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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0/13
    매트릭스, 괴델 그리고 리눅스(3)
    해민
  2. 2004/09/08
    '공짜' 리눅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II
    해민
  3. 2004/08/05
    '공짜' 리눅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I.(2)
    해민
  4. 2004/08/04
    힙합과 리눅스
    해민

매트릭스, 괴델 그리고 리눅스

매트릭스, 괴델 그리고 리눅스 19세기말까지만 해도 수학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체계로 인식되었다. 수학 체계는 내부에 모순 없는 몇 개의 기본 공리만 정하면 이로부터 모든 정리를 도출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아키텍트'는 가상공간 매트릭스에 완벽한 이상적 세상으로 건설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온의 민중들을 제외하면 매트릭스 속의 민중들은 실제로 완벽한 사회로 여겼다. 매트릭스에서 네오의 역할은 수학에서 괴델(1906~1978)이 맡았다. 괴델은 모순이 없는 완벽한 체계 안에는(어떤 공리에 기초를 두고 있건 간에) 항상 그 체계에서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는 문장이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것을 간단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 질문에 답해보자. "독도 사람이 말했다. 독도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이 말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만약 이 말이 진실이라면 이 사람은 독도 사람, 즉 거짓말쟁이인데도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말이 거짓이라면 독도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다. 아무튼 괴델은 이를 통해 완벽한 체계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의 그누 리눅스(GNU Linux)는 자유소프트웨어 규약(이하 GPL; General Public License)이라는 저작권 하에 배포된다. 이 것은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수정, 배포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유일한 제약 조건으로는 GPL이 적용된 소프트웨어를 수정해서 재배포할 때 다시 GPL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IBM과 같은 거대 자본도 예외일 수 없다. 일부 오픈 소스 진영에서는 이 것 때문에 기업들의 참여가 저조하다고 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제약조건은 자유소프트웨어(*)가 자본에 독점되지 않게 하는 강력한 방패역할을 한다. 그리고 자유소프트웨어가 마치 박테리아처럼 스스로 확장하며 번식할 수 있게 하는 내적 논리를 제공해 준다. 적어도 몇 년 전까지는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작년(2003년)에 오픈 소스 진영의 한 업체가 DRM (Digital Right Management; 디지털저작권관리) 기술을 GPL 규약 하에 제작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상황은 약간 달라졌다. DRM은 독점 소프트웨어를 보호하기 위한 인증수단 혹은 접근 차단 기술이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유’를 차단하는 기술 개발에 ‘자유’소프트웨어 규약(GPL)과 개발 방식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리눅스 공동체를 이끌면서 오픈 소스진영에 참여하고 있는 리누스 토발즈도 이 DRM기술 개발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DRM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리눅스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유로운 개발을 보장하는 GPL 규약을 어떠한 경우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토발즈는 자유로운 개발을 억압하는 DRM 기술 ‘그 자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DRM 기술의 외부적 조건 이 변한다고해도 즉, 자유롭게 개발하고 소스를 공개한다고 해도 기술 ‘그 자체’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괴델은 어떠한 완벽한 시스템에도(구조가 아무리 완벽해도) 항상 내부에 불완전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역으로 이러한 불완전함의 존재는 제도적 장치와 같은 구조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매트릭스에서도 완벽한 시스템 내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그 속에 존재하는 불완전함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을 이용한 시온 민중들의 투쟁이었다. 자유소프트웨어 상황은 매트릭스와는 정 반대이다. 완벽한 GPL 규약 속의 불완전성은 자본에게 개입할 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상황은 정반대이지만 결론은 동일하다. 자유소프트웨어에서도 그 불완전함은 주체(자유소프트웨어 생산자와 이용자)의 끊임없는 참여와 투쟁을 요구한다. (*) 자유소프트웨어는 지난호에 밝힌 4가지 자유를 만족하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GPL규약은 자유소프트웨어를 만족시키는 규약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 자유소프트웨어는 GPL규약을 따르는 자유소프트웨어만을 한정한다. (**) http://www.sidespace.com/products/oggs/ **이글은 네트워커 10호에 실린 글이다. 네트퉈커에서는 마지막 부분이 조금 잘렸다. 아마도 지면관계때문인듯하다. 잘된 글은 아니자만 그래도 저자와의 상의 없이 결론부분을 짤라 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듯하다. 나름대로 고민한 것인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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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리눅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II

 

'공짜' 리눅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II


1985년에 리차드 스톨만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창설하고 구체적으로 4가지 자유를 규정했고, 이 4가지 자유를 보장하는 소프트웨어를 자유소프트웨어라고 정의하였다. 프로그램을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도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자유 0'으로, 프로그램의 작동 원리를 연구하고 이를 자신의 필요에 맞게 변경시킬 수 있는 자유를 '자유 1'로, 이웃을 돕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복제하고 배포할 수 있는 자유 '자유 2'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로그램을 향상시키고 이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다시 환원시킬 수 있는 자유 '자유 3'로 규정하고 있다.

