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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3/28
    [동영상]향촌 사람들2(3)
    토닥
  2. 2006/03/28
    향촌 사람들2
    토닥
  3. 2006/03/28
    [SHOUT-18]오늘(3)
    토닥
  4. 2006/03/25
    [SHOUT-17]대추리에서 노래를(3)
    토닥
  5. 2006/03/23
    [동영상]향촌 사람들(8)
    토닥
  6. 2006/03/23
    [SHOUT-16]향촌촬영 후기(3)
    토닥
  7. 2006/03/20
    인천 향촌의 철거현장에 연대를 호소합니다
    토닥
  8. 2006/03/20
    [SHOUT-15]촬영계획(1)
    토닥
  9. 2006/03/16
    대추리에서 공연을(4)
    토닥
  10. 2006/03/15
    [SHOUT-14]평가(3)
    토닥

[동영상]향촌 사람들2

촬영: 3월 24일(금) 재원

편집: 나루, 재원

삽입곡:'멀리서' - 김두수

         (처음에 '강변마을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잘못 올렸음...죄송...)

 

재원이가 촬영하고 가편집한 영상물(23분)을

5분으로 줄이고 음악을 넣어서 올립니다

민중언론 참세상-열린채널에도 올렸습니다

 


향촌-2
 *인하대학교 학생들이 향촌아이들과 함께 공부방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전9시30분  향촌마을 철거대책위원회 주민들 구청앞에 모임

                      시민단체와 불교계 스님 주민협상단 구청측과 협상하려 하지만

                      구청측, 당사자주의를 내세워 주민들만 협상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함

 

오전 11시    구청측은 구청장없이 대행체제 상황에서 비공개협상을 진행 

 

오후 12시 20분쯤  협상을 마치고 나온 주민들은 “협상이 아니라 대화"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고 한다.  고 신현기씨 사체 수습에 관해

                    구청측이 공식적으로 발표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오후 3시 30분쯤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 철거대책위원회 사무실 방문.

                    4월 초 열리는 국회에서 건교부 장관에게 이 문제를 건의하겠다고.

 

(취재:재원/요약: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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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 사람들2

작성:재원

 

향촌에서 2006년 3월 24일 현재

 

같은 신앙을 가지고 같은 지역에 살며 같은 교회에 다니고 같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어떤이는 권좌에 앉아 사람을 희롱하고 어떤이는 가진 것 없다는 이유로 눈 비 바람 결에 그것들을 고스란히 맞고 자신들을 이 지경까지 내몬 거대한 힘을 원망하며 피눈물 흘리며 땅을 치고 통곡한다. 권좌에 앉은 자들아. 이 사람들의 피눈물 흘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냐? 권력이 있는 너희들이 마땅히 보듬어 안아주어야 할 사람들이란 생각이 안 드냐?


 



향촌 주민들에게 이 지역이 철거된다고 통보된 것은 2004년 말 이었다. 지역 주민의 기억에 의존해 그 때가 아마 2004년 11월에서 12월 사이 쯤 되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회의를 하고 대책위를 꾸렸다. 그 와중에 작년(2005년) 한 해 동안 이 지역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 사건은 무려 100여 건에 이른다. 이것은 지역 주민들의 기억에 의존한 것이다. 비록 소방서에서 보내온 공식 자료에 의하면 작년 가을이 되기 전까지 24건의 화재 기록이 있다. 이 화재들은 이 지역의 빈 집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한 지역에서 한 해에 빈 집을 대상으로 그 정도의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은 경찰 수사를 안 거치고도 이게 방화일 거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향촌 주민들이 철거에 반대해 저항해 온 지가 1년이 넘어섰다. 왜 1년여의 기간동안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이렇게들 버티고 있었을까? 왜 이렇게 힘겨운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이들은 가진 자들이 아니다.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들도 부지기수이며 사업이 망해 가족들과 이 지역으로 들어와 산 사람들도 있고 쉰이 넘은 어미가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아이 뒷바라지 하며 살았고 간헐적인 간질증세로 몸이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엄마가 여기에 살고 있었다. 이 사람들한테 왜 1년동안 돈 벌어서 이사가지 않았냐는 질문은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이 사람들한테는 그럴 능력이 없다.


