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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변증법적 이해를 위하여

 아래글은 Kenneth Neill Cameron의 "Dialectical Materialism and Modern Science"(1995)

이라는 책을 기준으로 ,  

리차드레빈스 “우리자신의과학:맑스주의와 자연-맑스주의 과학” 먼슬리리뷰 (1986)

글을 참조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변증법적 이해를 위하여

 

자본주의의 과학자와 사상가들은 고정되고 정적인 틀을 가지고 추론하고, 사회와 자연을 세분화해서 인식하는데, 이러한 방법으로 상당한 정도의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이 혼합된 이질적인 요소를 분리해서 사고하고, 상호 연관성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과학적 변증법“이다. 일부에서는 변증법을 인간의 사고 영역 혹은 사회영역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과학기술 영역을 도외시함으로써, 과학을 이상화 시켜 버리고, 과학 자체를 순수한 것으로, 그리고 자본주의 속에서는 자본가의 탐욕이나 이데올로기로 오염된 것으로 보는 효과를 낳는다. (레닌이 ‘테일러 주의’를 받아들인 점) 어떤 식으로든 사회주의 정당 건설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변증법과 유물론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 변증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과학적 변증법은 ”실천“과 전체 운동을 밝힐 수 있는 시스템적인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변증법도 역시 전체의 한 면일 뿐이며, 진리에 이르게 하는 마술이 아니다.

세상을 변혁하려는 사고 없는 변증법적 사고는 반동으로 흐른다.

∘ 유물변증법론자라면 변증법이전에 유물론이 우선적이며, 실천이 기본적이어야 한다.

실천 역시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정당성을 확인시켜 준다.

∘ 변증법적 논리로만 설명이 되는 운동이나 상호작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변증법적 논리가 사고의 주요 토대나 전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 전자나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의 특성을 보이는데, 이것을 변증법적인 모순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실체를 지속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 엥겔스의 세 개의 변증법 “법칙”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양의 질로의 전화 및 그 역의 법칙

2) 대립물의 상호침투의 법칙

3) 부정의 부정의 법칙

이들 중에서 가장 기본은 제 2의 법칙으로 볼 수 있다.

 

-양이 질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는 대립물의 투쟁 및 상호 침투의 관계가 있다. 양질전화의 법칙에서는 질로 전화하는 것이 반드시 양에 국한되지 않는다. 원자의 배치의 차이로 인해 질로 전화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탄소와 다이아몬드는 같은 원자를 가지고 있지만 배치의 차이로 인해 질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역시 내부에 입자들(대립물들)이 전자기력 및 원자력의 관계로 대립과 투쟁의 관계로 환원할 수 있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 속에도 역시 대립물의 투쟁과 상호침투의 법칙은 살아 있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단선적이건 나선형이건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대립물의 투쟁의 관계에 의존할 뿐이다.

 

∘ 보편과 특수

특수한 현상들을 통해 일반적인 현상이 구축되는데, 이들 중 특수한 현상이 기본적인 것이다.

 

∘ 사물(things)과 과정(processes)

과정보다 사물에 대한 파악이 우선한다. 고정된 사물은 없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한 변화를 알기 이전에 그 변화와 관련된 사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더 우선적이다. 과정과 사물을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차이는 존재한다. 과정만을 따로 때내서 강조하면 관념론으로 빠져들어 간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왜 대립물의 투쟁 때문에)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변증법적 과정의 본질로 여겨지고, 부정의 부정을 거쳐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누구에 의해서, 신? 아니면 절대적 법칙?)

 

∘ 법칙이란 무엇인가?

-‘객관적’ 법칙이란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적인 개념 즉 ‘주관적’ 법칙으로 볼 수 있다. 유물론자로써 자연에 내재된 법칙이란 없으며 단지 사물과 과정(반응)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중력의 법칙은 현대 물리에서는 중력자(아직 관측되지 않은 입자)의 상호작용에 의한 반응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사회와 자연 사고 모두에 적용된다는 변증법에도 “객관적”인 법칙은 없으며, 단지 대립물의 상호 침투에서 발생되는 일반적인 과정을 “법칙”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물들의 과정을 이해하는 형식이 바로 “법칙”인 것이다. 중력, 전자기력, 계급투쟁 모두 자연의 혹은 사회의 대립물들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주관적인 법칙이라고 해서, 상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 법칙은 그 토대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만큼 실재와 근접해 있다. ‘객관적’이라는 의미에는 항상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라는 의미가 따라 다니기 때문에 객관적 법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

