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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SSK 위험정보사회 연구팀 콜로키움 시리즈 : 2012년 상반기 - 빅데이터 이슈

2012년 상반기 - SSK 위험정보사회 연구팀 콜로키움 시리즈 

‘빅 데이터’, 새로운 패러다임 혹은 체계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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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3월~7월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오후 3:00~6:00
장소: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백주년기념관 216호

 


주최: SSK 위험정보사회 연구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IT정책연구소
후원: 한국연구재단
참가 문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연구소 970-6286/6872/7076
찾아오시는 길: 지하철 7호선 공릉역(서울과학기술대학교) 1번 출구에서 학교버스 이용
        

<<콜로키움 기획의도>>

‘빅 데이터(big data)’ 시대의 도래로 말미암아 그것이 지닌 현대 문명에 대한 파괴력과 영향력에서 인류가 가늠할 수 있는 예측과 전망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정보 폭발로 상징되는 새로운 위험의 징후들이 포착되고, 무엇보다 스마트 시대 새롭게 형성되는 정보화 국면에서의 위험사회 징후들에 대한 분석과 해법이 새롭게 요구됩니다. 즉 ‘빅 데이터’ 현상이 위험정보사회의 새로운 화두이자 패러다임으로 대두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새로운 사회의 미래를 모색하는 심도있는 콜로키움을 집중해 개최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석과 의견 교류를 환영합니다.





<프로그램 일정>

콜로키움 고정 토론:
조현석 (연구책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윤상오 (단국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 전공 교수)
황주성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공공정책 전공 교수)

 ◉ 혁신과 위험의 빅데이터, 긴장과 균형
   - 발표 : 강정수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
   - 일시 : 2012년 3월 30일(금)
 
◉  빅데이터 시대 정보유출과 해킹문화
   - 발표 : 조동원 (문화과학 편집위원, 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 박사)
   - 일시 : 2012년 4월 27일(금)

◉ 빅데이터를 둘러싼 전유 싸움: 디지털아카이브를 중심으로
   - 발표 :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
   - 일시 : 2012년 5월 25일(금)

◉ 빅데이터 연구방법의 비판적 독해: ‘문화분석학’을 중심으로
   - 발표 :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전문대학원 교수)
   - 일시 : 2012년 6월 29일(금)

◉ 위험사회의 표정들: 정보과잉 상황에서의 자아와 인간관계
   - 발표 : 김예란 (광운대학교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 일시 : 2012년 7월 27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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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현단계 ‘정보사회’의 위험 징후와 문제

제 3회 SSK 위험 정보사회 연구팀 정기세미나


현단계 ‘정보사회’의 위험 징후와 문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의 문제 제기 이래로 전세계 구조적 층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위기와 위험의 징후들을 포착하고 분석 및 진단하는 논의들이 학계에서 다양하게 이뤄져 왔습니다. 환경, 기후, 재난, 생명공학, 전쟁 등에 걸쳐 위험사회의 다양한 징후들을 인류 생태학적 시각 속에서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 발전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작업입니다. 무엇보다 그 영향력에서 예측이 어려워 정보 폭발로 상징되는 ‘빅 데이터’ 시대에는 새로운 위험의 징후들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소위 스마트 시대의 정보화 국면에 대한 위험 징후들에 대한 분석과 해법이 새롭게 요구됩니다. 이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새로운 ‘정보사회’의 전망을 모색하는 세미나를 개최하려 합니다.



● 발표 주제: 「정보위험사회의 특징과 과제」
            - 홍성태 (상지대학교)  


● 사회: 조현석 (연구책임·서울과학기술대학교)
● 토론: 백욱인 (서울과기대), 윤상오 (단국대), 이광석 (서울과기대), 이연옥 (런던대·로열홀로웨이), 조동원 (중앙대) 외 참가자 분들 모두


◎ 디지털 국면의 위험들에 대해 관심있는 분은 누구나 자유롭게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 일시: 2011년 11월 25일 (금) 오후 3:00 ~ 6:00
◇ 장소: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어의관 202호 (산학협의회실)
◇ 주최: SSK 위험정보사회 연구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IT정책연구소
◇ 후원: 한국연구재단
◇ 참가 문의: 02-970-6872 혹은 kslee@seoultech.ac.kr
◇ 찾아오시는 길: 지하철 7호선 공릉역(서울과기대) 1번 출구에서 학교버스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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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한국 IT 위기와 표류,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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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T 위기와 표류,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 사회는 지난 몇 년간 대형 개인 정보 유출 사건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전국민의 정보재난 상황에 정부는 마땅한 정책과 대응 방안없이 표류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중심에는 기술적 폐쇄와 정보 독점과 유용의 논리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인터넷 실명제는 아직도 건재하고 대기업과 정부기관의 개인정보 유출 불감증은 여전합니다. 이에 스마트 환경과 개방성에 기반을 둔 기술의 진화와는 전혀 다른 한국의 총체적 기술 재난과 위험 상황을 점검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구상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 발표 주제: 「신뢰없는 한국, IT의 미래는 없다」
            - 김인성 (IT칼럼니스트·<한국 IT산업의 멸망> 저자) 



● 사회: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 토론 (가나다순): 강정수 (연세대), 윤상오 (단국대), 정익재 (서울과기대), 조현석(서울과기대) 외 참가자 분들 모두


◎ 한국 IT 발전의 문제점 진단과 향후 대안에 관심있는 분은 누구나 자유롭게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 일시: 2011년 10월 21일 (금) 오후 3:00 ~ 6:00
◇ 장소: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어학원 컨퍼런스홀

◇ 주최: SSK 위험정보사회 연구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IT정책연구소
◇ 후원: 한국연구재단
◇ 참가 문의: 02-970-6872 혹은 kslee [at] seoultech.ac.kr
◇ 찾아오시는 길: 지하철

 

7호선 공릉역 하차후 학교버스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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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스마트 한국, 쟁점과 도전 – 밖, 그리고 안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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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SSK 위험 정보사회 연구팀 정기세미나

스마트 한국, 쟁점과 도전 – 밖, 그리고 안의 시선  

The 1st International Roundtable upon Interrogating ‘Smart Culture in Korea’: Issues and Challenges
 
인터넷과 정보화 초강대국이란 바깥으로부터의 찬사와 다르게, 한국사회는 최근 디지털 기술의 ‘스마트’국면 이후 기술 발전의 총체적 진로 수정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알려진대로 한국 정보통신과 문화 정책을 다루는 방식의 심각성은 구조적이고 총체적입니다. 예를 들어, 정부주도 하드웨어 개발형 시장 정책, 신권위주의 정부에 의한 시민 정보 통제와 관리, 보편적 향유권 무시한 상업주의적 정보문화 정책, 과도한 저작권법 적용으로 인한 표현의 자유 위협, 대기업들의 소비자 정보관리 부실과 도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단계 대한민국의 위상 문제에 대한 원인과 쟁점을 토론하고 앞으로의 대안을 모색하는 작은 집담회를 개최하려 합니다. 방식은 한국문화를 전공하는 한 해외 연구자의 ‘밖’으로부터의 시선을 화두로 삼아 ‘안’의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관련 사회·인문 영역들의 국내 학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로 꾸몄습니다.


인사말: 조현석 (서울과학기술대, 연구책임)

 

라운드테이블 기조발제: “Finding the Korean Digital Wave”  -- Brian Yecies (Univ of Wollongong) 

 

토론리드: 이광석 (서울과기대)

토론 참여자 (가나다 순): 김예란 (광운대), 문선영 (미국·영화사대표), 박진규 (서울여대), 백욱인 (서울과기대), 심애경 (호주·UOW), 은혜정 (서울과기대), 조동원 (중앙대) 외 참가자분들 모두

 

◎ 형식은 라운드테이블로 현단계 ‘스마트 한국’의 향후 진로에 관심있는 분은 누구나 자유롭게 토론에 참여할 수 있고, 통역없이 자유롭게 한국어와 영어를 혼용할 예정.

 

일시: 2011년 9월 30일 (금) 오후 4:00 ~ 6:00
장소: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어의관 202호
주최: SSK 위험정보사회 연구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IT정책연구소
후원: 한국연구재단
참가 문의: 02-970-6872 혹은 kslee [at] seoultech.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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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미디어 문화정치를 사유하라

 

중앙대대학원신문 2010. 11.

 

기술·미디어 문화정치를 사유하라

 

이광석

 

한국 사회에서 기술 혹은 미디어 결정론이 이상기후식으로 번성하거나, 맥루언과 같은 미디어 생태학자들을 기술결정론자로 생각해 도매금으로 비난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학계에서는 누군가 기술을 중심에 놓고 얘기하면 ‘기술주의자’란 혐의나 딱지를 얻기 일쑤였다. 이제와 보면 기실 이도 일종의 일화인 듯싶다. 예나 지금이나 기술·미디어 논의 생산과 대중화의 주류는 진짜배기 기술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인터넷이나 디지털 발전의 자문역으로 임명돼 정부 관료들의 우상이 된, 앨빈 토플러나 피터 드러커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떠올려 보라. 맥루언은 기술주의에 경도된 이들 미래학자들과 동종의 이론적 선구자로 추앙받다가 뒤늦게 비판적 미디어 생태학자로 재조명받은 경우다.

 

플루서나 베냐민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들의 전집 번역 출판이 좀 늦었다 뿐이지, 만약 그 시기가 얼추 90년대 중반쯤이었다면 맥루언처럼 기술주의자의 오명을 뒤집어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림-텍스트-테크노 코드의 세 가지 커뮤니케이션 코드로 인간 상징체계의 진화하는 속성을 설명하는 플루서의 방식은 기술주의 혹은 결정론의 혐의를 쉽게 받을 수 있다. 또한 베냐민이 시각매체에 의해 형성되는 탈인간화된 세계가 인간 지각구조에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기술·미디어의 가능성을 살핀 것 역시 충분히 비슷한 기술주의의 굴레를 뒤집어쓸 수 있다.

 

흔히 ‘낙인’찍는 방식으로 보자면, 기술·미디어 결정론은 기술과 미디어가 한 사회와 문화의 발전을 추동하고 이끈다고 보는 관점이다. 반대로 사회적 구성론이나 비판적 기술론 등은 한 사회와 문화가 기술의 형성과 구성에 미치는 구조적 영향력을 강조하는 관점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들 두 극단의 시각들이 포개지는 접점에 놓인 학자들의 다채로운 주장들인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들의 관점은 시대에 따라 양자택일로 간단히 무 자르듯 한쪽으로 구겨넣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맥루언이 그 대표적 희생양이다. 

 

기술·미디어 사회구성주의의 새로운 시도들

 

기술·미디어의 사회적 구성주의가 좀 더 다층적인 결을 보여줄 수 있게 된 데는 과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덕이 크다. 그는 기술 디자인 자체가 사회와 문화 형성에 미치는 역할론을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즉 행위자 대신 ‘행위소’ 개념을 사용해 ‘비인간’적 요소인 기술·미디어를 엄연한 주체 구성의 일부로 추가, 기술 진화의 구조적 해석을 폭넓게 한 측면이 있다. 라투르의 관점은 기술과 사회적 맥락이 주고받는 영향 관계를 밝히는데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논의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기술 혹은 미디어가 사람에게 말을 걸고 그것의 디자인이 인간의 행위나 문화를 바꾸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예컨대, 어떤 곳에 어떤 특정의 교통 신호 체계(신호등, 과속 방지턱, 경고문, 감시카메라, 경찰의 등장 가운데 하나 혹은 겸)를 설치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인지 방식과 태도에 미치는 영향은 달라진다. 이처럼 기술·미디어 발전의 논리를 규정하는 맥락의 규정성과 함께 그 역으로 기술·미디어가 인간 의식과 행동, 넓게는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무시하기 어렵다. 

 

라투르에 의해 기술·미디어가 행위소로 등극된 것과 함께, 기술·미디어 디자인이 품고 각인하고 있는 사회·문화·인종·계급·성차 등의 모습을 구체적 해석의 지평으로 삼는 논의 또한 사회적 구성론에서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쥬디 웨이크만의 ‘테크노페미니즘’ 개념은 계급의 문제를 기술 해석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기술내 권력의 각인화 과정에 있어서 보다 다양한 층위들을 살피려 한다. 생산 기술(노동 과정내 젠더 생산), 재생산 기술(생명 재상산의 가부장적 동학), 가내 기술(가정내 가전기기들의 젠더 리모델링), 젠더화된 공간 등을 살피면서, 계급과 젠더를 중심으로 한 기술을 둘러싼 중층의 사회 문화적 결정 요인들을 살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성주의에 기댄 근거없는 기술낙관론(속칭 ‘사이버페미니즘’의 부류)이나 조건반사적으로 기술을 남성성과 동일시하여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에코페미니즘의 부류와 결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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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만이나 라투르 등의 사회적 구성론 혹은 기술과의 상호주체성론은 다양한 층위에서 기술·미디어-사회간 조응의 방식과 지형을 밝히는데 업적을 쌓아왔으나, 단순 해석을 넘어 지배적 기술·미디어 디자인을 뒤엎는 탈주와 저항의 기술·미디어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 점에서 마르쿠제의 제자이자 비판적 기술철학자인 앤드류 핀버그의 ‘기술 코드’란 개념은 상당히 유효해 보인다. 기술에는 계급·인종·성차·당대 사회·문화 요인 등이 그 디자인 속에 잠입하고, 한 사회의 법과 정책은 기술에 면죄부를 발급한다. 핀버그 논점의 중요성은 지배의 논리만이 코드의 디자인을 단순 압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애초에 억압의 계기를 가진 기술 디자인도 정해진 이용 매뉴얼을 벗어나려는 다른 길로의 가능성들에 항상 열려 있다. 그래서 핀버그의 기술 코드는 누리꾼들에게 권력의 자기장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역설계’의 실천을 부추긴다.    

 

닫힘과 열림의 ‘기술 코드’적 양가성은 우리에게 자본 권력의 코드화를 경계하고 그 코드로부터 탈주하고 저항하는 계기들을 포착하도록 이끈다. 대부분의 기술·미디어 철학이나 사회학이 그것의 영향력에 대한 사후 해석에 치중하는 경향에 비해 핀버그의 접근법은 지배 코드를 깨는 자발적 실천을 강조한다. 기술·미디어가 사실상 현실에 대한 이해를 막는 장애물로 등장하는 오늘날, 가상의 현실에선 오히려 기술·미디어 코드를 변형해 그 자유로운 소통과 표현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문화정치의 기술·미디어 철학적 사유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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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닥 포지션] DFAIT Incoming POST-DOCTORAL FELLOWSHIPS

Apply for a post-doc concurrently with applications to TT faculty positions
- here is a brand-new Canadian post-doc announcement for folks from specific
countries... Could be you! And you can always list your PDF as "awarded and
not taken up" when you get the TT job.

DFAIT Incoming POST-DOCTORAL FELLOWSHIPS's: France, Germany, Italy, Japan,
UK, Brazil,
Mexico, Switzerland, NZ, Norway, Korea, Russia - Deadline Nov 15th

Foreign Affairs and International Trade Canada (DFAIT) is pleased to
announce the launch of the Post Doctoral Research Fellowships (PDRF).  These
1yr PDFR’s are available to incoming candidates from one of the following
countries who have recently obtained their PhD in the humanities, social
sciences, or natural sciences & engineering. Citizenship from eligible
countries required: Brazil, France, Germany, Italy, Japan, Mexico, New
Zealand, Norway, Republic of Korea, Russia, Switzerland, UK  Tenable in the
2011-2012 academic year.  Value: $36.5K. Priority given to those who have
not previously studied in Canada under a Canadian gov’t scholarship.  The
attached program description including eligibility requirements and
application information can be found on the Government of Canada's
International Scholarships website at www.scholarships.gc.ca
<http://www.scholarships.gc.ca/> . Based on reciprocal agreements between
Canada and Foreign governments, the PDRF will award approximately 40 to 60
fellowships to selected candidates from twelve countries.  

 

This information is provided as an overview only – for current program details, eligibility
and value of awards, please visit the relevant website.  

 

Jacqueline Smit
Senior Officer, International Research Initiatives Office of the Vice
President Research & International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T.
604-822-8136 jacqueline.smit@ubc.ca jacqueline.smit@ubc.ca

www.research.ubc.ca/international.aspx
<http://www.research.ubc.ca/international.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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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P: Riding the Korean Digital Wave (abstract due: 15th of Nov.)

Call for Papers Media International Australia no. 141 (November 2011)

 

Riding the Korean Digital Wave

 

Theme Editors: Brian Yecies, Ben Goldsmith and Kwang-Suk Lee

 

South Korea has been a world leader in a range of online, digital and creative fields, including Digital Multimedia Broadband (DMB), web 2.0 and other new media, broadband and IT technologies. Korean institutions have made innovations in cyber activism and citizen journalism (Ohmynews) and in social networking (Cyworld.com). And, with the support of the Seoul City government, a Digital Media City (D-City) has been built in Seoul as a base for research and development for companies and institutions working in digital media production, broadcasting, gaming, animation, software development and e-education.

 

Yet, despite these ground-breaking developments and innovations, South Korea is less prominent in scholarly discussion than neighbouring China and Japan. Moreover, since 2008, Ohmynews has lost power as a leader of online opinion, while creators of Cyworld mini-homepages have begun leaving their walled garden for the open pastures of new web 2.0 cultures such as Twitter and iphone. The Seoul D-City project has also begun losing its initial lustre due to a downturn in property values, a domestic construction slump and increased government intervention.

 

We seek contributions from a wide range of disciplinary areas that will offer new critical insights on these fundamental changes.

 

This issue of MIA aims to provide new perspectives on how South Korea’s digital media consumption and cultural production flows are changing rapidly and contributing to the power dynamics of creative and cultural industries in Asia and across the globe. We invite contributions on the following topics, and welcome additional proposals:


•    revitalised Hallyu (Korean wave) •    web 2.0 •    gaming •    cyber activism
•    online journalism •    digital media arts •    social networking •    DMB and other micro and mobile media innovations and subcultures •    wireless and broadband developments
•    digital cinema and its impact on the domestic film industry, and •    international co-productions, and government policy.

 

Join us in critically evaluating the changing moments of Korean digital media culture and policy as we look to the future of the so-called digital wave in the region. Abstracts of no more than 500 words should be sent to Brian Yecies (Brian_Yecies at uow.edu.au) by 15 November 2010; he will then advise whether a full paper is required for the reviewing process. Full contributions of 4,000–5,000 words, in MIA style, will be required by
1 March 2011.

 

For further information regarding this special issue, please contact the joint editors:
Brian Yecies (Brian_Yecies at uow.edu.au), Ben Goldsmith (goldsmith.ben at gmail.com) or Kwang-Suk Lee (kslee at uow.edu.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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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정치 패러디물의 미학적 가능성과 한계

온라인 정치 패러디물의 미학적 가능성과 한계

이광석
(@txmole)


<요약>
 

이 글은 인터넷 누리꾼들이 중요한 표현 매체형식으로 이용했던 패러디의 정치 미학적 가능성과 한계를 관찰한다. 특히, 2003년의 대선 정국, 2004년의 총선,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정국, 만두파동, 그리고 서울시장의 ‘서울시 봉헌’ 발언 등에 반응해 대중이 생산해냈던 정치 패러디물들을 중심에 놓고 본다. 당시 시사정치 패러디물에 힘입어 여론이 형성되거나, 그 중 일부는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았던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글은 먼저 한국사회에서 이렇듯 영향력을 행사했던 패러디물이 급격하게 대중화하다 왜 갑자기 쇠퇴했는지를 최근 몇 년의 패러디 발전 과정을 통해 살펴보고, 누리꾼들의 정치 패러디물들을 중심에 놓고 그들이 지닌 정치 미학적 특성과 함의를 살핀다. 본 연구는 이를 통해 누리꾼들의 대중적 창작 행위 증가, 디지털 기술에 의한 매체 표현의 다면성, 그리고 아마추어 작가들의 등장에서 정치 패러디의 긍정적 의의를 찾는다. 하지만, 이들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 패러디 작품들의 영향력이 대단히 단발적이고 휘발성을 지녔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단순히 영화포스터 등 오락미디어 문화의 상징적 이미지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패스티쉬(혼성모방)의 정치 미학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이것이 결국 정치적 앙가주망의 도구로써 패러디의 창조적 역할을 약화시켰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주요어> 패러디, 패스티쉬, 정치 미학, 다다, 전유, 전용, 포토몽타주, 콜라주


1. 앙가주망과 패러디     
 
   2002년 미선·효순 사건, 2004년의 노무현 전임 대통령의 탄핵 국면을 계기로 성장한 누리꾼들의 온-오프라인 정치 경험들, 그리고, 2008년 이후 촛불 정국에서 만개했던 온라인 대중 정치는 그 공과를 떠나 우리에게 누적된 온/오프 미디어 표현 형식의 실험들을 남겼다. 이 글은 바로 온라인 대중 실천의 경험 가운데 크게 영향력을 미쳤던 많은 표현 형식들 가운데 중요한 형식 실험으로 정치 패러디를 선택한다. 패러디는 특히 권력의 억압적 상황 (강화된 훈육과 대중 선전)이 지배적일 때 적합한 저항의 담론 형식이자 전술 형태이다. 그것의 미학적 형식 또한 단순한 이미지에서부터 음악, 동영상, 플래시, 게임 형태 등 다양하다는 점에서 소구방식 또한 대단히 유연하다. 패러디는 유쾌발랄하면서도 권력의 비린 곳을 적절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스타일 정치의 전형이다. 역사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때에 큰 힘을 발휘했던 표현 형식이기도 하다. 누리꾼들에게 정치 패러디란 표현 방식이 새롭게 정치 지수를 상승시키는 표현 방식으로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패러디는 여론을 일으키는 힘 또한 지닌 것이 사실이다. 특히, 온라인 게시물 형태의 패러디물은 한번 알려지면 순식간에 확산되어 권력 집단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시간적으로 즉각적인데다 사회적 영향력과 파급력에서 탁월하다.


정치 패러디는 보통 현실, 특히 퇴행적 정치 상황 (혹은 일상의 정치‘쇼’)에 대한 냉소에서 비롯한다. 거대 권력들, 특히 정부, 기업, 언론에 대한 조롱과 냉소는 이를 지켜보는 수용자들에게 심리적 경멸의 자족적 헛웃음과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패러디는 절차상의 민주주의나 상식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더욱 힘을 발한다. 비상식의 사회상과 정치적 낙후성이 주는 현실의 각박함이 오히려 충만한 패러디와 해학을 생산할 수 있는 원천이기도 하다. 20세기초 파시즘이 성행하던 시절에 베를린 다다가 ‘포토몽타주’(fotomontage)를 이용하여 권력을 조롱하는 새로운 예술 기법으로 창안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억압적인 정치 현실일수록 정치 패러디의 사회비판적 능력이 대단히 중요해져간다.

