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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혁신과 모빌리티 - ‘알 권리’ 신장을 위한 정부의 문서혁신이 돼야

문서혁신과 모빌리티 - 일상, 기업, 정부 영역에서 확산되는 새로운 혁신의 디지털 문화

이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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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문서의 발달은 관료주의의 직접적 산물이다. 서구 유럽의 17, 18세기 고전주의 시대에는 정부의 공문서에 서명을 첨부하면서 그 권위를 보증받기 시작했다. 권위의 진정성을 표시하는 방식은, 무명으로 만든 종이 바탕에 심볼을 각인하여 만든 고유의 형식지, 봉인, 그리고 서명을 통해서였다. 무명지에 각인된 심볼과 타이틀은 소속 기관의 권위를, 서명은 그 권위의 출처를, 봉인은 문서에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을 정하는 표식이 되었다.

 

형식화된 공문서를 통한 국가 관료제의 확대는 시장의 기업 조직에도 참고 사항이 되어 영향을 미쳤다. 식민주의와 전 세계적 상권의 형성과 자본의 글로벌한 이동으로 말미암아 문서혁신은 점차 기업에 주도권을 넘기게 된다. 즉 기업 조직의 거대화와 글로벌화로 인한 업무 처리의 효율성이 관건이 되면서, 그리고, 80년대 극소전자통신혁명으로 말미암아, 기업들은 인트라넷 등 원격 네트워크를 통한 문서 결제 시스템의 도입을 이미 폭넓게 추진했다. 크게 보면, 근대 이래로 효과적 업무 처리를 위해 정부, 기업 할 것 없이 문서 형식은 그야말로 폭넓게 적용되어왔고, 때론 필요 이상의 문서 형식들을 만들어내면서 과도한 관료주의의 폐해를 낳기도 했다.

 

한국의 상황을 보자면, 사실상 현대적 의미의 문서혁신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전자정부’(e-government) 프로젝트 덕택이다. 이는 김대중 전임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정책 과제의 핵심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정부 업무의 관료적 효율성 재정비, 대민 서비스 강화, 종이문서 낭비와 비용 절감 등의 효과 때문에 시작된 논의가 문서혁신이었다. 최근의 문서혁신 논의는 이를 한 단계 업그레드하여 진전되고 있다. 즉 종이문서의 감축(페이퍼리스 환경 구축)을 통해 그린 IT 환경을 구현하자는 맥락을 넘어서서 모바일 업무 환경을 구축하여 생활의 전면적 변화를 도모하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그 혁신의 영역은 크게 보면, 우선 정부 영역과 몇몇 국내 기업들이 주도하는 모양새다.
 


일상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의 문서혁신 문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일상을 영위하는 오늘날 현대인들을 보자. 특히 젊은 세대들의 디지털 문화를 들여다 보자. 전자 문서를 읽고 수업에 임하거나, 과제 제출을 프린팅하는 대신 파일로 온라인 공간에 올리는데 대단히 익숙하다. 필서하기 보다는 교수 강의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내용을 보면서 강의 노트를 만든다. 필자의 경우도 어지간한 학술 논문, 보고서, 뉴스 기사를 전자문서 읽기 형식으로 저장해, 노트북의 키워드 찾기 기능으로 중요한 관련 문서들을 원하는 부분은 뽑아서 읽고 참고하는데 대단히 익숙해져 있다. 예를 들어, 포탈이나 블로그를 통해 중요하다고 보는 기사 콘텐츠는 그 자리에서 전자문서 형식으로 저장하거나, 오픈 색인 프로그램을 통해 아카이브(archive)화 작업을 수행한다.

 

스마트폰, 아이패드, 넷북, 아마존의 이북리더기인 킨들의 대중화는 결국 현대인들에게 종이책을 찾아 읽는 행위보다도 모니터를 통해 문서들을 대하는 시간을 더욱 늘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달리보면 이는 현대인들이 책을 통해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식과는 다른, 개인 이동형 매체에 저장된 수많은 전자 문서들을 빠른 시간내에 정확한 정보를 불러들여 참고하고 인용하는 새로운 지식이용 방식의 변화된 문화에 맞춰 문서혁신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안과 효율에 방점 둔 기업의 문서혁신

 

현대 기업들로 가보자. 이들의 입장에서는 문서혁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개인의 차원과는 다른 목적들이 존재한다. 최근 위키피디아, 플릭커,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의 대중화와 발전은 기업에도 대단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서혁신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정보/지식 공유와 협업 구도를 통한 기업 효율성의 원리를 강조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자율적인 방식으로 좀 더 개방된 환경하에서 기업내 정보를 공유하거나 함께 축조해나가는 관계와 소통의 소셜 문화가 확산되면서, 문서혁신에서도 이를 응용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이 늘고 있다. 사기업들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협업과 공유의 원리를 극대화하면서도, 불순한 외부자의 침입을 미연에 막거나 내부인력 중에서도 고급 정보에 대한 정보접근 권한을 차등화하면서 문서혁신이 이뤄져야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지사나 오피스 등을 분산화하여 여러 곳에 소유한 기업이나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분산된 정보를 중앙에서 관리하는 통합 서버의 기능이 점차 중요해진다. 중앙 서버의 관리 모드는 통제의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얻을 수 있으나, 그 서버가 외부 침입에 의해 정보가 누출되거나 바이러스 등에 의해 오염될 경우 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이와 같은 위험성에 대한 사전 대비가 있다면, 통합 서버에 의한 문서 저장은 페이퍼리스 환경 구현은 물론이요 어디서든 가능한 유비쿼터스(Ubiquitous) 업무 환경 (24시간 모바일 오피스)을 가능하게 한다.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문서 업무 프로세스를 가시화하여 여럿이서 서로 협업해 과제를 수행하거나 검토할 수 있는 환경을 쉽게 구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U-모빌리티에 기댄 문서혁신 환경은 문서 작성과 프로젝트 수행 시간을 단축하고 수행 능력을 배가하는 중요한 방법일 수 있다.
 

 

‘알 권리’ 신장을 위한 정부의 문서혁신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지막으로, 정부의 문서혁신을 살펴보자. 기업의 입장에서는 공유되는 축적 정보가 지식 자산이 되면서 이에 대한 보안과 관리가 점점 중요하겠지만, 정부 문서혁신의 관건은 오히려 축적 정보에 대한 개방과 접근의 평등성에 있다. 사기업과 달리 정부의 역할은, 대민 서비스와 알 권리 보장이라는 국민의 기본권이 항상 상위임을 유념해 둬야 한다. 그래서, 특수한 국가 기밀 문서의 경우에는 보안과 관리의 측면이 강조되겠지만 일반적으로 정부 문서 혁신의 방점은 U-모빌리티 환경내 비차별적 전자문서 접근 보장이 기본이 되어야할 것이다. 정부 정책 문서들 혹은 관련 대민 정보들에 대해서 다양한 고정형/이동형 전자 미디어들을 가지고 어디서든 접근이 가능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앞으로 정부 문서혁신의 관건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시민들의 생활 반경 어디서든 접근도를 높이는 ‘U-모빌리티’ 가용 능력이 점점 중요해진다.


   그러자면, 사기업의 지적 재산권 등을 통한 사내 중요 문서 보호와 달리, 정부 문서에 있어서는 시민의 자유로운 이용 권리와 관련한 공공 소유 권한을 분명히 정의해야 할 것이다. 특히, 다양한 정부 기관들의 국책 업무를 대행하면서 정부 문서를 관리하거나 새롭게 생성하는 유관 기관들이나 단체들과의 저작권 문제를 분명히 해서, 시민 공유 정보에 대한 소유권 문제를 이들에 일임하는 우를 범하거나 일반인들의 이용 접근에 불편함이 있어선 곤란하다. 특수하게는 문서관리의 통합 서버나 문서 데이터베이스 등에 대한 관리를 일부 외부업체에 위임하면서 시민들의 접근도를 떨어뜨리는 상황을 막아야한다. 예를 들어, 미 연방정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연방 문서 정보들을 혁신과 효율 관리란 명목하에 몇몇 지정된 사기업들에 관리 업무를 위임하면서, 국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해야할 공공 정보의 유료화를 부추키게 되고 결국엔 시민들의 알권리를 후퇴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기도 했다.

 

결국, 문서혁신이란 화두는 정부 기관내 관료주의적 효율성의 개선이나 사기업 내부의 조직 혁신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부와 국민이 맺는 문서 시스템의 혁신에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봐야 한다. 시민들의 정부 문서 이용의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는 U-모빌리티 강화의 페이퍼리스 환경 추구, 통합 서버에 의한 공공 문서들의 체계적 관리, 문서 접근에 있어서 기술적 용이성과 개방성 등이 조화롭게 이뤄진다면, 이것이 바로 시민들이 원하는 정부 문서혁신의 방향이리라.

 

(지역정보화 20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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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디바이스’의 진화와 가족의 재탄생

‘소파 디바이스’의 진화와 가족의 재탄생

 

이광석

 

 


‘소파 디바이스’(sofa devices)란, 말 그대로 주로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거실 소파를 중심으로 활용되는 미디어 장치를 지칭한다. 그러다보니 이 미디어 장치들은 가족 구성원 공통의 여가 활동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 예전 텔레비전 시대를 떠올려 보라. 한 때 가족 성원들이 밖에 나갔다 저녁에 들어와 모이는 공간에 항상 텔레비전이란 ‘소파 디바이스’가 그 중심에 있었다. 옹기종기 가족들의 저녁밥상 머리에 혹은 다과를 나누면서 행하는 가족의 대화에 어김없이 텔레비전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가구가 배치됐고, 그 반대편엔 가족이 진을 치고 앉을 수 있는 소파의 자리가 늘 준비되었다. 이렇듯 텔레비전은 가족 공동체의 집단적 여가 활동의 적절한 대상이자 주요 매체였던 셈이다.

