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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일치 아나운서' 최영미... 자선공연 '쉼표를 위한 에튀드' 열다

 

 

 

그 좋은 멘트 말잔치로 끝낼 순 없죠"
'언행일치 아나운서' 최영미... 자선공연 '쉼표를 위한 에튀드' 열다
텍스트만보기   김기(mylove991) 기자   
▲ 여성노숙인 쉼터 건립을 위한 자선공연 "쉼표를 위한 에튀드"를 스물한 번째 이어오고 있는 최영미 아나운서
ⓒ 김기
최영미 아나운서는 경력 21년 고참이다. 과거 KBS 라디오 1FM <노래의 날개 위에>를 통해 인기를 높였고, 몇 년 전부터는 국악방송의 주요 프로그램을 맡아 맑고 차분한 예의 진행으로 청취자들과 음악의 사이를 좁혀주고 있다.

최영미 아나운서의 장점이라면 자유자재의 말솜씨일 것이다. 그녀의 방송 멘트를 듣자면 방송원고대로 읽지 않는 다분히 애드리브가 많은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라디오 속 세상은 저절로 봄이었다가 금세 겨울도 되는 천변만화의 요지경 세상이 되고 만다.

그렇게 방송만 잘하는 줄 알았던 그녀가 세상 잘 모르게 자선공연을 이끌고 있다. 2004년 11월 시작해서 지난 10일 나루아트센터에서 젊은 국악인들과 함께 한 '젊은 국악, 따뜻한 마음자리' 공연까지 벌써 스물한번 째다.

아나운서가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 그리고 사회까지 도맡아 하는 일도 의외인데 그 공연의 목적이 남다르다. 세상이 각박해도 자선의 뜻 모음은 여전하지만 특별한 날 한 번 하고 마는 일회성이 아니라 많으면 한 달에 세 번도 열리는 지속적인 것이다.

최 아나운서가 이토록 공연을 미친 듯이 하는 이유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 노숙인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하고자 하는 목표 때문이다. 스무 번의 자선공연으로 5800만 원을 모았고 올해 내로 1억 원을 모아 좁고 허름한 현재 서계동 쉼터를 좀 더 넓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겠다는 포부.

▲ 10일 나루아트센터 연주에서 가야금 앙상블 아우라. 가야금 한 대에 세 명의 연주자가 붙은 재미있는 연주장면
ⓒ 김기
최영미 아나운서를 오랫동안 팬으로서, 친구로서 지켜본 한 사람은 그를 '몸의 절반은 간'이라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일을 하는 데 있어 주저함 없이 당차게 도전한다는 뜻이다.

그는 또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으면, "어떤 좋은 일을 하는데?"하고 묻는다고 한다. 사람이 반드시 좋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으로 이런 봉사활동 속에서는 "119 최영미, 빠릿빠릿 특수요원, 2분 공주"라고 불릴 정도다.

처음 멀리서 그녀를 볼 때는 공주인데, 가까이서 사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그렇게 칭하는 무수리 같은 공주임에 분명하다. 이런 공주라면 온 세상 여자가 온통 그녀에게 물들어도 좋을 일.

황사를 지운 빗줄기가 그치고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아진 월요일(10일) 오후,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최영미 아나운서와 데이트를 즐겼다. 첫마디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 알리기 싫고, 우리 목적을 생각하면 더 널리 알려야 하고…"라면서 인터뷰에 겸연쩍어 한다.

그녀와의 대담이다.

"청취자와 신뢰로 잇는 가교가 되기 위해 시작했어요"

▲ 10일 공연 중 정가악회의 '태평가' 연주 장면
ⓒ 김기
-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2004년 KBS 제3라디오 <우리는 한가족>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열린여성센터 서정화 이사장이 6개월간 게스트로 출연한 게 계기였어요. 2004년 용산구 서계동 쉼터(열린여성센터)에 먹을 것을 사들고 놀러 갔다가 믿지 못할 여성 노숙인의 현실을 알게 된 거죠. 여성 노숙인은 여성 문제이면서 동시에 노숙인 문제이지만 기실 그 두 가지 모두 사회안정망에 적절히 노출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발견하게 된 거죠."

- 그분들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조금 과하다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어요. 설혹 가족이 있어도 돌아갈 수도 없고,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태. 여성 노숙인이 대부분 정신분열 등의 질환을 앓고 있는데, 누구라도 그런 생활 단 며칠만으로도 미쳐버리고 말 거라고 생각해요. 공황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그들의 삶입니다."

- 왜 이 일을 하십니까? 아나운서로 활동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밤하늘의 별이 빛나는 까닭은 자신이 받은 빛을 고스란히 혹은 더 보태서 내보내기 때문이잖아요. 라디오 진행을 하게 되면 세상의 좋은 이야기는 다 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단지 그 순간의 장식이 아니라 청취자와 신뢰로 잇는 가교가 되기 위해서는 그 말과 나의 생각과 그리고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공연횟수에 비해 모금액이 그리 많지는 않아 보입니다. 모금은 어떤지.
"공연수익만으로는 물론 쉼터를 건립할 수는 없죠. 우리들이 지금까지 해오고 앞으로도 계속할 '쉼표를 위한 에튀드'를 통해 더 많은 분들과 만나다 보면, 기부도 있고 더 많은 봉사도 있을 겁니다. 그런 기부와 봉사를 통해 머지않아 쉼터도 마련될 것입니다."

▲ 현대적 가야금 앙상블의 시대를 연 '사계'의 연주
ⓒ 김기
- 구체적으로 공연은 어떻게 꾸려 가는지.
"공연의 구체적인 준비는 방송작가인 신혜원씨와 같이 해요. 딱히 업무를 결정짓지는 않고 서로 일하다가 빈틈이 생기면 알아서 그것을 메워주는 사이죠. 그리고 우리 공연에서는 현재 공연들에서 보이는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탈피하려고 합니다. 연주자는 연주하고, 청중은 그저 말없이 보다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무대 위아래 없이 즐기고 돌아가는, 그리고 다시 만나는 공연을 만들려고 노력하죠."

- 정부의 도움이 부족하지는 않습니까?
"정부 탓만 하고 우리도 안 하면 결국 아무도 안 하는 것이 되고 말잖아요. 누가 하길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해버리면 모든 사람이 편해지는 거라 믿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공연을 열었는데, 이 공연이 이제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자라고 있는 거 같아요. 이제 저는 그 공연의 손발이 되어서 내가 공연을 하는 게 아니라 공연이 저를 움직이게 하는 것 같이 말이죠."

- 오늘 공연은 어떤 공연이고, 어떻게 준비되었죠?
"현재 국악계에서 주목받는 젊은 국악인들의 무대로 꾸몄습니다. 바이날로그, 가야금 앙상블 사계, 정가악회 그리고 가야금 삼중주단 아우라. 모두 네 팀이 무대를 장식해줄 겁니다. 국악은 오랫동안 사회의 관심을 강조해왔는데 이제 젊은 국악인들은 받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먼저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젊은 국악인들 중 일부가 동참한 거죠."

대학생 문화봉사 동아리도 동참... 모두가 자원봉사

▲ 국악기와 양악기의 동행. 바이날로그의 연주.
ⓒ 김기
이날 공연에는 장기 봉사하기로 한 대학생 문화봉사동아리도 동참했고, 언제나 그렇듯 음향, 조명, 무대감독 등 모두가 자원봉사이고 연주자들 역시 개런티 없이 무대에 섰다.

