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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이야기 - 전대완

 

 

이번 추석때 태국여행을 가기로 해서 읽어본 책이다. "태국"내지는 "방콕"으로 검색해 봐도 걸리는 책은 거의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타자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증거다. 미국이나 유럽에 대한 번역서, 에세이류는 쏟아져 나오면서도 정작 중남미나 아프리카, 동남아에 관련된 책은 거의 나오지 않는 기형적인 학문구조...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중남미에서 간행되는 일간지까지 구독하면서 타자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높였다는데 우리는 도대체 뭐하자는 얘긴지 모르겠다. 타자에 대한 연구나 공부가 없다면 결과는 뻔하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굽실대거나 혹은 쇼비니즘적 태도로 남을 무시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추석에 태국에 간다니 나오는 반응은 한결같다. "조심해서 잘 즐기다 오라"는거다. 그런 말을 하며 한쪽눈을 찡끗하는 분도 있다. 이들의 의식은 태국->팟퐁->성매매로 잘도 이어진다. 그들에겐 그것이 자동연상작용인 것이다. 1세계 관광객들이 한국을 그딴식으로 이해한다면 그들의 기분은 어떨까? 우리도 남들에게 얘기해줄 우리의 것들이 많지 않은가. 그것은 가슴아픈 역사과정이기도 할테고, 우리의 문화유산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타자를 이해하려고 들지 않을까. 그들도 타인들에게 얘기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을텐데...

이번 여행의 목적은 버마와 관련된 일이지만, 그러한 이유에서 여행전에 태국과 관련된 3권의 책을 샀다. 여행매뉴얼인 헬로태국, 태국에 대한 역사 개론서인 태국사, 그리고 간단한 에세이인 이 책이다. "태국사"보다는 읽기 편할 것같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나름대로 재미있게 잘 썼다. 현직외교관이 쓴 책이라서 그런지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시각이 엿보여 조금 뭣한 면도 있었지만, 이런 외교관이 많아진다면 확실히 대한민국 외교부는 '그나마' 나은 조직이 될 거다.

이 책은 태국의 간략한 역사, 태국의 문화유산, 태국인들을 만나고 살아가면서 느낀 단상들을 3-4페이지 단위의 꼭지에 담은 에세이집이다. 南國 특유의 느긋한 정서를 가진 태국인들의 모습과 외세의 침략에도 현명하고도 유연한 중립외교노선으로 평화를 유지한 그들의 저력은 감탄할만했지만, 엄청난 빈부격차와 엘리트 중심의 교육제도, 그리고 그로인한 사회적 차별이 불교특유의 윤회사상과 입헌왕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완화되고 있다는 대목에 가서는 좀 짜증이 났다.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환경은 동남아시아를 이해하는 주요한 단초가 될 것같다. 짧다면 짧은 여행기간동안 좀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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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벤트 재미있었습니다~!!!

* 이 글은 molot님의 [이벤트 최종 공지]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peyo님의 대장금을 능가하는 맛난 음식솜씨가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술자리가 길어지지 않았다면, 뒷정리를 좀 도와드리고 왔어야 하는데 아침에 싱크대에 쌓여있는 설거지 거리를 보면서 '내 다시는 이 따우 이벤트를 하지 않겠노라'라고 생각하셨을까봐 걱정됩니다. ^^

 

어제 peyo님, 달군님, 스머프님, 그리고 진화님으로부터 재미있는 얘기 많이 들었구요. 진보넷이 참 가깝게 느껴졌달까요? 암튼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 과거 정보운동 뭐시기 뭐시기는 거의 관심밖이었거든요. -_-;;

 

어제 술을 그리 많이 마신 건 아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띵~합니다. 오늘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실 peyo님, 달군님 수고하시구요 다음 기회에 뵙겠습니다.

 

참, 스머프님은 괜찮으신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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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든 생각...

아.. 자본주의보다 더 짜증나는 관료주의, 권위주의라니.