 

90년대 접어들면, 오래된 미디어 기기들이 ‘경박단소’하게 변하면서 대중들은 개인의 취향대로 미디어를 소비하는데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모두들 대중의 분중화와 파편화를 거론했다. 텔레비전의 방송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와 채널들을 통한 소비가 그리 만든 것이다. 이는 개성과 스타일의 부각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의 징후이기도 했지만, 정치적 혹은 사회적 공통 관심사의 축소라는 불편한 미디어 효과를 만들기도 했다. 후자의 측면에서 가족내 구성원끼리의 소통의 단절 또한 거론됐다. 한 때 거실-텔레비전-소파의 축 안에서 거행되던 공통의 가족 ‘의례’(ritual)가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조차 컴퓨터로 내려받아 보거나, 가족 구성원들 각각 각자의 방에서 자신의 선호하는 미디어를 소비하는 형상으로 가고 있다. 예를 들면, 부모들은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형이나 누나는 DMB나 넷북을,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서 컴퓨터나 게임기를 갖고 놀면서, 전통적 ‘소파 디바이스’인 텔레비전 앞에서 맺어지는 가족간 유대가 사라져 간다.  


최근 이렇듯 점점 죽어가는 ‘소파 디바이스’의 영역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애플이 개발한 ‘아이패드’(iPad) 개발 시연에 회장 스티브 잡스가 강연대 앞에 서는 대신, 그 자리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편안히 회심의 개발품을 두드린다. 아이패드를 통해 해체됐다고 믿었던 가족들을 다시 거실에 모을 수 있다는 얘기일까? 이도 허황된 것만은 아닌 것이, 최근 닌텐도 ‘위’(Wii) 광고를 보라. 비디오 게임도 이젠 가족이 함께 즐기는 여가 활동이다. 소통의 실마리는 간편하고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에 있다. 여기에 오락적 요소는 필수불가결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손주, 며느리 모두 모여 위 게임을 한다. 집안의 며느리는 요가를, 할아버지와 손주는 테니스를, 할머니와 아들은 권투를 즐긴다. 게임 도중에 쉬고 있는 가족들은 대개들 흐뭇한 표정으로 소파 위에 기대앉은 채 다른 가족 구성원의 게임을 지켜보거나 응원한다. 결국 이제 위 게임기가 텔레비전을 대신해 신종 ‘소파 디바이스’가 된다. 파편화되고 흩어졌던 현대 가족을 새롭게 모으는 역할을 이와 같은 신종 디지털 장비들이 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위처럼 아이패드 또한 이와 같은 ‘소파 디바이스’ 부류의 전면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소파 디바이스의 초창기 모델들


잠시 좀 더 먼 과거로 돌아가보자. 사실상 소파 디바이스의 초창기 모델은 축음기였다. 태엽을 감아 돌려 소리를 듣는 돌판 축음기부터 엘피(LP) 축음기까지 초창기 소리 장치는 거실 문화의 중요한 요소였다. 워낙 가정내 문화적 향수 자체가 희소했던 시절에 축음 장치는 중요한 가족 여가 수단이었다. 이어서, 보다 본격적인 소파 디바이스는 라디오였다. 1920년대 라디오가 상업화되면서 등장했을 당시, 이는 어지간한 김치냉장고 크기만큼이나 거대했다. 손가락 마디 굵기의 진공관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당시 라디오 크기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일반 가정에서 라디오는 가족들이 함께 여가를 즐기는 중요한 매체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뿐만 아니라 라디오 극장이나 안방 뉴스 등은 가족들이 모여 즐길 수 있는 축음기 이후의 한껏 진화된 매체 형식이었다. 이후 텔레비전의 등장은 극적으로 가족의 유대를 강화했던 매체다. 한 기업 광고에서 진흙으로 만든 인형들을 이용해 근대화 시기의 한국 생활을 묘사했던 시리즈물을 떠올려 보라. 텔레비전이 귀하던 시절에, 김일 박치기 레슬링 경기라도 볼라치면 동네 이장네 안방이나 돈푼이나 있던 집 대청마루 앞에 몰려 가던 시절이 있었다. 텔레비전은, 적어도 한국사회에선 60년대 시골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적 여가 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70년대로 넘어오면, 마을 단위의 공동 시청 유형에서 각 가정의 거실을 지배하는 중요 매체로 군림한다.

 

한편, 80년대 들어서면 기존 라디오는 텔레비전에 소파 디바이스의 자리를 넘겨주고, ‘개인 미디어’로써 그 자리를 잡는다. 그 시기는,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라디오 기술에 일대 혁신이 일던 때와 괘를 같이 한다. 트랜지스터의 가장 큰 이점은 덩치 큰 라디오 크기를 대폭 소형화해 휴대가 간편해진 점이다. 마치 정보국 직원들처럼, 버스에 오른 회사원들이 외짝 이어폰을 한쪽 귀에 꼽고 뉴스와 음악을 청취하던 시절은, 트랜지스터 기술이 만들어준 신문화였다. 당시 청소년은 이런 라디오를 끼고 공부방과 독서실로 향했다. 혹은 집에 돌아와 한창 사춘기 때에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 뒤집어쓴 채 ‘별이 빛나는 밤에(별밤)’을 들으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 나름 매체 소비의 가족간 변별과 단절이 존재했던 시절이다. 당시 어른들은 여전히 거실에 남아 텔레비전을 소비했고, 아이들은 개별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개별 매체의 소비를 즐겼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 90년대로 넘어오면 확연하게 매체의 개별 소비가 확대된다. 십대들은 워크맨과 노트북으로 무장한다. 오디오 청취와 이미지 소비의 공간 이동성이 실내에서 확장되어 길거리 신체 이동의 동선과 함께 하는 시대가 열린다. 2천년대 이후 아이들은 아이폰, 게임보이, 넷북 등에 의존하면서 공간 제약과 무관하게 다면적이고 개인화된 미디어 소비 단계에 들어선다. 어른들 또한 DMB 방송을 휴대전화나 네비게이션 등을 통해 시청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이젠 거실의 텔레비전이란 스펙터클한 영화를 보는 정도에 쓰이는 붙박이 미디어 장치로 전락한다.

아이패드, 가족 재탄생의 신호탄?

 

필자가 현재 사는 아파트에 3세대가 같이 산다. 이처럼 많은 가족 구성원이 같은 시간대에 함께 모일 수 있는 상황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런데도, 다들 모이는 때가 있다. 식사 때를 제외하곤 ‘위’ 비디오 게임을 할 때다. 이 때 거실 텔레비전은 위라는 소파 디바이스를 위해 이미지만을 투사해주는 조력자에 불과하다. 사실상 우리 가족 유대를 키우는데 위가 핵심에 서고 그것이 가족의 여가를 구성한다. 놀이방식의 격세지감이요 변화된 가족의 소통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소파 디바이스로 이제 아이패드까지 거론된다. 아이패드의 인터페이스는 철저하게 터치형에다 대단히 감각적이기 때문에 익히기 쉽게 만들어져 있다. 노인들 또한 몇 가지 기능만 익히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거나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소통을 할 정도로 조작이 수월하다. 집안의 항상 연결된 무선 인터넷 구조를 이용해 손쉽게 정보를 찾고, 아이패드용 체스를 두기도 하고, 맞춤형 잡지를 함께 보고 읽을 수도, 아이패드 게임을 하기도 하고, 간단한 영화도 함께 볼 수 있다. 또는 음식 레시피를 공유한다거나, 집안 관련 경조사나 그날 일의 메모나 스케줄을 함께 관리한다거나 중요한 수입과 지출을 기록해 놓는다거나, 쉽게 즐기는 게임을 올려두는 등의 용도로 쓸 수 있다. 아이패드형 터치스크린 기기들은 다분히 개인형 매체로 볼 수 있지만, 또한 누구든 쉽게 소파에 머물면서 함께 할 수 있는 미디어의 성격 또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본 것처럼, 새로운 소파 디바이스의 출현이 가족 성원들간 소통 방식에 유대와 혁신을 불러올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위나 아이패드 등 미래형 소파 디바이스란 단순히 틈새 기술이란 점을 주지해야 한다. 이미 다양하게 소비자들 혹은 가족들의 분권화와 파편화를 증대하는 신종 기술들과 문화 상황이 대세요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2010. 7. 지역정보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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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일: 불법/탈법/횡법의 예술, 그리고 저항의 미디어 <사이방가르드> |

* 이 글은 문화연구자 홍성일 선생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불법/탈법/횡법의 예술, 그리고 저항의 미디어

<뻔뻔한 미디어 농장 쇼-‘사이방가르드’ 저자와의 대화>


문화연구자 홍성일의 별별 관찰기

http://blog.daum.net/hongsungil/163

 

 

지난 6월 8일 오후 여섯시. 홍대근처의 허름한 지하 클럽 <공중캠프>에서 이광석 박사의 따끈따끈한 새 책 <사이방가르드-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딱딱하고 짐짓 격식을 먼저 챙겨버리는 출판기념회라는 말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문 앞에 거대한 축하화환이 놓여 초대한 이들을 압도하는 것도 아니었고, 모인 이들 또한 티셔츠에 청바지와 같은 활동적인 복장이었다. 저자 이광석 박사 또한 예의 캐주얼한 차림으로 사람들을 맞이했다. 저자의 자리에 올라 글의 주인이 되기보다는 사람들과 수평적으로 글을 나누고 공감하려는 것이었을까. 장소 또한 젊음과 자유의 거리 홍대 근처니 <출판기념회>보다는 <새 책 맞이> 혹은 <북 파티>란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아니면 그냥 문화연대가 주관한 이 행사의 공식 명칭 <뻔뻔한 미디어 농장 쇼-‘사이방가르드’ 저자와의 대화>라고 해두자.