보증금 백만원에 월세 10만원,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4만원, 철거되는 지역인 줄 모르고 집주인의 양해를 받아 빈집에 들어와 상하수도요금, 전기요금 같은 공공요금만 내고 살던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이 지역은 철거될 지역이고 국가에서 땅을 매입했으니 며칠까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시오. 세입자들인 당신들에겐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소.” 라고 요구한다면 이 사람들은 과연 어느 곳으로 가야 할까? 기껏해야 제2의 향촌마을로 이사를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도 상황이 좀 나은 경우일 때 가능하다. 이사를 간다고 해도 그 지역도 역시 환경개선지구로 명칭되어지고 머지않아 또 철거촌이 되겠지.


집은 며칠새 거의 다 헐리고 몇 채 남아 있지 않다. 24일 현재 행정대집행 마지막 날이다. 구청앞에 모여 앉은 주민들은 핏켓을 들고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다. 할머니 한 분이 통곡을 한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해. 나 저기(구청) 가서 죽을래.” 땅을 치고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하신다. 시민단체와 불교계 스님과 주민협상단이 구청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구청측에서는 주민들만 들어와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주민들과 구청측의 비공개 협상이 시작됐다. 무슨 말들을 했을까? 구청은 현재 구청장이 없는 대행체제로 움직인다고 한다. 구청장이 선거에 출마했기 때문이란다. 구청장이 없는 가운데 조용히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결론이 어떻게 났어요? 철대위(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은 협상이 아니라 대화였다는 말만 한다. 주민들 표정이 씁쓸하다. 대책위 사무실 건물은 보존하기로 했다고 한다. 지금 당장 거리로 쫓겨나진 않겠구나 생각하니 조금 안심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어둡다. 이 사람들은 느낀다. 이 사건이 조금 조용해지면 법을 앞세워 내쫓길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면 철거촌 한쪽 귀퉁이에 천막을 치고 생활해야 하나? 물도 전기도 없는 곳에서...


아이들이 하나 둘 학교에서 돌아온다. 오늘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반겨주고 같이 놀아주고 학교 공부를 보아줄 기력들이 없다. 오랜 기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생활한 어른들에게 감기는 기본이고 점점 근육도 뻣뻣하게 굳어오는 것 같다. 계속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은 무리다. 지금도 이런데 천막생활은 정말 안되겠구나 생각한다. 이 아이들을 만나러 오는 공부방 선생님들은 말한다. 이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관심이라고.


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그렇게도 보기가 싫었을까? 환경개선지구라는 명칭을 붙여 가며 건물을 부수고 이들을 내쫓게. 이들에게 가족들을 데리고 거리에서 노숙을 하라고 내어 쫓았을까? 그러면 또 노숙한다고 그 거리에서 쫓아내겠지. 외국 어느 나라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낡고 허름한 동네는 존재한다. 미국에도 콘테이너 상자 속에 들어가 사는 빈곤계층이 있고 일본에도 이탈리아에도 가난한 동네는 있다. 오히려 그런 동네를 유서가 깊네 어쩌네 하면서 그냥 놔두는 나라들도 있다.


왜 대한민국에서는 적은 돈이나마 한 집에서 온 가족이 모여 사는 것을 보기 싫은 곳이라며 부수고 그들을 쫓아내는 것인가? 힘의 논리. 자본의 논리에 앞서 국가는 마땅히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들을 거리로 쫓아내는 것은 보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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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18]오늘

3월 8일 울산 공연 이후

사진이라도 올리려고 했건만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는다

W 멤버들에게 미안해서 할 말이 없다

 

현재 촬영테잎 70개

두번째 다큐에서는 절대 100개를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과연...

 



연수가  다른 팀과 함께 광명시에서 연극공연을 했다

내가 요새 얼마나 정신이 없냐 하면

그 공연 제목도 모르고 그냥 갔다

 

게다가

입구에 늘어선 줄을 보고서야

아차, 입장료는 어떡하지? 하고 그제사 지갑을 열어봤는데

동전 세 개만 달랑 들었다

교통카드만 있으면 돌아다니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으니까

돈을 찾을 일이 거의 없어서...라고 하기에는 거 참...

