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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분한 똥별과 전과자 집단인 전 국방장관 할압지들께

추저분한 이력이 일목요연하게 아주 잘 정리되었다.

 

 

지저분한 똥별과 전과자 집단인 전 국방장관 할압지들께
나라를 기둥을 갉아먹었던 님들이시여!
입력 :2006-08-12 10:10:00   고은광순(한의사)
전 국방장관 할압지들께

2009~2012년 사이에 어느 때라도 전시작전권을 환수해도 상관없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에 전직 국방장관 할압지들이 모이셨네요. 어이구... 조중동 신문마다 님들의 비장한 모습들이 크게 실렸더먼요.

17명이 노무현 대통령의 견해에 반대하는 성명에 서명을 했고, 모임에는 세 명을 빼고 14명의 전직 장관과 장군들이 참석하셨다고요. 그런데 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대서특필한 조중동의 호들갑과는 달리 누리꾼들은 님들의 명단을 보고 전과자 명단이라거나 지저분한 똥별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있군요. 그게 정말인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장관들]

아니, 폭압적 군사독재정권인 박정희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했던 김성은, 정래혁, 유재흥, 서종철, 노재현 할아버지들은 옷 벗은 지 30년~4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살아계셨군요.

김성은 할아버지는 11일 서울역 광장의 규탄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이미 적화됐지만 주한미군이 있기 때문에 적화통일이 안 되는 것“이라고 하셨네요. 어련하시겠어요. 40여 년 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를 따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공’을 외치며 ‘초전박살, 때려잡자 공산당’을 군부대 담벼락마다 써 놓게 하셨던 분이니 빨간색만 봐도 경기가 날 것이며 ‘박살’이외의 방법은 생각하실 수가 없겠지요.

에그머니나. 일본육사 58기 출신 정래혁 할아버지는 부정축재자로 몰리자 ‘84년, 32억을 자진 헌납하고 은퇴했던 분이라고요. 세상에, 얼마나 쌓아 두셨길래 32억을 선선히 토해놓을 수 있나요? 그 무시무시한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월급 말고 챙길 수 있는 돈이 그렇게도 많으셨어요?

유재흥 할아버지는 1948년에 시작된 제주도의 4·3 민중봉기를 미군정과 함께 확실하게 진압하셨더군요. 대령이었던 당신의 부대는 1949년 2345명의 '유격대'를 살해 혹은 부상시켰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는데 미군이 파악하고 있던 숫자보다도 몇 배나 많은 ‘유격대’를 학살한 것이었습니다. 4·3 민중봉기는 제주도민이 조국의 완전한 해방을 촉구하는 3·1독립운동기념대회를 여는 동안 미군정이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일어나게 된 것 아니었습니까?

서종철 할아버지는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하겠다고 ‘72년 유신헌법을 만들고, ’74년 긴급조치를 발표하는 등 군사독재가 극악스러워질 때 그의 충복이 되셨군요. 최근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진 인혁당 사건의 수감자들이 1975년 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자 전무후무하게도 그 즉시 사형집행명령서에 서명을 해 박정희의 충복노릇을 충실히 하셨더군요.

노재현 할아버지는 박정희 사망 후 일어났던 12·12 반란을 진압하지 않으시고 육군본부 벙커로 달아났다가 나중에 전두환에게 체포된 후 국민에게 총을 쏘아댔던 전두환에게 협조하셨다고요.

[전두환 시대의 장관들]

국민에게 총칼을 휘두르고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의 각료였던 윤성민 할아버지는 육군 1군사령관이었을 당시 광주민주화운동을 외부 불순세력의 치밀한 배후조종을 받아 유언비어로 선동당한 광주시민이 일으킨 것이라 발표한 바 있고, ‘82년 국방장관으로 재임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문제 사병(학생운동출신을 뜻함)은 전방에 근무하도록 유도하라”고 지시하는 등 그 악명 높은 ‘녹화사업’의 주역이셨다고요?

이기백 할아버지. 1986년, 전두환에 장단을 맞춰주시느라 “ 북이 최대 200억톤의 금강산 댐 물을 방류하는 수공(水攻)작전을 감행하면 핵무기 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마이크 앞에서 국민들을 향해 설레발을 치셨지요. 국회의사당은 지붕만 물 위에 간신히 나오게 될 거라며 조·중·동도 함께 설레발을 치고... 그래서 당신들이 연출한 희대의 사기극에 속아 순진한 국민들은 716억을 성금으로 냈고, 당신들은 국민의 혈세 1294억을 합하여 평화의 댐이라는 쓸모도 없는 괴물을 만들다 내박쳐 두었습니다. 세상에... 2000억을 쓰레기통에 처박다니요.

[노태우 시대의 장관들]

오자복 할아버지는 국가보안법사수국민대회, 대한민국사수대회, 북한해방대회, 자유와 민주주의 사수를 위한 시국선언 등에서 목청을 높이시지만 당신의 손자들은 한국 국민이기를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받았다면서요.

이상훈 할아버지는 군납과 관련해 수천만 원의 뇌물을 받아 구속되었고,
이종구 할아버지는 율곡사업과 관련해 1억 80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던 비리 공무원 아니셨나요?

최세창 할아버지는 15년 전에 미군의 전시작통권을 2000년 이내에 이양 받게 될 것이며 그렇더라도 미군은 한반도에 계속 주둔할 것이라 말하셨다면서요. 1979년 12·12 당시 3공수여단장으로 쿠데타에 병력을 동원해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기도 하셨더군요.

[김영삼 시대의 장관들]

이병태, 김동진 할아버지, 모두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의 충복이셨고,
이양호 할아버지는 무기 로비스트인 린다김에게 마음을 홀딱 빼앗겨 “96년 3월과 7월 R 호텔과 A 호텔에서 두 차례에 걸쳐 린다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고백을 하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린에게, 맨 처음 Amb. Hotel 커피숍에서 내 눈동자에 못 박힌 우아하고 세련미 있는 중년의 숙녀....〉라고 쓴 연서가 공개되면서 큰 망신을 당하셨지요.

그런데 이를 어쩌나. 린다 김에 홀딱 빠졌던 사람은 그 외에도 금진호, C 전 장관 등이 있어서 “너는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사이임이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산타 바바라 바닷가... 그 추억을 음미하며...안아보고 싶다.” 는 등의 애절한 연서를 앞 다퉈 보내는 동안 국방정책결정과정에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당신들은 국민의 혈세로 변변찮은 무기들을 비싼 값에 사들이지 않았습니까? 결국 이양호 할아버지는 대우중공업에서도 1억 50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아, 요 며칠 새 조선·중앙·동아가 기를 쓰고 심혈을 기울여 당신들이 전시작전권환수를 반대하는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고 있건만, 알고 보니 당신들의 대부분은 네티즌들의 비아냥 섞인 표현대로 지저분한 똥별이고 전과자 집단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무능하고 무력하고 부패한 당신들이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 해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니 경악스럽습니다.

상관인 독재자를 위해 언제라도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자세가 되어 있었고,
무기를 사들일 때는 국민의 혈세를 펑펑 쓰면서 뇌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자주국방을 착실히 준비하기 보다는 미국에 언제라도 빌붙을 각오를 하고 계셨던,
당신들이야말로 나라의 기둥을 갉아먹었던 범죄자들 아니십니까.

아이고. 할아버님들, 인터넷을 달구는 누리꾼들의 반응을 알게 되시면 엄청 망신스럽겠습니다. 그려. 그러게 집안에 가만히 들어앉아 바둑이나 두시면 중간이나 갈 걸...

자, 할아버님들. 그래도 기력이 남아 다른 일이 하고 싶어 좀이 쑤시거들랑 일본의 군사무장과 군비강화를 반대하고, 역사교과서의 왜곡을 반대하는 일본의 좌파들에게 위문편지라도 쓰십시오.

일본의 우파들이 난징학살사건을 부정하고, 역사교과서 왜곡에 앞장서며, 군비를 증강시키고,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명실상부한 군사대국으로 나서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일본의 좌파(당신들 표현으로 빨갱이)들은 일본의 군사무장을 금지해 놓은 평화헌법은 보물과 같은 거라며 우파들의 준동을 제지하려 안간 힘을 쓰고 있더군요.

좌파라면 살이 떨리신다구요? 그럼 린다김이나 난다김에게 연서라도 다시 끄적여 보시던가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강아지에게 애정을 쏟으며 공원산책을 즐기시면 5년은 더 사실 수가 있답니다.



