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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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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야간 숙소 /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無宿者)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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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모든 사랑은 비루한 일상에 한 발을 내딛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의 모습이 변했다고 해서, 과거의 한 순간이 진심이 아니었던 건 아니다. 그 진심을 믿는 순간, 사랑은 사랑으로 존재한다. 

 

- 공선옥의 블로그에서..



 

 

p.s 한 번도 진심을 의심해 본 적 없다. 그럴 수 있었음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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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의 장례 / 김혜순

슬픔이란 이름의 새를 아시는지

그 새의 보이지 않는 갈퀴에 대해 들어보셨는지

그 새의 투명한, 그러나 절대로 녹지 않는

갈퀴에 머리채가 콱 잡혀서

나는 문설주에 고개를 기대고 서서 말하네

잘 가거라 항구를 떠난 잠수함아

여기 절벽 위에 서 있는 나를 잊지는 말아라

 



누군가 내 심장 박동 소리로 내 속을 쿵쿵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저 잠수함 저 혼자 떠난 거야

누군가의 손가락 내 관자놀이에 쉬지 않고 파닥거리기 때문에

저 잠수함 저렇게 혼자서 가라앉기만 하는 거야

 

엄마의 몸속에서 내팽개쳐진 그날 저녁부터

날마다 가라앉기만 하는 잠수함

이제 내 탄생의 그 종착역에 다 와간다고 기별이 오는데

내 슬픔의 박자는 이렇게 쉬지 않고 울리고

내 슬픔의 숨은 이렇게 쉬지 않고 헐떡거리고

추운 밤의 밀물 같은 슬픔이 온몸을 적시는데

 

찬물 속의 찬물처럼 나 흐느끼는데

 

항구를 떠난 잠수함아 우리가 처음 헤어지던 그날 잊지는 않았겠지

그 깊은 바다 속에서 혼자 흐느끼고 있지는 않겠지

내 머리채를 놓고 이 새가 날아가버린 날

매일 매일 가라앉는 꿈, 그 속의 잠수함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시체처럼 나는 네 속에

비로소 탑승하게 되는 거겠지?

그러니 부탁이야,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헐떡거리며 서 있는

김혜순을 잊지는 말아줘

 

밥하기가 귀찮거나 배가 많이 고프지는 않을 때, 나는 편한 옷차림으로 이 햄버거 가게를 즐겨 찾는다. '50년대 미국식' 느낌을 주는 인테리어의 이 가게는 일본에서 시작된 체인점이다. 기원도, 진실도 찾아볼 수 없는 그 공간에는 작은 벤치가 놓여 있어 기다리는 시간 동안 옆에 놓인 잡지를 볼 수 있다.

 

패션 잡지 일색에 가끔 여행 잡지도 섞여 있다. 나는 여행 잡지를 읽거나 패션 잡지의 여행-문화 섹션을 읽곤 한다. 그 날도 햄버거를 하나 주문해 놓고 잡지책을 들여다 보다가, 이름은 익숙하지만 한 번도 작품을 읽어본 일이 없는 한 소설가의 에세이집에 대한 소개를 읽게 되었다. 그 글은, 유명한 소설가였던 남편을 잃은 한 젊은 작가의 에세이집과, 이 소설가의 에세이집을 비교하면서 이 소설가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한 줄, 소설가의 블로그 주소.

 

괜한 호감을 느끼며 그녀의 블로그에 들어가, 그녀가 읽었던 시들을 따라 읽는다.. 늘상 그러하듯, 댓글을 따라 또다른 블로그에 들어가 보고, 또 들어가 보고 하다가,, 배경음악으로 쳇 베이커의 time after time을 설정해 둔 블로그에 멈춰 섰다.

 

일요일 오후 같은 쳇 베이커의 목소리.. 한 번 들으면, 떠나오기 힘든 그런 음색임을.. 공감하는 이가 있다면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군. 훗....

 

그 블로그에서, 장 그르니에의 '섬'의 한 구절을 본다.. 섬...

하..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다시, 읽어볼까... 내 작은 서가로 다가가니...

책은, 한동안 눈길 한 번 못 받은 채 그렇게 놓여 있다.

 

한가운데 책갈피 겸 꽂혀 있는 건, 칼을 든 꽃순이 시절 인디포럼 엽서 한 장...

