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8명의 여인들 - 프랑스와 오종(2002)

 

아름다운 저택에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들, 주인공들의 심리와 성격에 걸맞는 멋진 의상들, 중간중간 삽입된 유머러스한 뮤지컬 뿐만 아니라 그 주제면에서도 공감가는 영화였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진정하고도 영원한 사랑을 희구하며 살아갑니다. 세월이 흘러가도 시간의 떼를 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주고 받기를 원하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명 우리 모두가 애초부터 서로간의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완전한' 타인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어찌 보면 사랑은 외로움을 천형으로 타고 난 인간들로 하여금 주어진 현실을 살아가게끔 만드는 '잠깐동안의 마약'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의 행위들이 모여 '문명'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어져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에서 표면적인 피해자로 묘사되고 있는 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이지요. 사랑하는 아니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대상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심한 배신과 모멸을 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8명의 여인들도 모두 같은 피해자임이 밝혀집니다. 주인공들 모두 타인에게 일방적인 사랑과 애정을 보내지만 결국 그것이 쌍방향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거나, 둘만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색, 탈색되고 종국에는 자학에 빠져들기도 하지요. 등장인물들 중 그러한 진실(?)을 알고있는 몇몇은 새가 나무열매를 찾아 이 나무 저 나무를 찾아다니듯, 이기적인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상대적(!)인 사랑의 대상을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영화의 중반 흑인하녀 샤넬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노래의 가사내용 하나하나가 와닿을 때마다 너무나 가슴이 시리고 허무하기도 했습니다. 외로워서 사랑할 대상을 찾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집착할 무언가(종교, 돈 등등)를 찾는다는 내용. "외로워서 사랑을 찾고, 외로워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 역시 외로움을 느낄"수 밖에 없는 현실... 이런 것이 인생일까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송환

 
정말 오래간만에 영화관에 갔던 것 같다. 금요일 점심시간에 영화표를 예매해서 퇴근하고 난 뒤 곧장 씨네큐브에 갔다. 가는 길 광화문 동화빌딩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탄핵반대집회 때문이었다. 가는 길에 시커먼 옷을 입은 한 백발 아저씨가 유인물 박스를 어깨에 지고 간다. 지나치고 보니 명계남이었다. 이야 딴나라당, 잔민당, 딴민련 꼴통들 때문에 사람들 참 고생이 많다. 난 군대에서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고 당시의 말을 잘 하지도 않지만, 군대에서 들었던 한가지 말만은 퍼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능한 간부는 적보다 무섭다." 수구 꼴통들은 제발 여의도에서 삽질하지 말고, 빨리 지구를 떠났으면 싶다.
 

이 영화는 다큐집단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이 12년간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따라다니면서 찍은 필름으로 만들어졌다. 무거운 주제가 12년간의 필름속에 녹아 있는만큼 무거운 분위기를 예상했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되니 2시간이라는 시간은 의외로 빨리 흘러갔다. 간첩이라 불렸던 이들은 영화초반 감독의 나레이션대로 그리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월에 흔적과도 같은 깊이 패인 주름만큼이나 삶의 고단함을 간직한 폭싹 늙은 노인에 불과했다. 이런 사람들을 머릿속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만으로 30여년간 감금한다는 게 과연 법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건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었다. 분단 이후, 남북한 모두 수천명의 공작원을 남파 혹은 북파했으나, 그들의 실체는 모두 당국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부인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이렇게 실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도소에 있는 수십년 동안 전향공작이라는 이름의 갖은 고문이 행해졌고 전향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국자들에 의해 비전향이 아닌 '미전향 장기수'로 불렸다. 이 단어에서 공안당국자들은 그들이 언젠가는 전향을 할 거라는 자신감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문과 감금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히 사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적인 자존심 때문이었다. 전향공작이나 고문을 가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게만큼은 절대로 굴복할 수는 없다는 자존심이 전향서에 사인하는 것을 막았다는 거다.

