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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조정래

 

조정래의 한강을 읽었다. 그의 소설 중에 처음 읽은 소설이었다. 평소 그의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그리 탐탁지 않은 눈길로 봐온 나였기에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고, 그 분량에 있어서도 부담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한강을 읽게 되었던 이유는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이루어진 6-70년대를 어떻게 조망할 것인가라는 내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 이문열의 변경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문열을 싫어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채 먼지에 싸여 중대본부에 나란히 꽂혀있던 그 12권의 책들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 그때는 시간을 어떻게든 흘러가게 만들어야 했던 군대의 말년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문열의 변경은 6-70년대를 조망하는 나름의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기 보다는 작가가 왜 수구반동세력의 돌격대가 되는 길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지리한 변명을 풀어서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끔 만들었다. 또한, 그 시절을 살아갔던 인물 군상들을 바라보는 이문열의 시각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내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은 감정수준에서 끝났을 뿐, 그에 대해 객관적인 비판을 날카롭게 가할만큼 정리된 생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정래의 한강을 읽게 되었던 것이다.

 

한강에서 작가 조정래는 4.19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인물 군상들이 세상과 맞부딪치며 살아가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나가고 있다. 그 중에는 권력과 가진자들에 빌붙어 서서히 정신적으로 몰락해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고, 어떻게 해서든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발악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조선팔도와 세계 각지에서 스러져갔던 더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도 있다. 이들을 통해, 근대화, 산업화, 공업화라고 일컬어지는 6-70년대의 경제개발의 주역은 저 수구꼴통들이 들먹이는 다까끼 마사오(박정희)가 아니라 농토에서 내몰리며 서울의 공장에서, 그것도 부족해 베트남의 밀림, 독일의 광산, 사우디의 사막에까지 보내져 저임금과 고단한 노동에 혹사당해야 했던 이름없는 민초들이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천두만, 천칠성, 나삼득, 나복남, 나복녀, 박보금, 김광자, 문태복, 전묘숙, 그리고 항상 우리에게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되고 있는 전태일...

 

대학교 1학년 때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의 남한의 역사를 다룬 개설서인데, 그때는 각 학회나 동아리에서 갓 입학한 새내기들에게 이 책을 읽히고는 했었다. 그 책의 표지에는 구와바라 시세이라는 일본인 사진작가가 찍은 4.19혁명 5주년 기념시위 사진이 실려 있었다. 빗속에서 대학생처럼 보이는 일군의 남루한 사람들이 연출하는 우울하고도 경건한 침묵시위장면이 흑백의 스틸사진에 담겨있고, 그 뒷면을 넘기면 “지금 50대에 이르는 이들은 재벌 기업의 간부나 고위 공무원이 되는 등,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다.”라고 씌여 있었다. 그 책을 읽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한강을 읽은 뒤 바라보는 그 사진은 의미심장하다. 유일민, 유일표, 이규백, 허진, 이상재, 원병균, 박준서 등이 바로 그들이 아닌가. 현실과 부딪치게 되면서 날개를 하나씩 꺾여 버린 채 삶의 무게와 개인적, 사회적 욕망 속에 하나씩 허물어져가던 나의 아버지 세대들. 그들에게 품게 되는 나의 감정은 매우 복합적이다. 동정심, 측은함, 배신감, 허무함 그리고 경이로움. 이들에 대한 평가는 두고두고 우리 그리고 후세의 몫이 될 것이다.

 

조정래의 한강을 통해 정말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인물들을 만났고, 그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역사책에 나오는 딱딱함과 건조함으로 내게 다가오지 않았고, 나름의 삶의 무게를 지닌 향기가 나기도 하며, 때론 악취가 나는 주체로 다가왔다. 그것만 하더라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의 혹자는 조정래의 한강이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에 비해 너무 도식적이고 짜임새가 없는 것 같다고 비판을 하는가 하면, 지면상의 한계로 유신 이후의 소설의 결말부분이 너무 설익게 끝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포항제철의 박태준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일견 국가주의적인 시각인 엿보인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20여년간의 삶을 이토록 짧은 분량에 리얼하게 그려낸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조정래는 실로 큰 일을 해 낸 것이고, 우리는 나름의 시각을 통해 독해해볼만한, 우리시대를 조망해 볼 기회를 주는 중요한 텍스트를 손에 넣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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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놈일수록 잘 잔다

