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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바톤...

1. 컴퓨터에 있는 음악파일의 크기.  

    1.27GB  

 

2. 최근에 산 음악 CD

    루시드 폴 _ 오 사랑

    러브 사이키델리코 _  early times-the best of love psychedelico

 

3. 지금 듣는 노래

   peter, paul and mary _ puff the magic dragon

   이야기가 있고,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슬픈 노래라서 좋아..

 

4. 즐겨 듣는 노래 혹은 사연이 얽힌 노래 5곡

    그다지 사연이 얽힌 노래 같은 건 갖고 있지 않고..

    즐겨 듣는 노래는 5곡만 꼽기엔 너무 많지...

 

   1) ennio morricone _ cinema paradiso

   2) camel _ long goodbyes

   3) the alan parsons project _ time

   4) 어떤날 _ 오후만 있던 일요일 ('그런 날에는'이랑 뭘 할까 고민하다 결국 수정)

   5) 윤상 _ 소년

 

5. 다음 바톤을 이어갈 분들..

   아무나, 누구나, 혹은 어느 누구도.

 

   역시 어려워. 그래서 미뤘던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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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으...

여행.. 카메라.. 편집시스템...

 

비빔국수..

제대로 된 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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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타인이란,

절벽이다.

 

절벽 위에는 기댈 곳도, 붙잡을 무엇도 없다.

 

떨어질 생각만 하는 나에게,

절벽은 차라리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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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모호한 일부에게,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지금은 쓰지 않을 테지만,

언젠가는 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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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사실 난 이 영화가 좋지 않았다. 관념에서 관념으로.

결국 소통하기 어려운 또하나의 '실험' 혹은 '스타일'

늘 궁금했다. '실험적인 영화'는 왜 그 자체로 말할 뿐, - 도저한 자기반영? 켁.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 하거나 소통하기 어려운 것일까.

 

이 영화의 주인공이 반전집회에서 카메라를 들고 움직이고 스탭들이 그를 좇고 그 모습을 또다른 시선이 포착하고, 일종의 퍼포먼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시선을 모두 보여주는 씬이 있는데, - 관객이 보는 감독의 카메라는 분명히 주인공의 뒷모습을 좇고 있지만, 편집된 장면에는 그 장면도 있고, 주인공이 빠진 빈 공간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관객들에게 있어 감독의 카메라가 주인공을 좇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 수 있으나, 작품에서 보여지는 사실은 그것만일수도, 혹은 그 이전의 것이나 이후의 것일 수도 있다. 감독이 어떤 의도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했는가에 따라.

그것이 다큐멘터리 '만들기' - 즉 현상적으로 보여지는 다큐멘터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충실하다 못해 과다하게 인용했다 느껴지는. 펩시콜라는 오바잖아.. - 에 대해 관객들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굳이 반전집회라는 공간이었어야 하는 이유다.

그 이유에 대해 나에게 말걸기가 되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을 것 같다.

결론부터 말했듯이 그러지 못 했고, 감독이 '액티비즘적인 다큐'와 그 자신의 다큐를 나누어서 말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형식실험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확인했다고나 할까. 

 

물론 이 작품의 감독들이 던진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며(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다음 작품은 이 의미있는 시행착오를 넘어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포스트를 끄적이다가, 그리고..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궁금해 진 건,

이들 작품에 레퍼런스가 되었을 만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이다. 일견 도식적으로까지 보이는 나의 해석이나 반응과 달리 즐거운 무언가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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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이, 동의해.

인간에게는 자신만의 폐허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인간의 폐허야말로 그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본다.


아무도 자신의 폐허에 타자가 다녀가길 원치 않는다.

이따금 예외가 있으니 사랑하는 자만이 상대방의 폐허를 들여다 볼 뿐이다.

그 폐허를 엿본 대가는 얼마나 큰가.

무턱대고 함께 있어야 하거나, 보호자가 되어야 하거나, 때로는 치유해줘야 하거나 함께 죽어야 한다.

나의 폐허를 본 타자가 달아나면 그 자리에 깊은 상처가 남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가 되었던 그 일치감의 대가로 상처가 남는 것이다.

-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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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를 위한) 비폭력 교과서

발전이란 언제나, 소비에 의존하지 않고, 환경을 이용하여 생존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배제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by 이반 일리히 p.25

 

법률을 만드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일정한 의견과 특수한 이해 관계를 갖는 인간이다. 그들은 법률을 만들어 강요하고 그것이 바이블인 것처럼 휘둘러 댄다. 따라서 법을 어기는 것은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인류의 역사에서 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법을 어기는 사람들보다 더, 인간의 생명에 대해 더없이 잔혹한 짓을 했다. 인류에 대한 최대의 파괴 행위는 법에 따라서, 포고령이나 정부 명령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최대의 폭력은 권력의 폭력이며, 일반 시민의 폭력이 아니다. by 하워드 진 p.33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일단 '불법파업'이라고 매도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부당해고 한 노동자들이 법의 테두리 내에서 복직 판정을 받아도 복직시키지 않는다. '법대로 하자'는 말은 결코 합리적이나 공정한 말일 수 없다.

