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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4/27
    호밀밭의 파수꾼의 음모이론(1)
    HelterSkelter
  2. 2005/04/27
    임진모著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중 존레논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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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사람들 - 레닌에서 비틀즈까지
    HelterSkelter
  4. 2005/04/27
    '제5공화국' 게시판, 네티즌 열기 뜨겁다
    HelterSkelter

호밀밭의 파수꾼의 음모이론

 

http://www.youtube.com/watch?v=re8lOhx1wE8&search=beatles

[MV] Tomorrow Never Knows-The Beatles Carto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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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레논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 > by 전찬일

레이 코널리 著의 ‘존레논’본문과는 다른 관점으로 임진모씨와 함께 번역한 전찬일씨가 책말미에 수록한 부록을 올립니다. 80년도 레이건 행정부 집권과 관련한 CIA 존레논 암살 음모론에 관한 내용입니다. 재미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멜 깁슨,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음모론(conspiracy theory)'에 보면 멜 깁슨이 CIA가 만든 살인 병기로 나옵니다. 손에 한시라도 호밀밭의 파수꾼이 없으면 돌아버리지요(마크 채프먼처럼). 집에 사서 재놓고…
약물과 히피의 대부 제리 가르시아(그레이트풀 데드의 리더), 비판적인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이 CIA 뿌락찌라는 표현이 참 재밌었습니다.

왜 이런 흥미로운 음모론이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아래 762번 글부터 먼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자구에 얽매이지 마시고 문맥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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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레논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 > by 전찬일

존 레논을 살해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은 레이 코넬리의 의견처럼 과연 불행하고 머리가 돈 열광자에 불과 할까?
흔히 얘기되고 검찰측의 공식적인 논리처럼 그는 역사에 남기를 간절히 소망한 사이코 팬 또는 과거의 레논 팬에 지나지 않을까? 간혹 외신을 통해서 전해지듯이.. 어떤 정치적 세력의 사주와 세뇌에 의한 (정치적)암살일 가능성은 없을까?

혹자는 '엔터테이너'요 좀더 후하게 표현해 '팝 아티스트'에 불과한 인물에게 웬 암살이냐 할지도 모르겠다. 1963년 11월22일 미국과 전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살해마저 미국인들의 73%가 그렇게 믿지 않고 끊임없이 암살설이 제기되는 상황에서도 리 하비 오스왈드라는 24세의 한 청년의 단독 범행이라고 단정짓는 판국에 그런 반응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JFK에 이어 60년대에 계속 터진 마르틴 루터 킹 목사와 JFK의동생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죽음 역시 모종의 암살이라는 심증이 감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얼 레이와 시런 시런이라는 '고독한 광인들'이 저지른 미친 짓일 뿐이라니까
따라서 아무리 신빙성 높은 증거가 드러나고 결정적 사실이 밝혀진다 할지라도 2000년 12월이 지나야 비로서 사면 여부가 새로 결정될 채프먼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 한 레논의 암살설은 영원히 미궁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물론 얼마전 감옥에서 다시 한 번 음모설을 부인한 채프먼이 그간 진실을 말해 왔다고 할수도 있으리라.
그의 주장대로 그는 J.D. 셀린져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열여섯 살 먹은 주인공 홀든 콜필드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사기꾼들'을 제거하기 위해 레논을 선택해 살해 했는지도 모르니까.. 아울러 그럼으로써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게 되고 그 결과 채프먼같은 사명을 이 세상에서 실행에 옮길 수 있을런지도 모르니까..

혹은 그를 정신 감정한 대부분의 정신의들과 심리학자들. 더불어 대다수 언론의 의견처럼 그는 '레논이 되고자 한 인간'(The twisted man who wanted to be Lennon)-<타임> 1980.12.22, p.19- 이고 '레논의 타자아' (Lennon's Alter Ego)-<뉴스 위크>1980.12.22, p.30~31 -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한결같이 그런 주장을 펼치게 한 결정적 단서는 채프먼이 80년 10월 23일. 경비원직을 그만두고서 일지에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아닌 '존 레논'이라고 서명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가 자기 자신을 확인 시켜주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레논과 완전히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레논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따라서 레논을 살해한 것은 곧 스스로를 죽인것이나, 다름없다는 논리다.

사실 그들이 통설이 되어 버린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 듯하다. 이 책을 포함 대부분의 레논 전기는 물론, 기사들을 보면 여러 모로 레논과 채프먼의 삶 사이에 유사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둘다 사춘기 시절에 음악에 빠졌고, 록 그룹을 결성했다. 또한 그들은 아이들을 사랑했고 다른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도왔으며 연상 (레논은 7살,채프먼은 4살)의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아울러 그 두 사람으 sdiranf에 탐닉하기도 했고 감정의 기폭이 굉장히 심했다. 반면 그들의 삶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생산적삶과 파괴적삶,성공한 사람과 실패자로.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레이콜먼과 요코마저도 -레논의 죽음과 관련된 통설을 내세우고 받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살해가 정치적 암살이라는 음모설은 존이 죽은 80년 12월 말부터 이미 나돌기 시작했다.
전적으로 무시되긴 했지만 주로 '암살정보위원회'라는 단체가 유포한 것으로 황당한 구석이 많음에도 다음과 같은 주요 메시지에는 일축해 버리기는 어려운 타당성이 있다.
"비록 레논이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고 기회주의적으로 경찰 방탄 조끼기금을 희사하긴 했지만 미국정부와 CIA는 신뢰할 만한 정치적 저항자들이 전적으로 없는 상황에서 그저 속마음으로 털어놓는 친사회주의자요 반종교적 온건파 인물조차도 봐줄 수는 없었다!"

그 외에도 미정부 고위관리들은 레논이 다시 녹음작업에 복귀하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가 예전처럼 자신의 강력한 영향력을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행사할 것이라고 우려했다는 다소 거창하지만 신빙성이 높은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있었다. 매카시와 워터게이트의 나라. 이란 콘트라 스캔들과 걸프전의 당사국인 ,더욱이 단적으로'와스프(WASP: White Anglo- Saxon Protestant 미국의 지배적인 특권계급인 앵글로 색슨계 백인 신교도)의 천국인 미국에서 위의 주장들이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일까?

이같은 다소 감정적이고 산발적인- 그렇지만 개연성있는 -주장에서 상당히 발전해 레논의 암살설을 ,미 발표된 풍부한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설득력잇게 제시하고 잇는 것이 영국의 저명한 범죄학자이며 변호사인 펜턴 브레슬러가 8년간 조사 끝에 쓴 '존 레논의살해'(The Murder of John Lennon, Sidgwick & Jackson Ltd ,Lodon ,1989)라는 책이다. 그는 여기서 사실상 레논의 살해는 CIA에 의해 수년간 구상되고 계획되었으며.. 마크 채프먼은 그를 통제하는 비밀스런 힘에 의해 총을 쏘게끔 세뇌 당했다는다는 과감한 주장을 하고 있다.