외부 필자의 컬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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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인사 '정략코드'가 문제다"

노대통령 인사 '정략코드'가 문제다"
노회찬, 대통령 인사 비판 "민주노동당 논평 신중했어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노무현식 인사정책에 대한 불신이 누적됐기 때문에 문재인 전 수석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 의원은 4일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코드인사가 뭐가 문제냐'고 하는데, 말 자체는 맞는 말이지만 맥락을 봐야 한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노 의원은 "노대통령은 총선에서 떨어진 사람을 장관 자리에 앉히고, 그 사람을 다시 지방선거에 내보냈다. 김근태 의장, 정동영 전 의장도 당내 대선주자 관리라는 낮은 수준의 정략적 목적을 위해 입각시켰다."면서 "해당 업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장관 자리를 다른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했다"고 노대통령의 인사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노 의원은 "(코드인사에 대한 비판은) 무원칙하고 정략적인 인사정책에 대한 불신이 누적된 것"이라며 "이런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문 전 수석에 대한 반대 여론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노 의원은 "지금까지 (정책 코드가 아니라) 정략 코드 인사가 많았고, 이에 대한 불만이 코드인사 반대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런 점에서 어제 우리 당 대변인의 논평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은 전날 논평에서 "자신과 생각과 뜻이 맞는 사람을 인사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이자 임명권자의 권한"이라며 "법무부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코드인사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업무 적합성을 놓고 임명의 타당성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정치권의 코드인사 비판론을 비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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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이 처한 '지독한 패러독스'

노 대통령이 처한 '지독한 패러독스'
[取중眞담] 교육부총리는 6번 교체, 조선일보 기자와는 임기 함께 하나
텍스트만보기   김당(dangk) 기자   
▲ 노 대통령은 지금 청와대가 취재를 거부한 언론사의 출입기자와는 5년 '임기'를 함께 하고, 5년 임기를 함께 하겠다던 교육부총리는 최소한 6명째를 임명해야 하는 지독한 패러독스에 놓여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교육부와 환경부 그리고 경찰청 등 정부 부처들과 공동 주최해온 상을 연달아 철회당한 <조선일보>의 분위기는 사뭇 비장해 보인다.

특히 경찰청이 <조선일보>와 함께 공동 주최해온 40년 역사의 청룡봉사상에 대한 철회 방침을 통보한 1일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등 관가에서는 <조선일보>가 휴가를 간 기자들까지도 불러들이는 복귀령을 내리는 등 '전면전'을 준비중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와 관련 <조선일보> 측은 "낭설"이라고 일축했다. 다만 <조선일보>로서는 이 문제가 확대되거나, 비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선일보>는 기사와 사설말고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어떤 입장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사실 언론사가 정부와 공동으로 주최해온 시상에서 '파트너'인 정부가 손을 뗀다고 해서 언론사가 이를 '강제'할 방법은 없다. 또 <조선일보> 내부의 일부 분위기에서 감지되는 것처럼 정부가 공동 주최에서 빠진다고 해서 언론사가 당장 무슨 위기에 빠진다거나 야단법석을 떨 일도 아니다.

조선일보, "휴가 간 기자 복귀령은 낭설"

또 김대중 정부 시절의 언론사 세무조사나 참여정부 들어 추진된 신문법, 언론피해구제법 등과 비교하면 공동 주최 상 철회는 '새발의 피'다. 이 신문도 '옹졸한 정권 옹졸한 사람'이란 제목의 2일자 사설에서 저간의 '사정'을 이렇게 호소했다.

"조선일보는 이 정권 출범 이래 기사와 논평에 대한 집단적 소송을 비롯, 독자에게 신문을 배달하는 지국에 대한 지속적 감시와 사찰, 광고 수주 등 신문 제작의 전 부문에서 권력의 압박을 받아왔다. 권력의 강압이 심해질수록 독자의 성원 역시 강해졌던 게 조선일보가 지나온 3년 반 세월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 측도 권력과 언론의 관계에 비춰서는 언론 입장에서 이번 사안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는 적지 않다고 보는 것 같다. 공동 주최 철회를 '신호탄'으로 '전방위 장기전'이 펼쳐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일보>의 '계륵 대통령' 보도가 나간 날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은 <조선일보>에 전화를 걸어 "정면 대응하겠다"고 통고했고, 이어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조선일보>에 대한 취재 거부와 함께 "앞으로도 지속적 장기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대응 방침을 발표한 바 있다.

청와대에서는 '한 번 붙들면 뿌리를 뽑는' 노무현 대통령의 스타일로 볼 때 이것은 시작일 뿐이라고 예측하는 참모들이 적지 않다. <조선일보> 측도 청와대가 그 연장선 상에서 이번 일을 벌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래서 '정중동'이다.

▲ 서울 태평로 코리아나호텔 뒷편에 있는 조선일보 사옥
ⓒ 오마이뉴스 권우성

'계륵 대통령'과 '약탈정부'

이번 사건은 '김병준 죽이기'의 와중에 나온 '계륵 대통령' 칼럼이 사단이 되었지만, 누적된 감정이 분출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감정적 대응'으로 비치는 청와대의 '즉자적 반응'은 이번 기회에 다잡지 않으면 임기의 마지막 1년 반을 '식물인간'으로 지낼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을 반영한 것이다.

<조선일보>의 '계륵 대통령'과 <동아일보>의 '약탈정부' 기사에 대한 청와대의 1차 선전포고는 조선·동아에 대한 대통령비서실의 취재협조 거부로 나타났다.

<조선일보>의 청와대 출입기자는 노 대통령을 후보 시절부터 마크한 청와대 출입기자 중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기자이다. 그런데 이 기자는 청와대 출입기자 중에서 유일하게 노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 대통령은 2003년 2월 국민들 앞에 참여정부 조각명단을 발표하면서 "저와 임기를 함께 할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임기의 3년 반이 지난 오늘, 김병준 부총리의 자진 사퇴로 자신과 임기를 함께 할 것이라고 공언했던 교육부 장관마저 6번째 장관을 골라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오늘 사퇴한 김 부총리는 참여정부 들어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에 이어 두 번째 최단명 장관으로 기록됐다. 다른 부처도 아닌 교육부총리에서만 최단명 1, 2위를 기록한 셈이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김병준 구하기'의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게 되었다.

노 대통령은 지금 청와대가 취재를 거부한 언론사의 출입기자와는 5년 '임기'를 함께 하고, 5년 임기를 함께 하겠다던 교육부총리는 최소한 6명째를 임명해야 하는 지독한 패러독스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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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는 미녀만 욕망 한다?

에로스는 미녀만 욕망 한다?
[문화 속 욕망읽기⑧] 근원적인 시선(視線)을 찾아서
텍스트만보기   조영해(lacan66) 기자   
▲ <화양연화>, 어긋난 에로스는 인간을 절망과 고통에 빠지게 한다.
ⓒ 블록 2 픽쳐스
도대체 에로스가 무엇이기에 인간을 눈멀게 하고, 때로는 벼랑 끝으로, 때로는 스토커라는 타자에 대한 테러(?)로 나타나는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왜, 이토록 인간실존을 절망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반문들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란 자신의 반려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사랑에 울고, 사랑에 아파하고. 사랑에 목숨 거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한탄이 나올만하다.

그래서 떠나려는 것이다. 어디로? 사랑의 기원을 찾으러 말이다. 병의 원인을 알아야 무슨 처방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은 왜 사랑을 하게 되었으며 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지, 그리고 그 누군가를 부단히 소유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 근원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떠날 수는 없는 일. 여기서 잠시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혜안을 빌리자면, 신화가 인간에게 사물의 기원을 알려주고 있다고 하니 그의 말에 따라 먼저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남아메리카 부족의 창조신화에 나타난 '섹스의 기원'

아주 멀고 먼 남아메리카 테네테하라 부족의 창조신화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창조신이 최초의 남녀 인간을 만들었는데, 남자는 동정(童貞)이라서 항상 성기가 발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성기가 발기되어 있으니 얼마나 불편(?) 했겠는가?

그래서 그것을 죽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초의 그녀가 물의 정령에서 성기를 죽이는 비법을 배웠단다. 그리곤 그 난처해하는 남성의 성기를 죽였단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항상 난처했던 것을 죽여주었으니.

그런데 창조신은 그게 보기에 안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노발대발하면서 벌을 내렸단다. 앞으로 성교를 통해서 성기를 죽일 수는 있지만, 그래서 아이를 잉태하게 되겠지만 본인은 죽을 것이라는 거다.

이게 섹스의 기원이란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이 절묘한 관계, 어딘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다름 아닌 바로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열심히 설교했던 프로이드에게까지 이 얘기가 흘러 들어간 모양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발기돼 난처한 성기를 죽이려고 여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게 사랑이 되었다는 건데, 굳이 오늘의 현실을 들먹이지 않아도 너무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 보통 설득력이 있는 얘기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남성의 발기된 성기만을 죽이려고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 삭막하고 동물적인 것인 같지 않은가? 그래도 명색이 만물의 영장이고, 생각하는 동물인데 그래서 하나 더 찾아보았다.