 

<뻔뻔한 미디어 농장>은 지난 2009년 7월 초부터 시작해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집단 좌담회로 이번이 11번째다. <뻔뻔한 미디어 농장>(이하 <뻔뻔>)이란 말이 다소 튀는데, 재미있는(fun), 그러면서도 기존의 상식적 잣대에 ‘뻔뻔하게’ 물음표를 제기하는 행동주의를 표방한다. 11번째 <뻔뻔>의 주인공이었던 이광석 박사는 1회부터 참여하며 <뻔뻔>에 애정과 열정을 기울여온 터줏대감이다. <뻔뻔>과의 인연을 말하자면, 필자 또한 3차 모임에 토론자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때의 주제는 <촛불, 용산 참사, 그리고 미디어 행동주의의 미래>로 용산참사가 있었던 남일당 건물 뒤 레아미술관에서 열렸다(레아미술관은 용산 참사의 희생자 고 이상림 씨가 운영하던 레아호프를 이후 행동가와 예술가들이 결집해 용산 참사에 대한 추모의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곳이다). 뜨거운 여름 오후, 냉방기 없이 땀을 흘리며 용산 참사와 그에 대한 예술인들의 개입, 사회적 실천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는데, 정작 토론 보다는 <뻔뻔>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 하루로 기억한다. 이처럼 뻔뻔은 개입주의, 행동주의를 표방하며 순발력 있게 문화적/시사적/예술적 국면에 반응하고 새로운 의제를 확산하려는데 노력하였다. 회고컨대, 지난 1년은 MB 시대 국가와 자본의 침탈로 황폐화된 문화/예술 공간과 시민사회를 복원하기 위한 동분서주였다. 멈춤 없이 지난 1년을 달려온 <뻔뻔>에 축하의 말을 전하고, 멈추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전개된 지난 1년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낀다.

 

주변적인 소개를 하다 보니 책 소개가 늦었다. <사이방가르드>는 ‘사이버’와 ‘아방가르드’를 한국식으로 조합한 말이다. 정보의 바다 사이버 세계에서 펼쳐지는 발랄하고도 창조적인 예술 전위들의 저항과 개입의 실천을 학문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강단에 갇히지 않을 생생한 어휘로 풀어내고 있다. 이 자리가 본격적인 서평의 자리는 아니고, 필자 또한 서평을 할 만큼의 내공은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언을 한다면, 한국의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이들이 자칫 가질 수 있는 시간적/공간적/사고의 편협성을 개방시키고, 국적과 계급,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의 자유로운 접속과 연대를 고무하는 내용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거대 자본의 지적 재산권에 대한 거부와 저항에서부터 인간과 기계/이종생물체와의 융합에 이르기까지 책이 다루고 있는 소재는 다양하고 아방가르드적이다. 허나, 이러한 외양상의 다종다기는 “만국의 넷티즌들이여, 단결하되 분열하라.”로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공식적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은밀한 일상생활에까지 퍼져있는 자본의 통제, 권력의 통제에 대해 단지 온라인에서의 상징적 저항뿐만 아니라,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넘어들며 실재적 저항을 꾀할 수 있는 다양한 전략과 전술이 책 속에 살아 숨 쉰다. 저자 가 유학중에 느꼈을 법한 산책자이자 부유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이 그의 비판의 날을 보다 날카롭게 갈아 놓았다.

 

홍대에서 열린 <새 책 맞이>는 이광석 박사가 책을 위해 수집한 예술/행동/작업/저항 이미지들의 슬라이드 쇼, 독립미디어 활동가 ‘해ㅋ’와 저자와의 대화, 초대가수 루피(Lupi)의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지면의 한계로 인해 이 날의 모든 풍경을 다 소개할 수 없어 아쉽다. 무척이나 발랄하고 자유로우며 ‘불법/탈법/횡법’적이었다는 것만 언급한다. 아쉬운 것은 저자가 책을 내놓자마자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시금 오랫동안 한국을 떠난다는 점이다. 한국에 살기에는 정작 자신이 ‘뻔뻔’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을 해본다. 허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듯, 그의 새로운 작업과 함께 다시 만날 수 있음을 믿는다. 사이버의 세계에서 국경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에는 보다 한국적인 사이방가르드를 기대한다. 치이고 채이거나, 광분하고 휩쓸리는 가운데 정작 한국 땅에 사는 사람은 스스로를 되돌아 볼 여유조차 없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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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텔레비전 대신 차라리 구글TV를 내게 다오!

3차원 재현의 완벽성이 텔레비전 미래의 전부인가?

- 또 다른 하드웨어 중심주의의 신화론에 부쳐


이광석(@txmole)

최근 3차원(3D) 재현 기술에 국가가 발벗고 나서고 관련 업계가 열광하고 있다. 주도적 혹은 핵심적 IT기술의 선점과 수출 증대는 장기적으로 중요한 국내외 성장 동력임이 분명하다. 이 점에서 3차원 재현 기술은 우리가 욕심을 낼 수 있는 영역이다. 하지만, 3차원 재현기술의 개발은 현재 그리고 향후 전세계 IT시장의 추이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 맥락을 세심히 살핀 후 이뤄질 일이다. 사실상 국제적으로 최고 순위를 지켰던 한국의 정보통신 지수들이 왜 최근 위기 국면을 맞았는 지와도 잘 연계해 따져봐야 할 일이다. 


먼저 3차원 영상기술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를 주도했던 사건은, 해외 영화 <아바타>의 국내 개봉이었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 최고 흥행 기록을 갱신했을 뿐만 아니라, 3차원 영화의 오락적/기술적 가능성까지도 현실화했다. 국내 일반 상영관은 물론이요, 3차원 전용 영화 상영 아이맥스관이 연일 매진 행진을 이어갔던 것은 이를 반증한다. 엄밀히 따져보면 <아바타> 흥행의 성공 요인은, 우선은 잘 짜여지고 탄탄한 스토리에다 특수컴퓨터그래픽(CG)의 효과까지 잘 앉혀있고, 이에 3차원 효과의 맛까지 적절히 가미한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제작자들의 말처럼, 3차원 효과는 “<아바타>란 아이스크림 위에 살짝 얹은 체리”와 같다는 말이 예서 적절한 표현이다. 기술보다 콘텐츠의 중요성을 지적한 말이지만, 아무튼 이로 인해 3차원 기술은 한국에서 대중의 화두가 됐다.

 

입체영화에 대한 이와 같은 오락적 기대치와 함께, 삼성과  LG 등 가전업체들의 새로운 텔레비전 시장 마케팅도 분위기 조성에 한몫하고 있다. 국제 텔레비전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우위를 선점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크게, 플라즈마 티브이와 같이 벽걸이 텔레비전의 가정내 극장화나 가구화와 더불어 3차원 고화질 입체영상을 통한 이미지 재현 능력의 고도화라는 이중의 목표에 걸쳐 있다. 특히, 전자의 영역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재미를 봤던 가전사들이라, 기술적으로 후자의 영역에서 향후 큰 시장 잠재력을 본다. 그래서인지 국내 두 가전사는 3차원 입체 텔레비전 판매 전망에도 대단히 낙관적이다. 6월에 있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등의 특수에 주목하면서, 향후 스포츠나 영화, 게임, 오락 등의 영역에서 3차원 영상 구현의 가능성을 본다. 특히, 국내 ‘디지털 텔레비전’(DTV) 전환과 관련해서도, 3차원 영상 구현이 나름 적절한 연계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본다.

 

정부 접근은 어떠한가? 3차원 입체영상 정책 로드맵이 어느 정도 구체화하고 있다. 이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고용전략회의’에서는 올해 3차원 텔레비전 시험방송을 시작으로 2015년 입체용 고글안경 착용 없이도 시청가능한 텔레비전을 개발한다는 야심찬 산업 발전 전략을 밝힌 상태다. 2015년까지 이 분야에 8천억을 투자해 2014년까지 시장 규모 15조원에 4만여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야심찬 목표치도 설정했다. 말 그대로 ‘꿩먹고 알먹자’는 것인데, 우선 좀 뒤쳐진 우리의 국제 IT정책 지수도 회복하고 핵심기술 영역도 만들어 먹거리도 만들어보자는 복안이 깔려있다.

좋다. 늦게나마 IT 정책에 정부가 나서서 업계의 분발을 위해 3차원 핵심 기술에 대한 육성 전략을 내오는 것은 우선은 고무적이다. 우리의 IT 성장이 일정 부분 국가와 기업간 협의 구도를 통해 성공을 이뤘던 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가시적으로 흥행수표인 듯 보이는 기술들이 진정 미래까지 책임지는 핵심 동력인가를 잘 따져봐야 한다.

 

먼저, 기술적으로 현재까지 국내에서 개발한 3차원 영상 구현 기술은 아직도 많이 불완전하다. 입체 시청이 가능한 안경 없이도 3차원 화질을 완벽히 구현할 수 있는 시점이 그리 빨리 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입체 영상을 즐기기 위해 지불해야하는 비용들을 따져보면,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그만한 비용을 감내하고라도 구입할 수 있는 오락 미디어로 자리잡을 지는 아직 미지수다.

 

둘째, 정부는 보다 근원적으로 텔레비전 기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얼마전 구글이 ‘구글 텔레비전’을 개발한다는 뉴스가 미국의 <뉴욕타임즈>에 크게 실렸던 적이 있다. 현재 시험방송 중인 구글TV는, 구글(운영체제), 소니(수상기 제작), 인텔(스마트칩 내장) 등이 연합해 만들어내는 미래의 텔레비전 모델 중 하나다. 텔레비전 기술의 한 축이 지금의 3차원 텔레비전처럼 재현과 실사 능력을 극대화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실제와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 쪽으로 개발되고 있는 반면에, 구글 TV는 인터랙티브한 컴퓨터와 콘텐츠 개념을 전통의 텔레비전 개념과 ‘합치는’(convergent)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구글TV로 대표되는 후자의 텔레비전 기술 경향에 대한 고려 없이는 미래 텔레비전의 발전에 대해 반쪽짜리 진화론을 주장하는 꼴이 될 수 있다. 3차원 기술에 대한 정책 독려도 중요하지만, 후자에 대한 대응 혹은 대비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곤란하다. 