ㅇ 줄거리 :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구로사와의 비판이 가장 강력하게 표출된 영화 중 하나. 대기업 회장의 딸과 회장 비서의 성대한 결혼식장에 의문의 케이크가 배달된다. 그 케이크는 몇 년전 그 기업의 뇌물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해 강제적으로 투신자살했던 어느 간부의 아들, 바로 그 결혼식의 신랑이 복수의 서막을 알리기 위해 보낸 것. 절대 권력의 제도와 투쟁하는 한 개인의 고독한 면모를 그린 이 영화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은 영웅의 비극적 최후를 장엄하게 고하고 있다. (출처:서울아트시네마 홈피)

 

ㅇ 평 : 1960년에 제작되었음에도 무척 재미있는 영화이다. 45년 패전이후 일본의 경제적 풍요의 뒷모습인 정,재계의 유착구조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주제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일본의 문화적 전통에 맞게 재해석(내게 있어 근대화, 서구화에 대한 일본인의 편집증적 집착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항상 난감한 문제다)해 온 감독답게 극적 전개를 고려한 짜임새있는 구성이 돋보인다. 화면의 전환, 배우들의 극적인 대사와 연기로 인해 한편이 연극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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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소동 - 샹탈 에커만


 

한마디로 경쾌한 코메디물이다.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모~옵시 좋아진다. 현실감이라고는 없는 어리버리한 주인공인 샤를로트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감독의 말에서 샤를로트가 자신의 분신이라고 했는데, 감독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샤를로트는 에로소설류를 의뢰받아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프리랜서 작가다. 글을 써서 살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한국이지만 벨기에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외로움을 느끼던 엄마가 샤를로트의 집으로 쳐들어온다. 수년간 따로 살아왔으니 라이프스타일도 완전히 다를 것이고, 급기야 자신에게 사랑과 애정을 가져달라며 계속 칭얼거리는 엄마 때문에 강박증에 시달리던 샤를로트... 마침내 집을 팔고 이사를 가기로 결심하고 집을 내놓는다. 집을 보기 위해 꾸역꾸역 모여드는 사람들. 이들과의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에피소드들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앞서말했듯이 주인공인 샤를로트는 에로소설작가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의 경험조차 없고 그에 대해서 무지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샤를로트는 자신의 언어로 소설을 쓰지 못한 채, 옆집에서 들려오는 교성과 남들이 사랑에 대해서 하는 말들을, 그것도 단어로 분절적으로만 수첩에 끄적거릴 뿐이다.

 

그러나 집을 보러 오는, 아이를 낳기 직전의 젊은 부부, 장년의 권태를 느끼는 부부 등과 교감을 하게 되면서 변화를 겪게 되고, 샤를로트는 여타 여성들의 삶의 문제들에 공감을 하게 된다. 즉, 먹고 살기 위해 엉터리 포르노소설을 쓰는데(남성들의 관음증적이고도 억압적인 성관념)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런 간단한 주제와 더불어 이 영화에는 자신만의 자아를 위한 공간을 갖기 원하는 여성의 심리, 딸과 엄마 사이에서 벌어지는 애증의 관계, 노년들의 애정에 대한 욕망, 상상력과 공통경험을 통한 공감이라는 많은 꺼리들이 코믹적 요소들과 잘 버무려져 있어 2시간의 러닝타임이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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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 마스무라 야스조(1967)

 

이번 6회 여성영화제 상영작이다.

 

6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라고 믿겨지지 않을만큼 현재의 시대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된 유머러스한 부분도 현재의 관객들에게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재미있는 영화다.

 

영화의 무대는 18세기 말의 일본으로 화타와 같은 명의를 꿈꾸는 의사 하나오카 세이슈와 그의 아내 카에, 시어머니 오츠기가 영화를 끌어가는 주인공이다. 카에는 어린 시절부터 사모했던 하나오카 가문의 오츠기를 사모하여 그의 며느리로 들어간다. 시어머니 오츠기는 인자하고 현숙한 부인이지만(그리고 카에도 처음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츠기의 아들과 가부장제적 질서에 대한 집착은 카에에게 당황스럽게 비춰졌다.