제우스가 신에 도전한 인간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 플라톤
ⓒ 문학과지성사
이번엔 플라톤의 <향연>으로 들어갔다. 이 책에서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사람이 한 주제를 놓고 심포지엄의 형식을 빌려서 논하고 있다. 그들 중 아리스토파네스가 사랑의 기원을 논하면서 신화 속의 얘기를 끌어오는데 그의 얘기는 이렇다.

최초의 인간은 성(性)이 세 종류였는데 <남자+남자>, 그리고 <여자+여자>와 마지막으로 <남자+여자>의 양성으로 이루어졌다는 거다. 좀 더 설명을 하면 팔이 네 개, 다리가 네 개, 머리는 하나에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얼굴이 둘이었단다.

그런데 이 최초의 인간들이 작당을 해서 감히 신에게 도전을 했고 결과는 참혹한 패배였다. 그 벌로 제우스가 인간을 반으로 쪼개버렸다는 거다. 그런데 허걱! 이렇게 반으로 나누어진 인간들이 하나 둘씩 죽어 가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란다. 그래서 제우스는 고민 끝에 일정기간 동안만 그 반쪽을 만나게 허락을 했는데 그게 바로 에로스와 섹스의 기원이었단다. 그나마 이 얘기가 앞서의 얘기보다 좀 더 인간적인 것 같지 않은가?

거기다가 보너스로 동성애에 대한 의문도 말끔히 해결해 주고 있으니 금상첨화다. 동성끼리 붙어 있었던 인간에게 잃어버린 반쪽은 같은 동성이니 동성에 대한 사랑의 기원 또한 풀리지 않는가.

그래서 인간은 그 반쪽에 필(?)이 꽂히면 반가움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진해서 온 몸을 불태우는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애초에 반쪽이 아닌 것 같으면 포기하면 될 터. 그렇게 하면 서로의 사랑의 주파수가 어긋나서 이별과 배신의 고통도 당하지 않을 것인데 왜, 미련을 못 버리고 끝을 보려는 것일까?

인간의 욕망은 무엇인가를 남기려는 것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이<향연>으로 들어가야 될 것 같다. 이번에는 소크라테스가 사랑에 대해서 논할 차례인데 그는 자신의 얘기보다는 '디오티마'라는 여사제의 사랑에 대한 혜안을 끌어 와서 논한다. 그녀의 얘기는 이렇다.

인간이 에로스를 추구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행복을 가져다주는 대상을 소유하려는 것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에로스가 욕망 하는 대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아름다움'을 욕망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욕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한 반쪽을 찾는 게 에로스가 아니라 '좋은 것'을 욕망 하는 게 진짜 에로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린 그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그토록 살벌한 경쟁을, 죽어도 미련을 못 버리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에로스에는 육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대한 에로스도 있는데 이 둘은 모두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영원히? 어떻게? 그래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남기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육적으로는 후손을 남기는 일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위대한 지혜를 남기는 일이든 그 무엇이든, 무엇인가를 생산(잉태)하려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바로 이 생산을 통해서 인간은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했다는 만족을 얻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며 그로 인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에로스에 대한 정의이다. 아니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소와 수간한 파시바 왕비... 성욕이 주체가 된 인간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애욕에 눈이 먼 것일까? 어긋난 에로스가 죽음을 부른다.
ⓒ 동아수출공사
그렇다면, 에로스가 '행복'하기 위해서 '좋은 것'을 욕망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떤 대상에 지나칠 정도로 일방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좋은 것'도 아니면, 그 '좋은 것'을 낳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것을 '행복', 또는 '에로스'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보자면 외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에로스는 '좋은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발기된 성기만을 죽이기 위해서 에로스를 추구하는 것 또한 '행복'을 주는 가져다주는 에로스는 아닐 것 같다.

그 좋은 예가 바로 포세이돈의 저주로 수소를 사랑하게 된 파시파 왕비의 얘기일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애욕을 참지 못하고 암소로 위장(?)해서 그 수소와 수간(獸姦)을 한다. 그 결과 그녀가 낳은 것은 영원히 소유하고픈 '좋은 것'이 아닌, 무시무시한 반수반인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였다.

물론, 포세이돈의 저주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선이 문제였다. 그녀에게 아름다움은 '좋은 것'을 남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욕정을 한 순간이라도 풀어주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소유하고자 한 그 욕망에 있었다.

그러니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성욕이 주체가 되고, 인간은 대상이 되니 수소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게 되는 것이다.

또 있다. 그러니까 기원전 4세기경쯤 그리스 아테네에 아프로디테(고대 그리스의 미의 여신)신상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는 '프리네'라는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름다움에는 항상 고통과 질투가 따르는 법.

그녀에게 잠자리를 요구한 고관대작들 중 거절당한 맛이 간 X맨이 홧김에서인지, 암튼 그녀를 신성모독 죄로 고발을 한 것이다. 당시 신성 모독죄는 사형이었다고 하니 애욕을 거절한 대가치고는 너무 혹독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녀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소식을 전해들은 전 애인(?) '히페레이데스'가 그녀를 구명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한 배심원들 앞에서 '프리네'의 알몸을 공개한다. 그리고 그는 배심원에게 말한다. "신상(神像)에 자기의 형상을 빌려줄 만큼 아름다운 이 여인을 꼭 죽여야 하는가?"

▲ 장 레옹 제롬의 <배심원 앞의 프리네>1861. 에르미타주 미술관, 러시아
ⓒ 에르미타주 미술관
진정한 아름다움은 '숭고함'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의 벗은 알몸을 본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판결을 번복한 것이다. 판결문은 이랬단다. "저 아름다움은 신의 의지로 받아들여야만 할 정도로 완벽하다. 따라서 그녀 앞에선 사람이 만들어낸 법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죄를 선고한다."

외적 아름다움의 승리인가? 아니면, 배심원들의 일그러진 아름다움에 대한 음흉한 욕망의 승리인가? 신성하고 공정해야 할 판결마저도 번복하게 만든 배심원들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은 분명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파시파 왕비의 눈에 비친 수소와 다를 바 없는 애욕에 눈먼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들이 욕망 하는 일그러진 에로스의 대상이자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애욕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에로스의 대상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인가? 그 질문에 칸트가 명쾌한 답을 주고 있다. 그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숭고함'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숭고함'? 그것은 질리거나 지루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즐길 수 있고, 또 도덕적으로 고무되기도 하는 그런 감정이다. 그렇다고 종교적 의미의 경건한 감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숭고함에는 공포도, 전율도, 화려함도, 고상함도, 웅장함도, 떨림도, 모두 포함하는 그런 감정이다. 만약, 에로스의 대상에서 이런 '숭고함'의 감정을 느꼈다면 그것은 분명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애욕에 눈먼 에로스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숭고함'의 감정이 바로 우리가 찾는, 근원적인 본래의 우리가 욕망 해야 할 '좋은 것'에 대한 시선이 아닐까?
2006-07-28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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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목에 진주목걸이

돼지목에 진주목걸이
     글쓴이 : 巨志 (vpsxkrhs) 조회 : 3070  점수 : 306  날짜 : 2006년7월26일 10시08분 
   
 

이제 노무현대통령의 퇴임도 1년 남짓 남았다.


말 많고 탈도 많았던 고졸출신의 대통령을 바라보며 국민들의 편 가르기 또한 가관의 정점으로 치달았던 4년여 기간이었던 거 같다.


원칙과 상식의 기치 아래 출범한 참여정부는 초기부터 탄핵의 돌풍에 휘말리더니, 무능한 대통령으로 낙인찍고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저 오만한 한나라당부터 그나마 남은 지역 확보하여 다시 일어서보려는 민주당, 그리고 그들의 장단에 부화뇌동하는 국민들까지 누구하나 대통령의 의지에 힘을 실어준 적이 있었던가싶다.


차떼기에 발목잡기에 협박에 온갖 지저분한 성추행에 별 일이 많아도 요지부동인 한나라당인 것을 보면, 국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난 노무현 대통령이 강압적으로 국정운영을 해서 국민들에게 엔돌핀이 팍팍 돌게 하는 정치를 펼쳐 나갔으면, 지금 같은 상황까진 안 왔을 것 같은 솔직한 심정이다.


사람들 셋만 모이면 정치얘기로 편을 가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역사는 지나온 역사를 통해 과거를 공부하고,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창출해 나가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거쳐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거치기까지 국민들은 각 정권을 어떻게 평가하는 것일까?