저녁을 향해 기우는 봄 햇살을 뒤로 한 최영미 아나운서는 아나운서로 만났을 때와는 또다른 아름다움을 발하였다. 그리고 연주자들에게 줄 김밥을 양손에 들고 총총히 분장실로 향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래 아직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하고 마음이 울렁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여성노숙인 쉼터 문제가 해결되면 최영미 아나운서는 또다른 좋은 일을 위해 기꺼이 두 팔 걷어붙이고 땀을 흘릴 것이다.

▲ 간이 몸의 반, 119 최명미, 빠릿빠릿 특수요원...아나운서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묘사들이나 최영미 아나운서에게는 따라붙는 별명들이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그녀
ⓒ 김기
최 아나운서의 오랜 친구인 이지양 박사가 그녀의 블로그에 쓴 글에 의하면 그녀의 입에 붙어다니는 말이 있다고 한다.

"내가 방송할 때 했던 그 좋은 말들, 다 빈말로 남겨두고는 못살겠어요. 꼭 실천으로 채워야 해요. 내 방송 경력이 20년이 넘었고, 장애인을 위한 방송을 오래 했단 말이야. 나는 내가 했던 그 좋은 방송 멘트들을 말잔치로 끝내고는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어요. 꼭 실천으로 채워야만 해."

언행일치의 방송인? 꿈만 같은데 거짓말 같이 현실 속에 그런 방송인도 있다.

최영미 아나운서의 '쉼표를 위한 에튀드' 다음달 공연은 5월 11일 압구정동 광림교회 장천아트홀에서 열린다. 주로 브라스 앙상블로 꾸며질 이날 공연에는 재즈 피아노의 진보라, 재즈보컬 정말로 등 다양한 뮤지션들을 만나게 된다.

즐기기만 해도 저절로 사회참여도 되고, 봉사도 되는 것이 '쉼표를 위한 에튀드' 공연이라고 한다. 최영미 아나운서의 블로그를 방문하면 그동안의 족적을 상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최영미 아나운서 블로그. http://blog.daum.net/angela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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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희 “비정규직이라도 원하는 사람, 막을 권리 없다”

몸팔겠다는 사람, 막을 권리 없다.

 

아래 명제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인간이 노동 운동 했다고...

이런 인간이 법을 만든다니...

 

 

이목희 “비정규직이라도 원하는 사람, 막을 권리 없다”
[대정부질문] 비정규직3법 두고 노동계·민노당 반발에 불편한 심기 드러내
입력 :2006-04-12 22:01   권대경,최한성 (kwondk@dailyseop.com)기자
▲ 12일 오전 열린 국회 본회의 경제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한덕수 총리대행이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국회 대정부질문 경제분야에서 여야는 외환은행 론스타에 부실 매각 의혹과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특히 한나라당은 외환은행 매각이 국부유출의 중대한 사건이라는 전제하에 외환은행의 BIS조작 의혹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12일 대정부질문 한나라당의 첫번째 주자로 나선 김성조 의원은 “외국기업에 매각을 할 수는 있지만 매각을 위해 BIS비율을 조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조작한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고, 답변에 나선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당시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BIS비율을 조작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김 의원은 또 “외환은행장은 매각을 도운 대가로 17억의 부당이익을 챙긴 것으로 보도됐던 같은 시각에 외환카드 근무자 상당수는 길거리로 나왔다. (이같은 현상이)양극화가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이에 한 부총리는 “당시 직장을 잃은 이들에게는 개인적으로 가슴이 아프다. 임원이나 담당자들이 받은 보상의 적절성 여부는 이미 국회가 감사원에 감사청구를 했고, 검찰에도 수사를 요청했다. 법적으로 위반사항이 있는지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심재엽 한나라당 의원은 정부의 FTA정책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단기대책이 나왔고 중장기 대책은 연말에 나온다 한다. 그럼에도 FTA를 3월 말에 마무리 하겠다고 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이에 한 부총리는 “농업에 대한 장기적인 육성대책은 만들어져 있다. 앞으로 협상하게 되면 어떤 결론을 갖고 협상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고 설명했다.

한나라당에 반해 열린우리당 의원은 방향을 틀어 론스타의 수익에 과세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정부도 긍정적으로 고려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날 대정부질문에서는 무엇보다 이목희 열린우리당 의원이 비정규직 3법 입법을 두고 노동계와 민주노동당의 반대에 불편한 심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눈길을 끌었다.

이 의원은 “일부 노동계와 민주노동당의 소수 강경파들이 아직도 (비정규직 3법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중소영세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량실직이 초래되는 사전사용사유제한을 수용하라며 반의회주의적 행태를 계속하고 있다”면서 “참으로 안타깝다. 대부분의 비정규직을 실업자로 만드는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일축했다.

이 의원은 또 “물론 비정규직 일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비정규직으로라도 취업해서 생계를 이어가려는 사람들의 권리를 막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비정규직법안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는 이 의원의 질문에 한 경제부총리는 “차별금지와 남용을 방지할 균형 잡힌 법안이라 생각한다. 차별시정 효과는 내년부터 일부 나타날 것이다”며 “기업규모별 단계적 시행 때문에 중기 근로자들에게는 시간을 두고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의 차별시정 효과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4월 임시국회 대정부질문은 13일 교육·사회·문화 분야를 끝으로 4일간의 일정을 마치게 된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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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 그는 누구... 장르·스타일 넘나든 흥행의 대가

서극, 오우삼 등 홍콩 느와르의 진정한 원조

 

 

고인이 된 신상옥 감독과 <빨간마후라>의 추억
텍스트만보기   신명철(smc6404) 기자   
신세대 영화팬들은 11일 유명을 달리한 신상옥 감독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저는 전쟁영화의 재미를 알려준 감독으로 기억합니다.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국민(초등)학교를 다닐 때 본 신 감독의 <빨간 마후라>는 그 전에 본 <돌아오지 않는 해병> <5인의 해병> 등 전쟁 영화와는 다른 정말 재미있고 신나는 영화였습니다.

▲ 적진에 비상낙하한 최무룡을 구출하기 위해 수송기를 이용한 작전이 펼쳐지고 있다.
2, 3년 전 EBS에서 우연히 <빨간 마후라>를 다시 봤는데 40여 년 전에 본 영화의 몇 장면이 기억이 났습니다. 특히 다리를 폭격하는 장면은 그때 그 느낌 그대로였습니다.

언제 그 영화를 처음 봤는지 궁금해 제작연도를 확인해 보니 1964년 작품이더군요. 그때 어느 관공서 강당에 광목으로 된 스크린을 걸어 놓고 덜덜거리는 영사기로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EBS에서 본 <빨간 마후라>에는 40여 년 전에 볼 때는 그냥 지나친 장면도 꽤 있었습니다. 특히 남궁원, 최무룡 두 배우가 시차를 두고 극 중 황해도 사리원 출신 처녀 최은희의 입술을 빼앗고(최무룡은 선배 장교인 남궁원이 전사한 뒤 그의 부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역시 공군 장교인 신영균은 윤인자와 격정적인 키스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외에 이대엽, 박암, 김희갑 등의 얼굴도 보였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분도 계시지만 그 영화에 나온 모든 분들은 한국영화 발전에 든든한 받침돌을 놓은 분들입니다.

그 시절 영화니 과장된 억양의 대사가 웃음 짓게 하고, 신세대들에게는 낯선 '괴뢰군'이라는 용어도 나오지만 최무룡이 자신의 고향(함경남도 안변)을 폭격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장면에서는 북한 출신인 신 감독의 의식세계가 언뜻 비치기도 합니다.