 

샤르트르식으로 보자면, 누리꾼들이 최근 몇 년간 보여줬던 정치 행위들은 구조화된 사회악과 결별하고 자유로운 개인 삶을 긍정하는 정치 참여로써 ‘앙가주망’(engagement)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앙가주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불가능한 논리이자, 억압의 구조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들의 적극적 정치적 입장 표명이다. 이 점에서 삶을 강제적으로 유린하는 힘을 드러내고 권력에 대한 희화화와 반전을 꾀하는 정치 패러디는 중요한 대중의 표현 형식이다. 이로써 대중이 아마추어적이지만 작품 생산의 주체가 돼가고 정치 미학을 형성하는 창의적 주체로 떠오른다.  

 

이 글은 국내 온라인문화 속에서 누리꾼들의 패러디물을 통한 사회 참여적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반(反)권위주의와 아마추어리즘에 기댄 누리꾼들의 창작 행위가 건강한 정치적 표현 형식으로써 가능한지를, 그리고, 정치 예술 미학의 발전 양쪽에서 어떤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글의 순서는, 먼저 이론적으로 정치 미학의 현재적 가능성과 그 표현 형식으로써 패러디의 개념에 대해 논구한다. 그 다음 국내 온라인 문화사 속에서 패러디 발전의 경과를 짧게 되짚어보고, 실제 당시 유행했던 대표적 패러디물을 시기별로 살펴본다. 방법에서는, 다른 표현수단 보다 월등히 많은 누리꾼들의 사진 패러디들을 생산해왔던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작품과 2천년대 초반부터 정치 현실과 관련해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대표적 패러디물을 뉴스기사 검색을 통해 찾아들어가는 방식을 취했다. 무엇보다 누리꾼들의 작업 방식을 대중화 요인, 정치 미학적 효과, 예술 생산 방식의 대중적 전환이라는 범주로 묶어, 패러디물의 정치 미학적 성과를 따져보고 있다.    

 

 미리 결론을 요약하자면, 정치 패러디를 통한 누리꾼들의 증가된 사회적 발언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만들어낸 작품의 효력이 빠르게 잊혀진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이 글은 영화포스터 등 오락미디어 문화의 상징적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이를 혼성모방(패스티쉬)하는 방식이 문제라 본다. 오히려 이와 같은 혼성모방의 패러디 방식은 앙가주망의 도구로써 정치 패러디의 가치를 약화시켰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적어도 개념적 탈취 개념인 전유와 베를린-다다와 상황주의의 실천 개념이었던 ‘전용’(détournement)의 예술 미학을 통해서 누리꾼들이 지닌 정치 미학적 한계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2. 패러디의 정치 미학

1) 패러디 기원과 그 조건들

옥스퍼드 어원사전(1996년 판)에 보면, 패러디란 말은 16세기말경 그리스어 parōidia에서 나왔다. 어원상 ‘아울러’, ‘곁에’ 혹은 ‘대응의’ par-와 ‘노래’를 의미하는 -ody가 결합되어 생긴 말이다. 이를 합치면, 다른 이의 원작을 이용해 풍자하여 부르는 노래 형식쯤 된다. 중세 때 구전을 통해 노래처럼 부르던 시구절을 연상하게 만들 듯이, 패러디는 중세에 ‘타인의 시 스타일을 모방해 자신의 창작에 이용하는 시 형식’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물론 어원적 의미에서 ‘모방’이란 말은 흔히 말하는 원본 베끼기가 아닌 새로운 표현을 위한 재해석적 행위로 봐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동양에서는 ‘용사’(用事)라는 개념이 있다 (정끝별, 1997, 36쪽). 용사는 과거 경험의 권위를 현재 문맥에 확장시켜 얻는 시적 효과를 지칭한다. 패러디든 용사이건 우리는 둘 다 그 어원이 시나 노래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고, 큰 천재적인 재능 없이도 인민의 정서와 함께하면서 대중적 창작 행위의 일부였던 미학 장르가 패러디임을 또한 엿볼 수 있겠다.


유추해보면 패러디는 앞선 것을 재조합해 현실의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의도적 모방인용이라 할 수 있다. 패러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원본의 텍스트, 패러디를 수행하는 패러디스트, 모방인용의 새로운 패러디 텍스트, 그리고 이를 읽는 독자가 개입돼 있다. 패러디의 창작 완성도는, 모방인용의 정밀함보다는 원작에 일부 기억을 이용해 비정상성에 기댄 현실을 비틀고 조롱하는 능력에 달렸다. 다른 한편, 독자의 해석 능력과 과정이 패러디스트의 감각적 패러디 생산 능력만큼이나 중요하다. 만약 독자가 패러디를 전혀 이해못한다면 그 영향력은 유명무실하다. 즉 원텍스트와 패러디, 그리고 이를 지칭하는 현실을 독자가 제대로 이해를 못한다면 패러디의 효과는 반감하거나 상실된다.

 

구체적으로 패러디가 작동하는 조건을 보면, 첫째, 원텍스트의 ‘전경화’(前景化, foregrounding)'를 필요로 한다. 인용과 모방은 바로 패러디를 위해 원저자의 텍스트로부터 가져온 이미지, 음원, 영상, 시구절 등에 의해 구성된다. 이들이 전경이며, 이는 패러디스트의 작품이 이미 가져온 것(원텍스트)에 의해 구성된 패러디라는 것을 독자에게 일깨우는 구실을 한다. 또한 ‘전경’은 원텍스트의 이미지가 패러디 창작의 전제 조건임을 뜻하나, 새로운 패러디물을 압도해 주인 행세를 하면 곤란하다는 점을 말한다.

 

둘째로, 가져온 것(원텍스트)과 패러디 텍스트는 상호 교류하고 대화한다. 원텍스트가 당대의 사회적 문맥에 의해 수용되고 공인되었던 방식이 패러디 텍스트가 쓰여진 현실에서 다시 여과되어 재해석되는 단계를 거친다. 대개 패러디는 원작에 대해 경애를 표하거나 조롱하는 것에 만족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원작의 힘을 빌어 패러디를 수행하는 시점의 현실과 사건을 풍자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후자의 경우에, 원저와 패러디간을 매개하는 역할은 패러디 대상화된 현실의 소재나 사건에 의해 맺어진다. 일반적으로 원텍스트의 맥락을 기억에 담아 오늘날 정치 현실을 조롱하려는 미학적 형상화 작업이 대개 패러디의 메커니즘으로 보면 된다. 패러디스트가 예술가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현실 비판을 매개로 원텍스트와 자신의 패러디 텍스트를 대화하게 하는 창의적 능력 때문이다.

 

셋째로, 진정한 패러디 창작의 힘은 원작과의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획득된다. 원작과 대화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패러디요 용사이지만, 원작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두는 반복과 모방이 진정한 창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린다 허천(Hutcheon, 1992, 15쪽)은 “유사한 점보다는 다른 점에 유의하면서 (원작에) 비판적인 거리를 두는 반복형식”을 패러디라 간주한다. 다시 말해 “이전의 예술작품을 재편집하고, 재구성하고, 전도(inversion)시키고, 초맥락화(trans-contextualizing)하는 통합된 구조적 모방” (같은 책, 23쪽)이 패러디다. 쉽게 얘기하자면, 패러디엔 같으면서 다름 혹은 다르면서 같은 이율배반의 미학적 논리가 틈입해 있다. 그래서, 패러디나 용사를 행하는 자(패러디스트)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거나, 가져온 것(원텍스트)의 문맥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해하여 피상적으로 패러디 텍스트에 모방 인용했을 때, 이는 새로운 창작이라 보기가 어렵다. (정끝별, 1997, 36~7쪽) 이 점은 이후에 진술될 누리꾼들의 패러디 정치 미학의 패스티쉬적 한계점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논의된다.

 

마지막으로, 패러디는 독자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수용성의 영역이 존재하지만, 이 또한 패러디스트의 역할과 합쳐지는 경향이 있다. 근대 미술 시장의 발달은 전문적 패러디 창작의 영역과 독자 혹은 수용자의 해석 영역을 사실상 분리시켰다. 물론 전문적 패러디스트에 의해 생산된 패러디물로부터 당대 독자와 관객들은 반전과 독특한 해석, 그리고 해학으로부터 ‘기대 전환’의 감흥 효과를 얻었다. 물론 이같은 심미적 해독의 즐거움이란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 온라인 패러디 생산 구조의 민주화로 일반 독자도 누구나 패러디스트의 범주에 끼게 됐다. 온라인 패러디물을 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생산하고 비슷한 것끼리 대조하고 퍼뜨리는 주체로 패러디스트가 독자가 되고 독자가 패러디스트가 되는 합일이 이루어진다. 더 나아가 이들이 만들어낸 대량생산된 패러디물들은 동일 원본을 차용한 경우 서로간에 대화와 소통이 가능한 간텍스트성(intertextuality)에 주목하게 만든다. 이는 패러디의 무한복제 문화와 패러디 생산 주체의 민주화에 따른 결과다. 즉 디지털 기술의 덕택에 힘입은 패러디의 집단 생산은 예술주의적 성찰성을 궁극적으로 떨어뜨리는 경향성을 보이나, ‘과잉의 변조’나 간텍스트성에 의해 해석적 균열을 가져오고 대중의 정치적 소통에 에너르기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는 이후에 보게될 누리꾼들의 정치 패러디물의 생산과 관련해 긍정(일시적·즉각적 대량의 패러디 제작을 통한 여론 환기)이자 한계(성찰성의 뿌리가 약한 관계로 인한 휘발성과 이미지 과잉으로 인한 현기증 유발)로 작용한다.

2) 패러디의 정치 미학적 척도  

패러디의 유사어로, 벌레스크(burlesque, 戱作)나 트라베스티(travesty, 서툰 모방), 패스티쉬(pastiche, 혼성모방), 키치(kitsch), 콜라주(collage), 몽타주(montage), 풍자, 인용 등이 있다. 자주 이 유사어들은 패러디와 혼동돼 쓰이는 차라 조금은 구별이 필요하다. 먼저 ‘벌레스크’ 혹은 ‘트라베스티’는 논자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르나 이 둘은 비슷한 의미로 함께 쓴다. 허천 (68쪽)에 따르면, 이들과 패러디의 차이는 전자가 반드시 조롱을 내포하고 있지만 후자는 반드시 조롱을 지향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벌레스크의 장점은 원작의 진지함의 형식이나 내용을 익살로 모방해 표현하는데 있고, 그렇게 보면 패러디의 하위 장르 유형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패스티쉬’를 보자. 패러디가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에서의 변형 혹은 각색이라면, 패스티쉬는 무비판적이고 피상적인 모방이라는 점에서 또한 다르다. 패스티쉬는 차이보다는 전작과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패러디가 거리두기임을 상기해보면, 프레드릭 제임슨식의 표현법으로 이는 ‘무표정한 모방’ (blank parody)이요, 이미지들의 중성적 모방과 혼용에 불과하다. 더불어 패스티쉬가 대중문화의 장르로 확대될 때 이를 ‘키치’로 볼 수 있다. 키치는 현실 풍자의 맥락이 실종된 원본 베끼기의 배설 미학에 다름 아니다. 한편, 콜라주와 몽타주는 파편화된 단편들을 새롭게 재조합하여 새로운 창작물로 동시화하는 기법이다. 각각의 우연적 배열이 전체의 통일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패스티쉬의 동기 결핍의 베끼기와 무질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콜라주와 포토몽타주는 앞서 지적한 허천의 ‘원작에 비판적 거리두기’에 있어 대단히 충실하다. 패스티쉬에 대한 이들의 상대적 미학적 우위는 왜 이 글에서 패러디의 정치 미학적 가능성을 다다나 상황주의자들의 콜라주와 몽타주 예술 기법에서 찾는지에 대한 근거로 봐야 한다.

 

또 ‘풍자’를 보자. 풍자란 원본 이미지에 대한 줄곧 조롱과 해학을 담고 있다. 그러나, 패러디는 이와 더불어 원텍스트나 원작자에 대한 존경의 ‘오마주’(hommage) 또한 포함한다. 즉,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적 패러디가 풍자와 혼용되어 쓰였던 조롱과 경멸의 패러디라면, 오마주적 패러디 혹은 존경의 패러디 또한 패러디 형식의 일부다. 이렇게 따지자면 풍자의 한 형식으로 패러디를 보는 것은 협소한 정의다. 마지막으로, ‘인용’(quotation)은 단순히 전텍스트 혹은 작가와의 사실적 혹은 잠재적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중립적으로 쓰인 경우다. 인용은 전거 혹은 원텍스트의 힘을 억누르고 거리두는 절제의 완성도 높은 패러디에 줄곧 쓰인다.

 

사실상 이들 용어법은 서로를 배제하기 보다는 서로 중첩되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유사 용어와 그 표현들은 패러디와 경계를 긋거나 혹은 패러디의 중요한 표현 형식이 되면서 패러디의 형식적 미학에 힘을 배가하는 근거가 된다. 문학과 인문 영역에서 활발히 정의내려지거나 해석되는 패러디 미학의 근거는 사실상 활자화된 글인 텍스트 패러디에 한정된 측면이 크다. 사실상 이미지나 동영상 등의 영역에서 패러디 미학 구조에 대한 해석이 최근 거의 부재했다. 그나마 거의 유일하게 예술계에선 한상엽(2006)이 시론적으로 패러디 미학의 성찰성 정도를 본 정도다. 그는 패러디 미학의 수준을 세 가지 정도로 나눈다. 수평적 패러디, 수직적 패러디, 인용으로서의 패러디가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세 가지 미학적 완성도에 따른 분류를 응용해 누리꾼들의 패러디 미학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 활용한다.

 

우선 ‘수평적 패러디’다. 이는 원본 텍스트의 단순 차용 패러디를 지칭한다. 그 급으로 치면 패스티쉬의 접경에 거하는 혼성모방의 패러디다. 누리꾼들의 일반 작품 형식들에서 많이 관찰된다. 예를 들면, 원작 영화 포스터에 얼굴만 포토샵으로 작업해 대치하는 대량 복제식 패러디물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경우에 수평적 패러디물은 원작의 전경화된 이미지에 좌우되고 그것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전경으로 쓰였던 영화 포스터 등이 누렸던 인지도와 인기에 의해 만들어진 패러디 이미지란 결국 전경의 흥행 기간에 비례해 독자의 기억에 각인되는 처지에 놓인다.

 

‘수직적 패러디’는 조금 격상된 패러디 미학이다. 원작의 전경화가 패러디물에서 즉각적이지 않고 일부 의미론적 연결만을 유지한다. 원작 이미지의 차용과 동시에 덧붙여 색다른 형태의 해석을 가미하는 창작 행위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패러디 차용으로서의 대상 이미지’의 힘이 잔존하지만 그보다는 ‘패러디 목표’(target)로서의 현실 해석에 대한 의지와 강도가 훨씬 두드러진다. 수직적 패러디 이미지는 말하자면 원본에 대한 동일성의 힘보다는 이격의 힘이 좀 더 압도하는 상황이다. 수직적 패러디는 이 글의 실제 분석에서 ‘전유’ (appropriation)라는 말로도 달리 쓰이고 있다. 실제 예들은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군들에서 심심찮게 목격된다. 전유의 미학 개념 또한 기존의 것(원텍스트)을 가져다 맥락을 재해석하는 행위를 지칭하나, 그것의 주요 방점은 대상 이미지와의 동일성 유지보다는 오히려 스텍타클의 과잉 이미지들을 정치적으로 재해석해 현실의 패러디 목표를 조롱하는 문화정치적 실천 효과에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선 수직적 패러디란 용어보다 전유의 미학이 훨씬 더 정치적 동기를 함의한 실천적 용어로 본다.

 

   마지막으로 ‘인용으로서의 패러디’ 혹은 중립적 패러디다. 필자는 이것을 ‘전용’ 혹은 ‘선회’(détournement)의 패러디 방식으로 본다. 둘 이상의 원작 이미지들을 끌어오는 포토몽타주는 인용으로서의 패러디의 대표적 형태다. 기존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혼용하나, 새롭게 창작된 것이 기존의 것에 대한 기억 혹은 전경화가 거의 소멸된 형태의 패러디를 지칭한다. 각각의 합이 완전히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연다는 점에서 인용의 패러디는 전유를 넘어선 전용 혹은 선회의 미학에 가깝다. 이는 누리꾼들이 생산하는 패러디 효과의 휘발성을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미학 기제이다. 필자의 주장이 마치 누리꾼들을 패스티쉬와 전유에, 반면 직업적 작가군을 전용에 도달한 것으로 경계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누리꾼이 전용의 미학을 보여줄 수도 직업적 예술가가 그 반대에서 허덕일 수도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아마추어의 몇몇 작품들도 전용과 선회의 미학을 간혹 보여주기도 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개개의 아마추어 패러디 미학을 전용의 미학에 이르도록 독려하고, 집단으로 동시에 제작하는 패러디물들의 과잉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4. 아마추어 정치 패러디물 소사
   
이제 한국의 패러디계로 실제 들어가보자. 2009년 6월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정국과 함께, ‘딴지일보’는 사회 각계의 시국선언에 때맞춰 자신들의 시국선언을 내놨다. 시국선언서의 변에는, “연일 시국선언을 감행하는 측이 청와대와 비교하여 과연 소통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시국선언의 목적이 독백이 아닌 한 결국 청자가 알아들을만한 소리”를 내려면, 다음<표 1>의 내용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쥐가 지껄이는 듯한 ‘찍찌리리릭’ 시국선언에는, 불통의 정치에 소통을 복원하라고 힘없이 외치는 순진함에 대한 풍자 또한 깔려 있다. 한글 서체는 궁서체를 써 시국선언의 옛맛을 살리고, 쥐소리를 흉내내면서 불통의 정치 현실을 묘사한다. 여론의 외면하는 정치 현실을 조롱하는 퍼포먼스 효과이다.

<표 1> 딴지일보의 시국선언문 내용

찍찌리리리릭(시국선언문)

찌~~~익 찌리리리찍 찌리리 찍찍 찍찌리리리리리~~~~~~~찍찍 찍찌찌리릭
찍찌~~~~~~~~~~~~~~~~~~익 찍찍찍찍찍 찌리리리~~~~~~~찍 찌찌찍
찌~~~익 찌리리리찍 찌리리 찍찍 찍찌리리리리리~~~~~~~찍찍 찍찌찌리릭
찍찌~~~~~~~~~~~~~~~~~~익 찍찍찍찍찍 찌리리리~~~~~~~찍 찌찌찍
찌~~~익 찌리리리찍 찌리리 찍찍 찍찌리리리리리~~~~~~~찍찍 찍찌찌리릭
찍찌~~~~~~~~~~~~~~~~~~익 찍찍찍찍찍 찌리리리~~~~~~~찍 찌찌찍


찍찌찌리리~~릭 (2009년 6월 17일 딴지 편집부 일동)

딴지일보는 1998년 7월에 문을 연다. 거의 국내 인터넷 문화의 초창기 시절이다. 당시 청년 실업자였던 총수 김어준은, 적절한 비속어와 농을 섞어 권위를 뒤틀어 표현하는 정치 풍자·패러디 사이트를 개설한다. 딴지일보는 사실상 인터넷 채팅에서의 언어파괴 현상과 형식주의 붕괴에 힘입은 바 크다. 무엇보다,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씨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이라는 창간 선언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딴지일보의 패러디 문법은 문어체 언어 형식의 파괴와 비속어 사용이었다. 그것은 당시 신세대, X, N세대 논쟁과 맞물리면서 사회를 관통하는 엄숙주의에 대한 나름 청소년들의 재기발랄함을 선도하는 디지털 문화로 각광받는 계기가 된다. 형식은 황색 잡지 저널리즘의 틀을 빌렸으되, 내용은 크게 현실 참여적이었다. 딴지일보의 창간 목적에도 나오듯, “우끼고 자빠진 각종 사회 비리에 처절한 똥침을 날리는 것을 임무로” 삼아 뉴스와 사진 패러디물들을 올리면서, 누리꾼들의 호응은 물론이고 언론의 주목을 받아가며 성장한다.  


딴지일보의 힘은 영상을 통한 새로운 의미 전달도 있었지만, 언어 사용의 자유로움과 파괴였다. “유일한 경쟁지는 썬데이 서울”이요 사회 권력의 비리 저 안 ‘똥꼬 깊쑤키’ 들여다보고 비웃고 조롱하는 쾌감의 언어들에 누리꾼들은 쉽게 감응했다. 딴지일보는 정치적으로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과 김영삼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인터뷰 기사와 사진 패러디로 누리꾼들의 호응을 얻으며 크게 이름을 알린다. 그러나, 한일 월드컵 전에서 쇼비니즘에 편승하고 스스로 기업화하면서, 그리고 딴지일보로부터 분리해 새로운 패러디 사이트들이 하나둘 분리해 등장하면서, 원조 사이트로서의 이름도 차츰 퇴색해져갔다.

 

정치 패러디는 2000년 16대 총선 당시 간헐적으로 모습을 보였다. 이후 딴지일보에 의해 2001년 1월쯤에 연재를 시작했던 이회창 등 대선 후보들에 대한 ‘일망타진 이너뷰 시리즈’ 등으로 그 형식적 재미를 주다가, 2004년 총선,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정국, 그리고 당시 이명박 서울 시장의 ‘서울 봉헌’ 발언 등의 정치 현실에서 봇물터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딴지일보 중심의 날 것 그대로의 언어를 통한 정치 패러디에 집중했던 2002년과 달리, 2004년부터는 그 형식에서 디지털 이미지 합성으로 전환한다. 단순히 드라마, 영화 포스터의 이미지들과 카피 문구들을 포토샵 등으로 재가공하는 형태의 정치 패러디물이 폭발했던 시점이라 볼 수 있다.

