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이방가르드 ( Cyvangarde) _ 2012. 05.
연분홍치마,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해 독립 다큐의 길을 걷다
By 이광석
성적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이 가장 크게 작동했던 순간은 내 30대 유학 시절인 듯 싶다. 미국 땅을 처음 밟아 내 석사 지도교수로 삼았던 이가 게이였다. 그는 한겨울 어둠 속 독일의 한 마을에서 내게 가슴 속 얘기를 꺼냈다. 상아탑내 성적 ‘핍박’을 피해서 샌프란시스코와 같이 문화적으로 개방된 곳으로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고. 그러다 얼마되지 않아 차선책으로 그는 예술을 하던 동거남과 함께 토론토로 떠났다. 텍사스의 마초 문화로부터 ‘팽’ 당해 떠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곧 난 정반대의 인간을 만났다. 내 석사 지도 교수를 밀어낸 학과의 권력자인 바로 그 여성 교수의 밑으로 박사 지도를 받기 위해 들어갔다. 그녀는 학과내 권력을 배경으로 같은 과 트렌스 여성(MTF; 남성에서 여성으로)에게 대놓고 성적 모욕을 끼친 혐의로 신문에 오르내리기까지 했다. 미국의 학계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그들을 뒤로 하고, 난 학위 후 이역만리 호주로 향했다. 그곳 첫 직장에서 나를 반겨줬던 이도 우연인지 영국 캠브리지 출신의 게이 교수였다. 사실상 십여년을 이국에서 ‘에일리언’이자 유색인종으로 살아가는 내게 게이 스승들은 사회 속 마이너로 살아가는 법을 내게 가르쳤다.
40대에 접어들어 국내에 들어와 살다보니 이 모든 것을 잊고 살았다. 더구나 토양이 바뀌고 정치가 하류이니 관심이 자연 세상 정치에만 쏠리던 차였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아끼는 한 후배의 물음으로 30대에 저 멀리 잊었던 망각이 이 땅에서 꼬리를 물며 되살아났다. 일상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그녀는 내게 연분홍치마라는 여성주의자들이 제작한 <종로의 기적>(2010, 연출 이혁상)이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난 그녀의 말에 순발력이랍시고, MB 시장 시절 청계천 복계공사의 허실을 들추는 정도의 이야기 아니냐고 되물었다. 아뿔싸, 이 무슨 무지의 소치란 말인가! 게이의 고향,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서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펼치는 4명의 이야기를, 나는 관성에 이끌려 되는대로 답했으니 이 얼마나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정치의 과잉에 물들고 찌든 이의 표본적 모습이던가. 주류정치의 익숙함에 열정은 온데간데 없고 소수자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무지만 켜켜이 쌓이던 내 모습을 후배에게 처절하게 들켜버렸다. 결국 그 후배의 인도를 받아 난 말로만 듣던 ‘연분홍치마’를 만나러 직접 나서게 된다.
연분홍치마의 초기 활동
연분홍치마는 2001년 몇 번의 사전 모임들을 갖다가 2003년 정식 발족한다. 제각기 영화학, 미디어학, 사회학 등 서로 다른 공부를 했던 김일란, 홍지유, 한영희, 이혁상, 김성희 다섯명의 여성주의적 삶을 지향하는 이들이 뭉쳤다. 이들은 처음부터 ‘성적 소수 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으로 출발해, 스스로 성소수자를 위한 문화운동 활동가들의 모임으로 입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연분홍치마는 일상 속 젠더 이분법에 갇힌 현실 속 차별의 지점들을 걷어내려고 사회내 성적 감수성을 바꾸어나가는 문화 활동을 꾸준히 펼쳐나갔다. 처음에는 성적 소수자들의 삶을 알리고 일상적 차별과 억압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을 주로 관련 현장 실태 조사를 중심으로 수행했다. 곧이어 이들은 연분홍치마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쟁점을 드러내고 대중의 성적 감수성을 끌어올리고 이에 대한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한 방법으로 다큐멘터리 매체와 장르적 장점을 발견한다.