 

혼자 얼굴을 붉히다가 카메라를 꺼내 어깨에 메고

마치 취재하러 온 기자처럼 그냥 출연자 대기실로 걸어갔다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누가 '여보쇼!'하고 부를까봐

태연한 척 몇 걸음 걷다가

나중에는...발바닥이 안보일만큼 빠르게...휘리리리릭...

 

예비군과 어르신들이 단체관람을 와서 객석은 금세 꽉 찼고

연수는 무당역할을 맡았는데 그럴 듯 하게 잘 어울린다

저녁에 다른 약속이 있어서 마지막 장면을 볼 수 없었던 게 아쉽다

 

촬영은 어찌 어찌 했건만 돌아와서도 다시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

재원이가 향촌2를 촬영해서 가편집테잎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아직 들여다보지 못했다

 

약속은 약속을 낳고

시간은 시간을 먹어치워서

내일 하루도 도무지 예측불능이로세

일단 자야겠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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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17]대추리에서 노래를

오늘(25일 토요일) 대추리에서 박향미를 만나기로 했다

불안하고 주눅이 들었다가도 W를 만나면 안심이 되는데

대추리에서 만난다니까 더 마음이 좋아진다

 

저녁 7시, 대추리 문화제에서 향미가 노래를 하게 될텐데

그 순간, 모두가 잠시라도 즐거웠으면 좋겠다

 

 



다녀와서 계속 말하자면...

박향미는 '등대지기' '손을 잡아야 해' '희망의 노래' 세 곡을 불렀는데 (맞나?)

반응이 좋았다

좋은 정도가 아니라 박수를 치던 여러 어르신들이

'노래도 잘하고 말도 잘한다'고 '저 사람이 테레비에도 나오냐?'며

몹시 진지하게 관심을 표현했다

(그런데...그런 재밌는 이야기들은 촬영을 못했다...아쉬워...)

 

오늘은 시인들이 세 분이나 와서 대추리 투쟁에 대한 시를 낭송했고

스크린쿼터 축소반대 투쟁을 하던 영화인들도 와서 인사를 했고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 감독, 한독협 이사장인 '황철민 감독,

  '송환'의 김동원 감독, 그리고 영화제작자협회의 한 분)

다른 가수들도 많이 왔다

 

밤에 서울에 와서 편집할 일들 때문에 또 하룻밤 묵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다음에는 독립영화를 만드는 여러 친구들과 그 곳 주민이 된 여러 친구들이 모여서

술도 한 잔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촬영만 하고 급하게 돌아오는 길은 늘 너무 아쉽고 죄송하다

일 때문에 가서 만나는 게 아니라

그 곳에서 싸우는 사람들과 그 곳에 찾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한 사람의 대등한 인격으로 만나서

속내를 털어놓는 친구로 다가가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영화를 더 잘 만드는 길이기도 하고

영화를 만들면서 조금씩 성장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차 안에서 침 흘리며 졸던 와중에 잠시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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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향촌 사람들

2006. 3. 23

재원이가 촬영, 편집한 영상(8분 50초)을 받아서

시간을 줄이고(4분30초) 음악과 자막을 넣어서

올립니다

 

2006. 3. 25

[민중언론 참세상]에서 활동하시는 '지후'님이

'참세상 열린채널'이란 공간에 동영상을 올려주셨습니다

 

*촬영 : 2006. 3. 21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삽입곡: Portland Town -  Joan Baez


♪ 향촌-1 ♪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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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16]향촌촬영 후기

토닥님의 [인천 향촌의 철거현장에 연대를 호소합니다] 에 관련된 글.

 

작년 10월부터 철거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는 '향촌'은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에 위치한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정부와 주택공사가 이 곳을 '환경개선지구'로 발표하고 철거를 서두르는 바람에

최근 이곳에 살던 주민들의 삶은 말 그대로 완전히 망가지고 있다 

박향미는 두 달 전부터 이 곳에 찾아가 노래강습을 했고

주민들 중 몇 몇이 '향촌 노래패'를 조직했다

 