 

이후 딴지일보의 뒤를 잇는 계보엔 ‘디시인사이드’가 있었다. 이미 디시인사이드는 1999년 디지털 카메라 동호회 사이트로 출발하여 숱한 디지털문화 현상들 (예를 들어, 2002년 디지털 폐인들의 ‘아햏햏’ 문화와 2008년 촛불 정국아래 정치적 토론장으로서의 ‘아고라’의 위력을 보여줬다)의 본산으로 커가는 중이었고, 디시인사이드의 시사 갤러리는 당시 정치 패러디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누리꾼들의 창작 공장쯤이 돼갔다. 어찌보면 디시인사이드는 다른 온라인 공간과 달리 게시글에 이미지를 올려야 글이 게시된다는 성격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패러디 이미지와 동영상의 성장을 도왔던 측면도 있었다.

 

독특하게도, 국내에서 온라인 패러디는 정치적 여론 형성이나 변화에 미치는 역할이 대단히 컸다. 언론에 기사로 소개되거나 언론 스스로 패러디를 차용함으로써 그 대중화를 가속화했다. 특히, 시기적으로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국면에서 패러디의 힘이 컸다. YTN 의 ‘돌발영상’은 탄핵 정국의 주요 장면만을 모아 패러디해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누리꾼들은 그들대로 영화 <살인의 추억>을 패러디한 ‘탄핵의 추억’, 탄핵 가결일의 모습을 풍자한 ‘망국기 휘날리며’, ‘탄핵 대장금’ 등 유명 영화나 드라마 포스터를 따와서 탄핵정국을 비난하거나 국회의원들의 비상식적 행태를 알리는 패러디물들을 제작해 순식간에 인터넷상에 퍼뜨렸으며, 이 패러디물들은 탄핵반대 촛불집회 등 반대여론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우리는 무적의 투표부대’ 패러디 시리즈는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투표를 독려하는 캠페인 소재로 활용되었다. 당시 디시인사이드와 라이브이즈 등에는 수많은 합성물과 패러디물이 등장했다. 누리꾼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복귀를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개혁적 대통령 이미지) 혹은 <효자동 이발사> (소박한 대통령 이미지)에 빗대 만듦으로써, 이제까지의 희화화하거나 부정의 미학 혹은 풍자의 미학에 근거한 정치 패러디물 제작 패턴에 긍정의 패러디란 정반대의 미학적 흐름을 세우기도 했다.    

 

이라크 파병 반대와 반전 작품으로 공을 세웠던 현실 참여적 미술작가군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과 총선 정국에서 누리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패러디 이미지의 기세에 눌려 사실상 부진을 면치 못했다. 당시에 몇몇 아방가르드 정치 미술인들이 탄핵 정국과 관련 온라인 전시 기획을 통해, 프리첼 카페 ‘아트시월’, ‘알통닷컴’, ‘아트무브’ 등에서 누리꾼들과의 만남을 시도했으나 별 호응을 받지 못했다. 누리꾼들은 자신들의 디지털 카메라로 찍거나 기존의 이미지들을 바로 손쉽게 포토샵 등으로 자체 편집을 시도하고 (일명 ‘포샵질’) 단번에 게시판에 올려 명성을 얻으면서, 오히려 직업적 작가군들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2004년의 정치 현실은 이렇게 아마추어 누리꾼들의 패러디 창작이 만개하면서 정치 패러디 사이트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시기였다.

 

그 맘쯤 패러디의 인기를 등에 업고 비즈니스 전업의 신생 사이트들이 속속 등장한다. 시사 패러디물 ‘대선자객’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2003년 12월 말 정치 시사 사이트로 출발한 ‘라이브이즈’(liveis.com), 딴지일보 출신 일부가 독립해 만든 ‘미디어몹’ (mediamob.co.kr), 서울시 버스정책과 CJ 만두파문 패러디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풀빵’ (pullbbang.com) 등이 새롭게 총아를 받았다. 문제는 패러디 사이트들 중 대부분이, 상업적 포털들마냥 누리꾼들이 생산하는 정치 패러디를 콘텐츠 서비스 개념으로 접근해 패러디 자체를 소비재로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상업적 동기를 지녔던 많은 사이트들이, 정치 패러디물을 누리꾼들끼리 보고 키득거리는 배설의 공간에 밀어넣고 온라인 콘텐츠 서비스 사업을 벌이는데 골몰했다. 검색엔진의 패러디 코너에도 영상 합성을 활용한 탄핵 풍자물들이 즐비해져갔다. 예를 들어, 검색 포털인 다음은 ‘디시 인 총선’ 메뉴를 만들어 패러디 포스터 등 누리꾼들의 기발한 창작물들을 모아 게시했고, 야후는 ‘총선 VJ’라는 이름으로 시민기자들이 현장에서 취재한 동영상과 뉴스를 ‘그들의 변신은 무죄’, ‘동상다몽’ 등의 제목을 달아 제공했다. 네이버, 마이엠 등의 사진갤러리도 선거 관련 패러디 사진들로 대체됐다.

 

당시 누리꾼들의 패러디 문화를 흡수하려던 상업적 포털들에 의해 정치 패러디의 연성화와 패러디의 가십화가 비약적으로 늘게 된다. 게다가 패러디 대상이었던 정치권이 역으로 누리꾼들의 정치 패러디 기법을 정치 선동과 상대 비방의 장으로 활용하는 경향도 이즈음 크게 증가해 패러디의 현실 저항적 성격이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의 좋은나라닷컴은 정치에 오락을 가미한 ‘폴리엔터테인먼트’를 표방하면서 적극적으로 정치 패러디물을 선전 도구로 이용했다. 중앙선관위조차도 당시 정치 포털과 연동해 총선 사이트(vote2004.nec.go.kr)를 운영하면서, ‘투표용지 휘날리며’ 등 유명 영화를 패러디한 각종 포스터를 게시할 지경이었다. 정치 패러디의 난맥상은 ‘패러디 정쟁’으로 여야 대결 구도까지 형성되면서 극에 달한다. 실제 패러디 정쟁은 <그림 1>에서 처럼, 청와대 홈페이지 초기화면에 올렸다가 내려진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패러디 사진이 시발이 됐다. 영화 <해피엔드> 포스터의 여배우 얼굴에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의 얼굴을 넣은 패러디물이 청와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올라 파문이 일었다. 정사를 마친 듯 침대에 앉아있는 불륜의 연인 중 남성을 조선과 동아 일보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여성을 박근혜에 비유했다.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며 분격해 노대통령의 알몸 패러디와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사진에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해 ‘희대의 민생파탄범’으로 이름붙인 패러디 사진을 좋은나라닷컴 패러디 사진 코너에 게시하며 반격했다.

 

<그림 1> 패러디 정쟁의 대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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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홈피의 박근혜대표 패러디// 좋은나라닷컴의 노전대통령 패러디
 

멱살잡이와 난투극이 난무하는 우리의 정당정치 현실에서 보자면 이도 그리 큰 사건이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제도권 정치 비판의 수단이었던 패러디가 오히려 의회내 정쟁의 도구가 됐다는 측면에서 보면, 패러디 문화의 발전에 꽤 부정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 정치인들간 패러디 정쟁으로 말미암아 패러디가 특정 정파를 비난하고 선동하는 도구적 역할로 후퇴했고, 이후에 계속해서 비열한 정쟁의 도구로 등장한다. 물론 2008년 촛불 정국에서 스티커, 짤방, 플래카드, 풍선, 카메라 등 다양한 소통의 매체 역할에 더해, 정치 패러디는 계속해서 누리꾼들의 중요한 사회참여와 표현의 수단으로 쓰인다.


2009년에 또 한번 패러디는 그 정치적 급진성을 상실한다. 정부 홍보의 적극적 수단으로 도입되는 국면을 맞이한다. 반전과 해학을 통한 풍자의 미학이 사그러들고 이제 패러디는 정부 정책의 중요한 홍보 수단으로 떠오른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은 드라마 ‘꽃보다 남자’(KBS 2TV)의 인기에 편승해 당 홈페이지에 국정핵심과제 관련 특위 활동을 ‘꽃보다 경제’로 패러디해 게시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변인은 손담비의 노래를 빗대어, ‘박담비, 같이 미칩시다’ 패러디를 만들어 당 기초의원 결의대회에서 선전용으로 제작해 퍼뜨렸다. 또한 박희태의 말말말 게시판에 또 한번 오른 ‘우리도 연아처럼’에서는 피겨선수 김연아 선수 옆으로 그가 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을 합성해 올렸다. 김연아처럼 세계 경제전쟁에서 승리하자는 메시지를 첨언한다. 패러디의 홍보 수단화는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을 패러디하면서 사실상 절정에 이르렀다. 김인식 야구감독의 얼굴을 대신한 이명박 대통령이 야구단 감독의 얼굴로 합쳐져 등장하고, ‘당정청 드림팀이 되자’는 문구로 패러디물을 완성했다.


대부분 패러디의 정부 홍보 수단화에 누리꾼들의 야유가 쏟아졌는데, 사실상 콜라주나 포토몽타주의 역사를 본다면 이도 그리 크게 욕먹을 짓은 아니었다. 사회주의 건설기에 콜라주나 포토몽타주가 정치 과잉의 선전 도구로 이용됐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주들 또한 심심찮게 이들 기법을 이용해 물건을 팔아왔기에 정부 홍보용 패러디물이란 외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요 결과일 수 있다. 문제는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누리꾼들의 전유물이자 정치 풍자의 대표적 수단으로 각광을 받았던 패러디 수단이 정당간 정쟁이나 홍보용 수단으로 재개념화될 때였다. 노무현 탄핵정국 패러디물들을 빼곤 사실상 정책 홍보 등 긍정의 패러디가 오히려 누리꾼들의 반감을 사거나 대부분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음을 보여준다. 정치인들의 패러디 오용이 문화정치적 표현 수단으로써의 효과를 상당히 희석시켰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요약하면, 정치 이슈가 나올 때마다 누리꾼들은 새롭고 기발한 그래서 정국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정치 패러디 작품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동시에 패러디는 정치권의 정쟁과 홍보용으로 그리고 온라인 포털들과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전문 상업 패러디 사이트들을 위한 돈벌이로 전락하면서 그 정치적 호소력을 점점 잃기 시작한다.


5. 정치 미학적 표현으로써 패러디의 가능성    

이제까지 국내 인터넷 패러디의 발전을 딴지일보에서 출발해 최근의 정치 패러디 발전까지 그 특징들을 훑어보았다. 2004년을 정점으로 놓고 패러디 문화의 대중화와 이후 쇠퇴 국면을 살펴보면서, 그 쇠락의 요인들로 업체들의 패러디의 상업적 서비스화, 패러디의 정쟁 도구화, 정부 홍보용 패러디 생산을 들었다. 이제부턴 좀 더 미시적인 패러디 생산 미학 자체에 눈을 돌려서, 누리꾼들과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이 직접 디자인해 올렸던 몇몇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우선 그들의 작업 방식을 대중화 요인, 정치 미학적 효과, 예술 생산 방식의 대중적 전환이라는 특징에 착안해 패러디물의 공과를 따져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방법에서는, 다른 표현수단 보다 월등히 많은 누리꾼들의 사진 패러디들을 생산해왔던 디시인사이드 갤러리(http://gall.dcinside.com)를 중심에 두고 그 하위 디렉토리인 ‘패러디 갤러리’ 작품들을 주로 살펴보았다. 2003년부터 개설된 패러디 갤러리의 게시물들을 재열람하면서, 다양한 패러디 게시물 가운데 주로 정치적 사안과 연관된 목록들을 열람하는 방식을 취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들에 이뤄졌던 패러디 창작과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들을 함께 감상하기 위해, 디시인사이드 외에 구글, 네이버, 야후 검색(예를 들면, 이명박 패러디, 정치 패러디, 노무현 탄핵 패러디, 박근혜 패러디 등)으로 관련 이미지들을 여러 경로를 통해 찾아들어가는 방식도 썼다.


정치 패러디의 성장과 발달이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시기들과 대체로 일치하지만, 2003년의 대선 정국을 시작으로 2004년의 총선,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정국, 만두파동, 그리고 서울시장의 ‘서울시 봉헌’ 발언에 대응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다, 촛불 정국 시기에 다른 표현 매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춤하는 소강 국면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정치 패러디 발전의 이와 같은 국면 변화에 대한 해석을 주로 이 때 생산되어 높은 조회수를 누리며 유명세를 탔던 패러디물들을 관찰해보며 그 근거 이유들을 찾고 있다. 즉 정치 패러디가 문제시됐던 시점들(주로 정치 선거 시즌들)과 연계된 정치 패러디물에 대한 기사 자료 수집은 뉴스기사 전문 검색 사이트인 카인즈(http://www.kinds.or.kr)를 통해 추가로 병행했다. 기사화됐던 누리꾼들의 패러디에 대한 소개를 참고로 다시 관련 이미지를 검색하는 방식도 취했다. 덧붙여, 정치 패러디 갤러리로 유명한 ‘미디어데일리’, ‘풀빵닷컴’, ‘미디어몹’, 그리고 ‘야후’와 ‘다음’2의 사진 이미지 갤러리 등을 참고가 필요할 경우 열람했다. 패러디물 내용에 대한 미학적 평가는 앞서 이론적으로 살펴봤던 패러디 미학의 세 가지 부류들, 즉 수평적 패러디 혹은 패스티쉬의 미학, 수직적 패러디-전유의 미학, 인용의 미학-전용 혹은 선회의 미학이란 기준을 통해 해석을 시도한다.

 

1) 정치 패러디의 대중적 생산 방식과 파급력

이제까지 대중과 언론의 조명을 받아 소개됐던 국내 정치 패러디물의 형식을 보면, 대부분 그 내용들을 국내ㆍ외 영화나 드라마 포스터에 크게 의존해왔다. 단순히 포스터에 나온 배역 얼굴만을 바꾸고 카피 문구를 적절히 고치는 ‘포샵’ 수준의 패러디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 올라와있는 패러디 게시물들을 살펴보면, 2003년부터 사회적으로 쟁점화됐던 사안들과 관련해 거의 대부분 영화 포스터들을 원본 이미지로 차용했다. 콜라주 형식으로 다른 이미지들을 여럿 합성한 작품은 오히려 2천년대 초반에 잠깐 등장하고 곧 사라진다. 사회적 논쟁이 있던 시점에 만들어진 패러디물들은 대부분 포스터 이미지의 틀을 그대로 갖다 쓰는 방식이었다. 그것도 대중적으로 관객이 많이 들었던 영화나 드라마 작품들 중 정치적 사안이 터진 시점이나 바로 전에 제작된 포스터 이미지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누리꾼들 스스로 혹은 보는 이들의 기억 능력에 소구하기 위해서 최근 1, 2년간 쓰였던 영화포스터들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보는 듯하다. 그러다보니 세월이 지나서보면 당시 패러디의 정황과 맥락이 뭔지에 대해 보는 이의 기억에서 가물가물하기 십상이다. 즉 패러디 작품에 대한 누리꾼들 스스로의 기억과 패러디물 자체의 생명력이 짧아진다. 이는 다음에 볼 패러디의 정치 미학적 한계 상황을 만드는데 일조하는데 반해, 다중에 의한 창작물의 대량 생산을 허용해 여론을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크게 기여한 측면이 있다.

<표 2> ‘미디어데일리’ 시사 패러디 연재물
 

 패러디 연재 제목

연재 일자

원본 출처

·'타임머신' MB와 함께 떠나는 과거여행!

09. 6. 30.

미국영화: 타임머신, 2002

·황석영의 '잘못된 만남' 중도실용주의??

09. 6.  8.

국내영화: 잘못된 만남, 2008

·'바보' 노무현 당신의 미소가 그립습니다.

09. 5. 25.

국내영화: 바보, 2008

·'황씨표류기' 황석영 '사는게 다 그런거지!'

09. 5. 15.

국내영화: 김씨표류기, 2009

·'마더' 건호야! 엄마가 지켜줄께!

09. 5. 13.

국내영화: 마더, 2009

·'킬빌' 강한 박근혜가 돌아왔다!

09. 5. 12.

미국영화: 킬빌, 2004

·2009 외인구단

09. 5.  6.

MBC드라마: 외인구단, 2009

·'박풍(朴風)'의 신라의 달밤!

09. 4  30.

국내영화: 신라의달밤, 2001

·4.29 뺏지대전!

09. 4. 24.

중국 영화: 적벽대전 2, 2009

·우리집에 왜 왔니?

09. 4. 22.

국내영화: 우리집에 왜 왔니?, 2008

·신해철의 '사랑'

09. 4. 21.

국내영화: 사랑, 2007

 

누리꾼들 누구든 쉽게, 있는 포스터 이미지들을 가져다 변형하여 사안에 따라 대량으로 제작해 게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누리꾼들이 완성한 패러디물 아래 흔히 달아놓는 “하룻밤 꼬박 날 새서 만들었어요”란 누리꾼들의 덧붙이는 게시글은, 이들이 패러디 제작에 투여한 상대적으로 손쉬운 작업 난이도를 뜻한다. 최근의 이미지 패러디 제작 방식을 봐도 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일례로, <표 2>의 ‘미디어데일리’(www.mediadaily.co.kr)의 정치 시사 패러디물의 연재를 봐도, 그 제작 특성이 잘 드러난다. 표의 우측 칸들은 원본 이미지의 출처를 국가명, 제목, 제작년도 순으로 필자가 정리해본 것이다. 이를 보면 대부분이 흥행에 성공해 잘 알려진 국내ㆍ외 영화 포스터를 이용해 재미를 주는, 거의 만평과 비슷한 연재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연재물조차도 매주에 한편씩 작가가 아닌 전문기자가 패러디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본 포스터에 기대서 누구나 제작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됐음을 의미한다. 물론 패러디 생산 미학의 수준에서 보면, 대개가 단순히 포스터 캐릭터와 정치인의 얼굴 이미지를 뒤바꾸는 것들이어서 패러디의 완성도와 영향력이란 면에서 단순 차용의 ‘수평적 패러디’에 해당한다.

 

<그림 2> 서울시 버스노선 패러디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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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인사이드 패러디 갤러리의 게시물들과 앞서 패러디 쇠락의 전반적 역사를 보면, 단연 2004년 탄핵 국면, ‘서울 봉헌’ 반발, 그리고, 같은 해 6월 ‘쓰레기’ 만두 파동 시기에 누리꾼들의 패러디 창작이 최고점에 달했다. 창작물 생산의 당시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컨대, 탄핵 국면에서 국회의원들을 향한 국민들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국회해산’ 등을 외치는 사이버시위에 자연스레 정치 패러디가 합세해 힘을 실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기각했을 때 또한 노대통령의 복귀를 환영하는 포스터 이미지 혹은 플래시로 제작한 패러디물이 봇물을 이루었다.

 

2004년 7월경에는 당시 이명박 서울 시장의 ‘서울 봉헌’ 논란과 교통 체계가 바뀐 것에 대해 비판 패러디들이 디시인사이드 등을 가득 메운 적이 있다. 특히, 이 때 제작된 패러디물 가운데 서울 버스를 구분한 알파벳 표기 G, R, Y, B를 ‘지랄염병’의 약자라 빗대어 보면서, “이젠 버스를 타면 살아 숨쉬는 지랄염병을 체험할 수 있다”는 내용의 패러디가 등장해 크게 주목을 끌었다. 버스 노선 패러디는 이제까지의 대중영화 포스터의 패러디 합성 방식과 미학적 완성도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나쳐보면 이미 존재하는 버스 이미지에 단순히 문자를 바꿔놓는 효과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버스와 문자가 색감 효과를 발휘하면서 뛰어난 타이포그래피 효과까지 함께 거두고 있다. 그림에선 흑백으로 보이지만, 각각의 버스는 위로부터 파랑, 빨강, 노랑, 파랑 색이고, ‘지/랄/염/병’의 네 글자가 버스 색깔과 상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흥미롭게도 색감과 타이포그래피의 앙상블은 육두문자 네 글자와 대비되면서 그 색감의 정교한 질서를 여지없이 희화화하고 박살내는 재미를 준다. 미학적 수준으로 본다면, 아마추어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용으로서의 패러디’ 혹은 ‘전용’의 미학에 이른다.

 

같은 해 만두 파동에서도 패러디물의 위력은 강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사안은 기업의 도덕성 문제였다. 무엇보다 일명 ‘쓰레기 만두’ 생산과정과 관련해 식품업체 1위 CJ 등이 책임 회피 등 비도덕적 모습을 보이다 누리꾼들의 공분을 샀다. 결국 누리꾼들이 분풀이로 제작해 배포했던 패러디가 여론몰이를 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만두파동의 책임 논의가 불거지던 당시 한 누리꾼의 기업 윤리 질책에 대한 CJ 직원의 면피용 답 메일이 공개되면서 공분을 샀다. 이 때 <올드보이> 영화 속 장면을 이용해 CJ 직원을 비판하는 다양한 패러디들이 등장했다. 당시 패러디물들은 먹거리와 관련해 대기업의 비윤리적 속성을 알리는데 상당히 큰 힘을 발휘했다.

 

결국, 효과면에서 누리꾼들이 제작한 패러디 하나하나가 가진 이미지의 힘보다는 여럿이 한번에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빠르게 제작하여 뿌리는 그 이미지들의 합해진 힘이 외려 컸다. 2004년 당시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사이트에만 하루에도 수백건의 정치 패러디 게시물들이 올라왔던 점이 그 예이다. 다시 말해, 작품으로서 콜라주나 혹은 포토몽타주처럼 패러디 이미지가 지니는 미학적 완성도에 의한 심미적 감흥보다는, 사회적 이슈와 적절히 맞물리면서 누리꾼들이 퍼뜨렸던 풍자 이미지들에 압도당했던 특정 시기의 정황이 효과 측면에서 더 컸다. 누리꾼들의 활동은 패러디를 생산해 인터넷 곳곳에 터뜨리는 게릴라전에 가까워보인다. 패러디 생산 방식에 있어서 쉽고 대중 친화적인 특성이 단기간에 파급력이 컸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이는 개개의 패러디 이미지들이 쉽게 잊혀지고 생명력이 짧은 근거로 작용했다.    
 

 

2) 매체 표현 방식의 다층성

2008년 촛불 정국하에서, 미국의 힙합 래퍼 에미넴(Eminem)의 음원(Lose Yourself)에 반주를 맞추고 이명박 대통령의 연설 내용을 샘플링해 제작한 랩곡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에미넴을 패러디해 일명 닉네임이 ‘핼시오네라(Halcyonera)’라 알려진 누리꾼이 만든 ‘Cease Yourself’란 싱글 곡이다. 이대통령의 육성을 대부분 역진술해 끊어 이어서 가사를 만들었는데, 샘플링의 편집이 상당한 수준이다. 음원 샘플링을 통한 정치 패러디 기법은 또한 동영상 이미지와 합쳐지기도 한다. 즉 가수들의 노랫말에 맞춰 연설하는 정치인들의 입모양을 편집하여 립싱크하는 동영상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떠오르는 정치 패러디의 일종이다.

