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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및 LP들 중에서 흥미로운 것들...

 

 

제가 소장하고 있는 DVD 및 LP들 중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소개합니다.

사진을 잘 못 찍어 여러분들 보시기에 부담스러울지 몰라도, 제가 보기에는 기냥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 먼저 아래에 DVD들

좌측 상단 DVD부터 순서대로 보자면...(아래 5장은 비틀즈 활동 중에 나온 작품들)

 

1. Beatles 1 (1위곡들의 뮤직 비디오로 구성된 bootleg)

2. Anthology (5장짜리 박스 세트 내용물 중 vol.5 special features)

3. US first visit (공식적으로 재발매된)

4. Ed Sullivan shows (64년에서 65년까지의 모든 쇼를 담고 있는 bootleg으로 직전 dvd의 extended version?)

5. making of a Hard Day's Night (국내반)

 

6. a Hard Day's Night 64(5.1 dts)

7. Help 65(5.1 dts)

8. Magical Mystery Tour 67(국내반- 이 아방가르드 영화가 조속히 5.1 채널화되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9. Yellow Submarine 69(호주산 5.1 dts- region code free)

10. Let It Be 70(ebay에서 산 bootleg- 강석 쥔장님께서 바가지 쓰셨다고 소개하신 것과 같은 버젼)

 

 

* 다음 LP들

좌측 상단 LP부터 순서대로 보자면...(중간 5장은 비틀즈 5대 명반들)

 

1. oldies but goodies (66년에 나온 초기 히트곡집으로 나중의 62-66 red album의 원형임. 사이키델리셔스한 커버... 아, 쑝간다 쑝가!)

2. 62-66 Red Album (63년 영국 데뷔작 Please Please Me와 유사한 커버의 설명이 필요없는... )

3. Meet the Beatles (64년 미국 데뷔작)

4. the Beatles 2nd Album (위의 Meet the Beatles 앨범과 합치면 영국반 With the Beatles으로 변신 합체)

5. Beatles for Sale (아름다운 커버의 초기 앨범으로서 개인적으로는 최초로 구매한 오리지날 앨범이었기에 더욱 애착이 가는...)

 

6. Rubber Soul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최고의 자작곡들로 구성된 마치 히트곡집 수준의 정규 앨범. 아름다운 & 쑝가는 마리화나 커버)

7. Revolver (스튜디오 혁명... 처음에 Tomorrow Never Knows를 들었을 때의 그 충격이란!... 역시 쑝가게 뱅뱅도는 LSD 커버)

8. Sgt. Pepper's..... (더 이상 무슨 설명이...  cf. 또하나의 소장품으로서 군바리들이 난도질친 70년대 국산LP를 와이프 몰래 빨리 세계 시장에 70만원에 내다 팔아 재take 해야 할텐데...)

9. white album (생애 최초로 구입한 수입 원반... 아! 파리 68년 5월 혁명... turn me on)

10. Abbey Road (해산 직전 밴드의 앨범이 과연 맞습니까? 믿습니까?)

 

11. Let It Be bootleg (계단에서 내려다보는 오리지날 Get Back 앨범을 열심히 찾아다니다가는 결국 LA에서 꿩 대신 닭으로 http://bootlegzone.com/album.php?name=post&section=1)

12. Live at Hollywood Bowl (국내반으로 당시 비틀즈 초기 오리지날 앨범이 전무할 때 나름대로 해갈시켜주던 라이브 대체제들...)

13. Live on Stage 1962-66 (5장짜리 bootleg으로 이하에 따로 소개)

14. Rock and Roll music vol. 1 (더블 엘피의 back 커버임(살아생전 레논이 그렇게 혐오해 마지 않던 커버). 금지곡이었던 Back in the USSR, Revolution까지 모두 수록된...)

15. Rock and Roll music vol. 2 (멋진 커버는 물론 80년대 헤비메탈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던 Helter Skelter를 처음 들을 때 그 기대와 설레임이란..)

 

 

* Live on Stage 1962-66

참으로 흥미로운 LP SET이 아닐 수 없습니다. bootlegzone.com에도 이 음반에 대한 기록이 없는 듯 합니다. 동베를린에서 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Limited Edition 150 copies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저도 전세계 그 150명인 중 한 사람인 듯...

수록곡은 다음과 같습니다.

 

LP 1- A side
Dec. 31. 1962 Star Club Grosse Freiheit Hamburg

 

1 A TASTE OF HONEY
2 TILL THERE WAS YOU 
3 WHERE HAVE YOU BEEN ALL MY LIFE? 
4 LEND ME YOUR COMB                                 
5 YOUR FEET'S TOO BIG
6 TALKIN' ABOUT YOU  

 

LP 1- B side
7 TO KNOW HER IS TO LOVE HER
8 EVERYBODY'S TRYING TO BE MY BABY
9 MATCHBOX 
10 LITTLE QUEENIE 
11 NOTHIN' SHAKIN' (BUT THE LEAVES ON THE TREES)
12 ROLL OVER BEETHOVEN 

 


LP 2- A side
Oct. 24. 1963 Karlaplansstudio Stockholm

 

0. I Saw Her Standing There
1. From Me To You
2. Money (That's What I Want)
3. You Really Got A Hold On Me
4. Roll Over Beethoven
5. She Loves You
6. Twist and Shout


LP 2- B side
Dec.22. 1963 Empire Theater Liverpool

 

1. From Me To You
2. I Saw Her Standing There
3. All My Loving
4. Roll Over Beethoven
5. Boys
6. Till There Was You
7. She Loves You
8. This Boy
9. I Want to Hold Your Hand
10. Money (That's What I Want)
11. Twist and Shout
12. From Me To You

 


LP 3- A side
Aug. 24. 1964 Hollywood Bowl(Afternoon show)
 
13 TWIST N SHOUT
14 YOU CAN'T DO THAT
15 ALL MY LOVING
16 SHE LOVES YOU
17 THINGS WE SAID TODAY
18 ROLL OVER BEETHOVEN

 

LP 3- B side
19 CAN'T BUY ME LOVE
20 IF I FELL
21 I WANT TO HOLD YOUR HAND
22 BOYS
23 A HARD DAY'S NIGHT
24 LONG TALL SALLY

 


LP 4- A side
Aug. 19. 1965 Sam Houston Coliseum Houston Texas
 
1. Twist and Shout
2. She`s a Woman
3. I Feel Fine
4. Dizzy Miss Lizzy
5. Ticket To Ride
6. Everybody Trying To Be My Baby

 

LP 4- B side
7. Can`t Buy Me Love
8. Baby In Black
9. I Wanna Be Your Man
10. A Hard Days Night
11. Help
12. I`m Down

 


LP 5- A side
Jun. 30. 1966 Mudokan Hall Tokio

 

1. intro

2. Rock and Roll Music
3. She`s A Woman
4. If I Needed Someone
5. Day Tripper
6. Baby In Black
7. I Feel Fine

 

LP 5- B side
8. Yesterday
9. I Wanna Be Your Man
10. Nowhere Man
11. Paperback Writer
12. I`m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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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보환자 안받는 병원 생긴다

 

 

건보환자 안받는 병원 생긴다


[동아일보]

인수위 “민영의보 활성화”… 병원에 건보선택권 추진

“건보 재정 도움” “의료서비스 양극화” 논란

앞으로 병원에서 환자가 가입한 보험의 종류에 따라 환자를 가려 받을 수 있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은 건강보험에 든 환자는 어느 병원에서든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비싼 보험’에 들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병원이 생기는 것이다.

21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따르면 새 정부는 건강보험의 재정 안정과 의료산업 선진화를 위해 민영의료보험 활성화 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다.

인수위 관계자는 “의료기관이 건강보험 적용 환자의 진료를 이유 없이 거부하지 못하도록 한 ‘당연지정제’를 완화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질병 관련 정보를 민간보험사와 공유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금융감독원과 보험업계도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민영의료보험 시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연지정제가 완화되면 건강보험 적용 환자를 받지 않기로 결정하는 병원은 민영의료보험 가입자만 선택적으로 진료하고 보험사에 고가(高價)의 진료비를 청구할 수 있다. 민영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환자가 이런 병원에 갈 경우 보험 혜택 없이 비싼 치료비를 내야 한다.

현재 민영의료보험은 건강보험이 보상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을 보상해 주는 동시에 급여항목에 대해서는 본인 부담금을 보상해 주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민영의료보험 가입자들이 본인 부담금을 보상받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자주 병원을 찾는다’는 이유로 본인 부담금을 보험사들이 보상해 주지 못하도록 관련법을 고칠 계획이었다. 이 때문에 보험회사들은 민영의료보험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길 꺼렸다.