채프먼은 레논을 체제를 전복시키려 한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로 간주한 CIA / 미국 정부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그들은 그때 막 선출된 공화당 출신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반동적 정책에 반대하는 데모를 벌이는데 일백만 인파를 동원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존 레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브레슬러가 더욱 황당한 주장을 펴고 있다고 느낄지는 모르지만, 그는 수십 년간 법에 종사해 온 전문가답게 FBI, CIA의 레논 관련 문서, 채프먼의 정신 감정 자료들, 채프먼 선고문 등 레논레 대한 글을 쓴 그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접근법으로 치밀하게 레논의 암살설의 가능성을 제고하고 있다.
코넬리의 말대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란 인물자체가 존레논의 삶에 그 어떤 중요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존레논의 살해(암살)가 전 세계에 준 충격과 파급 효과를 고려해 볼 때, 이상하리 만치 살인범에 대해 폭넓고 깊이잇는 관심과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본필자 역시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브레슬리의 탐구가 다소 지나치게 문제 의식으로 가득차 있고 기존의 통설을 뒤집어엎는데 초점을 맞춘 것 같은 인상이 들지는 모르지만 채프먼이 명사수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대상을 저격 살해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아울러 브레슬 리가 집요한 추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하와이 호노룰루에서 뉴욕으로 가는 그의 항공권은 조작되었었다.
그리고 그는 뉴욕으로 가기전 시카고에서 아무도 모르고 설명할 수는 없는 3일을 보냈다. 게다가 진실을 밝혀 주리라 예상했던 재판은 채프먼 자신이 변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갑작스럽게 스스로 유죄를 인정해 버림으로써 벌어지지도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브레슬리가 다른 전기작가들과 여느 평범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밝혀내지 못한 문제점들이지만, 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어떻게, 왜 그런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그것을 추적하면서 미국 역사에 등장하는 암살들.CIA가 자행한 약물과 최면술을 이용한 마인드 콘트롤 실험. CIA-FBI-YMCA 등의 관련 CIA가 조직 운영해 온 암살 조직 , CIA FBI 의 존레논 감시 등을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술, 전문가다운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의 주장을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고 최종적인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 현명함을 보이고 있다. 즉 그는 흔히 빠지기 쉬운 센세이셔널리즘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서 센세이녀서널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어떤 정치적 필요에 의해 국민들에게 주어지는 천편일류적 사실이 결코 진실이 아닐수 있다는 깨달음과 의식을 다시 한 번 각성, 환기시키는 훌류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면은 결코 그가 3백 페이지에 달하는 저서로 제시한 내용을 요약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것은 별도의 작업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고정관념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아울러 새로운 정보와 시각을 제시하기 위해 조금 더 상세히 그 책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판단에 브레슬리의 저서가 코넬리의 책과 연관하여 독자에게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채프먼의 삶과 관련된 '세'가지 중요한 일반적 오해이다. 그 첫 번째가 거의 모두가 아무런 의문없이 인정하는 사실로서 채프먼이 열렬한 존 레논 숭배자라는 것. 그렇다면 헌신적인 팬이 왜 그의 우상을 죽여야만 했을까?? 브레슬러에 따르면 사실은 레논을 살해할 당시 마크 채프먼은 레논의 특별한 팬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이 처음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것은 법원이 임명한 채프먼의 변호사 허버트 아들러버그의 즉흥적인 진술 때문이었다.

80년 12월 9일 오후에 벌어진 법정 신문에서 그는 판사에게 채프먼이 동문서답을 한다고 얘기하면서 단지 "그(채프먼)는 비틀즈를 대단히 칭송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자기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덧 붙였다.
그는 법정 안에서는 특별히 레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법정 밖에서 기자단에 둘러싸인 그는 겁에 질려 무심코 채프먼이 10살때부터 레논에게 매우 경도되어 있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느낌은 아주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혼란스러운'은 어디로 날라가 버리고 채프먼은 갑잡스레 레논의 열광적인 팬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실 그 후 2개월이 지난 뒤 아들러버그가 밝혔듯이, 그가 채프먼을 만나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단지 25분 동안 급히 이야기를 나눈 다음 법정에 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들러버그는 채프먼에게 그가 레논의 팬인가 물어보았는지 아니면 그가 자진해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또는 '팬'이라는 말을 도데체 언급이나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검찰특 얘기 역시 채프먼이 14살때부터 24살 사이인 지난 10년간 존 레논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 물론 그가 학창시절 비틀즈나 존 레논에 빠졌다 해도 그것은 예외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는 수백만의 청소년들이 다 그랬으니까. 따라서 그는 결코 헌신적 레논 팬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살해 현장에서 체포될 당시 14시간에 해당하는 비틀즈 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된것인가?? 만약 카세트 녹음기와 테이프가 정말로 있었다면 그는 레논 팬은 아니었더라도 비틀즈의 열광적 팬이란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를 체포한 뉴욕 경찰 스티브 스피로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채프먼이 소지하고 있던 것은 책 '호밀밭의 파수꾼' 그의 뉴욕 호텔 객실 키. 하와이 은행 비자카드가 전부였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어떤 상상력이 풍부한 기자가 꾸며낸 이야기인 셈이다. 레논 살해 후 한 달이 엄게 하와이에서 마크의 행적을 조사한 호노눌루 경찰서 루이스 L. 수자 경감 또한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마크 채프먼과 관련된 두 번째 오해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과의 관계. 그는 알려진 바처럼 레논을 살해한 후 총은 내던지고 조용히 그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책표지 안에다 '홀든 콜필드로부터 홀든 콜필드에게.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라고 적어 놓기까지 했다. 그는 1988년 2월 미국과 영국에서 방영된 케빈 심이 만든 영국 TV 다큐 프로<존 레논을 살해한 사나이>에서 자신이 존 레논을 살해한 이유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그 책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그 사건이 벌어지기 바로전까지 채프먼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전세계의 수많은 기자들이 가능한 온갖 각도로 다양하게 그 사건을 다루기 위해 채프먼의 고향을 찾아 갔지만 마크의 학창시절 친구들이나 교사들 중 단 한 명도 그 책의 주인공과의 동일시는 커녕 책자체에 대해 언급한 예를 볼수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 역시 과장, 조작 되었거나 채프먼이 의도적으로 그책이 청소년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감안해 일부러 강조할 수도 있었다.