 

2004년 탄핵 국면에서 등장했던 각종 플래시, 카툰, 풍자만화 등도 이미지, 캐리커처, 동영상, 음악 등을 혼성해 쓰면서 사이버공간을 스타일 정치의 표현 무대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레떼닷컴(www.lettee.com) 등에서는 패러디 플래시물들이 등장했고, 게임 사이트에서는 게임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듯 ‘탄핵반대’를 외쳤다. 게임 내러티브 자체가 정치 패러디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노 전대통령 탄핵에 가담했던 국회의원들을 기생충에 비유해 총으로 쏘아 잡는 ‘국회 기생충 박멸게임’이 개발되어 유행한 적이 있다. 청와대를 배경으로 ‘193마리의 기생충을 잡아라’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날개 달린 국회의원들의 얼굴을 총으로 쏘아 떨어뜨리는 게임이다. 임무 수행을 다 끝내지 못하면, ‘민주주의 오버’라는 메시지가 창에 뜬다. 또한 경매 사이트 옥션(www.auction.co.kr)에서는 네티즌들 간에 탄핵을 찬성했던 국회의원들의 이름을 붙인 물건들을 헐값에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방식은 다 다르지만 다양한 매체 수단을 응용한 정치 패러디의 양상들이다.


2008년 촛불 정국에서도, 광화문 앞 광장 한복판에 펼쳐놓은 컨테이너 박스들 (일명 ‘명박산성’)에 망연자실해 하면서 수많은 누리꾼들이 다양한 패러디들을 제작했다. 형식은 광화문 사진 이미지였으나 내용은 온라인 게임 베틀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게임 전술 화면들을 합성하여 구성하는 재치를 보여준다. 마치 조선 시대의 운문체 글을 떠올리게 하는 ‘명박산성’(明博山城)이란 <표 3>의 시구절을 보라. 이 또한, 한자어 고유의 소리와 말뜻을 서로 달리할 수 있음을 살려서 패러디를 재치있게 구성했다.  

    

명박산성(明博山城)

 

광종(狂宗) (연호:조지) 부시 8년(戊子年)에 조선국 서공(鼠公) 이명박이 쌓은  성으로 한양성의 내성(內城)이다.
 성(城)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당시 육조거리에 막아놓은 기대마벽(機隊馬壁)이 백성들에 의해 치워지매, 그에 대신하여 보다 더 견고한 철궤로 쌓아올린 책(柵)에 불과하다.
 이는 당시 서공(鼠公)의 사대주의 정책과 삼사(三司:조선,중앙,동아) 언관들의 부패를 책하는 촛불민심이 서공의 궁(宮)으로 향하는 것을 두려워 만든 것이다. (후략)


 [출처: 불명]    


 <표 3> 광화문 컨테이너 박스의 패러디 시구절
 

20세기초 나치에 대항해 다다이스트들이 그 어느 누구보다도 다양한 오브제들을 사용해 이미지 콜라주의 패러디 정치 예술을 보여줬던 것처럼, 인터넷 누리꾼들은 반전과 풍자를 끌어올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 기법과 수단들을 통해 패러디 창작을 한다. 물론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이 가져온 효과는 다다의 20세기초 상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예컨대, 다다의 포토몽타주가 지금까지 미학적 차원에서 뛰어나고 그것이 마치 르뽀 사진의 효과를 낼 정도로 정교한 합성 효과를 뽐내어도, 사실상 아마추어 누리꾼들이 하루 밤을 새서 만드는 패러디물에 비해 실재감을 구현하는데 오히려 경쟁에서 밀리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게다가 포토몽타주를 위해 쓰였던 재료가 인쇄된 책이나 신문임을 고려하면, 1차원 평면적 이미지 합성을 넘어서는 디지털 이미지의 다양한 효과와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시각적 표현이라 하더라도 훨씬 다차원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지한 사진에 운동성을 줄 수도 있고, 하나의 이미지 바탕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주는 것도 가능하다. 디지털 기술은 이렇듯 표현의 시간과 공간 배치의 모든 부분에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2008년 촛불 정국하에 어느 누리꾼에 의해 만들어진 ‘엠비콕’이란 작품을 보자.

 

<그림 3>은 헐리우드 영화 <행콕>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15장 조합(예서는 그 중 3장 발췌)의 연속으로 움직이는 이 사진은 마치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콜라주들의 중첩 효과를 내고 있다. 한 누리꾼에 의해 제작된 이 이미지는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던 촛불 시위를 각 지역별로 ‘엠비콕’의 고글 안경 위로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다. 기본 얼굴 이미지와 주요 하단 문구들은 바탕으로 고정돼 있고, 시간에 따라 고글 안경 위로 전국에서 벌어지는 촛불 시위 현장들의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변해간다. 동시에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 시위에 반응하는 답글이 만화식 말풍선을 통해 점멸한다.
 

<그림 3> 영화 <행콕>의 패러디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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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보면, 15장의 조합된 사진들 각각이 하나의 움직이는 사진 이미지의 콜라주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가만 들여다보면, 15장 사진조각들 각각에 또 다른 콜라주들의 시·공간적 배열과 배치 효과를 합해놓고 있다. 어찌보면 이는 비슷하게 변화하는 이미지들을 여러 겹으로 중첩시키는 플래시 등 디지털 표현의 아주 단순한 미학적 효과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흔히 볼 수 있었던 영화포스터 배역의 얼굴을 정치인의 것으로 대체하는 1차원적 사진 병합의 패스티쉬 방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흔히 고착된 공간성을 지닌 콜라주나 포토몽타주에 비해서, ‘엠비콕’과 같은 이미지 변형은 시간적 축을 이용하여 콜라주 이미지들의 공간 편성의 변화까지도 함께 꾀하는 작업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는 기법의 다양성과 표현 방식을 한층 시공간적으로 유연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엠비콕’은 현대 누리꾼들의 문화, 특히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반응하는 새로운 패러디 형식 실험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미학적으로 보면, 디지털 시대의 기법들을 창의적으로 전유한 ‘수직적 패러디’로 봐도 좋다.

 

상황과 토픽에 따라 이처럼 매체적ㆍ시각적 특성을 종횡하며 새로운 표현방식들을 다매체적으로 결합하는 능력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물론 영화 포스터의 원본 이미지에 너무 기대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도 사실이다. 이 또한 영화 포스터라는 오브제의 아우라에 의존함으로써 이 또한 패러디의 생명력을 짧게 만들고 있다.     
 

 

3)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의 탄생

국내에서 누리꾼들의 패러디물 생산은 정치적 동기에서 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디지털 이미지들의 얼굴을 장난삼아 바꾸는 행위로 출발했다. 그들 주위의 친구들, 친지, 가족, 연애인 등이 콜라주의 대상으로 나오다, 사회적, 정치적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로 차차 그 사진의 내용이 대체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디시인사이드 패러디 갤러리를 봐도 이와 비슷한 패러디 내용 변화의 패턴을 읽을 수 있다. 갤러리에 등록된 게시물 가운데, 2003년 10월쯤 되서야 게시 목록에서 본격적으로 영화 포스터를 이용한 패러디물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로 소재는 누리꾼들 주위의 친한 인물들이었고, 서서히 정치성(주로 쇼비니즘에 기댄 주변국들 비난)을 띤 게시물들이 같은 해 7월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 시기와 맞물리고 이후 시기로 접어들면 정치인들의 패러디물들이 대거 늘어난다. 그 와중에 한-일 월드컵, WBC 야구, 독도 문제, 2008 베이징 올림픽 패러디 등에서처럼, 스포츠계 인사들과 선수들이 패러디물의 소재로 떠오르기도 한다.


불과 십수년전만 해도 전문 작가들의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실험예술이 대안으로 떠올랐던 적이 있다. 작가와 수용자의 대화를 위해 수용자를 직접 작품 생산 과정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예술 활동을 일컫는다. 허나 이 상황에서도 수용자는 어디까지나 작품의 소비자였다. (예를 들어 강명구, 1987 참고). 하지만, 이제는 수용자가 작가가 된다. 이들의 작업 소재도 신변잡기에서 사회 참여적 이슈로 옮아가는 추세다. 오늘날 누리꾼들의 작품은 대개 사안의 정황을 기막힌 반전을 통해 얼마나 풍자적으로 묘사했느냐에 따라 커뮤니티 내부로부터 평가받는다. 그것의 현실태는 조회수와 ‘펌질’이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서만 봐도 잘 만들어진 패러디의 경우 조회수 1만건을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리고, 명성을 얻은 패러디는 누리꾼들에 의해 다른 장소로 무섭게 퍼진다. 이는 예술 작가들이 화랑이나 미술관을 통해 명성을 쌓는 방식보다 즉각적이다. 인정 투쟁의 방식에서, 프로급 예술가들의 성장이 폐쇄된 인적 회로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 것에 비해, 누리꾼들의 클릭수와 펌질은 더 공개적이며 연예인 스타제조 방식의 스타덤 구조와 비슷하다.

 

정치 패러디물이 홍수를 이루던 2004년은 이렇게 누리꾼들에 의해 인정받는 스타급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이 급부상하는 시기다. 예를 들어, ‘하얀쪽배’라는 아이디로 잘 알려진 신상민(당시 27살)은 그 해 17대 국회의원 선거 시기 24건 정도의 패러디물을 올려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아마추어 작가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 패러디물 아래에 아이디를 삽입해 넣을 정도로 나름대로 프로 작가의식이 있었다. 방식은 다른 이들의 것과 비슷하게 영화 포스터물의 이미지 변형 수준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사진 이미지들을 이용해 전문적 패러디 작업을 수행했다. 당시에 워낙 정치 패러디물로 선거사범들이 늘어나면서, 그와 비슷한 몇몇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연대’를 결성한다. 총선을 거치면서 패러디 사범이 1천여명 이상 입건된 것을 보면, ‘하얀쪽배’류의 스타 작가가 나오는 것이나 이들의 권리를 사수하는 모임 결성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얀쪽배’와 아마추어 작가들이 당시 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과연 패러디가 창작이냐 아니면 ‘해적’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냐는 논쟁도 일었다. 방석호는 한 언론 대담에서, 패러디를 직접/간접으로 구분하고, 수준높은(직접) 패러디의 경우 창작이 개입돼 저작권 위반 혐의가 적고, 단순히 얼굴 정도 바꿔치는 수준의 저급(간접) 패러디의 경우 창작 수준이 떨어져 엄격한 저작권법 적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누리꾼들이 만들어내는 패러디물이 대체로 간접 패러디에 집중해 직접 패러디를 생산할 수 있는 여력이 적었고, 직접과 간접 패러디를 구분짓는 판단 자체가 사실상 자의적일 수 있어서, 그의 접근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질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저작권법 제25조의 ‘비평을 위한 인용’으로서 정치 패러디를 인정한다면,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한 패러디 작가들의 작품들은 저작권 침해와 무관한 사회 비평을 위한 인용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2004년 국회탄핵 시기까지 ‘하얀쪽배’나 ‘첫비’ 등 아마추어 작가들은 크게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나, 이후 많은 패러디 작가들은 정치 패러디 제작 일에서 손을 떼고 일상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는 저작권법과 선거법 위반 등 법적 판단에 의해 그들의 창작 활동이 크게 위축된 정황이 컸다. 아마추어 정치 패러디 작가들의 위축에 이어서, 최근에는 정치적 맥락을 거세한 연예 오락전문 패러디 작가들이 오히려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의 패러디는 소재 자체가 연예물이어서 그런지 법적 소송 압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오히려 온라인 서비스업계는 패러디를 오락산업의 아이템으로 만들어 이들을 오히려 포획하는 추세다. 아마추어 작가들은 대체로 정치성을 거세해 패러디가 주는 재미만을 특화하여 연성화해 누리꾼들의 입소문으로 이름을 얻으면 연예계에 작가로 데뷔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008년 패러디 제작 전문작가로 발탁된 ‘김여사’란 이는 ‘드라마 리폼’을 연재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또한 이재수라는 이는 원래 서태지의 노래 ‘컴백홈’을 패러디하며 이름을 알렸던 패러디 전문 가수인데, 최근 패러디 전문 영화감독으로 돌아서면서 나홍진 감독의 영화 <추격자>를 패러디한 ‘추경자’란 작품을 만들어 재미를 봤다.

 

정치 패러디의 전반적 흐름에서 보자면, 아마추어 작가군 생산의 맥이 이처럼 정치, 사회 이슈에서 연예 오락에 봉사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소수 엘리트들에 전유되던 창작 활동들이 누리꾼들 누구나 참여하는 창작의 민주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인터넷 패러디의 발전이 생산 주체의 다변화에 큰 돌파구가 된 셈이다. 전통적 정치 예술이 그렇게 벗어나려했으나 실패했던 지점은, 예술의 자기함몰적, 엘리트주의적, 그리고 선동주의적 자세였다. 예술에서 엘리트주의는 일반 대중이 해독하기에 어렵고 이해 불가능한 수준의 작품들로부터 빚어진다. 아무리 정치 미학이 뛰어나더라도 대중의 동의나 이해력을 얻지 못하면 창작의 힘을 잃고 외면을 받을 수 있다. 비록 아마추어적이었고 이제는 시들해졌지만, 창작의 대중화란 점에서 누리꾼들로부터 패러디 작가군의 배출은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4) 패러디 정치 미학의 한계점들

앞서 세 가지 수준(대중적 파급력, 다매체 결합력, 창작의 대중 친화력)에서 정치 패러디의 가능성들을 살펴봤다. 이제부턴 누리꾼들이 지녔던 정치 패러디 미학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먼저 패러디란 표현 방식은 기본적으로 그 미학적 완성도란 측면에서 보면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다. 그 까닭은 창작 기법에 있어 원본 이미지의 차용이 반드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손쉬운 제작을 가져오지만, 그만큼 창작의 수준을 원본 이미지의 기억에 매달리게 만드는 단점을 지닌다.


원본의 기억에 크게 기대는 누리꾼들의 패러디 생산은 패스티쉬로 전락하거나 전유에 머무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패스티쉬의 퇴행성과 달리 지배 문화와 지배 담론의 언어를 바꾸어서 대중의 것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을 일컬어 ‘전유’라 지적했다. 그나마 전유는 소비문화를 통해 생산된 대중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재구성해 역으로 지배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한다. 뉴-/디지털 미디어 예술은 ‘전유’의 창작 방식을 북돋고, 아마추어 누리꾼들을 손쉽게 작가의 스타덤으로 이끈다. 이때 전유는 인용, 샘플링, 콜라주 등의 기법을 동원하며 그로 인해 브랜드 가치를 보호하는 저작권 체계나 초상권, 명예 훼손 등과 항상 적대 관계에 놓인다. 통칭해, 이는 ‘전유 예술’ (Harold, 2008)이라 불릴 정도다. 이제까지 살펴봤던, 영화 포스터 등 원본 이미지를 합성하고 그것의 아우라를 이용해 누리꾼들이 정치 풍자를 한다고 하면, 이는 어디까지나 원본의 기억에 기대서 작업한다고 봐야 한다. 대부분이 전유보다는 패스티쉬에 가깝다. 전유의 강점은 원본이 패러디에 미치는 것보다 강한 현실에 표적을 맞춘 비평의 힘에 있다. 그러나, 전유의 방식 또한 패스티쉬만큼이나 자본주의의 브랜드 기호나 권력의 약호를 재배치하거나 변형하는 행위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자연히 전유의 이미지들 또한 수많은 스펙터클한 다른 기호들에 효과없이 파묻히거나 자본주의 광고 등에 역으로 활용되면서 많은 부분 포획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1) 소구 방식의 동일성

실제 패스티쉬적 모방이나 전유에서 멈춘 채 그 자리에서 더 나아가질 않는 누리꾼들의 문화 행동은 아마추어 패러디의 미학적 맹점으로 작용한다. 인터넷 정치 패러디의 가장 큰 문제는 이용되는 소재가 다양한데 소구 방식이 동일하다는데 있다. 국내외 영화와 드라마 포스터 등 소구 방식의 동일성은 대개 관객과 독자를 지치고 무디게 만든다. 낯익은 포스터들로부터 반복되는 패러디의 지루함은 의도했건 아니건 정치적 학습을 방해할 수 있다. 패러디는 처음에는 배를 잡게 만들고 여러 생각을 주다가도 계속해 볼수록 흥미를 잃게 만드는 마취제와 같은 효과가 있다. 이것은 누리꾼들이 주로 패러디 수단으로 사용하는 극장 포스터와 드라마 홍보용 사진에 대부분의 수용자가 진력이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주로 깊이 없는 퍼포먼스와 미장센과 인물 변화에만 호기심을 갖고 즐거워한다. 수용자 대부분은 역사적 상황과 맥락에 대한 패러디스트의 비평적 표현보단 사진 속에 극적으로 표현되는 재미에만 관심을 둔다. 즉 초기의 충격 효과는 비슷한 사진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지루함을 유발하고 어떤 통찰의 기회도 주지 못한다. 모든 게 오락이고 쇼가 된다.

 

실지 패러디란 다름아닌 언어나 이미지 형식의 냉소적 비틀림을 통해 “일상의 장막을 걷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깨임과 열림을 만들어내는 것” (백욱인, 1999), 즉 사물의 본질에 이르는 성찰의 힘을 이끄는데 있다. 그러나, 전유 이상의 지점에 이르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현실 패러디는 갈수록 허망하다. 엄밀히 따지면, 누리꾼들은 패러디 원본의 형식에 매여 말하고자 하는 전달 내용이 무엇인지 아리송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리꾼들이 만들어내는 패러디물의 효과란 영화나 방송 포스터의 원본 이미지들에 대한 대중의 기억에 철저히 의지한다. 독자가 원본의 이미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그 효과 또한 반감한다. 또한 패러디를 한번 봤더라도 쉽게 기억으로부터 잊기 십상이다. 설사 원본 이미지에 대한 연상 작용을 하더라도 대중적 포스터들의 전유 방식은 깊이 있는 정치 분석을 가로막는다.

 

같은 이미지 또한 끊임없이 전혀 다른 소재, 맥락, 대상을 갖고 재활용되는 것도 문제다. 자연히 의미는 대단히 제한적이고 해석의 지평은 낮다. 결국은 소비 사회의 이미지들과 다름없이, 누리꾼들의 패러디 또한 지배적 스펙터클의 이미지들 속에 파묻힐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패러디가 순간의 ‘클릭’ 혹은 ‘포샵질’에 의거해 제작되고 유통되면서,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한 패러디물들이 이제는 차고 넘쳐 누구에게도 감흥을 주기 어려운 이미지 공해가 되가는 것이다. 정치 패러디의 상품 광고 도용도 흔한 일이 됐다. 패러디의 연예오락화 경향으로 말미암아, 정치 패러디가 지닌 상징성은 사라지고 그것 자체가 다른 콘텐츠들과 함께 하나의 서비스 장르화하는 경향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풀빵닷컴같은 온라인 기업이나 포털 서비스업체들의 경우에 누리꾼들의 모든 패러디 생산물들은 수익 모델을 지탱하는 콘텐츠 이윤원이 된다. 누리꾼들이 제작하는 패러디물의 가치가 그저 새로운 재미를 찾아 헤매는 인터넷 유저들의 심심풀이용 콘텐츠가 됨으로써, 패러디는 날이 무뎌지고 자본의 상업적 포획을 막기가 어려워진다.

 

(2) 이미지 차용의 패스티쉬화  

정치 패러디는 이제 유명 영화나 드라마 등의 한 장면을 따와 제품을 홍보하는 카드회사의 패러디 광고와 전혀 다르지않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림 4>에서 보이는 것처럼, 일반 누리꾼이 제작한 디시인사이드의 패러디물(글만 바꾸는 경우나 얼굴 이미지를 대체하는 단순 작업)에도, 현대카드 M에서 소비자들을 경품으로 유혹할 때도,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만두 파동과 관련해 비윤리적 기업을 비꼴 때조차 다들 한결같은 이미지가 쓰인다. 모두들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을 원본 이미지로 쓴다. 그림에서 보이는 3편의 사진들은 정치와 광고, 그리고 일상과 오락간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을 보여준다. 카드사 상품광고 패러디=CJ 만두파동 패러디=일반 누리꾼들의 스타일 패러디 내용이 동일한 원본을 인용함으로써, 더 이상 보는 이들에게 전달받는 메시지 내용은 중요해지지 않는다. 오직 수용자들에게 그저 배우 최민식의 들이민 수첩 장면이 머릿속 잔상에 떠오를 뿐이다. 영화의  인상적 장면만이 남으면서, 결국 개별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미지들의 과잉 연출로만 기록된다. 원래 만두파동으로 소비자의 공분을 샀던 한 기업의 비윤리성을 지적한 패러디 이미지가, 비슷한 류의 원본이미지를 차용한 패러디들의 과잉으로 비평의 정치적 차원과 미학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말 그대로 그것이 다 그것처럼 보이는 패스티쉬 이미지들의 잔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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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시인사이드 누리꾼의 패러디 // CJ 만두파동 패러디  // 현대카드 M의 패러디  

 

 <그림 4> 영화 <올드보이>의 패러디물들   

 

비슷한 예로 영화 포스터 <웰컴투 동막골>의 패러디물들을 들 수 있다. 이 원본 영화 포스터도 수많은 누리꾼들에 의해 패러디 오브제로 애용됐던 경우다. <그림 5>에서 보는 것처럼, 영화 포스터 내용은 누리꾼들에 의해 얼굴 이미지들이 바뀌면서 새로운 패러디들을 제작하는데 이용된다. 우선 ‘웰컴투 스미골’이란 패러디는, 원래 배역들을 영화 <반지의 제왕> 출연진으로 대체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패러디의 예이다. 원 영화의 등장인물 순박한 처자 ‘여일’(강혜정 분)이 졸지에 ‘스미골’(골룸)이 됐다. 재미있는 예는 진보 정당이 지방선거를 위해 홍보용으로 제작한 ‘웰컴투 진보정치’와 광우병 파동 기간에 만들어진 ‘웰컴투 미친소’란 두 편의 패러디물이다. 전자는 선거 홍보를 위해 정치 패러디를 만들었다. 반면 후자는 미국 부시대통령과 성조기를 이마에 붙힌 젖소를 원이미지에 대신해 넣음으로써, 정부 정책 불신에 기반한 반전 효과를 얻기위한 비판적 패러디로 작성됐음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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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패러디 // 이명박-부시 대통령 패러디 // 민주노동당 패러디

 

<그림 5>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패러디물들

 

이 둘의 사례는, 앞서 <그림 1>의 여야간 흠집내기용 정치 패러디의 부정적 쓰임새와는 사뭇 다르다. 앞서 <그림 1>에서는 여야가 패러디를 정쟁의 도구화함으로써 어떻게 정치 비판 기능적 의미가 희석화됐는가를 살펴봤다면, <그림 5>는 아예 동일한 원본 패러디에 기댐으로써 어떻게 패러디 과잉과 남발이 생기고 오히려 이것이 진보/보수 정치의 구호상의 구별을 무위화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웰컴 투 동막골>의 포스터에 맞춘 스미골=민주노동당의원=미친소의 등식은, 부정, 긍정, 그리고 코미디의 미학이 뒤엉켜 서로의 정치 미학적 효과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정치 패러디의 이용은 많다. 대표적으로 <옹박>이란 영화를 이용해서, 완전히 서로 다른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모습을 다뤘던 것도 패러디원본 이미지로 인한 폐해의 일종이다. <그림 6>에서 보면, 한 쪽은 한나라당 홈페이지에 실렸던 패러디로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을 “박정희의 뒤를 잇는 강력한 대권 후보”로, 다른 한쪽은 “졸속행정과 무대뽀” 후보로 묘사한다. 이 또한 동일한 이미지를 전혀 맥락을 달리해 이용함으로써 누리꾼들에게 부정/긍정의 상호 혼동을 주고 사실상 제대로 패러디 효과를 못살리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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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영화 <옹박>의 패러디물
 

누리꾼들은 이렇듯 기존의 소비문화의 스펙터클 이미지들 (영화, 드라마, 제품 선전 등)에 기초해 손쉽게 패스티쉬적 패러디물을 만들어왔다. 그것들을 쉽게 가져오는 대신에, 그 편리함이 누리꾼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의 ‘새로움’을 표현하는데 발목을 잡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패러디물은 고작해야 원본 이미지의 홍보 역할만 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연예오락 문화산업에서 생산된 이미지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으로 인해 영화 포스터 등을 마구잡이로 이용하면서, 이미지 소비 주체들에겐 그것이 누리꾼들 자신을 위한 유희와 배설의 동기이건 국가 정책 비판이건 진보 정당의 홍보 패러디건 그닥 차이없는 이미지 과잉으로 느껴지게 된다. 결국, 혼성모방의 패러디 제작 방식이 아마추어 패러디꾼들의 한 차원 올라서는 정치 미학적 도약을 막고 있다고 봐야한다.
 