 

 

등장인물들 중에서 유난히 정이 가는 사람은 조창손 할아버지였다. 나는 그의 인격적인 모습에 끌렸다. 평소 말이 별로 없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면서, 생명을 사랑하고 한없이 겸손한 그의 모습에서 인격적인 완성이랄까 그런 것을 느꼈다. 취로사업에 나가 청소를 하면서 조창손 할아버지는 쉬는 시간에도 쉬지를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내가 쉬면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 늘쟎아. 내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 줄어드니까 이거 얼마나 좋은 거야?"라고 답했다.

 

할아버지들은 교도소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교도소 밖의 생활도 이들에게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십년의 감옥생활에서 얻은 지병으로 항상 몸은 불편했고, 자신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돈은 스스로 벌어야 했으니 말이다. 이들은 취로사업이라도 할 수 있음을 고맙게 여겼다. 할아버지들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조그만 일에 토라지기도 하고 서로 장난도 치고 아이스크림을 맛나게 먹기도 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들과 같았다. 이런 사람들이 뭐가 두려워서 30여년을 가두어 두었을까?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2001년에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으로 송환된다. 북으로 송환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강제전향이력 때문에 송환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송환된 이후라도 남과 북을 자유로이 오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현재로선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송환이 결정되자 납북피해자 단체에서 이들을 찾아오는 장면이 있었다. 분단과 냉전의 피해자인 그들 중 일부는 격한 감정을 들이밀며 송환반대를 외치기도 했고 납북자들과 연락을 부탁하기도 했지만,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납북이란 없다며 납북자체를 부인했다. 이북체제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거의 광신에 가까웠다. 그들은 50-60년대 북한을 떠나온 사람이었고 기본적으로 자신의 체제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로 하여금 감정적으로 북한 체제에 찬동하도록 만든 것은 아마도 남한에서의 야만적인 수감생활이었을 것이다. 야만은 또다른 야만을 낳는다. 납북자 가족들의 격한 감정표출과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집단 히스테리는 엄연히 분단과 냉전이라는 역사적 실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단순한 이성으로 무자르듯이 평가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실재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략적으로 이용해 먹는 놈들은 "무자르듯 평가한 후 몇배로 두들겨 맞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과 북한으로 간 할아버지들이 다시 자유로이 만날 그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반지의 제왕

 

스뻭따끌한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덕에 내 취향과는 맞지 않은 영화를 연거푸 2탄이나 보았다. 이번에는 장장 3시간 반의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보지 않으려고 했으나, 소개팅女의 소망에 이끌려 3탄도 봤다. 영화보구나서 3시간 반동안 고문당하고 나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스펙터클, 과감한 액션, 실사와 맞먹는 CG효과.. 모두 좋다. 하지만 그 지리하게 긴 시간동안 필연성없는 폭력에 시달리고 나면 "도대체 쟤들은 왜 저렇게 싸우지?"라는 물음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머, 서양의 중세에 대해 잘 모르지만, 서양의 중세 신화가 현재의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기껏해야 현실로부터의 도피? 하물며 프로도를 위해 헌신하는 샘, 그리고 왕들과 영웅들을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아랫것들'을 보며 이 시대의 "자발적인 복종"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 봤다. 이 영화의 원작인 반지전쟁이 2차대전이전, 그러니까 귀족과 평민으로 대표되는 영국 구체제의 신분질서가 어느 정도 남아 있던 시절에 씌여졌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범상치 않은 '윗것'을 위해 희생을 감내하는 것이 '아랫것들'의 아름다운 의무라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스펙터클을 가장한 영화가 바로 반지의제왕이 아닐까.