왜 지역 편 가르기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국민들은 진실을 외면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들이 난 노무현정권의 실패라고 단정 짓는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정권의 실패를 거울삼아 국민들에게 좀 더 혹독하게 했어야 하고, 한나라당은 제1야당일 뿐이니 무시하고 독단적인 국정운영을 하였어야 했다. 그래서 써글 한나라당을 코너까지 몰아붙여 숨통을 끊어야지 국민들은 광분하고 지지율은 올라갔을 듯싶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더러운 기득권세력들을 검찰에게 무소불위의 힘을 부여하여 정치공황 상태로까지 몰아붙였으면 한나라당의 저 더러운 작태도, 국민들의 질 떨어진 의식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니…. 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기분 좋은 일 아니던가.


이승만처럼 박정희처럼 전두환처럼 강하게 국민들을, 야당을 밀어붙였을 것이다. 때론 한나라당과 거침없는 싸움도 하고, 지역주의에 기대기도 하고….


나라면 그랬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칙과 상식이 실종된 나라에선 민주주의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일 뿐이므로….


비오는 수요일 기분 좋은 상상을 해봤다…. ㅎㅎ


                                                                                                ⓒ 巨志



끔찍한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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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의 건설경기부양론은 '망국론'이다

동아>의 건설경기부양론은 '망국론'이다
[주장] 도대체 누굴 위한 투기 부추기인가
텍스트만보기   토지정의시민연대(justland)   
▲ 공사가 한창인 아파트 건설 현장.
ⓒ 오마이뉴스 남소연
지난 7월 22일과 26일 <동아일보>는 '땡처리 아파트', '건설경기 침체가 성장발목 잡았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두 기사가 말하는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부의 부동산 (금융과 재건축)규제정책과 세금정책이 지방의 미분양 아파트 폭증을 초래했고(7월 22일), 건설경기 침체를 낳았으며 그것이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7월 26일)이다.

이런 논조의 기사는 <중앙일보>와 <조선일보>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 기사들이 궁극적으로 주장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금융규제 풀어서 담보대출 자율화 해라', '과거처럼 재건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라', 그리고 '보유세와 양도세를 내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지방의 아파트도 제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불티나게 팔리게 될 것이고, 건설경기도 살아나 고용도 증가하고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결국 부동산 불로소득 장려를 통한 '건설경기부양론'이다. 이 기사의 논리적 허구성과 위험성, 그리고 극복 대안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땡처리 아파트' 발생이 규제정책 탓?

<동아일보>는 7월 22일 기사에서 의류 유통과정에나 있을 법한 '땡처리'가 분양시장에 나타날 정도로 지방에는 심각한 미분양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그 원인을 정부의 각종 금융규제 및 부동산 관련 과세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기사의 어디에서도 미분양 아파트 적체와 각종 금융규제 및 부동산 관련 세제 사이의 인과관계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아일보>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에 미분양 아파트가 증가하고 있는 원인은, '부동산 불패신화'를 낙관해 수요예측에 오류를 범한 건설업체들의 과도한 분양 추진에서 찾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동아일보>가 그렇게 중요시 하는 시장경제론에 따른다면, 공급과잉은 시장에 참여한 건설업체가 수요예측을 잘못한 것이며 그에 따른 가격하락도 공급자가 감수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경제 주체의 하나인 기업이 위험에 처해 있고 이에 따른 파급효과가 심각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면 국가적 논의를 통해 다양한 원조를 신중히 고려해 볼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이러한 개별 업체들의 수요예측 오류까지도 정부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것이다.

지방에 아파트가 과잉공급된 원인은, 건설사들이 불로소득을 노리는 투기적 가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공급을 무리하게 확대한 데 있다. 그런데 정부의 각종 정책으로 불로소득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자 매수세가 위축돼 미분양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원리에 따르면 가격이 떨어져야 공급과잉이 해소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투기적 가수요자가 아닌 실수요자 중심으로 주택시장이 재편될 수 있다. 모쪼록 <동아일보>는 시장경제 원리에 충실하길 바란다.

보유세와 양도세 강화가 '세금폭탄'?

보유세와 양도세 강화가 '세금폭탄'이라는 지적도, 그동안 어마어마한 토지불로소득이 발생해 그 폐해가 극심한 한국적 현실을 고려할 때 대단히 악의적이다.

8·31 대책의 입법화에 따른 종부세 대상자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2009년에 가서야 0.89%에 이르고 전체 부동산 소유자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2017년에 가서야 0.61%에 달해, 선진국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선진국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되는 것을 '세금폭탄'이라고 한다면 선진국의 보유세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보유세는 투기꾼을 지목해 그들에게 부과하는 징벌적 세금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동산 과다 보유를 억제하기 위해 누진세율구조를 채택했기 때문에 보유세가 벌금처럼 느껴지는 것인데, 본래 부동산 보유세(특히 토지보유세)는 부동산 보유자가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는 혜택에 상응해 납부하는 대가에 불과하다. 그리고 보유세 강화가 토지불로소득을 환수해 지가를 (하향)안정화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양도소득세도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좋은 수단이다. 물론 양도소득세는 거래를 제한하는 '동결효과'가 발생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보유세 강화와 같이 실시하게 되면 동결효과는 약해지고, 더 나아가 보유세 강화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게 되면 부동산가격이 하향안정화 되기 때문에 양도차액이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결국 양도세의 존재 의의까지 상실되게 된다.

<동아일보>가 양도소득세의 동결효과를 걱정한다면 (토지)보유세의 지속적인 강화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보유세와 양도세를 내리게 되면 시장에는 또 다시 불로소득을 노리는 투기적 가수요가 창궐할 것이 불을 보듯 뻔 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실수요 대비 공급 과잉이 지금보다 더욱 심각해져 건설 경기와 경제 전반에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이것이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동아일보>는 어떻게 하는 것이 언론의 공익적 임무를 감당하는 길인지 자문해 보기 바란다.

재건축법안은 '규제정책' 아닌 '정상화 정책'

▲ 서울 송파구 잠실아파트 단지.
ⓒ 오마이뉴스 권우성
<동아일보>는 현재의 재건축법안이 규제정책이라며, 이것도 건설경기 악화의 원인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재건축법안은 엄밀하게 말하면 '재건축 정상화 조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용적율 변경과 같은 단순한 행정행위로 발생하는 개발이익(불로소득)을 최고 40~45% 정도까지 환수하겠다고 하는 정책도 옳은 방향이다.

그동안 아파트 재건축 과정에서 온갖 비리와 범죄가 저질러져 왔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막대한 불로소득을 얻기 위해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아파트를 부수고 다시 짓는 자원의 낭비를 너무나 많이 목격해왔다. 그렇다면 정부가 나서서 재건축의 절차적 투명성과 합리성을 제고해 범죄와 비리를 막고, 불로소득을 환수해 투기를 진정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와 같은 재건축법안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이다. 따라서 <동아일보>가 재건축법안이 규제라고 계속 공격하는 것은 정부더러 재건축에서 발생하는 범죄와 비리를 계속 방관하고 자원의 낭비와 투기를 장려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동아일보> 등의 일간지는 강남권에 주택이 부족하기 때문에 재건축법안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강남권에 공급이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많은 통계가 입증해주고 있다는 점만 지적하겠다.

<동아일보>는 투기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던 각종 부동산 담보대출에 대한 규제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일정부분 옳은 측면이 있다. 필요한 사람이 돈을 대출해가는 것이 시장경제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려면 불로소득에 대한 기대를 꺾을 수 있는 보유세와 양도세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산적인 부문에 투자돼야 할 금융권의 자금이 토지투기에 몰리게 되고 그것은 다시 부동산 가격을 앙등시키는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보유세와 양도세도 완화하라고 하면서 대출규제도 풀라고 하고 있다. 한 마디로 금융권의 자금이 부동산 투기에 몰리도록 놔두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토지 불로소득 환수, 건설경기 활성화의 지름길

부동산 투기를 막으면서 건설경기를 활성화하는 방안이 있다. 토지보유세를 강화시키는 동시에 건물분 보유세를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투기목적의 유휴토지나 저사용 토지가 효율적으로 이용된다. 토지가 효율적으로 이용된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건물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의 효과는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피츠버그에서 확인된 바 있다.

피츠버그에서는 1979년부터 토지분 보유세와 건물분 보유세를 분리해 전자는 높이고 후자는 낮추는 '차등세율(two-rate taxes)정책'을 추진했다. 피츠버그시는 1979년에 토지세율은 높이고 건물세율은 낮추는 방법으로 토지와 건물에 적용되는 세율의 비가 3대 1이 되도록 했고, 곧이어 (시는) 토지세율을 더욱 높여 건물세율의 거의 6배가 되도록 했다. 이 정책으로 피츠버그는 건축·건설 활동이 활발해져 경제가 살아나고 실업문제는 상당 부분 극복되었다.