 

셋째, ‘쓸만한 콘텐츠 없이는 3차원 구현 텔레비전은 무용지물이다’라는 말들이 적잖이 들려온다. 3차원 실사 구현도 중요하나 이를 채울 콘텐츠 제작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앞서 <아바타>의 성공에 콘텐츠의 탄탄함이 기본이 됐음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시청자나 소비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원할까라는 문제의식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우리 휴대전화 생산업체들이 국내 모바일 시장에서 쌓아왔던 오랜 기술과 공력이 단 한순간 애플의 아이폰과 이이패드로 인해 단 몇 개월 사이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라. 기술 개발의 하드웨어적 접근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기술의 고도화로 대부분이 엇비슷한 경쟁력을 가질 때 소비자가 주목하는 것은 콘텐츠의 접근성과 활용 가능성이다. 미디어 이용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추동할 수 없는 기술들은 사실상 무용(uselessness)의 기술이 되기 십상이다. 마치 아이폰의 충격에서 처럼, 우리의 3차원 텔레비전 기술이 또 한번 구글TV와 같은 콘텐츠 중심형 텔레비전 모델에 무기력하게 당하는 일을 만들어선 곤란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IT 혹은 미디어 생태계 발전의 방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음을 봐야 한다. 한 때 정부 주도로 혹은 기업과의 협의기구를 통해 IT 초고속망을 깔고 하드웨어 기기를 단독 개발해 선진국형 기술을 독자 생산해 성공을 구가하던 호시절이 있었다. 그로부터 고도 성장의 중흥기를 제대로 맛 보았다. 그러나, 이제 디지털 경제의 체질이 바뀌고 있음을 지각해야 한다. 마치 90년대 중반 이후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도의 한계를 파악하고 발빠르게 정보화에 들어섰던 것처럼, 지금이 바로 그 비슷한 상황이며 또 다른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상황을 요구한다. 즉, 하드웨어 중심의 IT 발전으로부터 ‘소셜 미디어’가 각광받고 ‘집단지성’과 협업의 논리가 ‘신’경제의 핵심이 되는 시기로 전환되고 있다. 이같은 도도한 흐름 속에서 텔레비전 기술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다시 풀어 말하자면, 텔레비전 기술의 미래는 실사 재현의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관련된 콘텐츠 기술과 이를 추동할 수 있는 기술 문화를 육성하는데 모아져야 한다.


하드웨어 기술 개발은 국가가 나서 독려하면 단기간에 일정 정도 성과를 낼 수 있으나, 소프트웨어나 콘텐츠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미래 텔레비전 영상의 발전에 있어서도. 보다 장기적으로 꾸준하게 자유로운 문화 생산의 토양을 만들어주는 간접 지원이 정부 정책의 주된 역할이 돼야 한다. 기업들 또한 구글TV와 같이 소프트웨어 진화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텔레비전의 기술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2010. 5. 지역정보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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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와 지방선거 - 실천문학 (2010 여름)

트위터와 지방선거 - 실천문학 (2010 여름)

이광석 (@txmole)

작은 아이콘들이 네트를 통해 쉼없이 재잘거리며 말들을 뱉어낸다. 이를 영어말로 ‘트윗’이라 한다. 트윗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물이 ‘트위터’란 서비스다. 말 그대로 재잘거리는 트윗들에게 소통의 자리를 깔아주는 매개자이다. 이 작은 웅성거림이 이제 한 국가에선 혁명을 돕고, 정치 비리를 들쳐내고, 재난 소식을 공유하거나 완화하고, 지구촌 한쪽의 가난을 함께 나서서 해결하고, 누군가의 아픔을 공유하고, 낙후한 선거 정치에 혁명을 이끌 수 있는 울림으로 전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승 모드에 힘입어 최근 트위터 개발자는 마치 스스로 표현 자유의 투사인 듯 의기양양해서 중국 공산당의 권위주의에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이와 달리 대한민국에서는 트윗조차 권력이 허하는 ‘관용’(tolerance)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정치적 도발 행위로 간주된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리 대한민국 선관위가 불법 선거운동의 일환이라 하여 트위터를 틀어쥐려 한다. 소수의 재잘거림마저 막으면서까지 전세계 유일무이한 트위터 탄압국이 되려는 그 속내를 살펴보자.
 
이바구 억압의 새로운 배출구


한국은 이제까지 특유의 인터넷 문화를 만들어냈다. 누리꾼들은 벙개 모임, 게임방, 블로그, 싸이질, 댓글, 펌, 아햏햏, 포샵질, 유씨씨, 온라인 카페와 클럽 등 새로운 신조어들을 만들고 이를 통해 새로운 소통과 만남의 자유로운 출구들을 만들어냈다. 표현 수단들 각각의 효용값은 다 달랐지만, 이들 각각의 소통로와 문화들은 누리꾼들의 서로 다른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장이 돼 왔다.


불운하게도 현실 정치의 문제는 곧 온라인 공간의 억압으로 연결되어졌다. 인터넷이 점점 단속과 불통의 감옥이 되가고 있다.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주민등록번호가 실명 인증을 위해 쓰이고,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린다. 기술의 디자인이란 한번 만들어지면 고정되고 고착되는 습성이 있다. 이를 이용하는 유저들 또한 그 기술에 익숙해지면 쉽게 그것은 문화가 된다. 실명제 없이도 잘 굴러가던 인터넷에 본인확인의 인증을 위한 절차가 끼어들면, 처음에 유저들이 어색하고 불편해 하다가도 곧 쉽게 적응 단계에 들어간다. 그것이 인터넷 문화의 질곡이다. 

 

98년 봄에 미네르바가 무혐의로 나온 후에도, 여기저기 인터넷 사찰과 감청의 부활로 대한민국 현실이 정신없이 어지럽다. 국정감사 현장에서 속속 들어나고 있는 정보기관들의 ‘패킷 감청’과 함께, 일선 경찰에선 인터넷 사이트의 댓글들과 첨부 파일을 일일이 감시하는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한다. 패킷 감청 앞에서는, 유행처럼 불었던 국내 정보서비스업체에 못미더웠던 이용자들이 해외 서버로 자신의 계정을 옮기는 ‘사이버 망명’이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이용자의 메일 서버가 해외에 있더라도 누군가 가는 길목에 진을 치고 속속 열람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제 트윗은 인터넷 구속과 억압의 신권위주의 정치 상황에 상처입고 답답한 누리꾼들의 이바구에 새 생명을 주고 재잘거리는 숨결을 불어넣는다. 바야흐로 새로운 소통의 배출구 노릇을 시작한다. 이미 실명 공개로 불구화된 댓글 문화에다가 인터넷 주소(IP) 추적으로 험악해진 게시판 환경에 누리꾼들은 말과 논쟁의 생동감을 잃던 차였다. 자신과 생각이 비슷하거나 뜻이 맞는 이들에게 140자로 요약된 말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신나는 일이다. 표현에 억압받던 누리꾼들의 이바구들에 다시 생명의 불꽃이 피어난다. 허나 트윗도 권력의 드잡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선거 국면에 접어들면서 공권력은 정치적 이슈로 재잘거리던 입들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트윗의 기술


일단 트윗팅의 논리를 잠깐 살펴보자. 누군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려면 트위터를 통해 입단 신고를 하고 자신만의 아이콘을 생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본인 확인 인증 절차는 필요 없다.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면 프로필에 적으면 그만이요 싫으면 숨기면 된다. 프로필과 아이콘 이미지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돕기도 혹은 숨기기도 한다. 요 단계까지는 아직 트위터 안의 홀로된 섬과 같다. 이제 누군가와 재잘거리기 위해선 먼저 원하는 상대의 재잘거림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팔로잉’이다. 이를 위해 그리 큰 노동은 없다. 그저 클릭으로 의사를 표시하면 된다. 팔로잉을 통해서 관계를 맺고 말을 트고 재잘거리다보면 자신 또한 수많은 ‘팔로워’가 생겨남을 인지할 수 있다.

 

  팔로잉과 팔로워의 숫자와 함께 얽힌 이들의 성향을 보고, 한 명의 ‘트윗터리언’이 관계 맺고 있는 다른 이들의 면면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맞팔’이란 상대가 팔로잉하면 자신도 응대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에 연연하는 이들은 보통 트윗을 자신의 선전이나 홍보 수단으로 삼는 부류가 많다. 이들은 팔로워를 늘리는데 주력한다. 그 반대엔 작가 공지영이나 김연아와 같이 팔로잉이 아예 없거나 적은 이들도 있다. 팔로잉 없이 트윗을 ‘날리니’ 주로 개인 독백이요 방백이 되고, 이를 지켜보며 즐기는 팬들에게 적합하다. 하루이틀만에 수만명의 팔로워를 거느리는 유명 연예인들이나 잘 알려진 아이돌 스타들도 이 경우다. 이들 스타 중 일부는 적극적으로 팬서비스를 위해 팔로워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언팔’은 팔로잉을 끊는 행위인데, 주로 성향이 다르거나 트윗 공해를 일으키는 이들을 피할 때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리트윗’ 혹은 알티(RT)는 다른 트윗터리언이 올린 글을 다시 올리는 것을 뜻한다. 고재열 기자의 ‘독설’(@dogsul)과 같이 수만명의 팔로워들이 있는 경우, 어떤 이름없는 재잘거림도 독설이 한번 더 리트윗으로 튕겨주면 예상치 못한 파장을 불러오기도 한다. 즉 일종의 도움받기가 가능해지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이들을 만나는 기회도 획득한다. ‘트친소’(트윗 친구를 소개합니다)가 현실의 인적 관계가 확장되는 측면이 강하다면, 리트윗은 개인의 재잘거림에 주목하여 새로운 트윗터리언을 만나는 방식이라 훨씬 더 우연의 요소들이 많다.

 

   팔로잉한 트윗 글들은 각자의 ‘타임라인’을 통해 시간순으로 배열된다. 다시 말해, 트윗을 맺은 사람들이 내게 재잘거리는 말들의 기록은 각자가 선호하는 바에 따라 서로 다른 ‘타임라인’의 연대기를 만들어낸다. 누구든 트윗의 140자라는 제한된 글자수를 통해 자신만의 재잘거림을 내면서 타임라인에 편승할 수 있다. 몇 줄 안팎의 간결한 단문으로 제한되지만, 중국어나 한국어는 영문 조합에 비해 한번에 보다 많은 의미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이점또한 지닌다.

자유로운 재잘거림을 위협하는 선거법 


자, 속성으로 트윗의 기술을 이제 막 익혀 한번 놀아보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요새 정치판 돌아가는 꼴에 한마디 할까 했더니 선거법 위반이란다. 정치인에 대한 얘기도 금지란다. 선거 때 소통의 자유를 위해 ‘돈은 묶고 말은 풀라’했는데, 자유로운 재잘거림에 이렇듯 족쇄를 채운다. 대한민국 선관위는 트위터를 통한 특정 정치후보에 대한 지지나 비방을 금하겠다 한다. 게다가 선관위 명의(@nec3939)로 허수아비 트윗까지 운영하며 누리꾼들의 재잘거림에 선거 감시의 촉수를 곤두세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할 선거철이면, 선관위는 블로그, 채팅, 게시판, 유씨씨 제작 등 누리꾼들의 정치적 표현에 불법의 철퇴를 내려치기 일쑤다.