책의 제일 앞장엔, 그 책을 내게 선물해 준 선배의 못난이 글씨..

 

노래는 쳇 베이커를 지나, 오아시스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로 갔다가 다시 쳇 베이커로..

 

그동안 나는 몇 년에 이르는 과거를 다녀온다..

2002년 인디포럼, 그리고 1998년 선배와 함께 했던 세미나며 다툼이며 노래며 눈물까지..

 

자꾸만 기억의 폭이 넓어져 간다..

안타깝구나.. 가슴이 먹먹하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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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 김중배 칼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군.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흑, 흑흑..."

걸려오는 전화를 들면, 사람다운 사람들의 깊은 호곡이 울려온다. 비단 여성들만은 아니다. 어떤 중년의 남성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늘과 땅을 부른다. 이 땅의 사람다운 사람들을 찾는다.

 

그의 죽음은 이 하늘과 이 땅과 이 사람들의 희생을 호소한다.

정의를 가리지 못하는 하늘은 제 하늘이 아니다.

평화를 심지 못하는 땅은 제 땅이 아니다.

인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 사람들이 아니다.


 

그 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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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명복을.

나와 동갑내기인 한 남자는,

아마 일당 얼마에 사측의 대체인력으로 투입된 용역이었을 거다.

운전을 할 줄 아는 건강한 몸뚱아리는 그렇게 팔려왔을 거다, 돌이키고 싶은 그 순간으로.

 

참을 수 없이 더웠을까? 달려드는 노동자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졌을까? 그저 짜증이 났을까? 당황했던 걸까? 단지 우발적이었던 걸까?

무엇이었건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고,

부당함에 맞서 싸우던 한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아내와 어린 딸만 세상에 남았다.

 

나와 동갑내기인 그 남자,

27세 최모씨는,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그는 질긴 목숨 원망하며 '죽은' 삶을 살게 될 거다.

 

이제 분노를 느낀다.

죽은 자와 죽인 자, 그 둘 모두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자들에게.

 

비극은 둘의 몫이어서는 안 된다.

돌려주어야 한다. 반드시.

 

너, 자본에.

너, 신자유주의에.

 

다시 한 번,

고 김태환 열사의 명복을 빌며.

 

p.s 사람이 죽었습니다, 기계를 멈추세요, 라던 한 노동자의 절규가 떠오른다. 어느 다큐였던가.. 사람이 죽었는데, 세상은 너무나 태연하고, 나는 이제야 가쁜 숨 몰아쉬며 몇 글자 끄적인다. 지금까지도 많은 죽음을 보아왔다. 간접적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매번 먹먹함을 느낀다. 그들의 얼굴, 인간의 얼굴. 사라져버린..

 

p.s 레미콘이 사람을 치고 지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떠올린 건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던 레이첼 코리라는 20대 초반 활동가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불도저를 막아서고 있다가 그 아래 깔려 죽었다. 몇 해 지나 그런 사실을 접하고 경악했더랬는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폭력은 국경과 상관없는 일이다.

 

p.s 한국노총 방송국에 올라온 영상을 참세상에도 올렸다. 촬영한 사람도 고통스러웠겠지만 편집한 사람도 만만치 않게 고통스러웠을 거다. 어느 시점에서 끝을 낼 것인가. 열사의 죽음에 누를 끼치기 않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인다. 이 영상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그랬으면 좋겠다.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을까 걱정스럽다. 고인과 유가족에 자그마한 누라도 끼치게 된다면, 참세상에 올리자고 했던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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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끝.

절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끝이라는 건.

그래서 늘 조심해야 한다.

 

당신 뒷모습이 무척 쓸쓸했어요,

나는 안타까워 했지만 그건 나를 벗어나지 못한 메아리일 뿐.

그림자 발끝에라도 가까스로 닿기를 소망하지만,

그 끝에 닿는다 하여 만날 수 없는 이들이 만나지는 건 아니다.

 

피로한 얼굴로 안녕.

 

어른들의 삶에 희망은 없다.

 

2월쯤 느꼈던 절망감을 되감기하고.

 

- * -

 

요즘 들어..

재작년 가을쯤, 약 때문에 관절까지 아팠던 기억이 자주 떠오른다 .

걷는 것조차 힘이 들어 오르막길 가운데쯤 주저앉아 버렸던..