▲ 영화속 전투기 조종사들이 즐겨 찾던 '바'의 여인들.
또 당시로는 획기적인 F-86 등 제트기의 공중전 장면, 미니어처를 이용한 다리 폭격 장면 등은 신 감독의 영화 재능을 보여줍니다. 적진에 비상낙하한 최무룡을 수송기로 구출해 내는 장면은 극적입니다.

신영균은 이 영화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이 영화는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되기도 했습니다. 신 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당시 일반적으로 소요되는 3∼4만 자[尺]가 아닌 10만 자의 필름을 썼다고 합니다. 영화를 찍는 동안 필름이 떨어져 암시장에서 사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서울 명보극장에서만 20여만 관객을 동원했는데 당시 서울특별시 인구가 250여 만 명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전국 200여 개 극장에 동시에 거는 방식이라면 수백만 명은 쉽게 동원했을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신파조'의 대사를 부드럽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투기를 최신형으로 바꾸고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해 공중전을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등 개작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 출격에 앞서 작전내용과 정신훈화를 듣고 있는 조종사들. 자료사진은 흑백입니다만 '빨간 마후라'는 컬러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지 못한 신세대 독자들은 <빨간 마후라>라는 영화 제목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알려진 대로 '빨간 마후라'는 전투기 조종사의 상징이고 이 영화에서는 사랑, 충성, 우정을 아우르는 상징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빨간 마후라>의 주제곡은 지금처럼 축구국가대표팀을 위한 특별한 응원가가 없던 1960, 70년대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올림픽, 월드컵 지역예선 같은 큰 경기에서 응원가로도 불렸습니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석양을 등에 지고 하늘 끝까지,폭음이 흐른다 나도 흐른다
그까짓 부귀영화 무엇에 쓰랴, 사나이 일생을 하늘에 건다


저는 초등학교 때, 그리고 나이가 꽤 들어서도 재미있게 본 <빨간 마후라>로 신 감독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겁니다. <만추>의 이만희 감독을 기억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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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옥 감독이 1961년 만든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그와 결혼한 최은희와 김진규가 출연했다.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84년 영화계의 최대 이슈는 최은희·신상옥 부부의 납치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이 사실을 발표하면서 영화계는 발칵 뒤집혔고, 4월 4일 1500여 명의 영화인이 참여해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영화인대회가 열렸다."

장석용(인하대 강사)씨는 <영화평론> 2002년 제14호에서 '한국 영화의 혁명적 이야기꾼, 신상옥'이라는 제목으로 그때 일을 회고했다.

지난 11일(화) 밤 80세로 타계한 신상옥 감독은 19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감독이자 제작자였다. 또 전설적인 뉴스 메이커였다. 1978년 납북됐다 1987년 탈출했는데 북한에서도 영화를 만들었다. 분단 이후, 남과 북에서 최초로 영화 연출을 한 감독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가 전설적인 감독인 건 아니었다. 2001년 6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시대의 욕망을 연출한 한국영화의 거인'이란 이름으로 신상옥 감독 회고전을 열었다. 신상옥 감독을 부르는 말은 많았다. 장르의 대가, 60년대의 징후, 다중적 정체성의 작가. 실제로 신상옥 감독은 장르를 넘나들었다. 멜로, 드라마, 사극, 코미디까지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을 넘나들었고 당시 흥행 감독이었다.

장석용씨는 <영화평론>에서 신상옥 감독이 "나운규 이후, 한국영화 미학의 핵심을 형성하고 다중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영화를 통해 "전통성에 저항하면서 사회제도에 얽매인 비인간성을 폭로하다가 급격한 사회변화에 저항해서 역설적으로 전통성을 미화시키고 승화"시켰다고 표현했다.

1926년 출생한 신상옥 감독은 일본에서 도쿄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악야>로 데뷔했다. 장석용씨에 따르면 "이색작가 김광주 원작의 양공주를 다룬 <악야>로 '현실은 추악하다'는 것을 고발한다. 데뷔작의 문제제기는 이후 그의 작품에서도 계속 제기되는 문제점과 상통된다. 그는 늘 깨어있으면서 시대의 타락, 예술성의 상실, 핍박 받는 국민들을 안타까워했다.

시대의 타락 안타까워했으나 작가주의 감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관객이 외면하는 영화에 집착하는 작가주의 감독은 아니었다. 그가 1961년 제작하고 개봉한 영화 <성춘향>은 그때 74일간 38만명을 동원했다. 그 당시로선 놀라운 흥행이었다. 지금의 <왕의 남자>에 버금가는 흥행이었달까. 이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던 컬러 시네마스코프였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연산군>(1961), <빨간 마후라>(1964)까지 그는 승승장구했다.

영화의 성공을 등에 업고 그는 한국 최대 영화사 '신필름'을 설립했다. 1966년이었다. 신필름을 설립해서 한국 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다. 장석용씨는 <영화평론>에서 그 당시를 이렇게 밝혔다.

"당시 영세하던 영화시장을 기업화하는 계기가 된 1966년의 신필름 설립은 기업화, 한국영화의 소재개발과 다양한 영화 창출의 본거지가 된 점에서 의의가 있었고, 이형표, 이장호, 박철수 같은 영화감독들이 감독으로 세공되었다는 점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신상옥은 신필름에서 3백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연 평균 2편 이상의 영화를 연출했다. 김승호, 최은희, 김진규, 신성일, 엄앵란 등 당대의 스타들을 제조했고, 제작 감독 촬영 각본 등 그의 활약은 종횡무진이었다. 그의 스타 스튜디오 시스템은 멜리에스의 그것에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신상옥 감독은 1953년 당시 최고 스타이던 최은희와 결혼했다. 결혼 뒤에도 최은희를 여주인공으로 숱한 영화를 찍었다. 그의 대표적인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 어머니가 바로 최은희였다.

하지만 그가 만든 신필름이 승승장구하는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

"60년대 초 영화들이 다양한 장르에 걸쳐 4·19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시키는데 반해, 신감독은 <쌀>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표명했다. 같은 해 9월, 일정 요건(제작편수가 15편 이상)을 갖춘 이에게만 제작사 등록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문교부의 고시가 떨어졌다. 군사정권은 소수의 제작사에만 외화수입과 제작권을 내줬다. 난립하던 65개의 영화사는 16개로 축소, 통합됐다. 신필림은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15편을 앞세워, 단일 제작사로서는 유일하게 등록을 마친다."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 이어 벌어진 부부 납북 사건

하지만 그의 영화계 생활도 영욕의 세월이었다. "정권과 소원해진 뒤 1975년 11월28일 <장미와 들개>(홍콩합작) 예고편의 검열 미필 장면(키스신) 삽입으로 영화사는 정부로부터 영화사 등록 말소 명령을 받고 폐쇄되었다."

그리고 신상옥 감독 부부 납북 사건이 일어났다. 신상옥 감독은 탈북 후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귀국하지 않고 미국으로 갔다. <마유미>(1990), <증발>(1994), <벙어리 삼룡>(1994)을 만들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작업에도 참여했다. <닌자 키드>의 속편인 <돌아온 닌자키드3>(1994)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살아생전 신상옥 감독은 항상 스카프를 두르고 선글라스를 꼈다. 그는 항상 그 스타일을 고수했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여러모로 그는 당시 멋쟁이였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등 영화와 상관없던 박철수 감독은 우연히 신상옥 감독을 만나서 그 멋에 반해 영화계에 입문하게 됐다는 일화도 있다.