철거투쟁의 과정에서  한 주민이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 상황은 급박해졌고

박향미는 향촌 노래패와 함께 투쟁가를 녹음하러 서울에 왔었다

노래패에 참여한 여성주민 세 분과 박향미의 녹음장면은 내가 촬영했고

21일 화요일 인천 남동구청 앞에서 열린 향촌 주민들의 집회는 재원이가 촬영했다

빠르면 오늘밤, 늦어도 내일 새벽에는 관련장면을 편집해서 이 곳에 올릴 예정인데

일단 재원이가 향촌에 다녀와서 쓴 글을 아래에 올린다



작성:2006. 3. 22(수) 재원

촬영:2006. 3. 21(화)

 

야구 열기가 한창인 때 인천 만수동에서는 사람이 죽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신현기. 쉰을 넘긴 이 사람은 인천 만수동에서 강제철거를 반대하던 지역 주민이다. 돌아가시기 바로 전 날에도 강제철거를 반대하며 열심히 활동하시던 분이다. 그 사람의 죽음이 자살이었는지 타살이었는지는 모른다. 시신을 둘러싸고 주민들과 신현기씨의 가족들은 염을 할 수 있도록 시신을 넘겨 달라고 했단다. 그런데 경찰과 남동구청장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며 시신을 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정히 시신을 돌려 받기를 원한다면 신현기씨와 같이 찍은 사진이라도 가져오라고 했단다. 지역 주민과 유족은 사진도 가져갔다. 하지만 돌려받지 못했다.  

 

신현기씨는 고아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 어느 집에 입양되었고 양부모와 형이 버젓이 생존해 계신다. 그들은 다만 호적 정리만 하지 않았을 뿐이다. 남동구청장은 이들이 법적인 가족이 될 수 없으므로 시신을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행정에는 인정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단다.

 

그 사람의 유족과 지역주민들의 원성을 뒤로하고 남동구청측에서는 시신을 몰래 빼돌려 화장을 시켜 버렸다. 고 신현기씨가 자살인지 타살인지 밝힐 수 없다. 이미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강한 의혹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너무나 잔인하다. 행정에는 인정이 개입될 수 없다고 하는 그 구청장의 말에 공감을 하는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될까? 누가 뽑아준 구청장인데... 남동구청장은 이번 구청장 선거에 또 나온다고 한다.

 

만수동 향촌마을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전세금도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대부분 보증금 삼사백에 월세를 내는 세입자들이다. 주택공사측과 남동구청은 향촌마을을 재개발도 아닌 환경개선지구로 만들어 그들을 내몰았다. 그들에게 그들의 보증금 삼사백을 쥐어준들 그 사람들이 그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이 있을까? 주공과 남동구청은 자기들은 할 바를 다했다고 했고 지역 주민들의 항의를 보상금을 노린 항의라고 치부하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서 그들을 내몰고 트럭이 들어선다. 그집의 가구며 세간 살이를 끄집어 내서 마구잡이로 트럭에 실고 저 멀리 공터로 가져간다. 바로 전까지 잠을 자고 밥을 해먹던 사람들이 넋을 잃고 그자들이 하는 행동을 볼 수 밖에 없다. 망연자실한 그 사람들 앞으로 고물상들이 들이 닥친다. 미처 빼내가지 못한 것들 중 쓸만한 것들은 고물상들이 집어간다. 그 작업이 끝나면 포크레인이 집을 뭉게 버린다.

 

철거가 시작된 첫날 어떤 어미의 작은 아이가 유치원에 갔다 와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우리 집이 없어" 엄마는 눈물을 꾹 참았다. 두어시간 뒤 중학교 다니는 큰 아이가 와서 엄마에게 같은 말을 한다. "엄마. 우리 집이 없어" 엄마는 애써 참았던 눈물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갈 곳이 없는 지역 주민들은 어디 놀러 갈 때 짐 몇가지 챙기듯 옷가지 몇개만 달랑 들고 나왔다. 왜 짐을 많이 챙겨 오지 못했냐는 질문에 갈 곳이 없는 사람이 그 짐을 다 어디에 갖다 놓을 수 있겠냐고 한다.

 

사람들은 저 멀리 무너져 가는 집들을 보면서 한마디씩 한다. 오늘은 아무개네 집이 무너지겠고만. 저걸 어째. 저긴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데. 어이 이봐. 오늘은 자네 집 차례야.

