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디어헌터

 

 

이 영화의 배경은 펜실베니아의 제철공장지대다. 2차대전 이후 “세계의 공장”을 자처했던 미국 위상의 급격한 하락을 상징하듯 영화의 배경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퇴락해 보인다. 게다가 이 마을의 주민들은 러시아를 그 출신지로 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마을 중앙에는 커다란 러시아 정교 교회당이 들어서 있고, 마을공동체라 불리울만한 유대관계를 맺고서 살아간다. 육체노동을 하며 미국사회의 하층민으로 살아왔던 이민 1세대처럼 이 영화의 주인공인 이민2세대들도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들에게는 언어적, 문화적 충돌과 어려움이 덜하다는 정도일 것이다. 사회적 신분의 상승(이른바 입신양명)과 러시아적 정체성의 유지(그들은 그들의 자식들이 러시아 출신과 결혼하는 것을 바란다)를 희구하는 그들의 부모들에게 엿을 먹이려는 듯 그들의 삶은 공장과 선술집, 그리고 가끔씩의 사슴사냥 속에서 부유한다. 그들은 애초부터 앵글로 색슨이 지배하는 미국사회에서 신분의 상승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그들 자신이 미국의 쓰레기라는 한계를 철저히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미국이라는 국민국가의 일원으로서 ‘자랑스러운’ 징병의 대열에 합류한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약간의 두려움과 머뭇거림의 흔적을 엿볼 수 있지만, ‘전쟁도 사슴사냥과 같은 하나의 게임일 뿐’이라는 말로 위안을 삼으며 그들은 전장으로 향한다. 그들이 거기서 본 것은 전쟁의 광기와 어떠한 도덕적 주저함이 없는 살육의 현장이었다. 게임이 지속된다면 게임의 참가자 모두 죽을 수 밖에 없는 러시안 룰렛처럼, 베트남전속에서 참전자들의 생명은 하나둘씩 스러져 가고 미쳐간다.

 

그 와중에 참전했던 세친구 중, 닉은 탈영을 해서 자취를 감추고, 스티븐은 반신불수가 되고, 마이클만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나중에 닉이 패망직전의 베트남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한 마이클은 다시 베트남으로 들어가 닉을 구하려고 하지만, 닉은 러시안 룰렛판에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만다.

 

감독 마이클 치미노는 이 영화를 통해 미국사회의 주변인들이 베트남전이라는 광기어린 전쟁을 통해 파괴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 이후 최초의 진지한 영화적 시도였던 이 작품은 미국의 주류계급이 원하는 도식적인 결말로 허무하게 끝난다. 베트남으로부터 도착한 닉의 시신을 묻고 난 후, 옛친구들은 식사를 하며 미국찬가를 조용하게 부르는 것이다. 영화 곳곳에서 베트남인을 비하하는 영화적 장치가 눈에 거슬리기는 하였지만, 생명주의와 反戰이념을 기초로 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수시간동안 영화를 봤던 내게 있어, 이건 완전한 反轉이었다. 별로 권할만한 작품은 아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멕시코혁명사

 

요즘 사람들의 삶을 이토록 팍팍하게 만들어 버린 "신자유주의"라는 녀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보다 먼저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된 라틴 아메리카에 관련된 책을 몇 권 구해서 읽고 있다. 그런데 책 속에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관련된 사례가 나올 때마다 이해가 곤란한 부분이 많아 그쪽과 관련된 재미있는 역사책을 먼저 찾아보던 도중 눈에 띄었던 책들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20세기초에 진행된 멕시코혁명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주제를 혁명의 각 주체세력들을 중심으로 각 사건의 원인, 전개과정 및 그 영향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는 '기사본말체'방식을 사용하여 정리하고 있다. 이는 필자가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일반인들에게 자칫 생소할 수 있는 주제와 배경 때문에 독자들이 쉬 흥미를 잃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때문에 1910~1940년이라는 긴 시간을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이 책은 그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쉽게 읽힐 수 있었던 듯 하다.

 

저자의 지적대로 멕시코의 근현대사 속에서 우리의 그것과 유사한 인물과 사건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수십년간 총과 칼로 집권한 냉혈한 독재자가 있고, 권력에서 배제되자 단순한 지배세력간의 교체를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우기는 웃지못할 과두 부르주아들이 있으며, 모두를 위한 진정한 정의와 평등을 외치며 피를 흘리다 죽어간 노동자, 농민들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란 사람과 관련된 일들이기에, 세상 어디에서 일어나는가만 다를 뿐 우리 모두 비슷한 경험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치 무협지를 읽듯 숨가쁘게 책장을 넘기며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들었던 대체적인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30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혁명과정동안 사람들이 당했을 죽음과 고통 때문에 가슴이 아팠고, 그러한 희생을 치르고도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버린  그 결과에 절망했다. 특히나 에밀리아노 싸빠따가 혁명의 동지랄 수도 있었을 까란사에게 암살당하는 장면에서 그랬다. 멕시코혁명의 전과정동안 혁명의 의미와 그 방향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수줍은 이상주의자' 에밀리아노 싸빠따.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이상은 7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그걸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라틴아메리카의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카탈로니아 찬가

 