 

(3) ‘전용’의 미학적 결핍

아마추어 패러디의 패스티쉬와 전유에 기댄 정치 미학은 이렇듯 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치명적으로 패러디 작품의 비평적 생명력을 약화시킨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쓰면서도 그 원본의 기억을 멀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기법을 이미 우리는 ‘전용’의 미학 혹은 ‘인용으로서의 패러디’라 봤다. 패스티쉬, 전유, 전용간의 차이는 결국 미적 생산물의 미학적 완성도에 따른 구분이지만, 패러디물 개개의 심미적 영향력과 직결된다.


날조된 소비주의의 스펙터클 안에 갇힌 채 유희와 욕망의 명령을 따르는 인간에게 지향성을 갖고 맞서라한다면 이는 ‘전용’ 혹은 ‘선회’라 할 수 있다. 전유가 이미지의 차용에 의한 냉소에 머무른다면 전용 혹은 선회는 성찰성에 기반한 반대다. 이상향에 대한 비전이 있다면, 전용과 선회의 힘은 배가된다. 소비자본주의의 스펙터클 이미지를 도용하면서도 그 원본 이미지의 흔적을 온전히 떨어내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방식이 선회요 전용이다. 전유 행위가 아마추어 누리꾼들도 가능한 창작의 영역이라면, 선회나 전용은 예술로 표현하자면 숙련과 미학적 재능을 요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베를린 다다의 구성원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처럼, 각각의 차용된 이미지들이 지녔던 과거의 흔적이 완벽히 사라지고 콜라주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부분들로 자리매김하고 각각이 모여 새로운 의미로 형상화할 때 전용과 선회의 의미가 살아난다. 반면, 대개 누리꾼들의 패러디는 전용에 이르지못하고 패스티쉬에 젖거나 전유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결국, 대안의 추상적 지점을 고민할 때, 전용 혹은 선회를 통한 미학과 저항의 방법이 그 적절한 예이다.

 

다다이스트 하트필드의 <독일의 자연사: 변이 Deutsche Naturgeschichte: Metamorphose (1934)>와 80년대 민중미술 진영의 작가이자 사진 콜라주 작업을 계속해왔던 박불똥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1990)>란 작품을 보자. 이 둘은 기성의 사진 이미지들을 합쳐 놓았지만 그들 각각의 의미는 작품 속 전체에서 전혀 새로운 맥락과 미학적 의미를 생성한다. 즉, 두 사람의 포토몽타주에서는 애초 각각의 차용된 이미지들이 지녔던 과거의 흔적은 사라지고 콜라주를 통해 각각이 모여 새로운 의미로 형상화한다. 먼저 박불똥은 80년대 한국사회의 구성체 논쟁을 사진 콜라주로 표현했다. 사회과학의 개념인 토대와 상부구조를 연관없는 그림조각들 (돈다발을 에워싼 공권력으로써의 전투경찰, 미국기가 걸린 총포 등)로 이어붙여 형상화한다. 콜라주의 작품 속에 대한민국의 심층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박불똥은 프로답게 대한민국의 권력 매커니즘과 사회구조적 질곡을 잡아서 그 특징적 측면을 이미 존재하는 사진들을 오려붙여 새로운 의미로 생성한다. 콜라주로 도입된 각각의 이미지 파편들의 기억들이 죽은 자리에 작품 속 전체의 생명이 전용의 힘으로 되살아난다. 이들의 작품은 수직적 패러디를 넘어서는 인용의 패러디요 전용의 미학인 셈이다.

 

한편, <변이>에서 하트필드는 독재자 히틀러의 출현과 파시즘의 계보를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하는 생물학적 변이 과정에 빗대어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면,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유충 에베르트가 죽음의 우두머리 나방인 히틀러로 부화한다. 에베르트 아래 자행됐던 스파르타쿠스단 학살과 피비린내나는 전쟁에서 하트필드는 나치즘의 징후를 읽고, 그 변이 과정의 최종적 완성이 히틀러 출현 (히틀러 나방으로 형상화)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대 사회 현실의 권력 구조와 파시즘의 기원을 밝히는데, 그의 포토몽타주는 여러 말보다 더 강한 여운과 깊이를 남긴다. 이 또한 전용의 효과다.  

 

전용이란 이처럼 어떤 대상을 최초 용도나 경로로부터 이탈시키는 과정이다. 이제까지 본 것처럼, 아마추어 정치 패러디는 미학적으로 전용에 이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아마추어가 어찌 직업적 작가들의 창작 수준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도 있을 수 있겠다. 이 점에서 왜 오히려 2004년을 분기점으로 정치 패러디의 힘이 심하게 꺾였는지를 곰씹어봐야 한다. 어느 누가 이미지 변형을 시도하던지 간에 결국 원본 이미지의 잔상만 떠올리게 만드는 패러디 방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외로써 소개됐던 몇몇 사례들, 서울시 버스 노선 패러디, ‘명박산성’ 패러디 시구절, 에미넴의 샘플링 패러디, ‘앰비콕’ 패러디 이미지들은 박불똥이나 하트필드가 가졌던 전용의 미학에 비해 절대 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들도 바로 당대 사회 이면의 맥락을 드러내는 해학과 풍자의 힘으로 전용의 미학을 표현했다. 결국, 누리꾼들이 레디메이드(기성) 이미지들을 통째로 쓰는 방식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정치 패러디의 긍정적 효과를 지켜내기가 어렵다고 봐야 한다. 누리꾼들의 패러디가 기성 정치인들의 홍보 수단화나 상업적 포털의 콘텐츠화로 전락하는 현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6. 맺음말        

이 글은 프로 세계의 직업적 예술 미학이란 잣대를 가지고 무작정 누리꾼들이 생산하는 아마추어 패러디 작품들을 섣불리 재단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글의 서두에서 지적한 바처럼, 이 글은 한국 사회에서 누리꾼들의 정치 패러디가 지닌 기술적, 매체적, 대중적 가능성과 한계를 최근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2004년을 정점으로 이후 정치 패러디가 왜 그 미학적이고 질적인 완성도 면에서 지속적인 문제들을 노정했는지를 살펴봤다. 특히, 패러디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정치인들의 홍보물로 삼거나, 상대 비방의 정쟁 도구화하거나, 패러디 긍정과 부정의 미학이 하나의 이미지에 동시에 모순적으로 동원되거나, 패러디 자체를 사업 수단으로 삼아 연예오락화화거나 할 때 문제점들이 발생함을 보았다. 즉 패러디가 오용되면서 작품의 생명력이 사그러들고 패스티쉬화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았다. 마지막 대목에서는, 점점 위축되어가는 아마추어 패러디를 살리는 방법으로 하트필드와 박불똥의 포토몽타주의 예를 들었다. 이 속에서 패러디 미학의 세 가지 구분 중 ‘전용’의 정치 미학을 누리꾼들이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학적 완성도의 수준은, 작품에 인용된 원본 오브제나 사진들의 맥락을 완전히 탈각시키고 이를 패러디할 대상에 맞춰 정치적으로 미학화하는데 달려있다고 봤다. 가져다 쓴 원본의 기억을 지울 때만이 완성된 콜라주 속에서 현실의 질곡을 드러내고 뒤트는 힘이 배가된다고 봤다. 지금과 같이 기존의 기성 이미지들의 기억들을 통째로 가져다 쓰는 방식은 전거의 예를 차리는 오마주의 미학은 고사하고 외려 수많은 공해의 패러디물만을 양산하기 십상이다. 결국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한 패러디라도 전용의 정치 미학을 담으려 노력한다면 지금의 침체된 정치 패러디의 문화를 크게 살릴 수 있다. 그 아이디어는 물론 전용의 미학으로부터 얻어야 한다.

 

사실상 패러디는 전유가 됐건 전용이 됐건 기존의 이미지를 ‘훔쳐야’ 한다. 2004년을 정점으로 괜찮은 정치 패러디들이 점점 줄고있는 이유 중 하나에는 누리꾼들이 자유롭게 콜라주를 위해 써야할 소재 접근권에 점점 큰 위협을 받고 있는데 있다. 누리꾼들의 패러디 생산 작업을 위협하는 것은 정치적 표현의 억압도 있지만, 점점 더 현실적인 억압은 저작권 위반과 초상권 침해 소송에서 시작한다. 하트필드와 다다의 포토몽타주는 적어도 저작권이나 초상권으로 나치 법정에 서는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현대에는 정치 패러디들이 종종 저작권 보호 대상의 저작물들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절도 예술’ (Lütticken, 2002)의 길을 걷는다. 누리꾼들은 저작권과 초상권 등에 의해 보호받는 이미지, 음원, 영상 등을 이용함으로써 그들이 행하는 창작으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는다. 즉 풍자와 패러디 생산의 출처와 자원들이 권력이나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보호받는 영역에 놓여 있다. 2004년 당시에도 몇몇 아마추어 작가들이 저작권으로 고생했지만, 오늘날 패러디는 점점 더 저작권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면 예술품도 정치 패러디도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과 같은 디지털 리믹스(remix) 시대에 행해지는 다양한 콜라주, 샘플링, 인용 등을 이용한 아마추어 창작자들의 정치적 패러디물은, 처음부터 창작의 자유를 막는 저작권과 소비자본의 횡포에 대항하고 통치 권력에 대한 정치적 조롱을 함께 전하는 스타일의 문화정치 행위라 볼 수 있다. 저작권, 명예훼손, 선거법 위반 등 정치 패러디의 위협 요건에 대한 개선이 없는 한 프로건 아마추어건 미래 패러디 창작의 자유는 요원하다.

 

 

참고문헌

강명구 (1987) 「권두논문: 영상이미지의 사회적 소통과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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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과잉 시대의 카피레프트 문화정치

저작권 과잉 시대의 카피레프트 문화정치

 

- 『황해문화』2009 겨울호

 

이광석 (@txmole)

자본주의의 디지털 국면에서 정보, 지식, 그리고 문화는 기존의 물질 재화의 고전적 운동 방식을 허물고 있다. 이제는 토대의 상부구조에 대한 영향력이 문제가 아니라, 상부구조에 머물렀던 문화가 토대 쪽으로 무너져내리며 ‘문화의 산업화’ (the Industrialization of culture)로 탄생하고, 다시 ‘산업의 문화화’(the culture-ification of industry)를 재반복하는 모양새다 (Lash & Lury, 2007, p.9). 정보와 문화는 저작권 등 지적 재산권의 합법적ㆍ‘체계적 식민화’(Wittkower, 2008) 과정을 겪는다. 이미지와 꿈이 사회, 경제의 중심 엔진이 되는 ‘드림소사이어티’에서는 제품 위주의 마케팅에서 이미지와 향유 문화를 파는 행위가 중심에 놓인다 (서진석, 2007, 16-17쪽). 인류애의 철학과 비전은 비자 등 신용카드 회사들이 주도하는 글로벌 디지털 소비문화로 둔갑한다. 개성과 유행은 밀라노와 파리의 패션 도시와 함께 노키아, 모토롤라, 애플, 삼성전자의 디자인실로부터 주조되어 나온다. 현실 속 조중동 족벌신문의 뉴스 생산의 바통을 네이버와 야후가 이어받아 황색 포탈 저널리즘으로 완성한다. 구질구질한 재래시장 좌판들을 뒤집어엎어 홈쇼핑과 미니 유통체인들이 자신들의 편리함으로 도배한다. 인용, 트랙백, 혼성모방, 변용, 샘플링, 콜라주의 문화는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으로 낙인찍힌다. 루카치(Lukács, 1923)식으로 보자면, 이 모든 현상들은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모든 관계들을 교환 가치화하는 ‘(사)물화’(Verdinglichung)의 새로운 디지털 국면이다.


처음부터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상품시장의 확장에 의해 유지되고, 상품화 과정은 오늘날 물질재뿐만 아니라 정보와 문화 영역에까지 걸쳐 확대된다. 이 글에서, 필자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저작권과 같은 강제적 재산권화 과정이 없이는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자본주의 시장의 이윤원에 크게 변화가 왔다고 본다. 우리의 문화산업 진영도 ‘한류’ 등을 등에 업고 저작권 소유자의 지배적 권리를 아시아권에 행사하면서 할리우드의 아류적 맛에 중독된 지 오래다. 국내의 시장 행위자들은 ‘아시아적 가치’란 주술을 통해 지역에서 문화 영역의 (재)영토화를 통한 이윤 창출의 기제를 형성하려 하면서, 국내외 저작권법 적용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글은 저작권 과잉의 문화가 만들어내는 현실 유감으로 쓰여졌다. 문화적 향유와 생산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이용자 혹은 시민의 권리가 소멸하는 현실에 대한 가능한 다른 길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우선 코미디같은 저작권 문화의 몇 가지 사례들로 시작한다. 이 사례들로부터 자본주의의 디지털 국면에서 지식생산의 사유화 방식의 미래 경향성을 볼 것이다. 그 경향성에서 보면, 생각보다 시장 권력의 변화 방식은 꽤 세련되고 공고하다고 본다. 예컨대, 마르크스가「공산당선언」에서 “모든 굳건해 보이는 것들이 대기 중으로 녹아 사라져버린다”고 짚었던 것처럼, 무엇이든 삼키는 가공할 괴물의 모습을 현대 자본으로부터 확인한다. 흔히들 열광하는 누리꾼들의 ‘집단지성’ 혹은 ‘창발성’,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저항성’을 상업화하여 포획하는 자본의 힘들을 우려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전망이 자본에 대한 투항으로 비춰져선 곤란하다. 현단계 자본의 능력에 대한 판단이 대안의 문화정치적 전망에 누가 될 순 없다. 냉엄한 사태 파악이 대안의 전제가 된다.

 

필자는 자본에 의한 지식의 사적 전유에 대한 대항의 논리로 '카피레프트' 개념을 중심에 둔다. 무엇보다 이를 통한 실천을 비관의 현실을 깨는 시작점으로 삼으려 한다. 역사적으로 과감히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면서 지식 사유의 경향을 비판했던 아방가르드 예술과 미디어 행동주의의 사례들을 근간으로 해서, 오늘 우리 현실에서 정보와 지식의 사유화를 역전할 수 있는 카피레프트적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저작권 과잉의 현실유감

우리의 저작권 문화 현실로 와 보자. 한 아이의 엄마가 어린 딸아이의 재롱이 혼자보기에 너무 아까워 이를 캠코더로 담았다. 기술적으로 한 것이라곤 집안 거실에서 가수 손담비 ‘미쳤어’ 음악을 배경에 맞춰 아이의 춤추는 모습을 찍었을 뿐이다. 곧이어 이를 그대로 UCC (손수제작물)의 형태로 웹에 올렸다. 그런데, 음원저작권협회로부터 아이의 엄마가 게시물을 올렸던 그 포털업체에 경고가 들어왔다. 유명 가수의 음원을 함부로 도용했기에 이는 저작권 위반이란다. 만약 게시물을 삭제치 않으면 법대로 조처를 취하겠다는 엄포가 들어왔다. 그러자, 포털업체는 얼마 지나지않아 아이의 엄마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스르르 게시물을 삭제했다. 마치 생일상 앞에서 아이의 재롱을 찍던 부모의 캠코더를 누군가 나타나 강제로 빼앗아 녹화 테이프를 바닥에 내팽개치는 형국이다. 몇년전 이와 거의 흡사한 일이 미국에서도 있었다. 당시에 이를 두고 정말 해외 토픽감이라 여겼는데, 그같은 일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재연출된다.


두 번째 이야기. 내가 잘 아는 출판사 사장님의 기막힌 사연이다. 국내 출판사 대부분이 언론사나 잡지사 등에 신간을 위한 자체 제작 홍보용 기사를 뿌린다는 것쯤은 많이들 알고 있다. 출판사에서 보낸 맞춤형 글에 자신의 글 몇 줄을 가감해, 힘들여 읽지 않고도 희한하게 서평을 써댄다. 그리곤 법적으로 그 기사에 대한 저작권은 언론사가 갖는다. 필자가 면식이 있는 영세한 출판사의 사장은, 기획도 하고 책도 만들고 번역도 하고 거의 모든 일을 홀로 자들은 받아서 서평을 썼다. 의당 책 선전도 할 겸, 그이는 자랑스럽게 활자화된 서평 기사를 출판사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언론사를 대리하여 한 변호사 사무실로부터 소송이 들어왔다. 저작권자인 언론사의 동의 없이 감히 글을 무단으로 올린 죄란다. 불쌍한 사장은 법적으로 붙어봐야 이길 수 없는 싸움, 그저 벌금을 물고 물러섰다 한다.

 

세 번째 이야기. 2008년 6월경이다. 거리는 한창 촛불시위로 후끈했던 때다. 당시 조용히 나우콤의 문용식 대표이사가 구속됐다. 이유인즉슨 누리꾼들의 ‘불법’ 파일교환 행위에 대한 방조죄였다. 온라인 서비스 사업자의 중립적 지위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갑작스런 대표 구속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대단히 양심적 기업인으로 정평이 나있던 이를 불법 파일교환 방조죄로 몰았으니 잡아가는 쪽의 꼴이 우스워졌다. 실제 구속 사유를 따져보니, 문대표가 촛불 국면을 생방송해 누리꾼들의 사랑을 받던 ‘아프리카TV’의 운영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작권 앞에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단단한 모든 것들’

앞서 세 가지 사례들은 지식 생산의 사유화가 벌어지는 서로 다른 지점으로부터 뽑아낸, 동시에 대단히 최근의 저작권 위반 사례들이다. 먼저 첫 번째, ‘미쳤어’ 사례를 일반화하면 다음과 같은 진술이 가능하다. 가족, 친지, 친구 또래 등 사적 영역에서의 문화 향유 방식과 지식 상품화의 강제 규제력인 저작권 진영이 첨예하게 맞부딪힐 때, 점점 후자의 영향력이 확대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도 영역에서의 저작권법 개정 작업, 기술적 보호와 잠금장치, 초등학교내 저작권 교육, 연예인들이 벌이는 ‘굿 다운로더 캠페인’ 등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사유화된 문화를 빠르게 체득하고 있다. 자본주의 태동이래 화폐가 물질 재화의 교환가치를 위한 추상의 등가물로 등극하는 방식에 비해, 비물질 재화에 소유 개념과 재산권을 강요하는 방식은 훨씬 더 집요하고 다면적이고 빠르다.


‘미쳤어’ 사례는 근본적으로 이용자쪽(직업적 작가군과 아마추어 누리꾼들 포함)이 자유롭게 창작에 써야할 소재의 접근에 점점 더 큰 위협을 받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누리꾼들의 UCC 제작에 이미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들을 소재로 이용하는데 제약이 걸리면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심대하게 위협한다. 즉 풍자, 패러디, 혼성모방 등 창작 행위가 이미 권력이나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철통같이 보호되는 영역 속에 놓여 있음으로 해서, 저작권은 표현에 대한 검열 기제로 등장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지식의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인 ‘프로슈머’(prosumer)의 장밋빛 전망은, 일상의 대중적 표현과 연계된 저작권 법리를 벗어날 때만 유효한 개념일 뿐이다.  