 

한국에서 트윗을 하는 인구는 이제사 걸음마를 떼어 얼추 10만명을 넘긴 정도라 한다. 그도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해 외곽으로 나가면 트윗을 통한 투표 독려와 같은 행동들은 아직은 사치일 수 있다. 그래서, 트윗족은 선도적 신기술 이용 집단으로 통하는 ‘얼리어댑터’들에 해당한다. 실제 이들은 연예, 스포츠, 예술, 정치, 학술, 정보통신 기술, 블로그 등 현실 영역에서 의견을 주도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보면 야당이나 여러 시민단체들에 근친성을 갖거나 비슷한 성향의 트윗터리언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초기 기술 수용자의 정치적 성향이 대체로 상식의 현실 감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트윗 문화는 아직은 건강하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누리꾼들의 재잘거림을 막는 행위는 다름아닌 집권 유력 정당이나 스타급 정치인들 보다는 힘없는 약소 군소 정당의 정치인들이나 주체적 시민들의 말길을 봉쇄하는 효과를 지닌다. 즉, 트윗을 불허한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나름 깨어있는 여론 선도형 집단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엄포에 해당한다.

 

트윗의 재잘거림이란, 확성기로 내는 소리가 아닌 말에서 말로 퍼지는 리트윗과 팔로잉으로 엮어진 자생적인 울림이다. 140자의 형식적 제약 속에 정치적 심각함을 나르고 논쟁을 촉발하긴 어렵다. 주로 특정 사안에 대한 즉흥적 속풀이와 단상들에 대한 공감에 그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자들에 의해 던져지는 다양한 화두와 함께, 하이퍼링크와 이미지, 동영상 등이 자유롭게 단문의 글들 바깥으로 연결되면서 형식적 제약을 거의 무위화하고 있다. 즉 트위터는 정치적 선동이나 광고로서의 면모보다는 다른 어떤 수단보다 간결하고 조용히 움직이나 유연하고 바깥으로 트임이 끝없이 이어져있는 지저귐의 경로를 지닌다.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 규정에 의한 트위터에 대한 처벌 조항은 그래서 대단히 임의적이다. 예를 들어, 선관위는 선거운동 기간 전에 각자의 타임라인을 이용해 특정 정치 후보자와 관련된 내용에 대한 리트윗 행위 자체를 금한다. 트윗을 광고성 집단 이메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포되는 광고 메일과 달리 트윗의 타임라인은 강제적 소구력이 없는 상호 재잘거림의 목록이란 점에서 다르다. 또한 이메일의 개인 정착지적 속성과 달리 트윗들의 흘러간 타임라인은 거슬러 공들여 읽지 않으면 찾기조차 힘들다.

트윗으로 재잘거리며 넘볼 것들


트위터 또한 여타 ‘소셜 미디어’라 통칭하는 부류의 기술이요 수단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세계 최초로 인터넷을 통해 아래로부터 선출한 우리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를 되새겨보면, 이제 새로운 기술에 열광하는 일에 신중할 필요가 있음도 느낀다. 그런데도, 필자는 트윗으로부터 다시 한번 일상 혹은 생활 정치에 미치는 긍정의 가능성을 본다. 수만명의 팔로워를 거느리며 트윗을 날리는 소수 정당의 정치인들을 보라. 4만여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노회찬(@hcroh) 국회의원이 한번 트윗을 띄우면, 적어도 수만명의 팔로워들이 이를 받아 수백건의 리트윗을 올리며 반응한다. 리트윗을 통해 내는 재잘거림의 반향들은, 또 다른 관계망을 타고 거의 대부분의 국내 트윗터리언들에게 전달된다. 선관위 입장에서는 탐탁치 않을 것이요 불법 사전 선거 운동이란 구실로 옭아맬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트윗의 공간에서 이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요, 외려 소수 정당의 정치인이 구사할 수 있는 여럿 중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받아들일 일이다. 이조차 선거법으로 불허하면 소수 정당의 소통 능력을 불구화하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늘진 현실의 질곡과 권력의 힘이 트윗 공간에 자리를 틀 것이 자명하다. 선관위의 트윗에 뻗힌 촉수는 그 중 일부이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더라도 트윗의 재잘거림들이 크게 수그러들긴 어려워 보인다. 수많은 트윗터리언들이 모여, 트윗을 통해 이어받기 소설을 쓰고, 트윗을 통해 모임을 만들고, 선거자금 캠페인을 벌이고, 혹자들은 정치 논쟁을 벌이고, 트윗 단문을 모아 책을 쓰는 세상이 오고 있다. 더군다나 우린 2003년의 대선 정국, 2004년의 총선,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정국, 2008년의 촛불정국 등 중요한 고비마다 누리꾼들이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벌이는 문화 행동과 자율적인 말의 게릴라전에서 새로운 표현 매체의 가능성을 십분 활용했던 경험이 있다. 이 점에서 트위터는 누리꾼들의 풍부한 미디어 경험의 축적이란 연속성 위에 놓여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서, 아니 이를 계기로 그동안 쌓였던 허망함과 분노를 풀 유권자들의 일상의 정치적 의사표현 수단으로 요만큼 실한 물건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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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뻔뻔한 미디어농장 쇼:『사이방가르드 저자와의 대화

11회 뻔뻔한 미디어농장 쇼: 『사이방가르드: 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의 저자와의 대화

 

” 유독 우리는 디지털과 뉴미디어를 말하면서, 삶, 인간, 사회, 모순, 질곡, 자본, 권력, 정치, 전지구적 질병과 고통에 대한 얘기들에 침묵한다. 대신 은빛의 세련된 미래에 열광하고 쉽게 매료된다. 인터랙티브하고 맞춤형에다 관객 참여적이며 역동적이라는 미사여구로 새로운 예술을 치장하고 덧씌우는 데 바쁘다. … 필자의 책 제목과 부제에서 드러나듯, 사이버 시대의 아방가르드적 행동주의의 흐름과 예술·미디어 저항과 실천의 다양한 작업들에 주목한다. 책에서… 여러분들은 현실의 야만에 반응하는 나름의 ‘싸움의 기술’을 터득하길바란다”(저자의 들어가는 글 중에서).

<뻔뻔한 미디어농장> 열 한 번째 포럼은 이 ‘싸움의 기술’을 글쓴이와 직접 만나!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저자 이광석이 연마한, 그리고 우리 각자가 갈고닦아온 예술-미디어-정보 문화 개입과 저항의 기술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누구든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습니다.

  • 때_ 2010년 6월 8일(화) 오후 6시부터
  • 놀거리_
    • (6:00~7:00)  저자가 소개하는 ’불법’ 샘플링 음악, 예술 행동 작업 이미지 슬라이드
    • (7:00~8:00) 저자와의 대화쇼
    • (8:00~9:00) 한국의 사이방가르드를 찾아서… 그리고, 인디언팜과 영보이즈의 루피(Lupi) 힙합 공연
  • 책_ 현장에서 3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뻔뻔한 미디어농장은 문화, 미디어, 정보통신 운동의 현장과 실천을 씨뿌리고 새로운 실험과 실천을 경작하고자 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기획모임 참여를 기다립니다. 문의: 오유나(문화연대, 02-773-7707), 오병일(진보네트워크센터, 02-774-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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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디지털 생산물의 전유 싸움 - 닭장과 해적

정보공유연대 제1회 포럼: "디지털 생산물의 전유 싸움 - 닭장과 해적"

정보공유연대에서는 2010년부터 정보공유운동의 연구 활성화와 담론 확대를 위한 정기 포럼을 열고자 합니다. 이 포럼은 저작권과 특허를 비롯한 지재권의 국내외 현안과 쟁점들에 대한 비판적 해석과 창조적 개입을 위한, 그리고 정보공유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재구성하기 위한 대중 토론의 장이 이 될 것입니다. 정보공유연대에서는 이 포럼을 격식 없이 관심있는 누구나 자유롭게 참석하여 맘껏 토론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이번 첫번째 포럼에서는 정보사회와 네트워크문화 그리고 사회운동을 가로지르며 비판적 연구를 해오신 서울산업대 백욱인 교수의 발표로 디지털 시대의 지식 생산과 공유의 현실에 대한 진단을 함께 내려보는 토론장이 마련됩니다. 정보공유연대 첫 번째 포럼에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주제: 디지털 생산물의 전유 싸움 - 닭장과 해적

때: 2010년 5월 27일(목) 저녁 7시
곳: 문화연대 강의실
발표: 백욱인 (서울산업대 교수)
사회: 이광석 (성공회대 강사)


* 함께해요!
정보공유연대 정기 포럼을 함께 기획하며 준비하실 분을 찾습니다. 정보공유연대 정기 포럼에서 발표하고자 하시는 분도 환영합니다.
ipleft@jinbo.net 혹은 02-717-9551로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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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사이방가르드: 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

제 새책이 나왔습니다.

 

 

방송문화진흥총서 시리즈 102

 

사이방가르드: 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

 

이광석 지음 / 안그라픽스 / 2010년 05월 / ISBN:9788970594446

 

사이방가르드는 ‘아방가르드’와 ‘사이버’의 준말로 이것을 풀어보면 디지털 시대의 아방가라드라는 의미가 된다. 사이방가르드를 통해 20세기 초 이래 아방가르드 예술 집단들이 새로운 표현 수단을 찾았던 당대의 사회 참여적 동기와 현실 개입의 역사와 전통을 오늘날 경험 속에서 다시 한 번 찾고자 한다.

사이방가르드의 실천적 경험들이 표상하는 것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새로운 권력 변화에 조응하고 대응하는 실천과 개입 방식의 변화이다. 촛볼 시위와 온라인 토론에서 우리는 ‘스타일’ 혹은 ‘즐거움’의 정치를 목격했듯이 앞으로 문화 행동의 중요한 흐름은 이와 같은 사이방가르드 미디어, 예술 행동과 저항 방식들의 개발이 될 것이다.