연분홍치마는 일단 경기도 평택 기지촌 여성과 함께 하며, 다큐멘터리 제작을 처음 시작한다. 기지촌에서 일하는 혼혈 여성에 대한 실태조사를 병행하며 이뤘던 이들의 첫번째 다큐 프로젝트인 셈이다. 2년여 작업을 통해 연분홍치마는 <마마상>(2005, 김일란, 조혜영 연출)이란 작품을 내놓았다. ‘마마상’은 포주와 성매매 여성들을 연결하는 중간 포주격의 업소 ‘언니’들이자 ‘아줌마’들로 불린다. 연분홍치마는 마마상이란 성매매 노동자의 기생 계급이자 노화로 퇴물이 된 마마상들의 모습에서 기지촌 성매매 메커니즘을 밀착해 살핀다. 하지만, 다큐 연출자들은 단순히 마마상을 성매매 여성의 몸을 착취하는 가해자로만 단순화하지 않는다. 그들 성매매 기생 집단 또한 성매매 구조의 피해자임을 보여주려 한다.
사실상 어설프게 시작했던 이 첫 다큐 작업을 통해 내부 구성원들은 다큐 제작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문화활동가로서의 그들의 운동에 대한 열정과 다르게, 다큐 제작 현실에서 오는 아마추어리즘의 문제나 제작 기술과 기법에 대한 차이나 체득 정도는 반복과 학습을 통해 얻어져야 하는 것들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제작 능력을 서로 엇비슷 끌어올리는 방도를 이들은 이 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한다. 연분홍치마는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다큐 학습과 제작 실습의 시기를 보낸다. 이른바 ‘미디어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자체 다큐 제작 교육을 실시하고, 이주여성과 장애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교육을 미디어운동의 차원에서 시작한다. 이주여성과 장애여성 스스로가 그들의 사는 모습을 찍고 담는 미디어 교육을 장려하면서, 연분홍치마는 나름 사회적 소수자 운동의 변경을 넓히면서도 그들 내부의 다큐 제작 역량을 튼실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았다.
워크숍으로 다져진 내공으로 첫 작품 후 3년 만에 그들 <3xFTM>(2008, 김일란 연출)이란 두 번째 프로젝트 결과물을 내놓는다. 이 작품은 다큐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들만의 고민이 처음으로 짙게 배어 있다. 이전까지 없었던 다큐 관객에 대한 고민, 독립 다큐 운동과의 연계성 속에서 배태된 그들 작품에 대한 성찰, 그리고 수년간의 워크숍에서 축적된 다큐 기술적 역량의 표출 등이 어우러진, 처음으로 프로 의식을 담은 작품이었다. 김일란 감독의 <3xFTM>은 제목처럼 세 명의 ‘FTM’(female to male) 트렌스젠더들의 일상과 삶을 담아내고 있다. 다큐의 주인공들은 영화 속에서 FTM 이전과 이후에 단순히 하나의 감성으로 묶어 세우기 어려운 각각 서로 다른 젠더감각의 결을 드러내고 그들만의 독특한 일상과 욕망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감독의 영화는 성적 소수자들, 특히 트렌스젠더들 속 삶의 가치와 욕망에도 서로 다른 결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에 이르면, 우리가 평소에 기댄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성적 정체성 구도라는 것이 얼마나 박약한 인식에 근거했던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연분홍치마의 다큐 3부작
2008년 트렌스젠더를 다룬 <3xFTM>을 기점으로 연분홍치마의 성원들은 매년 1편의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다큐 영화들을 제작했다. 대표적인 성소수자들의 커밍아웃 다큐 3부작으로 꼽는, <3xFTM>, <레즈비언 정치도전기(이하 레정기)>(2009, 한영희, 홍지유 연출), <종로의 기적>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레정기>는 한국 최초 커밍아웃 국회의원 후보 레즈비언 최현숙의 선거운동본부에 함께 참여하면서 남긴 기록을 다큐 영화화한 것이다. <레정기>는 한국사회 진보진영을 표상하는 가장 유연하고 급진적인 ‘진보신당’조차 그녀의 성적 정체성에 맞딱뜨리면 기성의 정치 세력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조직 생리를 보여준다는 점을 뼈아프게 지적한다. 정치 1번지 종로 지역에서 최후보 선거본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6%의 득표로 관성과 현실의 벽에 좌초하고 말지만, 시종일관 영화의 톤은 유쾌하고 발랄하다. 영화는 단순히 담론정치의 수준이 아닌 최초의 성소수자 정치가 어떻게 조직될 수 있는지를 추적해 보여주고, 기존의 전통적인 노동운동 등 진보 진영과 연합하는 레즈비언 정치가와 이들 선거본의 모습에서 수치상에서 보여준 좌절이 아닌 새로운 문화정치적 희망 가능성을 독해해낸다.