 

표현 자유의 쟁점과 함께 또 다르게 등장하는 위협 요인은, 아마추어 창작과 저항 행위 자체의 비지니스적 포획이다. 디지털 국면에서 저작권을 행사하는 기업들은, 일반 누리꾼들이 지니는 자유로운 카피레프트 문화를 시장 안에서 순화하거나 끌어들이려 한다. 그것이 닷컴이후 경제 모델인 소위 ‘리믹스’(remix) 경제의 근간이 된다. 정보재가 지닌 공유적 특성(비배제적 혹은 비경쟁적, 무한복제, 한계비용 0 등)을 인정하고, 누리꾼들이 형성하는 창작물과 놀이 형식을 비즈니스의 영역 안에 포획하려는 것이 리믹스 경제의 요체다. 이 법칙을 거스르곤 미래에 성공은 고사하고 쪽박차기 십상이라는 것을 기업들 스스로도 체득한다. 예를 들어, 2008년 삼성경제연구소에서「인터넷과 미디어산업의 재편」이란 보고서를 내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필자는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이 기업 보고서를 간간이 읽히는데, 그 이유는 오직 단 하나다. 소위 이윤의 생리에 밝은 우리의 삼성 대재벌조차 누리꾼들의 정보공유와 자유문화의 경향을 포착하는데 있다. 이 보고서에서 삼성은, 누리꾼들에 의한 공유 문화를 법적으로 옥죄기 보다는 이를 인정하고 그 문화 현실에 조응하는 사업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당연하게도, 정보 풍요의 시대에 “범용화된 정보는 모두 무료화될 가능성이 놓고, 유료서비스의 경우도 가격하락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래서, 장차 사업 방식은 “이용자에게 저가ㆍ무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기업 입장에서는 수입을 보전할 수 있는 차별화된 비지니스 모델 발굴”로 가자고 말한다. 정치인들이 이 정도의 사업 마인드만 있어도, 올해 국회에서 시대에 역행하는 저작권법 개정안을 들이미는 비상식은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따져보면, 사실상 삼성은 구글이나 애플을 롤모델로 삼고 있는데, 주로 온라인 소비자들의 흐름과 그들의 문화 생산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상업적 모델을 구성하는 방식을 고민한다.


삼성 보고서에서 드러난 리믹스형 경제의 요체는 무엇보다 더욱 더 아마추어적 정보 생산자/이용자들에 기생해 그 힘을 키우고 유저들의 자유로운 기운으로부터 자산의 증식력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말은 불순하고 위험할 수 있다. 즉, 인간 신체의 네트워크 접속, 그리고 그 인간 뇌를 자양분삼아 진화하는 상업 미디어 사이에 맺어진 상호 공생의 효과가 집단 지성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미래는 바로 이 인간들의 뇌 촉수로부터 사출한 집단 지성을 자본의 것으로 재가공하는 능력에 달렸다. ‘닷컴 이후’ 자본주의의 진화는 급속히 이와 같은 기생형 모델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즉, ‘참여’와 ‘창조/창의 산업’(the creative industries)이라는 명목으로 누리꾼들이 생산하는 지식 생산물들의 끊임없는 사출을 통해 기생하는 네트워크 잡종형 (사유와 공유의 혼합형 - 리믹스형) 경제 모델로 가고 있다. 결국, 현대 자본의 사활은 살아 움직이는 누리꾼들의 문화와 생산물들을 자기화하는데 달려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누리꾼들은 이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접속하고 자발적으로 연결될 때에만 주소를 갖고 아이디를 얻고 타인과 연계되고 ‘호명’되는 지위에 이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두 번째, 비운의 ‘책쟁이’ 사례다. 저작권의 비상식적 강화라는 측면에서 첫 번째 ‘미쳤어’와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째 사례에서 저작권 로얄티 배분과 관련해 실제 실소유자와 시장에서 문화생산자로 전락한 힘없는 창작자 (여기에선 언론사와 책쟁이)의 권리적 모순과 불평등 구조를 읽어야 한다. 많은 이들은 창작자를 위한 ‘인센티브’(일종의 다음 창작을 유도하기 위한 동기유발)를 위해 보상(rewards)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저작권이 존재하는 이유라 답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그와 같은 고색창연한 ‘낭만적 저자’(romantic authorship)들을 칭송하고 보답해야할 상황이 이젠 사라진 지 오래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저자에 의한 지식 창작과 그 창작물의 소유자(방송사, 이통사, 연예기획사, 문화산업 등)가 점점 분리되고, 전자는 후자에 종속된 문화노동자로 전락했다. 그 실소유자들은 음반회사들을 거느리고, 책을 출판하고, 영화를 제작하고, 문화상품을 전세계에 전파한다. 창작자들은 계약관계를 통해 그들의 대리자를 위해 머리를 쥐어짠다. 해외의 문화제국들인 소니, 워너브라더스, 월트디즈니는 전세계 문화노동자들의 대리인이자 실제 소유주다.

 

애초에 저작권이라 함은, 저자가 수행했던 창작에 대한 법적 최소 보상 체제임과 동시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모두의 공공재로 자유롭게 돌리자는 합의의 소산이었다. 한 축에 저작권자의 권리 규정과 함께, 다른 한 축에는 저작권자의 공익적 역할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작권은 점점 사적인 재산권 행사의 장으로 변질된다. 더군다나 저작권의 소멸 전에도 저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이용자들의 최소한의 권리 규정들인 ‘공정 이용’ 혹은 ‘저작권 제한 조항’조차 제 기능을 잃고 있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앞서 출판사 사장의 경험은 사실상 ‘공정 이용’에 의해 충분히 보호될 권리였으나, 그도 작동하지 못하는 비상식의 현실을 지칭한다.

 

실상 ‘비운의 책쟁이’ 사례는 문화산업 전반의 불평등 현실을 예증한다. 연예기획사들은 연예인들을 가부장적 노예계약을 맺어 그들의 노동력을 강탈한다. 연예 제작자들은 소속사 연예인들을 출현시키기 위해 제작자들에게 종노릇을 자청하거나, 고장자연씨 자살사건에서 보듯 소속사 연예인들을 술좌석에 배석시키는 ‘성상납’의 파렴치 행위를 저지른다. 외주제작사가 만든 프로그램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중파 방송사에 자신의 권리를 대부분 양도한다. 영화 제작사들은 제작 여건이 계속해서 어렵다지만, 대기업과 금융기업 등 전략적 투자자와 불평등한 수입 분배 (제작사 대 투자사 4:6 혹은 2:8로 수입 배분)에 만족해야 한다. 음반 시장이 다 죽어가고 새로이 떠오른 음원 수입에서 최고의 수혜자가 음원 배급사인 이동통신업체(음원 저작권 로얄티의 거의 40% 독식)다. 이같은 현실 논리 앞에서, 불법 근절의 ‘굿다운로더’를 키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업자간 공정 플레이가 실제 모순의 깊은 골임을 직시해야 한다.

 

마지막 ‘아프리카TV’ 대표의 구속 사례는 대단히 한국적인 저작권 남용의 모습이다. 저작권을 통해 ‘의사’(擬似) 재산권을 점점 늘리는 것도 모자라, 누리꾼들의 정치 발언까지도 정부 기관이 나서서 저작권 위반으로 겁박하는 경우다. 문화산업 논리로 시작된 우리의 저작권 철학에다가 우리네 통치권의 폭압적 논리가 결합되면서, 명분은 저작권 위반 혐의로 옭아매고 실제로는 누리꾼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단순히 디지털 경제논리를 보호하고 규제를 푸는 서구 국가들의 역할과 달리 우리 국내 상황은 순수 시장 논리보다 아직도 국가의 통치 퇴행성이 함께 작동한다. 이 점에서 개정 저작권법에 추가된 ‘삼진아웃제’(세 번의 저작권위반 경고후 게시판의 임의 폐쇄 조치 가능)가 누리꾼들의 ‘불법’파일 교환행위에 대한 서비스업자 측의 자체 모니터링을 강제하기위한 방법이라는 명분이 애초부터 의심스러웠다. 필요하면 언제든 정치발언에 재갈을 물릴 수 있는 장치도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국적 현실에서 저작권은 신자유주의 시장의 논리이자 대단히 정치적 통제의 논리다. 디지털의 물질적 기반은 누구보다 선진적으로 봐야 하지만, 그 운용 원리는 국가의 폭력에 억압당하는 질곡을 떠안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의 공공적 기원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우리의 저작권 과잉 현실을 보고 그 퇴행적 진행 방향에 대해 짚어보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저작권의 전면화와 일상화, 창작자보다는 소유자의 권한 강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작권을 통한 정치적 표현과 창작의 자유 제한을 읽을 수 있었다. 저작권 과잉의 이러한 부정적 경향성을 부추키는데, 사실상 국내에선 저작권 입법의 산업주의적 배경이 한몫하고 있다. 이미 미국과 유럽의 저작권 체제가 글로벌 경제 재편을 위한 산업 우위의 강제 논리로 바뀌고 있으나, 애초에 그들의 저작권이란 ‘공익’과 ‘시민권’을 염두에 둔 이용자 권리와 저작물에 대한 창작자 권리간 타협의 산물이었다.


서구 유럽의 역사를 보자. 15세기 중엽 인쇄술의 발달은 새로운 문화와 이념을 전파하고, 인쇄된 책을 통해 의식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민족주의가 번성하는데 일조한다. 인쇄출판의 대중화와 그것의 위력은 유럽의 군주들에게 이를 검열을 통해 관리하도록 요구했고, 16세기에 접어들면 영국에선 국왕이 친히 인쇄출판업자를 지정하여 통치자의 출판물을 독점하여 내도록 명했다. 당시 몇몇 인쇄 출판업자들의 시장 독점은 저자에 대한 영구적인 재산권 보장에 대한 요구를 낳았다. 또한 유럽 출판 시장의 전성기인 18세기에 들어서면 이는 해적 출판의 난립과 소수 독점업자들의 출판 길드조합간의 대립을 가져온다. 1710년에 제정된 최초 저작권법인 영국 ‘앤 여왕법’은 이 둘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작품의 재산권을 옹호하는 출판 길드와 지식에 대한 접근권을 외쳤던 해적출판 등 자영업자나 독자들 사이의 쟁투와 타협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Hesse, 2002; 남형두, 2008)

 

비슷한 시기에 이미 프랑스에서도 저작권에 대한 접근은 반영구적 재산권으로서 보다는 일시적 점유의 ‘특권’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이자 프랑스 혁명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꽁도르세(M. de Condorcet)의 다음 진술을 들어보자.

그러한 (지적) 재산은 자연의 질서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회의 힘에 의해 보호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로부터 만들어진 재산이다. 그것은 진정 재산권이 아니라, 특혜(privilége)에 불과하다. 이 특혜는 별 큰 폭력없이 그 원소유자로부터 가로챘을 때 느끼는 배타적인 즐거움과 비슷하다. (마르케스 드 꽁도르세, 「표현의 자유에 대한 단상」, 1776)

사회적 원천으로서 지적 재산과 이의 일시적 점유를 주장하던 꽁도르세의 주장은 지금 세상에서 보자면 격세지감이요 급진적 주장이다. 이제는 헐리우드와 문화산업이 지배하는 저작권 소유자의 재산권으로 개념화하면서, 꽁도르세가 보는 일시적 ‘특혜’나 공익과 같은 접근은 이제는 기억 속에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의 저작권은 마치 서구의 문화생산물을 수입할 수 있는 아시아 수출 시장의 합법화된 조문처럼 꾸며졌다. 다시 말해, 1957년에 처음 만들어진 우리 저작권법은, 이용자의 권리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국내외 문화산업 시장과 사익에 기반을 둔 저작권 소유자의 권리만을 강조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찬가지로 국내에서 ‘공유 영역’(public domain)이라 수입돼 쓰이는 용어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는 저작권법이 만료가 되든 저작자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든 이의 사정권이 미치지않게 되어 자유롭고 누구나 접근이 용이한 공간을 지칭한다. 이도 확실히 공간의 메타포를 지닌 서구적 개념이다. 원래 공유 영역이란 영국 황실이나 미국 연방정부가 국민에게 제한적으로 빌려줘 쓰도록 했던 토지를 일컫던 말이다. 역사적으로 19세기 유럽에 널리 알려진 비슷한 개념은, ‘공공재’ (public property) 혹은 ‘공유재산’(common property)이었다 (Ochoa, 2003). 그것이 1886년 베른협약에서 불어로 domaine publique라는 개념으로 최초 지적 재산에 이용되고, 20세기에 갓 접어들면 미국 저작권법(1909년) 하에서 정보와 지식의 '공유 영역'이란 개념으로 정착돼 쓰이게 된다 (Littman, 1990). 그런 이유로 국내에선 비물질재 개념으로 '정보'란 말을 삽입해, '공유정보영역'이라 쓰기도 한다. 즉 이제는 저작권의 시장 권역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적 산물의 독립된 그린벨트 영역을 상징하는 은유로 이용된다. 미국의 법학자 레식(Lawrence Lessig)의 ‘창작 공유터’(creative commons) 혹은 제임스 보일(James Boyle, 2003)의 ‘마음 공유터’(the commons of the mind)란 개념은 바로 이 18세기 ‘공유 영역’ 개념의 현대적 변용인 셈이다.

 

서구에서 ‘공유(정보)영역’에 대한 보호를 외치는 것은 정보와 지식에 대한 공익적 접근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도 우리 현실에 오면 용어만 갖다쓰고 그 맥락을 거두절미한다. 오직 산업의 논리가 득세하기 일쑤다. 예를 들어, 요즘 국내 인문학계에서는 ‘공유영역’에 놓여있는 무형의 자산들을 어떻게 하면 돈이 되는 쪽으로 재가공(2차적 저작물 제작)해 시장에 내놓을까 다들 고심 중이다. 예서 인문학의 미래 밥줄을 찾는 듯한데, 학술진흥재단에서 프로젝트를 따내거나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자연스레 ‘공유영역’의 사유화 방법들을 제각각 모색한다. 이같은 시각에선,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지적 공유 자원들, ‘장화홍련전’, ‘전우치전’, ‘구운몽’ 등은 다시 각색돼 영화에 쓰이거나 게임 내러티브를 만드는데 유용할 뿐이다, ‘공유영역’은 쏙쏙 빼먹을 양념꼬치로 전락하고 원래의 공공적 의미를 되묻거나 이 영역을 누구든 비상업의 지속가능한 지적 자원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다.

 

‘카피레프트’적 비전이란 것은 이와 같은 저작권 과잉을 막고 공유영역을 개발하자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한다. 예를 들어, 저작권 내부에 ‘이용허락’의 라이센스 방식을 통해 이용자의 저작물 권리를 훨씬 더 유연하고 쉽게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과거 사회주의의 재산권 철폐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아예 저작권 체제 자체를 폐지하자는 사회적 전망들도 존재한다. 통칭하여 보면 카피레프트는 정보공유론의 시각이다. 정보와 지식에 대한 접근은 대체로 공동 소유와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사회주의적 체제의 저작권 시각을 빼고보면, 카피레프트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창작 행위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효해야 하며, 저작물이 개인의 지적 작업에 의한 산물이긴 하나 외부 자원과의 관계망을 통해서 지적 자극과 혜택을 입은 것이기에 궁극적으로 공공의 자산으로 봐야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래서, 카피레프트는 이용자와 공익을 중심에 놓는 정보 권리 선언이요 다양성의 문화 논리다.

 

이 글은 이제부터 카피레프트의 징후들을 역사 속 예술 창작의 영역에서 찾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소비 기호화된 스펙터클과 브랜딩 이미지를 넘어서고자했던 문제의식을 예술의 역사로부터 주목하려 한다. 이미 국내에도 지식 생산의 민주화나 저작권의 유연적 적용에 관한 ‘이용허락’의 법률적 전망이 나오긴 했지만, 아직까지 크게 문화생산의 하위 영역에까지 퍼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그 지지부진한 이유가 카피레프트란 좋은 것이고 모든 이들에게 득이 되고 자본의 탐욕을 막을 수 있다는 평범한 메시지를 대중에게 심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라 본다. 이용자를 보호하는 ‘공정 이용’이나 ‘저작권의 제한’ 조항에 대한 검토 혹은 대안적 라이센스 모델의 적용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끊임없이 상품화된 지식 생산의 조건들을 조롱하고 비틀었던 창작 전위의 사례들에서 우리식 정보공유의 대중적 모델이나 캠페인을 개발하는 것도 돌봐야할 시급한 과제다.


  카피레프트의 예술적 유산들

카피레프트의 예술적 기원은 모방(mimesis), 베끼기, 혹은 참조, 패러디 등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15세기 라파엘의 <파리의 심판 Judgement of Paris (c1515)>이란 소실된 작품을 이제 현대인들은 원본없이 복사품을 통해 감상들 하고 있다. 라파엘의 직원이던 라이몽디(Marcantonio Raimondi)가 이를 에칭(蝕刻)해 복제본을 만들어둔 것이 결국 라파엘의 원본이 소실되면서 이를 추측하는 희대의 작품으로 남게된 것이다. 또한 그로부터 얼마 후에 라베나(Marco Dente da Ravenna)란 이는 라이몽디의 동판본을 표절하여 여러 장 만들어 팔아먹었던 당대 전문적 복사꾼으로 묘사되고 있다. 라파엘의 기운이 예서 멈추진 않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로부터 350년이 지나 1863년에 프랑스 작가 에두아르 마네(Manet)는 라파엘의 작품에 등장하는 바다의 신들 일부를 변경하는 대신 당대 현실의 의상과 나체의 여성을 삽입해 패러디 작품 <풀밭위의 점심식사 Dejeuner sur l'Herbe>를 남겼다. 물론 파카소는 자신의 일련의 작품 시리즈(1959~61, Les Dejeuners)에서 마네의 작품을 또 한번 창의적으로 재해석해 150개의 드로잉과 27개의 회화 작품으로 표현해냈다. 또한, 미국의 극사실주의 조각가로 알려진 존 드 안드레아(John De Andrea)가 제작한 같은 제목의 조형물(1982년)이나 ‘팝파겐다’(popaganda)로 알려진 론 잉글리쉬(Ron English, 1994년)의 같은 제목의 그림 작품은 다들 인물 구성을 현대적으로 재배치해 풍자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같은 잘 알려진 라파엘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시대를 가르면서 끊임없이 보여줬던 상호참조와 베끼기, 복제, 재창작, 풍자, 패러디 등의 기법들이 사실상 인류의 일반화된 창작의 기본 패턴임을 인정해야 한다. 따져보면 인간의 역사에서 몇몇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던 대발명을 제외하곤, 대개는 인용과 모방의 상호 참조를 통해 재해석하는 작업 정도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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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혹은 그것이 지닌 아우라를 거부하고 무위화하는 예술 운동이 보다 본격화된 계기는 흔히들 ‘반예술’적 경향이라 꼽는 ‘다다이즘’(dadaism)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은 창작의 천재성이나 주체성을 찬양하는 ‘낭만적 저자’(romantic authorship) 개념에 저항한다. 그 중에서 많은 이들은 대표적으로 뒤샹(Marcel Duchamp)을, 그리고 그의 변기 작품을 기억한다. 뒤샹의 1917년 남성용 소변기로 만든 작품 <샘 Fountain>에 ‘R. Mutt’이란 변기 회사의 이름을 서명해 미술전시회에 보냈을 때, 이는 예술 생산과 관련해 혁명적 의미를 지닌다. 흔히들 알고 있는 예술 제도와 시장의 허구성에 대한 도발을 넘어서, 자본주의 대량생산품인 변기에 찍힌 서명은 작가 개인의 창조성에 대한 조롱과 독창성을 의문시하는 도발 행위였다. (Bürger, 1974, 98~104쪽 참고) 사실상 이는 반예술의 표명이요, 저작권에 날리는 비릿한 조롱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베를린-다다 모임의 구성원들 중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는 ‘포토몽타주’ (photomontage)라는 예술 기법을 통해 당대 독일 파시즘의 폭력과 엄숙주의를 완벽하게 비판했다. ‘콜라주’는 기존 이미지들의 합성이란 의미에서 ‘포토몽타주’와 거의 흡사하나, 후자의 경우 반영구적 인쇄를 통한 복제 기능을 적절히 결합하는 기법 때문에 달리 지칭한다. 그의 기법은 표제와 부제들을 달고 나타나는 합성 이미지들을 잡지나 책 등의 표지에 대량 제작해 많은 독자들에게 돌려보게 한다는 점에서 대중적이었다. 상징 언어를 새로이 만들기보단 하트필드는 잡지나 신문의 보도 사진이나 기사 등 이미 존재하는(레디메이드) 이미지들과 글자들을 오려붙여 새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당대 현실을 지배했던 권위 체계를 조롱하고 뒤집고 전복하려 했다 (Walker, 1983, p.102).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와 비슷하게 프랑스 상황주의자들 일부의 작업 중 비예글레(Jacques de la villeglé)의 ‘데콜라주’(décollage) 혹은 ‘익명적 찢기’란 방식도 창작 행위의 집단적 성격을 강조한다 (Crow, 2007, 73쪽). 벽보 광고의 일부를 찢어내면 그 자리에 이전의 포스터와 전단들이 드러나면서 관객들은 그 아래 감춰졌던 과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위에 덧씌운 최근의 광고들과 찢기면서 드러난 오래된 광고의 이름 모를 기억이 혼합되면서 그 어떤 남다른 특권적 개인도 찢어진 게시물의 소유자라고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데콜라주는 바로 개인 창작의 가치를 무위화하는 카피레프트의 기본 정신인 익명의 공동 창조성을 강조한다. 포토몽타주는 기성의 저작 이미지들을 모아붙여 새로운 창작에 응용하면서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데 반해, 데콜라주는 후면에 덧붙여진 이미지를 찢기로 드러내면서 익명의 과거들을 흔들어 깨우고 이로부터 다중의 협업 효과를 깨우치게 만든다. 방식은 서로 역전돼 있지만 둘 다 개인 창작의 무위성을 드러내는 카피레프트적 실천 행위라 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뒤샹, 하트필드, 혹은 비예글레 등의 창작은 따져보면 오늘날 리믹스 시대에는 아방가르드 전위 축에도 끼질 못한다. ‘포샵질’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동원해 하룻밤 사이에 생산해내는 아마추어 누리꾼들의 창작물은, 처음부터 창작의 자유를 막는 저작권과 소비자본의 횡포와 통치 권력에 대한 조롱을 함께 전하는 다다식 문화정치 행위라 볼 수 있다. 뒤샹, 하트필드 혹은 비예글레처럼 현대에는 아마추어 창작자들이 스스로 창작물의 전위로 등장한다. 법학자 레식(Lessig, 2009; 2004)의 개념으로 본다면, 이렇듯 다다식 창작문화는 ‘변용가능 문화’, ‘자유문화 혹은 ‘RW (Read & Write) 문화’에 해당한다. 다다이스트들과 상황주의자들은 닫힌 예술을 파기하고 새로운 예술을 구상하기 위한 카피레프트적 시도로써 창작자와 저자 개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축에는 ‘읽기전용 (Read Only) 문화’와 ‘허가 문화’(permission culture)의 현실이 도사린다.