이 책은 스페인내전에 대한 소설이라기 보다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 오웰은 스페인인들과 세계로부터 온 의용군들의 순수한 혁명적 열기, 스탈린의 배신과 이로 인한 혁명의 좌절을 자신이 의용군이 되어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1936년 7월 프랑코를 위시한 파시스트들이 인민전선 정부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키자 스페인의 좌익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총을 들고 이들을 막아낸다. 이에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스트 정권은 프랑코를 지원하고, 소련과 각국의 혁명적 좌익세력들은 스페인 인민전선을 지원하게 되면서 스페인 내전은 국제전의 성격으로 발전한다. 전쟁 초반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파시스트를 막아낸 스페인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은 혁명을 요구한다. 수백년간 내려온 지주와 부르주와세력을 몰아내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공장을 접수하여 진정한 사회주의혁명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소련의 안보를 보장받기를 원했던 스탈린은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되, 사회주의혁명은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른바 ‘일국사회주의노선’으로 알려진 스탈린주의는 혁명을 배반했던 것이다.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혁명세력들(POUM, CNT)과 스탈린의 조종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의 시가전 이후, POUM과 CNT, 그리고 의용군들은 “파시스트의 간첩”,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비밀경찰에게 끌려가 투옥되거나 총살당한다. 게다가 좌익탄압에 이용됐던 세력은 왕당파의 사설경호대와 다를바 없던 치안대(la guardia)와 비밀경찰이었다. 당시 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오웰도 겨우 스페인을 탈출하여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국제정세와 스페인내부의 사정에 따라 혁명노선은 달라질 수도 있다. 농업국가에 가까웠던 스페인의 산업적 특성,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면 러시아혁명때와 같이 간섭전쟁을 도발하겠다는 영국과 프랑스 등 자본주의국가들의 위협 등등을 감안했을 때, 스탈린의 선택이 현실적으로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만명의 국제의용군들과 스페인노동계급은 순수한 혁명적 열정 하나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파시스트들과 싸웠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했다. 40년이 넘은 딱총을 들고, 자신들이 직접 만든 수류탄 깡통을 들고 죽음의 공포와 추위, 굶주림과 맞서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그들의 등뒤에서 칼을 꽂았다. 이후 스페인은 결국, 파시스트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이 책을 읽고,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을 다시 봤다. 국제의용군으로 참전한 한 영국인의 눈을 통해 스페인내전을 그린 역작이다. 전사한 동료들을 땅에 묻은 의용군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에서, 그리고 스탈린주의자들의 군대가 의용군을 무장해제시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이 흘렀다. 현실 앞에서 그들의 순수한 혁명적 열정은 짓밟혔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들의 실패는 이후의 세대들에게 희생이란 무엇이고, 숭고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이후 시간이 되면 스페인내전이 유럽인들의 사고에 미친 영향에 대해 공부해 보고 싶다. 96년 겨울, 시간을 때우려고 “세이예스(dis-moi oui)”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나이든 남성 의사와 그 의사를 좋아하는 천방지축 십대 여자아이가 등장하는 통속적인 연애영화였다. 근데, 그 여자애의 할아버지로 스페인내전당시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그 사실을 평생 자랑스러워하는 고집불통의 노인이 나온다. 스페인내전이 “고집불통의 노인”으로 기억되는 건 어째 좀 씁쓸하다.


스페인내전을 다룬 영화로 "마리뽀사"와 "로르카"를 추천한다. "마리뽀사"는 나비를 뜻하는 스페인어로, 어린 아이 몬쵸의 성장영화인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옹호한 선생님을 빨갱이, 무신론자로 몰아야 했던 스페인의 비극을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한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그리고 있다. 스페인의 자연과 시적인 대사가 너무나 아름답다. "로르카"는 스페인내전 당시 의문사한 천재시인 로르카의 행적을 뒤쫓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영화로 앤디 가르시아의 오버가 약간 느끼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무리없이 잘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버마이주노동자 마웅저 씨

작년 8월부터 <만원계>라는 모임에 나가게 됐다. 버마-태국접경지역에서 버마정치범을 위해 일하는 현지 활동가(부찌氏)를 후원하는 조그만 모임인데, 한달에 만원씩을 내고 한달에 한번 정기모임을 갖는 그다지 큰 부담이 없는(?) 모임이다. 거기서 마웅저씨를 처음 만났다. 94년 한국에 들어왔다는데, 한국말이 참 유창해서 놀랐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씩 우리는 만났다.

 

한국내에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의 경제적인 생활의 문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모국의 민주화 문제같은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는 그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마웅저의 경우는 자신이 불법체류자라는 현행법적 지위에 있음에도, 아시아지역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주노동자문제, 버마의 민주화문제, 버마-태국국경지역의 난민촌문제 해결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활동가의 길을 걷고 있다.

 

벌써 5번이상 얼굴을 대했지만 아직 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인터넷 웹서핑을 하며 우연히 읽게 된 다음의 글을 보고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정도다. 그리고 전업활동가로 살아가겠다는 마웅저를 지원하기 위한 모임이 결성되었다는 사실도 최근에서야 알았다. 그걸 생각하면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의 글을 올린다.

 

=====================================================================================

*만원계 http://www.10usd.net

*마웅저를 지지하는 사람들 http://people.action.or.kr/zaw

 

 

1. 외국인 이주마웅저의 노동자 생활

1988년부터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학생활동가로 해왔던 저는 1994년10월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입국할 때 브로커를 통해서 비지니 비자로 큰 빚을 지고 들어왔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어느 아는 사람을 통해서 한 사출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야간/주간으로 공장에 열심히 일을 하면서 한국에 입국할 때 빌린 돈을 조금씩 갚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회사에 7개월째 일하고 있는 중에 공장이 말없이 이사가고 사장님이 우리 외국인들을 피해 도망갔습니다.그래서 그 회사에서 7개월 동안 야/추간 (주72시간)근무한 2달치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회사가 저희 외국인 노동자들의 월급을 주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사갈 때 저는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었고 한국말도 하지 못한 상태여서 갈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때 제가 가장 고민한 것은 한국에 입국할 때 빌린 돈과 높은 이자입니다. 저는 정신이 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이 하였습니다.

미얀마의 민주화 활동가인 저는 코리안 드림을 잘못 꿈꾸고 한국에 들어왔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버마의 민주화 문제 생각만 해왔던 저는 그때부터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열심히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후에 어느 미얀마 친구를 통해서 새로운 일 자리를 구했습니다.

그 새로운 회사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은 오전 8시30분부터 저녁 6시30분까지, 외국인 노동자들은 오전 8시30분부터 저녁 9시30분까지 일했습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저녁 6시30분 후에 근무하면 (특히) 초과 근무 수당이 받았습니다. 이 회사에서 근무하기 힘들고 장시간 노동이지만 좋은 한국인 노동자들을 만났고 그 선배들에게서 한국말, 한국문화를 많이 배웠습니다. 한국인과 외국인 관계에 있는 문제는 언어와 문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회사에서 저의 행복이 시작되었고 한국어 공부도 시작했습니다.