트렌스젠더와 레즈비언의 스토리는, 필자를 대오각성하도록 유도했던 게이들의 삶을 다룬 <종로의 기적>에서 완성된다. 성적 억압의 도시풍광 후미진 한 껸, 동성애자들에게 종로 낙원동은 마음의 안식처이자 진짜 ‘낙원’이기도 하다. 이혁상 감독은, 이곳을 배경으로 네 명 게이남성들의 삶을 경쾌하고 발랄하게 추적한다. 이 영화에서 네 명의 소수자들의 일상을 통해 관객은, 성적 소수자란 사회의 낙오자나 비정상인이 아닌 누구보다 사회와 현장의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삶을 적극적으로 꾸려가고 그 사회 체제를 구성하는 적극적 주체라는 자명한 사실에 또 한번 눈을 뜬다. 연분홍치마의 이렇듯 단 다섯명의 구성원은 단 3년동안 매년 서로 다른 정체성을 점유하는 성적 소수자들의 다양한 커밍아웃 스토리를 필름 안에 미친 듯 담아냈다.
다큐 영화를 촬영하면서 이들 연분홍치마의 다큐 감독들이자 성원들은, 다큐 작품의 출연자들과 함께 매번 프로젝트를 함께 완성해 간다는 운동적 차원의 철학을 함께 공유하고자 했다고 회고한다. 연분홍치마 다큐의 시작과 엔딩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연분홍치마 프로젝트 O번’이란 번호는 성원들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이들의 다큐가 영화의 형식이자 또한 문화 운동이란 점을 매번 강조하고 있다. 예서 운동이란 전체 독립 다큐 진영의 차원에서 이들이 만드는 다큐의 정치적 역할론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연분홍치마를 두고 보면 성적 소수자를 위한 많은 문화 정치 중 하나로 이들이 다큐를 사유한다는 점일 게다. 상황이 그러다보니 이들은 출연자들을 단순히 배우로 취급하기 보다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고동락의 동지들로 보려고 했고, 이에 출연자들이 그만큼 호응하지 않을 때 실망감 또한 배로 다가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도 그들의 과욕임을 쉽게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같은 지점을 사유하여 공동의 기획에 참여했으나 각각 역할의 차이를 서로 인정한 까닭이다.
<두개의 문> 이후
노순택, 2009
출연자에 대한 과도한 동지감이나 기대치를 접고 나면, 연분홍치마의 강점은 명확해진다. 먼저 사회 참여와 다큐 제작을 긴밀히 연결해 문화 운동의 활력과 시너지 효과를 얻는데서 찾을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연분홍치마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현장 실태조사, 현실 사회운동단체들과의 사안 공조, 관련된 다큐 제작 프로젝트 작업을 함께 잘 연계한다. 여느 독립 다큐 제작자들의 제작 동기나 과정과는 사실상 차이가 크다. 즉 개인적 착상이나 작업에 의해 구성되는 일반적인 다큐 제작과 달리, 연분홍치마는 철저히 다큐 제작을 문화운동가나 활동가적 틀에서 사고하고 연계한다. 그러다보니 철저한 현장 조사와 시민 단체들과의 연대에 기반하여 다큐를 제작한다는 특색이 있다. <마마상>의 기지촌 ‘반성매매팀’의 혼혈 성매매 노동자 실태 현장조사에서부터 내려온 이러한 전통은 이후 성전환자 실태조사, 한국 최초 커밍아웃 국회의원 후보 레즈비언 최현숙 선거운동본부의 캠페인 참여, 용산참사 대책 범대위 활동 참여와 법정 녹취작업 등에서 잘 이어져 내려온 바다.