신상옥 감독은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1962년 베를린영화제 특별상을 비롯,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벙어리 삼룡이> 등으로 대종상은 4회나 수상했다. 또 제11회 아시아 영화제 감독상, 카르로비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다양하다.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남을 생각이다"고 말하던 신상옥 감독은 갔지만, 그가 남긴 말은 남았다. 신상옥 감독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오락성이 없거나 여성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영화로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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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신상옥 감독과 <빨간마후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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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조선 11일자 사설, 특정후보 옹호하는 언론의 장난질”

바로 이런걸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진중권 “조선 11일자 사설, 특정후보 옹호하는 언론의 장난질”
12일 SBS컬럼 “근거 찾다 없으니 근거도 미제를 수입해 사용”
입력 :2006-04-12 11:44   조은영 (helloey@dailyseop.com)기자
▲ 진중권 시사평론가.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민원기 기자 
“‘서울 시장 선거는 미래 국가 지도자를 뽑는 선거’라는 제목의 11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언론이 어떻게 독자의 얼을 빼놓는지 보여주는 모범적인 예이다.”

시사평론가 진중권씨는 12일 자신이 진행을 맡고 있는 ‘진중권의 SBS 전망대’를 통해 ‘서울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서울시장이야말로 미래의 대통령감’이라는 부당한 전제가 깔린 11일자 조선일보 사설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이 사설이 서울시는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문제의 축소판이자 대한민국에 열려 있는 가능성의 집합체이기에, 서울시장은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고, 서울의 잠재력을 현재화하는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에게 대한민국의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해 볼 수도 있다는 의견을 싣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서울시장이 이런 중차대한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정치 패션’ ‘미디어 노출도’가 높은 인물을 내세워 표 줍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여야 모두를 비판하고 있어 공정하고 타당한 시각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사설이 말하고 싶은 본질은 그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서울시장 선거는 미래의 국가 지도자를 뽑는 선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재의 서울 지도자를 뽑는 선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씨에 따르면 “이런 사설의 바탕에는 서울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서울시장이야말로 미래의 대통령감’이라는 부당한 전제가 깔려 있는 것으로 그 분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들 하실 것”이라며 언론에서는 주로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친다며 조소를 보냈다.

그는 “조선일보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미 카터 이후 현재까지 5명의 미 대통령 중 4명이 주지사 출신이라는 미국의 예를 들고 있다”며 “근거를 찾다가 없다 보니 근거도 미제를 수입해다 쓰고 있다”며 씁쓸해 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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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자신의 통계부터 따져보라

 

 

 

중앙일보>, 자신의 통계부터 따져보라
[창과 방패]정부 규모 논하다가 웬 '장관 거친 언행'?
텍스트만보기   진중권(angelus) 기자   
"정부가 주장하는 재정규모는 GDP의 28%이지만 실제 재정규모는 GDP의 38%이다."

얼마 전 중앙일보에 이런 내용의 탐사기획 보도가 실렸습니다. 물론 보수언론에서 주장하는 '작은 정부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기사겠지요.

하지만 복지수준이 바닥을 헤매는 한국에서 "정부의 씀씀이가 미국과 일본 수준"이라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지요. 실제로 <중앙일보>의 통계에 문제가 있었나 봅니다.

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은 이 보도를 "국가 기본통계를 훼손하는" "위조지폐"에 비유했네요. 예산처의 한 관료는 이는 "무지의 소산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가 깔린 악의적 보도"라며 분개했다고 합니다. 한국은행에서도 <중앙>의 보도는 왜곡보도라는 입장을 내놨네요.

어떻게 28%가 38%로 늘어난 걸까요? 인천대 경제학과의 황성현 교수에 따르면, "어떤 기관의 활동에 시장성이 없을 때만" 정부 산하기관으로 잡아야 하는데, <중앙일보>에서 웬만한 공기업은 다 정부 산하기관에 집어넣고 그 씀씀이를 산출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전문성이 부족한 취재팀이 일부 전문가들만의 이야기를 듣고 국가의 기본 통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하루아침에 1년에 77조원을 더 쓴 정부로 만든 것도 언론의 건전한 비판과 감시 기능에 속하는지 묻고 싶다." 황성현 교수의 지적입니다.

통계의 오류에 대한 지적들이 쏟아져 나오자 <중앙일보>, "장관들의 거친 언행 도를 넘어섰다"며 지면을 장관들 언행에 관한 비난으로 도배하고 있네요. <중앙일보>에서는 먼저 자신들이 내놓은 통계가 옳았는지부터 되살펴보고, 장관의 거친 언행 따지는 건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네요.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 따지다 말고 갑자기 남의 말버릇 붙잡고 늘어지는 것. 논리학에서는 이런 걸 '논점일탈의 오류'라 부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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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신(神)인가?

 

 

 

예수는 신(神)인가?

다음의 예수자신의 말을 통해서 보면 그는 분명히 여호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자신이 신이라면 이런 말을 했겠는가 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정말 잘들어 두시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 아무 일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할 따름입니다.[요한 5:19]

나는 아무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저 여호와께서 하라시는 대로 심판을 할 뿐입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기 때문에 내 심판은 올바릅니다.[요한 5:30]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 24:36]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때가 언제 될른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으라.[마가 13:30-33]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들이 영접치 아니하나 만약 그분(another)이 자기 본래의 이름(his own name)으로 온다면 영접하리라.
[요한 5:18]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한8:28)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한12:49~50]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요한16:2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한6:38~39]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3: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호와가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한8:42]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한14:28]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7:21]

예수와 여호와가 분명 위격(位格)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죽음을 앞둔 때부터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게 될 때까지를 살펴 보면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1) 예수는 운명하는 순간 "나의 여호와! 나의 여호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면서 부르짖는다. (마태복음 27장 46절)

2) 예수는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라"하면서 약속을 한다.(누가복음 29장 49절)

3)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마침내 하늘로 승천하였다. 이 장면을 성경은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 하늘로 올리우사 여호와 우편에 앉으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6장 19절)

먼저 1)의 장면을 보면 예수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그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시여! 왜 이 아들을 돌보지 않으시나이까"하면서 여호와께 원망까지 하였다.

여기까지는 아직 인성이 다하지 못하여 신성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일 것이므로 그런 대로 접어 두기로 하고 사망의 고통을 이겨내고 죽음에서 승리한 후의 예수의 모습을 보기로 하자.

2)을 보면 예수는 사망의 늪을 빠져 나와 부활한 상태이므로 예수는 마땅히 신성을 회복하였어야 함에도 아직까지도 예수는 그 자신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모르고 "내 아버지"하고 여호와만 찾았으니 이 구절 역시 예수의 신성을 입증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다음 장면인 3)를 보면 예수는 스스로를 승천하지는 못하고 무엇인가에 이끌려서 승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he was received up into heaven) 삼위일체인 예수가 스스로 승천하지 못하고 누구에겐가 도움을 받아 승천하였으니 이 또한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지는 못한다고 하겠다.

또한 이끌리어 승천한 예수는 삼위일체인 여호와와 합쳐지지 못하고 하나님 오른쪽에 따로이 좌정하여 앉았다고 하였으니(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God)이것은 예수가 여호와가 아니라는 증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구약성서를 다 같이 인용하고 있는 유태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는 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이슬람교는 예수를 마호멧과 같은 예언자로 봄) 기독교는 예수를 신이라고 보고 있다.

