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에서 찾기나의 1960년대

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6/02/05
    야마모토 요시타카 [나의 1960년대] 5장 지구물리학이라는 학문
    뎡야핑

야마모토 요시타카 [나의 1960년대] 5장 지구물리학이라는 학문

  • 등록일
    2016/02/05 14:44
  • 수정일
    2016/02/05 14:44
  • 분류

일본어 강독하는데 맡은 부분을 조금 번역하고 있다. 초벌 번역에다 일부이고 중간에 빼놓은 문장들도 있지만 올려놓으면 검색해서 방문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니까 올려봄.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1941년생으로 전공투의 '안보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도쿄대 물리학과 출신이다보니 그 이후 정치평론가뿐만 아니라 과학사저술가로서 잘 알려져있습니다.
일본에서 1960년대에 대해서는 "60년대론"이라고 해서 일정하게 형성된 역사적 담론이 있습니다.
전공투의 지도부였던 야마모토 요시타카가 2015년에 이르러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합니다.

-by 선생님

 

5장 지구물리학이라는 학문

지진학, 해양학, 기상학, 지구전자기학 등 지구물리학이란 학문은 돈벌이는 어쨌든 군사와 그 시초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동대(=동경대) 물리교실 창시자로 일본 지구물리학을 개척한 동경제국대교수 다나카 다테아이키츠(1856~1952)가 지도했던 전국적 지자기 측정은 일러전쟁 당시 해군의 필요성과 밀접히 연결돼 있다. 자침(磁針, 콤파스)이 정확하게 북쪽을 향하지 않는 동서에 조금 빗나간 자기편각(편각: 자침이 가리키는 방향과 지리학적 자오선 사이에 생기는 각; 방위각)은 지구상 각점에서 다른데, 해상의 각점과 그 편각의 정확한 값이 당시는 항해에서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물리학사>에 따르면 다나카는 1904년 발표한 이 측량결과를 인쇄중의 원고 그대로 해군수로부에 제공했다. 그 해에 시작된 일러전쟁을 위해 훨씬 새로운 지자기 관측자료로 역할해, 후에 해군수로부의 대규모 지자기 측량사업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이과계 학자에 대해 “옛날 학자는 일러전쟁 개전도 모른 채 연구실에 틀어박혀 시험관을 만지작대며 계산자를 사용해 오직 연구에 몰두하는 은자라고 세간에 간주되고 있다”고 잘도 쓰고 있는데, 메이지 시대 물리학자는 전쟁에 솔선해서 협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부로부터 메이지유신을 거쳐 ‘해방(海防)’이라는 말이 있었다.1855년에 설계된 ‘해방국’은 요즘말로 외무/국방성임. 사방이 바다로 둘러쌓인 일본에서는 국방이란 단적으로 말해 ‘해방’이었다. 페리가 태평양을 넘어왔을 때부터 막부가 중요성을 인식. 근대 일본의 해양학은 군사상의 필요성으로부터 생겨났다.  당시 해양연구를 추진한 해군수로부는 1871년 전쟁 전 일본 ‘해군해도’라는 해도를 만들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해외에 진출하는 것과 관련해 해양학의 중요성이 더 높아짐. <과학지식>에서 한 학자는 해군수로부에서 본인이 시작했던 쿠로시오 해류 조사에 의해 대만 동쪽 해안부터 보소 반도 앞바다까지의 소위 쿠로시오 해류의 정체가 명확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해양학회가 창설된 것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한 해. 그 발족총회에서 동대, 경대, 구대 외에 해군수로부가 인사를 했다. 지금도 방위성과 문부과학성 소관의 독립행정법인 해양연구개발기구와의 제휴가 논의되고 있다.