 

세이슈가 에도에서 화란의 의술을 배우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보이듯이 극중의 여성들은 세이슈의 세속적 성공을 위한 도구다. 어머니 오츠기, 아내 카에,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두 여동생들 모두 세이슈를 위해 가사노동과 세이슈의 에도유학비 마련을 위해 매진한다. 특히 오츠기와 카에는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고 파괴하는 정도를 자신의 세이슈에 대한 사랑의 강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로 삼으면서, 서로에 대해 우위를 점하려고 경쟁한다. 이들의 경쟁은 세이슈가 만든 마취약의 최종실험을 위해 자원을 하는데서 정점에 달한다.

 

외과수술을 위해서는 전신마취를 해야하는데 당시에는 환자들이 수술을 고통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취약이 존재하지 않았고, 전신마취만 가능하다면 나름의 멸균법을 통해 외과수술을 해서 많은 생명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네덜란드의 의술을 접했던 세이슈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서로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아달라고 애원하자 세이슈는 오츠기와 카에 모두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여 마침내 전신마취제 개발에 성공하고 세계최초의 마취수술에 성공한다. 그러나 실험과정에서 마취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카에는 실명을 하게 되고, 아들과 며느리에 의해 자신이 속은 것을 안 오츠기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한편, 세이슈는 당대의 명 외과의로 승승장구하여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되고, 결과적으로 마취약 개발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카에는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감독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세이슈의 누이동생이 종양으로 죽는 장면인데, 자발적으로 자신을 파괴해가며 가부장제적 질서에 경쟁적으로 순응하는 여성들의 어리석음을 여성(세이슈의 누이동생)의 입을 빌려 통렬하게 비판한다.

 

아멜리 노통은 그의 소설 [사랑의 파괴]에서 사랑을 자발적인 자기파괴과정으로 그려내고 있다. 어떤 인격적 실체에 대한 비합리적(?) 끌림으로 인해 가학과 피학의 행위가 발생하게 된다고 말이다. 물론 노통의 소설에서는 나와 엘레나라는 두 여성이 등장하고, 그러한 자기파괴과정의 수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처리되고 있지만, 이 영화의 감독 마스무라 야스조는 가부장제와 그 안에서 경쟁적으로 발생하는 자기파괴과정의 수혜자가 결국 남성임을 분명하게 지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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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제6회 여성영화제 상영작이다.

마그레테 폰 트로타 감독 특별전 형식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 중 한 작품이었는데, 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책으로만 읽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일생을 영상으로 본다는 기대감을 안고 본 작품이었는데, 장면 장면마다 왜 이리 가슴이 불편한지 ...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가 단병호씨를 인터뷰하다가 그의 나이보다 팍싹 늙어보이는 외모에 불편함을 느꼈다고 썼는데, 오늘 본 로자 룩셈부르크가 내게 그랬다.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생각도 많이 변화하기도 했고, 나름대로 나 자신을 합리적인 사민주의자로 규정하곤 했는데, 대학 때 읽었던 맑스를 생각해 보면 왜 이리 창피하고도 답답하냔 말이다.

 

암튼, 영화에는 당시 맑시즘의 교황이라고 일컬어지던 카우츠키와, 베벨, 베른슈타인, 클라라 제트킨을 볼 수 있고, 리프크네흐트의 공원연설장면도 등장한다. 당시의 사진과 비슷한 외모의 배우들을 기용하고, 당시 연설장면을 재연한 것만 봐도 감독이 당시상황의 고증에 상당히 집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변 : 내 기억으로 1968년은 우리 모두가 정치적으로 긴장했을 때였다. 나는 그 때 로자 룩셈부르크의 책인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와 개혁 또는 혁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 글 뒤에 숨어있는 여성을 생각하며 언젠가 그녀의 일생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오 요기헤스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며, 로자의 옥중 서신을 통해 그녀가 정치적 활동을 하고 있지만 여성으로서의 감성 또한 잃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2,500통의 서한을 썼고, 이 편지들은 영화를 만드는데 최고의 자료가 되었다. 서한들은 그녀가 얼마나 감성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했으며 따뜻한 여인인지,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역동적이고 전투심이 넘쳤는지도 보여준다.
로자는 정말 완벽할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인간보다 자연에게 더욱 가까운 ‘유대감’을 느꼈다. 그녀는 문학과 음악, 미술과 식물학(사실 식물학에 대해선 전문가였다), 지질학에 대해 관심이 높아 촘촘하고 깔끔한 글씨로 공책 가득 메모를 하곤했다. 그녀는 언제나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무슨 일을 하든 열정을 가지고 행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 특유의 발랄함과 인내심으로 친구들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관해 모은 자료들이 너무 많아서 두 편의 영화를 더 찍어도 될 정도였다. 그녀는 평생을 바쳐 연구해도 아깝지 않을 여성이었다. 몇몇 역사가들은 내 영화가 매우 부족하다고 말한다. 나는 역사물을 만들거나 로자의 완벽한 초상을 그리는게 목표가 아니었다. 나의 영화로 인해 로자 룩셈부르크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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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네시-아멜리노통