 

유독 우리는 디지털과 뉴미디어를 말하면서, 삶, 인간, 사회, 모순, 질곡, 자본, 권력, 정치, 전지구적 질병과 고통에 대한 얘기들에 침묵한다. 대신 은빛의 세련된 미래에 열광하고 쉽게 매료된다. 인터랙티브하고 맞춤형에다 관객 참여적이며 역동적이라는 미사여구로 새로운 예술을 치장하고 덧씌우는 데 바쁘다. 이 책은 한때 인문사회과학계에 장밋빛 ‘정보사회’론이나 ‘기술주의’를 떠받들던 열병이 소위 뉴미디어와 디지털 예술계에 똑같이 재현되는 현상을 경계한다. 첨단, 미래, 젊음, 세련됨의 수사학과 연결된 아주 미끈한 현실의 뉴미디어와 디지털 세상과 예술 경관의 뒤안길을 살핀다. 『사이방가르드: 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라는 책 제목과 부제에서도 드러나듯, 이 땅의 고민들을 반영하고 담아내려는 사이버 시대의 아방가르드적 행동주의의 흐름과 예술·미디어 저항과 실천의 다양한 작업들에 주목한다. 책에서 소개되는 아방가르드 예술군의 사회 참여 방식을 보면서, 독자 여러분들은 현실의 야만에 반응하는 나름의 ‘싸움의 기술’을 터득하길 바란다. (저자의 들어가는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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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는 글

1. 디지털 문화의 주요 키워드들
0&1 비트의 변증법
배니버 부시의 하이퍼텍스트 이후
사이버공간의 패러독스
가상현실의 진정한 꿈
신체-기계-네트 잡종의 미래, 사이보그
인간-기계 간 인터페이스 진화의 끝 1
유비쿼터스 코리아

2. 사이방가르드 문화 정치 2.0
네트극장의 배우들
디지털은 무엇을 꿈꾸는가
사이방가르드 행동주의의 조건
사이방가르드 아트와 문화 정치의 구상

3. 사이방가르드 문화 정치의 실험실: 스물일곱의 저항과 개입의 아이콘들

현실 개입의 게릴라 문화 정치
1 | 대중문화를 조롱하는 악동들, 개미농장의 10여 년
2 | ‘유비쿼터스’ 체 게바라
3 | 디지털 행동당, 전자교란극장
4 | 자본주의 권력을 등치는 영리한 악동들, 예스맨
5 | 현실극장의 역할론 거부, 게릴라 걸들의 고릴라 가상극장

비주류에서 비판적 주류로 떠오르는 예술
6 | 박제된 거리를 반역의 거리로, 뱅씨
7 | 미 언더그라운드 시사만평의 기수, 앤디 싱어
8 | 희망을 그리는 삽화가들, 하퍼, 드루커 그리고 사트라피
9 | 아우토노미디어출판사의 약장수 이동서점

후기자본주의 소비문화 비판과 ‘ 전유’의 저항 예술
10 | ‘팝파겐다’와 대중문화 비판, 론 잉글리시
11 | 저항과 상품 문화의 은밀한 거래꾼, 마크 에코
12 | 정보 자유의 아트 행동주의, 네거티브랜드
13 | 반저작권 예술의 최전선, 불법아트
14 | 물신성 끊는 경매 포퍼먼서들

뉴미디어 아트의 공학적 개입
15 | 권력에 대한 역감시, ‘역’기술국
16 | 체제 기술 비틀기, 카본방위연맹
17 | 감시 권력 앞에서 벌이는 시원한 부조리극, 감시카메라연기단
18 | 기술 문명의 폭력 학습장, 생존연구실험실

유전학적 미래에 도전하기
19 | 맥루한의 사이보그적 실현, 스텔락
20 | 사이보그 성형 수술극장, 오를랑
21 | 사이버페미니스트 예술 동맹, 비너스 매트릭스
22 | 생명 공학의 (초)현실주의자, 프랭크 무어
23 | 기술과 생명의 그로테스크한 결합, 피치니니의 생명 공학 예술

사이방가르드 문화 이론의 재구축
24 | 문화 정치의 큐레이터, 아트마크
25 | 디지털 저항의 집단 창작 모임, 크리티컬 아트 앙상블
26 | 디지털 비평의 선구자들, 크로커와 더리
27 | 전자미디어의 미학과 문화 분석학, 마노비치

나오는 글
인명색인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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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광석
  • 소개 : 현재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주 울런공대학 미디어·문화 연구 프로그램에서 강의와 연구 교수직을 맡고 있다. 미국 텍사스-오스틴주립대학 Radio, Television & Film 학과에서 박사를 마쳤다. 한국언론정보학회 기획이사와 문화연대 운영위원을 지낸 바 있고, 이론적 실천모임 ‘뻔뻔한 미디어농장’의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진행 중인 연구 주제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인터넷 발전의 사회문화사 비교 연구, ‘공유지public domain’의 사회문화사적 고찰, 한국 ‘쓰레기 문화trash culture’의 민속지학 탐방 등이다.
  • 주요 저서:
    IT Development in Korea : A Broadband Nirvana(Routledge, 2011)
    『디지털 패러독스: 사이버공간의 정치경제학』(커뮤니케이션북스, 2000)
    『사이버 문화정치』(문화과학사, 1998)

[출판사 책소개]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실천의 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여기 그 대안을 위해 아방가르드 예술과 미디어 행동주의가 나섰다.


디지털 시대의 아방가르드
‘사이방가르드’는 첨단, 미래, 젊음의 수사학과 연결된 아주 미끈한 현실의 뉴미디어나디지털 세상의 예술 경관보다는 그 뒤안길을 살핀다.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의 고민들을 반영하고 담아내려는 사이버 시대의 아방가르드 예술 실험과 저항의 다양한 실험들에 눈길을 보낸다. 이제부터 문화 행동의 흐름은 사이방가르드 미디어, 개입의 예술, 전자 저항의 개발이 될 것이다.

개요


아방가르드와 사이버가 만나다.

 

그것은 새로운 미디어를 가지고 정치 미학적 기능성에 주목했던 오늘날 아방가르드 예술과 미디어 행동주의를 가리킨다. 사이방가르드는 ‘아방가르드’와 ‘사이버’의 준말로 실제 이런 영어 조합은 없다. 이것을 마음 내키는 대로 풀어보자면 디지털 시대의 아방가라드라는 의미가 된다. 사이방가르드를 통해 20세기 초 이래 아방가르드 예술 집단들이 새로운 표현 수단을 찾았던 당대의 사회 참여적 동기와 현실 개입의 역사와 전통을 오늘날 경험 속에서 다시 한 번 찾고자 한다. 그 주제는 대중문화, 하위문화, 문화운동, 디지털운동, 대안미디어, 아방가르드 예술 등이다. ‘사이방가르드’는 궁극적으로 한때 인문, 사회과학계에 장밋빛 ‘정보사회’론이나 ‘기술주의’를 떠받들던 열병이 소위 뉴미디어와 디지털 예술계에 똑같이 재현되는 현상을 경계하면서 쓰였다. 첨단, 미래, 젊음, 세련됨의 수사학과 연결된 아주 미끈한 현실의 뉴미디어와 디지털 세상과 예술 경관보다는 그 뒤안길에 놓여 있는 풍광들을 살핀다. 다시 말해 이 땅의 고민들을 반영하고 담아내려는 아방가르드 예술 실험과 저항의 다양한 실험들에 눈길을 보낸다. 사이방가르드의 실천적 경험들이 표상하는 것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새로운 권력 변화에 조응하고 대응하는 실천과 개입 방식의 변화이다. 촛볼 시위와 온라인 토론에서 우리는 ‘스타일’ 혹은 ‘즐거움’의 정치를 목격했듯이 앞으로 문화 행동의 중요한 흐름은 이와 같은 사이방가르드 미디어, 예술 행동과 저항 방식들의 개발이 될 것이다.

구성
『사이방가르드』는 권력의 폭력에 감긴 현실에, 유쾌하지만 질긴 ‘골통’ 문화 정치의 행동을 제안한다. 새로운 예술과 문화 행동 실험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글을 쓰면서, 글 속에 오래전 흔적들을 군데군데 담았으나 대부분은 다시 새롭게 썼다. 햇수로 오래된 기록들의 경우에는, 아직도 유효한 메타포의 힘을 가지는 것만 추려서 실었다.


책 1부 ‘디지털 문화의 주요 키워드’에서는 디지털 시대를 낳게 했던 대표적 개념을 중심으로 그것들이 가지는 가능한 위험과 긍정적 함의이다. 여기에서는 이제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받아들이는 디지털의 기본 키워드들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자 한다. 디지털의 기본 단위인 0과 1의 비트적 구성, 사이버공간, 하이퍼텍스트, 가상현실, 사이보그, 인터페이스, 유비쿼터스 개념을 가지고, 이것들이 살아 있는 오늘 현실의 문제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반추한다.

