만,
단 한번도 땅의 숨구멍을 막은 적이 없다
질퍽거리는 논둑길을 걸어갈 때면 흙탕물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땅이 제 숨구멍을 막아대는 발자국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수만년을 반복한 습성이기에
누가 누굴 탓하지도 않는다
이제, 논둑길이 헐리고 아스팔트로 땅의 숨구멍을 틀어막는 시절
빗물이 제 갈 길을 찾지 못해 빙빙, 돌고 돌다가 우리를 덮쳐도
오로지 하늘만 탓하고 살지만,
그 사이 우리의 몸뚱어리를 먹여 살리는 숨구멍은 점점 쪼그라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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