브레슬러는 이 저서를 다완성해 출판사로 보내고 89년 6월2일 마크 채프먼에게 편지를 보낸 5월 후 마크가 자신이 음모에 관련되어 있다는 저자의 주장을 부인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책의 맨 마지막에 각주로 밝히고 있다. 마크는 "레논씨의 살해 이유는 매우 복합적입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그것들을 감적으로 구분하려고 여전히 애쓰고 있습니다."라고 적어 보낸 것이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삶을 밝혀 주고 목적을 부여한 예수님께 자기를 바쳤다고 주장했다. 그가 그렇게도 중시하던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오해는 마크가 사귀기 힘들고 혼자 있기를 더 좋아한 '외톨박이' 였다는 주장이다. 그의 모친은 1987년 <피플>지의 짐 게인즈에게 단 한 번의 인터뷰에서 그에 대해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그는 친구도 많았고 밖에 나가서 좀 놀라고 말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종합해 봐도 그는 언제나 쉽게 여자얘들과 어울렸고 비중있는 연애사건도 2건있었다. 게다가 그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고 잘지냈으면 남자들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처럼 채프먼에 관련된 일반적 믿음이 객관적으로 확증된 사실이 아님에도 그가 대부분의 암살범들과 마찬가지로 또 한명의 정신이상자에 불과 한가. 더욱이 재판부마저도 그가 정상적이라고 판단해 20년부터 종신형까지 징역을 살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린 마당에. 채프먼이 재판을 받기도 전에 자신이 유죄임을 시인한 것이 진정 그가 미쳤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정작 본인도 재판당국도 그가 정신이상 이 나니라고 하는 상황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 사실에 집착하는 것일까?? 사실 그가 미쳤다는 것이 요코는 물론, 진실보다는 현실이 더 중요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속편한 생각일 터이다.

유럽 정치가도 한나라의 왕도 대통령도 아니며, 그렇다고 교황도, 종교지도자도, 노벨수상자도 아닌 일개 팝스타가 죽은거 가지고 왜 크토록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여 음모,암살 운운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많았고 지금도 역시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그의 죽음에 직면해 보인 슬픔과 분노의 의미는.
JFK의 죽음 이후 한 사람의 죽음이 그토록 엄청난 여파를 미친적이 없다는 그 많은 증언들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비록 존 레논이 정치적 음모에 의해 암살당햇다는 것을 백일하에 밝힐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간 통념으로 굳어진 나이브한 주장들은 수정,폐기 처분돼야 하지 않을까?

채프먼이 레논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레논이 사기꾼이며 평화와 저항을 설파하면서도 다른 초특급 부자 자본주의자들처럼 엄청난 부의 결실을 만끽하고 있던 억만장자 록 스타라고 굳게 믿어 그를 제거하려 했다는 ,또는 인생의 낙오자로서 레논과 같은 세계적 인물을 죽여서 유명해지기를 꿈꾼 '고독한 광인'이었다는 주장은 말이다.
국내의 보통 독자들은 물론 열렬한 비틀즈 / 레논 팬들이라 할지라도 존 레논이 그긔 세대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록스타였고 좌파적 색채를 띠고 호전적인 활동을 펼쳤다는 것은 거의 모르리라.. 그렇지만 그 진실성은 차지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곧 들어설 반동적 레이건 정권에 반대하는 집단적 저항의 집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의 독보적인 강력한 영향력을 느꼈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따라서 그 도구로써 채프먼이 조종받고 이용됐다는 브레슬러의 주장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다.


어쨌든 레이건의 권력 획득과 레논이 예전의 거대한 존레논으로의 복귀가 일치했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위력을 입증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의 정치,사회 활동을 벌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컴투게더'(Random House, New York, 1984)의 저자 존위너가 밝히고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잇지만, 그가 저격당한 바로 그 주에 그는 처와 숀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 웨스트 코스트에서 스트라이크를 벌이는 일본계 미국인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집회에서 행진할 예정이었다." 그는 이미 비행기 티켓도 구입해 놓은 상태였다. 그는 다시 거리로 나설 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브레슬러는 이런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즉 레논은 또 다시 '정치적 동물'이 되고 있는 것이니 만큼 생존해서는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의 이유가 명백해지기전, 세상 사람들이 예전의 레논 <평화에게 기회를>을 부른 바로 그주인공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 그는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브레슬러는 자신의 주장을 단언하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진실'에 근접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라고 못받고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간 강요받아 온 사실과 진실은 결코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진실을 쫓는 작업은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 그것이 바로 브레슬러 저서의 진정한 가치이며, 필자가 이런 글을 덧붙이는 목적이다. (Rest In Peace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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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著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중 존레논 편

이제는 한편의 시 across the uni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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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著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중 존레논 편


1964년 2월 이들이 처음 미국에 상륙했을 때 미국 전역이 떠들썩했다. 케네디 공항에는 1만 명 이상의 틴에이저들이 운집했고, 그들이 출연한 '에드 설리반 쇼'의 시청률은 70%를 상회했다. 그 시간대의 뉴욕시의 소년 범죄는 드물게도 제로를 기록했다 ...

짤막한 비틀스 스토리다. 비틀스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것을 창조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등 '전설의 4인'(Fab Four)은 1960년대 내내 대중음악과 청년 문화를 주도하면서 시대를 대변했다. 1960년대는 그들의 것이었다.

1970년 그룹은 해산되었고 비틀스라는 이름은 무대에서 사라져 갔지만 멤버 모두가 빛나는 솔로 활동을 펼쳐 재결합설은 끊임없이 그들을 에워쌌다. 그러나 그룹 성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레논이 1980년 괴한의 흉탄에 피살되면서 사실상 비틀스 스토리는 끝이 났다.

존 레논은 비틀스의 리더였다. 그의 이름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룹을 이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중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그가 사망했을 때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는 동시에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뤄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던가(권위를 자랑하는 이 양대 주간지가 문화 예술인을 발행일이 같은 날에 표지인물로 취급하기는 존 레논이 최초였으며, 지금까지 그밖에 없다).

그는 우리에게도 유명하다. 비틀스의 리더라는 사실은 차라리 상식이고,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폴 매카트니와의 다툼으로도 유명하다. 아내가 일본 여인 요코라는 점도 유명하다. 특히 우리 팝 팬들에게 '이매진', '러브', '오 마이 러브' 등 아름다운 팝송을 남긴 '부드러운 가수'로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1970년 비틀스 해체 전후로 정치, 사회적 제반 문제를 강도 높은 톤으로 노래하고 한때 일선 투쟁에까지 가담한 '투사'였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존 레논이라는 어찌보면 한 사람의 대중 스타의 존재에 시사성의 가치를 부여하고 무게를 실어준 이 중요한 사실이 우리 대부분의 팝 팬들 기억에는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틀스 시절이 1960년대 후반 존 레논에게 대중음악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인기 창출의 수단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꿰뚫고 그 인식을 전달하는 미디어로 파악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3인칭 대중 소설 쓰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고 사회적 사고를 전달하는 1인칭 다큐멘터리를 쓰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한다. 1968년 그는 '혁명(Revolution)'이란 제목의 노래를 싱글로 발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곡은 레논의 사실주의적, 정치적인 노래쓰기의 신호탄을 올렸다.