 

게다가 반지의제왕에서의 곤도르의 섭정은 거의 광인 수준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곤도르를 다스렸던 이실도루의 후손 아라곤왕이 돌아오면서 악의 세력은 물러가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 얼마나 웃긴 혈통주의인가? 혈통에 의한 왕위의 계승... 삼성그룹 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그룹승계는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혈통에 의한 왕위의 계승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는 그들에겐 왕손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요정을 아내로 맞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근대이전의 서구이야기가 오히려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인기를 끄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고스포드파크 등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구귀족층은 더이상 시혜적인 동정조차 베풀지 않는 쓰레기일 뿐이다. 그러나 모리카오루의 엠마나 기타 메이드류 만화에서 보여지는 귀족층은 부와 명예, 그리고 도덕성까지도 거머쥔 그야말로 범상치 않은 혈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경배와 의무의 이행은 자발적이며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된다. 실질적인 법적 평등조차 거머쥐지 못한 세상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혈통주의가 판을 치다니.. 이것은 야만으로의 복귀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말죽거리 잔혹사 - 유하(2004)

 

영화 포스터를 봤을 때 "이거 또 친구같은 쓰레기영화아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포스터 한켠에 감독이름이 유하였다. 그의 전작 <결혼은미친짓이다>를 매우 재미나게 본 나로서는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었다.

 

이땅의 모든 이소룡 세대들에게 바친다는 감독의 헌사처럼 영화는 이소룡의 현란한 액션으로 시작된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78년...그렇지만, 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나에게도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학교의 모습은 너무나 익숙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진학이라는 무오류의 절대명제를 향해 소떼몰이를 당하듯 하는 모습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에서처럼 이 영화의 학교도 사회의 조그만 축소판으로 그려진다. 박정희의 유신체제 말 "각하"를 정점으로 한 거대하고도 "평온"해보이는 권력피라미드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벅벅 기었듯이, 영화속 "정문고"도 선생들로부터 권력쪼가리를 위임받은 선도부짱을 정점으로 여전히 "평온"해 보인다. 등교길에 수많은 학생들이 선도부학생들에게 충성을 외치며 거수경례를 때리고, 조금이라도 행동이 하 수상해 보이는 놈들은 각목 찜질을 당하며 학교는 평온하다.

 

이 와중에 선도부짱에게 반기를 드는 놈이 나타나는데, 이 놈은 어딘가 삐딱한 부잣집 도련님이다. 선생으로부터 위임받아 합법과 불법이 혼합된 폭력을 휘두르는 선도부짱이나 이 부잣집 도령이나 권력의 속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이소룡 이전의 무협영화에서 그려지던 싸나이대 싸나이의 "승부"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들은 잘 안다. 무조건 상대의 약점을 철저히 이용해 짓밟아 버리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는 "Winner Takes All"의 논리를 이들은 잘 알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들의 우상 이소룡도 이러한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소룡 이전의 무협영화보다 이소룡 영화의 싸움장면은 더 처절했고 상대방이 방심할 때 뒷통수 갈기기, 급소차기 등 온갖 불법(?)이 난무했으며, 정통파들로부터 "이소룡의 절권도는 무시를 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승부는 정정당당하지 않은 것이다. 누가 이기든 이긴 놈이 모든 것을 가져간다. 이기기만 하면 정의도 내편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이소룡은 "뒤돌아보지 말 것"을 그저 "앞만 보고 이길 것을" 우리에게 주문했던 것이다.

 

암튼 이토록 지저분한 사회의 논리를 따랐던 이 두 놈이 한판을 붙게 되고, 밀려난 부잣집 도령은 자취를 감춘다. 도령 밑에 있던 똘마니들의 새로운 줄서기가 단행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 평소 도련님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햄버거'는 완전한 선도부짱의 행동대원으로 나서고 권력의 단맛을 만끽한다.

 

한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 때문에 상처를 받은 우리의 주인공 권상우... 학교 안의 그 권력피라미드를 박살내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권상우는 피나는 노력을 통해 이소룡의 절권도로 조그맣고도 불온한 권력피라미드를 개박살낸다. 정정당당하지 않은 방법이라고 욕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하지만 승부란 그런거다.. 권상우의 한가인에 대한 순정이 도련님의 한밤의 쇼로 압도당했듯이, 박정희의 유신이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선전되었듯이 당시의 세상은 (아니 지금도?) 진실보다는 위선이 정의보다는 가진자의 권력이 더 인정받는 곳이 아닌었던가?