 

현대인의 고독과 소통의 단절을 날카롭게 표현해 낸 소설이다. 밤새 읽으면서 너무 재미있었다. 소설의 초반에는 은퇴한 노년의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일상적인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소설의 1/3이 넘어서면서 스릴러로 바뀌고, 종국에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되짚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살아가야할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할 경우 그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현대인들 대다수가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아볼 생각도 없이 그저 생에 대한 집착만을 가지며 살고 있다는 데 있다. 이유는 없고 집착만이 남은 삶. 그럼에도 생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에게 살아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건 폭력일 듯 하다.

 

이 책의 팔라메드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병원에서 만난 베르나데트와 결혼한 걸로 봐서 나는 그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세상의 편견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생의 의미를 상실한 채,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희망을, 공격적인 태도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팔라메드 베르나르댕. 주인공이 마지막에 취했던 극단적인 행동은 팔라메드에 대한 전적인 공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소설의 중간, 에밀과 쥘리에트의 어릴 적 침실에서의 추억이 참 마음에 들었다. 뿌옇게 처리된 과거회상용 화면의 따뜻함이 내 뺨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누군가의 추억에서 빌려온 장면이라면 난 그 사람이 너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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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 - 박홍규

 

'오웰탄생 100주년 기념'이라는 다소 과장된 문구로 광고된 이 책은 박홍규 교수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인간 오웰'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오웰을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투사의 모습으로도, 그리고 탁월한 반공주의자(?)의 모습으로도 그리고 있지 않다. 다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만 하는 인간의 권리를 위해 담담하게 자신의 생을 살았던 인간 오웰의 모습을 그린다.

조지 오웰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상당히 왜곡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60년대부터 시작된 군부독재정권이 반공과 냉전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데 이용함으로써 오웰하면 반공주의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기는 하지만, 그는 스페인 내전에 지원병으로 참전하기도 했던 좌파적인 아나키스트였고, 산업주의에 반대하며 전원생활로 회귀하기를 원했던 공상적인 자연주의자이기도 했다.

또한, 이 책은 오웰의 성장기부터 그의 삶을 추적해 들어간다. 인도식민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그 역시 버마식민경찰로서 식민주의자의 길을 걷다가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되돌리는 과정. 작가로서의 활동과 전체주의에 대한 그의 일관된 반대노선 등.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며 인간을 위해 살아가고자 했던 오웰의 모습을, 휘청대는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보다 인간적인 방향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이 책은 외국어 번역본이 아닌 탓에 문장의 호흡과 어휘 등 모든 면에서 쉽게 읽힌다. 이 책이 많이 읽혀 오웰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일조할 수 있었으면 한다.


*참고 - 금금님의 '코끼리를 쏘다' http://blog.jinbo.net/kumkum/?pi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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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이처럼 얇은 책을 이처럼 오랜 시간 읽어본 적은 없었다. 이 책은 몇년전에 정치학과 전공선택 수업에 꼽싸리 끼어 들었던 정치사상사 과목의 발표용으로 읽었던 책이다. 독일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된 강사가 맡은 수업이라서, 수업은 처음의 2시간을 빼놓고는 학생들이 '마키아벨리부터 헤겔'까지의 원전 중 하나를 선택하여 충실히 읽어오고 그것에 대해 다른 학생들 앞에서 발표하고 발표내용을 서로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학을 4년간 다녀오면서 발표수업은 많았지만, 이처럼 원전에 대해 독해를 하고 그 내용을 발표하는 수업은 처음이었고, 학생들의 자발적인 호응 속에서 서로 얻은 것도 많았던 알찬 수업으로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후기산업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지금에서도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더욱이 일목요연하게 편집된 여러 개론서들, 특히나 ‘한권으로 읽는...’등의 부제가 붙은 얄궂은 개론서 한권을 읽고, 그 책에 수록되어 있는 많은 사상가들의 사상을 다 이해했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는 지금 세상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상서들의 저자들은 그들이 발을 딛고 있었던 세계의 문제점을 무엇이라고 보았으며, 그 문제들을 어떻게 체계화시켰는지, 그리고 대응책은 무엇이었는지를 철저하게 뒤쫓을 수 있는 방법은 역시나 고전을 직접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루쏘를 중고등학교 때 배운 사회계약론을 주장한 사상가로서만 단편적이고도 막연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사회계약론자로서 분류되는 홉스와 로크, 몽테스키외, 루쏘의 주장 사이에 거의 공통점이 없음을 알고는 정말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다음은 사회계약론에 대한 짧은 서평이다.