'혁명을 원한다고들 하지. 그래, 우리 모두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지... 그러나 당신들이 파괴에 관하여 얘기할 때 나를 제외시키게 된다(count me out)는 것을 모르는가요... 헌법을 개정할 거라고들 하죠. 예, 우리는 머리를 변화시키길 바라죠.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들 하죠. 대신 정신 상태를 해방시켜야 할 거예요. 모택동의 사진을 들고 나선다면 여하튼 누구와도 성과를 얻지 못할 겁니다.'

미국과 영국 전역에 민주화 투재, 반정 운동으로 시위와 집회가 들끓기 시작하던 그 당시 존은 과격한 행동주의 노선에 앞서 '정신 개조'와 '의식혁명'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작금의 풍조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의식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얘기다. 그 무렵 존은 자신이 양친 없이 이모 밑에서 자란 불우한 유년기를 비롯, 자신이 겪게 된 불행의 근본적 원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있다고 자각한 상태였다.


이러한 존재 규명을 토대로 그는 비틀스 해산 후 자신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1971년도 음반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의 수록곡 '어머니(Mother)'에서 존은 '어머니 가지 말아요, 아버지 돌아오세요'라고 광기서린 듯 절규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토해 내고는 곧바로 '노동 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이란 곡에서는 전투 의지를 다지는 현재의 변모된 자신을 펼쳐 보인다.

'그들은 가정에서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학교에서는 당신을 매질하지. 당신이 똑똑하면 증오하고 바보일 땐 무시하지. 그래서 당신은 돌아 버려 그들의 좆같은(fucking) 규율을 따르지 않게 되지.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한 거야... 그들은 당신을 종교와 섹스와 TV로 중독시키지. 그런데 당신은 자신이 현명하고 계급이 없으며 자유롭다고 여기는 거야.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여전히 좆같은(fucking) 농부나 다름없다구.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하지... 영웅이 되려거든 자 나를 따르라구!'

존은 무차별로 법, 종교, 도덕 등 자본주의의 이념적 베일을 들추어 그 실체를 통렬히 고발하면서 개량과 개혁을 넘어서는 혁명을 부르짖는다. 의식 혁명의 단계를 뛰어넘어 이제는 실천과 투쟁의 시점으로 진입해야함을 느낀다. 노래로써 그가 내세운 테마는 '사랑과 평화'(Love and Peace)로 포장되었다.


<플라스틱 오노 밴드>와 곧이어 공개된 <이매진(Imagine)> 음반의 수록곡을 비롯해 해산 직후에 싱글로 발표한 노래를 살펴보자.

'인스탄트 카르마가 네게 올 거야. 네 머리를 두드릴 거야. 자신과 만나야 할거야. 곧 당신은 죽게 될 터인데 도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사랑 앞에서 비웃으면서 말야.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당신에게 달려 있어... 인스탄트 카르마가 네게 찾아올 거야. 당신의 발을 움직이게 할 거야. 네 주위의 형제들을 인식하라구. 네가 만나고 있는 모든 사람을 말야... 우린 빛날 수 있어. 달과 별과 해처럼. 어서와, 만나자구.' '인스탄트 카르마(Instant Karma)'

카르마는 인연 또는 만남을 가리키는 말로, 존은 이 곡을 통해 미디어를 포함한 현대적이고도 '즉각적인 만남'을 역설하고 있다. 발표 당시 영미(英美)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상품 광고배경으로 이용돼 다시금 주목받았다.


'민중에게 권력을! 즉각 민중에게 권력을! 우린 혁명을 바라지. 똑바로 두발을 세워 거리로 나서야 해... 당신이 부리는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를 못받고 노동하고 있어. 그러니 그들이 사실상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이 소유하도록 해줘요. 우리가 전면에 나서 당신들을 끌어내릴 것이야.' '민중에게 권력을(Power to the People)'

'난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아. 난 죽고 싶지 않아. 난 법관이 되고 싶지 않아. 난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난 성직자가 되고 싶지 않아. 난 울고 싶지 않아.' '난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아(I Don`t Want to bed a Soldier)'

직설적이고 과격한 메시지 일색이다. 마지막 곡에서 그 일단이 엿보이고 있지만, 특히 종교는 그의 독설을 피하지 못한다.


'신은 우리가 고통을 재는 척도로서의 관념일 뿐이야. 다시 한번 말하자면 신은 관념이야, 그것으로 우린 고통을 측정하는 거지... 난 마법을 믿지 않아. 성경을 믿지 않아. 히틀러를 믿지 않아. 예수를 믿지 않아. 케네디를 믿지 않아. 석가를 믿지 않아. 엘비스 프레슬리를 믿지 않아. 밥 딜런을 믿지 않아. 비틀스를 믿지 않아. 난 나만을 믿어. 요코와 나를. 그것이 현실이야. 꿈은 끝났어. 어제까지 난 꿈을 쫓고 있었지만 이제 난 다시 태어났어.'

'신(God)'이라는 노래다. 여기서 신은 종교적인 신 외에 현실적 우상으로서의 신을 포함하고 있는데 존은 모두를 깡그리 거부하고 있다. 무신론자의 극단을 노출하는 곡으로 비틀스 때인 1966년 “비틀스는 예수보다 유명하다”(Beatles is More Popular than Jesus)라는 발언으로 일대 파문을 일으킨 전력을 면면히 이어나간 것이다.


그의 역사관, 사회관은 1971년의 명곡 '이매진(Imagine)'으로 완결된다. 존은 이곳에서 '천국이 없다고,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보라'고 하고는 말미에 가서 '사유재산이 없다고 상상해보라'고 유도하고 있다.

'물론 상상하기 어려울 거야. 그리되면 탐욕에 대한 필요도, 기아도 없지. 형제애만이 있을 거야. 모든 사람이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게나.'

루소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기초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의 원리로 파악된 사유재산제에 회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노래는 1980년대 초반 영화 <킬링 필드>의 마지막 부분에 삽입되어 많은 관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겼다. 영화 사운드 트랙의 백미라고 칭송을 하기도 했지만, 당시 존의 생활권인 영미사회, 즉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부정이 테마인 만큼 공산주의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영화에 이 곡이 삽입된 것이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없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어느덧 가수의 위치에서 크게 일탈, 노래 운동가이자 행위주체로 변해 있었다. 평화를 주제로 한 정치색 짙은 일련의 이벤트에 적극 나섰으며 1960년대 말 대학가의 시위를 주도한 제리 루빈이나 애비 호프먼 등 신좌익 활동가와 친교를 긴밀히 한다. 활동 거점은 미국의 뉴욕.