토지보유세를 높이면서 건물분 보유세를 내리는 것은 토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견인하는 동시에 건물의 신축·증축·개조 등의 생산 활동을 더 장려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불로소득을 줄이면서 건설경기를 위축시키지 않는 가장 좋은 대안이다.

따라서 <동아일보>가 진정 건설경기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토지보유세는 강화하고 건물분 보유세는 내리자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동아일보>는 이런 대안은 말하고 있지 않다.

너무 많이 겪은 건설경기 부양의 폐해

앞서 언급했듯이 <동아일보>가 주장하는 것은 간단하다. 금융규제를 풀어 은행이 담보대출을 자유롭게 하게 하고, 개발이익환수율 완화와 더불어 재건축허가도 과거처럼 해주어야 하며, 투기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 보유세와 양도세 강화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건설경기가 살아나고 경제전체가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요구대로 하면 어떻게 될까? 불로소득을 환수할 수 있는 장치인 보유세·양도세·개발부담금를 내리고 금융자금이 부동산 투기에 투입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부동산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투기적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건설업이 활황을 띠어 경제가 살아난다고 마냥 좋아해야 할까? 가격이 거품처럼 계속 부풀어 오르는 동안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거품이 꺼지고 나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동아일보>는 정말 모른단 말인가?

'건설경기부양책'은 한국경제가 침체할 때마다 정부가 꺼내들었던 카드였다. 멀게는 박정희 정권 때 그랬고 가깝게는 김대중 정부 때도 역시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건설경기부양의 폐해를 너무나 많이 겪었다.

이것은 결국 일부의 부동산 부자들에게 엄청난 불로소득을 안겨주는 대신 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엄청난 고통만 주었다. 또한 건설경기부양책으로 발생한 주택과 토지가격의 앙등이 한국경제에 얼마나 큰 부담이 되어왔는지에 대해서도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리고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심화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동아일보>가 이런 정책을 또 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도대체 무슨 배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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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주장] 부동산 투기로 자본 유출 막자굽쇼?
(사)민주언론시민연합과 토지정의시민연대는 지난 7월6일 '부동산보도모니터팀'을 구성해 총 9개(경향, 국민, 동아, 서울, 세계, 조선, 중앙, 한겨레, 한국) 일간신문의 부동산 관련 보도를 모니터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부 언론들은 집값이 폭등할 때는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요구하다가 막상 부동산 대책이 나오면 '세금 폭탄' 등의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부동산 대책을 흔드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 시장경제논리를 가장한 반(反)시장경제논리로 부동산 투기를 잠재우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정책을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언론의 보도태도는 실효성 있는 부동산 정책 수립과 '집값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합니다.

이에 민언련과 토지정의시민연대는 주요 일간지들의 부동산 관련 보도를 지속적으로 분석·비판해 그 문제점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올바른 부동산 정책이 마련되고 시행될 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논평은 두 단체의 홈페이지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민언련 www.ccdm.or.kr/ 토지정의시민연대 www.landjustic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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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가 말하는 ‘한나라당이 가장 빨리 망하는 법’

제발 이 분 말씀대로 딴나라당이 따라줬으면 하는 생각이다(사실 원래 하던 그대로임).

박끄네 대권을 위해 공공연하게 자신의 대권을 포기하고 당권을 선택한 강재섭 대표는 남은 기간 편파적으로 박끄네를 밀어 박끄네가 반드시 딴나라당 대권 후보가 되기를 바란다. 명바기 시장이 나오면 색깔론으로 밀어부치고...(재섮어도 그렇게 하기를)

요번에 강재섭이 아니라 젖녀오크가 당권을 잡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이 있다.

박끄네 대권-젖녀오크 당권...... 최상의 조합이었는데...

 

 

조갑제가 말하는 ‘한나라당이 가장 빨리 망하는 법’
“30~40대의 좌편향된 정치부 기자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
입력 :2006-07-18 11:28:00   이응탁 (et-lee@dailyseop.com)기자
대표적인 보수논객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는 18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한나라당이 가장 빨리 망하는 법’이란 글을 올리며 그 방법은 “30~40대의 좌편향된 정치부 기자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조 전 대표는 이어 “이들은 기사나 논평, 또는 사설을 통해서 이렇게 주문할 것”이라며 아래 7가지 방법을 소개했다.

△‘색깔론은 구태의연한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라’ △‘개혁적 인사를 중용하라’ △‘애국행동단체를 멀리하라’ △‘북한인권운동은 표가 되지 않는다’ △‘여당과는 협조하고 민생에 주력하라’ △‘좌우를 다 잡으라’

▲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가 18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한나라당이 가장 빨리 망하는 법’란 글. 조갑제닷컴 화면 캡처  

그러나 조씨는 각각의 방법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며 결국 한나라당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대로 따라선 안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는 ‘색깔론은 구태의연하다’는 것과 관련 “이 말은 결과적으로 좌파와 투쟁하지 말고 좌파의 한나라당내 침투를 허용하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젊은이들에게 다가 가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영합하는 탈이념적 정책을 쓰라는 뜻인데 이대로 하면 정체성을 상실해 고유한 지지기반과 노장층 표를 잃게 된다”며 “인구구조의 고령화 추세로 노장층 표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한 충고”라고 지적했다.

이어 ‘개혁적 인사 중용’에 대해서도 “좌파적 시각을 가진 인사나 운동권 출신들을 등용하라는 이야기”라며 “이들은 대체로 정권과 투쟁하기보다는 내부투쟁에 능하고 분열의 전문가들”이라고 밝혔다.

또 ‘애국행동단체를 멀리하라’는 것도 “대좌파 투쟁을 하지 말고 대중적 정서와 멀어지라는 뜻”이라며 “이대로 하면 대중동원력이 없는 실내정당이 되어버린다”고 충고했다.

‘북한인권운동은 표가 되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선 “김문수 경기도 지사의 약진은 북한인권운동이 표가 된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덧붙였다.

‘여당과는 협조하고 민생에 주력하라’는 부분에서는 “이미 한나라당은 수도이전, 언론규제법, 과거사법 등 주요 쟁점 법안을 협조적으로 통과시켜주었는데 이보다 더 하라는 것은 2중대가 되란 뜻”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좌우를 다 잡으라’는 것과 관련 “기회주의적 처신은 항상 좌우로부터 협공을 당한다”고 지적했다.

조씨는 “1997년과 2002년 대선, 2004년 탄핵사태 때 한나라당은 대충 기자들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패배했다”며 “이들이 쓰는 기사에 일비일희하다가는 2007년에도 당하고 말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한나라당이 살 길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한 다음에 생각이 다른 세력을 존중하면서 그들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정치부 기자들이 밀어주던 한나라당의 이부영, 김부겸, 김원웅 등 소위 개혁파 소장파 의원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우익진영의 계속되는 ‘공세’…‘노대통령 하야’ 이어 ‘탄핵’ 이규택 ‘막말’ 파문 “아무 쓸모없는 노 대통령 하야해야”
우익단체 “노 대통령 그만두는 게 마지막 애국”…‘하야 광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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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가 선암사에서 빠져 들었을 고민거리 4가지

개인적으로 아주 쥑이는 정치 공학 기사라고 생각한다.

 

 

 

이재오가 선암사에서 빠져 들었을 고민거리 4가지
읍참마속과 토사구팽이냐,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떠날 것이냐?
입력 :2006-07-15 12:55:00   이동연 저술가· 대자보 편집위원
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전남 순천에 칩거중이다.

더 정확한 그의 기거 위치는 순천의 선암사 경내 삼전(三殿).

그는 왜 거기에 갔을까? 하한거(夏閑居)에 들어 간 것은 아닐테고 7·11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강재섭 대표에게 패해서 내려 갔다.

이재오 본인은 당 대표에 떨어져서가 아니라면서 한나라당 원내대표까지 지낸 자신을 빨갱이로 몰고 ‘색깔’을 덧칠한 행태에 화가 난 것‘이라고 한다.

이재오의 산사칩거의 본심이 무엇이든 간에 색깔로 덧칠해 버리면 어느 누구든 당 대표가 될 수 없는 당이라면, 이념의 시대를 넘어서 버린 지구촌의 현 트렌드를 따라 잡기는 어려운 정당이 아닌가.

7·11 선거의 가장 큰 후유증은 이명박 진영과 박근혜 진영의 갈등의 골이 깊어 졌다는 정도를 넘어서서 한나라당이 다시 보수 영남의 패권주의 정당으로 도로 주저 않았다는 데 있다. 7·11은 한나라당의 대선후보가 누가되든지 한나라당에게 정권은 주지 않겠다는 역풍의 빌미로 언제나 작동할 개연성을 지닌다.