오늘 갑자기 그렇게 느껴버렸다. 이거 제도권 교육을 너무 충실히 받아서 그렇나. 세련된 모습을 한 자본주의가 더 친근하게 느껴질 줄이야. 솔직히 말해서 겁나 파시스트들은 나를 좋아한다. 왜? 내가 그들 앞에서는 가만히 있는 소시민(?)이거덩. 그들의 썰렁한 농담에 박자맞춰 미소지어주는 미덕까지 가지고 있음이야 두말해서 무엇하리 -_-;;;

아.. 이런 내가 싫군. 비겁하기는...

 

주절주절 써놓고 보니 "아.."가 두운을 이루는 수미쌍관법일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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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 해리 훅 감독(1990)


 

같이 사는 누군가가 비디오가게에서 빌려왔는지 집에 뒹굴고 있더라. 그래서 오늘 일요일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불살랐던(?) 영화였다.

 

1983년 노벨상 수상작인 윌리엄 골딩의 동명소설을 극화한 영화로 소설을 읽어보지 못해서 영화화가 제대로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재미있었다.

 

하도 유명한 소설이라 줄거리는 많이 알려져 있는대로다. 십수명이 아이들이 난파되어 무인도에 상륙하게 되고 순진무구한 주체인 아이들답지않게(?) 그 안에서 권력이 발생하고 나름의 독재체제가 성립되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내용이다.

 

난파된 아이들의 리더격인 랄프는 합리적이고 선한 인간의 본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무인도상륙초기 아이들은 랄프를 따른다. 랄프는 외부로부터의 구조를 기다리며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정의와 사랑을 강조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려 애쓴다. 그러나 랄프의 라이벌격인 정의롭지 않은(?) 잭이 랄프와의 불화로 아이들을 이끌고 떠나자 아이들은 2개의 무리로 나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동굴 속에서 괴물을 보았다는 한 아이의 말에 의해 어이없는 공포가 아이들 사이에 유포되고 잭은 이 공포를 교묘히 이용한다. 외부로부터의 누군가에 의해 내가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아이들로 하여금 다른 무리에 대한 공격과 따돌림, 심지어 살인을 하게끔 만들고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고 따랐던 랄프에 대해 무지막지한 공격에 나서게 한다.

 

여기서 제목인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은 혐오스러운 독재(자)의 상징으로 드러난다. 원인모를 공포의 공간인 동굴앞에 아이들이 박아놓은 돼지머리는 흉칙하게 썩어가며 파리떼를 끌어모은다. 흡사 합리적이고 선한 개개인의 아이들이 잭의 주위에서 흉칙한 파리떼의 모습으로 변해가듯...

 

작가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합리적이고 선한 인간개개인이 모인 공동체도 항상 합리적이고 선한 전체일 수는 없다는 것과, 권력의 횡포는 원인모를 공포에 대한 집단무의식을 통해 확대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요즘들어 국보법 폐지문제로 온 사회가 뜨겁다. 50년이상 "원인모를 공포"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그들만의 기득권을 유지해온 세력이 발악을 하고 있다. 남한의 인민들이 구역질나는 돼지머리(파리대왕)의 주위를 맴도는 소심하고 흉칙한 파리떼로 남을 것인가. 귀추가 주목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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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주말이로군~

또다시 금요일 오후군. 이 시간 때만 되면 야릇한 흥분을 느낀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고 이틀간은 늘어질 수 있겠다는 안도감도 밀려든다.

일요일 오후에 밀려들 약간의 두통은 잠시 접어두자.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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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레닌

* 이 글은 미류님의 [굿바이 레닌, 그래서... 진실인 것이다]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작년 어느 금요일 저녁 퇴근해서 본 영화다. 굿바이 레닌.. 가보니 객석이 만원사례였던 걸로 기억난다. 게다가 늦은 시간임에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단체관람을 하러 와서 놀랬다. 역시 현실은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다.