예수의 설교를 음미하면 할수록 예수는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예수 생전에도 사후에도 변함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경의 내용이 이러한데도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수를 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여호와와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여호와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여호와와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1:1~14]

여호와와 함께 있었고 말씀이 곧 여호와라고 한 다음 그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 예수라는 얘기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말씀=예수'의 등식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A(말씀)와 B(여호와)가 함께 있었다"와 "A는 곧 B다"라는 명제가 동시에 주장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은 영지주의의 신비주의적 세계관에서 파생한 것이며 말씀이 갖는 두 기능, 즉 우주생성론적 기능과 구속론적 기능이 동시에 주장됨에 따라 파생된 모순이다.[김용옥<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중에서]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무시하고 요한복음의 "여호와=말씀=예수"라는 공식을
무조건 인정한다고 가정하고 한 번 생각을 해 보자.

신약을  살펴보면

1)예수의 행적
2)예수의 가르침
3)예수의 생존시 함께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이야기
4)성경저자의 견해와 주관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

1)번 예수의 행적과 3)번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이야기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으나
2)번 예수의 가르침과 4)번 성경저자의 견해와 주관은 문제가 될 수 있다.

2)번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하면서 예수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기록한 
  대목이고
4)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 1:14]" 하면서 성경저자의 견해를 기록한 대목이다.

성경에서 2)번과 4)번의 내용이 같다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2)번과 4)번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면 이때에는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지 혼돈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은 하나는 예수의 이야기요 또 하나는 예수 추종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하여 보라. 예수는 그 자신이 여호와가 아니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신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는 여호와일까? 신이 아닐까?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면 혹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예수는 신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쓰여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해하면서 성경 전체를 예수의 이야기이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건 성경저자의 견해이건 간에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데에서부터 성경은 수많은 모순을 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성경e에 있는 내용을 근거로 "성경은 성령으로 쓰여진 것이므로 성서의 이해는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논리를 전개하기도 하는데 물론 그렇게 난해한 말씀도 있다.

그러나 그냥 읽어서 초등학생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백한 내용까지도 성령 운운한다면 성경의 존재이유가 없지 않은가? 성령을 통해서 성서를 이해를 했는지 안했는지 그 판단은 누가 하는가? 결국 인간이 하지 않는가?

기독교의 교파가 전세계적으로 25,000여 개를 넘어서는 이유가 무엇인가? 모두 인간들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모두 서로 무조건 나의 해석이 정통이고 남의 해석은 이단이라고 매도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는 스스로 밝혔듯이 여호와의 가르침을 직접 전달한 대역자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가르침을 직접 사사받은 사람들이고 성서의 저자들은 구전을 통하여 들어 두었던 내용을 견해와 주관에 따라 기록한 사람들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이러한 성경을 빌미로 하여 신앙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크기를 표시한다면 " 예수> 제자들> 성경의 저자들> 기독교인"이 될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한다면 성경은 의문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한가지 성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은 "시대적인 소산물" 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는 요한복음에서 "나는 곧 길리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하였다.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던 그 당시는 전통적인 유태인의 종교적 습관이 완고하리 만큼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때였다. 예수는 결국 그들의 손에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새로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으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러한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은 후대인 이 시대에도 경종이 될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 시대의 정말 안 통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깨달음의 자극을 주기 위하여 이야기했던 시대적인 소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소산물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보다도 훨씬 이전에 세상을 다녀갔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몰랐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기도 하고

조금 양심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몽땅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안 되었던지 "그들이 가는 세계가 따로 있다"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이는 예수조차 모르는 사실을 그들이 더 알고 있는 셈인 것이니 예수보다 더 위대한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는 많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을 종합해 본다면 예수는 스스로 신이 아니라고 이야기 해 왔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는 성자(聖子)인 여호와이다."고 믿고 있음을 볼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예수는 무능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도 지금의 기독교인들도 예수는 곧 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예수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여호와에게서 특별히 선택받아 세상에 왔으므로 예수를 무능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터이므로 이러한 추론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추론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어떻든
예수의 진위가 무엇이건 상관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고쳐가면서 신봉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는 자신과 여호와는 그 능력과 위격(位格)이 서로 틀리다는 것을 누누이 말하고 있다. 성경에 예수가 여호와의 아들이라고 명백히 쓰여진 곳이 백 군데라면, 예수가 여호와와 동일하다고 해석할 만한 곳은 한 두 구절밖에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정작 예수 자신은 "내가 여호와"라고 말한 곳이 있는가?

그리고 자신이 왔을 때는 사람들이 환영하지 않았지만 다른 분, 즉 여호와가 직접 오신다면 사람들이 영접할 것이라고 예수 자신이 명백히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예수와 여호와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론의 성립과정

그러면 예수의 본래 가르침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이 왜곡되었는지 삼위일체 교리의 성립과정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2세기 중엽 무렵에 당시 퍼져 있던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 신앙이 쇠퇴하고 기독교가 로마의 중류 및 상류층까지 전파되어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313년)되고 기독교가 억압받는 자의 종교에서 로마제국 지배계급의 종교로 됨에 따라 초기 억압받던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기독교 신앙의 핵심사상(하늘나라의 도래와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기대)이 변질되게 된 데에서 기인한다.

현실의 역사적 세계가 결코 변혁(종말)될 필요없이 인간의 구원은 오직 부활하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보장된다는 신앙으로 변질된 것이다.

또한 인간인 예수가 진리를 깨닫고 죽음을 뛰어넘어 신이 된 것이 아니라 애당초 신이었던 예수가 인간구원을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빌려 잠시 왔다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즉,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말살한 것이다.

예수가 세상을 떠난 지 300여년이 지난 4세기까지만 해도 3위일체론은 확고하게 정립된 교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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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은 4세기 초반의 초기 기독교회에 있어서 기독론(Christology)을 둘러싼 교부들의 패싸움에 기인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성서적 근거조차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마태 28:19, 고후13:14 등의 언급은 삼위일체론을 구체적으로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없다." [ 김용옥<老子철학 이것이다>중에서] <---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예수에게 여호와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당시 "3위1체" 인정여부에 대해서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아리우스(258~336)

아타나시우스(297~373)

여호와

여호와는 단 한 분이시며, 여호와는 신성의 본질과 존재를 나누어 가질 수 없다(3위를 부정)

여호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이루어져 있다.(3위 인정) 3위는 각기 완전하며, 셋이 합하여 완전한 동등성을 이룬다.

아들

예수

아들 또는 말씀은 피조물이다. 명목적으로만 여호와로 불려질 뿐 참 여호와가 아니다

아들 또는 말씀은 피조물이 아니라 참 여호와이다. 만일 로고스가 약점을 갖고 있다면 인류는 구원될 수 없다

예수는 본래 신 아니었으나 나중에 여호와에 의해서 신성이 부여되었다.(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존재)

예수는 본래 신이다. 인간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잠시 인간의 모습을 빌려 내려왔다(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말살)

 

삼위일체교리를 확립한 최대의 공로자는 콘스탄틴황제이다.
기독교 교리의 절대적인 힘을 빌려 로마제국을 강력하게 통치하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세속적, 정치적 속셈이 아타나시우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예수는 본의 아니게 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로마제국과 기독교

로마제국이 신흥의 기독교가 모든 측면에 있어서 제국문명의 논리에 반하는 요소를 함장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탄압하였지만은 결국 그 역기능을 순기능으로 이용하여 기독교 그 자체를 제국문명화해 버린 역사의 아이러니를 잘 기억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야말로, 로마제국에서 억압돼왔던 기독교 저항문화가 갖는 강력한 조직성과 반체제적 생동성을 제국문명자체의 정신적 유대감의 기저로 역이용하여 제국문명을 재건하는 기발한 구상을 도모했던 정치적 천재였던 것이다.