'정치 가수'로서의 존 레논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당시 미국사회의 배경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1960년대 말 불길처럼 퍼져나간 공민권 투쟁, 반전 운동은 1968년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사건과 월남전의 격화를 계기로 과격한 양상으로 번져갔다. 대학가의 징병 거부 시위는 무장 투쟁의 단계로까지 진입했고 평화를 주창한 비폭력 노선의 히피들 간에도 과격집단 이른바 '이피'(Yippie)가 등장했다. 이피들은 흑인 무장 투쟁 그룹인 '블랙 팬더'와 제휴, 폭력 혁명의 기치를 드높였는데, 이 이피들의 리더적 존재가 제리 루빈과 애비 호프만이었다.

비틀스 말기부터 이피의 입장에 공감을 가졌던 존은 이들에 동조하고 실천적으로 연대해 정치색을 노골화한다. 1969년 5월 캐나다 몬트리얼에서의 '베드인' 행사, 같은 해 9월 캐나다 터론터에서의 '라이브 피스' 공연을 가진 데 이어 1970년에는 미국으로 파고들어가 11월 뉴욕 아폴로극장에서의 '애티카 자선 콘서트', 12월 미시건주 앤아버의 미시건대학에서의 '존 싱클레어 자선 콘서트'(제리 루빈도 참석) 등에 잇따라 출연하여 평화를 외치고 사회의 억압 및 모순을 규탄한다.

애비 호프만과 제리 루빈과 같은 신좌익(New Left)과 손잡고 일선 투쟁에까지 나섰으니 일련의 사회운동을 체제에 대한 도발로 간주했던 미국정부가 어찌 가만히 있었겠는가. 존의 행동은 백악관의 닉슨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되었고 닉슨 정권은 '위험 인물'인 존의 미국 추방을 궁리하게 됐던 것이다.
1972년 6월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존은 강도높게 미공화당 정부의 사기성을 공격했으며, 이로 인해 더욱 닉슨의 미움을 샀다. 당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와 치열한 선거전을 벌이고 있었던 닉슨 정권은 존 레논이 급기야 그 무렵 개최된 공화당 전당대회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미국땅에서 내쫓아야 했다.

닉슨 정부가 두려워했던 인물은 무장투사보다는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 특히 효과적인 존 레논 부류의 '문화적 게릴라'인 까닭이었다. 이때부터 FBI가 존과 요코의 생활을 은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존은 정부 차원의 '외압'이 자신에게 가해져요고 있음을 감지했지만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당시 외쳤다.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여기 있든 또한 어디에 있게되든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거리낌없이 말할 참이다.”

1972년 2월로 기한이 끝나게 된 그의 미국 체류 비자 연장 신청은 기각되고 말았다. 표면상의 기각 사유는 1968년 그의 체포까지 몰고왔던 영국에서의 마리화나 소지죄였다(궁색하지 그지없다). 이후 미국 영주권을 획득하려는, 존의 미국 정부 당국을 대상으로 한 길고도 치열한 법정 투쟁이 전개되었다.
비자 연장 신청 기각으로 가시화된 닉슨 정부의 국외추방기도에 분기탱천한 그는 1972년 6월 가장 과격한 메시지를 담은 2장짜리 음반 <뉴욕에서의 한때(Sometime in New York)>를 출반하여 미정부에 응답한다. 그때까지 나온 대중 가요 음반을 통틀어도 가장 급진적이라 할 만한 이 작품에서 존은 1971년 뉴욕시 애티카 형무소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주방위군이 발포해 43명의 사망자를 낸 반민주적 사태를 성토하고 있고, 영국정부에도 핏발을 세워 당시 격화일로를 걷고 있던 북아일랜드 식민 정책에 대해서도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그는 영국 정부에 대해서도 강경한 자세를 보여 1969년 11월 영국군이 월남과 나이지리아 전쟁에 참전한 데 항의, 비틀스 시절 받았던 국가공로훈장 MBE를 반환해버렸다).

'죄수를 쏘다니. 43명의 가련한 여인들을. 언론은 죄수에게 책임을 돌리지만 죄수들은 서로 죽이지 않았어. 록펠러가 방아쇠를 당겼지! 그게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거야. 모든 죄수를 석방하라!' '애티카(Attica State)'

'앵글로 잭슨 돼지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이 북부(아일랜드) 식민지화를 위해 보내졌지. 피에 젓은 유니온잭을 흔들면서.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어찌 너희들이 자랑스럽고 자유로운 사람들을 감히 억류한단 말인가. 아일랜드는 아일랜드에게 맡기고 영국군은 바다로 되돌아가라!' '일요일, 피에 젖는 일요일(Sunday, Bloody Sunday)'

이 음반에 수록되어 있고 역시 북아일랜드 식민화 정책을 비판한 노래 '아일랜드인의 운명(The Luck of the Irish)'과 함께 '일요일, 피에 젖은 일요일'은 매상의 이익금이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무장게릴라 단체인 북아일랜드공화군(IRA)에 기부되었다. 이 곡은 또 아일랜드 출신으로 1980년대 팝계를 강타한 그룹 유투(U2)에게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유투는 곡은 존의 것과 다르지만 '일요일, 피에 젖은 일요일'이라는 똑같은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이 앨범에는 또 '안젤라(Angela)'라는 노래가 들어 있는데, 흑인 여성운동가인 안젤라에 대한 당국의 부당한 탄압을 고발하고 있다.

'안젤라, 그들이 당신을 감옥에 집어넣었죠. 당신의 배우자를 총살했구요. 정말, 당신은 세계의 무수한 정치적 죄수 중 한 사람이죠... 안젤라. 세계가 바뀌는 소리가 들리는가요? 세상은 당신을 주시하고 있어요. 당신은 곧 세계의 누이 형제들에게 돌아가게 될 거예요. 당신은 아직도 민중의 교사지요.'

그런데 과연 안젤라를 탄압한 인물은 누구였을까.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고 나중 8년간 미국 대통령에 재임한 로널드 레이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레이건은 1970년 말 카터를 꺾고 대권을 쥐었고, 레논은 그때 피살되었으니 운명의 엇갈림치고는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한때>음반의 꽃은 '여성은 세계의 노예(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라는 곡이었다.