영화를 보기전에는 어머니를 위해 쇼를 벌이는 한 아들의 눈물겨운 일화라고 하길래 내가 공감가는 얘기는 아닐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조금씩 앞으로 달려가던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나름대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했다고는 해도 그리고 그 나라들이 실제로 '공산주의'를 실현했느냐라는 평가를 차치하고라도 일단 그 나라들은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고 실존했던 것인만큼 특히 그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필요하다. 아님 무식한 내가 모르고 있었던가..

 

영화속 어머니는 고지식한 열혈공산당원으로 이상주의자다. 그녀의 남편은 당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독 체제에서 왕따를 당하고 괴로워하다 서독으로 망명한다. 그녀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남편과의 망명을 계획하지만 실행하지 못한채, 서독 여자와 바람이 나서 가족을 버렸다고 아들과 딸 그리고 동독정부를 속인다. 그녀에게 동독체제는 완벽한 '공산주의의 이상향'은 아니었다. 당원/비당원 간의 차별, 낮은 생산능력에 따른 인민들의 열악한 생활 등 개선되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생활주변의 사소한 것조차 조금씩 고쳐나가며 언젠가 '이상향'이 도래하기를 바랐다. 동독여성들의 체형에 맞지 않는 옷의 치수에 관해 장문(!!!)의 편지를 당에 보내는 그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자유를 위한 시위에 참여하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을 본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긴 혼수상태에 빠진다. 다시 깨어난 어머니는 충격을 받게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 하지만 이미 몇개월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의 곳곳에 자본주의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이에 아들은 동독체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거짓말에서 시작하여 종국에는 서독인민들이 동독으로 대규모 망명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짓말까지 하게 된다.

 

이영화에서 재미있는 점은 아들이 처음에는 어머니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만, 나중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대신 어머니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는데 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웃들과 다정하게 살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도 소박한 이상의 하나일 거다. 그리고 현존 사회주의를 일구었던 초기 인물들도 그런 이상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그 진행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거나 희망을 잃어갔다. 영화속 어머니도 그런 사람이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서독으로 망명한 이후 어머니가 열혈공산당원이 되는 걸로 나오지만 난 그 이유가 생존을 위한 거짓 연극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 사람이 서독인민들이 경제난으로 대거 망명을 해서 베를린시의 주택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말에 자신의 집을 선뜻 내어주려고 하겠나. 오히려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는 체제를 자신의 희생과 노력으로라도 조금씩 개선해보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아들은 어머니가 그토록 갈구했던 이상을 한편의 쇼로나마 실현시키고 감격한 어머니는 편안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골은 그녀가 그토록 염원했던 이상이 존재하는 곳(하늘)을 향해 '발사'된다.

 

이 영화가 통일독일에서 개봉한 이래 역대 2번째로 높은 흥행실적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만큼 내용면에서나 대중성면에서나 충실한 작품이며, 또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일국민 대다수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영화는 몰락하여 서독에 흡수된 동독을 망할 수 밖에 없었던 후진적인 독재체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실험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살던 많은 사람들 각자의 이상찾기(!)를 인간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승자의 우월감에서 나온 포용력인가? 그건 아닐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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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페스티발 "오세이선생의 교육혁명"

 

 

EBS 다큐멘터리 페스티발에서 “오세이 선생님의 교육혁명”을 봤다. 내겐 일본의 제도교육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교육자로서의 이야기보다 죽음을 앞둔 고뇌에 찬 한 인간의 이야기로서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 작품이다.