하지만 정부의 연구용역을 의뢰받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해 12월 말 “민영의료보험 가입자들이 오히려 병원에 덜 간다”는 연구 결과를 정부에 제출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새 정부에서 본인 부담금과 관련한 논란이 끝나고 당연지정제까지 완화되면 민영의료보험시장이 크게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새 정부가 민영의료보험 활성화를 추진하려는 이유는 고령화가 진전되면서 건강보험 적자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은 지난해 2847억 원의 적자를 냈으며 올해도 2578억 원의 적자가 예상된다. 인수위 측은 새 제도가 도입되면 고급 서비스 병원이 생겨 환자의 선택권이 확대되고 건강보험은 지출이 줄어 재정이 안정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소득 수준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의 격차가 커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제주대 의대 박형근 교수는 “건강보험 영역의 일부를 민간보험이 대신한다면 의료서비스의 질은 좋아지겠지만, 민영의료보험 가입자와 미가입자 간에 의료 서비스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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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경제학 메카'였던 서울대, 왼쪽 눈 가리나

 

 

'마르크스경제학 메카'였던 서울대, 왼쪽 눈 가리나
[기고 ③] 서울대 경제학부 박사과정 정상준
정상준 (news)
 
33명의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중 유일하게 마르크스경제학을 전공한 김수행 교수가 이번 달에 퇴임합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가 그 후임이 돼, 경제학부 내에서 최소한의 학문적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이에 '학문의 균형과 비판정신의 복원을 바라는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들' 70명은 18일 학내에 "마르크스경제학 전공교수를 채용하라"는 호소문을 붙였습니다. 이들이 호소문에 공감하는 대학원생과 학부생 등의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왔습니다. <편집자주>
 
  
서울대 정문(자료 사진).
ⓒ 권우성
서울대

"(주류경제학과 마르크스경제학) 양자가 각각의 독자적인 접근법을 포기하고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상대방을 인정하고 때로는 허심탄회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질 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접근법만이 유일하게 적합한 것이라는 독단적인 태도가 젊은 계층에서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이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앞으로도 상당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이번에 퇴임하시는 김수행 교수께서 쓰신 글이 아닙니다. 이준구 교수께서 19년 전에 쓰신 글의 일부입니다(<경제논집>, 제28권 4호, 526쪽). 저는 경제학 연구자들의 '독단성'과 '협소한 사고'를 염려하고 경고하는 이준구 선생님의 지적에 십분 백분 공감합니다. '자신의 접근법만이 유일하게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계층'이 19년여의 세월이 흘러 설마 더욱 완고해졌을까요?

 

학부 시절부터 지켜봐온 다른 선생님들도 충분히 이준구 선생님만큼 포용력 있는 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선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의 필요성에 대해 계급 간 동학으로 혹은 가치이론의 틀로 현대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 의의를 논하는 재미없는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그저 저는 대학원생이니 대학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경제학 수업에만 몰두한 요즘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안 통하는 까닭

 

"요새 유학 간 애들은 퍼포먼스가 안 좋아." '미국 대학 유학원으로 전락한 이 곳 대학원'이라는 냉소는 어지간한 석사 1년차들도 다 하는 소리이니 여기서 유학은 미국 유학을 뜻함을 재차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어쨌든 위 '퍼포먼스' 이야기는 우리 학부 선생님들로부터 은근히 많이 듣는 소리입니다.

 

1년 동안 미·거시, 계량(경제학)을 들은 후 논문자격시험, 소위 '퀄'을 패스하지 못하면 제적까지 당하는 미국 대학원의 경제학 교육 체제에서 서울대 출신들이 우등으로 '퀄'을 통과하면서도, 정작 '퀄' 패스 이후 논문의 아이디어들을 제출하고 써나가는 데 있어서는 그리 빛을 발하지는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일부 학생들은 여기서 심지어 수학과나 통계학과 대학원 과목들까지 섭렵하고 유학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저는 그런 지적들을 들을 때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미국 학계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제 또래나 선배 그룹들의 면면을 요즘 세대 이 곳 대학원생들과 비교해보면 이해가 됩니다.

 

이전 세대의 유학파들 중엔 여기서 학부를 다니던 시절 경제학 전공 수업도 대놓고 안 들어가던 이들도 수두룩했습니다. 지금 계신 일부 교수님들도 저희와 술자리를 하시다보면 겸연쩍게 자신의 그런 과거들을 폭로하곤 하시지 않습니까?

 

좌파적 사회과학 학습, 시장주의 경제학 연구에도 도움 됩니다

 

하긴 요새처럼 강의실 앞에서 이전 수업 끝나기 10여 분 전부터 줄을 서 자리를 잡으려 대기하는 대입단과학원 같은 한심한 풍경이 아니라, 담배 연기 가득한 동아리방이나 으슥한 찻집, 퀴퀴한 골방에서 제목부터 살벌한 온갖 '이념 서적'들을 읽어가며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발언들로 토론에 피를 튀기는 '오버'가 그 시절 대학의 풍경, 또래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기말고사 날에야 '자체 개강'하고도 일필휘지로 답안을 써내려가는 실력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예컨대 마르크스경제학의 악명 높은 '전형문제'(transformation problem)를 직접 풀겠다며 당찬 포부로 선형대수학 책을 꺼내 독파하던, 솔직히 지금 같으면 저부터도 한 대씩 쥐어박을 '무식한 용감함'이 그 시절 학부생들에겐 도리어 있었습니다.

 

  
서울대 앞 인문사회과학 서점 <그날이오면>에서 한 이용자가 책을 읽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덕련
인문사회과학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학부생들의 중간·기말 고사 채점이나 성적 처리를 할 기회가 많다보니 요즘 세대의 화려한 글쓰기 테크닉에 종종 놀랄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행히도 겉만 번지르르하거나 알맹이 없는 답안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마 이들은 논술 사교육으로 범벅이 되어 대학에 들어왔다가 그저 학점 경쟁에 바로 정신없이 내몰린 탓일 겁니다.

 

물론, 그것이 요새 학부생 세대들의 한계 또는 잘못만은 아닐 것이고요.

 

즉, 어쩌면 결국 과거 이른바 또래들과의 '사회과학 학습'에서 길러진 토론 능력과 '과학적 상상력'은 경제와 사회를 분석하는 이론적 능력에 있어서는 훗날 설사 시장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각자에게 큰 강점이자 자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슘페터의 고백 "마르크스를 공부한 학생들이 더 우수"

 

고백컨대 대학 시절 그렇게 치열하게 토론하고, 때론 교조적이고 때론 융통성 없었을지언정 엄청나게 많은 양의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들을 읽고 변혁이론 토론을 해야 했던 경험과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고뇌들이 당사자들에게는 의도치 않은 부산물을 낳은 셈입니다.

 

논문자격시험 이후 논문의 아이디어를 잡는 힘, 교수님들께서도 말씀하시는 '퍼포먼스'의 실력 차이는 일부 천재들을 논외로 하면 결국 그런 의도하지 않은 부분들에도 크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변혁의 무기로서 학문을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면 그런 역설에 치를 떨었을 노릇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음지'에서 지내던 아이들일수록 오히려 '전향'을 해도 더 성공적으로 전향하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실 마르크스경제학에 우호적이기는커녕 무척 적대적이었던 슘페터(J. Schumpeter)마저도 일찍이 지적했던 바입니다.

 

"심지어 오늘날조차 모든 경제학 교수들은 마르크스를 자신의 모델로 사용한 학생들이 이론적 관심이 없는 학생들보다 더 우수하다는 사실에서, 하나의 이론체계에 친숙하다는 것이 얼마나 교육적 효과가 있는지, 그 장단점과 별도로, 알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정확히 연구의 과학적 핵심에 관한 한 사실상 깊은 이해를 항상 충족한 것은 아닐지라도, 사회주의자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에게조차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학의 역사와 방법>, 한신대출판부, 2006년, 171쪽)

 

별 대단한 발견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의 책읽기와 또래들과 함께한 토론, 마르크스경제학을 포함한 비판사회과학에 대한 천착이 좋든 싫든 이후 얼마나 학생들의 이론적 발전에 영향을 주는지는 교수님들도 사실은 아시는 이야기이며, 굳이 비유를 하면 멀쩡한 왼쪽 눈을 가린 채 오른쪽 눈만 치켜뜨기보다는 두 눈 다 뜨고 공부를 해야 공부도 더 잘 된다는, 당연하기 그지없는 논리일 뿐입니다.