이 4가지 자유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지만 '공짜'라는 의미와 연관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자유 1'과'자유 3'은 소프트웨어 생산에 관한 것으로 소프트웨어의 내용을 비밀로 유지하거나 사유재산으로 보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나머지 '자유 0'과 '자유 2'는 이용에 관한 것으로 재산권이나 저작권을 무시하고 공짜로 배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면 다시 자유 소프트웨어에 대해 그들의 설명을 직접 들어 보자.


유료 또는 무료로 수정하거나 그렇지 않은 상태어느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곳에라도 자유롭게 복제하고 배포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로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의 의미는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해서 별도로 요청할 필요도 없고 또한 비용을 지불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자유소프트웨어란 무엇인가. 강조는 인용자)’


즉, 소프트웨어가 자유소프트웨어 정의에 충실하다면, 자유소프트웨어의 4가지 자유를 반드시 실천해야 하고 그것은 공짜 소프트웨어로 귀결된다. 처음 유료로 구매한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구매한 사람은 언제든지 공짜로 배포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또 자유소프트웨어의 공짜의 의미는 일정기간 무료로 사용하는 셰어웨어(share ware)나 독점 소프트웨어로서 공짜인 프리웨어(freeware)와는 질적으로 다른데, 이들 소프트웨어는 4가지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자유소프트웨어의 공짜의 의미는 4가지 자유의 결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4가지 자유를 기본으로 하는 자유소프트웨어의 자유는 자유소프트웨어 공동체의 주장과는 상관없이 정치-문화적 의미뿐 아니라 경제적 의미를 강하게 포함하고 있다. 높은 가격으로 소프트웨어에 담을 친다면 더 이상 자유 소프트웨어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비단 자유소프트웨어를 누구나 공짜로 사용할 수 있다는 '분배'적 의미로 한정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소프트웨어가 가격이 없는 즉, 교환가치를 갖는 상품이 아닌 비-시장적 관계(non-market relations)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또 시장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서도 자유소프트웨어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수많은 특허를 독점하고 있는 IBM 등 컴퓨터 자본이 자유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하고, 자유소프트웨어를 그들의 기계에 적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소프트웨어 분야의 독점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또 정보기관의 참여는 그 만큼 자유소프트웨어가 기술적으로도 보안상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자본이나 정보기관마저도 자유소프트웨어에 기여하게 유도하고 있다는 의미로, 자유소프트웨어의 강한 흡입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소프트웨어에 담겨 있는 특별한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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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리눅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I.

'공짜' 리눅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I. 그누/리눅스(GNU Linux)는 ’자유소프트웨어(Free software)‘에 포함되는데, 영어로 Free는 공짜의 의미와 자유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공짜 좋아하면 머리가 벗겨진다.'는 속담이 있지만 프로그래머가 아니고서야 리눅스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공짜‘라는 의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있을까? 적어도 필자는 그렇다. 필자는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을 더 좋아 한다. 그냥 자유소프트웨어는 공짜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많은 자본들이 리눅스를 비롯한 자유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이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자본은 이윤이 남기 때문에 참여할 것이며, 이윤이 남는다는 의미는 어떤 면에서는 공짜가 아님을 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 안보기관인 NSA도 보안을 이유로 리눅스에 지원하고 있다고 하니 더욱 조심스러워 진다. 1998년 오픈소스 이니셔티브(Open Source Initiative, OSI)를 창설한 에릭 레이몬드와 같은 사람들은 자유소프트웨어를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개선하는 도구로 보고 있다. 사실 에릭 레이몬드는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목적에 맞는 운동을 새롭게 시작했는데, 그것이 오픈소스 이니셔티브(OSI)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정의와 자유소프트웨어 정의 사이에 문헌상 차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자유소프트웨어는 '자유'를 오픈소스는 '생산의 효율성'을 더 강조한다. 그러한 OSI에는 자본가들을 위해 자유소프트웨어를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당근! 레이몬드는 당연히 자유소프트웨어를 공짜라는 개념과 연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이용하는 자유소프트웨어 공동체 사람들이 공짜라는 개념에 인색하다면, 자유소프트웨어가 공짜로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기 더욱 힘들어진다. 사실 자유소프트웨어 공동체 사람들은 자유소프트웨어의 자유를 공짜라는 의미로 사용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핵심은 구속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의 자유에 있는 것이지 무료라는 금전적인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도하는 이러한 자유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료 맥주(free beer)"가 아닌 "언론의 자유(free speech)"와 같은 예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유소프트웨어란 무엇인가?)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을 창설한 리차드 스톨만은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의 영감을 1776년 미국 독립선언의 이상인 자유, 공동체 그리고 자발적 협동 정신에서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정신은 ‘자유 기업’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자유소프트웨어에 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스톨만은 '자유 기업'까지 언급하면서 Free는 공짜가 아니고 자유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스톨만까지 이렇게 주장하니 난감할 뿐이다. 그렇다면 '자유소프트웨어=공짜'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 또 그렇게 주장해서도 안되는 것일까? 또 공짜라고 주장하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면 아직 공짜의 희망을 버리지 말고 자유소프트웨어 정의부터 한번 뒤져 보도록 하자.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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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과 리눅스