7·11은 한나라당이 명실공히 영남당, 그것도 냉전으로 이득을 보아왔던 일부 인사들이 탈 냉전시대에 재기의 발판으로 삼는 당으로 고착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기존의 우려를 확인시켜 주었다.

21세기 들어 민심은 일정한 패턴을 지니기보다는 대단히 카오스적으로 움직인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열린 우리당이 미운털 박히면 덜 미운 쪽으로 표를 몰아 주는 스윙(Swing)민심의 맛을 톡톡히 보았다.

스윙민심에는 삼김(三金) 정치시대에 국민들이 보여주었던 순애보(純愛譜)는 없다.

21세기 한반도의 민심은 어제 열린우리당, 오늘 한나라당, 내일은 또 다른 당을 나비처럼 옮겨 다니며 지지와 철회를 반복한다. 이런 민심을 천심이 알아차린 듯이 전례 없던 국지성 호우가 한반도를 적시고 있다.

7·11에서 한나라당은 분명히 민심과 괴리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과거 회귀적인 모습을 계속 보인다면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쏟아져 내렸던 민심의 호우(好雨)가 내년대선에도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레드 칼라 칠하기가 통하는 한나라당 당사를 떠나 순천 선암사에 머무는 이재오 최고위원을 찾아 강재섭 대표가 내려갔다.

강재섭 대표의 지역구는 대구 서구.

모양새로는 7·11에서 색깔론 공세의 최대수혜자로 해석되는 영남 사람이 색깔론의 최대 피해자로 보이는 사람을 찾아 호남으로 갔다.

비내리는 날 강대표가 찾아온 그 시각, 이재오는 법당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일반인들 같으면 먼 곳에서 찾아 온 손님을 마중 나갈 법한데 역시 정치인이라 다르다. 누가 오건 말건 예불드리고 참선하고 있는 모습이 절묘한 타이밍을 갖춘 것 같아 약간은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배우고 싶은 마음도 들고 하여튼 혼란스럽다.

과연 이재오는 찾아온 강 대표를 등 뒤에 세우고 잠시 무슨 상념에 젖었을까? 추측컨대 한 4가지가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을 것이다

1) 박근혜로 대권을 잡을 수 있을까?

박근혜는 강재섭 대표 취임으로 분명히 당내 대권주자 경선에 더 한층 유리하다.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권 주자가 되면 정말 집권이 가능한가?

이번 7·11선거로 더한층 영남 보수의 태두 이미지를 강화하게 된 박근혜, 그만큼 멀어질 개혁과 자유주의 세력의 민심. 아직도 여자 대통령에 대한 편견이 엄존하는 장년층 이후의 세대들, 그렇게 낙관할 수 만은 없다

2) 박근혜가 정권을 잡으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직도 자신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녀가 대통령이 되면 읍참마속의 대상은 되지 않을까? 차라리 야당이 되면 정치적 탄압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지만 같은 집권당 내에서는 딱히 항거할 명분도 없이 토사구팽 당하기 쉽다.

3) 이명박과 함께 새로운 당을 만들어 박근혜를 수구 영남으로 묶어 영남표를 반분하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이명박이 제2의 이인제가 되는 것 아닌가, 아니지 과거 3김 때를 보면 툭하면 새로 정당 만들어 성공하지 않았던가. 혹 지더라도 제 거대 야당으로 남아 차기를 노리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마지막 네 번째는 그 스스로 밝혔다. ‘선암사는 어려운 고비때 마다 내게 힘주던 곳이다. 민주화 운동했던 초심으로 돌아 가겠다’

그말을 그가 전남 선암사로 내려간 본심이기를 기대한다. 차별의 상징, 호남으로 내려간 이재오는 영남당의 이미지를 더 강고하게 굳힌 한나라당에서 자신의 초심을 어떻게 펼칠지 부처의 지혜를 빌어 보라.

이재오의 정치적 입지에서 초심을 회복하려면 거의 해탈에 이르는 노력을 기울여야 될 것이다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면 온갖 번뇌와 속세의 집착을 끊어야 되는 데 그 정도의 각오를 할 수 있겠는가?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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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미국 예외주의: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

Lipset이라... 학부 시절 전공 공부하면서 본 것 같다.

아래 8가지 이유가 있는데 1번 및 4번은 내가 지적한 것과 같다. 그외 이하 글에서 본좌는 매카시즘의 영향을 든 바 있다.

http://blog.jinbo.net/sickduck/?pid=1068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나
[서평]미국 예외주의: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

미국 정치, 미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꼭 참조해야 할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S. M. 립셋이 쓴 <미국 예외주의: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 (문지영외 옮김, 후마니타스, 2006)가 그것이다.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했거나 아니면 정치학 개론이라도 수강했던 사람에게 립셋은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20대에 <농업사회주의>와 <유니언사회주의>라는 책으로 주목받은 그는 30대에 쓴 <정치적 인간>이란 책을 통해 세계 정치학계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고 정치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론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말 슈타인 로칸과 함께 쓴 논문은 정당과 사회갈등 분야의 한 패러다임을 개척한 것이기도 했다.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뤘던 2004년의 책 <민주주의의 세기>의 완성을 못보고 쓰러질 때까지(이 책은 그의 마지막 제자 래킨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가 쓰거나 편집한 100권 가까운 책 대부분은 학자로서의 그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미국의 정치학회와 사회학회 회장을 모두 역임한 유일한 사람일 정도로 그는 미국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꼽힐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학자로서의 그의 업적 때문이었다.

   
 
립셋의 평생 연구는 크게 두 주제 분야를 갖는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탐색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르크스의 논거를 적절히 활용한 1959년의 논문(“민주주의를 위한 몇 가지 사회적 조건”)이 대표적으로, 이 논문을 통해 그는 이른바 ‘근대화론’을 대표하는 정치학자가 되었다. 이 분야의 연구는 주로 제3세계 후발국가들을 대상으로 했다.

또 다른 연구 분야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 핵심은 민주주의가 왜 여러 다른 유형과 경로로 발전하게 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왜 다르고 유럽의 민주주의는 또 왜 다르며 일본과 캐나다의 민주주의는 왜 다른가를 묻는 것이다. 이 주제를 집약하는 주제가 바로 ‘미국 예외주의’이다.

사회주의 없는 민주주의의 모델, 미국

미국 민주주의의 예외성은 여러 내용을 갖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은 왜 미국만이 사회주의 없는 모델을 갖게 되었나 하는 데 있다. 따라서 미국 예외주의라고 하면 대체로 사회주의 없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로 이해되곤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립셋은 미국 예외주의를 훨씬 넓게 다루고 있다.

사회당, 노동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등 명칭은 다르더라도 진보적 이념이나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정당이 해당 국가들의 정치, 경제, 사회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유독 미국만이 매우 다른 정치체제를 발전시켜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선진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시장의 절대적 역할을 숭배하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에 부정적이며 개인의 거의 무제한적 권리에 기반을 둔 물신화된 법치주의가 지배하는 정도에 있어서도 미국은 독보적인 나라이다.

저자인 립셋도 예를 들고 있듯이, 유럽의 기준에서 보면 지극히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한 클린턴의 복지정책조차 결국 좌절될 수밖에 없는 나라이다. 대체 왜 미국은 다른 것인가? 어떻게 이런 체제가 만들어질 수 있었고 존립할 수 있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 시대부터 사회주의자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더 강한 노동운동을 가진 미국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맨 선두에 설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메이데이’가 1886년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비롯되었듯이 19세기 후반까지 미국의 노동운동은 매우 강력했다. 당시 내로라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서 미국의 사회주의로의 발전 경로에 대한 확신에 찬 언급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메이데이의 기원이 된 헤이마켓 시위를 묘사한 당시 그림
 
마르크스는 미국에서 계급의식의 징후들을 지속적으로 탐색하였으며, 엥겔스는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이 문제에 답하고자 했다. 베른슈타인은 “우리는 곧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시작되어 뿌리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 했고, 카우츠키 역시 “미국은 우리의 미래”라고 말했으며,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힌드만은 “미국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 베벨 역시 “미국은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도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고,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프랑스 대표적 사회주의자였던 라파르그 역시 “가장 선진적 산업발전 수준을 가진 미국이 역사발전의 사다리를 맨 먼저 오를 것”이라 말했다. 레닌과 트로츠키 역시 미국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적어도 미국에서 사회주의의 실패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게 된 20세기 초까지 그랬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이 빗나가면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깊은 회의가 뒤따르게 되었으며, 연구자들에게는 매우 도전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왜 사회주의가 실패했는가? 미국은 왜 예외적 경로를 발전시키게 되었나?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에 대해 알고 싶거나, 그 역사적 경험을 반추하면서 21세기 오늘 척박한 역사적·지적 풍토를 지닌 이 땅에서 새로운 진보정치와 진보정당 실현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깊고 넓은 사색을 위한 좋은 소재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나, 립셋의 설명