 

'적극적 연구 지침'으로 재부상한 마르크스경제학... 도쿄대에선 전공 필수

 

더군다나 최근까지 세계 곳곳에서 빈발하는 금융위기와 불평등, 고실업의 만연은 신고전학파적인 시장 원리로만 설명·해결될 수 없으며, 교과서적인 시장 원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처방들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제3세계 빈곤 문제를 둘러싼 세계은행의 역할에 대한 논란과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들(SAPs)의 부작용은 이젠 관대한 일부 주류경제학 내용에도 포함되기 시작한, 상식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후진국뿐만이 아닙니다. 미국과 유럽을 위시한 선진국에서도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각종 경제 불황의 위협과 사회복지시스템의 경쟁적인 해체로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위협받고 있는 절박한 상황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을 뿐더러, 이에 맞서 자본을 재통제하고 재규율하자는 주장들 또한, 무슨 '이념에 사로잡힌 소수'의 주장만이 아님은 도리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고용 없는 성장과 금융자본의 독주를 용인하는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에서 고실업은 필연적이다. 사진은 도쿄 신쥬쿠카부키죠의 젊은 노숙자들.
ⓒ 전국백수연대
실업

마르크스경제학은 각자의 정치적 혹은 정서적 호불호, 전공 여부를 떠나 그런 논의에 있어 현재까지 가장 많은 연구 성과가 집적, 축적되어 온 경제학의 한 분야입니다. 경제학설사·경제학방법론의 용어를 감히 빌리면 마르크스경제학은 그런 전 지구적 시장주의의 독단적 지배와 그 폐해 덕분에 오히려 21세기 경제학의 '적극적 연구 지침'(positive heuristic)으로서 다시 부각된 셈입니다.

 

또한 프랑스 오를레앙 선언, 하버드 경제학부 학부생들의 주장, 캔자스 선언 등 탈자폐적 경제학 네트워크(post-autistic economics network)의 목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경제학이 진정 무엇에 대해 답변해야 하는지, 단일한 경제학만을 가르치고 배우고 이에 순응케 한 것(conformity of economics)이 설령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얼마나 지금까지 학생들의 생각과 이론을 질식시켰는지,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 등에 대한 경제학자·경제학도들의 고뇌와 질문·노력이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서로 공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덧붙여, 이 곳은 엄연히 '연구중심대학, 대학원 중심 대학'을 지향한다는 국립서울대학교의 대학원입니다. 괜찮은 제자다 싶으면 도리어 미국 유학부터 먼저 종용하시는 일부 교수님들의 이야기는, 제자들의 앞길을 열어주고 싶은 그 분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님에도 오히려 현재 이 곳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의 정체성과 강점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삼가 여쭙게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한때 대학원의 석박사논문 상당수가 마르크스경제학으로 쏟아지던 시절, 서울대는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마르크스경제학의 메카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마르크스경제학으로 제출된 석박사 학위논문들 중 일부는 지금 기준으로 보더라도 상당한 이론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서울대 경제학부의 역설적인 '강점'이자 '세계적인 경쟁력' 중 하나였습니다. 소위 '랭킹'을 따짐에 있어 솔직히 서울대보다 뒤떨어진다고 할 수 없을 도쿄대 경제학부에서 여전히 마르크스경제학이 1학년 전공, 그것도 필수과목이라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문제는 좌파경제학 '과잉'이 아니라 '부족'

 

  
20년 전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은 시장주의에 비판적인 경제학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고 학문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그 결과 김수행 교수가 서울대 경제학부에 자리를 잡았다. 사진은 그 당시 상황을 보도한 서울대 <대학신문>.
ⓒ <대학신문>
마르크스경제학

물론 마르크스경제학의 과제와 가치가 과거와 같을 수는 없으며, '그때 그 시절'을 복원코자 함도 아닙니다. '안병직 교수께서 제자 대학원생들에게 공장 현장으로 투신하라고 일갈하던 시절'(이영훈·안병직,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기파랑출판사, 2007년, 48쪽)의 마르크스경제학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학원 다니는 것마저 부끄러워하며 힘겹게 버텨내던 세대들 일부에게는 소련이나 북한이 대안사회로 여겨졌는지는 모르나, 지금 마르크스경제학에 관심을 두거나 연구를 하는 세대들은 기존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은커녕 구경도 못해본, 아니 별 구경할 생각도 없는 세대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마르크스경제학은 그런 모종의 과거의 굴레, 즉 기존 사회주의 체제를 어떻게든 옹호해야 했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일부는 수학·통계학의 영역을, 일부는 철학·논리학의 영역을, 일부는 역사·정치학의 영역을 잠식하면서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게 발전해 온 지 오래입니다.

 

더욱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의 고삐풀린 자본주의야말로 마르크스경제학을 소위 '블루오션'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심지어 서울대 주류경제학의 거장이신 조순·정운찬 두 분 선생님께서도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사상은 어떤 형태로든지 계속 존재할 것이다, 볕이 비치는 곳에는 항상 그림자가 있다"(조순·정운찬·전성인, <경제학원론>(7판), 법문사, 2003년, 943쪽)고 이야기하시지 않습니까?

 

물론 당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거나 연구했던 많은 선배 세대들이 일부는 한국경제학계의 편견으로 인해 노동시장이 더욱 좁아지면서, 혹은 일부는 직면한 생계의 문제로 인해 학문을 지속적으로 연구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정작 한국 경제의 진보적 혁신과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의 발전에 기대만큼 기여하지 못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즉, 문제는 당시 일부 관념적이기도 했던 '좌파경제학의 과잉'이 아니라 도리어 '진정한 좌파경제학의 부족함'에 있었으며, 따라서 지금 마르크스경제학의 명맥 유지가 위협받는 위기를 스스로 자초한 면도 있음을 냉정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비극이 2008년 현재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과거 선배들이 왜 마르크스경제학을 중심으로 한 비판사회과학 탐구에 열중하였는가라는 그 가치를 진심으로 존중하면서 동시에 현재 발 딛고 선 경제 사회의 현실, 인민들의 살림살이에 천착하여 뛰어난 연구업적을 지속 생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졸업 이후 현실적인 진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을 탐구하는 젊은 연구자들이 평생 지고 가야 할 책임일 것입니다.

 

'미래의 노벨상' 차버린 캘리포니아주립대... 서울대, 그 전철 밟을 건가 

 

글이 길어졌습니다. 에피소드 하나로 마칠까요? 1960~70년대 미국의 진보적 경제학계를 이끌었던 하워드 셔먼(H.Sherman)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 Riverside)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회고에 따르면(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Fall 2006, pp.533~535), 셔먼 교수는 1968년 당시 이미 23권의 저서를 냈던 미국공산당의 수석경제학자와 인도의 한 대학 교수를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로 영입하려다 보수적인 다른 교수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 이유들이 걸작입니다. 전자는 학부에 신임교수를 채용할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였고, 후자는 고작 제3세계의 인도 사람을 교수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류'의 편견과 선입견이 설마 1960년대 미국이나 2000년대 한국이나 마찬가지일까요?

 

특히, 당시 결국 임용에 탈락하고 만 인도인이 바로 불평등과 빈곤 연구의 대가이자 훗날 가장 이단적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1998년)로 불리는 아마티아 센(A.Sen)입니다. 결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경제학부 교수진들은 자신들의 보수적인 오만과 폐쇄적인 편견 덕분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교수진(faculty)에 보유할 기회를 놓친 셈입니다.

 

불필요한 독단론(dogmatism)에 사로잡혀 그들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서울대 경제학부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설마 우리 교수님들께서 그 정도로 편협하겠느냐고 자문하면서, 경제학부 졸업생이자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김수행 선생님에 이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후임으로 채용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988년 학문 다양성 확보를 위한 집단행동을 통해 마르크스경제학 교수 채용을 이뤄냈던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들. 그로부터 20년 후인 지난 18일 이들은 다시 '학문의 균형과 경제학에서 비판정신 복원을 위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를 채용하라'며 학내에 호소문을 붙였다.
 
마르크스경제학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프레시안>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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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성행위 조각상... 이런 게 왜 사원에 있지?

 

 

 

엽기 성행위 조각상... 이런 게 왜 사원에 있지?
[인도여행] 카주라호 동부, 서부 사원군의 조각상들
서종규 (gamguk)
 
 
  
▲ 인도 카주라호에 있는 동부, 서부 사원군의 모습과 조각상들
ⓒ 서종규
카주라호

 

카주라호에 가기도 전에 카주라호에 대한 이야기들이 시끌벅적하다. 카주라호 사원들에 가면 엽기적 성행위 조각상이 즐비하여 미성년자 관람불가니, 플레이보이 잡지보다 더 노골적이니, 심지어는 인도의 성인 간디도 성행위가 되어 있는 조각들을 보고 "모든 카주라호 사원을 다 부수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외설적이라니, 은근히 호기심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1월 19일(토) 오후 4시, 우리들은 카주라호 동부 사원군으로 갔다. 동부 사원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성행위 묘사가 들어 있는 기념품들을 들고 사라고 따라온다. 어떤 것은 열쇠고리로 성행위 동작이 가능하게 제작되어 있고, 인도에서 이미 4세기경에 쓰인 인도의 성행위 지침서인 <카마수트라>라는 책을 들고 와서 사라고 난리다.