 

평소 이지메현상과 등교거부 등 일본의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도시아키 오세이선생은 하마노고 초등학교의 신임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학생들을 위한 참교육을 위해 노력한다. 그에게 있어 교육의 목표란(특히 초등교육의 목표란) 아이들에게 “삶의 가치”와 “배움의 기쁨”을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교육이란 단순히 지식을 나열하고 암기토록 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읽을 수 없는 붕어빵같은 존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아이들의 경험, 지식, 판단력을 존중함으로써 아이들이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갖고 사고할 수 있게끔 수업방식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는 학교 선생님들의 잡무를 과감하게 줄이고 교사들로 하여금 정기적인 공개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효과적인 수업방식을 개발하도록 했다. 다큐멘터리를 찍기 전 그는 말기 위암판정을 받는다. 수술도 했지만 몇 개월의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자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오세이 선생님의 도덕시간, 그날의 주제는 “인생”이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한편의 동화를 먼저 읽어준다. 늙은 오소리가 죽자 그의 친구들이 오소리가 그들에게 가르쳐준 많은 일들(과자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일화, 넥타이를 메는 법을 가르쳐준 일화 등등)을 추억한다는 내용이다. 오세이 선생은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오소리는 죽었냐고, 죽은 게 맞다면 오소리와 그의 친구들과의 관계가 끝난 것이냐고, 관계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면 도대체 그들을 연결해 주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어떤 한 아이가 대답한다. “추억”이라고, 그들이 함께 했던 “추억”이 그들을 연결해 주고 있다고 말이다. 선생님은 자신이 늘상 어깨에 메고 다니던 링거주사액을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말한다. 자신도 죽어가고 있고, 곧 죽을 테지만 너희들과 함께 있을거라고.

 

한학기가 끝날 때까지 오세이 선생은 동료 교사들과 다음 학기의 수업계획과 새로운 교재개발에 대해 열띤 논의를 한다. 그리고 학기가 끝나고 짧은 방학을 맞이한지 2일 후 갑작스런 병세악화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머리맡에는 다음 학기 “인생”에 대한 수업계획안이 놓여져 있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몸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몹시도 두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주어진 시간동안 아이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했고 그러한 그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겨지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 추억이 오세이 선생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같은 기간 방영되었던 “어느 암환자의 해피데이”에서 주인공 쉴로미는 그야말로 발버둥을 친다. 신에게 의지하며 수술과 치료의 고통을 참다가도 어느 한순간에는 격한 감정에 휩쓸린 나머지 치료를 거부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살고 싶다며 흐느끼기도 한다. 그의 감정상태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아마도 죽음을 앞둔 보통사람이라면 그리고 나라면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타인을 위해 삶의 마지막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오세이 선생 같은 삶을 보면 괜시리 눈물이 난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나의 대학시절 맑스, 체게바라, 트로츠키, 김산과 같은 혁명가들이 멋있으면서도 그들이 왜 그토록 힘든 삶의 무게를 선택했을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다. 당시의 인텔리였으니 자기 한 몸 건사하며 호위호식할 수 있었을테고, 더군다나 그들은 기본적으로 유물론자들이지 않는가? 내세를 믿는 것도 아니니, 현세의 모든 고통을 신이 보상해 줄 것으로 믿지도 않았을텐데. 바로 그러한 나의 물음을 해소해 준 것은 ‘추억’과 ‘기억’에 대한 문학평론가 김명인씨의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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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역사가 대가 끊기는 것으로 종지부를 고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역사는 우리 당대에 반드시 모든 것이 실현되지도 않을 뿐더러 오래전 많은 지식인과 민중들이 희망했던 유토피아로서의 사회주의 혁명 자체가 저절로 그런 유토피아를 가져다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아직도 진보를 말하고 희망을 말하는가? 그것은 진보가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구체적 일상과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삶과 일상에 대한 하나의 자세이자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제한된 수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왜 막 살아버리지 않는가?

 

루이 아라공은 말한다. "죽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닐터 타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있어 가장 최후의 무기는 기억이다. 우리의 기억은 곧 역사의 현장이며 잊지 않기 위한 투쟁의 현장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종이로 씌어지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할 수도 있다. 많은 이름없는 이들이 그렇게 사라졌듯이. 그러나 우리는 그 이름없는 패자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기억함으로써 비록 당대에는 승리할 수 없음에도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전수해주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교사이고, 교육이다. 미래에 대한 나의 솔직한 전망은 그런 것이다. 나는 내 삶으로 나를 짊어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내가 당대에 이루지 못한 것일지라도 인간의 역사, 사람의 역사가 아이들에게서 다시 아이들에게로 이어지는 동안 언젠가는 변화될 것이라 믿는 것이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희망의 교육학”에 대한 서평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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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후유증인가?