 

관절까지 아픈데,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완만한 경사는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 * -

 

탕.

 

탕.

 

표정은 총을 쏘고 있었다.

 

다시,

끝이라는 건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

 

올해 들어 벌써 몇 가지의 '끝'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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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

어제그제부터 불안불안하다.

당장이라도 전화기를 들거나

가까운 곳으로 달려갈 것만 같은,

불안함.

 

하지만 잘 제어하고 있다.

불안함을 잠재울만큼 큰 벽.

그걸 매일 같이 확인하고 있는 덕에.

 

밤 11시쯤,

버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신산했다.

뺨에 감기는 차가운 바람,

그 바람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한 1년 만에.

또르르르, 딱 턱까지만.

 

보고 싶어서,

조만간 난 그가 있는 곳 가까이에 갈테지만,

그가 아닌 친구를 만나고 돌아올 생각이다.

택시를 타고 새벽을 건너기엔 택시비도 너무 많이 올랐다.

 

세 사람의 기억이 한데 모이곤 한다.

이제는 구분도 가지 않는 길, 기억, 느낌.

이 길을 걷다가 엉뚱한 이를 떠올리곤 웃기도 한다.

 

세월은 이렇게 흐르고,

기억은 이렇게 뒤섞이는구나.

결국 진심도 흐려지고,

나에게 남은 기억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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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 브레고비치 공연..


 

 



어디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집시 음악을 좋아한다. 집시들이 나오는 영화도 좋아한다.

그래서 고란 브레고비치의 공연에 안 갈 수가 없었다.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언더그라운드><아리조나 드림> 등에서 영화음악을 맡았던 고란 브레고비치...

 

그의 음악은 단지 '집시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다른 무언가가 많이 뒤섞여 있다.

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세르비아 출신 어머니에 무슬림 아내,

유고슬라비아 시절에 태어났지만 더이상 그가 태어난 나라는 없는 시대.

그의 음악은, 다국적인 배경만큼이나 복잡하지만 아름답다.

 

 

(앞줄 왼쪽부터, 불가리아 출신 여성 코러스 3인, 알렌 아데모비치(아코디언과 북을 주로 연주하면서 노래도 했다. 어찌나 멋진지 그의 두 손목을 보호하고 있던 까만 손목 보호밴드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 줄곧!), 고란 브레고비치(때때로 전자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도 많이 했는데, 다양한 창법을 구사했다), 뒷줄은 웨딩 앤 퓨너럴 밴드(집시 브라스 밴드다))

 

언뜻 눈에 띄는 악기만 보더라도, 브라스와 전자기타와 아코디언과 불가리아 여성들의 애절한 목소리... 이 조합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단언컨대, 정말 훌륭하다.

애절하고 아름다운가 하면, 흥겹고 떠들썩하고, 장중하면서 슬펐다가, 다시 기쁘고 즐거운.

정신없을 정도로 인간의 모든 감정을 순식간에 넘나든다. 주로는 집시 음악일 것이나, 고란 브레고비치 자신이 록밴드 출신이듯 록음악부터 시작해서 그가 섭렵한 문화의 다양한 음악 양식이 모두 섞여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삶과 사랑, 열정, 죽음, 모든 경험을 다 하게 된다. 그냥 그렇다고 말로 표현하는 건 정말이지 한계가 있다.

 



 

쩍벌남 자세는 맘에 안 들었지만 ~.~ 그가 브라스 밴드를 지휘하는 손모양들은 아주 느낌이 좋았다. 수많은 영화에서 보아 온, 동구권 사람들이 춤출 때 취하는 손모양. 팔의 움직임. 수도 없이 봤다. 게다가 옆자리에 함께 온 단원들인지 국내에 살고 있는 발칸 반도 사람들인지, 어찌나 신나게 박수치고 소리지르고 춤을 추는지, 덩달아서 더 신났던 것 같다.

 

팜플렛에서 몇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을 추려보자면,

 

- 고란 브레고비치가 20대 초반부터 16년 동안 비옐로 두그메라는 록그룹을 이끌었으며, 80년대 동안 1500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릴 만큼 유명했다는 사실이다. 유고슬라비아의 비틀즈라고 불렸댄다.