 

루소는 15년간 <정치제도론>의 출간을 기획하였으나, 그가 <사회계약론>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에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구성되게끔 만드는 근원적인 사회계약에 관하여 글을 남기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사회계약론>이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15년간의 그의 고민의 흔적을 느낄 수 있으며, '사회계약' 이외에 루소가 생각한 올바른 정치와 공동체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정치사상사의 영역에서 홉스, 로크, 몽테스키외 등의 사상가들과 함께 '사회계약론자'로 분류된다. 즉, 그들은 인간들이 근원적인 사회계약을 통해 정치공동체를 구성했다고 주장한 점에 있어서는 동질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을 고찰해 보면 그 이외의 공통점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에 큰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홉스는 절대군주정을, 로크는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를, 루소는 직접민주주의를 옹호하였으며, 인간의 (정치적)원시상태, 사회계약의 필요성 등에 있어서 그들의 의견은 큰 차이를 보여준다. 그들의 이러한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루소의 저작을 읽는다면 더욱 더 큰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루소의 저작에서 우리(특히 남한에서)에게 가장 유명한 말은 '영국 국민들은 그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정작 그들은 투표가 끝난 후 쇠사슬에 묶인 노예의 처지가 된다.'는 말이다. 이 말처럼 그는 직접민주주의를 갈구한다. 대의제민주주의에 안주하며, 정치적 무관심에 길들여져 가는 인간들의 나태와 무관심을 질타한다. 이것이 비단 루소 당시의 사람들만 해당되는 말일까? 건전한 정치적 관심과 직접적인 참여만이 민주주의의 생명이라는 루소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다보면, 그가 어쩔 수 없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 또한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그의 전체주의적인 성향이나 국민을 완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계몽의 대상, 새로운 인간형으로 거듭나야 할 대상으로 규정짓는 루소의 모순적인 사고방식... 과연 그 시대의 특징이라거나 갖은 정치적 핍박을 받아야 했던 루소의 비극적인 인생의 특징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분명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현대의 독자들이 읽기에는 그리 흥미로운 저작은 분명 아니다. 현대의 인문사회과학도서만큼 각 장에서 각 주제에 대해 명확하게 정리된 결론을 제시하지도 않을 뿐더러 했던 이야기를 중언부언하기도 하고, 잘못된 자연과학적 예시나 현대의 독자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고대의 사례를 나열하는 등 그의 사회계약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몰려오는 잠을 내쫓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을 제외한다면, 이 책을 어렵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것은 물론 무엇이건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며 또 독자적으로 사색하려는 독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자본론 서문을 paro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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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강유원

 

'책'은 강유원의 문필가로서의 면모와 본래 전공인 철학을 바탕으로한 탄탄한 논리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서평집이다. 그는 자신의 이념을 선뜻 밝히지 않았지만 주로 서평을 할때 다루는 논리의 근거, 대안을 찾을때 헤겔과 마르크스에 기댄다는 것,그리고 우리나라의 이념적 편향을 지적하며 좌파들의 분발을 촉구한다는 점에서(사실 이건 고른 이념 스펙트럼을 바라는 일부 자유주의자들도 지적하고 있기는 하다.) '좌파'라고 보더라도 무방할 듯 하다. 비단 그러한 논리나 글의 구성으로 파악되는 것말고도, 강유원은 좌파가 지니고 있는 일종의 '꼬장꼬장함'을 지니고 있다. 예전에 김규항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쓴 에세이에서 느껴졌던, 혹은 서준식의 글속에서 느껴졌던 그런 꼬장꼬장함 말이다.(좀더 멀리나가자면 진중권에서도 언뜻언뜻 발견되는) 그런 '꼬장꼬장함'은 강유원 특유의 문체의 간결함에서 비롯되는 것 같기도 하고,그가 비판을 가할시에 어떠한 이념,나이,국가를 초월해서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꼬장꼬장함의 태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나는 알수가 없다. 다만 그 태도는 그의 글을 보다 날카롭고 차갑게 만들어 준다. 그가 서평을 쓰는 이유는 책의 가치를 분별해주는 것이라 언급했고, 그 분별을 가능케하는 것은 감성이 아닌 이성이니 강유원의 문체나 분위기는 서평집의 목적에 상당히 부합되는 것이 틀림없다.