사회주의 없는 미국의 발전경로에는 과연 어떤 힘들이 작동하고 있었을까? 1851년 엥겔스가 강조하고 그 이후 40년간 반복적으로 지적된 조건, 즉 노동운동의 등장을 방해하는 미국의 특수한 조건은, “부르주아적 조건을 마치 자신의 멋진 이상인 양 생각하게 만드는, 이 나라의 필연적으로 급속한 그리고 빠르게 증가하게 있는 번영”(106쪽)이며, “미국적 신조로서의 (개인적) 성취와 기회 균등 및 능력주의에 대한 강조”(109-110쪽) 등이 그 배경에 작동해 왔다는 것이다. 즉 상대적 풍요로움의 효과가 부르주아 계급의 자산 증대를 넘어 노동자들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립셋은 미국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실패에 대한 기존 설명들을 차례로 검토하면서, 이를 상호배제적이지 않은 두 범주, 즉 사회적인 변수와 관련된 것과 정치체계의 내재적인 변수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가 지적하는 사회적 요인은 다음 여덟 가지이다:

① 새로운 사회로서의 미국, 즉 계급 구분에 따라 정치를 구조화하는 봉건적 전통의 계급 관계 부재(‘봉건주의 없이는 사회주의도 없다’ /No feudalism, no socialism ), ② 사회주의의 대용물로서 미국주의 그리고/또는 지배적인 공공철학으로서의 자유주의 전통, ③ 미국 프로테스탄트의 종파주의적 과거와 혁명적 가치로부터 파생된 개인주의와 반국가주의 가치에 대한 강조 ④ 생활수준, 특히 노동자 계층이 영위하는 생활수준의 꾸준한 향상이 미친 영향―좀바르트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사회주의적인 유토피아는 구운 쇠고기와 애플파이 앞에서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 ⑤ 주변화된 집단의 정치적 고립화와 낮은 투표율, ⑥ 생산성이 증가하고 교육기회가 확대됨에 따라 계층 상승의 기회가 증대, ⑦ 계급의식 형성의 방해 요인으로서 지리적 이동 성향과 안정된 공동체적 기반의 결여, ⑧ 다민족·다인종·다문화적 이주민 사회 형성에 따른 결과 등이다.

이에 덧붙여 정치적 요인으로 다음 네 가지를 지적한다: ① 거저 얻은 선물로서의 투표권―이와 관련해 레닌은 “사회주의는 선거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을 통해 성장한다”고 언급한다 ② 행정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만 부여되고 그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연합적인 양당 구도로 전개되도록 만든 헌정 및 선거체계, ③ 대체로 대중운동 그리고/또는 제3의 정당 형태로 명백하게 표출되는 만연된 불만을 흡수하거나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연합적인 야당체계의 유연성, ④ 급진적 운동에 대한 정치적 탄압 등이다.

미국 예외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19세기 말 이래로 사회주의자들을 괴롭혔던 이 수수께끼,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회의와 곤혹스러움은 ‘미국의 특이성’과 그 차이의 속성이라는 문제영역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를 인도한다. 이 영역은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한 이른바 ‘예외주의 미국’의 실체와 관련된 것이다.

‘미국 예외주의’는 그동안 두 가지 코드로 읽혀왔다. 앞서 본 사회주의 운동의 부재와 관련된 것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미국이 그 독특한 기원과 국가적 신조, 역사 발전과정, 정치 및 종교 제도로 인해 다른 서구 선진국들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관념으로서의 미국 예외주의이다.

립셋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도 이 후자의 영역이며,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 운동의 부재를 설명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립셋은 미국 예외주의를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다양한 측면을 통해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거의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덜 복지 지향적이고, 덜 국가주의적이며, 더 방임주의적이고, 더 권리지향적이고 더 애국적이며, 더 도덕주의적이고 종교적이라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그는 이러한 특성이 ‘미국적 신조’라고 불리는 미국인의 가치체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미국적 신조란 자유, 평등주의, 개인주의, 포퓰리즘, 자유방임주의 등 다섯 개념으로 압축되며, 이러한 미국인의 가치체계는 미국의 독특한 기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즉 미국은 무엇보다 “혁명적 사건으로 출발한, 그리하여 독립에 성공한 최초의 식민지, 최초의 신생국가”라는 점에서 ‘예외적’인 나라이며, 결국 미국 예외주의는 새로운 사회로서 미국이 봉건적 구조, 군주제 및 귀족주의 문화, 사회적 위계를 유산으로 물려받지 않았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 예외주의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미국적 가치는 매우 복합적이라는 진단과 함께 립셋이 그것을 ‘양날의 칼’과 같다고 거듭 강조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예외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낫다거나 우월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단지 다른 나라들과 질적으로 ‘다르게’ 발전해왔음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4부 8장 결론).

그에 따르면 미국 예외주의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동전의 양면처럼 모두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특성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미국은 최선이 되기도 하고 최악이 되기도 한다.

미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바로 이 다양한 가치관들, 최선과 최악의 공존과 갈등을 통해 오늘의 미국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립셋은 미국적 가치의 다양하고 이중적인 측면을 부정하고 오히려 국민적 ․ 국가적 합의를 강조하는 것은 갈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가령 소득불평등, 높은 범죄율, 낮은 수준의 선거참여, 모든 것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려는 강력한 경향들, 그리하여 때로 정치적 · 윤리적 소수자들에게 거의 관용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경향과 같이 오늘날 미국사회를 특징짓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개방적인 민주사회의 규범 및 행태와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7쪽)이며,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정치적 분위기와 자유로운 시장질서에 기반한 경제적 풍요는 미국적 신조를 기반으로 성취된 미국적 예외주의의 가장 밝은 면모라는 것이다.

아울러 미국 예외주의는 높은 수준의 개인적 책임감, 독립적인 진취성, 자원봉사 문화를 함양하는 반면에, 이기적인 행동과 원자론적 분열, 공동선에 대한 경시와 전통적인 형식의 공동체적 도덕에 대한 위협 역시 조장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립셋의 신보수주의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그의 이러한 이중적 접근은 그것이, “미국인의 강한 자민족 중심주의의 표현이자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도 우월하다는 노골적인 정치선전에 다름 아니”라는 비판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이다.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강조가 미국 엘리트들뿐만 아니라 보통의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미국 우월주의로 나타나 미국 패권주의와 긴밀히 연결되곤 했기 때문이다. 즉 세계 최초의 순수한 민주주의 혁명을 거쳐 탄생한 국가이자 자유세계의 수호자로서 미국은 ‘민주주의의 전파’라는 세계적 사명을 갖고 있다는 우월적 의식 등을 가진 존재로 나타났던 것이다.

   
 ▲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이와 관련해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1980년대 초 레이건 행정부 이래 미국 공화당의 대내외 정책 기조로 알려진 신보수주의에 대한 그의 진단이다. 저자는 신보수주의가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실체라는 것을 특히 강조한다.

립셋은 이른바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의 제1세대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신보수주의 지식인으로서 립셋은 급진적인 트로츠키주의자에서 반공적 자유주의자로 전향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책에는 이러한 그의 지적 편력이 잘 반영되어 있다. (네오콘의 사상적 대부라고 불리는 어빙 크리스톨도 한때는 극좌파 지식인이었다가 1960년대 베트남전 반대운동의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전향한다. 네오콘의 1세대라고할 수 있는 네이던 글래이저, 다니엘 벨 등도 모두 트로츠키주의에서 우파로 전향한 인물들이다.)

“야만인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자연의 권리이자 책임”이라고 주장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스트라우스를 사상의 기원으로 삼는 신보수주의라는 용어는, 흔히 “국내 쟁점에서는 고전 자유주의적 반국가주의를, 외교정책에서는 강경노선을 견지하는 미국 내외의 광범위한 범위의 전통적 보수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립셋은 이러한 용어 사용이 오류라고 말한다. 즉 “하이에크, 프리드만, 레이건, 대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 자유지상주의자들이지 신보수주의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 종파주의에 기반을 둔 신보수주의의 기본 입장은, 정치적인 쟁점에서 개인주의와 능력주의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경제적으로는 사회보장 및 복지정책의 확대를 지지하며, 사회․문화 분야에서 전통과 권위를 존중하고, 미국식 민주주의의 보존과 전파를 위해 외교·군사적으로는 개입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프리드만적인 자유시장경제를 계속 거부하는 것이며(297쪽), 공화당 내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구별된다는 것이 립셋의 설명이다.