그 뒤로 교회와 국가의 파트너쉽은 서구라파 역사패턴의 한 기저를 이루는 형식이 된 것이다. 후대의 비잔틴 제국이나 카롤링그 왕조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모습에서 그러한 기독교제국의 전형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그 맥락과 종교조직적 성격면에서 매우 상이한 것이기는 하지만, 유교가 시황제(始皇帝)에 의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참상에 이르기까지 탄압을 당했으면서도 새로 정립된 한제국(漢帝國)에 이르러서는 그 제국문명의 주축을 이루는 국교(state ideology)로 등장한 것은 인류보편사적 패턴에 있어서 기독교의 운명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최소한 유교의 이론체계나 이념지향성이 제국문명의 논리에 반한다고 판단되었던 그 역기능적 측면들, 예를 들면, 종교공동체적 천명(天命)민주주의 사상이나, 고대봉건체제의 하부구조로 이상시 되었던 정전제(井田制)의 옹호라든가, 주종실(周宗室)을 주축으로 하는 정명(正名)사상의 보수성이라든가 하는 모든 역기능적 측면들을 제국문명의 순기능적 요소로 전환시키는 패턴은 동일하다. 한무제(漢武帝)야말로 중국의 콘스탄티누스대제였던 것이다.

"예수"라는 보편사적 사건이 바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은 기실 알고 보면 "여호와(야훼) 하나님"의 보편성이 아니라 바로 로마제국의 논리라는 역사적 보편성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 논리의 씨앗을 그 형성 초기에 뿌렸으며, 그것은 그러한 토양의 맥락 속에서 장대하게 성장하였으며 급기야는 바로 로마제국 그 자체의 이데올로기의 제공자로서 그 인위문명의 구조 속에서 신격화되어 세계문명사의 주요부분을 제패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논리와 초기부터 결탁된 예수가 오늘날 21세기에 이르기까지도 그 막강한 정경적 힘(Canonical Power)을 휘두르게 되는 것은 인류보편사의 빤할 빤자의 운명, 그 결정성과 한계성의 비극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 김용옥<老子철학 이것이다>중에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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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산곡동 개들에게 집 생기다

개고기...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인천 산곡동 개들에게 집 생기다
인천수의사협회, 개집 50개 기증... 일정기간 적응후 정착 가능
텍스트만보기   전경옥(pigamojara) 기자   
4월 6일 오전 9시 인천 산곡동을 찾았다. 그간 인천 동부공원관리소 측과 개주인 이아무개씨 사이의 분쟁으로 좁은 우리 속에 갇힌 개들에게 집이 생기게 되었다는 소식. 관리소측은 예산집행의 어려움 때문에 더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입장이었고 이씨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견사를 지을 수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었다. 도움의 손길을 준 것은 인천수의사협회. 인천수의사협회 허준형 회장은 협회의 수의사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지붕이 있는 개집 50개를 마련해 6일 현장을 찾았다.

▲ 적응훈련을 위해 미리 빼 놓은 개. 목의 쇠줄은 우리에서 빼낼 때 사용하기 위한 것. 4월 6일 현재.
ⓒ 전경옥
이씨는 미리 연락을 받고 우리 속에 갇힌 개들을 몇 마리 빼 밖으로 내보내 묶어 둔 상태였다. 한꺼번에 개들을 내보낼 경우 무리가 간다는 주장. 이미 좁은 우리 안에서 벗어나 좀 더 큰 견사 안에 보호되어 있는 개가 눈에 띄었다. 목에 걸린 쇠줄은 좁은 우리에서 개들을 밖으로 빼기 위해 채워 둔 것이라고 한다. 개들은 한 마리당 3~4일의 적응훈련을 거쳐 밖으로 나오게 된다. 현재 좁은 우리 안에 있는 개들이 밖으로 완전히 나오게 되기까지는 총 15일이 걸리게 된다.

이미 개집이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좀 더 빨리 밖으로 내보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허준형 회장은 이런 어려운 상황을 '분리불안'이라고 설명한다.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벗어났을 경우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며칠간 시간을 두고 적응훈련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우리의 앞쪽에 있는 개들. 그간 조금씩 빼내 한 마리씩 들어가 있는 곳이 많았다. 4월 6일 현재.
ⓒ 전경옥

▲ 첫번째 우리에 있는 개. 목에 쇠줄이 보인다. 적응훈련을 준비 중. 4월 6일 현재.
ⓒ 전경옥
애초 동부공원관리소 측에서 만들었던 우리는 길게 두 줄로 연결되어 있다. 앞줄 첫 번째 우리의 개를 보니 이미 적응훈련을 위해 목에 쇠줄이 감겨 있었다. 문을 열자 개가 요동을 치며 튀어 올랐다. 주인인 이씨가 목줄을 힘껏 잡아챘는데도 여간해서 개의 움직임이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간의 스트레스가 엄청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잠시 후 개가 소란을 멈춘다. 하루에 몇 차례 받아야 한다는 적응 훈련. 15일이 너무나 길다.

▲ 처음 밖으로 나온 개. 한참을 요동치다 가라앉아 있는 상태. 4월 6일 현재.
ⓒ 전경옥
뒤쪽 우리를 보니 목에 쇠줄이 없다. 우선적으로 앞쪽의 개들을 풀어주고 뒤쪽의 개들은 나중에 순번을 받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뒤쪽 개들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한다. 좀더 기간을 앞당길 수는 없을까. 다급하고 초조한 마음이 절실할 뿐이다.

▲ 뒤편 우리에 있는 개. 아직 목에 쇠줄이 없다. 4월 6일 현재.
ⓒ 전경옥
이미 이씨가 조금씩 개들을 빼내 왔지만 첫 번째 줄 맨 끝 우리에는 아직 두 마리씩 개들이 들어가 있는 곳도 있었다. 사람들이 왔다갔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자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철망을 물어뜯고 옆의 개들과 싸우기 시작한다. 이 분쟁과 싸움이 언제나 그칠 수 있을지.

▲ 싸우고 있는 개들. 4월 6일 현재.
ⓒ 전경옥
개집을 조립하는 사이 다른 개들이 있는 장소로 올라갔다. 옆에는 공원 조성을 위해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었고 소음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요란한 소리에 일부 개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저 멀리 산위 나무에 묶여 있는 개들도 여전히 보였다. 그 개들에게는 언제나 집이 생길까. 지난 봄비가 개들에게는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 태어난지 15일 된 새끼들. 4월 6일 현재.
ⓒ 전경옥
그 와중에서도 생명은 태어나고 있었다. 태어난 지 15일 된 새끼들. 이 새끼들은 아무 일 없이 건강할 수 있을까. 매년 이어지는 행정기관과의 불화와 철거 집행. 어떤 상황도 이 아이들을 보호해 줄 수 없을 듯하다.

허준형 회장은 장수동 사건에 이어 산곡동 사건의 개들을 책임지고 치료해 왔다. 허 회장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개농장 사건의 원인에 행정기관의 잘못된 인식이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했다. 법적 집행은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살아있는 생명을 옮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물 전문가의 자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허 회장은 인천시에 앞으로 있을 행정집행 시 수의사협회의 자문을 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한다. 문제는 인천시 만이 아니다. 전국 어디에서도 이런 일은 발생할 수 있다. 물건이 아닌 이상 소중한 생명을 다루는 데에는 최소한의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 공터에 모아놓은 개집. 총 50개. 4월 6일 현재.
ⓒ 전경옥
12시경. 개들의 적응훈련이 끝나면 하나씩 고정시켜 놓을 개집이 다 모였다. 총 50개. 개들의 적응훈련과 치료를 도와주시겠다는 수의사도 있다. 개집을 트럭에서 내리고 있는 와중에 지나가던 주민이 묻는다.