카피레프트의 현대 예술적 표현들

현대에 들어서면 다다와 상황주의적 행위들은 문화정치적 측면에서 ‘문화 간섭’(cultural jamming)이라는 대중문화의 브랜드 이미지에 대한 저항 전술과 연결된다. 움베르또 에코식으로 얘기하자면, ‘문화간섭’은 자본주의 브랜드 기호와 로고의 제국에서 펼치는 ‘기호의 게릴라전’(semiological guerrila warfare)이다. 브랜드 이미지가 구성하는 스펙터클 혹은 기호 이미지를 뒤집고 조롱하며 시장 가치를 희화화하려는 행위가 기호의 게릴라전이다. 원래 문화간섭이란 “햄 라디오 이용자들의 대화 혹은 라디오 방송에 간섭 현상을 발생시키는 불법 행위”를 지칭했다. (Harold, 2007, p. xxv) 즉 신호에 잡음을 끌어들이는 기술적 간섭 현상이 문화정치 영역에서 재해석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카피레프트와 직접적으로 관련해서 본다면, 문화간섭의 저항 행위로 우리는 ‘전유’(appropriation)를 꼽을 수 있다. 전유의 어원적 의미 중 하나가 ‘훔치다’ 혹은 ‘묻지않고 가져오다’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Harris, 2006, p. 17) 이는 지배 문화와 지배 담론의 언어를 가져다 대중의 것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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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론 잉글리쉬는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소재로 월트디즈니의 미키 마우스를 이용한다. 잉글리쉬의 마를린 먼로의 초상을 그린 시리즈 그림을 보면, 미키 마우스의 얼굴이 마를린 먼로의 가슴을 대체하고 있다. 마치 성적 상징물로써 여성의 풍만한 가슴에서 느낄 수 있는 관음의 성적 욕망을 자본주의 상품 문화의 소비 욕망과 포개놓는 효과를 갖는다. 이러한 예술 창작 행위가 일종의 문화간섭이요 전유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네거티브랜드’(Negativland)는 오랫동안 오디오 샘플링 (일종의 음원 콜라주)를 수행하면서 카피레프트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그룹이다. 요새 빅뱅 멤버인 G드래곤의 ‘하트브레이커’가 표절 시비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네거티브랜드는 이와 같은 스캔들이나 표절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소리, 소음, 음원, 목소리, 기계음 등 채취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조합해 이들은 새로운 곡들을 만들어낸다. 20여개가 넘는 샘플링 CD를 제작해 선보였고, 샘플링의 재배치와 재구성만으로도 딴판의 새로운 음악 창작이 가능함을 입증해왔다. 비슷하게 '걸턱'(Girl Talk)이란 뮤지션도 샘플링을 통해 음악을 창작하고 무대에 서면 악기와 보이스 대신 작은 노트북만을 몸에 걸친 채 공연한다. 사실상 이는 퍼블릭에너미(Public Enemy)나 척디(Chuck D) 등 정치색 짙은 하드코어 래퍼들이 자신들을 악동으로 그리며 보도하는 앵커들의 목소리, 블랙 리더들의 연설, 드라마나 영화 속 흑인의 묘사 등을 그들의 음악에 샘플링해 음원으로 쓰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렇듯 네거티브랜드나 걸턱, 그리고 몇몇 래퍼들은 소위 원본이라 얘기되는 음원들을 전유하여 새롭게 재구성하여 음원들의 진본성에 조소를 보내는 효과를 내고 있고, 미래 음악 창작과 공연 형식의 새로운 전범을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같은 전유 행위들은 소비문화를 통해 생산된 대중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재구성해 역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효과를 거둔다. 뉴-/디지털 미디어 예술은 ‘전유’의 창작 방식을 북돋고, 아마추어 누리꾼들을 손쉽게 작가의 스타덤으로 이끈다. 이때 전유는 인용, 샘플링, 콜라주 등의 기법을 동원하며 그로 인해 브랜드 가치를 보호하는 저작권 체계나 초상권, 명예 훼손 등과 항상 적대 관계에 놓인다. 통칭해, 이는 ‘전유 예술’ (Harold, 2008)이라 불린다. 전유는 마치 권력의 길거리 풍경을 반역의 약호들로 재탄생시키는 벽낙서(graffiti)와 같은 저항의 힘을 불어넣는다. 이와 같은 전유의 전술은 사실상 ‘사보타주’(sabotage)와 다르다. 사보타주는 부정과 배격의 저항 전술이자 가장 오래된 전법이다. 자본의 톱니바퀴에 공구를 던져넣어 생산 공정을 마비시키는 멍키랜치의 의미에서처럼, 사보타주는 자본의 흐름을 멈추려는 태업의 적극적 표현이다. 부정하지 않으면 휘말리고 포획됨을 알기에, 사보타주는 절연의 정치를 택한다. 바리케이트를 사이로 이쪽은 아요 저쪽은 적이 됐다. 이는 또한 안의 권력 파장을 벗어나 밖의 자유로 탈주하고자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허나 사보타주는 저 멀리 권력을 바라보며 벌이는 적대의 저항 방식이라 체제내 유연성이 부족하다. 슬로건은 해묵고 전술은 경직돼 있다.

 

외려 날조된 소비주의의 스펙터클 안에 갇힌 채 유희와 욕망의 명령을 따르는 인간에게 지향성을 갖고 맞서라한다면, 이는 오히려 ‘전용’ (détournement)이 맞다. 전용은 ‘전복’과 ‘우회’의 중간 지점에 머무른다. 상황주의의 대부였던 기 드보르(Guy Debord & Wolman, 1956)에 따르면, 전용은 지배문화의 언어에 대항하는 ‘다다식 부정’(Dadaist-type negation)의 전술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보타주가 감성에 기댄 반대라면, 전용 혹은 선회는 성찰성에 기반한 반대이자 합에 대한 고민이 들어 있다. 헤겔식의 변증법적 이상향에 대한 비전이 있다면, 전용의 힘은 배가된다. 소비자본주의의 스펙터클 이미지를 도용하면서도 그 자본의 흔적을 온전히 떨어내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방식이 선회요 전용이다. 한편, 앞서본 전유의 예술 행위가 아마추어 누리꾼들도 가능한 창작의 영역이라면, 선회나 전용은 예술로 표현하자면 좀 더 숙련과 미학적 재능을 요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마치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처럼, 각각의 차용된 이미지들이 지녔던 과거의 흔적이 완벽히 사라지고 콜라주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부분들로 자리매김하고 각각이 모여 새로운 의미로 형상화할 때 전용과 선회의 의미가 살아난다. 반면, 대개 패러디는 전용에 이르지못한 전유의 한 표현 형태로 남는다. 전유건 전용이건 사실상 그 나름대로 문화간섭의 한 방식이요, 카피레프트의 문화정치적 전술을 기획하는데 둘 다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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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20세기초 역사적 아방가르드 예술 시절에 콜라주 혹은 몽타주를 통해 창작했던 다다이스트들은 독일 파시스트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았지만, 적어도 시장으로부터의 위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 누리꾼들의 아마추어 UCC 창작이나 직업적 예술가들의 문화간섭을 위협하는 것은 저작권 위반 기소와 정치인들이나 족벌 언론인들의 초상권 침해나 명예훼손 소송이다. 과거와 달리 전문 작가들과 누리꾼들은 자신들의 창작을 위해 저작권 보호 대상의 저작물들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전유와 전용의 예술은 ‘절도 예술’ (Lütticken, 2002)의 길을 걷게 된다. 대중들은 저작권과 초상권 등에 의해 보호받는 이미지, 음원, 영상 등을 이용함으로써 그들이 행하는 창작으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는다. 엔디 워홀이 소비사회의 상징들을 주요 소재로 쓰면서 저작권 분쟁으로 크게 시달렸단 것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쉐리 레빈(Sherrie Levine)이나 조각가 제프 쿤스(Jeff Koons) 등 소위 전유 혹은 절도 예술을 자신의 기법으로 실천하는 전문 예술가들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쿤스는 아트 로저스(Art Rogers)라는 이름의 사진작가가 찍은 1980년 엽서를 참조하여 자신의 조각을 1998년 완성한다. 원본의 흑백사진 이미지는 똑같은 종의 새끼 강아지 7마리를 나란히 안고있는 중년 부부의 모습인데, 쿤스의 목각 작품에서는 개들의 털색깔이 보라색으로, 루돌프 사슴코처럼 과장된 개들의 코들, 그리고 중년부부의 머리에 꽂힌 꽃장식 등으로 원본과 달리 묘사됐다. 쿤스의 이 작품은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비싼 가격에 경매에 붙여졌다. 그러나, 쿤스는 로저스에게 저작권 위반 혐의로 고소당하여 법정 패소한다. 현 체제에선 쿤스의 작품은 복제물로 낙인이 찍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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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크 네피어(Mark Napier)란 작가 또한 바비인형을 자신의 창작 행위에 모델로 썼다가 그 인형을 제작하는 마텔 회사(Mattel, Inc.)으로부터 저작권 위반 위협을 받은 경우다. 그는 자신의 창작 자유가 어떻게 위협받았는지 자신의 웹 프로젝트에서 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일명 ‘뒤틀린 바비인형’(distorted Barbie)이란 온라인 작품들은 원래 자신이 만든 이미지들을 모두 다 뒤틀리게 묘사함으로써 기업이 소송을 통해 어떻게 창작 자유를 훼손할 수 있는지 그 침해 상황을 비꼬아 그려내고 있다.

 

네피어나 쿤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기업들의 작가들에 대한 점증하는 공격과 그들이 생산하는 일상속 브랜드 이미지들의 위협은, 서두의 ‘미쳤어’ 사례를 포함해 복제에 기반한 패러디 예술 등 창작 행위 모두에 부정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불법예술’(illegal-art.org)이란 온라인 사이트는 이처럼 저작권의 위협을 받고 있거나 법정에 섰던 동영상, 음원, 예술 작품 등 문제작들의 아카이브 저장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온라인 이용자들에게 창작의 자유에 훼손된 수많은 양질의 작품들을 전시해 저작권의 창작과 표현의 자유 훼손의 전범들을 기록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불법예술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한 이미지의 사례를 들어보자. 이 사이트에서 방문자는 켐브루 멕리오드사용자 삽입 이미지(Kembrew McLeod, 2007)란 아이오아대학 신방과 교수가 등록한 스캔된 상표권 이미지와 문구(‘표현의 자유’, 1998년 미 상표권 번호 2127381)를 볼 수 있다. 이는 저작권 과잉 현실과 관련해 두고두고 회자됐던 사례다. 멕리오드는 문화간섭의 일환으로 ‘표현의 자유’ 문구를 미 특허청에 법적으로 등록해 소유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는 대기업들이 만약 이 문구를 오용하여 광고 등에 사용하면 지체없이 경고장을 날려 소송을 걸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는 나름 언론이 주목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우선은, ‘표현의 자유’라는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문구를 일개인이 상표권으로 사유화해 등록할 수 있다는데 모두들 놀랐다. 그 다음엔 무엇보다 이 실험이 대기업들이 공공 영역에 남아있는 용어들을 무작위로 상표권으로 사유화하는 현실에 대한 경종이 됐다. 이 상표권 실험 덕택에 그는 뉴욕타임즈 등 언론이 주목해 소기의 대중적  페다고지 효과를 봤던 것이다.

정보 생태운동으로서 카피레프트

이제까지 훑어본 것처럼, 서구에서 전유, 전용, 혹은 절도의 문화 행위들은 뿌리깊고, 이들 예술 형식들은 문화간섭이란 행위에 합류하면서 자본주의 소비문화 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을 수행해왔다. 이는 일상의 아마추어 누리꾼들의 창작에서부터 직업적 예술가들의 전유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무정형의 다중에 의해 표현되는 문화정치의 행동들이 앞서 얘기했던 ‘공유영역’을 일구는 기본 바탕이 될 것이라 본다. 이 글의 서두에서도 지적했던, 국내 저작권 과잉의 경향성들을 막기위한 하나의 문화정치의 전술로서 언급될 수 있다고 본다. 공유영역에 대한 전문 법학자인 보일(Boyle, 2003)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가진 것 없는 농민들이 나눠 경작하던 당시 유럽의 공유영역에 대한 재산권 소유자들의 역사적 ‘종획운동’(enclosure movement)으로 농민들이 토지를 박탈당한데 이어, 현대 기업들이 또 다시 정보와 지식의 공유영역을 사적인 이윤의 전쟁터로 만들어 누리꾼들을 범죄자로 몰고 있다. 자본의 변화에 대한, 그리고 저작권의 과잉에 대한 보다 적극적이고 세련된 문화정치적 저항의 판을 짜는데, 전유와 전용의 전술이 필요하다. 유쾌 발랄하면서도 권력의 비린 곳을 드러내면서 미래의 카피레프트 비전을 세우는 작업이 요구된다. 자본과 권력의 영역이 첨단화하고 스스로를 체질 개선하고 있다면, 그 속에서 정보 공유의 가치를 대중화하면서 새로운 대응 논리를 세우고 카피레프트의 구체적 사례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보일(Boyle, 2008)은 이를 지식과 정보의 생태주의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마치 공해산업으로부터 환경을 보호하듯 정보와 지식의 공유영역을 저작권의 과잉으로 인한 공해로부터 보호하여 그린벨트화하자고 제안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린피스 등 환경운동단체처럼 저작권의 지적 공해 현상을 적극적으로 사회 공론화하는 작업을 확대하자고 주장한다. 이 글과 그의 비유법이 서로 다르지만, 앞서본 카피레프트적 문화정치 행위들은 ‘정보생태주의’적 행동들과 일맥상통한다. 즉 전유와 전용의 문화정치적이고 문화간섭적 행위들을 정보 환경운동의 맥락에서 자리매김하고, 우리도 이와 같은 아방가르드적 문화정치를 통해 저작권 과잉을 떨쳐낼 새로운 지속가능한 전망들을 끄집어내는 집중화된 작업이 시급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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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뉴미디어 - 포스트486세대의 트위터 반란, 그리고 촛불세대의 부재증명

포스트486세대의 트위터 반란, 그리고 촛불세대의 부재증명

 

문화과학 (2010 가을호 게재) * 각주는 편의상 다 잘라냈습니다. 일부 실천문학(2010 여름)에 실었던 내용이 중복되나, 거의 새롭게 쓰여진 글입니다. 논평 부탁드립니다.

이광석 (@txmole)


가만보면 우리에겐 특정 역사적 국면에서 대중의 정치적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발산한  특정 미디어 혹은 기술적 서비스의 전례들이 꽤 많다. 다소 거칠게 본다면, 90년대 초∙중반의 피시 통신문화, 90년대말 게시판 문화와 딴지일보 등 풍자·패러디 사이트들의 등장, 2000년대 초반 오마이뉴스 등 누리꾼들의 게릴라식 글쓰기를 통한 온라인 시민 저널리즘의 발전, 2004년 중반 총선과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시 인터넷 카페들을 통한 대항 담론 생산, 2008년 광우병 파동과 촛불 시위 속 휴대전화, 넷북, 휴대 카메라 등 게릴라 이동형 매체 등을 활용한 실시간 인터넷 방송과 UCC 제작, 그리고, 올해 지방선거에서 대항 여론 형성과 투표 독려에 한몫한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가 그것이다.


물론 특정 시기에 오로지 어느 한 매체만이 아래로부터의 소통로들을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 사안에 따라 누리꾼들은 다양한 매체들을 혼용해 여러 담론들을 생산해내는데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마찬가지로, 신진 매체의 등장은 구매체의 퇴장을 전제하여 발달하진 않는다. 즉 복수적 매체들이 한 시점에 여럿 걸쳐서 그 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불과 두 해 전 촛불의 저항 국면에서 보여줬던 다양한 매체 전술 가운데 구매체의 변형이나 복원 형식들, 즉 리플릿, 팸플릿, 전단, 명함, 무가지, 걸개, 대자보, 벽화, 판화, 음악, 판소리, 춤사위, 지역 방송, 공동체 라디오, 스티커, 짤방, 플래카드, 풍선, 해킹, 반저작권, 플래시몹, 온라인 패러디, 1인 시위, 그라피티 등은 신진의 다양한 소셜 미디어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대부분은 정치적 격변기 현장 속에서 항상 존재했었으나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전술 매체들과 예술 장르와 기법들이다. 이와 같은 일반적 미디어 조건들을 인정하는 한에서 논의를 끌어가자면, 적어도 어느 특정 매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유의 디자인과 효과가 당대 이용자들의 문화나 정치 상황과 잘 맞물리는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정 시점에서 특별한 기술 디자인과의 조응은, 단순히 디지털 기술이 시장에 도입될 때마다 누리꾼들이 덥석 덥석 문다는 ‘기술주의’적 논의와 무관하다. 디자인의 당대 적합성이 잘 물릴 때 대중의 어필을 받을 수 있다는 가설은, 그 디자인의 생성과 발전을 규정하는 힘들이 존재함을 지칭한다. 보통 새롭게 도입되는 기술의 디자인에는 이미 일정 부분 사회의 논리가 각인되고, 이에 반응하는 기술들이 대중의 호응을 얻는다. 이미 설계된 기술의 디자인 또한 그 자리에서 멈춰있지 않고 이용자들의 문화와 결합되면서 같이 조응하거나 이용자들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대표적 예로, 애플은 컴퓨터를 팔기도 하지만 이를 구입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자발적 ‘애플 문화’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고 자본의 재생산을 도모하는 근거가 된다.

 

마르쿠제의 제자이자 비판적 기술철학자인 앤드류 핀버그는 기술 디자인의 형성과 진화 과정에 대해 ‘기술 코드’(technical codes)란 개념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즉 자명한 듯 보이는 기술에는 계급, 인종, 성차, 당대 사회∙문화 요인 등이 그 디자인 속에 내면화돼 있고, 이는 한 사회의 법과 정책 등으로 검증받는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이 코드의 디자인에는 지배의 논리만이 강조되진 않는다. 애초에 억압의 계기를 가진 기술 디자인도 정해진 이용 매뉴얼을 벗어나려는 다른 길로의 가능성들에 항상 열려 있다. 핀버그의 기술 코드는, 그래서 누리꾼들에게 권력의 자장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역설계’(reverse engineering)의 실천을 부추긴다.  

 

한국 사회에서 누리꾼들에 의해 애용되는 신종 기술의 등장과 대중화는 대체로 공권력의 파장에 대응한 탈주의 성격이 강하다. 예를 들어, 지난 정부 때부터 시도됐던 내용등급제나 인터넷 실명제(소위 본인 확인제)는 현 정부 들어서 개인 홈페이지와 게시판 문화의 토론 기능을 급격히 약화시켰다. 인터넷 삼진아웃제나 법적 제제와 고발은 인터넷 카페나 인터넷방송 등 서비스 운영자의 표현의 자유를 막으면서 1인 방송을 불구화했다. 아고라 등 논쟁적 카페들은 명예훼손과 사생활 침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공권력을 견디지 못하면서 ‘인터넷 망명’이란 특유의 문화를 낳았다. 대단히 슬프게도 국정원 등 패킷 감청으로 인터넷 망명이란 의식적 행위가 부질없다는 사실로 인해 그 효과 또한 반감했다. 한 때 선거 시기 문자나 메일링 활용 방법이 선거법 위반으로 막히면서,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의 활용 등이 그 중심에 서기도 한다. 이렇듯 공권력의 힘과 농단의 정도에 따라 누리꾼들의 활동 반경에 영향을 주고, 새로운 대안 기술이나 우회로가 존재할 때 급격히 다른 기술로 빠르게 이전되어 간다. 예를 들어, 최근 본인 확인 절차 없이도 트위터를 경유해 토론 게시물을 등록할 수 있는 방식은, 정부 영향력 아래 불구화된 게시판 ‘본인 확인제’를 조롱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결국 권력의 일상화가 점점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화될수록, 기술 세대들은 억압의 계기가 강한 코드들을 담고있는 기술에서 멀어지거나 우회해 탈주 가능성이 높은 기술적 대안들에 눈을 뜨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소셜 미디어의 일종인 트위터는 촛불 정국 이후 소통과 이바구의 배출에 장애가 생기면서 누리꾼들의 대안으로 떠오른 경우다.

 

이 글에서는,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트위터 등 신종 ‘소셜 미디어’의 가치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이용했던 ‘2030세대’들의 역할과 이들을 잇는 촛불세대들의 문화정치적 가능성을 볼 것이다. 이들 세대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커뮤니티 소통의 배출구를 긍정하고, 무엇보다 뉴미디어를 활용하여 권력 억압과 여론 조작 국면에서 새로운 문화정치의 활력소를 찾고, ‘오정보’(misinformation)를 교정하고 권력의 구린 내면을 폭로하는 기능을 높이 산다. 이 글에서는, 소위 모바일 혹은 ‘유비쿼터스’ 환경하 총체화된 ‘삶권력’(bio-Power)에 저항할 ‘삶정치’(bio-politics) 혹은 ‘삶활력’(biopower)의 일환으로 소셜 미디어, 그 중 트윗 문화가 지닌 실천적 긍정성을 살펴보겠다.


소셜 미디어 전성 시대, 트위터의 논리 

6월 지방 선거의 긍정적 효과가 아니더라도, 요새 인터넷 소셜 미디어의 중흥기다. 위키피디아(Wikipedia), 플릭커(Flickr),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eeter), 마이스페이스(Myspace) 등 사람과 사람을 관계맺고 소통하도록 돕는 다양한 미디어들이 출현하고 있다. 단순히 자신의 글을 보여주거나 소비하던 시절을 지나, 가진 것들을 서로 나누고 생산하고 공유하고 연결하여 지속적 유대를 형성하는 미디어 서비스 유형들이 급증하고 있다. 국내에서 소셜 미디어의 일종이었던, 싸이월드나 아이러브스쿨이 커뮤니티 서비스 바깥으로 나가거나 그 바깥과 소통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폐쇄적인 ‘섬 구조’를 지닌다면, 최근의 서비스들은 바깥으로 열려있는 공개와 개방성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무엇보다 기술적으로 ‘오픈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라는 개방적 특성을 지니면서, 타 개발사들이 만든 프로그램들과 쉽게 연동해 작동하는 특성을 지닌 것도 강점 중 하나다. 이렇듯 소셜 미디어는 참여, 협업, 공유, 공개, 커뮤니티 등을 특징으로 하면서, 젊은 누리꾼들을 급속하게 끌어모으고 있다.