 

물론 권상우가 그 불온한 권력피라미드를 인정하면서 소시민으로 살아갔어도 난 슬펐겠지만, 그가 교내의 조그만 권력피라미드를 박살내는데 성공했을 때도 난 슬펐다. 어차피 그에게 돌아올 것은 더 가혹한 처벌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조그만 권력 피라미드 뒤에는 더욱 강고하고 거대한 권력피라미드가 놓여있는 법이다. 이소룡이 "Fist Of Fury"의 마지막 장면에서 라이플을 정조준하고 있는 영국군인들을 향해 발차기를 날리듯이 그의 발차기는 의미없는 지랄이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지만, 한번 지랄해 본거다. 그 지랄 한번으로 권상우는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꾸역꾸역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착찹했다. 솔직히 난 그런 지랄 한번도 못 해봤다. 그 뒤에 연이어 서 있는 권력피라미드의 위압감 때문이었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천년여우 - 콘 사토시

 

역시 조선사람 정서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더 잘 어울리는 듯 하다. 물론 그들과 많은 면이 다르기는 하지만, 일본애니를 보고 있을라치면 소소한 심리묘사 등에서 우리와 코드가 비슷한 점이 많음을 느낀다.

 

난 천년여우라고 해서 여우라는 동물이 나오는 애니인 줄 알았는데, 밑에 영어자막을 보니 "Chiyoko once and forever"라는 자막이 나와서 그게 아닌 줄 알았다. 영화는 갑자기 영화계에서 사라져버린 후지와라 치요코라는 일본 여배우를 두사람의 다큐멘터리작가들이 추적하면서 시작된다.

 

치요코는 1922년 생으로 그녀의 인생은 격동기였던 일본의 현대사에 얼마간 연결되어 있는데, 우연히 경찰에게 추격당하던 민권운동가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게 되면서 그에 대한 사랑이 싹트게 되고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배우가 되어 그를 찾아 나선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이 영화를 서양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정말 우스운 줄거리일지도 모른다. 아무 관계도 없었던 남자와 잠깐 이야기를 했던 것에 불과한데도 그와의 너무나도 조그마한 약속같지도 않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갖 역경을 마다하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 또한 현실과 치요코가 출연했던 여러편의 영화가 뒤섞여 치요코 자신과 민권운동가 사이의 만남이 천년동안 이루어지지 못했던 남녀간의 운명적 사랑의 조그마한 일부일지 모른다는 설정. <은행나무침대>나 성유리의 어색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끈 최근의 드라마(제목도 기억 안 난다)와 많은 부분 닮아있다.

 

그러나 분명 빠른 편집, 여러 이야기를 뒤섞는 교묘한 장치들, 연거푸 오버액션을 일삼으며 치요코를 연모하는 겐요로 인해 이 이야기는 식상한 틀에도 불구하고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게끔 만들고 있다.

 

중반 이후, 치요코가 사랑을 찾아 훗카이도까지 달려가는 장면에서 나는 사실 좀 짜증이 났다. 별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목숨까지 걸 듯한 치요코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것을 마치 지고지순한 사랑, 순정으로 포장하려는 겐요를 비롯한 주변의 시선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종반 전직 일본 순사를 통해 치요코가 그토록 찾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겐요 또한 수십년 동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치요코에게 말하지 못했던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나는 비로소 이 영화가 "Chiyoko once and forever" 가 아닌 "Genyo once and forever"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 영화가 맘에 들었다.

 

치요코가 쫓던 그 사람은 이세상에 존재치 않는 사람이었고 치요코가 현실에서 했던 모든 행동들은 무의미한 것, 한낱 자아도취의 결과물이나 자위행위로 생각될지 모른다. 그런데 왜 겐요는 치요코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치요코가 간직한 사랑이 치요코로 하여금 치요코의 남은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었으며 치요코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사랑에 대한 욕망은 치요코의 존재이유였고, 또한 치요코에 대한 사랑은 겐요의 존재이유였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사랑이란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의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사람 이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사랑은 조그마한, 일견 허망해보이는 조그마한(치요코와 그 남자의 조그만 약속과도 같은) 계기에서 비롯된다. 나만의 개똥철학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사랑, 그리고 그것의 허망함, 그러나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나름의 성찰이 담겨 있는 좋은 작품임에 분명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올드보이