 

동부 사원군에는 파르스바나트·산티나트·아디나트 등 3개의 자이나교 사원이 있다. '은근하게' 기대했던 성행위 조각상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불상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리고 얼굴이며 가슴이나 골반은 분명 여인의 몸인데, 정작 남자의 음경이 달린 신상들이 많아 신기했다. 

 

엽기적 성행위 조각상이 즐비하다더니...

 

  
인도 카주라호 동부 사원군의 신상들(얼굴미여 가슴이나 골반의 모습이 분명 여인의 몸인데, 정작 남자의 음경이 달려 있다)
ⓒ 서종규
카주라호

고색창연하게 멀리서도 우뚝 솟아 보이는 파르스바나트 사원(Parswanath Temple)으로 갔다.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로 치면 큰 탑 같이 보이는 이 사원은 다닥다닥 수많은 조각상들의 군집이다. 1000년경 인도의 유명한 조각가들을 다 모아 놓고 돌에 새겨 붙인 조각 전시장 같다.

 

기록에 의하면 각가지 형상들을 담은 약 900여개의 부조들이 사원 안과 벽면에 붙어 있다고 한다. 탑 안에 또 하나의 탑이 들어 있고, 사원 안뿐만 아니라 사원 밖에도 그렇게 많은 조각상들이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붙어있는 것이다.

 

대단하면서도 장중한 맛이 든다. 때로는 섬세하고, 때로는 풍만하고 농염한 여인의 모습으로 여성스러운 멋을 마음껏 드러냈다. 그리고 갖가지 동물들의 기기묘묘한 모습과 탑 위의 또 다른 작은 탑, 그 옆의 또 작은 탑의 모습들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사원은 하나의 거대한 조각 작품이다. 

 

파르스바나트 사원 벽에 붙어 있는 부조들을 하나하나 넋을 읽고 바라보느라고 해지는 줄 몰랐다. 인도 여행 중에 본 그 많은 석상과 사원들, 그리고 많은 조각상들에 놀랐지만 이 사원에서 느끼는 장인들의 솜씨와 숨결은 거대한 감동으로 밀려왔다. 

 

  
인도 카주라호 동부 사원군 중 파르스바나트 사원의 조각상들
ⓒ 서종규
카주라호

 

  
인도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의 조각상들
ⓒ 서종규
카주라호

20일(일) 오전 9시, 서부사원군으로 갔다(입장료 5$). 유네스코 문화유산이어서 그런지 입구에 총을 든 군인이 지키고 있다. 난 금속 탐지기를 통과하여 들어갔다. 어제 동부 사원군에서 받은 감동이 너무 커서 아직도 들떠 있었다.

 

어제 동부 사원군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10여개의 사원들이 곳곳에 우뚝 솟아 있었다. 우리나라로 보면 거대한 탑들이 곳곳에 늘어 서 있는 것이다. 모든 사원 외벽에  900여개의조각상들이 붙어 있다고 한다.

 

카주라호는 950년부터 1050년 사이에 달의 신 찬드라의 자손이 세웠다는 찬델라 왕조의 초기 수도가 되면서 이곳에 85개의 사원이 건축되었다고 한다. 대부분 힌두교 사원이었지만 동부지역에 몇 개의 자이나교 사원도 지었단다. 500년을 이어가던 왕조가 이슬람에  망하면서 많은 사원들이 파괴되어 현재 22개의 사원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인도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의 멧돼지 조각상
ⓒ 서종규
카주라호
  
인도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 중 락슈마나 사원
ⓒ 서종규
카주라호

'자세하고 적나라하고 노골적이고 엽기적인' 조각 

 

처음 들른 바라하 사원에는 비슈누의 3번째 화신으로 알려진 거대한 멧돼지 상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 멧돼지상은 쇠와 같은 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멧돼지 몸에는 수많은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여인상도 있으며, 특히 돼지주둥이에도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다음은 바라하 사원 앞에 있는 락슈마나 사원이다. 이 사원의 외벽은 시바와 비슈누신, 요정들과 아름다운 여인들 모습의 조각들이 붙어 있다. 이 사원이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그만큼 관심의 대상인데 그 이유는 사원 외벽에 900여 개가 넘게 붙어 있는 조각들 중에 '미투나상'이 많기 때문이다.

 

미투나(Mithuna) 조각이란 남녀의 성행위를 표현하는 조각으로 락슈마나 사원과 칸다리야 마야데브 사원 외벽에 집중적으로 붙어 있다. 이 조각들은 여인들의 풍만하고 농염한 육체는 물론 남녀가 벌이는 성행위를 약 80여 가지 모습으로 '자세하고 적나라하고 노골적이고 엽기적으로' 조각하였다고 한다.

 

성행위 장면은 갖가지다. 여러 명이 함께 하는 장면들을 비롯하여, 서로 성기를 만져주는 장면, 뒤에서 껴안고 성기를 삽입하는 장면, 눕거나 서서 하는 갖가지 성행위 장면들이 마치 요가를 하는 동작과도 같다. 어떤 조각은 말과 성행위 하는 장면을 새겼다. 모두 남자의 성기를 드러내어 삽입하는 모양들이다.

 
  
인도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의 미투나 조각상들(성행위 묘사 조각)
ⓒ 서종규
카주라호

 

  
인도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에 있는 미투나조각상(성행위 묘사)
ⓒ 서종규
카주라호

왜 사원에 성행위 묘사 조각상을 걸었을까? 

 

그렇다면 왜 사원에 이런 성행위를 드러내는 미투나상을 조각하여 붙였을까? 모두 뚜렷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8세기에서 12세기까지 성행한 '탄트리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탄트리즘의 근본인 '탄트라'는 '스스로 지식을 넓히고 몸의 실천적인 수행을 통해 익히는 것'이란다. 

 

탄트리즘은 남성의 신과 성적인 에너지, 즉 우주의 생명력을 의미하는 여성의 신을 숭배하였단다. 이들은 '차크라 푸자'라는 숭배 의식을 통하여 한밤중에 같은 수의 남녀가 둥글게 둘러앉아 성교 의례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남녀가 성교를 하여 그 절정의 상태에서 자아의식과 우주의식이 하나 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브라만 계층의 사람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장소였다고 한다. 브라만 계층은 인도의 네 계층 중 가장 높은 계층으로 성직자들인데 이러한 성행위의 조각상들을 보고도 흥분하거나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훈련하였던 장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껴안고 성행위를 벌이는 조각상들을 찾으려면 많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많은 미투나상이 있지만 직접적인 성행위를 벌이고 있는 상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원 내외벽에 붙어 있는 900여개의 조각상들 중에서 성행위 장면을 묘사한 조각은 약 5%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성행위를 하는 조각들을 찾으려고 사원 전체를 샅샅이 뒤지다 보면 어느새 사원 외벽에 붙어 있는 조각들을 다 훑어보는 것이다.

 

조각상은 성행위보다는 풍만하고 농염한 여인들 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인들의 젖가슴이나 엉덩이·종아리 등은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할 정도로 육감적이다. 그 풍만한 육체에 장신구들과 속옷을 걸치고 있는 표현은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사원의 내벽과 외벽에는 미투나상이 많지만, 코끼리나 말을 비롯한 동물들도 많다. 동부 사원군에서 보았듯이 사원 외벽에는 또 다른 작은 탑 조각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기상천외한 모양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전쟁과 사원을 건축하는 장면도 형상화되어 있다.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의 전쟁에 나가는 코끼리탄 왕 조각상
ⓒ 서종규
카주라호
  
인도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의 코끼리 타고 하는 전쟁 조각상들
ⓒ 서종규
카주라호

성행위 조각상은 많이 훼손돼

 

이 조각들은 성행위 장면을 묘사한 미투나상을 비롯하여, 춤추는 여인, 코끼리를 타고 전쟁에 나가는 왕, 코끼리를 타고 싸우는 장면, 창과 방패를 들고 행진하는 장면, 말을 타고 싸우는 장면, 전쟁을 격려하기 위하여 음악을 울리는 군악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군인 등 현실의 삶을 그대로 표현했다.

 

아쉬운 것은 많은 조각상들이 훼손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미투나상이 많이 훼손되었다. 그 중에서도 성행위를 드러내는 조각들의 손상이 심하다. 혹 간디의 말에 따라 몇 사람들이 파괴하였는지도 모른다. 파괴된 조각상을 보면서 조상들이 남겨 놓은 문화재 하나, 대대로 이어온 강산, 그 위에 있는 돌 하나까지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 같다.