'우리 여성더러 가정만이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말하지. 그리곤 그녀가 친구가 되기엔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하는 거야. 그녀가 하인이 아니면 우릴 사랑하게 아니라고 하거든. 여성은 노예 중의 노예야.'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해주는 또 하나의 기둥인 가부장제와 여성 차별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노래는 대중 가요 최초로 우먼리브(Woman lib), 즉 여성해방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곡이라는 게 정설이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는 우먼리브 물결이 솟구쳐 1969년 뉴욕에서 제1회 페미니스트회의가 개최되어 남녀의 완전 평등이 주창되었고 1972년에는 미국 최초의 여성월간지 <미즈>가 창간되었다.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에 대한 공식적 항의가 제기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여성은 세계의 노예'는 우먼리브운동에 열정적이었던 아내 요코의 사고방식이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우먼리브를 매우 적절하게 소화해냈다고 평가받았다.

존은 노래만 부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념을 적극 실행에 옮겨 요코와 숫제 남녀 역할을 교체해버린다. 요코와 잠시 헤어졌다가 필생의 반려자임을 재확인하고 1975년 재결합한 이후 내내 집안에 들어앉아 아들 숀의 육아에 전념하는 등 안살림에 치중, 실제로 자신을 그렇게 불렀듯 '하우스 허스번드'(House Husband : 主婦 아닌 主夫가 되는 셈이다)로 변신하여 모든 바깥일은 요코에게 일임한다. 요코가 존의 사후에 사업가의 면모를 견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남편 덕분(?)이다.

'여성은 세계의 노예'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지적해야 할 부분은 이 곡이 발표됐을 때 니거(Nigger)가 차별 용어에 해당된다고 해서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차별을 고발한 노래인데 용어가 차별적이라고 금지되다니 우습기만 하다.

존의 노래는 그 이념성, 급진성, 그리고 묘사의 대담성으로 인해 방송 금지라는 억압이 유달리 자주 가해졌다. 심지어 '어머니' 같은 곡은 너무 광기를 띠고 있다는 이유로 발표 당시 일부 방송국에서 금지 지정을 받기도 했다(이유치고는 너무 인색하다).


그러나 1974년 이후 존의 이미지는 크게 바뀌고 만다. 이 무렵 내놓은 음반 <마인드 게임즈(Mind Games)>나 <벽과 다리(Walls and Bridges)>에서 나타나듯 투사적 대열에서 극단적 퇴각을 시사, 민주화 투쟁에 지친 모습을 군데군데 노출시키고 음악적 주장은 자취를 감춘 채 공허한 사랑타령을 해대기도 한다. 물론 이 두 앨범은 요코와 별거중일 때 출반되어 절망과 공허감이 상당 부분 작용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의 급진성에 매료된 팬들에게는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아주 오래 전 그것은 꿈속에서였을까? 단지 꿈이었을까? 알아, 난 알아. 그것은 너무 현실 같았어. 거리를 산책했고 열기 속으로 속삭이는 나무들. 난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 두 개의 정신이 이상하게 춤을 추고 있었지...' '9번째 꿈(#9 Dream)'

빅히트한 노래였지만 그의 작품으로서는 너무 무게가 제거되어버렸다. 불과 2년 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같은 외형상의 사상 전향(?) 때문인지 미국 정부는 마침내 1975년 10월 존에게 미국영주권을 발급해주었다. 더구나 그는 이후 음악 생활을 단절한 채 작품 출반은 물론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꺼렸다. 한편 1987년 전기작가 앨버트 골드만은 존의 전기문인 『존 레논의 삶』을 내놓고 그 무렵 그가 깊이 마약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 일대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뉴스위크>지는 이와 관련한 갑론을박을 커버스토리로 취급했다).

5년간 동면하고 난 후인 1980년 그는 앨범 <이중환상(Double Fantasy)>을 들고 화려히 컴백하여 새출발의 의지를 팬들에게 알렸다. 그렇지만 그 새출발의 정체란 일반인이 상상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매일 우린 사랑을 나누곤 했지. 왜 우리 둘은 멋지고 편하게 사랑을 나누지 못할까. 이제 우리들의 날개를 펴고 휠훨 날아가야 할 때야. 또 하루가 우리 사랑을 비껴가지 않도록. 마치 새출발하는 것처럼 말이야.' '새출발 하듯(Just Like Starting Over)'

그의 새 모습은 '바퀴를 바라보며(Watching the Wheels)'라는 곡에는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난 그저 여기 앉아 바퀴가 굴러가는 것만을 응시할 테야. 난 정말 그것이 굴러가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워. 더 이상 회전목마는 타지 않을 테야. 굴러가도록 내버려둘 거야.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내게 질문하지. 난 문제는 전연 없고 해결만이 있다고 말하지. 그러면 그들은 마치 내가 이성을 잃었다는 듯 고개를 젓지. 난 서두를 것 없다고 말하지. 난 단지 여기 앉아 시간을 즐길 뿐이야.'

참으로 많이 변질된 상태다. 과연 존은 훼절한 것인가. 엄청난 부와 안락에 취해 투쟁 의지를 저버린 것인가. 이런저런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앨범 발표 몇 개월만인 1980년 12월 8일 그는 팬이라고 자처하고 순순히 다가온 마이크 채프먼이라는 정체불명의 청년이 쏜 총에 맞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얼마 전 미국 CIA의 조종으로 마이크 채프먼이 존을 살해했다는 미확인 외신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존의 사망과 함께 미국은 레이건의 보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존의 후반기 삶을 집중 조명한 사람들은 “그도 별 수 없는 인물이었다”라고 결론 내리기도 한다.
1970년대 초반의 거침없는 돌진과 견주었을 때 이같은 단정이 무리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성급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방법론에 변화가 있었을 뿐 최후의 앨범에까지(아무리 냉정하게 따져도) 그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과 평화'는 결코 그의 두뇌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다만 가정이 큰 관심사로 부각되었을 따름이었다. 그의 유작 <이중 환상>에는 과잉이라고 여겨지리만치 요코에 대한 헌신과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전편을 흐르고 있다. 그에게서 가정이란 의미는 개인에게 가치뿐만 아니라 '변화의 밑거름'인 교육을 제공하는 '사회의 살아있는 세포'로 간주되었다. 그간의 현실 투쟁에서 이제 가족을 단위로 한 길고 긴 '역사투쟁'에 돌입한 것이었다.

존 레논의 전설은 신비와 혼돈의 안개에 뒤덮여 있다. 그가 보여준 인생의 드라마틱한 굴곡이 그에 대한 확실한 규정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방체제의 제반 가치를 통렬히 고발한 투사로서의 존의 모습은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록 그의 육신은 사라진 지 10년이 훨씬 흘렀지만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서방의 순종파 가수들'과 달리 현실 개혁과 직접 투쟁으로 일생을 숨가쁘게 달려간 그는 여전히 많은 가수들에게 '노래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서 있다. 섹스 피스톨즈의 쟈니 로튼, 퀸의 브라이언 메이, ELO의 제프 린, 유투 그리고 조지 마이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스타들이 그의 영향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다.