신보수주의에 대한 립셋의 이러한 설명은 그 타당성 여부에 대해 따지는 것을 잠시 멈춘다면, 광적인 냉전반공주의와 개발독재의 향수에 깊게 물든 사이비 보수만 판을 칠 뿐 진정한 보수주의가 실종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인 상황에서, 보수의 실체가 여전히 모호한 것이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뉴라이트 역시도 예외일 수는 없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보수주의의 출현 배경과 의미, 그 갈등과 타협의 궤적을 미국의 역사적 맥락에서 추적하는 립셋의 시도는 우리 사회에서 보수주의의 제자리 찾기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할 것이다.

미국 중심적 사고의 문제

한편 립셋의 글 내용 가운데는 헌팅턴과 같이 노골적으로 미국을 편드는 식의 오만함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헌팅턴에 따르면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은 민주화의 중요한 촉진자였는데, 민주화에 대한 미국의 기여는 미국의 힘과 영향력의 의식적이고 직접적인 행사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즉 “전세계 민주주의 운동들은 미국이라는 사례에서 영감을 받았고 이를 모범으로 삼았다”는 것이며, 미국이 앞으로도 이러한 역할을 계속 수행할 지 여부는 미국의 의지와 능력,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 대한 모델로서 매력을 미국이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Samuel P. Huntington의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Norman and London: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91).

   
 ▲ <자유의 여신상> 너머로 보이는 화염에 휩싸인 세계무역센터 빌딩
 
그러나 헌팅턴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의 민주주의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19세기 혹은 20세기 초반까지의 미국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또끄빌(Tocqueville)이 보았던 미국, ‘제국’으로 등장하기 이전의 미국이다. 그런데 오늘 미국 내의 양심세력과 유럽과 미국 외의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보는 미국은 그런 미국이 아니다”(김동춘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2004). 이런 점에서 헌팅턴이 보여주는 것은 세계적 명망성과 학자로서의 양심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지적 진지함 등에 비춰볼 때, 립셋은 헌팅턴류의 사람들과는 달라 보인다. 그럼에도 ‘미국식 도덕주의’와 ‘교리적 열정’에 근거한 미국적 신조, 이른바 “평등과 자유의 이상에 뿌리박고 있는 미국 사회의 강력한 도덕체계”를 미국 예외주의의 뿌리로 인정하며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립셋 역시도 미국적 신보수주의로 철저히 무장한 지식인의 면모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식 가치와 질서를 기준으로 ‘악의 축’을 설정하고, 이라크 침공을 하느님과 악마 간의 싸움으로 평가하면서 일종의 ‘성전’으로 정당화하는 미국 행정부의 일방적 태도가 섬뜩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에서 립셋의 결론은 많은 것들을 생각게 한다.

보편성에 대한 성찰이 없는 상태에서 여타 나라들에 미국식 도덕주의의 잣대를 강압적으로 들이밀며 미국의 ‘신성한’ 임무의 범위를 확장할 때, 미국 예외주의는 일방적인 미국 우월주의이자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억압적 기능을 행사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그의 언명에도 불구하고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경계심과 경각심을 늦출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뭔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립셋의 이 책이 비교정치학적 연구를 통해 미국 예외주의를 미국의 특성으로 분석하고 입증할 뿐, 그에 대한 진지한 반성적 성찰은 없다는 데 있다. 미국의 예외적 특성이 갖는 억압성과 배타성, 그로 인한 고통과 피해에 대한 고민이 함께 진행되었더라면 립셋의 노작은 그 의미를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또한 이 책은 미국의 신경제가 그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던 1990년대 중반에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미국적 모델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문제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소득양극화, 빈부격차의 확대, 사회적 이동성의 하락 등은 신경제 10년 이후 미국사회의 초라한 목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세계체제의 정점에 위치하여 ‘게임의 규칙’마저 변경할 수 있는 ‘패권’국가이자,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갖고 있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배타적인 특권적 지위와 그로부터 비롯된 ‘오만과 편견’을 분석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예외주의가 작동할 수 있었던 국제정치경제적 이면의 동학을 간과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미국과 미국인들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자 훌륭한 참고서인 이 책의 가치와 함의를 떨어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 책을 넘는 문제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야만의 물결이 미국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한미 FTA의 국가적 추진 등을 통해 미국 사회를 따라가기 위해 질주하는 한편에서 그것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미국의 일방적인 패권적 군사주의가 세계를 반(反)평화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미국이 여전히 한반도 위기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실체라는 점에서 ‘미국 바로 보기’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과거 로마제국보다도 더 막강한 제국으로 떠오른 미국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어쩌면 미국보다 더 심한 미국병에 걸려 있는지도 모르는 한국사회를 되돌아보고, 전 세계에 확산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위기와 그 대안을 함께 고민하자”는 김동춘 교수의 지적(2004)에 대해 립셋의 이 책은 일정하게 응답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전히 이 책의 독해에는 “불완전한 사회가 주도하는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민족과 인류의 미래상을 설계하고 전망하기 위해서는 자기도취된 현실주도세력의 세계인식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그것과 언제나 지적 긴장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삼성 교수의 지적에 귀 기울이는 것이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삼성,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 1995)

2006년 07월 13일 (목) 09:04:34 조현연 /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정치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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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 폭우에 패하다, '을씨년스런' FTA 지지 집회

요런게 전형적인 명실상부한 세계 무대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후진국이다.

사진에 드러난 저 구태의연한 인적 구성을 보라

 

 

우파 폭우에 패하다, '을씨년스런' FTA 지지 집회
"김정일이 반대하기 때문에 저는 찬성합니다"…허겁지겁 30분만에 끝난 집회

돌아갈까 싶었다. “모이자! 한미 FTA 추진 지지 국민대회로!”라는 큼지막한 일간지 광고를 보고 찾아간 집회장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노인네들 뿐이었다. 비가 와서 집회가 될지 모르겠다는 관계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괜스레 심란해진다. 우익이든 좌익이든 제 목소리는 내야 하는 거 아닌가? 비 온다고 데모 안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 서경석 목사
역시 왕년의 운동권 서경석 목사의 힘찬 목소리가 좌중을 모은다. “좌파들은 10만 명이 모였답니다. 저희는 비록 1천 명 뿐이지만, 끝까지 투쟁합시다!” 운동권을 떠났으되, 운동권식 과장법은 여전하다. 종로 5가 좁은 인도에 우산 하나씩 받쳐 들고 모인 사람들을 아무리 세어 봐도 1천 명은커녕 그 절반도 안 돼 보인다.

참가자 평균 연령이 FTA 반대 집회보다 두 세 배쯤은 되겠으니, 대강 그 정도로 계산해주자. 환갑 정도는 애 취급받을 집회장 분위기를 보고 있자니, 역시 FTA보다는 노인복지 문제가 더 절박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또 다른 연사가 외친다. “김정일이 반대하기 때문에 저는 찬성합니다.” 김정일이 반대한다는 얘기도 금시초문이지만, 이거 해도 해도 너무 치졸한 거 아닌가. 어느새 우리 나라 우익이 이처럼 퇴락했던가? 박세일 교수(전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이석연 변호사(전 경실련 사무총장) 등이 공동상임위원장으로 있는 ‘선진화국민회의’에서 뿌린 유인물에는 “우리의 자동차 휴대폰 반도체 선박 섬유 완구 가죽제품 등이 미국 시장에서 세금 없이 팔리게 되어 한국 제품들이 미국 시장을 석권하게 될 것”이라는 나름의 경제적 논리가 적혀 있었지만, 정작 집회장에서는 “한미 FTA는 제2의 한미동맹”, “사이비 좌파, 한미 FTA 정치적 이용 규탄한다” 같은 정치성 구호만이 난무한다.

   
 
30분 만에 허겁지겁 집회를 마치고, 미국 대표단이 묵고 있는 신라호텔을 향해 행진을 시작할 즈음 연단에 섰던 사람들 사이에 고성이 오간다. “쓸 데 없는 소리 하고 있어. 그딴 소릴 하면 어떡해!” 뭔가 안 맞는 게 있는 모양인데, ‘대한민국 국민, 서울시민’ 앞에서 안쓰럽기 그지 없다.

사무실로 돌아 오는 길, 종로 청계천 을지로 명동 서울역에는 “한미 FTA 반대. 위 집회로 인하여 교통을 통제합니다”라는 경찰 안내판이 서 있었다.

   
 

2006년 07월 12일 (수) 19: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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