 

락슈마나 사원과 칸다리야 마야데브 사원을 제외한 다른 사원들도 여전히 많은 부조들이 붙어 있다. 이 두 사원에서 성행위를 표현한 미투나상을 찾다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버렸다. 그래서 모두 비슷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다른 사원들은 빙 한 바퀴 돌고 또 다른 사원을 찾아야만 했다. 그 사원들에는 미투나상이 있기는 하였지만 성행위 장면이 직접 드러나는 조각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원 안에 또 사원을 세우는 건축 기법에, 그 안에 숭배하는 신을 모셔 놓고, 그 안과 밖에 미술시간에 배웠던 부조와 환조의 기법을 사용하여 찬란한 조각 예술의 꽃을 피운 카주라호의 사원군은 인도가 가지고 있는 세계 문화유산 중에서도 백미이다. 인도 여행에서 가장 볼 만한 곳을 추천하라면 단연 카주라호 사원군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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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주류 경제학 반성하는데…&quot;

 

 

미국도 주류 경제학 반성하는데…"
  [기고] "규제 없는 자본주의가 낳은 재앙의 역사, 기억해야"
 
  2008-02-20 오후 1:42:09
 
   
 
 
  칼 마르크스의 이론을 전공한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후임 논란을 다룬 기사가 게재된 뒤,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관련 기사 : "아직 마르크스를 버릴 때가 아닙니다")
  
  다양한 이론을 접하며, 복잡한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학생의 반응도 있었다. (☞관련 기사 : "경제학 교수들은 왜 택시기사 분신에 침묵하는가")
  
  하지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은 역시 학계다. 단지 마르크스 경제학, 서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주류 학계 전체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강국 일본 리츠메인칸 대학 교수가 최근의 사태에 대한 소회를 적어 보냈다.
  
  이 글에서 이 교수는 "규제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본주의의 모순이 대공황으로 이어진" 역사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그는 "1980년대 이후, 노동자와 국가에 비해 자본과 금융의 힘이 강화된 현실"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심각한 양극화와 빈곤, 금융 불안을 낳았다. 그래서 이 교수는 고삐 풀린 자본의 움직임을 견제하려는 문제의식이 담긴 비주류 경제학이 여전히 소중하다고 지적했다.
  
  금융 위기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양극화가 심화된 현 상황은 오히려 진보적인 문제의식에 기반한 경제학 이론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다음은 이강국 교수의 글 전문이다. <편집자>
  
  김수행 교수님이 퇴임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문득 드는 생각은 세월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90년대 초 내가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도 이미 80년대 후반의 민주화운동의 열기는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마르크스 공부하던 학생들, 이제는 새로운 흐름을 고민하고 있지만
  
  하지만 당시만 해도 절반을 넘는 대학원생들이 정치경제학을 비롯한 비주류경제학을 전공하고자 했고 김수행 교수님은 많은 학생들을 아버지처럼 맞아 주셨다. 전공하고자 하는 분야의 교수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대학원생들은 선후배가 세미나를 조직하여 함께 학습을 했고, 한국사회경제학회는 다른 학교의 교수님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선생님의 수업들과 그 치열한 토론들로부터 자본주의의 운동과 모순에 대해 배웠고 가난과 불평등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다.
  
  세월과 함께 우리들의 관심도 다양해져서 선생님만큼 굳건하게 마르크스와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기보다는 대부분 최근의 경제학의 새로운 흐름과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지만, 여전히 언제나 세상의 낮은 곳을 향하는 초심은 바래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에도 가끔씩 학교를 들르면 여전히 선생님 아래서 논문을 쓰고 있고 비주류적인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가진 대학원 후배들을 만날 수 있다.
  
  시장 만능주의가 득세한 분위기와 마르크스 경제학자의 쓸쓸한 퇴임
  
  그러나 이제 시대는 전과 많이 달라서 이전과 같은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비주류경제학에 관한 관심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이미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했고,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 사회도 더욱 보수적으로 변한 것을 생각하면, 비주류적인 경제학은 이미 낡은 논의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저성장과 양극화의 문제가 더욱 심화되어 소위 민주정부 10년 동안에 진보에 대한 실망이 더욱 커진 것도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제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새 정부의 탄생을 목전에 둔 이 때에, 후임도 확실치 않은 채 학교를 떠나시는 김수행 선생님을 생각하면 묘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장만능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의 시작과 선생님의 퇴임이 겹쳐지는 것이다.
  
  세계화와 무한경쟁을 향해 모두가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시대, 대학생들조차 사회문제가 아니라 영어공부와 취직준비에 목을 매는 시대. 이 자본과 시장의 시대에 선생님과 같은 학자들이 차지할 자리는 점점 더 없어지는 것일까.
  
  '워싱턴 컨센서스'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면화
  
  잠시 자본주의의 역사를 되돌아보자. 규제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본주의의 모순이 대공황으로 이어졌고 2차 대전 이후 케인즈주의 복지국가로 대표되는 경제사상과 제도의 변화가 자본주의의 황금기의 기반이 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후 전개된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이후 1980년대부터는 세계화와 함께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을 찬양하는 경제학의 흐름이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여러 개도국들에서도 금융위기 이후 구조조정과 함께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들이 득세한 지 오래다.
  
  이는 물론 노동자와 국가에 비해 자본과 금융의 힘이 강화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작금의 우리 사회를 덮치고 있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파고는 우리만의 일이 아니며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시대에 자본주의의 미덕과 경쟁력, 그리고 시장의 아름다운 균형과 행복한 결과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약해지고 진보적인 비주류경제학의 흐름이 약화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세계화와 양극화'…'세계적 금융 위기'의 가능성
  
  하지만 세계의 현실을 냉정하게 둘러보고 미래를 성찰해보면 이는 잘못된 생각인 듯하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불평등과 빈곤, 그리고 경제의 불안정 등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을 더욱 중요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임금격차가 커지고 부와 소득의 분배가 악화되었다고 보고된다.
  
  이는 물론 기술변화도 반영한 것이지만, 급속하게 진행되는 세계화와 개방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진전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리고 세계화와 함께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으며, 2004년에도 무려 10억에 가까운 세계인구가 하루 1달러도 되지 않는 소득으로 살아가고 있을 정도로 세계의 가난 문제는 심각하다.
  
  또한 금융자본의 국제적 이동과 버블을 배경으로 여러 국가들이 경제위기로 고통을 겪었고 미국 등 선진국의 금융불안도 심화되고 있다.
  
  결국 시장근본주의와 세계화의 소용돌이가 세계를 휩쓸수록 체제의 모순과 갈등이 새로이 심화되고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나타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진보적 경제학의 문제의식은 더 절실해졌다"
  
  많은 이들은 지금, 고삐 풀린 시장을 전 세계 시민들의 지혜로 제어하고 현재의 세계화 과정을 적절하게 개혁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한국만 보아도 경제위기 이후 가난과 격차 그리고 경제적 불안이 더욱 심각해져 안정적 성장의 기반이 약화될 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은 선생님이 평생 동안 천착하셨던 정치경제학의 비판적인 문제의식과 이에 기초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대안적인 노력들을 더욱 주목받게 할 것이다.
  
  선생님이 퇴임 후 정치경제학을 강의하시는 사회과학대학원에 등록하는 일반인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올해 2월에도 여러 학생들이 선생님의 지도로 서울대 경제학부의 박사학위를 받게 될 것이다.
  
  선생님이 퇴임하는 지금은 정치경제학이 약화되고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는 때가 아니라, 개혁과 대안적 변화를 위해 진보적인 경제학의 문제의식이 보다 중요해지는 시기인 지도 모른다.
  
  <뉴욕타임스> "주류경제학의 지나친 강조가 창의적인 정책 논쟁 가로막는다"
  
  2007년 7월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비주류경제학(heterodox economics) 이야기를 다루는 한 칼럼을 실은 적이 있다.
  
  이 기사는 미국의 대학 내에서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주류경제학의 믿음에 대한 회의와 비판적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글에 따르면 이제 유수의 경제학자들도 정부의 시장개입은 나쁘고 자유무역은 좋은 것이라 주장해야 공인된 경제학자로 받아들이는 주류경제학의 과도한 주장이 경제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창의적인 정책논쟁을 가로막고 있다고 강조한다.
  
  최근에는 여러 학자들이 주류경제학의 방법론에 기초해서도 이단적인(heretic) 결론을 보고하는데, 이들의 고민은 비주류경제학의 문제의식과도 그리 멀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 일본에서도 비주류 경제학은 살아 있다"
  
  미국에서는 또한 그 수는 비록 많지 않지만 필자가 공부했던 매사추세츠 주립대학교(University of Massachusetts)와 같은 대학들에서 여러 비주류경제학자들이 꾸준히 마르크스경제학의 현대적인 적용에 대해 연구하고 또 비판적인 입장에서 세계경제를 분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유학시절 교수들 그리고 동료들과 세계의 금융위기와 신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경제발전에서 민주적인 정부의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에 관해 난상토론을 벌이던 기억이 새삼 새롭다.
  
  이 곳 일본의 경우도 여전히 많은 대학들에서 전공필수과목으로서 마르크스경제학을 가르치고 경제사 등도 전공과목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학생들도 이러한 과목들에 커다란 흥미를 보이며 주류경제학과 비교하며 균형잡힌 세계관을 만들어가고 있다.
  