 

2부 ‘사이방가르드 정치 문화 2.0’에서는 사이방가르드라는 개념이 무엇이고 그것이 기대고 있는 정치 미학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살핀다. 즉, 디지털 시대의 예술과 미디어 저항과 개입에 대한 필자의 시각을 알리는 ‘애피타이저’로 보면 된다. 디지털 시대의 권력의 변화에 대응한 전문 작가들과 아마추어들의 문화 정치적 개입과 저항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3부 ‘사이방가르드 문화 정치의 실험실‘은 이 책의 핵심부이다. 현실 지형에의 개입을 꿈꿔 왔던 예술가 개인이나 아방가르드 집단들에 대한 소개글이다. 스물일곱의 아방가르드적 행동주의의 사례들을 현실 개입의 게릴라 문화 정치, 비주류에서 비판적 주류로 떠오르는 예술, 후기자본주의 소비문화 비판과 ‘전유’의 저항 예술, 뉴미디어 아트의 공학적 개입, 유전학적 미래에 도전하기, 사이방가르드 문화 이론의 재구축의 여섯 묶음으로 나눴다. 각각의 영역은 다루는 주제에 따라, 정치 퍼포먼스나 해프닝 영역, 그라피티나 삽화 등의 풍자예술 영역, 기술 공학을 활용한 전술미디어 영역, 유전 공학이나 분자 생물학 등에 개입하는 정치 예술 영역, 그리고 사이방가르드 이론 생산 영역으로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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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스마트폰이 전혀 스마트하지 않은 이유-모바일 규제 쟁점들

안녕하세요,
다음 주인 4월 27일(화) 오후 3시, 문화연대 강의실에서 뻔뻔한 미디어 10차 포럼이 '스마트폰이 전혀 스마트하지 않은 이유-모바일 규제 쟁점들'을 주제로 열립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뻔뻔한 미디어농장 10차 포럼 :스마트폰이 전혀 스마트 하지 않은 이유 - 모바일 규제 쟁점들
지난해 말 아이폰이 국내에 정식으로 출시된 것을 계기로 스마트폰의 도입과 모바일 기기를 통한 인터넷 이용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이 과정에서 그동안 국내 인터넷/모바일 이용의 활성화에 걸림돌이 되었던 규제 정책들이 도마에 오르고 있습니다. 위치정보 서비스 규제정책, 액티브X에 기반한 공인인증서를 사실상 의무화했던 보안정책,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인터넷 실명제, 공공정보의 민간 개방문제,게임물의 심의 문제 등. 이와 함께 국내 통신사업자들의 폐쇄적인 무선망 정책과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의 하드웨어 중심의 사업 전략 등도 비판과 자성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뻔뻔한 미디어농장 10차 포럼에서는 스마트폰 도입에 따라 이용자 컴퓨팅 환경이 어떻게 변화해나갈 것인지, 스마트폰을 전혀 스마트하지 않게 만드는 한국의 낡은 규제 정책은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인터넷/모바일 환경에서 규제의 실효성은 어떻게 변화할지 등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일시 : 2010년 4월 27일(화) 오후 3시
장소 : 문화연대 강의실
주최 : <뻔뻔한 미디어 농장> 기획모임
문의 : 오유나(문화연대, 02-773-7707), 오병일(진보네트워크센터, 02-774-4551)
사회 : 이광석 (뻔뻔한 미디어농장 기획모임)
발제 : 스마트폰 확산에 따른 모바일 규제 쟁점 / 전응휘 (녹색소비자연대 이사)
 * 뻔뻔한 미디어농장은 문화, 미디어, 정보통신 운동의 현장과 실천을 씨뿌리고 새로운 실험과 실천을 경작하고자 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기획모임 참여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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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어린이] 어린이와 게임 - 게임, 타자가 필요한 오락

계간 창비어린이
2010. 3. 봄호.

 

어린이와 게임 - 게임, 타자가 필요한 오락

이광석

필자는 미국에서 한 9년간 유학생활을 했다. 오랜 세월 타지에서 지내다보니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 누구보다 상대적으로 아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다. 유학생 가족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내는 학교 생활에서 가족이 주는 안식은 절대적이다. 하루종일 영어 스트레스에 입과 귀가 쥐나려할 때 아이와의 놀이와 휴식은 오아시스와 같은 여유를 줬다. 그렇게 살다 귀국해선 먹고사는 일이 뭐 그리 바쁜지 아들과 지내는 일이 가뭄에 콩나듯 하다. 좋았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미국에서 유학생 부모들, 특히 아빠와 자녀들간의 관계는 대체로 건전하게 보였지만 대개 미국식 소비문화의 틀 안에 갇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헐리웃의 흥행주기와 스케줄에 따라 어린이들과 부모들이 함께 움직인다. 알면서도 그냥 이에 반응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가족의 놀이 법칙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 상황을 잠깐 들여다보자.

어린이들의 원초적 게임들


먼저 헐리웃이 특정의 화제작을 띄우기 위해 바람을 잡으면, 대개 소비자들은 의도한 바를 알면서도 넘어간다. 예를 들어, 2011년 5월이나 개봉한다는 <스파이더맨4>가 당장 몇주 뒤 개봉한다고 치자. 때가 오면 텔레비전은 개봉을 앞두고 연일 관객몰이하느라 광고에 불이 난다. 이는 한국에서도 비슷하다. 잘 보이지않던 연예인들이 갑자기 이 채널 저 채널 자주 등장한다면 십중팔구 이들은 영화 홍보 도우미다. 반면 어린이들에게 영화 개봉의 바람잡이 역할은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인형들이 담당한다. <스파이더맨 4>가 개봉된다면 아마도 1, 2, 3 시리즈들에 출현했던 왕년의 캐릭터들이 보관 창고에서 먼지털고 나와 다시 상점 가판에 깔리고, 그들과 더불어 스파이더맨의 치명적 라이벌들인 ‘블랙캣’, ‘리저드’, ‘카니지’(Carnage) 등 새로운 캐릭터들이 추가로 늘어날 것이다.


  어린이들의 영화에 등장하는 하나의 시리즈물에도 캐릭터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수십 가지가 훨씬 넘는 나무로 만든 토마스 기차와 그의 친구 기차들을 생각해보라. 캐릭터 하나 사줄 때마다 등골이 휜다. 사실 이도 수백수천이 넘는 ‘스타워즈’ 영화 캐릭터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포켓몬’, ‘디지몬’, ‘유희왕’, ‘드래곤볼’, ‘나루토’ 캐릭터 게임 카드는 어떠한가. 마치 편의점의 껌처럼 아이들을 유혹하는 문방구 품목들이다.

  어린이들이 처음 벌이는 게임은, 사실 디지털 시대의 게임 유형보다는 이들 장난감 캐릭터나 카드를 양 손에 들고 펼치는 상황극이다. 초등학교 5학년인 내 아이는 아직도 한 1년남짓 팔다리가 너덜해 다 떨어진 ‘파워레인저’ 캐릭터 둘을 갖고 “푸쉬, 피웅, 피웅” 침을 튀기면서 이것들에 싸움을 붙여가며 논다. 올해 해를 넘기면서 뭔가 작심했는지 우리 아이는 쓰레기통에 그 너덜한 파워레인저들을 내던져버렸다. 그래도 아이의 손때를 타 만질만질한 그 녀석 둘을 마주하고 이내 버릴 수 없어 서랍 속 깊이 간직했다 보여줬더니 우리 아이가 날아갈 듯 기뻐해 놀란 적이 있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 아이는 그 닳아빠진 캐릭터들을 집어들고 다시 침을 튀겨가며 놀고 지낸다. 이렇듯 캐릭터들의 실제 상황극은 아직도 우리 아이들을 지배하는 최고의 게임이다.


  비디오 게임의 사회적 효과들 


  하던 얘기를 계속 해보자. 이렇게 헐리웃이 장난감 업체들과 캐릭터로 한껏 분위기를 띄우면, 대개 어린이들은 영화 개봉일이 올 때까지 카운트다운에 돌입한다. 사실상 집안으로 들어가보면 카운트다운은 아이 대신 부모가 더 열심히 하는 경우가 많다. 보호자라는 명분으로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영화를 관람하고 아이보다 더 즐거워한다. 영화 관람후 후유증은 어른보다 아이들에게 더 오래 간다. 대개 어린이들은 관람후 다시 캐릭터 수집에 몰두하고 상황 게임에 한층 몰입한다. 관람했던 영화가 조만간 디브이디(DVD)로 출시되면 아이들은 이를 사달라고 조른다. 성화에 못이겨 구입한 디브이디를, 아이들은 질릴 때까지 반복  시청하며 즐긴다. 이것이 헐리웃의 가내 경제심리학이다.

   예서 하나 더. 어린이들이 영화 관람후 보다 본격적으로 그 여운을 즐기는 방식이 또 있다. 진짜배기 게임이다. 미국에선 주로 게임 콘솔, 즉 하드웨어를 구입해 즐기는 비디오 게임이 대세다. 크리스마스 때면 아이들의 최고 선물은 단연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Xbox)’,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PS)’, 그리고 닌텐도가 만든 ‘위(Wii)’ 등이다. 다들 게임 콘솔들이다. 필자의 유학 시절 아들과 즐겼던 놀이의 대부분 시간은 이들 비디오 게임을 같이 즐기는데 쓰였다. 만약 <스파이더맨4> 게임이 콘솔용으로 시장에 나오면, 손으로 쥐고 놀던 캐릭터 인형들의 상황극은 종료되고 화면 위 캐릭터들간의 격투신으로 바뀐다.

   콘솔 게임은 비용이 쏠쏠하게 많이 든다. 게임 콘솔을 위해 한번 구입하는 가격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매번 게임 타이틀 출시에 맞춰 구입하는 비용이 훨씬 더 크다. 정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다. 가정 경제의 지출 내역이 뭔지 알게 무엇인가. 그저 아이는 새 게임 타이틀을 사면 그것의 전체 스토리를 마칠 때까지 집중한다. 스토리가 없는 격투 게임인 경우에는 질릴 때까지 한다. 후자는 친구나 아빠랑 벌이는 격투가 대체로 많고, 전자의 경우엔 이들과 협업해 공동의 과제를 푸는 식이다. 어느 한쪽이 지건 이기건, 진행될수록 부자지간에 정이 드는 것도 효과 중 하나다. 아이의 생일 때나 집에 친구들이 놀러오면 주로 재미삼아 하겠지만 일종의 그들만의 ‘의식’(ritual)인양 비디오게임을 수행한다. 게임이 그들간 의식이 되면, 이미 스토리의 일부를 앞서 깬 친구들은 뒤따르는 아이들의 멘토이자 스승이 된다. 결국, 헐리웃의 돈벌이를 위해 고안된 홍보-캐릭터상품-영화-디브이디-게임 등으로 연결되는 연쇄 고리는 가족의 여가 생활을 부정적으로 구성하면서도, 일견 부모와 아이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 새로운 소통의 관계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입맛이 다른 게임들


  게임들에 따라 입맛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장르인지 어떤 콘솔을 쓰는지에 따라 즐기거나 빠져드는 정도가 다르다. 게임보이와 같은 휴대용 게임은 차량 이동 중 막간을 이용해 즐길 수 있는 야참형 콘솔이다. 비디오 게임은 앞서 본 것처럼, 친구, 가족 등과 함께 즐기기에 좋다. 좋은 점이라면 새 비디오 게임 타이틀을 사줘도 어린이들의 중독성은 대체로 일주일이면 가라앉는다. 즉 게임 내러티브를 얼추 다 깨고 읽으면 아이가 그제서야 정신을 깬다. 그 때까진 게임하는 아이보다 부모가 패닉 상태에 이른다. 요새 한창 유행하는 개콘의 남보원에서 유행하는 말, “괜히 사줬어, 사주지 말걸 그랬어”라는 후회가 몇 번이고 밀려온다. 이 상황을 보내면 대개 어린이들은 평정을 찾는다.