 

workshop에 갔다가 너무도 일찍 돌아온 금요일 오후, 지난 밤에 뽀지게 마신 술기운에 어지러운 머리를 추스르며 올드보이를 보았다. 이른 오후인데도 상영관은 만원이었다. 박찬욱이라는 감독이 그리 대중과 친한 감독은 아니지만, 그간 마케팅에 때려박은 돈이 장난이 아니어서인지 올드보이는 주말예매1위에 올랐다.


아무리 일본 아해들의 만화에서 빌려온 착상이라지만, 사적으로 운영되는 감방의 존재와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한 15년간의 감금은 너무나도 기괴한 설정임에 틀림없다.(하지만 원작만화보다는 영화가 낫다.)


영화 초반 최민식의 감금생활과 거기서 풀려나 감금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나를 완전히 영화에 몰입하게끔 만들었다. 또한, 최민식이 망치를 들고 감금방의 깡패들과 벌이는 사투는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폭력적인 것이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역설의 미학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영화의 중반 이후, 감금의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그리고 복수를 완성하는 주체가 돈으로 칠갑을 해도 돈이 남는 멋드러진 부자로 이미지화 되면서 왠지 모를 불쾌감이 고개를 들었다.

 

전편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그 주제는 "복수"였다. 올드보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감정의 폭발이 극을 이끌어가는 추동력이었으나, 그래도 당시 박찬욱은 개인적 원한과 복수가 사회와 분리될 수 없이 톱나바퀴처럼 맞물려 움직이고 있음을 영화 곳곳에서 드러내려 애썼다.

 

"복수는 나의 것"의 분노는 신하균과 송강호의 개인적인 분노만은 아니었던 것이고, 그들의 사회적 역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런 고통과 분노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감독은 사회적으로 강제된 고통과 분노로 범벅이 된 아비규환을 감각적으로 그려내었고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최소한 불편함(!!!)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또한 신하균에게 마지막 복수를 가했던 송강호를 아나키스트단의 이름으로 단죄함으로써 감독은 결국 신하균의 손을 들어준다.


그런데, 개인적 원한과 복수... 게다가 "모래알이나 바위나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속편이 어디있나. 공중파 CF까지 내보내는 등 엄청난 마케팅비용을 지출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올드보이는 대중을 위한 상업영화다. 그건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상업적인 면에서나 메시지적인 면에서나 박찬욱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조화를 원한다. 박찬욱은 그만큼 큰 능력을 가진 감독이기 때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매

추석같은 명절날. 우리집 친척들은 주로 서울에서 모여 살기에 지방에 살고 계신 부모님이 역귀성을 하고 있다. 그래서 명절연휴가 되면 난 별로 할 일도 없이 집 밖을 어슬렁거리곤 한다. 우리집은 친척들간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서 굳이 무리해서 올라올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부모님은 어쨌건 명절에는 상경한다. 보통 서울로 올라온 어머니는 큰집으로 혼자서 일하러 가고 아버지는 아들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말도 안되는 말을 내게 늘어놓기 일쑤다. 그러기를 몇 년째.. 난 도저히 짜증도 나고 그런 아버지와 더 싸울 힘도 없어져 버렸다. 큰집에서도 제발로 걸어 나와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그래서 난 명절이 되면 차례만 지내고 큰집을 탈출해서 친구집에 피난(?)을 간다.