아이폰 등 스마트폰의 뒤늦은 국내 시장 형성이, 최근 소셜 미디어의 성장을 과열로 몰아가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그 볼썽사나운 면모에는 국내 대기업들의 움직임이 단연 독보적이다. 어지간한 기업들은 구글/위키로부터 새로운 부 창출의 경제학을 학습하고,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네트워크 기업 조직관리학과 소셜 망을 활용한 기업 마케팅학의 재부활을 꿈꾼다. 직장인들은 자기계발의 일환으로 일과후 최신 소셜미디어 신간들을 자발적으로 읽고 토론하며 동료들과 학습 세미나를 수행한다. ‘씨크한’ 우리 사장님과 회장님의 트윗을 따르며, 노사간 평등과 민주적 소통의 가능성에 감격해하고 열광하는 젊은 직원들도 나온다.

 

소셜 미디어들 가운데 트위터를 보자. 영어말로 ‘트윗’이란 쉼없이 새처럼 재잘거리며 말들을 뱉어내는 행위를 지칭한다. 트윗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물이 ‘트위터’란 서비스다. 말 그대로 트위터는 재잘거리는 트윗들에게 소통의 자리를 깔아주는 서비스이다. 이 작은 웅성거림이 이제 한 국가에선 혁명을 돕고, 정치 비리를 들쳐내고, 미국에 흑인 대통령을 만들고, 재난 소식을 공유하거나 완화하고, 지구촌 한쪽의 가난을 함께 나서서 해결하고, 낙후한 선거 정치에 혁명을 이끌 수 있는 울림으로 전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승 모드에 힘입어 최근 트위터 개발자는 마치 스스로 표현 자유의 투사인 듯 의기양양해서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권위주의에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트위터가 다른 기술에 비해 뛰어난 점은 대단히 기동성이 좋고 날렵한 네트워킹 기술이란 점에 있다. 일반 인터넷 단말기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휴대전화의 트윗 기능을 통해 짬짬이 한 개인을 둘러싼 상황의 변화를 즉각적으로 단문을 통해 알리거나, 사건의 진실을 그 자리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 링크로 올리거나, 특정 사실 등을 바로 공유하는데 탁월하다. 그만큼 모바일 문화 현실에 잘 어울리는 기술이다. 애초 트위터 프로그램의 개발자가 휴대전화용 단문 메시지 서비스 어플리케이션으로 트위터를 개발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다른 트위터의 독특한 점은 사람들간 관계 맺고 소통하는 방식에 있다. 페이스북과 마이스페이스는 주로 현실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간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큰 효과를 지닌 반면, 트위터는 아는 사람들과의 긴밀한 관계들만큼이나 느슨하지만 새롭게 형성되는 관계망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데 적합하다. 즉, 트위터망은 긴밀하게 엮인 작은 인적 관계망들이 서로들간에 느슨하게 연결된, ‘작은 세계망들’의 총합으로 구성된다. 이것이 트윗의 조직 구성 방식의 독특함이고, 이것 때문에 정치인들이 선거 시기 트윗의 연결망의 확산 효과를 보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트윗 문화의 또 다른 국내 흥행의 요인은, 아이폰이라는 모바일 기기의 국내 수입과 맞물린 스마트폰 시장의 발흥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말 아이폰 수입과 동시에 불과 몇 개월만에 한국 사회에 미쳤던 파장은 모바일 시장, 정책의 룰은 물론이고 모바일 문화까지도 바꿀 정도로 대단했다. 그 가운데 소위 ‘공짜’ 무선인터넷의 대중화란 예기치 못했던 모바일 환경 개선이 이뤄져, 어디서든 와이파이 전파가 잡히는 곳들에서 자유롭게 인터넷 접속이 가능해지면서 휴대전화를 통한 트위터 등 어플리케이션 사용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단 트윗팅의 논리를 잠깐 살펴보자. 누군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려면 트위터를 통해 입단 신고를 하고 자신만의 아이콘을 생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본인 확인 인증 절차는 필요 없다.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면 프로필에 적으면 그만이요 싫으면 숨기면 된다. 프로필과 아이콘 이미지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돕기도 혹은 숨기기도 한다. 요 단계까지는 아직 트위터 안에서 홀로된 상태다. 이제 누군가와 재잘거리기 위해선 먼저 원하는 상대의 재잘거림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팔로잉’이다. 이를 위해 그리 큰 노동은 없다. 그저 클릭으로 의사를 표시하면 된다. 팔로잉을 통해서 관계를 맺고 말을 트고 재잘거리다보면 자신 또한 수많은 ‘팔로워’가 생겨남을 인지할 수 있다.

 

  팔로잉과 팔로워의 숫자와 함께 얽힌 이들의 성향을 보고, 한 명의 ‘트윗터리언’이 관계 맺고 있는 다른 이들의 면면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맞팔’이란 상대가 팔로잉하면 자신도 응대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에 연연하는 이들은 보통 트윗을 자신의 선전이나 홍보 수단으로 삼는 부류가 많다. 이들은 팔로워를 늘리는데 주력한다. 그래서, ‘하루 30분씩 7일이면 나도 팔로워 1,000명 거느린 트위터러’란 책 광고 문구가 등장하면서, 소셜 미디어를 인맥관리에 목마른 이들에게 단비인 듯 묘사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언팔’은 팔로잉을 끊는 행위인데, 주로 성향이 다르거나 트윗 공해를 일으키는 이들을 피할 때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리트윗’ 혹은 알티(RT)는 다른 트윗터리언이 올린 글을 다시 올리는 것을 뜻한다. 「시사 IN」의 고재열 기자(@dogsul)처럼 수만명의 팔로워들이 있는 경우, 어떤 이름없는 재잘거림도 독설이 한번 더 리트윗으로 튕겨주면 예상치 못한 파장을 불러오기도 한다. 즉 일종의 도움받기가 가능해지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이들을 만나는 기회를 획득한다.

 

   팔로잉한 트윗 글들은 각자의 ‘타임라인’을 통해 시간순으로 배열된다. 다시 말해, 트윗을 맺은 사람들이 내게 재잘거리는 말들의 기록은 각자가 선호하는 바에 따라 서로 다른 ‘타임라인’의 연대기를 만들어낸다. 누구든 트윗의 140자라는 제한된 글자수를 통해 자신만의 재잘거림을 내면서 타임라인에 편승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구나 김연아, 오프라 윈프리, 김주하와 대등해지는 곳’이 트위터라는 또 다른 광고 문구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대체로 김연아와 같이 알려진 스타급 인물들은 팔로잉이 아예 없거나 적다. 매니저에 의해 팬 관리 차원에서 이뤄지거나 현실의 문화 권력 관계가 그대로 트윗에 옮겨오기 때문이다. 


  선거 시기 모바일 행동과 촛불 세대의 공백

실시간 국내 트윗 인구를 조사하는 오이코랩(oikolab)에 따르면, 한국에서 트윗을 하는 인구는 8월 1일 현재 100만명을, 트윗의 수는 200억개를 넘었다 한다. 지방 선거가 있기 바로 전 달인 5월말에 50만명이었으니, 불과 두 달여만에 곱이 늘었다. 최근 스마트폰의 대중화 추세와 언론 등의 트윗 문화 열풍 때문이란 진단이 나온다. 6월 지방선거 때도 그랬지만, 아직까지는 트위터 이용자들이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해 외곽이나 지방으로 나가면 트윗을 통한 선거 투표 독려와 모바일을 통한 정치 행동은 낯선 얘기일 수 있다. 그래서, 트윗족은 아직은 선도적 신기술 이용 집단으로 통하는 ‘얼리 어댑터’들에 해당한다. 실제 이들은 연예, 스포츠, 예술, 정치, 학술, 정보통신 기술, 블로그 등 현실 영역에서 의견을 주도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보면 야당이나 여러 시민단체들에 근친성을 갖거나 비슷한 성향의 트윗터리언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초기 기술 수용자의 정치적 성향이 대체로 상식의 현실 감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트윗 문화는 아직은 건강하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누리꾼들의 재잘거림을 막는 행위는 다름아닌 집권 유력 정당이나 스타급 정치인들 보다는 힘없는 약소 군소 정당의 정치인들이나 주체적 시민들의 말길을 봉쇄하는 효과를 지닌다. 즉, 트윗을 불허한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나름 깨어있는 여론 선도형 집단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엄포에 해당한다.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트윗팅조차 권력이 허하는 ‘관용’(tolerance)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정치적 도발 행위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서도, 선관위와 정부가 불법 선거운동의 일환이라 하여 트위터를 틀어쥐려 하면서 우리는 트위터 탄압국의 오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현실의 억압의 결과는 오히려 디지털 세대들을 주축으로 폭넓게 트윗을 통한 투표 독려의 긍정적 효과로 기능했다. 여기서 ‘디지털 세대’가 누구인지를 좀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트윗 행위를 소위 세대론에 기초해 보자면, 이들 디지털 세대는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소비 문화에 친화적이고 새로운 디지털 기기와 문화에 민감한 ‘포스트 486세대들’이다. 보통 이들 세대의 범주에, X세대/신세대와 IMF세대 (소위 ‘2030세대’), 그리고 최근의 ‘광장세대’이자 촛불세대 (10대)가 혼재돼 있다. 무엇보다 6월 지방선거는 2030세대를 주축으로 극히 일부의 촛불세대가 트윗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선거 관련 적극적 투표 행위를 독려하는데 나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세대별 구분 표 참조). 이와 같은 필자의 단정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고등학생이나 현 대학 1, 2학년 학생들로 구성되는 촛불세대가 모바일 정치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구입할 수 있는 재정적 여건이 미약했다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즉 과거에 보여줬던 촛불세대의 발랄한 정치 참여적 지향성과는 무관하게, 세대적 지불 능력의 부족이 이들이 소셜 미디어의 관계망을 활용하는데 별 동기를 유발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올해 6월경 국내 트위터 인구의 연령별 조사를 보더라도, 2030세대에 비해 촛불 세대를 위한 모바일 정치행동의 물적 토대가 아직은 무르익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소수 얼리 어댑터들의 기술 수용 그룹들을 제외하고, 트위터 인구를 연령대로 따지면 20대와 30대가 각각 28%와 53%로 8할 이상이 이들 연령대에 몰려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0대와 50대는 2%대에 머무르면서, 영미권의 50대 이상 19%와 10대(13~17살)의 7%에 비해서도 턱없이 낮은 비율을 보인다. 아이폰, 갤럭시S 등 스마트폰의 보급과 맞물려 관심은 있으나 기존의 약정 기간 해지 부담이나 스마트폰의 비싼 가격대로 인해 구입을 포기했던 10대 학생들과 대학 초년생들이 많았던 점은 촛불세대의 활동 부진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상 트위터의 접속은 휴대전화가 없어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기동성과 즉시성을 따지자면 무선인터넷 접속이 보장되는 스마트폰의 경우가 가장 최적화된 이용 조건이라 봐야 한다. 선거 이후의 시장 상황을 고려해보면, 촛불세대의 기술 장치로부터의 소외는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아이폰4 등 새 모델 출시로 가격대가 반으로 할인되는 등 전반적으로 스마트폰 가격 하락으로 그 소유 연령대가 더 낮아질 전망이다. 이 점에서 향후 스마트 모바일 기기를 통한 정치 행동에 있어서, 다른 어떤 세대보다 촛불세대의 재기발랄함이 훨씬 빛을 발할 거란 예측이 가능하다.
 

<새로운 기술 세대와 표현형식의 차이 구분>

 

 


세대 명명법

기술 세대 명명법

출생연도

표현 형식

대표 매체

대표 의제

성 격

 신세대/

신세대/

X 세대

디지털 세대

70년대(1973~78)

게시판/ 온라인 동호회

피시통신/홈페이지

- 2000년 총선, ‘인터넷 질서확립법’

- 2010년 6월 지방선거

개별적, 다소 이념적, 낭만적

IMF세대/ ‘88만원’세대

N 세대

(인터넷/

신인류 세대)

80년대(1978~88)

시민/ 1인 온라인 미디어

포탈 서비스/ 온라인카페/ 블로그

- 2002년 16대 대선

- 2004년 총선, 노전대통령 탄핵 정국

실용적, 온라인 지향, 동아리적, 협업적

촛불세대/광장세대

모바일 세대

(웹2.0 세대)

90년대(1988~ )

웹2.0/ 모바일 미디어

다양한 이동형/ 휴대형 매체 활용

- 2008년 광우병 파동과 촛불시위

온-오프 연동, 개방적, 참여적, 이동적



촛불세대에 대한 미래 모바일 정치에 대한 기대감과 별도로, 결국 이번 지방 선거에서 야권 도약에는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신세대와 IMF세대라는 듀오가 존재했다. 무엇보다 현실 정치 지형과 관련해서, 고용 불안 사회(precarious labor society)를 그 특징으로 삼는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2030세대에 미치는 경제적 악조건의 상황들이 장기화되고 현 이명박 정부에서 극대화하면서, 아직 사회진출을 멀리 앞둔 촛불세대 보다는 현실에서 극적 탈출구를 원했던 2030의 기술 친화 세대들의 소셜 미디어 활용을 통한 투표 독려가 먹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알려진대로 보수-진보의 이념적 지형보다는 실용적이고 반권주의적이고 생활 속 실천을 강조하는 세대들이다. 특히 IMF세대는 고용 안정에 대한 기대로 뽑았던 경제 대통령에 스스로 뒤통수를 맞으면서 이번 지방선거에서 트윗들을 통해 지지 정당의 선호도를 바꾸고자 하는 정치 행동을 고무했고 일부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 


트위터의 문화정치적 실험과 촛불세대의 미래

온라인 공간은 지방선거 이전에 이미 실명 공개로 불구화된 댓글 문화에다가 인터넷 주소(IP) 추적으로 험악해진 게시판 환경에 모바일 인터넷 세대들이 말과 논쟁의 생동감을 잃던 차였다. 6월 지방선거는 촛불 정국 이래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던 누리꾼들의 이바구들에 다시 생명의 불꽃이 피어났던 경우다. 물론 트윗 또한 권력의 드잡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선거 국면에서 공권력은 선거법 위반을 들이대면서 정치적 이슈로 재잘거리던 입들에 재갈을 물리려 했다. 그러나, 자신과 생각이 비슷하거나 뜻이 맞는 이들로부터 실시간으로 전하고 퍼뜨리는 이 시끄러운 재잘거림들의 활력을 막기에, 현 권력은 이 생경한 기술과 문화 디자인에 대한 학습이 부족했다.


트윗의 재잘거림이란, 확성기로 내는 소리가 아닌 말에서 말로 퍼지는 리트윗과 팔로잉으로 엮어진 자생적인 울림이다. 140자의 형식적 제약 속에 정치적 심각함을 나르고 논쟁을 촉발하긴 어렵다. 주로 특정 사안에 대한 즉흥적 속풀이와 때론 정제된 단상들을 올리거나 서로의 생각에 대한 공감에 그치기 쉽다. 2030세대가 실어 날랐던 트윗과 리트윗의 울림들은 사실상 직접적 투표 독려에서도 힘을 썼으나, 짧은 단문 속에 서로들 감흥하면서 만드는 현실 유감의 성찰적 탄식들에서 더욱 더 빛을 발했다. 게다가 단문의 글들 바깥으로 하이퍼링크와 이미지, 동영상 등이 자유롭게 연결되면서 형식적 제약을 거의 무위화하고, 현실 정치 기획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다층적으로 수행했다. 즉 트위터는 정치적 선동이나 광고로서의 면모보다는 다른 어떤 수단보다 간결하고 조용히 움직이나 유연하고 바깥으로 트임이 끝없이 나 있는 성찰적 지저귐과 상호 감흥의 세계라 볼 수 있다.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 규정에 의한 트위터에 대한 처벌 조항은 그래서 대단히 임의적이다. 예를 들어, 선관위는 선거운동 기간 전에 각자의 타임라인을 이용해 특정 정치 후보자와 관련된 내용에 대한 리트윗 행위 자체를 금했다. 트윗을 광고성 집단 이메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포되는 광고 메일과 달리 트윗의 타임라인은 강제적 소구력이 없는 상호 재잘거림의 목록이란 점에서 다르다. 또한 이메일의 개인 정착지적 속성과 달리 트윗들의 흘러간 타임라인은 거슬러 공들여 읽지 않으면 찾기조차 힘들다. 그만큼 정치적 선동 효과가 적다.

 

[월간 조선] 2010년 7월호에 변희재가 대표 선수로 지방선거 패배의 원인 분석을 한 글, 「‘어르신’은 몰랐던 지방선거의 이면 - 승패 가른 트위터와 뉴미디어」를 보면 트위터에 대한 극우들의 재밌는 사고가 발견된다.

2010년, 지방선거의 미디어 환경은 2년 전보다 격차가 더 크게 벌어졌다. 기존의 포털[미디어다음-아고라]과 친노좌파 인터넷매체 이외에 ‘트위터’라는 다단계식(式) 선동형 매체가 가세한 것이다. 정치와 별 관계없어 보였던 IT 전문매체와 연예매체가 합류해 결정적인 사안이 등장할 때마다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와 관련한 대다수 미디어의 중심 역할은 30대 언론인들이 주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
트위터라는 매체 자체의 영향력보다는 트위터로 상징되는 젊은 층의 정치 트렌드 변화가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분석이 최근 힘을 얻고 있다. 김제동 등 연예인들이 잇달아 트위터에 자신의 투표소를 배경으로 찍은 ‘투표 인증샷’을 올리면서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급속히 유행으로 퍼져 나갔다. 그 이전부터 20대 청년 조직들은 20대와 30대 투표하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여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쿨’하다고 평가받던 흐름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문화로 바뀔 조짐이 보였었다. 이를 상징화시킨 문화가 ‘투표 인증샷’ 이고, 최첨단 매체로 과대 포장된 트위터를 통해 젊은 층의 투표행위를 새로운 패션 트렌드로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골통 극우에 음모론까지 오염된 논의라 이를 논구할 가치가 없다고 한켠으로 제낄 수도 있겠으나, 다만 트위터에 대한 변씨의 평가를 주목해 보자. 우선 그가 트위터를 ‘다단계식 선동형 매체’로 보는 것은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의 근거 논리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소셜 미디어에 대한 극우들의 정치적 두려움의 극화된 과잉 반응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선거 당시 4만여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노회찬(@hcroh) 의원이 한번 트윗을 띄우면, 적어도 수만명의 팔로워들이 이를 받아 수백건의 리트윗을 올리며 반응한다. 리트윗을 통해 내는 재잘거림의 반향들은, 또 다른 관계망을 타고 거의 대부분의 국내 트윗터리언들에게 전달된다. 겁이 날만하다. 그러나, 아직 트윗의 공간에서 이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요, 외려 소수 정당의 정치인이 구사할 수 있는 여럿 중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받아들일 일이다. 이조차 선거법으로 불허하면 소수 정당의 소통 능력을 불구화하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변씨의 트위터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평가는 뭔가 좀 색다르다. 선거 시기 ‘투표 인증샷’을 ‘노빠’들의 정치적 감수성 변화의 징후로 읽고 있는데, 좀 뒤늦은 감이 있지만 트위터로 매개되는 디지털 세대의 스타일 정치의 맥락을 조금은 간파한 듯하다. 그는 우익 독자들에게, 무엇보다 대중문화 영역의 정치화를 막기 위해서 시장 논리로 밀어부쳐 이를 순화시키고, 뉴미디어도 “벼락치기가 아닌 평소 실력”으로 미리 미리 준비하여 선거전을 치러야한다고 조언한다. 트위터에 대한 그의 평가가 과잉 해석된 측면도 있지만, 그의 언설을 통해서 보면 보다 본격적으로 대중문화 영역과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 공간에 자리를 트려는 권력의 촉수를 쉬 감지할 수 있다.

 

다가올 포획의 논리을 인정하더라도 트윗 문화의 열풍, 특히 생산적 혹은 긍정적 담화 생산의 출구로서의 소셜 미디어의 역할론은 당분간 꽤 오래 끌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트윗터리언들이 모여, 트윗을 통해 이어받기 소설을 쓰고, 트윗을 통해 모임을 만들고, 선거자금 캠페인을 벌이고, 혹자들은 정치 논쟁을 벌이고, 트윗 단문을 모아 책을 쓰는 세상이 오고 있다. 소통과 관계의 새로운 변화요 진전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모순들의 결절점 마디마디에서 신세대 누리꾼들이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벌이는 문화 행동과 자율적인 말의 게릴라전에서 새로운 표현 매체의 가능성을 십분 활용했던 경험이 있다. 지방선거에서 활용된 트위터 또한 누리꾼들의 풍부한 미디어 경험의 축적이란 연속성 위에 놓여있음과 동시에 2030세대 유권자들의 일상의 정치를 위한 의사표현 형식으로 기능했음을 확인한다. 이번 선거 시기 트위터의 활용은 사실상 모바일 환경에 기초한 문화정치적 행동주의의 확장적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덧붙여, 2030세대를 잇는 ‘촛불세대’들이 그들만이 지닌 문화적 재기발랄함으로 아이폰 등 스마트폰으로 갈아타면서 앞으로 본격화될 ‘모바일세대’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은 이제까지 특유의 인터넷 문화를 만들어냈다. 누리꾼들, 특히 ‘486’ 이후의 세대들에게 번개 모임, 게임방, 블로그, 싸이질, 댓글, 펌, 아햏햏, 포샵질, 유시시, 온라인 카페와 클럽, 인증샷 등은 새로운 놀이의 소재들이자 문화정치의 공작소였다. 이들을 통해 느슨하지만 기존의 전통적인 사람간 관계맺기 (인맥관리)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소통과 만남의 자유로운 출구들을 만들어냈다. 표현 수단들 각각의 효용값은 다 달랐지만, 이들 각각의 소통로와 문화들은 누리꾼들의 서로 다른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장이 돼 왔다. 더욱 진전되고 긴밀한 형태로 다른 놀이의 소재들과 함께, 뉴미디어는 신권위주의 정치 상황의 희극적 상황들을 드러내고 전면화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인터넷을 통해 아래로부터 선출한 우리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를 되새겨보면, 이제 새로운 기술에 열광하는 일에 신중할 필요가 있음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어느 세대들에서 보다 문화적 감성이 풍부한 촛불세대로부터 제 2, 3의 모바일 행동을 통한 일상 혹은 생활 정치의 가능성에 더 큰 기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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