 

- 과학은 실수를 인식하는 독특한 패턴과 그 실수를 피하기 위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맑스주의에서는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들은 각각의 상황에서 인정되는 정보의 일부분으로 취급하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은 그 구체적인 상황 자체를 가지고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을 모두 합쳐 진리발견의 기초로 삼는다. 즉, 객관성은 과학이 가진 기본 조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할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가 편견을 갖고 세상에 맞서는 과정이며 다른 사람의 편견이 우리의 편견과 마서는 과정이며, 다시 여러 가지 다른 편견들이 우리가 가진 편견가 맞서는 끊임없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과학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남성으로 구성된 과학 기술계 내부의 성적편견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의 저항에 의해서만 균열을 낼 수 있다.

 

 

∘ 현상(appearance)과 실재(본질, reality)

강물의 운동을 보면-위에는 거품이 일고 아래에는 깊고 조용히 흘러간다. 거품조차도 본질의 표현이다. 즉, 감각에 의해 보이는 세계도 그것이 과학에 의해 밝혀진 세계와 다를 지라도 망상이 아니라 그것도 실재인 것이다.

 

∘ 과학에서 환상과 관념

관념도 역시 실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환상조차도 실재이며 꿈도 실재이다. 꿈이 실재가 아니라면 그러면 꿈의 원천은 무엇인가? 환상도 과학에 도움을 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는 환상의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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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

이 글은  1986년 미국의 좌파 잡지 먼슬리 리뷰지에 실린 리차드 레빈스의 글입니다. 하버드대 교수이며 생태학자인 레빈스는 한국에서도 이미 많이 알려진 맑스주의 과학자입니다(참세상에서 “과학, 사회, 혁명운동 그리고 변증법”이라는 글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이 글은  좌파가 왜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과학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를 비교적 명료하게 설명되어 있어 소개합니다. 이 글을 총 3부분으로 나누어 번역하고 있고, 이번에 이어 다음에는 ‘부르주아의 성장과 현대과학의 탄생’,‘과학과 철학의 통일'을 그 담에‘현실 과학 비판‘과 ’좌파와 과학‘을 번역해서 올릴 예정입니다. (급하게 번역하느라 오역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문을 참조해 주세요)

  

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


리차드 레빈스 (Richard Levins)


내가 글을 배우기 전에 할아버지(아브라함 색만, Abraham Sackman)는 배드 비샵 브라운 신부(역주- 윌리엄 몽고메리 브라운, 미국 성공회 주교이자 공산주의자. 배드 비샵이라는 별명은 이교도 재판과정에서 붙여졌다.)의 “소년 소녀를 위한 과학과 역사”라는 책을 읽어 주셨다. 이 책에서는 과학과 역사는 서로 연계관계가 있음을 주장하였고, 그런 주장이 나에게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매우 흥미 있는 발견이었다. 할아버지는 사회주의-노동자들을 위한 교육에 최소한 우주론, 진화론 그리고 역사를 의식적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교회에서 파문당한 맑스주의자 배드 비샵은 그의 책에서 과학과 역사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보았다. 그에게 인간의 역사는 자연 역사와 연속선상에 있었다.


과학과 역사는 몇 가지 이유로 맑스주의자들에게 중요하다. 첫째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지배계급의 지식 독점과 종교적인 반계몽주의에 저항하는 것이며 특히 신교도들이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사상에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이 건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이 질문에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은하수 주변 바깥, 2류 태양 주위를 도는 작은 행성위에서 최근에 살고 있는 하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바위에서 과거를 읽을 수 있고 우리의 노동으로 현재를 변혁하며, 별들의 미세한 빛의 조성을 프리즘으로 알아내고 또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 자신의 미래 발전을 도모한다.