이번 명절도 그랬다. 차례를 지내자마자 바로 큰집을 나와버렸다. 어찌보면 친척들간의 갈등의 중심에는 항상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아들 딸들의 중간에서 적극적으로 긴장을 조성해 가며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거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쩌면 그렇게들 유치하게 되는지... 그런 할머니를 보지 않은지도 벌써 3년이 넘었다. 빨리 돌아가셔야 그나마 친척들간에 얼굴 맞댈 일 없이 편안하게 살텐데. 서로 얼굴 붉히면서 명절때라고 몇일간의 휴전을 선포하는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추석연휴전에 친구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했더니, 친구녀석이 보러가자고 했던 영화가 바로 이거였다. 산자와 죽은자 사이를 연결해 준다는 영매들(무당,점쟁이 등)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였는데, 재미는 있었으나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짧은 이승에서의 인연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 맺힌 한을 풀어주기 위한 그 많은 의식들이 우리의 주변에 있는 줄 몰랐었다. 아예 우리의 삶 전체가 그런 맺힌 한을 풀기 위한 제의같았다고나 할까? 인간들의 만남과 관계라는 것들이 그렇게 질긴 것인지, 좀더 쿨한 관계가 올바른 것은 아닌지, 질긴 인연에 얽혀 허우적대며 어쨌거나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인 것인지 그러저러한 생각들을 하며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만약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가 사실이라면 난 완전 인생 헛 산거다. 젠장.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타나주아

 

2003년의 마지막날, 종무식을 마치자 팀장이 그냥 가랜다. 집에 가는 길에 씨네큐브를 지나다 이번이 아니면 보기 힘들 것 같아 표를 사서 들어갔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영화 무지 웃긴다. 내용이 웃겨서가 아니라 배우들이 진짜 어설퍼서다. 보고 있으면 피식피식 웃게 된다. 미친놈처럼말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에스키모 부족사회 안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지는데 그게 애정문제와 얽혀들고 집안의 철없는 것들이 끼여들어 싸가지 없는 짓을 하게 되면서 살인도 나고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는 거다.

내가 무식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는데, 평단에서 이 영화를 가리켜 치켜세우듯 "진정한 마스터피스", "놀라운 대서사시","톨킨을 긴장시킨 라이벌"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저 주류영화로부터 철저한 변경지대로 인식되던 툰드라지대의 에스키모 전설과 삶에 대한 영화라는 점, 에스키모 원주민어로 촬영되었다는 점, 깐느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할만큼 툰드라지대의 생경한 환경을 계절변화에 맞추어 기막히게 담아냈다는 점이 매력적인 정도다.

평단에서 난리가 난 것처럼 이 영화를 추켜세우는 이유는 평론가집단이 그런 이벤트라도 꾸준히 벌이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직종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영화의 중간중간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역할을 하는 샤먼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야말로 논증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필요조차 없는 '절대지식'이다. 난 윤회, 환생, 영혼 등등 이런거 무척 싫어해서 그런지 그런 장면이 자꾸 나오니까 짜증이 났다.

암튼 러닝타임이 거의 3시간에 달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배경(이 영화속 툰드라지대의 봄과 여름은 정말로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봄날은 간다>의 화면을 좋아하는데 그 영화나 이 영화나 봄날의 풍경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잘 잡아냈다.)과 배우들의 어설픈 연기덕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칼들고 사람 죽이러 가는데 지풀에 자빠지질 않나, 다큰 어른이 토끼고기 혼자 쳐먹겠다고 갖은 궁상을 다떨지 않나, "별들의 고향"에 나올법한 연애씬까지 무리없이 소화해낸다. 특히나 45초간 이어지는 우리 아타나주아 아저씨의 全裸疾走씬은 쳐다보기 민망했다.(특히 난 오늘 맨 앞자리에서 봤거든-_-;;)

 

그런데 가장 인상깊게 남는 건 아무래도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여주는 제작과정이다. 이미 문명이라는 것이 깊숙이 침투한 에스키모인들의 삶을 보여주는데, 이제 더이상 에스키모들은 가죽옷을 바늘에 기워입지 않고 샤먼을 찾지도 않는다. 그런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인들이나, 서구인들의 눈을 가지게 된 우리의 마음 속에만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걸 확인시켜주기 위해 감독은 그런 엔딩크레딧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감독의 사려깊음에 박수를 보낸다. 특히 알고봤더니 우리 오키아저씨는 가죽잠바에 이어폰 꽂고 썬글라스 끼고 다니는 오렌지 에스키모다. 그거보구서 오늘 관객들 다 뒤집어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