그들의 옷차림은 아직 겨울이다. 요 며칠새 날씨가 푹해서 이제 봄 옷을 입어야 할 때다. 하지만 그들에겐 갈아입을 옷 조차 없다. 철거반이 실고간 이 사람들의 옷가지는 마구잡이로 옛날 비닐을 엉기성기 엮어 만든 쌀푸대자루에 들어가 집합장소에 갖다 놓는다. 그들의 옷가지들은 푸대자루 안에서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먼지 풀풀 날리는 곳에서 이리 저리 뒹굴고 있다. 그 옷가지를 찾는다 한들 그들이 다시 걸칠 수 있을 것인가.

 

학교에서 헐래벌떡 뛰어온 손녀가 땀을 뻘뻘흘리는 것이 안스러워 할머니는 자신의 지갑을 열고 백원짜리 동전 다섯개를 쥐어주시며 하드 사먹으라 하신다. 아이는 신이 나 동전을 쥔 손을 꼭 쥐고 밖에 나가려 하지만 어른들의 제지를 받는다. 혼자 나가면 위험하다. 아이는 체념하고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놀이를 한다.

 

유치원 다니는 딸아이가 옆에서 내내 인상을 쓰며 울며 불며 난리다. 온갖 짜증 다 낸다. 이유를 들어보니 유치원 갔다 오면서 예쁜 지갑을 봤는데 사천오백원이란다. 아이의 엄마는 그걸 사 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 마디. 꼭 필요한 거 아니면 사 줄 수 없어 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엄마의 단호한 말에 아이는 대성통곡을 한다. 그 어미가 나에게 자신의 힘든 얘기를 하며 눈물 짓는다. 아이가 어미의 눈물을 보며 더이상 지갑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아이는 밖에 나가 언니들과 시장놀이를 한다.

 

쉰이 넘은 아낙의 친정아버님이 같이 살고 계셨다. 아버님의 연세 90을 바라 보셔서 거동이 불편하시다. 그 아낙이 아버님께 항상 말했다. 아버지. 무슨 일 생기면 아버지가 119에 신고해서 병원으로 가셔. 아버님은 요 근래 병원 신세를 지신다. 가까이 있는데 왜 안오냐고 하신단다. 어버지. 내가 거기 갈 상황이 아니야. 갑자기 울컥하며 그 아낙은 혼자 울먹이며 말한다. 차라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좋겠어.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야. 자신의 말에 비통함을 느껴 그 아낙은 대성통곡을 한다.

 

어미는 지금 기거하는 철대위 사무실도 무너지면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을 어떻게 천막생활을 하게 할 지 막막하다. 지금이야 날씨가 차가우니 조금 괜찮지만 더운 날씨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활을 하면 전염병 문제도 심각하다. 큰애가 아토피라 더 걱정이다. 중학교 다니는 아이는 한참 사춘기라 더 걱정이다. 이러고 살아야 할까? 차라리 죽어 버릴까 생각도 많이 한다.


그 사람들에게 죄가 있을까? 가난한 것이 죄인가?
권력을 쥔 자들이 서로 짜고 그들을 거리로 내몰고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일제시대 때 조선민들은 일본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신의 삶을 파괴당했으며 조선민들은 판자로 움집을 만들어 생활해야 했다. 홍수가 나도 그들은 망연자실 자신의 허름한 집이 떠 내려 가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고 마을로 나와 거리의 쓰레기를 주우러 다녀야 했다.

 

지금은 2006년이고 대한민국은 독립된 한 국가다.

이런 데서 과거 식민지시대 권력자들이 조직적으로 유린하고 죽여온 조선민들과 같은 수모를 겪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다.


저의 바람은 온 국민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재산이 넉넉치 못하는 것이 죄가 될 수 없고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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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향촌의 철거현장에 연대를 호소합니다

토닥님의 [촬영계획] 에 관련된 글.