저는 미얀마에 있을 때 한국어 공부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맨 처음에 배운 말이 "안녕하세요"가 아니고 "빨리 빨리" 였습니다. 맨 처음에 회사에서 그 말이 하루에 여러 번 들었고 어디 갈 때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빨리 빨리 문화가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빨리 빨리 문화와 김치는 저한테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회사에서 저희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한 만큼 임금과 권리를 제대로 받고 싶어서 사장님에게 부탁하는데 안되지만 같이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사장님에게 이야기하며 100%는 안되었지만 얼마 정도 성공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으로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를 해결 운동 할 때 한국 국민과 한국 노동자들의 이해와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얀마 민주화 문제, 외국인 노동자 인권문제에 오랫동안 관여 해왔습니다. 97/98년 IMF 문제 있을 때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이 힘들고 1993년 9월 (외국인근로자고용등에관한법률)에 따라 지난해 11월17일부터 자진출국을 거부한 불법체류 10만명 넘는 외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간 것이 외국인 노동자들은 가장 힘듭니다.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쓰다버리는 소모품처럼 생각한다고 보았습니다. 불법체류자들을 단속하고 고국으로 보낼 것으로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완벽한 해결한 방식으로 생각했으며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9년 내내 회사에 열심히 근무를 해왔습니다만, 상여금, 퇴직금, (특히) 초과 근무 수당과 2달치 월급을 받지 못하였습니다만 다른 6-8개월 임금을 받았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산재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들, 치료와 보상을 받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친구들은 한국에 많이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온 이유가 대부분 고국에서 보다 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내국인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생각합니다만 그 외국인 노동자들의 마음속에는 또 하나 훤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사랑과 이해 입니다. 지금 한국 국민들이 마음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열려있지만 좀 더 크게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2. 국가의 인사말

가깝고도 먼 나라 버마, 버마라는 나라 이름이 여러분에게 생소해도 아웅산 수지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버마에는 많은 자랑거리가 있지만 저는 버마의 가장 큰 재산과 자랑은 아웅산 수지로 대표 할 수 있는 민주화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버마는 매우 가까운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씨가 대통령을 할 때 박스컵의 우승은 아시아의 축구 강국 버마와 한국의 몫이었습니다. 또한 전두환씨가 대통령을 할 때 아웅산 장군 묘소에서 있었던 폭파 사건으로 한국민들에게 강하게 인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아웅산 수지 여사는 민주화운동의 오랜 친구입니다. 버마는 한국과 비슷한 현대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세(영국, 일본)에 의한 침략과 점령, 독립, 군사독재, 민주화운동 등 매우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인들에게 버마는 너무 먼 나라입니다. 세계 최빈국, 불법체류자를 많이 보내는 나라로 인식되어 있지는 않은지…

군사독재가 시작되기 이전인 1948년부터 1962년까지 버마는 아시아에서 교육, 보건, 삶의 질에서 앞서가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1962년 군사독재가 들어선 이후 버마는 세계 최빈국이라는 멍에를 쓰게 되었습니다. 버마는 공식적으로 사회주의체제를 지향하고 있지만. 버마의 사회주의는 군사독재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특히 사회주의체제 이후 교육과 보건에 대한 많은 부분이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군사독재의 관심은 국민을,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보다는 철저히 군사독재만을 위한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 있어야 할 아이들은 군사독재에 의해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으며, 무료로 운영된다는 병원의 환자들은 낙후한 의료체제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부탁 드립니다. 버마는 먼 이국의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버마의 지식인들에게 한국은 아시아 민주화의 선배 나라이며, 친구의 나라입니다. 지금 버마에게 절실한 것은 국제적 관심과 연대 그리고 인도주의적 지원입니다.

3. 마웅저(Maung Zaw)의 인사말

한국의 광주 5·18민중항쟁 같은 버마의 8888항쟁(88년8월8일에 일어난 미얀마민중항쟁)때 저는 학생운동 활동가였습니다.

89년엔 선배, 90년엔 친구 두 명, 이후 매년 한 두 명씩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믿을만한 친구는 모두 체포되었고, 92년 이후는 저는 어떠한 활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얀마를 떠나서 자유롭게 활동 할 수 있게,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의 준비 끝에 한국에 갈 수 있는 비자를 얻었습니다. (당시 체포되었던 선배와 친구들을 태국, 미국, 미얀마(버마)에서 아직도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94년에 한국에 오게된 저는 다른 이주노동자들과 같은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불법체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민지위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의 있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 미얀마의 민주화 문제를 위해 활동하면서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을 방문했고, 미얀마의 민주화 문제 관심을 두고 활동하는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점차 제 생각은 조금씩 변화되었습니다.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군사독재에 대한 미움과 증오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그들을 몰아 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오래 기간 한국의 친구들을 통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국의 민주화라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많은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관심이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정치활동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아이들의 교육과 건강 그리고 인권과 평화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돈버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온 이유가 돈을 벌어 본국에 송금해 제 개인과 가족의 안위를 지키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랜 고민과 망설임 끝에 저는 제가 처음 한국이란 나라를 고민했던 시기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은 제가 미얀마로 돌아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준비중입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시민단체를 방문하고, 미얀마의 상황을 한국의 시민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태국·버마 국경지역에 아이들을 지원하는 모임이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글로 저를 다 설명 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관심과 애정으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글에서 이런 문구를 봤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갑니다’라는 글을 말입니다.

4. 한국과 외국인 노동자(이주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 땅에 들어와 일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80년대 말 정도입니다. 그 수가 점차 늘어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극에 달해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94년경입니다.