 

해양학과 군사 관계는 물론 일본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1940년 유럽 전쟁에 미국의 참전이 얘기되기 시작할 때 미합중국정부는 국방연구위원회를 설치했고, 그것은 일본개전 당시, 즉 2000명 이상의 과학자가 관계한 450 건의 계약을 체결하고 있었는데 거기엔 (소수의 해양생물학자를 제외하고) 모든 해양학자가 포함돼 있었다. 미국에서도 해양학자들이 전쟁에 전면 협력함.

 

기상학도 군사와 밀접. <과학펜> 1940년 12월호에 실린 글은: “독가스 발사에 즈음해 그 구름이 낮게 떠다니는* 기상적 조건을 고려한 전대전에서의 독일군의 활약은 실제로 눈이 부셨다. 그 성공은 국부적 풍향과 접지기층에서의 기온분포, 난폭한 소용돌이(乱渦)의 성쇠를 예측하기 시작한 성취에 있다”

(* 迷低란 단어는 없고 ていめい[低迷]저미;구름이 낮게 떠돌아다님;향상이 여의치 않음)

 

<과학지식>에 1938년 5월호부터 연재된 조선총독부관측소 소장의 “전쟁과 기상”이란 글에 전쟁과 기상이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제외국에서도 군비의 충실을 꾀하는 것과 함께 착착 기상관측망의 충실정비를 행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청일전쟁 후 히로시마는 해외파병의 거점이었따) 메이지 27년 7월 청일전쟁 중 대본영은 히로시마로 나아가(?) 9월 16일 이후 전국의 기상요소를 매일 히로시마 관측소에 전보로 보내고, 기상도를 만들어 대본영에 뽑아 보냈다. 메이지 37년 1월 일본-러시아 사이에 전운이 감돌며 조선과 청나라에서 기상 조사에 임해 2월 이후 기상관측원 및 기상관측소를 증가시켰다. 전선의 확대되는 것과 함께 점령지 부산, 목포, 인천, 원산 등지에 임시관측소를 지정하고 관측결과를 전보로 보냄. 이 사람들 나중에 훈장 받음

 

이미 청일-러일 전쟁에서 기상학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 해외 관측소는 전쟁의 결과로 설계되어 오직 다가올 전쟁을 위해 설치되었던 것.

 

기상학자 오카다는 일본의 기상사업의 근간을 구축한 사람으로 불리는데, 1874년 생이다. 그 다음 해에 기상관측이 메이지 정부의 사업으로 시작. 1923년에 중앙기상대 대장으로 취임해 쇼와 원년부터는 동대 교수를 겸임, 전후 1956년 83세로 사망. 발틱 함대와 일본해 결전의 날의 연합함대사령장관으로부터 대본영에 타진된 유명한 전문(電文)의 말미에 “오늘 날씨 ??”*는 오카다에 의한 그 날의 요동반도 부근 해상 기상예측을 받아적은 거였다.

* 「本日天気晴朗ナレトモ波高シ」、連繋機雷作戦使えず


단어

かねもうけ[金もうけ]
[명사,ス자동사]돈벌이.
いい金かねもうけがある좋은 돈벌이가 있다.

くさわけ[草分(け)]
[명사]황무지를 개척함; 또, 그 사람; 전하여, 창시(創始)함; 또, 창시자.

とじこもる[閉じこもる·閉じ籠る]
[5단활용 자동사]틀어박혀 나오지 않다; 두문불출하다.

いじる[弄る] 중요
[5단활용 타동사]

    주무르다; 만지작거리다; 만지다.
    애완(愛玩)하다.
    (제도·기구 따위 개혁에) 손대다.

よすてびと[世捨(て)人]
[명사]속세를 떠난 사람(승려나 은자(隱者)).

かいぼう[海防]
[명사]해방; 바다[해안]의 방비.

めざましい[目覚(ま)しい] JLPT N1
[형용사]눈부시다; 놀랍다.[문어형][シク]めざま-し

欲を言えば
욕심을 부리자면; 욕심 같아서는

しょうちょう[消長]   소장; 성쇠.

かみひとえのさ[紙一重の差]
종이 한 장 (두께)의 차이; 근소한 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