 

 

추신: 3월20일 현재 상황

        아직 부검하지 못한 이 시신을 경찰이 적법절차없이 강제로 화장했습니다

        주민들과 철거대책위가 오전11시경 초제를 지냈습니다

        연대를 요청합니다, 진실을 알려줄 카메라를 요청합니다

 

<연락처:032-461-4572 향촌 철대위사무실>



*아래는 원글에 달아놓은 박향미의 덧글

 

오늘 아침11시에 남동구청앞에서 철거민들과 집회를 하고
1시에는 고신현기씨의 초제가 그자리에서 있었습니다..
철거민들과 오정렬의장님, 노수희 의장님을 비롯해
 각단체 대표로 보이는 사람들과 그리 많지는 않은 사람들이 함께 모였었습니다.
11시에 철거민들의 자유발언도 있었구요..
그중 향촌의 노래패언니가 딸아이 이야기를 하며 결국 또 눈물이 흐르고말았습니다
분명 내귀로 라디오에서는 간접적 책임을 통감하며 강제철거를 중단했다고 했는데..
개풀뜯는 소리..방송국이 어디였는지 모르지만
주공쪽의 언론자료만 읽어대는 정말 무책임한 방송이었습니다
한 채 한 채 사람이 사는 아직 가재도구도 꺼내오지 않은 집들도 가구를 실어내고
집은 철거를 하고 고물상은 얼씨구나 싣고들 가버렸다고 합니다..
뭐 이루 말할수없는 상황들이 너무 많아 나중엔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나루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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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15]촬영계획

현현님의 [[펌]노무현 정권과 주공은 살인철거를 즉각 중단하라!] 에 관련된 글.

위의 글은 W-불현듯의 홈페이지에서 퍼온 기사내용이다

며칠 전에는 그 곳에서 공연도 했었고

향미와 금예가 다녀왔다는데

촬영팀은 아직 못갔다

W의 첫 공연에서 음향을 맡았던 분이 그 곳의 철거대책위에서 일하신다

이번주에는 집회에 같이 가야겠다

 

사람이 죽어도 놀라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달려들어도 여유만만한 이 사회는

살아있는 모든 이들을 모욕한다

생존이, 밥이, 돈이, 다 치욕이 될 수 있는 이 와중에

공연을 한다는 것

특히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들끼리 예술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눈치가 보이는 일인지, 얼마나 주저하게 되는 일인지...

그래도 우리는 달릴 것이다

희망을 품기 위해서

더 이상 죽지 않고 더 열심히 살기 위해서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고 모두가 노래할 수 있는 세상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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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에서 공연을

 


<사진출처:참세상>



울산공연을 마치고 대추리에서도 공연을 하자고 했었는데

3월 대추리는 앓고 있다

대추리만 앓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도 쓰러지고 있다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인간답게 살 권리와 자기 땅에서 거주할 권리가

하루 아침에 폭력으로 짓밟히는 세상

 

W가  이 곳에서 같이 노래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평화롭게 공연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사막을 건너야 한다고

같이 어깨를 걸고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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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14]평가

W에 총연출과 기획자가 결합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동감이다

장르가 다르고 표현방식이 다른 몇 사람이 모여서

멤버들이 모든 일을 일일이 의논해가며 한 무대에 선다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율하고 이끌어갈 사람이 필요하다

 

첫 공연과 비교해서 달라진 내용, 달라진 환경에 대해

미흡했던 부분을 짚어보고 대안을 고민하는 중요한 자리였는데

미리 가서 기다리기는 커녕 두 시간이나 지각을 했다

생리가 시작되면서 몸도 마음도, 카메라도 무겁다

 



 

촬영을 한 지 석 달이 다 되어가는데

박향미의 집에 처음 갔다

개미갬은 어질러진 집안을 보이기 싫어서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언니에게 야단을 하고

준하는 자다가 깨서 칭얼거리고

나는 울산에서 말실수했던 걸 사과하고

향미는 불편했던 속을 잠시 보여주고나서 하하 웃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코코아와 호박죽을 먹으면서

어색하게 마음을 조금 풀고나니

향미의 홈페이지가 복원되었다는 반가운 소식

 

사진과 자료를 보강하는 중인데

며칠 뒤면 이곳에도 링크를 할 생각

 

인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향미가 시청앞까지 태워다줬는데

사무실에 내려 짐정리를 하고 있자니 휴대폰이 울린다

 

'달 좀 봐봐 혼자보기 아깝다'

 

운전하면서 문자를 어떻게 보내나

그러면서 창 밖을 보니 정말 달이 흐릿한 황사 뒤에서

핼쓱한 낯빛으로 반긴다

 

고단하지만 멋진 하루, 달도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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