레논이 사망했을 때 영원한 라이벌이자 친구인 폴 매카트니는 이러한 추모사를 남겼다.

존 레논은 예술, 음악 그리고 세계평화에 누구와 견줄 수 없는 지대한 공헌으로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직 살아 숨쉬고 있다.


1993/04 임진모 (jjinmoo@izm.co.kr)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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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람들 - 레닌에서 비틀즈까지

http://www.youtube.com/watch?v=Gf-Q2rDd6Tw&search=beatles

[MV] Beatles Hey Jude /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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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atles -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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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atles - revolution
Added on December 29, 2005, 07:48 PM by bigriverharp

 

한 10년전에 한겨래 신문에서 "20세기 사람들 - 레닌에서 비틀즈까지" 라는 코너를 매주 운영했습니다. 나중에는 2권짜리로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는데 정치 사회 문화 외에도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 현대 사상까지 인물 위주로 포괄하는 아주 좋은 책이었습니다(저는 지금도 이책을 가지고 있는데 이사가다가? 분실하여 다시 구입한 세트입니다. 언론 고시? 준비하던 동생도 같이 끼고 열심히 봤었습니다... 상식 제고 차원에서).
말미의 내용처럼 레논은 롤랑 바르트나 쟝폴 사르트르와 동급이지요. 한시대가 끝났습니다....

아마도 직접 typing하신 정원창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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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람들 - 레닌에서 비틀즈까지

100 - 비틀즈 (1962-1971)



전 세계 젊음 열광시킨 자유와 평화의 화음

뛰어난 음악성에 시대정서,이상담은 대중음악의 전설



파리/고종석 주재기자


한국의 1950년대를 회고하는 자리에서 시인 고은은 "아, 50년대!"라는 영탄을 피할수 없었다. 어떤 세대, 어떤 공간의 사람에게는 1960년대가 그런 영탄의 대상 일 것이다. 만약 한 연대의 이미지란 것이 있다면 1960년대의 이미지를 짜내고 있는 것은 어떤 사건들과 사람들일까.

많은 현대사가와 저널리스트들은 그 리스트를 케네디가의 영욕, 베트남전쟁, 아이히만 재판, 알제리 독립, 유리 가가린과 잇따른 우주 정복의 무용담, 중국의 문화대혁명, 그리스의 군사쿠데타, 체 게바라의 비장한 최후, 68년 5월혁명과 그 이듬해 드골의 퇴진, 프라하의 봄 같은 항목들로 채울 것이다. 그런 현대사가들이나 저널리스트의 일부를 포함해서 더 많은 수의 대중은, 특히 그들이 60년대에 10대였거나 20대였다면, 그 리스트에 비틀스라는 항목을 기꺼이 끼워 넣을 것이다. 이런 판단은 비틀스의 리더격이었던 존 레논이 지금부터 15년전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을 때, 당시의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발표한 애도 성명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그의 정신, 비틀스의 정신은 경박하면서도 진지하고, 냉소적이면서도 이상주의적인 그 세대의 정신이 되었습니다."



"경박하면서 진지" 60년대 상징



사실, 비틀스의 60년대 대표성에 대해서는, 그 영역을 대중음악에 한정하다 하더라도 약간의 이의가 제기될수 있다. 그들은 단지 짧은 한 순간 동안만 엘비스 프레슬리 한 사람의 인기를 누르고 팝음악세계의 정상에 머물수 있었다. 정치가요의 전통을 중시하는 이에게 60년대는 비틀스의 시대라기보다는 차라리 보브 딜런이나 조운 바에즈나 컨트리 조 앤 더 피시나 짐 모리슨이나 롤링 스톤즈의 연대다.



그러나 더 대중적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나 더 정치적이었던 보브 딜런들보다도 60년대의 이미지는 비틀스라는 이름에 더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다. 그것은 우선 록 그룹으로서의 비틀스의 시작과 끝이 60년대와 일치한다는 사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틀스의 앨범들은 그러나 30년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팔려나간다. 게다가 그들 주위에는 그들의 경쟁자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신화가 따라다닐다. 그런 신화들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해낸 일은 코드 사용의 극적인 다양성과 리듬의 혁명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 비틀스식의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통한 한 시대유행의 창조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 모두는 영국 지방도시 리버풀의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서 백만장자가 되는 계급상승의 신화를 이룩했다. 그들 모두는 한사람 한사람이 뛰어난 뮤지션이었고 그 네 싱어송라이터의 만남을 통해 그들 재능의 효과는 한껏 증폭되었다. 그들은 록 음악을 대중에게 더욱 더 친숙하게 만들면서도 비록 좌충우돌하기는 했지만 음악의 정치성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그들 모두는 적어도 반전주의자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존 레논에게는 음악의 정치적 선동력을 먹어치우는 자본주의 유통회로에 대한 자의식이 있었다. 요컨대 그들은 백만장자 명망가가 된 뒤에도 자기들을 그렇게 만든 좌우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



그 존 레논은 1940년 10월 9일 영국 서쪽의 항구도시 리버풀에서 아일랜드계의 가난한 노동자 앨프리드 레논과 극장 안내원 출신의 부인 줄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 탓에 이모 밑에서 자라난 존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56년에 이미 쿼리맨이라는 그룹을 조직했고 한해 뒤엔 자기보다 두살 어린 왼손잡이 기타리스트 제임스 폴 매카트니를 만났다.



"전쟁대신 사랑을" 베트남전 반대



그 이듬해에 땅딸한 몸통에 기다란 팔다리를 지닌 조지 해리슨이 쿼리맨에 가입했다. 60년에 실버 비틀스로 이름을 바꾼 이 그룹은 도버해협을 건너 당시 유럽 대중음악의 중심지였던 독일 함부르크를 오가며 하찮은 명성을 쌓았다. 앞의 "실버"를 떼고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레논 그룹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노스잉글랜드 뮤직스토어의 사장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이었다. 엡스타인은 레논과 그의 동료들에게 60년대 대중음악계를 불태워버릴 수 있는 연료가 내장돼있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그 자신이 기꺼이 그 점화자가 되기로 했다.



매니저 엡스타인의 제안으로 레논과 동갑내기인 리처드 스타키(에명 링고스타)를 새 드럼 주자로 받아들인 비틀스 4인조는 역시 엡스타인의 주선으로 62년 EMI사와 계약을 맺고 데뷔싱글 <날 정말 사랑해 줘>를 발표했다.