일하기가 넘넘 싫다.

그래도 지난 금요일에 왠만한 일을 끝내놓았기에 매주 일욜 저녁무렵에 느끼던 두통은 없었거늘..  오늘 아침은 이상하게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내내 진보네에서 사네 그려..-_-a

여름 내내 매지 않던 넥타이와 긴팔 와이셔츠 때문일까? 다시 넥타이로의 복귀. 올해도 다 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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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자

이 글은 난타님의 버스를타자에 대한 트랙백입니다.

 

언제 봤던 다큐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떨결에 친구한테 끌려가서 본 기억이 있다. 사실 그 다큐를 보기전에는 부끄럽게도 장애우들의 이동권 문제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내 이종사촌 누나의 경우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옆에서나마 누나의 일상을 꾸준히(?) 볼 수 있었다. 지금 정신연령이 6살 정도인 누나는 걸을 수는 있지만 오래 걷지는 못한다. 발이 선천적으로 너무 작은데다 비만이 심해서 다리가 오래 견뎌줄 수 없는 탓이다. 누나는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성당에서 운영하는 쉼터 혹은 집에서 보낸다. 외출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누나의 다리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이 누나와 함께 걷고 있는 나로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였던지... 어느 피자집에서 자리에 앉아 피자를 주문했는데 종업원이 그러더라. 홀 중앙에 앉지 마시고 조금 구석진 자리로 가 달라고... 나는 그러자고 했지만 이모는 끝까지 홀 중앙에서 피자를 드셨다. 마치 오기를 부리시는 것 마냥...

 

솔직히 그때 난 ... 창피했다. 그냥 조용하게 구석자리에서 먹고 가면 될 것을 왜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기어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난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부터 난 누나나 이모를 만나는 걸 피해왔고 아직도 그렇다. 마치 이모가 누나 때문에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까봐 그게 두려웠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머리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인간이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종로3가에서 이동권쟁취를 위한 서명운동이 있을 때 "폼나게" 서명도 했다. 하지만 내 주변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건 나로서는 숨겨야 할 부끄러움으로, 그리고 누나는 시혜적인 동정만으로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야 할 착한 존재로 인식되어왔던 것 같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충격을 먹었다. 그들은 더이상 시혜적인 동정을 구걸하고 떡고물이 떨어질 때 "아이구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착한 존재"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뻔뻔함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모습이 뻔뻔스러움으로 느껴진다는 건 항상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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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지 모른다더니...

위의 말은 지금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거의 컴맹수준으로 지내오다가 블로그 하나 만들어서 써 보니 신기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트랙백이니 RSS니 처음 대할 때에는 어려웠는데 막상 써 보니 아무것도 아니다. 항상 어딘가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는 빅브러더로부터 RSS가 뭔지 대충 얘기만 듣고 오늘 abilon을 깔아서 사용해 봤는데.. 오호~라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니다. 관심블로그를 지정해 놓으면 자동으로 업데이트가 되서 모든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한시간동안 삽질(?)했더니 관심등록 블로그가 화면가득 차버렸다. 오른손이 저리네 ... -_-;; 암튼 회사에서 앞으로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 냐하하하하~

 

참,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느긋하게 EBS 다큐멘터리를 보려고 했는데, <시간의 수레바퀴>라는 별 거지같은 다큐가 해서 컴퓨터앞에 앉았던 거다. 유명한 다큐감독의 작품이라고 꼴에 "다큐멘터리 거장을 만나다" 섹션에 있다. 서양애들은 왜 되도 않은 오리엔탈리즘에 빠져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전파가 아깝다. 전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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