현장-운동-다큐 제작의 3박자에 기반한 연분홍치마의 활동은 최근 <두개의 문>(2011, 김일란, 홍지유 연출)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두개의 문>은 오직 용산 참사 이후 이뤄진 법정공방 녹음과 녹취, 법원에 제출되어 변호사들에게 입수된 경찰들의 채증 동영상, 그리고 사자후 등 1인게릴라 미디어에 의해 기록된 동영상만을 가지고 재구성한 작품이다. 사건 이후 국면의 촬영을 통해 거슬러 상황을 추적하는 전통적 다큐의 방식과 달리 오직 사건 현장을 알리는 증거 자료들만을 콜라주 형식으로 주도면밀하게 분석해 당시의 상황을 해석하여 보여준 수작으로 꼽힌다. 이는 사실상 연분홍치마의 용산참사 범대위 활동 참여, 즉 관련 시민단체와의 긴밀한 연계와 활동이 없이는 자료 접근 등 내용 구성면에서 온전한 다큐 작품이 만들어질 수 없음을 뜻한다.
연분홍치마가 커밍아웃 3부작 이후에 <두개의 문>을 제작하면서, 기간에 그들이 관심을 가졌던 성 소수자 쟁점에서 빈민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권력 엘리트들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들추어내는데로 작품 초점이 확장되거나 이동한 것이 아니냐는 관객의 추측을 낳게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시기적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이끌었고, 본연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을 알리고 드러내는 작업이라 확신해 말한다. 그래서인지 <두개의 문>에서도 난 그들의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감수성을 감지한다. 이 영화에서 특이하게 김일란과 홍지유 감독은 권력의 수족이 되어 진압에 앞장서야했던 일선의 ‘경찰특공대’를 유달리 주목한다. 용산 철거현장에서 참혹하게 타죽었거나 감옥에 갇힌 남일당 망루의 당시 철거민들과 비슷하게 권력 엘리트들에게 농락당한 힘없는 이들로 진압 경찰을 함께 묘사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실제 ‘마마상’과 ‘경찰특공대’는 쉽게 외양만 보면 권력과 억압을 위해 복무하는 굴종의 존재로 비춰진다. 허나 연분홍치마는 단순 이분법의 사회 논리구도의 허상을 거둬내고 이들을 사회적 약자의 일부로 감싸 안으려 한다. 대신에 두 감독은 실제 참사를 일으킨 당사자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그 대립의 각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지를 좀 더 치밀하게 계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오히려 망루 아래 놓인 두 개의 문 중 어디로 가야 할지 사전 정보도 없었던 경찰특공대의 모습에서, 그리고 성급한 폭력 앞에서 잿더미가 되버린 철거민들의 시신에서 우리는 권력 앞에 무력하게 표류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연분홍치마는 내년이면 얼추 10년 세월의 무게를 쌓는다. <노라노>(2013, 연출 김성희)를 끝으로 일단 이들은 활동의 시즌 첫 시기를 정리하려 한다. 이 다큐는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로 주름을 잡던 노라노란 여성을 통해 본 패션의 대중문화사쯤 된다고 한다. 이것이 마무리되면 연분홍치마는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기 위해 재충전의 시기를 가질 것이다. 미술을 통한 사회 치유 프로그램이 주목받는 것처럼, 이들은 이후 미디어워크숍을 통해 새로운 사회 치유의 방도를 고민하겠다 한다. 한 가지 바램이 있다. 연분홍치마가 쉬어가는 동안, 이제까지의 성적 소재주의(성매매여성,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게이 등)에 기댄 ‘커밍아웃’ 스토리에서 벗어나 그들간 내적 차이나 결들을 드러내는 깊이있는 다큐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 하나 더. 좀 더 자본 권력의 맥락 안에서 섹슈얼리티의 퇴화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비판적 다큐 작업들을 후속작에서 담아내길 기대해본다.
//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