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후까지 퇴근 못하고 있었는데,

왠 아줌마가 허름한 가방보따리를 들고 자리에 와서는 물건을 부시럭 부시럭 꺼내놓는다.

중국말 억양이 남아 있는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는

양말과 치약 칫솔을 꺼내놓고서는

일하다가 한쪽 팔이 짤려서 먹고 살기 어려워 이렇게 장사를 다닌다면서

한가지를 사 달라고 한다.

상품은 써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거니까 믿을 만 한거라면서...

 

한편으로는 반갑고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 10년 만에 사무실에서 만나는 '잡상인'아닌가...

한편으로는 짜증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거리에서 5천원도 안주면 살 수 있는 허접스런 물건들인데,

이걸 만원주고 사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양말이 발가락 양말이라면 흔쾌히 사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조금은 망설이다가 치솔 8개 포장되어 있는 걸 만원주고 샀다.

그냥 다 있고,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다음에 사겠다고

거절해서 돌려 보낼 수 가 없었다. 



'잡상인' 물건 을 샀던 날들이 벌써 옛날이 되었구나,

그 즈음에는 이런 저런 것들을 가끔은 사기도 했는데....

 

최소한 10년 전까지는 사무실에 '잡상인'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자유롭지는 않고, 경비실에서 막아도 어찌 어찌 잘도 들어왔고,

그들은 일대일로 붙잡고 늘어져서 물건을 팔았다.

산오리처럼 마음 약한 인간은 괜히 얘기 한마디 들어주려다가

그 얘기 들어준 시간이 미안해서라도 사곤 했다.

 

90년대 초반에 등산화를 샀다.

사무실에 자주 들르는 아저씨 였는데, 이 아저씨 직접 만드는 등산화라면서

발크기를 직접 종이에 그려서 맞춰 주겠다고 했다.

마침 산에 가는 것도 재미를 좀 붙여 가는 즈음이라,

3만원인가 주고선 등산화를 맞췄다.

그당시의 등산화 딱딱한 고무바닥에 적갈색 통가즉으로 온통 둘러싼 신발,

요즘 공장의 작업화 비슷하게 생긴 거였다.

신발을 가져 왔는데, 신어 보니까 조금 작은거 같았다.

조금 작다고 했더니, 다시 가져가서는 좀 늘려 왔단다.

그래도 별 차이가 없었다.

그 신발을 신고 설악산 백담계곡으로 마등령을 거쳐 공룡능선을 가자고 올랐는데,

마등령까지 가서는 엄지발톱은 빠질 만큼 상처가 나고, 뒤꿈치도 다 까지고..

공룡능선 당연히 포기하고, 비선대로 하산했다.

그리고  그 등산화 신지도 못하고 신발장에 두었는데,

요즘 안보이는거 보니까, 버렸는지, 누굴 줬는지 모르겠다.

 

카메라도 '잡상인'한테 샀다.

이 아저씨도 얼굴 익힐만큼 자주 들락거린 아저씨 였는데, 올림푸스 카메라를 사라고 했다.

디카 나오기 전이니까 필카인데, 사진이라고 개뿔도 몰랐지만, 카메라 생긴게 그럴듯했고,

그기다 줌이 잘 된다는게 너무 신기하고 좋았다.(왜 그렇게 줌이 되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지...)

하튼 30만원쯤 되는 카메라를 10개월 할부로 샀다. 한창 할부가 유행을 타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는 열심히 카메라를 들고 다녔는데, 이 놈의 카메라가 밤에 빛이 모자르면 자동으로

안찍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번이나 카메라 들고 가서는 찍지도 못하고 들고 오기도 했다.

낮에 날씨 좋을때야 잘 찍혔지...

그리고, 밧데리가 장난 아니게 비싼 거였다. 그당시 밧데리 한개에 만원인가 했는데,

그걸 두개나 갈아야 했으니, 카메라 값보다 밧데리 값이 더 비싼 꼴이었다.

그러니, 밧데리 닳을까봐 많이 찍기도 부담스러웠다. 그기다 필름 값도 녹록하지 않았으니..

어쟀든 이 카메라는 버리지도 못하고, 아직 집에 있다.

필름 끼우면 아직 찍히기는 하는데, 밧데리가 남아 있나 모르겠다.

 

심지어 중풍예방주사도 '잡상인'한테 맞았다.

어느날 한 직원이 아주 용한 아줌마 한사람이 왔는데,

이 아줌마한테 중풍예방 주사를 맞으면 평생 중풍이 안걸린다는 거였다.