1994년에 산재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치료와 보상을 요구하며 농성 하였고, 이 농성을 시작으로 한국사회는 외국인 노동자의 존재에 대하여 미미하나마 시선을 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95년 1월 현대판 노예제도라고 일컬어지는 연수제도를 개선하여 연수생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는 네팔인 연수생들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연수제도: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라는 이름(명목)으로 네팔, 버마를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노동자를 데려오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외국인 기술연수생들은 기술을 배우기는 커녕 적은 임금으로 매일 어렵고 힘든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월급주세요" "여권주세요"

이 말들은 95년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농성을 할 때 울며 외쳤던 말입니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지역의 뜻을 모아 대략 1992년부터 상담소(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들이 속속 개설되었습니다.

그러나 상담소(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들이 문을 열고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권리보호에 나서고 있는 지금도 이주노동자가 처한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단지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유로 임금체불, 감금은 물론 폭행과 성희롱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외국인노동자 관련단체들이 현재는 전국적으로 대략 250여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지원단체의 활동 영역은 첫째, 각 종교 고유의 종교활동 둘째, 생활 문화 복지 지원활동 셋째, 인권향상 및 법적 제도적 개선을 통한 외국인 노동자 지위 개선을 위한 활동 넷째, 외국인 노동자 공동체 형성 및 노동조합 조직 지원 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세계에는 약 2억 명의 이주민이 고향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1억6천만 명 이상은 세계 각국의 3D(dangerous, dirty, difficult) 업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들입니다. 한국 땅에서도 약 40만 명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은 3D 업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12월18일은 UN이 정한 '세계 이주민의 날'입니다. 1990년 유엔총회가 제69차 본회의에서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이하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날을 기념하여 2000년부터 제정된 날 입니다. '이주노동자 국제협약'은 채택된 지 13년이 지난 올해, 기본 비준국 수인 20개국을 넘어 국제사회에서 정식으로 발효되었습니다. 이 협약은 이주노동자들과 그의 가족들을 위한 생존권 보장, 가혹행위 금지, 강제노동 금지, 생각과 표현의 자유, 법에 의해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 사생활의 권리, 노동조건, 사회 보장, 의료서비스에 있어 고용국의 국민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 등을 포괄적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법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기본적 인권을 동등하게 누려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있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의 인권은 심하게 침해받고 있습니다.

2002년 1월 21일 중앙일보에 외국인 의문사 수사 '어물쩍'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미얀마인 묘테테인(29)의 죽음에 대한 보도였는데 이처럼 전국의 외국인 노동자 집 등에 접수된 사인 규명 요구 사건만도 2000년 6월부터 2002년1월까지 70여건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이루어 좋은 추억을 갖고 귀국할 수 있으며, 외국인 노동자들과 한국 사회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현재 기술연수생 제도를 철폐하고, 노동허가제를 실시하는데, 한국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한 해결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고용허가제는 고용되어 있는 직장을 외국인 노동자 자유 의지에 따라 옮기지 못하는 등 문제가 있어 완벽한 제도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위 협약에 비준은 커녕 아직도 현대판 노예제라고 일컫는 산업기술연수생제도와 편법적으로 운영되는 현지법인 연수생제도를 버젓이 운영하고 근로자 신분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용허가제는 2004년 8월부터 실시 예정입니다. 1993년9월 (외국인 근로자고용등에관한법률)에 따라 4년 이상 10만 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었고, 법무부는 지난해 11월17일부터 자진출국을 거부한 불법체류 10만명 넘는 외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간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10만 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숨어살고 있거나, 강제출국 정책을 반대하며 농성장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강제추방을 당하기보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입니다.

지난해 11월11일에 성남에서 스리랑카 노동자 치란 다라까 자살부터 김포, 인천, 수원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자살과 죽음이 2003년 12월까지 8명에 이르렀습니다.

1000여명이 외국인 노동자들이 몇 개월 내내 농성하고 있습니다.

강제추방 중단하라!,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하라!, 연수제도 철폐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하라!,노동비자 발급하라!,
연행동지 석방하라! 등 농성투쟁단 결의문에는 이들의 절규가 담겨 있습니다.

집회, 단식농성등 여러 활동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열심히 하지만 지금까지 정부의 정책은 옳게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농성, 집회 등 할 때마다 외국인 노동자의 지원단체들과 한국 국민,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고 같이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문제는 남에 인권 문제 아니며 모든 사람들의 인권문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이 계속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정부의 정책은 올바르게 하고 한국 땅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 땅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드림을 이루어 좋은 추억을 갖고 귀국할 수 있길 바랍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亂-구로사와 아키라

ㅇ 줄거리 :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본 시대극으로 옮긴 작품. 한 늙은 영주가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눠주기로 결심한다.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은 그 얘기를 듣고 매우 기뻐하지만 막내는 그의 형들이 서로 싸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70대의 구로사와가 만든 <란>은 그 스스로 자신의 남아 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고 말한 그런 영화이다. 여기서 구로사와는 우선 스크린 위에 장대한 비주얼을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들였고 그 결과 표현주의적 작품에 가깝다고 할 만큼 시각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다른 한편으로 <란>은 하늘에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 조건을 내려다보려는 야심찬 시도를 행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출처:서울아트시네마 홈피)

 

ㅇ 평 : 나에게 '세익스피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애틋한 감정을 지우기는 어려운데, 그 이유는 무엇이든 읽으며 공부하는 걸 좋아한 어머니였지만 당시 어려운 집안 때문에 고등학교만으로 배움의 기회를 접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야 형제분들 모두가 그러셨으니 그러려니 말씀하시지만 말이다.