그들의 뒤이은 싱글 <제발 날 기쁘게 해줘>와 <당신의 손을 잡고 싶어>가 잇따라 히트차트 1위를 기록했을 때, 그리고 64년 2월 비틀스의 미국 공연 뒤 그들의 노래가 빌보드 차트 1위에서 5위까지를 휩쓸었을떠, 이제 비틀스라는 이름은 대중음악사에서 누구도 지울 수 없는 고딕체의 활자가 되어 버렸다. 이어서 비틀스 멤버의 삶을 그리며 영국 노동계급 청년들의 한 단면을 보여준 영화 <어느 힘겨운 날 밤>이 출시됐을때, 더 나아가서 마침내 66년에 비틀스가 집단 기자회견을 통해 베트남전쟁 반대를 선언하고 <필요한 것은 사랑이 전부>라는 노래를 통해 무조건의 사랑과 평화를 역설 했을 때, 비틀스라는 이름은 성공한 노동계급과 대항문화와 프리섹스와 마약과 진보운동의 모순된 그러나 가장 강력한 60년대적 상징이 되었다.



67년 여름 엡스타인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고, 존이 일본계 미국인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와 가까워지면서 보이기 시작한 비틀스의 분열 조짐은 존에 대한 폴의 라이벌 의식으로 가열돼 71년 그룹의 공식해체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룹 해체 뒤에도 윙즈라는 새 그룹을 이끈 폴 매카트니를 비롯해서 비틀스 멤버들은 잇따른 히트 앨범을 발표하며 제 나름의 음악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리더격 존 레논, 열성팬에 피살



그룹 해체 뒤 존 레논의 삶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이 필요하다. 비틀스 시절부터 정치적 급진주의와 인도의 초월명상, 정신 요법등을 오가며 멤버들 가운데 가장 "히피적인" 면모를 보였던 존은 그뒤 타리크 알리, 로빈 블랙번 제리 루빈 등 대서양을 사이에 둔 두 앵글로 색슨 국가의 신좌파 청년들과 어울리며 급진적 정치운동가로 변모했다. 부인 오노 요코와 함께 뉴욕에 정착해서 반전, 인권운동, 북아일랜드 독립지원운동에 매진하며 우리나라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운동가요 <민중에게 권력을><이매진>등의 노래를 만든 이 시기의 레논은 닉슨 행정부의 블랙 리스트에 올랐고, 공화당 정부는 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사임하기까지 계속적인 추방명령과 FBI를 동원한 미행과 감시를 통해 그의 사생활을 옥죄었다. 레논은 1980년 12월 8일 그의 열렬한 팬임을 주장하는 마크 채프먼에 의해 자기 집 앞에서 살해됐다. 바로 그 해에 사르트르, 티토, 에리히 프롬, 롤랑 바르트, 앨프리드 히치콕, 헨리 밀러, 팔레비, 장 피아제, 스티브 매퀸 ,로맹 가리 같은 이름들이 세상을 버렸다. 한 시대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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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게시판, 네티즌 열기 뜨겁다

ㅠ.ㅠ 공부해야 하는데 지금 막 5공화국 인터넷으로 재미있게 봤다. 옥의티? 극 흐름상 큰 문제 안됐다. 몰입하면 그냥 막 넘어가는거다(발끄네가 그렇게 이쁘게 나오다니! 옥의티다. 지역 촌로들이 선거때 박끄네 손잡으며 먼저 가신 어머니랑 똑같이 생겼다고 하던데 바끄네는 아버지를 닮았다. 대게 딸은 아버지를 닮으면 잘생겼다는데 요 케이스는...).

 

마쵸 박정희 이하 역사의 반역자들이 인간적으로 멋지게 묘사되었다. 그럴 수 있다. 룸쌀롱 마담들이 모시고 술 한잔 따라드리고 싶었다고 한다고 그리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김재규는 여러모로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김재규는 민주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71년 보안사령관 시절 선거 승리를 위해 모진 고문으로 서승-서준식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다. 서준식씨는 현재 인권운동사랑방 http://www.sarangbang.or.kr/ 에서 활동 중이다.

 

그래도 김재규도 나중에 건설부장관도 하고 했으니 그렇게 개념없는 인간은 아닐텐데 싶은데...

...

 

정말 김재규가 미국과 무슨 교감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믿는 구석없이 아무 대책없이 그렇게 일처리하지는 않았을텐데... 확인된건 없고...

 

좌우간 김재규랑 민주주의는 관계없다.

 

 

 

 

'제5공화국' 게시판, 네티즌 열기 뜨겁다







[앵커멘트]

네티즌들의 논쟁이 제5공화국의 시청자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일부 네티즌들은 김재규와 박정희를 두고 진정한 영웅을 가리고 있고, 실존 인물에 대한 다양한 평가의 의견들도 올라오고 있습니다. 드라마 속 옥의 티를 지적한 시청자들도 많다고 합니다.

[리포트]

'제5공화국'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실존인물과 역사를 다루고 있는 만큼 드라마 내용에 대한 진실공방과 역사적 인물에 관한 재평가가 시청자 게시판의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현재 시청자들 사이에 제일 큰 논란거리로 떠오른 것은 김재규에 관한 것입니다. 일부 시청자들은 김재규를 민주인사로서 높게 평가하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한 네티즌은 그 당시 김재규는 차지철에게 무시당하고 박정희의 총애가 차지철에게 기울자 우발적으로 박정희를 살해한 것이 아니냐며 어차피 죽을거 후세에 모반자로 찍히기 보단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다는 말로 미화한게 아닌가라는 의문을 남겼습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네티즌은 김재규의 최후진술 원문을 올리며 누가 자기 목숨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자기 가족의 영원한 굴레를 걸고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느냐며 그의 용기에 고개를 숙인다는 반박의 글을 남겼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 등 실존인물에 대한 평가도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일부 시청자들은 요즘같이 경제가 힘든 때에 박정희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글을 남겼고, 또 다른 시청자는 고도의 경제 급성장에 대해서는 칭찬 받아 마땅하지만 수출로 급성장한 탓에 큰 인플레이션이 왔다며 '계란 위에 집짓기'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한편 옥의 티를 지적하는 시청자들도 많았습니다.

한 시청자는 24일자 방송 중 차량이 이동할 때 '대우정보시스템'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며, 이 회사는 지난 89년에 생긴 회사인데 79년 10.26사태에 등장한 것은 큰 오류라며 작은 티 하나가 극의 몰입을 떨어뜨린다며 주의해달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또 다른 시청자는 박 대통령 총상으로 병원 후송 후에, 미 주요인사들이 회동을 하는 자리에서 이한우가 주한미국대사로 표기가 됐는데, 이한우역은 CIA 한국지부장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극중 당시 보안사령관 소장이었던 전두환의 계급을 한자로 잘못 표기한 것과 대통령 전용차량의 유리창이 실제로는 보안을 위해 검은 선탠을 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방송에서는 유리창이 투명하게 표현됐다는 점 등도 지적됐습니다.

YTN STAR 손문선입니다. [저작권자(c) YTNSTAR & Digital YTN.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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