"이러다 완전히 여기에 정착하는 거 아니예요? "

짖는 개소리와 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냄새. 주민들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먼저 귀중한 생명이 어찌 될지 물어주는 고맙고 정다운 말투가 그립다. 또 다시 쫓겨나면 개들은 어디로 가라는 것인지…. 장수동 사건에서는 동물단체가 범법자가 되었고 산곡동에서는 수의사들이 사비를 털고 자원봉사를 자청했다. 예산 마련을 위한 항목을 법적으로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공원관리소 측 주장. 대한민국의 법은 너무도 무심하다. 살아있는 생명을 구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법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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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유다복음, 기독교 질서 뒤흔들 뜨거운 감자인가

 

 

 

외전 유다복음, 기독교 질서 뒤흔들 뜨거운 감자인가
에수의 지시로 유다가 배반했다는 기술에 대한 논쟁 격화
입력 :2006-04-07 11:00   뉴스앤조이 방철섭 기자
최근 실전(失傳)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유다복음이 공개될 예정이어서 논란을 부를 전망이라는 보도를 보았다. 유다복음은 30년 전 이집트의 골동품 시장에 나온 것으로 지금 스위스 메세나 고(古) 미술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4월 6일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 공개되는 유다복음은 1-2세기 경 이단인 영지주의(Gnosticism, 靈知主義)의 한 분파인 가인 파(Cainites)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 그리스어로 된 것을 4세기 당시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콥트어로 번역해 파피루스에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유다복음은 주후 2세기경 예수의 성육신 사건과 육체적 부활 부정했던 영지주의라는 초대 교회의 이단 종파가 복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정경은 물론 외경에도 들지 않는 신빙성 없는 문서에 불과하다. 그런데 공개된 유다복음의 내용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을 것이고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를 생각하고자 한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위해 유다의 역할은 필수적이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자유 의지와 관계없이 무작정 따라가게 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와의 관계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첫째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심에 있어서 유다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유다복음서의 주장대로 만일 유다가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성취될 수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다의 배반 여부에 관계없이 인류 구속 사역을 얼마든지 이루어 가실 수 있는 주권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가정(假定)이지만 만일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을 지라도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 인류 구속 사역은 성취되었을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요셉을 높이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창 37:5~11)이 요셉의 형들의 음모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이 반드시 필수적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역시 그렇지 않다 그들의 악역은 요셉을 높이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만일 요셉에게 훈련이 필요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말고 다른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고, 다른 방법을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의 결정에 따라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와의 관계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관계없이 무작정 따라가게 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악역을 하기로 예정되었고 그 예정에 따라 그저 악역을 했을 뿐인가 하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종으로 판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선택한 사항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고 그들은 자유 의지로 그 일을 선택 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는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한 가지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기도 하면서 한편 인간의 자유 의지 가운데 선택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벌카워라는 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요셉의 형들은 머리를 짜내 계교(計巧)를 꾸미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악하고 질투심 많은 그들의 행위를 통해 지평을 밝게 비추셨다” 카슨은 말하기를, “요셉의 사건은 한편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다른 한편 하나님께 로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기 위해 악한 행위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선을 이루신다. 그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이는 요셉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나니” (창 50:20).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자유 의지를 따라 행하게 하시면서도 의도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褓)의 물과 같이 움직이신다고 했다. (잠 21:1) 때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마음속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행동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이 그르치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를 강제로 행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 하게 하신다.

성경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로봇처럼 움직인다고 하는 표현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선택, 동생을 팔아 넘겼던 요셉의 형들의 선택, 예수님을 사형 언도했던 빌라도의 선택,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의 선택 역시 모두 자신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유다가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것은 선정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실 맨리는 “이(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는 신비에 해당하는 일이다. 성경은 신비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신비는 더 높은 차원의 계시나 조명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시편 50편 21절을 보면 “내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지 않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분명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게 하신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뤄지도록 섭리(攝理)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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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예수요구로 배반”…유다복음 일부 공개 /김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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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근대성 넘어 ‘이진경주의’로

 

 

 

 

마르크스 근대성 넘어 ‘이진경주의’로
유물론은 물질개념 탈피 ‘외부에 의한 사유’로 재해석
노동계급과 구분해 ‘프롤레타리아 되기’ 주장
오염된 마르크스주의 재구성 작업의 결실
“불온함으로 또다른 불온함 촉발 기대한다”
한겨레 안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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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경은 탈근대주의를 거쳐 다시 마르크스로 돌아와 ‘미래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사유를 펼친다. 사진 왼쪽부터 자본주의 비판의 거두인 칼 마르크스, 서구 근대이성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프랑스 탈근대 사상가 미셸 푸코와 질 들뢰즈, 세계자본주의체제를 ‘다중’의 자율주의 운동을 통해 전복할 것을 제안했던 이탈리아 정치철학가 안토니오 네그리. <한겨레> 자료사진.

‘사회구성체론’ 20년만에 ‘미래의 맑스주의’로 사유 큰매듭

이진경씨의 새 책이 나왔다. <미래의 맑스주의>(도서출판 그린비)다. 그의 이력은 그가 쓴 책으로 대표된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6년), <철학과 굴뚝청소부>(1994년), <맑스주의와 근대성>(1997년),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2000년), <노마디즘>(2002년),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년>. 그는 쉼없이 생각하고 썼다.

<사회구성체론…> 이후 꼭 20년만에 나온 <미래의 맑스주의>는 그 이력에 책 하나를 더하는 의미 이상이다. 책 제목에 마르크스주의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실은 ‘이진경주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그를 말할 때는 <사회구성체론…>과 <미래의 맑스주의>를 언급하게 될 것이다. <사회구성체론…>에서 그러했듯이, <미래의 맑스주의>에서 그는 사상가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를 따라가며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두 책의 또다른 공통점이다.

90년대 이후 그의 화두는 근대의 패러다임에 오염된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재작동시키는 것이었다. 이 화두를 풀기 위해 10여년이 넘도록 사상의 초원 위를 유목하며 고독한(실은 난해한) 전투를 벌였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 서구 탈근대론자들의 문제설정과 씨름했다. 동양사상과 생명과학 등도 섭렵했다. <사회구성체론…> 이후에 나온 모든 책들은 그런 편력의 특정한 대목을 반영하는 것이다. 책이 나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진경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박수를 치건 돌을 던지건,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동안 몇몇 책에서 등장했던 독특한 사유와 개념들이 <미래의 맑스주의>를 통해 비로소 전체적인 얼개 속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 유물론을 물질개념에서 탈피시켰다. “물질이란 말로부터 유물론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유물론에 대한 적절한 정의에 이를 수 없다.” 그는 물질과 관념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유물론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대신 “유물론이란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관념론은 “내부에 의해 스스로 완결되는 사유”다. 유물론은 “모든 것의 본질은 그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철학이다.