 

내가 어릴 적, 책 외판원 아저씨들이 우리 동네에 참 많이도 드나들었다. 물론 우리집 앞에서도 지나치지 않고 초인종을 눌렀는데, 그 책값이 무척 비쌌다. 당신이 책을 많이 보지 못하고 자랐다는 후회 때문이었는지 어머니는 자식들이 책을, 아니 무엇이든 읽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 외판원 아저씨가 내미는 카탈로그를 바라보면서 참 많이도 망설이셨을 것이다. 당신의 어린시절을 뒤돌아보면,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는 사줘야겠는데, 책값이 너무 비싸니... 당시 어렸던 나조차 어머니의 얼굴에 가득찬 망설임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쉬웠다. 그러던 중, 거듭 우리집 공략에 실패하던 한 외판원 아저씨가 머리를 쓴 것이 무조건 책을 가지고 우리집에 찾아오는 거였다. 자기가 책을 팔러 왔는데, 도저히 책들이 무거워 다시 가져가기가 어려우니까 일주일 후 자기가 여기에 다시 올 때까지 맡아달라고 했다. 그때 두고 간 것이 삼성출판사에서 펴낸 세계문학전집 50권짜리였는데, 지금 생각하기에도 그 빼빼 마른 아저씨가 그걸 혼자서 어떻게 날랐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참 고생했을 것 같은데... 암튼 일주일동안 어린 우리들은 밤새도록 책을 몇권씩 읽어댔고,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모종의 결단을 내려 일주일후 아저씨에게 책 구입의사를 밝히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어린 우리들만 그 책을 읽었던 게 아니었다. 당시 어머니도 몇권씩 빼서 같이 책을 읽곤 했는데, 지금 여렴풋이 기억나는 어머니의 모습은 '세익스피어 이야기'를 읽는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세익스피어'라는 단어를 들으면 책을 읽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거 이야기가 샜다. 그것도 옆길로 많이도 샜다.

영화를 보기전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각색한 작품이란 말을 듣는 순간 김이 팍 샜다. 줄거리가 너무 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이 영화는 세익스피어가 쓴 리어왕의 플롯을 충실히 따랐다. 결말까지 내 예상과 정확히 드러맞았다. 세 딸들이라는 소재가 세 아들들로 바뀌고, 중간중간에 일본적인 소재를 차용한 정도만 다르다고 할까? 그렇지만, 3시간여의 영화를 보면서 왜 세익스피어라는 작가가 널리 추앙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릴 적에 세익스피어를 읽었지만, 세익스피어는 6살도 안 된, 그것도 남자아이가 완전히 이해할만한 작가는 아니었다(요즘 나는 여자아이가 조숙하다는 말을 처절하게 인식하며 살고있다). 이 영화을 통해 다시 보게 된 세익스피어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세계의 비정함과 잔인함, 무모한 사랑, 그리고 탐욕과 배신, 인생의 허망함이 총체적으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극 중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의상과 건축물, 당대의 전쟁씬도 굉장한 볼거리다. 현재의 일본의상은 중국 당나라 시대 의복문화가 화석화된 것이라고 하는데, 중심부에서 변경지역으로 갈수록 종교나 문화가 도그마화 된다는 것의 실례라고는 하나 너무나 아름다웠다. 물론 입는 사람들은 고역이었겠지만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만철

 

이 책은 1906년 러일전쟁 이후부터 45년 일본의 패전에 이르는 기간동안의 “남만주철도회사(이하 만철)”의 역사를 다룬다. 저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는 만철은 일본제국(식민지역을 포함하여)을 경영하기 위한 두뇌집단이었으며, 그 영향은 패전이후 관료주도형 통제경제(이른바 1940년체제)를 통한 일본의 경제적 부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러일전쟁의 전리품이었던 만철을 식민지배를 위한 거대기구로서 위치지은 인물은, 고다마 겐타로와 고토 심페이였다. 이들은 만주나 조선보다 일찍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대만에 확고한 식민지배의 기반을 다져 놓았던 인물이었다.


만주의 주재배작물인 대두와, 그 탄맥이 너무나 거대한 나머지 획득초반 채굴방법을 결정하는데만도 엄청난 시간을 끌었던 푸순탄광, 그리고 유럽을 향해 열린 문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이 셋만 놓고 보아도 만주는 일본으로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요충지였던 셈이며, 이의 효율적인 관리체제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식민지배를 위한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만철은 그 내부에 자원탐사, 경제, 산업개발, 치안, 안보 등의 총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지닌 두뇌집단을 필요로 하였고, 이는 결국 만철조사부의 창설로 이어지게 되며, 만주사변이후 관동군, 만주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 속에 일본의 식민지배를 위한 전문연구기구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저자는 좁은 지면에서도 만철 속의 인맥관계에 지나치리만큼 많은 공간을 할애하고 있는데, 전후 일본 국철총재로 신칸센의 건설을 추진했던 소고 신지, 수상을 역임하게 되는 기시 노부스케, 고토 심페이의 조카이며 한일회담당시 외상을 지냈던 시이나 에쓰사부로 등 만주그룹이 전후 추진했던 정책들이 만주에서의 전시(戰時) 경제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논증하고 있다.(박정희, 서영훈, 정일권 등 남한내 만주인맥들에 관해서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보라)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두가지 점이 흥미롭고 놀라웠다. 첫째는, 당시 오가미 스에히로 등 맑시즘에 경도된 일군의 이단적 경제학파들이 일본본토를 떠나 만철조사부에서 이른바 ‘만철 마르크스주의’를 꽃피워 나름의 경제정책으로 입안시켰으며, 이것이 전후 일본의 관료주도형 통제경제체제(1940년체제)를 확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공산주의 이후의 생산양식이나 사회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경제연구는 자본주의를 분석하여 그 붕괴의 필연성을 밝히는 것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현실사회주의국가들에서 취했던 경제정책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에 가깝다라는 주장이 더욱 타당성을 얻는다. 차문석의 “반노동의 유토피아-20세기 산업주의에 굴복한 사회주의”에서 소련의 경제정책은 다름아닌 1차대전시기 독일군부에 의한 통제경제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후발 현실사회주의국가들도 동일한 경로를 밟았다. 결국 지금까지 존재하며 서로 죽일 듯 체제경쟁을 해왔던 현실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그 본류는 동일하다는 것이고, 완전경쟁에 의한 laissez-faire는 미시경제학교과서에나 존재하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일본인들의 치밀한 기록의 문화다. 만주국 시절 일본이 남긴 만주관련 자료들은 그 양의 방대함이나 질의 치밀함을 놓고 보더라도 그것을 능가하는 사료를 찾을 수는 없다는 말을 예전 근대 동아시아관련 수업을 수강하며 들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도 그 실례를 찾을 수 있는데, 만철 경제조사회가 개편되어 산업부가 되기 전 4년 반 동안에 1,882건의 조사 업적을 정리해 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술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연간 400권 이상, 한달에 30권 이상, 즉 하루에 한권 이상의 출판물들이 인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의 피땀 위에 그들만의 백년왕국을 일구기 위한 몸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들의 열정과 노력이 너무나 가상하게 생각되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책은 분량이 적어 읽는데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지만, 저자의 의도대로 당시 만철이라는 방대한 조직을 여러 시점을 통해 바라보려 했기 때문에 언뜻 책내용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며, 당시 만주 및 일본본토에 대한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이는 쉬 흥미를 잃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또한, 저자가 나름대로 당시 갖은 착취와 핍박을 받았던 재만 중국인, 한국인들에 대한 유감을 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제국주의와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이 간간이 엿보여 일본인 저자의 한계가 느껴지기도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상실의 시대

