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너를 시험장에 실어다 주고,

회사에 출근하는데, 갑자기 애비의 할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아들 시험 보는 날 왜 애비의 머리에 할머니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떠오르면서 갑자기 눈시울 뜨거워졌다.

 

 



그 말년에 서울 변두리로 자식을  따라 오셔서는

소일거리도 없이 그저 손주들 들락날락 거리는걸 물끄러미 지켜 보시고만 하시던 할머니였지.

그리고 장손인 애비가 군대 간다고 집을 나설때,

할머니는 그저 손자의 손을 잡아 보고서는 아무말이 없었다.

유난히 손자를 사랑했던 할머니의 모습이기에

그모습만 뚜렷하게 남아 있네.

 

지금쯤이면 마지막 시험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노력하고,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올 것이라 믿고 있지만,

그래도 약간의 운이라도 더 따라서 찍은 문제가 몇개라도 더 맞기를

애비는 바라고 있다. 그거야 부모보다 네가 더 한 심정이겠지.

 

그 지겹다는 제도교육을 거쳐온 애비로서는 자식에게는 이런 학교, 이런 선생,

이런 무자비한 제도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지금도 계속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그저 흘러가는대로 지나쳐 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될 거 같다. 흘러 오는 과정에서 좀더 좋은 대학을 나와야 잘 먹고 살수 있다는

보통사람들의 생각이 엄마의 생각이 되고, 그렇게 별 저항없이 지내온 것이지.

애비도 되돌아 보면, 뭔가 다른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또 사회에서 겪어온 걸 생각해 보면, 뭔가 다른 교육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보통의 사람들이 가고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오히려 살아가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차피 고고한 삶을 살기는 틀린 마당에, 아비규환의 세상에 들어가려면

그 아비규환을 어릴적부터 경험하면서 체화되지 않으면 더 큰 불행을 겪을수도 있으니까..

 

애비는 아니지만, 오늘 이 시험을 보기까지 너와 네 엄마가 겪은 고통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매일 밤 12시가 넘어서 집으로 들어왔으니, 그게 어린 네가 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들을 기다리다 지친 엄마는 가는 실로 아파트 모든 창의 커텐을 다 짰을 정도이니까

엄마도 결코 그렇게 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통을 겪고 시험을 봐서는 대학을 가야 하는데,

대학이 또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도 않는다는 걸 엄마나 아빠도 뻔하게 알고 있는데 말이다.

 

애비는 대학을 가려 할때 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게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구체적인 길을 보고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그저 그건 재미 있을 거 같고, 또 열심히 해 볼 수 있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

그런데, 아버지는 공대를 가라 했고, 그게 먹고 살 수 있는 지름길이란걸 강조하셨다.

어딜 갔어도 비슷했겠지만, 핑계거리라도 생겨서 공대 공부는 하기 싫었고, 하기 싫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모르는거 투성이였고, 그래서 겨우 겨우 졸업이나 했다.

대학에서 공부한 거와는 전혀 관계 없는 곳에서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대학이 살아가는 것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애비는...

 

너는 네 목표가 지금 뚜렷하니까 그 목표를 위해서 하겠다고 하면

애비는 그대로 따라갈 생각이다.

그게 설사 재수가 된다 하더라도, 네가 하고픈걸 하라고 할 생각이다.

 

너의 할아버지가 애비를 대학보낼때와 비교해서

30년이 지난 지금 너를 대학보내면서 나아진게 있다면,

너 스스로 대학을 선택할수 있다는 권리가 주어진 것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30년 전에 너의 할아버지도 먹고 살만했다면,

아니 논을 팔아서라도 사립대학을 보낼 만한 논이라도 있었다면,

어떤 전공을 선택하든 아들이 하고 싶다는 걸 하라고 했겠지...

 

마지막까지 시험 마무리 잘하고,

시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제는 네가 결정하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할 말밖에는 없구나.

 

아비규환의 전쟁터가 바로 네가 나가야 할 곳이고,

그런 전쟁터를 만들어 놓고, 그리로 내보내는 애비를 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살아 남든, 그렇지 못하든 그것도 네 몫의 삶이라고 생각하기 바란다.

 

그래도 덧붙여 바라는게 한가지 더 있다면,

이제는 네 손으로 무엇이든 좀 해보는 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의 손을 빌지 않고, 할수 있는 것들은 스스로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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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6 16:50 2006/11/16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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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하 2006/11/16 17:1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부모의 본분을 망각한거야??
    어떤책을 보니까..."선지식?"이라는 말이 있던데 이제라도..아니 마지막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아버지로써의 본분을 다하셔야지....
    칼산에 사시는 아버님은 안그러셨는데 일산땅이 안좋은가??

  2. 산오리 2006/11/16 17:3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연하 / '니가 하고싶은대로 해라' 이게 애비의 본분을 다하는거 아닌가?ㅎ

  3. 스머프 2006/11/16 17:4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는 이런 편지 써주는 아버님이야말로 정말 멋진 분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리고 애비의 본분이란게 뭐 따로 있나요? 든든한 '의지처'이면 된거지..ㅎ

  4. 2006/11/16 18:5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참으로 따뜻함이 묻어나와서 현재 저의 체감온도가 좀 올라간 것 같아요. 아들도 그런 엄마아빠의 마음과 고생을 알고 있을거예요. 그런데 마지막 문단이 쫌...^^
    왜 어른들은 마지막에 바라는 말을 꼭 쓰게 될까요?? ㅋ
    수능 치르느라 가족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5. 바다소녀 2006/11/16 21:0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오리형이 공대 나오셨구나. 첨 알았네.
    일요일에 자원봉사 안 하셔도 되는거예요?
    가족 모두 좀 쉬었다 갈 수 있겠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단 공주님 안냥. ^^

  6. 곰탱이 2006/11/17 16:4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정말이지, 모두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햐아... 저도 갑자기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동희가 자신의 길을 당당히 가는 멋진 노동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 민주애비 2006/11/17 17:1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눈물이 나려고 해요 ㅠㅠ

  8. azrael 2006/11/17 20:2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흠...불현듯 제가 수능볼때 울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지네요~

  9. 사막은 2006/11/18 03:5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부모가 되는 건 어쩐지 정말 무섭단 생각이.. 넘 부정적인가? 그래도 이런 편지 써주는 부모가 있는 산오리님의 아드님이 넘 부러워요.

  10. 알엠 2006/11/19 09:4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멋진 산오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