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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과 일본현상

지난주 저를 다소 놀라게 했던 '현상' 두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에피소드들을 통해 들여다 본 일본의 문화가 제게는 묘한 긴장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지난주 이라크내 반미 무장조직에 의해 일본인 香田証生(고우다쇼우세이, 25)씨가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납치단체는 48시간 이내에 이라크주둔 자위대병력의 철수를 석방 조건으로 제시했고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거액의 몸값'을 미끼로 바게닝을 시도했습니다만 결과는 '인질의 죽음'이었습니다.

희생된 고우다씨는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뉴질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중 중동여행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여행의 목적은 '지신오사가수료코(自身を探す旅行)', 즉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던 셈입니다. 이스라엘에 들렀다가 요르단을 타고 이라크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이라크 진입을 만류하는 호텔주인에게 '이라크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접 보고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아무튼 20대에 누구나 한번쯤 해 보고 싶어하는 '그' 여행을 하다가 변을 당한 셈입니다. 여기까지가 사건의 개요였습니다.

 

일본현상1: 인질 고우다씨가 무장조직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뉴스가 니가타의 지진기사를 덮어버린 지난주 목요일부터 후쿠오카의 고우다씨 집 전화와 팩스는 불이나기 시작했습니다. '본인 잘못으로 납치되었으니 본인 책임이다'는 것이 대부분 전화와 팩스의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익명의 추궁은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어 죽음이 확인되고, 시신이 고향에 운구되어 장례가 치루어지는 기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검은 상복의 고우다씨 부모들은 연일 테레비 화면에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일본 사회는 그 말의 진의, 즉 '정말로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6월 한국의 모습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사건의 원인과 경위가 어떠하든 슬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이 사람과 사회의 통상적 문화라고 여겼던 제게는 다소 충격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문화인류학에 큰 족적을 두고 있는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의 '국화와 칼(菊と刀)'은 일본 연구서로는 보기드문 역작입니다. 초판 이래 50여년이 지났지만 이를 넘어서는 일본연구를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 문화의 핵심 가운데 하나를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가장 큰 형벌이 되는 문화'로 정의합니다. "일생을 통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배척되는 것은 폭력보다 무서운 것이다. (All his life ostracism is more dreaded than violence, p. 288 from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요컨대, 일본인들의 생각과 행위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절대'에 가까운) 기준은 '도덕률'도, '정의'도, '양심'도 아닌 '타인의 눈과 입' 즉, 다른사람들의 '평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일본사람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민감합니다. 

 

일본현상2: 지진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과 인질로 살해된 고우다씨의 부모와 가족들에게 공통적이었던 것은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적 슬픔의 얼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목을 놓아 통곡하는 것을 한풀이의 문화로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소 생소한 모습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슬픔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울지 않습니다. 얼굴의 그늘 만이 그들의 슬픔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됩니다.

'감정을 입밖에 낸다'는 것을 일본 사람들은 큰 '수치'로 여기고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속속들이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리(의리)'와 '기무(의무)'를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덕으로 생각하는 일본인들에게 이렇듯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누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규범입니다. 

 

 

졸려서 이만... sabotage, t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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