 

최근에 짬이 나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고 있다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하루키를 좋아했다. 그의 소설 중에 처음으로 접했던 것이 상실의 시대였고, 그때 받았던 충격은 상당했던 듯하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동아리에는 나보다 4살 위의 매력적인 선배누나가 있었는데, 그가 내게 권해주었던 소설이 바로 ‘상실의 시대’였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이 책을 권했던 그도 다소간 감정의 과잉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만큼 하루키소설의 문체와 분위기는 젊은 층에게 강렬하게 다가올 이유가 충분했다. 그 후로 하루키의 소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의 소설은 여름날 밤 원샷으로 읽는 게 제 맛인 까닭에, 대학교 1학년의 여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밤에는 그의 책을 읽었고, 낮에는 커튼을 치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은 하루키의 소설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태엽감는 새, 댄스댄스댄스, 하루키 단편선 등등

 

그의 소설에는 항상 허무함이라는 냄새가 깊게 배어있다. 그의 소설 한켠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찾아냈던 기억이 있을만큼 그의 소설에서는 항상 죽음과 허무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인간은 그가 겪었던 시공간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기 마련인지라, 6-70년대 일본의 전공투는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전공투는 미일안보조약문제가 발단이 되어 6-70년대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구었으나, 너무나 어이없는 한편의 드라마로 끝나버린 극단적인 방식의 일본 학생운동으로 68년 세계혁명의 일부이기도 했다. 당시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생이었던 하루키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이 때문에 늦깍이로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내 전공투세대의 위치다. 유럽의 68혁명세대가 정치, 교육, 문화계에 대거 진출하여 극단적인 냉전대립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개량하는, 체제내의 새로운 목소리이자 활력으로 작용한데 반해, 일본의 전공투세대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를 추종하던 戰前세대와 풍요로운 물질적 성장을 기반으로 한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들인 신인류세대 사이에 끼여 제도권에 발을 붙일 수 없이 떠도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2차대전과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의 부재, 인간성을 말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맹종은 결과적으로 80년대의 일본을 극단적인 우경화의 길로 들어서게끔 만들었다. 하루키의 경험은 이러한 일본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젊은 시절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이상과는 정반대의 길로 들어선 일본의 모습 앞에 그는 한없는 상실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는 그의 문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나는 위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나라에 번역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기묘하지만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고등학생시절 친구인 기즈키의 죽음 이후, 세상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혼자서 수업을 듣고, 혼자서 식사를 하고, 어디서건 혼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등 그는 무인도에 떨어뜨려 놓아도 혼자서 능히 살아갈 수 있을 법한 自足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와타나베가 그리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는 미도리에게 “봄날의 곰만큼 네가 좋아”라는 기상천외한 고백을 할 줄 알며, 주변의 매혹적인 사람들(레이코여사, 하쓰미, 나가사와 등)을 자신에게 끌어당길 수 있을만큼의 매력을 지녔다. 그가 혼자인 이유는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일정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은 생명체이고, 생명체에게 죽음이란 어떤 위대한 사상이나 신념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을만큼 절대적인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無인 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정해진 만큼의 시간을 허가받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다. 젊은 시절, 신념의 좌절과 허무함을 맛보았던 그였기에, 인간의 본질에 대해 천착했고, 결국 그는 “죽음앞에 선 인간”이라는 무오류의 명제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허무함에 빠진 주인공의 생존의 증거는 욕망이다. 정확히 말하면 섹스(!)에 대한 욕망. 중간중간에 섹스장면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서술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하루키의 다른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주인공의 페니스를 가리키며 당신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의 결말부분, 레이코 여사와의 포만감이 깃든 몇 번의 섹스 이후, 와타나베는 빗속의 공중전화에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미도리는 어디냐고 계속해서 묻지만,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못한 채 흐느낄 뿐이다. 난 이 장면에서 마치 내 일인 것처럼 너무나 기뻤다. 사랑과 애정이 깃든 섹스를 통해, 와타나베는 비로소 자신이 궁극적인 無가 아니라, 욕망을 지닌 주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고, 자신의 둘레에 쳐둔 벽을 허물고 능동적인 소통을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러나 예전만큼은 아니다. 내 건방진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난 하루키가 동시대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주제의식)는, 상실의 시대 이후 더 나아간 게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저 소설의 플롯과 등장인물들을 약간 변형시키고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시킨 것 밖에는 없지 않나 싶다. 오히려 과장된 그의 기교가 독자들로 하여금 주제를 읽어내는데 더 난해함을 던져주고 있지 않은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씨는 어느 글에서 “이성이 사라지면 소녀 취향만 남는다”라는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고 썼다. 나는 위의 경구와 하루키를 동시에 떠올리며 무릎을 쳤다. 어제 친구가 “해변의 카프카”를 빌려주기로 했다. 그 책 속에서 하루키의 더 나은 생각의 단편들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 박천홍