  양극화와 빈곤의 현실,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러나 한국의 경제학은 미국에서 그대로 받아들인 주류적인 입장이 너무나 지배적인 듯하다. 경제사와 경제사상사조차도 강의에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현실은 학문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꽤나 편협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양극화와 빈곤 문제를 비판하고 약자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찾아보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경제학자는 무릇 '찬 이성과 더운 가슴'을 함께 지녀야 한다고 배웠다. 어떤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든 경제학자라면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는 공통적일 것이다. 우리의 경제학계도 세계화 시대에 더욱 심각해지는 문제들에 관한 비주류경제학의 문제의식들을 받아들이고 생산적인 논쟁 속에서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선생님이 떠나신 후에도 서울대 경제학부가 다양성에 기초한 학문의 발전과 사회개혁을 위한 경제학의 기여를 위해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이강국/일본 리츠메인칸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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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도 40년 전에는 '서열 의식'이 견고했다&quot;

 

 

덴마크도 40년 전에는 '서열 의식'이 견고했다"
  [덴마크에서 살아보니ㆍ<14>] 서열사회에서 평등사회로…'68혁명'이 계기
 
  2008-02-20 오전 8:03:09
 
   
 
 
  앞서 게재된 "명문대? 우리 애가 대학에 갈까봐 걱정"와 "의사와 벽돌공이 비슷한 대접을 받는 사회" 등 두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일부 독자들은 편집자에게 보낸 메일을 통해 "우리와 너무 다르다. 지구 상에 이런 사회가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라고 토로했다.
  
  또 다른 독자들은 "덴마크가 연재물에 소개된 것과 같은 복지 체제를 갖출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와 전혀 다른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며, "한국 사회에서 이런 모델이 실현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 서열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를 꼽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서열 의식'이 깨지지 않는 한, '평등 의식'에 기반한 복지 사회로의 이행은 요원하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런 이행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덴마크에서 살아보니' 필자인 김영희 씨는 "덴마크 역시 1950년대까지는 우리처럼 서열 의식이 강했다"라고 설명한다. 덴마크라고해서 원래부터 '평등 의식'이 강했던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김영희 씨는 1968년 학생혁명이 분기점이 됐다고 지적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소규모 학생 시위가 세계를 휩쓴 신좌파 열기로 번진 1968년 5월 혁명이 덴마크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 김영희 씨는 덴마크에 '평등 의식'이 급격히 확산된 것은 1970년대부터라고 설명했다. 불과 한 세대만에 사회 전체가 환골탈태한 셈이다.
  
  이런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보다 평등하고, 살기 좋은 사회로 거듭나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는 교훈이다. 다음은 '덴마크에서 살아보니' 14회분이다. <편집자>
  
  자녀가 행복한 삶을 살기 바라는 것은 한국부모나 덴마크 부모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한국 부모가 아이들의 교육에 그렇게 열성적인 것은 좋은 학교를 나와서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학교' '좋은 직업'이라고 말 할 때의 '좋은'이라는 말에는 은연중 어떤 서열의식이 뒤에 숨어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이 서열이라는 것은 숨 쉬는 공기처럼이나 어디에나 뻗어있다.
  
  가정에도 서열이 있고 학교 내에서도 교장 평교사 학생이라는 서열이 있고 학생들 사이에도 등수라는 서열이 존재한다. 고등학교가 평준화 되었다고는 하지만 강남학교와 강북학교 사이에 서열이 있고 대학 간에 있는 서열은 말할 것도 없다.
  
  직장, 직업에도 서열이 있어서 이는 바로 사회적 신분과 보수로 이어지는데 서열이 높은 쪽일수록, 즉 상위권일수록 혜택을 많이 받고 안락한 삶을 살게 된다.
  
  사정이 이러니 부모들은 아이를 상위권에 밀어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상위권, 하위권으로 나누는 서열의식, 그리고 불평등이 있는 한, 초인적인 학습시간과 과외열풍이 사라질 수 없다.
  
▲ '방과 후 클럽' 활동으로 토끼를 돌보는 덴마크 학생. 아이들이 경쟁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롭게 자랄 수 있게 된 계기는 '1968년 학생 혁명'이었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의 이행은 거저 이뤄진 게 아니었던 셈이다. ⓒ김영희

  부모가 다 같이 일하는 덴마크 가정에서 부부 사이는 물론 부모와 아이들과의 관계도 상당히 대등한 편이다. 아이들도 인격체로 간주하여 항상 아이들의 의견을 묻고 존중한다, 말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아이가 매사에 스스로의 의견을 말하도록 격려를 한다.
  
  학교에서도 교장은 교사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행정적인 업무를 맡아서 처리하는 대표쯤으로 인식이 된다. 또 교사는 학생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시켜야 한다. 학생들은 우열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능력과 소질이 다른 존재로 파악된다. 학교간의 서열은 거의 없고 직업에 따른 사회적 신분과 보수의 차이도 심하지 않다.
  
  이처럼 서열이 거의 없는 평등한 사회이니 상위권에 진입하기 위해 모든 희생을 할 필요도 없고 덴마크 부모들은 아이가 방과 후 학교나 클럽에서 마음껏 놀아도 걱정이 없는 것이다.
  
  덴마크 부모의 바람은 '아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고 그 분야로 나가 직장을 얻는 것' 이라고 한다. 즉 하고 싶은 일, 능력에 맞는 일을 하면서 만족감을 얻는 것을 행복한 삶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덴마크에도 1950년대 까지는 우리와 같은 서열의식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68년 학생혁명을 기점으로 1970년대부터 평등의식이 급격히 확산돼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인간 능력의 다름을 인정하고. 개성을 인정하여 동등하게 여기는 평등정신이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필자 이메일 : kumbikumbi2@yahoo.co.kr
   
 
  김영희/'과천 품앗이'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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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간 '박정희', 그리고 유신체제

 

 

문제적 인간 '박정희', 그리고 유신체제
 
[칼럼] <유신과 중화학 공업-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을 읽고
 
입력 :2008-02-13 09:28:00   이태경 사무처장
 
 
한없이 복잡했던 한 인간의 초상(肖像)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가 현대적 의미의 대한민국을 사실상 주조(鑄造)한 대통령일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그의 영향력이 지속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가 통치했던 18년 동안 대한민국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고속경제성장을 구가했다. 반면에 정당정치와 민주주의는 교과서 속에나 존재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상반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 위에서 말한 '그'는 바로 박정희다.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교사와 관동군 장교를 거쳐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고 남로당의 군책으로 활동하다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박정희의 인생역정은 마치 질곡으로 점철됐던 한국현대사의 속살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유년시절부터 30대 중반의 시기에 박정희가 경험했던 여러 사건은 그의 정신과 심성에 아로새겨져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대한민국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체험과 당시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최빈국 수준의 경제여건, 미국과의 종속관계, 북한과의 대결국면 등-이 어우러지면서 박정희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근대화론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의 치세를 대표하는 단어를 두 마디로 표현하면 '고도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후퇴'가 될 터이고 이는 그의 친일과 군사 쿠데타라는 휘발성 강한 쟁점들과 맞물려 그에 대한 평가를 한층 어렵게 만들고 있다.

   
 
  ▲ 유신과 중화학 공업-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일조각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한국현대사에서 박정희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도 달리 없을 성싶다. 한편에서 그는 절대빈곤에 허덕이던 대한민국을 근대화시킨 탁월한 지도자로 묘사되는가 하면 반대편에서는 군사쿠데타로 헌정을 유린하고 장기집권을 통해 민주주의를 질식시킨 잔인한 독재자로 폄하되곤 한다.

또 아주 많은 사람이 그를 청렴했던 '선의의 독재자'로 기억하고 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에게서 말년의 황음(荒淫)을 떠올린다.

그러나 박정희라는 인물 안에는 위에서 평가한 요소들이 사이좋게 머물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공정할 것이다.

한편 박정희 평가와 관련해서 특기할만한 점은, 박정희 지지자들이 그의 재임시절에 이룩한 경제성장에 후한 점수를 주는 반면 박정희 반대자들은 그의 정치적 잘못-특히 유신(維新)-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공(功)은 경제성장과 조국 근대화이고, 과(過)는 유신이라는 도식이 보편타당한 것일까? 호주국립대 교수인 김형아(정치, 사회 변동학) 교수가 쓴 <유신과 중화학 공업-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은 이러한 상식에 도전하고 있다.

근대화주의자 박정희, 부국강병을 꾀하다

김형아 교수는 이 책에서 박정희를 부국강병을 꿈꾼 근대화주의자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박정희의 근대화주의의 배경에는 민족주의가 작동하고 있었다고 이해한다.