세계를 알고, 지식화해야 한다는 열정적인 책임감은 우리의 적들에게는 오만함으로, 더 심하게 지독한 뻔뻔함으로 인식되었다. 적들은 맑스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 미학의 핵심으로 신비주의, 불가지론, 랜덤함, 비이성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40년대 고전 아서 커스틀러의 《요가 수행자와 인민위원 The Yogi and the Commissar and Other Essays》를 참조)

 

맑스주의자들에게 과학 기술의 발전은 세계에 대한 최신 지식을 얻는 다는 의미 이외에 특별히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기술과 사회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산 수단의 발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발전은 변혁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과학은 단지 과학적 성취와 응용기술을 나열한 명부가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회 환경에서의 인간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에 대한 학습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야할 대상인 것이다. 최근 들어 점점 더 다양한 이슈들, 지식의 군사화, 건강, 환경 경제 발전, 여성 해방, 인종주의와 계급 서열화의 합리화 그리고 교육 문제 등에 대한 정치적 투쟁에서 과학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혁명 정당은 권력을 잡기 전과 후 모두 과학에 관한 프로그램을 채용해야 하고 이런 저런 과학적 근거를 형성하는 사회 운동과 어떤 식으로 공동 투쟁할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맑스주의 과학자는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이 이데올로기적, 제도적 속박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한 사회주의자들은 과학의 문제들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부활시키고, 과학을 투쟁 활동과 연구를 위한 실천과제 속에 배치시켜야 한다.


과학을 이해하는 작업은 과학의 주요 모순을 명확하게 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현대 과학은 지식 성장의 역사에서 한 단계이며, 동시에 서구 부르주아지 계급에 속박된 창조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과학이 그들의 이익과 권력 추구를 위해 필요한지를 묻고, 지금까지 발전된 과학으로 적절한 방법을 적용한다. 그리고 부르주아 사상에 순응할 수 있는 적절한 답을 찾아낸다. 현대 과학은 생산력의 한 부분이면서 생산관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과학은 상품으로서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모순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실재(reality)를 해석하고 반영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실재를 혼미하게 하기도 한다. 또 과학은 부르주아 혁명의 산물이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처럼 부르주아의 욕망과 필요를 초월해서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그 근본 태생의 성흔은 결코 털어버리지 못한다.


과학은 지적 자유를 향한 저항의 함성이 되기도 하지만 억압과 지배를 합리화하기도 한다. 조작된 미신에 대항하는 계몽의 무기이기도 하지만 제 3세계 문화의 지식을 인종주의와 맹목적 애국주의로 파괴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학은 우리 존재 조건이기도 하고 정치의 대상이기도 하다. 또 이데올로기 장벽을 넘어 국제 협력의 장이기도 하지만 계급투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길잡이기도 하지만 독단적인 교조의 그리고 자기자랑의 미사여구가 되기도 한다. 내적인 면에서, 작은 규모에서, 한 연구소 규모에서는 과학은 지적 교양을 증가시켜 주는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인 과학 활동 수준에서는 비이성적인 면이 증가하고 있다. 과학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지금 알려진 것으로 가정하고 연구하기도 하는데 종종 그러한 가정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맑스주의자는 이들 모순들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몇몇 학파들은 액면 그대로 이상화된 과학관을 받아들이고 있다. 많은 서구 유럽 맑스주의자 특히 유로코뮤니스트들 중에는 맑스주의 영역을 진보적인 정치경제 프로그램에만 국한시키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자연 과학의 오용과 독점을 비판하는 것 이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개념을 “스탈린주의”로 보고 거부하고 있다.


맑스주의 당에서 이런 독단적 흐름은 과학이 실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는 관심 없게 하고 과학을 객관적 실재와 동등한 것 그리고 (순수한) 진리로만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과학적 사회주의’처럼 ‘과학적’이라는 말을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말로 사용한다. 이미 엥겔스 시대에 “독일 사회주의는 최근에... 한층 더 터무니없는 잠꼬대를 지껄이며, ‘과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뻐기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엥겔스, 반듀링론) 그 이후 수십건의 체계적인 문건에서 단지 한 두 번 일어난 일을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해왔었고, 저자들은 그것을 인정해왔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유로꼬뮤니스트와 독단적인 좌파 모두 과학을 진보적이며 객관적이고 해방을 담지한 힘이라는 이상화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화려한 묘사에 맞지 않은 과학은 그것 자체로 순수하지만 단지 외부에서 탐욕과 ‘이데올로기’로 오염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에 접근하는 유물론자는 이런 이상적인 정의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 명확히 과학은 자본주의와 함께 진화하는 것으로써 정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역할을 부르주아 혁명에서 해방의 힘으로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를 견고하게 하는 힘으로 평가하고 짧게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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