   내 아이의 경우 비디오 게임 타이틀을 사주는 것이 뜸해지면서 아빠를 통해 컴퓨터 게임을 배우고 즐기기 시작했다. 일단은 상대적으로 구입 비용이 저렴하다. 각종 게임을 컴퓨터에 내려받아 수행하는 컴퓨터 게임은 사실상 두 손 위에 조이스틱 대신 컴퓨터 키보드를 잡는 경우라 보면 무방하다. 서로 닮았으나, 비디오 게임의 경우 아무래도 그래픽 구현이 좀 떨어지긴 한다. 하지만, 이도 게임을 다 끝날 때까지 “괜히 깔아줬어”라는 부모들의 후회를 끝없이 밀려오게 한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이도 사나흘 정도면 아이의 중독성은 정상 수치로 복귀한다. 내 아이를 관찰한 경험이다.


  

 

물론 어린이들이 게임이 일상이 될수록 어지간한 그래픽이나 상황 설정에 무감각해가는 경우가 점차 늘어난다. 예를 들어, 1인 슈팅 게임인 임무수행(Call of Duty) 시리즈가 최근 현대전 4탄까지 나왔는데, 게임이 일상인 어린이들에게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1, 2탄은 별 감흥을 주지 못한다. 머리에 철모쓰고 단발식 소총을 들고 등장하는 60년대 ‘전우’를 연상시키는 그래픽보다는, 최첨단 무기와 위성 미사일이 불을 뿜는 최신 용병전 정도가 되야 어지간히 재미가 붙는다. 게임의 그래픽 강도나 내러티브의 세밀함에 대한 어린이들의 적응력은 이처럼 대단히 빨라진다. 그러다보니 어지간한 애니메이션 영화도 우습다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애니메이션이면 무조건 신기해하던 때와는 다르다. 이렇듯 영상 과잉 노출로 감성이 무뎌질진 모르겠으나, 달리 보면 영상을 해독하는 감각에 변별력이 상승하는 측면도 동시에 존재한다.

 
  게임에 중독된 어린이?


  한동안 내 아이는 게임방 열병을 겪었다. 마치 놀이동산 가자고 보채는 아이처럼 게임방을 가자고 내게 졸랐다. 방과후 한두번 친구들이 가자고 제안했는데 아무래도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집으로 서둘러 돌아왔던 터였다. 내 아이의 머릿속에 게임방은 무서우면서도 선망의 곳이었다. 어디서 얘길 들었는지 게임방엔 나쁜 아저씨들이 입에 담배물고 잘못하면 돈도 뺐는 악의 소굴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당시 아이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 곳에 가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이유는 게임방에선 원하는 게임을 실컷 할 수 있고 왠지 롤러코스터같은 짜릿함이 거기 가면 있다는 기대치 때문이었다. 내 아이는 자신의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으로 아빠를 택했다. 나를 대동하여 게임방에 갔으면 했다.

   아들을 통해 나 또한 머리털나고 처음 오락실에 친구들이랑 가슴을 콩닥거리며 들어섰던 기억을 떠올린다. 하필 그날 어머니 친구분이 고속터미널 근처 오락실에 있는 나를 정말 말도 안되는 막장드라마의 우연처럼 발견하시고 어머니께 고변하신 적이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께 정신없이 회초리로 맞던 기억이 생생하다. 왜 그 땐 그리도 어른들이 막을수록 하고 싶었는지. 중독과 열병은 결국 욕망의 과도한 통제 때문에 빚어지는 효과가 아니던가. 어머니의 과도한 체벌에 대한 반발 심리일까? 어른이 된 난 흔쾌히 아들과 게임방에 몇 번 같이 갔다. 다행히 동행의 효과인지 뭔지 우리 아이는 게임방에 흥미를 잃고 더 이상 가잔 소리가 없다.

   요샌 아이가 인터넷 게임을 하면서 좀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진정 말로만 듣던 심한 게임 중독 증세를 보였다. 일순간에 붙었다 가라앉을 것으로 보였던 게임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점점 늘어났다. 얼마전 아들에게 애둘러 물었다.

요새 왜 그리 ‘버블파이터’에 정신 못차리는데?
잘 몰라
왜 몰라. 비디오 게임보다 뭐가 재밌는데?
잘 몰라. 그냥 더 재밌어.
그냥 재밌어?
여럿이서 함께 하는 거라서 재밌어.
야, 미국에서도 ‘룬스케이프’(Runescape, 롤플레잉 게임의 일종) 하면서도 잠깐 재미로 잘 놀더구먼. 왜 그렇게 게임을 계속 해대는데?
룬스케이프는 롤플레잉만 하지만, 버블파이터는 여럿이서 슈팅하면서 놀 수 있어.


  아이들은 우선 단순히 타자와 함께 노는 것에 생동감을 느낀다. 스크린만 보고 하는 비디오 게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게다가 상대팀들을 교란하고 싸우기 위해 살아있는 여럿이 편을 먹고 지네끼리 소통하는 상황이 재밌다고 여긴다. 실제로 온라인 게임이 중독성에서 단연 뛰어나다는 점을 나름 감지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 아이만은 이미 게임으로 단련되어 중독증에 항체가 생겼다고 보았던 터였다. 게임이 잘 안풀리면 식구들에게 신경질도 점점 늘었다. 자발적으로 책읽고 조용히 그림 그리는 시간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게임하는 시간을 줄여 거짓말하기도 하고, 어른들이 외출후 들어오면 후다닥 컴퓨터를 끄는 모습도 보였다. 결국 집을 나설 때 컴퓨터에 패스워드를 걸고 게임을 지우는 수도 썼지만 무의미했다.


   이런 아이를 보면서 갑자기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 <서로게이트 Surrogates>가 떠올랐다. 인간들은 구질구질하고 나약하고 늙어가는 신체를 대신할 자신의 싱싱한 대리인(서로게이트)이 행세하는 세상에서 시들어간다. 마치 인터넷에 연결된 수많은 롤플레이어들처럼 인간들은 무기력하게 누워 이들 껍질뿐인 대리인들을 조정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 아이의 게임 중독에서 서로게이트에 의존해 점점 노쇠해가는 영화속 서로게이트형 인간의 모습까지 볼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열병은 심했고 오래 걸렸으나 가족의 노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온라인 폐인이 되가는 느낌이 들었는지, 서서히 게임을 줄여나가는 법을 배워 갔다. 자연 책 읽는 시간이 늘었고, 다른 콘솔용 게임도 함께 즐기는 여유를 가지기 시작했다. 


  게임하는 어린이들


  게임에 빠져드는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줄곧 생각나는 예술 작품이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호주의 시각예술 작가인 페트리샤 피치니니의 설치 작품들인 [우리는 한가족] 시리즈다. 그녀의 작품에선 미래 기술 현실에 대한 긍·부정의 이중적 시각이 교차한다. 기술이 미치는 해악을 경계하면서도 삶의 일부가 되고 삶의 진실이 되가는 인간 보편의 기술에 대한 긍정의 시선이 교차한다. 무엇보다 작품에 등장하는 게임보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얼굴은 반백이 지난 얼굴들이다. 고작 내 아들 나이만한 아이들이 한참 ‘삭은’ 얼굴로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은 짐짓 겉만 보면 누구나 소름 돋기 마련이다. 또한 그녀의 작품 속에서는 상상하기도 싫은 유전 조작의 돌연변이들이 인간의 애완 동물이 되고 한 식구가 된다. 아이들은 생명과학의 진보로 인해 얻은, 쭈글쭈글하고 허연 피부를 가진 강아지 비슷한 새 생명체와 놀고 장난친다. 그 새로운 과학과 생명의 혼합 속에서 태어난 돌연변이 생명체들은 그들 스스로 생식해 또 다른 가족을 형성한 채,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물린다. 과학적 성과에 있어서 부정의 메타포인 반백과 돌연변이가 피치니니의 작품 속에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해야할 ‘한가족’으로 묘사된다. 어쩌면 피치니니는 새로운 과학과 디지털 문화에 대해 선입견에 사로잡힌 부모 세대들의 마음 속 생각을, 흉측한 애늙은이와 돌연변이를 통해서 투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홀로 아빠의 서재에서 인터넷 게임을 몇 시간이고 집중하는 내 아들에게서 피치니니의 작품 속 아이들을 보며 흠칫 놀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아들의 모습에 그저 불안감만 엄습하진 않는다. 게임은 내 아이와 어린이들의 새로운 놀이 방식이라 믿고 싶다. 다만 온라인 게임이 다른 게임들과 달리 아이들에게 열병 주기가 좀 길 뿐이다. 게임하는 어린이들에게서 반백의 얼굴도 보지만, 아직은 게임이 그들에게 주는 긍정의 문화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온라인 공간을 통해 아이들은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것에 쉽게 동화되기도 하지만, 스토리 전개를 통해 서사 규칙을 배우고 타인과 소통하고 그들과 관계 맺는 과정을 습득하고 가상의 상황에 따른 전술을 짜는 법 등을 스스로 터득하기도 한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어린이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문화 경험이다. 그들에게는 가상공간의 ‘세컨 라이프’가 현실의 삶만큼 일상이 되고, 게임방이 우리 세대의 만화방만큼 안락하고, 게임이 놀이터만큼 하루 한두번쯤은 꼭 들러야하는 곳이 된다. 피치니니가 게임하는 애늙은이들에게서 그 양가성을 함께 보고 모두 끌어안은 것처럼, 이제 어른들도 게임하는 아이들에게서 두려움의 시선을 거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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