그런게 있어? 그리고 그 당시 숙직실로 갔더니,

몇 벌써 중풍예방 시술을 하고 있었는데, 기다란 침으로 코를 쑤셔서 피를 뽑는 것이었다.

그것만 한번 하고 나면 평생 중풍이 안생긴다는데, 솔깃하지 않을수 있으랴..

그것도 같은 직원들이 모여서 권하고...

산오리도 믿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면서 3만원인가 주고 중풍예방 시술을 받았다.

긴 대바늘 침으로 코를 쑤셔서 피를 뽑았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면 한바가지 나온거 같았다.

그리고 그 바늘을 다시 다른 직원의 코에 쑤시고...

암튼 사람들이 조금씩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수 있으랴..

그 다음날이 되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하는 생각이 들던데..

광신도가 되거나, 만병통치약이라고 믿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이 나이까지 중풍 안걸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 대침 찔러 피 뽑은 효과 있는 것일까?ㅎㅎ

 

보험도 '잡상인' 아줌마에게 들었다.

아직도 보험 설계사들은 가끔 사무실에 보이기도 하는데,

그당시에는 왜 그리 많은 아줌마들이 자주도 찾아 왔는지..

한 아줌마가 집요하게 찾아 와서 얘기하니까 어쩌랴...

그당시 수입에 비해 꽤 비싼 보험료를 내고 들었는데,

저축성은 거의 없고, 보장성만 있게 해 달라고 해서 보험료는 내는 족족 날라갔다.

6-7년을 넣다 보니까 너무 아까워서 해약했다.

그랬더니 약간의 저축성으로 남아 있던 돈이 나왔고,

그 돈으로 놀러 가는데 썼다.

 

어느날 농담삼아 아줌마에게 얘기 했다.

"설계사 아줌마들하고, 우리 직원들하고 미팅한번 하죠.."

그랬더니 그 아줌마가 미팅 주선하겠다고 했다.

어느날 와서는 몇날 며칠 어디서 몇명씩 만나서 미팅 하자고

그 아줌마가 약속을 잡아 줬는데, 막상 날 잡아 주니까 못가겠더라..

 

어떤 아저씨는 성인용품만 들고 다녔는데,

이 아저씨는 사무실에서 상당 인기가 있었다.

사우디에서 가져왔다는 정력제 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들을 들고 와서 팔았는데,

이건 하나도 사지 못했다.

성인용품이랍시고, 너무 비싼데다가, 가져가서 어디다 쓸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잡상인' 아줌마, 아저씨들이 사무실을 돌아 다니니까,

직원들이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고,

사무실 문에는 대문짝만하게 방이 붙었다.

"잡상인 출입금지"

그런다고 그들이 출입안할리도 없었고,

꾸준이 수요도 있었으니까 출입은 계속되었다.

 

근데, 97년 일산으로 이사오고도 '잡상인' 출입이 계속되니까,

직원들 원성이 높아졌고, 출입카드를 설치하고 나서부터는

눈에 띄게 '잡상인'들의 출입이 줄어들었다.

그놈의 출입카드는 참 용도도 다앙하시지...

 

그러고 나니까 사무실에 갇혀서 물건 팔러 오신 분들의

얘기 들어줄 기회도 없고,

듣다 미안해서 쓸모 없는 것이라도 사줄 기회도 없고,

허튼 농담이라도 한마디 던질 사람도 없다...

점점 삭막한 사무실이 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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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2 11:21 2008/01/0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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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뎡야 2008/01/02 12:5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중풍.....=ㅁ= 너무 웃겨요;;;;; 재밌는 일도 많은 거군요-ㅁ-;;;

  2. 썩은돼지 2008/01/02 12:5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목숨건 중풍예방 시술...

  3. 행인 2008/01/02 13:1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우겔겔겔겔... 중풍예방... 기절하겠네요. 어쨌거나 잡상인이던 누구던 먹고 살기 좋은 쥐띠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삭막한 사무실... 간만에 출근한 당사 연구실이 그렇구만요. 쩝...

  4. 산오리 2008/01/02 13:3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덩야 / 제가 생각해도 웃겨요..ㅎㅎ
    썩은돼지 / 목숨까지 걸진 않았는데..ㅎ
    행인 / 지랄같은 당에 다시 출근이라니.. 멀리서 생각만해도 갑갑하옵니다.ㅎㅎ

  5. re 2008/01/02 18:2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느무 재밌어요. 대꼬챙이로 코파기.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