...어설픈 좌파를 자칭하면서, 아니 그렇기에 그러한 '꼬장꼬장함'을 지니지 못한 나로서는 그의 그러한 태도가 부러우면서도 조금 부담스럽다. 예전에 고종석이 그의 에세이에서 수구세력과 강준만과 박원순과 같은 개혁세력에 대한 김규항의 비판의 정도가 비슷한 것에 대해 버거움을 느낀다고 했는데, 나도 그와 비슷한 부담을 강유원의 서평에서 느끼는 것 같다. 이를테면 조한혜정이나 홍신자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사상과 행동의 불일치를 강한 어조로 비판할때 그 나는 그 비판의 정도가 부담스럽다. 물론 지식인이란 생각과 행동에 있어 일치를 보여야 한다는 강유원의 발언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그도 언급했듯이, 그 생각과 행동의 일치가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는 조한혜정이나 홍신자의 발언들이 설령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공감하는 편이다. 그 발언은 설령 비현실적이더라도 이 나라의 진보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사람들의 닫힌 의식을 깨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그러한 '말하는 행위'조차 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위치(교수라는 안정된 직장, 명망있는 예술가)에 안주하고 아무 발언도 안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직무유기라고 난 판단한다. 물론 강유원은 그들이 그렇게 된다면 지식인이라는 명함을 내밀 자격도 없다고 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내 안의 자유주의자적 기질에서 오는 불편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강유원의 글쓰기,그의 작업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실상, 오늘날 좌파들이 지닌 문제점들은 '꼬장꼬장함'의 과다보다는 지나친 타협(다른 말로 하면 지나친 리버럴함)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창'에서의 에세이, 그리고 문화일보의 '서평' 그외에도 선보이는 철학작업을 통해 그는 점차 자신의 '꼬장꼬장함'을 보다 폭넓게 그리고 자유롭게 선보이는 것 같다. 그러한 태도가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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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가족 - 임상수


이번 크리스마스이브때 혼자 조용히 이 영화를 봤다. 재밌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이 영화를 가로지르는 키워드는 "쿨"이다. 반쯤 미쳐버린 후기산업사회라는 시공간에서,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하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조건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관계를 통해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런 상처를 일일이 감싸쥐고 아프다고 소리지를 수만은 없기에, 그리고 그 작은 소리에 귀기울여줄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겉으로는 쿨한척 자신을 포장한다. 그것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기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100% 쿨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줄 알지만, 우리는 일종의 가면을 쓴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잘 나가는 변호사 영작과 그 아내 호정, 그리고 죽어가는 아버지와 바람난 시어머니.. 겉으로는 쿨한 척 하지만 그들의 가슴은 여리고 또 여려서 어느 순간 그들은 하나씩 무너져 내린다. 아들의 죽음과 아내의 외도, 그리고 연인으로부터 받은 상실감으로 가장 먼저 무너져 내리는 영작, 그리고 아들의 죽음으로 한없는 울분을 토해내는 호정, 남편의 최후를 눈앞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시어머니, 신체적인 극한에 몰리자 병상에서 횡설수설 빨치산의 노래를 읊조리던 시아버지... 그때였을까 내 눈에서 눈물이 울컥 치밀었던 때가...

어떤 영화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새로이 느껴질 때가 있다. 바로 이 영화가 그랬다. 근 한달동안 누군가를 좋아했지만, 내 자신이 번번이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쿨함에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어 돌아설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그의 쿨함이 오히려 안쓰러웠고 그가 쿨의 가면을 쓸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그의 과거가 미웠다. 그랬다... 그저 그런 느낌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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