이어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한계도 넘나든다.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넘어 인간과 기계와 자연의 합일을 말한다. 그의 생태학 안에서는 “기계와 자연은 더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연으로 돌아가는 보존의 생태주의가 아니라 기계와 문명조차 거대한 자연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게 그의 세계 인식의 틀이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핵심인 노동가치론도 전복시켰다. 기존의 노동가치론은 “노동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노동의 특권적 중심성을 제거해 노동과 비노동의 구별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명제는 과거의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과정의 기계화를 언급하면서 “이젠 ‘인간화된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고 말한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의 계급론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계급을 구분했다. 그가 보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란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에서 배제되거나 벗어난 자들”이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되기’ 전략이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척도에 복속되는 길을 벗어나 이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종류의 가치, 다른 종류의 세계를 창안하는 것”이 핵심이다. ‘프롤레타리아-되기’는 기존 지배질서를 거부하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전략은 그가 주창해온 ‘코뮨주의’의 핵심이다.

거칠게 보자면 그는 국가·노동계급·인간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진경주의’는 확실히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와 상당히 다르다. <미래의 맑스주의>는 이진경이 몸담고 있는 연구집단 ‘수유+너머’가 주창한 코뮨주의적 실천에 대한 하나의 선언이거나 알리바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불온함이 책을 읽는 분들의 또다른 불온함을 촉발하고 증식시키길 바란다”고 적었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함의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그의 깊은 모색의 끝에서, 그러나 여전히 남는 의문은 있다. 지금 이진경의 사유와 ‘수유+너머’의 실험을 불온하게 여기며 두려워 하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이진경의 지적 이력

화염병→감옥→사회주의 붕괴→‘수유+너머’
포기하지 않는 혁명의 꿈 ‘코뮨주의’

400여쪽의 책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맑스주의와 코뮨주의’라는 제목의 장이다. 20여쪽의 짧은 글에서 이진경은 자신의 지적 이력을 담담하게 돌아보고 있다. “돌맹이와 화염병, 매캐한 최루가스로 가득찬 전투의 바람, 혹은 아련한 꿈같은 혁명의 바람”이 스물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1980년대에 대한 회상이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했다. 고민에 빠졌다. “좀 더 나은 삶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한, 맑스스주의는 쉽게 버릴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이 아니었다.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집스런 지조로 그저 안고 가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이념도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사회주의 사회 역시 또다른 ‘근대 사회’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서부터 ‘근대성’에 대한 긴 모색이 시작됐다. 근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으려는 모색은 “맑스주의 외부에서 던져져야 했고, 맑스주의 안에 없는 것, 그 공백을 통해서 사유돼야 했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심지어 동양의 화엄학까지 끌어들였다. ‘수유+너머’ 연구실을 출범시킨 것도 이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연구와 삶이 하나로 결합된, 근대적인 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창안하고 실험하며 새로운 종류의 습속과 무의식을 생산하는 ‘연구자들의 코뮨’”을 시도했다.

이진경은 이제 “기존의 맑스주의,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과 혁명에 대한 구도에 다른 이질적 요소들이 침투해 뒤섞이는 것,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또다른 주류 계급이 된 노동운동을 소수화의 전략을 통해 새롭게 혁명화하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런 그가 ‘급진 혁명가’가 아니라 스테디셀러 작가로 인식되는 경향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 20년전 봄에 나온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서문에서 이진경은 “사상적 논쟁 과정이 주체의 형성과정”이라고 썼다. 코뮨주의의 주체를 형성하려는 그에겐 지금 논쟁할 상대가 없다. 어쩌면 논쟁하려는 사람들이 없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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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강금실 출마선언은 한편의 연극”

 

 

 

진중권 “강금실 출마선언은 한편의 연극”
7일자 <경향> 칼럼 통해 “관조 이론 넘어 실천의 삶 사는 선언” 평가
입력 :2006-04-07 15:00   이응탁 (et-lee@dailyseop.com)기자
▲ 시사평론가 진중권씨(자료사진)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시사평론가 진중권씨는 강금실 전 법무장관의 출마선언에 대해 “희곡의 대사를 인용하는 등 한편의 뛰어난 연극과 같았다”고 풀이하며 “현실 안으로 뛰어드는 실천의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라고 평가했다.

또 “강 전 장관의 출마선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선거전 패러다임의 변화”라며 “그가 화려한 보라색을 실천의 색으로 갈아입은 것은 사회가 색깔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영상문화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진씨는 7일자 경향신문 칼럼에서 강 전 장관을 ‘여성 파우스트’로 비유하며 이같이 밝혔다.

강 전 장관 출마선언, 실천의 삶을 살겠다는 선언

그는 강 전 장관이 출마선언 자리에서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로지 영원한 것은 저 생명의 나무’라고 밝힌 것에 대해 희곡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 박사에 접근해 유혹하며 던진 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강 전 장관이 이런 말을 한 이유가 “한마디로 서재에 처박혀 현실의 밖에서 관조만 하는 이론(theoria)의 삶이 아니라, 현실 안으로 뛰어드는 실천(praxis)의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라고 진씨는 밝혔다.

그는 “사실 현실과 거리를 둔 지식인형의 인간에게 정치권이 보내는 러브콜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과 다름없다”며 “파우스트처럼 강전장관도 악마의 유혹에 제 영혼을 맡겼다”고 덧붙였다.

진씨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가 가진 마법의 힘을 빌어 현실 속에서 여러 체험을 하는 것이 마치 오늘날 우리가 컴퓨터 그래픽의 힘을 빌려 사이버 공간에서 가상의 체험을 하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며 “가상과 실재, 정치와 오락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정치는 날로 ‘폴리테인멘트’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여당의 후보가 출마선언을 당사가 아닌 극장에서 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덕수궁 돌담을 끼고 정동극장까지 걸어가는 강금실 이벤트는 탄탄한 드라마투르기에 입각해 짠 한 편의 뛰어난 연극을 방불케 한다”며 “출마선언을 하면서 희곡의 대사를 인용한 것 역시 연극적이다”고 지적했다.

이어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고양시킨다’ 역시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이라며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을 구한 것이 박근혜라는 여성 정치인이었듯이, 위기에 빠진 열린우리당 역시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서 구원을 찾으려는 모양이지만 이 구원은 여당만의 것이 아니라 정치 자체의 구원이다”고 주장했다.

강 전 장관의 화려한 보라색, 선거전 패러다임 변화 반영

진씨는 이와 함께 선거전의 패러다임이 “2002년 서울시장 선거가 문자와 문자의 대립이었다면, 2006년 선거는 문자와 영상의 대립이 될 모양이다”이라며 강 전 장관의 출마 선언에서 이런 것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낡은 문자문화와 새로운 영상문화. 미래가 어느 쪽에 있는지는 말할 필요 없을 것”이라며 “게다가 우리의 정치도 서서히 살기 위한 저개발(低開發) 정치에서, 놀기 위한 과개발(過開發) 정치로 이행하고 있잖은가”라고 반문했다.

진씨는 “문자에는 색깔이 필요 없지만, 영상에는 색깔이 필수적”이라며 “색깔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영상문화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잿빛 이론의 색깔을 벗고 화려한 보라색 실천의 색으로 갈아입은 우리의 여성 파우스트. 그의 앞에는 이제 정치라는 악마가 펼쳐줄 마법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며 “오늘날 메피스토펠레스의 마법을 대신하는 것이 바로 영상의 테크놀로지다”고 밝혔다.

그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실수하는 법이다’ 역시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인데, 인간이 실수를 한다는 것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잿빛 이론의 밖으로 나와 여러 오류를 범했던 파우스트 박사. 생의 마지막에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영혼을 앗아가려 하나, 신은 그의 영혼을 구제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강금실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 정치라는 악마의 손에 떨어질까? 아니면 신의 손으로 돌아갈까? 시민이라는 이름의 신들은 그의 영혼에 과연 어떤 판결을 내릴까?”라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글을 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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