 

경찰을 권력자의 개라고 본다면, 이미 비폭력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by 페트라 켈리 p.43

 

생산자인 우리 농민이 인간적으로는 군인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각을 굳게 갖고, 파괴자인 군대를 가르치고 이끌어 가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by 아와곤 쇼코 p.52

 

집회현장에서 전경들을 볼 때면 궁금해진다. 시위대가 펼쳐놓는 처절한 이야기들의 반만 귀담아 들어도 방패나 진압봉을 들어서 그들을 칠 생각은 안 할텐데. 시위대가 폭력을 휘두를 땐,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있다. 그러나 공권력의 그것은 명령에 의한 즉각적이며 훈련된 폭력일 뿐, 정당한 분노가 담겨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공권력의 폭력과 민중의 폭력을 같은 결로 보지 않는다. 집단으로서의 경찰이나 군대에도 희망을 가져야 할까. 개개인에게는 희망을 가진다 해도 체제로서의 그들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

 

나는 원자폭탄 피해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인류의 삶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by 이시다니 스스무 p.54

 

혁명이란 인민 기관이 권력을 장악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발전해 가는 것이다. 인민 기관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권위주의, 지도부의 횡포, 민중에 대한 무시 등은 계속될 것이며, 이것을 끊임없이 변혁해 나가야 한다. by  조지 레이키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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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요다, 꺄아~

 

어쩔 수 없는 거다.

<스타워즈> 시리즈나 요다에 대한 애정은.

 

"use your feelings"

"Fear is the path to the dark side. Fear leads to anger. Anger leads to hate. Hate leads to suffering."

 

두려움은 분노를, 분노는 증오를, 증오는 고통을.



 

역시 이 모습이다.

900살 먹은 은둔자의 모습.

광선검 휘두르는 요다는 어색해..

 

그나저나 간만에 루크를 보니 가슴이 설레는군. @.@

루크와 도노반, 맥가이버.

중학교 들어가서 리버 피닉스를 알기 전까지 좋아했던 배우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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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뭘 막 쓰고 싶거나 막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오늘은 밤새도록 독백을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야.

 

그리 솔직하지 않으면서

늘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는 욕망의 소유자로서.

 

그의 순결한 기차여행에 다녀올 때면

릴리 슈슈스러운 감성에 젖게 되는데

그걸 200% 즐기다가도

당장 내 눈앞에 놓여진 작업들을 떠올리면

난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헷갈리게 된단 말이지.

 

혁명과 예술.

정직함이 지닌 고루함과 진정성.

파괴가 지닌 생명력과 거의 필연적이라 할 거부감.

치열할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것과

삶 속에 꼭 존재했으면 싶은 쉼 같은 것.

 

누구나가 자신은 경계를 서성이며 불안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프란츠 파농이,

"먼저 자신의 소외를 의식하지 않는 한 결연하게 전진하기란 불가능하다."라고 했다는데.

 

나는 나의 소외를 진정으로 의식하고 있을까?

내가 나를 믿지 못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역설적으로 나를 전진케 하는 것 역시,

그러한 회의로부터 나온다면 그건 말장난에 불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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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sky / 조 존스턴

 

스푸트니크호가 하얀 꼬리를 빼물고

시월의 밤하늘을 날아가는 광경을 목격한 순간,

탄광 소년은 우주를 꿈꾸게 된다.

 

오랜만에 보는,

옛스럽고 감동적인 미국식 성공드라마.



영화 보고 글쓰기, 는 내 취미이자 꿈이었다.

그러나 내 능력이 인상비평 이상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노력이 필요했는데,

왠지 그러기가 싫었다.

 

직관으로 분석하는 것은 즐겁지만,

이론틀로 분석하는 것은 어쩐지

늘 누군가를 따라가야만 한다는 강박이 느껴져서?

 

많은 이들은 내게 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난 시작도 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학문의 세계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은 영화를 보고 나서 a4 1장을 채 쓰지 못 한다.

우울하긴 하다.

 

사실 october sky만 해도 할 얘기가 무척 많다.

막장으로 내려가는 이미지의 반복과 변주가 내게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켰는지,

그건 감성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것이니까.

그저 시끄러운 무엇으로 비치던 탄광노동자들의 파업과

'아버지-아들'의 그 식상한 애증과 영웅 어쩌구 하는 지루한 감동,

그 속에서 끊임없는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어머니.

어쨌거나 영화 자체는 흥미롭게 역사와 개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헐리우드 내러티브의 새끈함이라던가.

 

그만그만.

쓰지도 않을 거 뭐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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