 

- 전쟁 시, 군악대를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은, 집시들에게 악기를 나눠주는 것이었단다. 특별한 가르침 없이도 어떤 악기든 잘 다루는 집시들은 곧 뛰어난 군악대가 되었고, 트럼펫을 이용해서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음악을 연주하곤 했단다.

집시 브라스 밴드도 훌륭했지만, 언젠가는 집시 바이얼린 공연을 꼭 보고 싶다.

엘지 아트센터 같이 집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고급스런 공간이 아니라,

어느 식당이고 들이닥쳐서 연주하고, 침도 찍 뱉어가면서 춤도 춰가면서 연주한다는, 그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공간에서. 아. 별 수 없다. 여행 가야지.

 

그러고 보면 참 웃기다. 그 지역에서는 서민적인, 너무나도 서민적인 음악이며 밴드일 터인데, 극동의 한 나라에 와서는 최소한 3만원 이상 내야 볼 수 있는 고급 공연으로 탈바꿈하다니. 사진도 찍을 수 없고, 그래, 연주자들이 바닥에 침도 찍 뱉을 수 없는 그런..

 

- 고란 브레고비치가 한 말 중에 제일 맘에 드는 건, "집시 브라스 밴드 안에서 튜닝 되지 않은 인간적인 어떤 것을 찾고 있는 중이고 그들이 이를 실현시켜 주리라 믿는다"고 한 부분이다.

(자신이 실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현시켜 주리라' 믿는다는 표현..)

 

튜닝 되지 않은 인간적인 어떤 것, 막연하지만, 직관적으로, 알 것 같지 않은가.

그 날 공연에서 들었던 인간의 목소리만 하더라도,

불가리아 코러스는 무엇보다 애절하며 아름다웠고, (집시의 시간에서, 노을에 젖은 집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르는..)

고란 브레고비치의 목소리는 힘있고 멋있다가도 능청스럽고 느끼했고(섹스라는 노래에서, '스스스스스스 섹스' 할 때의 느끼함이란.. 우아.. 장난아니었다. ㅋ) 신났다.

알렌 아데모비치의 목소리도 참 아름다웠고, 트럼펫 연주자의 낮은 음색은 강하고 장중했다.

깔끔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으되 각자 지닌 아름다움은 충분히 어우러졌고 감동적이었다.

악기 연주도 뭐.... 트럼펫은 어느 순간 태평소 소리를 내고 있었고, 알렌의 북 연주는 특이하게도 장구 치듯 북의 양면과 옆면까지 활용하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기발함,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고란 브레고비치 음악의 매력이었다.

 

가사를 알아듣지 못 한 게 매우 아쉬웠고....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과...

고란 브레고비치의 모든 음악을 들어보고 싶다는...

 

2년 만에 본 공연이었는데, 대만족. 굶어도 좋아~

 

ps. 연극 '신곡'의 음악도 맡아서 했다는데,
찾아보니 이 연극, 이미지가 장난 아니다.
거의 피터 그리너웨이 영화를 연상시키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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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청동 다녀옴.

경찰이 행한 '진압작전'이라는 이름의 강제철거가 끝나고,

현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기자들만 남았을 때.

 

mbc 라디오 방송에서 나온, 앳되어 보이는 한 기자가

카메라 기자들 앞에서 귀엽고 낭랑한 목소리로 자기자랑을 하고 있었다.

 

저, 여기서 다 땄어요!

서장님도 인터뷰 안 해 주려고 하는데 떼써서 했어요!

서장님이 저보고 떼쟁이래요~

 

...

 

역겨웠다.

 

가뜩이나 경찰서장에게 '감사합니다'고 허리 숙여 절하는 주공 관계자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분개하고 있었는데.

 

30명에 이르는 철거민들이 경찰특공대 진압봉에 두드려 맞고 떠나간 자리,

살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공권력에 의해 힘없이 떨려나간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하하호호 웃을 수 있단 말인가.

 

최루액 탄 물대포를 맞고, 눈 주변이 시뻘개져 있던 그들의 얼굴을 보기는 했던가.

 

나풀거리는 치맛자락만큼이나 상큼한 미소는,

일요일 오후 놀이공원에서나 행복하게 흘리란 말이다.

 

...

 

발목까지 시큰거려 절뚝이며 현장을 나서는데,

주인 잃은 어린 코카 스패니얼 한 마리가

겁먹은 맑은 눈을 하고서 길목을 배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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