박정희가 민족주의적 근대화주의자로 자리매김한 데에는 이미 위에서 살핀 것처럼 박정희 자신이 경험했던 사건들과 대한민국이 봉착했던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짐작이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직후부터 박정희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은 온통 공업화를 통한 경제개발이었다. 이는 62년부터 시작되어 비약적인 성과를 거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나타나며 그 구체적인 방법은 64년부터 본격화된'수출'이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위해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전시하의 총동원체제로 편성하고 자신이 그 체제의 정점에 선다. 경제발전을 위해 박정희는 사용 가능한 모든 대내외 역량을 동원했다.

자본과 금융에 대한 철저한 통제, 산업·무역·기술 정책·재벌을 중핵으로 하는 경제성장,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월남파병, 냉전 국면을 이용한 미국의 수혜 등은 박정희가 급속한 경제개발을 위해 선택한 목록이다.

물론 이 시기 민주주의의 진전은 고통스러울 만큼 더뎠다.

중화학공업화의 필요충분조건 유신(?)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박정희가 가까스로 승리했던 71년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초야에 묻혔다면 그에 대한 평가와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에 대한 평가도, 대한민국의 운명도 지금과는 자못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71년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박정희는 의식과 토대의 양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개조(?)를 추구했다. 의식개조는 새마을 운동을 통해, 토대개조는 중화학 공업화를 통해 이루고자 했다.

박정희가 국가개조프로젝트라고 불러도 좋을 수준의 변화를 추진한 배경에는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의 경제성장과 자주국방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미국의 보호막이 걷힐지도 모른다는 박정희의 두려움은 자주국방의 하나로 중화학 공업화를 강력히 추진하게 하였다. 물론 그 자신의 권력욕도 짙게 배어있었다.

대한민국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던 중화학공업화는 73년 1월 공식화되었는데 이 중화학공업화는 박정희를 필두로 한국은행 출신의 김정렴 비서실장, 자동차회사 공장장을 지낸 오원철 경제수석비서관으로 구성된 이른바 '중화학공업화의 3두 체제'에 의해 추진되었다.

특기할 점은 박정희가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경제기획원 관료들이 아니라 상공부의 기술관료들에게 의존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우위와 적극적 간섭 등을 고려해 보면 결국 박정희식 경제모델은 자유방임보다는 세계시장을 염두에 둔 계획경제에 가까웠다고 평가해도 큰 무리는 없을 성싶다.

한편 중화학 공업화에 대한 세부 계획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유신헌법에 대한 기초작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는 박정희가 유신체제로 상징되는 폭압적 정치체제 아래서만 중화학공업화라는 대역사가 가능했다고 사고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마리기 때문이다. 또 이는 당시 적지 않은 엘리트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유신'과 '중화학 공업화'가 양날의 선택과도 같았다는 이러한 인식은 중화학 공업화 추진의 핵심실세였던 오원철의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요사이 많은 사람이 박 대통령은 경제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실패했다고들 말한다. 심지어는 박 대통령 아래서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공개적으로 중화학공업화와 유신 개혁을 별개의 문제처럼 이야기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중화학공업화라는 것이 쓰라린 진실이라고.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었다. 한국이 중화학공업화에 성공한 것은 박 대통령이 중화학공업화가 계획한 대로 정확하게 시행되도록 국가를 훈련했기 때문이다. 유신이 없었다면 대통령은 그런 식으로 국가를 훈련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1996년 10월, 2000년 1월 오원철 인터뷰), (본문 294P)

독재와 경제발전과는 선택적 친화성이 있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지만, 유신이 중화학 공업화의 필요충분조건이었는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그러나 박정희식 경제모델 하에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기적적으로 성장한 것만은 분명하다.

아래의 인용문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의 국민총생산은 20년간(1962~1980) 127억 달러에서 574억 달러로(1980년 기준) 452퍼센트 성장했고, 수출액은 1964년 1억 달러에서 1978년 100억 달러로 늘었다. 이 시기 동안 한국은 해마다 평균 8.5퍼센트의 국민 총생산 성장률을 기록하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Johnson 1987 : 136 ; Amsden 1989 : 56) 정부가 공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하부구조를 건설함으로써 사회적 설비 역시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었다. 예를 들면 전기발전량은 1961년에서 1971년 사이 10배로 늘었고 전화 대수는 1965년에서 1975년 사이 437,915대에서 2,292,286대로 다섯 배가 늘어 100명에 6대 수준이 되었다(우승무 1995 : 462)

… 교육제도와 고용 기회의 광범위한 확대를 통한 공공복리 증진에서도 한 걸음 나아갔는데, 많은 이들이 이를 한국 공업화의 핵심 특징으로 꼽는다. 예컨대 중학교 입학자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급속하게 늘어나 1980년대에 와서는 250만 명에 달했다. 고등학교 입학자는 1970년대 동안 59만 명에서 270만 명으로 껑충 뛰었다(Snodgrass 1998 : 172).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3)의 절대 필요한 분야로 가족계획을 포함한 상대적으로 광범위한 의료제도의 확립은 한국인의 기대 수명을 1960년의 55.3세에서 1978~1979년 65.9세로 극적으로 연장하는 데 이바지했다(김태헌 1995 : 533)" (본문 351P)


그럼에도 남는 의문들

경제발전에 따른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점증적 요구에 더해 핵무기 개발로 상징되는 자주국방 노선으로 인한 미국과의 심각한 갈등은 결국 박정희 체제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는 더 부자유스러워졌고 경제적으로는 더 부유해졌다.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유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는가? 김형아 교수는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듯하다.

유신체제를 못 견뎌 이 땅을 떠난 김 교수가 국내외 미공개 문서와 광범위한 인터뷰를 기초로 집필한 이 책은 그래서 더 많은 믿음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의문점들은 여전히 남는다.

첫째, 당시 중화학공업화가 옳은 경제발전 전략이었느냐는 점이다. 과잉중복 투자라는 비판을 전적으로 수긍할 수는 없지만 중화학공업화가 옳은 경제발전 전략이었는지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필요할 것이다.

둘째, 설령 당시 중화학공업화가 옳은 경제발전 전략이었다고 해도 재벌을 중심으로 이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셋째, 유신이라는 폭압적이고 전제적인 통치체제가 아니고서는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할 수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중화학공업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박정희가 국민을 상대로 동의나 설득을 구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할 수는 없었던 걸까?

박정희가 사망한 지 30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 박정희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박정희가 남긴 구조적, 정신적 유산이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와 현실 정치의 셈법을 벗어나 박정희의 공(功)과 과(過)를 엄밀히 평가하고 박정희식 발전모델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일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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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 자주파 김창현 vs 평등파 김형탁 대담

 

 

민노당 자주파 김창현 vs 평등파 김형탁 대담


 
[서울신문]민주노동당 분당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창당 이후 계속돼 온 노선갈등은 임계점에 다다랐다. 논란의 핵심은 소위 ‘종북(從北)주의’다. 한쪽은 “북한을 추종한 다수파가 당을 북의 위성정당으로 전락시켰다.”고 하고 다른 쪽은 “비상식적인 낙인찍기를 중단하라.”고 맞받는다. 접점이 없다. 지난 13일 심상정·노회찬 의원은 민노당 탈당·진보신당 창당에 합의했다. 실질적 창당 작업 시작이다. 관망하던 평등파 당원들도 줄줄이 탈당을 결행했다.

자주파는 분당을 막기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천영세 집행부는 “분당을 막아달라. 당이 함께 죽는 길로 치닫고 있다.”고 호소했다. 민주노총·전농·전여농·한청 등 자주파를 지지하는 4개 단체도 민노당 사수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제 분당은 시기의 문제만 남은 분위기다. 한 평등파 당원은 “총선 전이냐 후냐의 문제 외에 다른 걸림돌은 없지 않으냐.”고 했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18대 총선 맞대결 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진보진영 재편의 갈림길에서 민노당 김창현 전 사무총장과 새진보정당모임 김형탁 대변인이 대담을 통해 격론을 벌였다. 둘은 각각 자주파와 평등파의 핵심인물로 꼽힌다. 직접 만나기를 부담스러워한 둘은 서면으로 대담을 진행했다.

▶분당사태로 진보진영의 입지가 좁아졌다는 분석도 있다. 진보진영의 진로에 대해 말해달라.

-김창현 전 사무총장 새로운 진보운동을 추진하는 분들이 종북주의 등 비상식적 주장을 들고 나왔다. 토론과 논쟁은 발전과 단결로 연결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논쟁은 분열을 위한 명분쌓기다. 진보의 지평이 넓어지기보다 도리어 입지를 좁혀버렸다.

-김형탁 대변인 민노당은 지난 대선 참패로 국민들에게 이미 심판을 받았다. 사표심리가 없었던 선거였는데도 참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후보 선정과 대선 전략이 정파적 이해에 따라 결정됐기 때문이다. 둘째,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정당이 아니라 운동권 정당·친북당·데모당·민주노총당이라는 부정적 인식 때문이다. 진보정당은 이제 새롭게 시작돼야만 한다.