힙합과 리눅스 김영식 / 정보공유연대 IPLeft yskim@jinbo.net 깊 숙한 골목, 어두운 지하실 공간, 가장자리에 놓여있는 두 대의 턴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랩, 그리고 브레이크 댄스! 이것은 힙합하면 떠오르는 광경일 것이다. 80년대에 힙합은 미국의 어느 뒷골목 한 쪽 귀퉁이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고, 불과 몇 년 만에 빌보드 차트와 방송을 장악할 만큼 괴력을 발휘했다. 정규교육을 재대로 받을 기회가 없었던 미국의 빈민촌 흑인들은 음악이나 악기를 배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한 그들이 가장 리듬감 있는 음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들은 악기나 오선지 없이 기존의 음악을 발췌하여 힙합 음악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기법을 ‘샘플링(sampling)’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두장의 LP판을 동시에 틀면서 원하는 부분을 연결시켜(샘플링해서) 비트를 맞추며 즐겼고, 1980년대 중반에는 디지털 샘플러가 등장하면서 힙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보통 유명 힙합 음악은 수천 개의 소리를 샘플링하여 만들어진다. 물론 샘플링이 전부가 아니다. 주요 기술에는 턴테이블에 올린 LP판의 속도를 달리하는 디제잉(DJing), 컴퓨터의 전자 사운드를 음악적으로 배치하는 미디(MIDI) 등이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힙합을 작곡하는 사람을 작곡가라고 부르지 않고 ‘프로듀스’라고 부른다. 비극은 이들이 엄청난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시작됐다. 거의 모든 음악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음반사들은 힙합 그룹들을 고용하였다. 이 때부터 저작권 소송분쟁이 시작됐는데, 유명한 힙합 그룹 드 라 소울(De La Soul)도 “You Showed me”의 밴드 Turtles와 법정싸움에 휘말려 170만 달러를 배상해야 했다. 저작권은 힙합 그룹에게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음악을 둘러싼 권리에는 저작재산권과 저작인접권이 있다. 저작재산권은 말 그대로 음악에 대한 소유권이고, 저작인접권은 음악 실연자, 음반을 제작자 혹은 방송사업자 등이 갖는 권리를 말한다. 뻔뻔하게 다른 사람의 음악을 모두 표절한 사람은 한 사람의 저작재산권만 침해한 것이다. 그러나 수천 곡을 샘플링해서 만든 힙합은 수천 명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 된다. 그리고 저작재산권과 저작인접권을 모두 침해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힙합 그룹들이 선택할 길은 몇 가지 없는 듯하다. 음원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음반사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소유권이 없는 음악만으로 샘플링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힙합음악을 그만두어야 한다. 미국 흑인 민중들의 독특한 음악 생산 방식은 저작권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을 이끌고 있는 리차드 스톨만이 한국에 왔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은 마치 (저작권이라는) 지뢰밭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힙합 뮤지션들도 같은 기분일 것이다. 힙합 음악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단지 스스로 즐기기 위해 기존의 음악을 샘플링해서 새롭게 만든 것이다. 그누-리눅스(자유소프트웨어)도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서로의 프로그램을 샘플링하며 새롭게 만든 소프트웨어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필요한 것(즐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생산하는 것이다. 힙합의 자유로운 정신과 리눅스의 자유는 여기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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