 

‘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이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근대성이라는 것이 내면화되었는지에 관한 연구서다. 이 책은 근대문명 그 자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철도가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을 당시의 공문서, 신문기사, 문학작품 등의 사료를 통해 분석함으로써 근대민족의식, 제국주의, 공간, 시간, 풍속의 변화를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저자인 박천홍이 제시하는 자료는 책 말미의 참고문헌목록만 보더라도 방대하며, 곳곳의 글의 문맥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인용된 사료는 명쾌하고도 적확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이 책을 준비했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책의 곳곳에서 저자의 고민과 고된 작업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상당히 왜곡된 우리 근대화 과정의 문제다. 저자는 근대화과정에서 “서구의 근대화가 자신들의 패권을 지구적으로 관철시키는 과정이었다면, 비서구권에서는 타율적으로 자본주의 세계로 편입되는 고난의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당시의 조선은 서구의 패권주의와 일본제국주의라는 이중적인 억압을 겪어야만 했기에 더욱 고난에 찬 근대화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근대화는 전근대사회의 잔재를 쓸어버리고 근대적 합리성(자본의 증식이라는 절대적인 목적을 위한 합리성)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정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서구의 경우, 자신들의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과거와의 끈을 통해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 반해, 조선의 경우는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전근대사회와의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원인이 되었다.

 

증기기관이라는 동력은 대량생산을 위한 생산력의 집적(대공장제도)을 가능하게 했으며, 철도는 상품과 원료, 기술을 놀라운 속도로 실어나르며, 전지구를 단일한 시장으로 만들었고 세계를 자본주의적인 분업체계로 재편했다. 이는 구래의 농촌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고, 농촌에서 밀려난 대규모의 인구는 도시빈민으로서 자본주의적 질서를 유지하는 값싼 노동력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는 부르주와지의 주도세력으로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가상적 실체인 민족과 근대국민국가의 성립, 국민교육제도와 징병제, 신문, 소설과 같은 서사문학의 유행, 표준시(mean time)제도의 확립, 봉건적 신분제의 철폐, 근대도시의 성립, 박람회 등을 통해 새로운 착취구조를 은폐하고 그들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다시 한번 왜곡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철도노선의 건설을 위해 민중은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고, 민중의 생산물은 철저히 싼 값으로 수탈당해야 했으며, 철도건설에서 구도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일본인 주도의 새로운 식민도시를 건설하여 전통사회와의 단절을 의도하였으며, 빈부에 따른 도시공간의 분할이 조선인과 일본인이라는 국적 구분에 의해 다시 한번 분할되는 차별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저자는 근대성에 관한 수많은 문헌을 통해 우리의 근대화 과정의 문제를 치밀하게 논증한다. 근대적 시간을 이야기하기 위해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가 등장하기도 하고, 철도의 삶과 죽음의 갈림길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이인직의 ‘은세계’가 나오기도 하며, 근대의 성격을 논하기 위해 베네딕트 앤더슨, 칼 맑스,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라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 우리의 정체성과 근대와 관련한 새로운 저작을 기대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마지막 수업 - 니콜라 필리베르(2002)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의 산골분교를 찍은 니콜라 필리베르의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에는 천진난만한 여남은 아이들과 20여년동안 이 마을에서만 근무해 온 조르쥬 로페즈 선생이 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프랑스인들의 교육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시골마을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있어 교육이란 행복한 삶을 살아나가기 위한 그야말로 기본적인 덕목을 배우는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으로부터 숫자를 세는 법, 글자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만, 그 외에도 함께 생활하는 법과 서로 이해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의 중반, 감독은 로페즈 선생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짧막한 인터뷰를 한다. 로페즈라는 姓이 말해주듯이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에서 넘어온 이민1세대였고, 이민1세대들의 삶이 으례 그렇듯이 선생의 아버지는 공사판을 떠돌다 가난한 소작인으로 이 지방에 정착했다. 왜 선생님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로페즈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어릴 적부터 동무들과 학교놀이를 하면 자신이 선생님역을 도맡아 했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고 말이다. 선생의 부모도 아들이 교사가 되는 것이 일종의 신분의 상승이라고 간주해서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단다.

로페즈는 말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이 필요한 일이지만, 나는 이 일을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그 말마따나 다큐멘터리 내내 로페즈선생과 아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지리하게도 길게 나온다. 내가 선생님과 일상적으로 저렇게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기억을 해보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내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로페즈 선생은 손을 씻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손을 씻어야 하는 이유를 납득시키려 하고, 서로 싸움을 한 아이들에게도 왜 싸웠는지 왜 싸움이 나쁜지,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지리하게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키우는데 따른 고민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길게 선생님과 나눈다. 이럴 때 보면 그들은 선생과 학부모가 아니라, 아이들을 양육하며 비슷한 고민을 하고 살아가는 친구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꼬맹이들에게나 중학생이 되기 직전의 아이들에게나 급우들은 경쟁에서 이겨 짓밟아야하는 대상이 아닌 더불어 살아야 할 친구들로 거듭 인식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열한 경쟁, 명령과 불복종에 대한 폭력이 상시화된 공간이 학교라고 생각했던 내게 프랑스의 학교는 너무나도 생경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영화의 마지막, 로페즈선생의 마지막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이다.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입을 맞추고 작별인사를 한다. 아이들 하나하나와 진심어린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노선생은 마침내 눈물을 흘린다.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영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
 미디어