-김창현 민노당에 대한 비판과 혁신안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대선 패배 이후 당의 고질적 문제가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국민들에게 냉정한 평가를 받게 됐는지 논쟁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토론의 성과는 진보정당의 발전과 단결로 귀결될 때 의미가 있다는 점도 명심했어야 한다.

-김형탁 자주파는 심상정 비대위의 혁신안을 거부했다. 대선도 실망스러운 결과일 뿐이라고 했다. 당 운영에 문제가 있었다는 평가도 거부한다. 민노당은 더 이상 진보정당이 아니다. 민노당은 이제 자주파의 서클에 불과하다. 희망이 없다.

▶종북주의는 존재하나. 존재한다면 그 폐해는 무엇인가.

-김창현 친북이라는 용어는 들어 봤지만 종북이라는 단어는 이번 논쟁과정에서 처음 들어 봤다. 자주파에게 이런 식으로 딱지 붙이는 것은 함께하지 않겠다는 적대감의 표현일 뿐이다.

-김형탁 당 간부들의 신상·성향 분석 자료를 북에 넘겼는데도 감싸고 도는 게 말이 되나. 한반도에서 핵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해 오다가 북한이 핵무기를 만드니 자위적 핵무기는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이해될 수 있나.

-김창현 민노당은 국가보안법의 적용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 일심회 관계자들은 피해자로 인정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공소장과 판결문만으로 당원정보를 유출했다는 점을 인정할 수는 없다. 북 핵실험 당시 지도부 입장은 이런 상황을 만든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 대한 비판이었다.

분당의 다른 이유인 패권주의에 대해 말해달라.

-김형탁 정파간 경쟁은 당연하다. 그러나 숫자로 다른 입장을 눌러버리면 희망이 없다. 자주파가 다수를 차지한 민노당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정당이 되었다.

-김창현 다수파의 일원으로서 반성한다. 소수를 배려하는 측면이 부족했다. 지금이 존중하고 소통하는 시스템을 만들 기회다.

총선이 임박했다. 총선 전략은.

-김형탁 새 진보정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줄 것이다. 또 이번 총선도 중요하지만 총선용 정당을 만들 생각은 없다. 본격적인 내용을 채우는 작업은 총선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민노당과 정책연대도 가능하다.

-김창현 실체와 근거가 없는 종북 논란을 제외하면 민노당과 새 진보정당은 차별점이 없다. 각각 깃발 들고 별 차이 없는 구호를 외치면 공멸이다. 민노당으로 힘을 모아 총선에 임해야 살 수 있다.

▶평등파·자주파 모두 대중과 동떨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김형탁 인정한다. 그래서 이번 대선에서 심판 받은 거다. 민노당의 갈등이 심해진 건 자주파가 대거 입당하면서부터다.

-김창현 국민은 반성해야 할 시점에 소모적인 이념 논쟁을 하는 모습을 싫어한다. 자주파의 ‘평화통일’과 평등파의 ‘민중의 삶 보호’ 모두 중요하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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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몽준 &quot;국회 증원 반대&quot;, 왜?

중앙>·정몽준 "국회 증원 반대", 왜?
  '제 머리 깎기'인가, '의회 통제하기'인가
 
  2008-02-14 오후 5:38:40
 
   
 
 
  18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또 다시 국회 증원 논란이 불붙었다. 국회 선거구획정위원회가 13일 현행 243곳인 지역구를 적게는 2석에서 많게는 4곳까지 늘려야 한다는 안을 임채정 국회의장에게 제출하기로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지역구의 증가를 그대로 반영할 경우 현행 299명인 국회의원 정수는 300명대에 접어들게 되지만 한나라당과 보수언론들이 거세게 반대하고 있다. 국회의 비효율 등을 이유로 비례대표 정원을 줄여서라도 총원을 299명에 묶어둬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참에 의원수를 현실화해 국회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과부하를 해소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중앙> "비례대표 줄여서라도 299명 유지해야"
  
  한나라당 정몽준 최고위원은 14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국회가 선거구획정위원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국회의원 숫자를 299명에서 301명으로 늘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 최고위원은 또 "우리가 작은 정부를 운운하면서 국회는 힘이 있다고 해서, 또 자기 밥그릇이라고 해서 299명에서 301명이 뭐 대수냐고 한다면 그 역시 국민을 너무 쉽게 보고 하는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최고위원회의 후 나경원 대변인은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을 모두 합쳐서 299명이라는 국회의원 정수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자는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날 자 <중앙일보> 역시 '국회의원 수 증원 말라'는 제하의 사설을 통해 국회의원 증원 논의를 "국회의 역주행"이라고 규정했다. 신문은 "한국 국회는 사회의 다른 분야에 비해 매우 후진적"이라며 "지역구를 늘려야 한다면 비례대표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기적으로는 인구가 줄어드는 농촌의 지역구를 줄이는 방안도 생각해 봄직하다"고도 했다.
  
  "국회의원 줄어들면 '기득권층'이 좋다"
  
▲ 눈보라 속 국회 의사당 전경.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증원 논란이 된서리를 맞고 있다. ⓒ뉴시스

  한나라당의 결정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조직의 몸집을 스스로 제한했다는 점에서 '용기 있는 결단'으로 미화되기 쉽다. 정 최고위원의 주장은 국회의 예산낭비와 의원들의 세비 책정에 대한 비판론이 높은 여론을 적절하게 반영한 소신 어린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중앙일보>도 언뜻 권력기관 견제란 언론의 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 그룹에서는 "'국회의원 증원은 나쁘다'는 여론 자체가 동원된 이념"이란 지적도 적지 않다.
  
  "국회 증원에 대한 비판은 국민의 진정한 여론으로 보기 어렵다. 국회는 인민대표 기관이니 대표의 수가 많을수록 국민에게 이롭다고 보는 것이 정상 아닌가. 기득권 세력이 개혁에 반대하기 위해, 혹은 민주주의를 공격하기 위한 다른 방법으로 '일은 안 하는 국회의원들이 숫자만 늘린다'고 비판을 한 것을 언론이 확대 재생산하는 식이다." <박상훈 박사 (정치학.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박 박사는 의석수 논란이 있을 때마다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으로 기업을 꼽았다. 이는 한나라당에서도 재벌 출신인 정몽준 최고위원이, 또 보수언론 가운데에도 기업의 견해를 충실히 반영하는 <중앙일보>가 증원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과도 맥락이 맞아 떨어진다.
  
  "전경련 정치개혁보고서나 중소기업 정치개혁보고서 등 기업의 이익을 반영한 정치개혁보고서에서는 예외 없이 '국회 축소'를 주장한다. 대기업 혹은 기득권 세력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서 국회는 작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결국 의원수가 감축될 경우 그 피해는 일반 대중의 몫이다."
  
  1948년 200석으로 시작한 제헌국회 이후 60년 간 행정부를 비롯한 사회 전반이 급속도로 팽창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원 수는 99명밖에 늘어나지 않은 상황이 오히려 국회의 비효율을 자초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14대 이후 발의되는 법안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음을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당장 17대 국회만 해도 16대와 비교했을 때 국회에 접수된 법률안이 3배가 넘는다. 회기 내에 처리하지 못해 자동 폐기된 법안 수도 16대 대비 10% 이상 늘어났다. 국회에서 해치워야 할 일의 양이 299명이 해낼 수 있는 최대치를 넘어선 지가 오래란 얘기다." <서복경 박사(정치학. 전 국회입법연구원)>
  
  서 박사는 "유권자가 전문화된 의회를 바란다면 인원수 현실화에도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며 "사회적 갈등은 폭증하는 상황에서 조정역할을 맡은 의원수를 묶어 두는 것이야말로 의회의 제 기능을 발목 잡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역구 축소'가 진정한 용기
  
  하지만 '국회 증원'을 주장하는 전문가들마저 선거구획정원회가 제안하고 대통합민주신당이 선호하고 있는 '지역구 2~4석 증가'에는 비판적이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제 밥그릇'을 버리지 못해 의석수를 살금살금 늘려온 관행이 '국회 증원=밥그릇 챙기기'란 여론의 부정적 인식을 만들어 결국 의석수 현실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서 박사는 한나라당에서 '비례대표를 줄여서라도 의원정수를 맞추자'고 주장하는 데 대해 "선택가능한 안 중 가장 최악"이라고 비판했다.
  
  서 박사는 "지역구 의원들이 지역 민원 챙기기에 치중할 시간에 비례대표들은 비교적 성실한 의정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비례대표가 하는 일이 없다'는 세간의 인식 역시 왜곡된 것"이라며 "의회의 전문성 강화라는 측면에서도 비례대표는 증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박사 역시 "비례대표를 대폭 증원하는 대신 지역구를 광역화해 지역구별 인구편차를 줄이는 게 현실적 해법"이라며 "의회가 지역구를 줄일 수 있을 때 진짜 '제 머리 깎기'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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