기관지노힘  제47호
김명준 (노동자의 힘 회원)

p54_1.jpg p54_1.jpg(67 KB)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


2003, 아일랜드, 74분, 킴 바틀리/돈챠 오브리에인
2003, Ireland, 74min, Kim Bartley and Donncha 'Briain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래, 바꿀 수는 있다. 다만 바꿔내기가 쉽지 않고, 지켜내기란 더욱 어려울 뿐이다. 미국의 텃밭 라틴 아메리카에서 베네수엘라 민중들은 바로 지금 그 힘겨운 변혁의 시기를 거치고 있다. 지난 제7회 서울 국제 노동영화제에서 소개된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 베네수엘라를 무대로 차베스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혁명과 반혁명, 정치투쟁과 미디어, 군부와 계급투쟁의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하는 다큐멘터리다. (필자의 시각으로는) 작년 우리나라에 소개된 어떤 영화보다도 역동적이며 극적이다.
사실, 영화의 출발은 원래 소박한 것이었다. 아일랜드의 두 다큐멘터리 감독은 차베스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에 대한 인물 다큐멘터리를 찍을 생각으로 베네수엘라로 향했다. 하지만 2002년 4월11일, 우연히도 터져 버린 쿠데타와 그에 대항한 민중의 봉기는 작품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꿔버렸으며, 쿠데타 직전의 7개월과 쿠데타 이후 48시간만에 이루어진 드라마틱한 복권과정은 혁명의 연대기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상업방송이 총격사건 현장의 상황을 철저하게 왜곡보도하며 기득권을 대변하는 장면, 쿠데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직후 대통령 관저에 모여있을 때 대통령궁 경호를 맡은 특수부대원들이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총부리를 돌리는 장면 등은 정말 충격적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세계 각국에서 이구동성으로 격찬을 받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영화제작자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서 만들어낸 모범적인 작품이며, 각각의 시퀀스들은 강렬한 긴장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시네마 베리떼이다."(버라이어티, 2003년 7월) 그 결과,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작품은 TV에 나오지 않았던 혁명을 TV로 진출시키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지금까지 이 작품은 급진적 색채가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치고는 보기 드물게도 BBC, ZDF(독일), Arte(프랑스/독일), NPS(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의 주류 방송 채널에서 방영되었으며, 베네수엘라 현지에서는 올해 4월에 상영되었다.
하지만, 이 예기치 않은 성공은 바로 그 성공 때문에 격렬한 반발과 증오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차베스의 변혁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과 그 동조자들은 이 작품을 묻어버리기 위해 전세계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며, 그 압력은 이메일의 발송 정도에 그치지 않고 있다. 얼마 전 캐나다에서 있었던 앰네스티 영화제에서 이 작품은 상영작의 하나로 선정되었다가 영화제 직전 갑작스럽게 최종 상영작 명단에서 탈락되었다. 반대파들은 이 상영 취소가 자신들의 비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환호했지만,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상영 프로그램을 확정한 이후, 앰네스티 본부는 베네수엘라의 앰네스티 지부로부터 심각한 내용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것은, 만일 이 작품이 상영될 경우 베네수엘라 앰네스티 지부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격렬한 투쟁이 진행중인 - 그래서 차베스 정부의 평화적인 대응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있는 - 베네수엘라에서 이 협박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였고, 결국 앰네스티는 오랜 고민 끝에 감독의 양해를 구하고 상영을 취소하기에 이른다.
정말, 혁명이 TV에 나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진행중인 혁명이라면 더욱 그렇다. 격렬한 사회적 격변기를 담아낸 작품은 그것이 담아내는 대상만큼이나 격렬한 투쟁의 한가운데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는 분명 전쟁터이다.
차베스 정부도,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민중도 바로 그런 현실인식에 기초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수개월 전 차베스 정부는 3백만 달러를 공동체 미디어에 대한 지원금으로 내놓았다. (사실, 쿠데타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베네주엘라의 독립 매체인 공동체 TV는 큰 역할을 했고, 당시 공동체 TV가 기록한 화면들은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유력한 대안적 매체인 인터넷을 활용한 비상업적 미디어의 활동도 서서히 힘을 얻어가고 있다.
과연 이러한 노력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보수파들의 쿠데타 시도와 일상적인 사보타지를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힘들다. 다만, 미디어가 얼마나 사회적 변혁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그러기에 미디어에 대한 총체적인 전략과 실질적인 투자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는 입증한다.
덧붙여 또 한가지 중요한 초점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한국의 미디어 운동이 어떻게 베네수엘라로부터 교훈을 얻고, 거꾸로 지난 20여 년의 우리 경험에 기초해서 어떤 비판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을지, 그래서 그 과정에서 어떻게 국제적 연대를 발전시킬 것인지의 문제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한 나라에서 고립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적 변혁이 얼마나 쉽게 붕괴되고 심지어 역사에서 지워지기까지 하는지, 우리는 지난 20세기 내내 지겹도록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 추신: 한가지 아쉬운 점은 아직 이 작품이 국내에서 배급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면 1월31일 서울 광화문의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저녁 6시에 개최되는 서울국제노동영화제 첫 번째 월례 정기 상영회가, 한국에서 이 작품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박스))

감독: 킴 바틀리 / 돈챠 오브리에인
킴 바틀리는 주로 아프리카와 남미의 위기 혹은 갈등 상황을 소재로 국제기구들을 위해 단편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여성 감독이다. 돈챠 오브리에인은 최근 1년여에 걸쳐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에 참여한 세 명의 청년들을 소재로 한 작품 <신학교>를 완성한 바 있다. 그는 최근 아일랜드 출신의 극지 탐험가 톰 크린을 소재로 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베네주엘라의 혁명과 반혁명
세계 4위의 석유수출국이며 미국의 주요 석유수입국 중 하나인 베네수엘라에서,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우고 차베스는 부정부패를 종식시키고 국민의 80%에 달하는 빈곤층에게 석유 이익을 재분배할 것을 약속했다. 그의 약속은 기득권층과 관료적 노조집단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했고 그 결과 차베스는 대통령이 된 첫날부터 베네수엘라 내외로부터 강력한 적들을 직면하게 된다. 영화 속에 담겨진 쿠데타는 그러한 기득권층의 가장 노골적인 도발이었고, 차베스의 복귀는 민중의 반격의 결과였다. (보다 자세한 정치적 분석은 원영수의 글을 참조하기 바람: 노동자의 힘 2호, 6호, 22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