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노동자와 과학철학 IV
- 해민
- 2017
-
- 4차 산업 혁명 관련 자료
- 해민
- 2017
-
- 왜 양자역학에서 봄(Bohm...
- 해민
- 2016
-
- 무기력...
- 해민
- 2016
-
- 맑스가 사랑한 미분(수학)
- 해민
- 2014
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아래글은 Kenneth Neill Cameron의 "Dialectical Materialism and Modern Science"(1995)
이라는 책을 기준으로 ,
리차드레빈스 “우리자신의과학:맑스주의와 자연-맑스주의 과학” 먼슬리리뷰 (1986)
글을 참조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변증법적 이해를 위하여
자본주의의 과학자와 사상가들은 고정되고 정적인 틀을 가지고 추론하고, 사회와 자연을 세분화해서 인식하는데, 이러한 방법으로 상당한 정도의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이 혼합된 이질적인 요소를 분리해서 사고하고, 상호 연관성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과학적 변증법“이다. 일부에서는 변증법을 인간의 사고 영역 혹은 사회영역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과학기술 영역을 도외시함으로써, 과학을 이상화 시켜 버리고, 과학 자체를 순수한 것으로, 그리고 자본주의 속에서는 자본가의 탐욕이나 이데올로기로 오염된 것으로 보는 효과를 낳는다. (레닌이 ‘테일러 주의’를 받아들인 점) 어떤 식으로든 사회주의 정당 건설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변증법과 유물론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 변증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과학적 변증법은 ”실천“과 전체 운동을 밝힐 수 있는 시스템적인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변증법도 역시 전체의 한 면일 뿐이며, 진리에 이르게 하는 마술이 아니다.
∘ 세상을 변혁하려는 사고 없는 변증법적 사고는 반동으로 흐른다.
∘ 유물변증법론자라면 변증법이전에 유물론이 우선적이며, 실천이 기본적이어야 한다.
실천 역시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정당성을 확인시켜 준다.
∘ 변증법적 논리로만 설명이 되는 운동이나 상호작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변증법적 논리가 사고의 주요 토대나 전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 전자나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의 특성을 보이는데, 이것을 변증법적인 모순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실체를 지속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 엥겔스의 세 개의 변증법 “법칙”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양의 질로의 전화 및 그 역의 법칙
2) 대립물의 상호침투의 법칙
3) 부정의 부정의 법칙
이들 중에서 가장 기본은 제 2의 법칙으로 볼 수 있다.
-양이 질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는 대립물의 투쟁 및 상호 침투의 관계가 있다. 양질전화의 법칙에서는 질로 전화하는 것이 반드시 양에 국한되지 않는다. 원자의 배치의 차이로 인해 질로 전화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탄소와 다이아몬드는 같은 원자를 가지고 있지만 배치의 차이로 인해 질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역시 내부에 입자들(대립물들)이 전자기력 및 원자력의 관계로 대립과 투쟁의 관계로 환원할 수 있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 속에도 역시 대립물의 투쟁과 상호침투의 법칙은 살아 있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단선적이건 나선형이건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대립물의 투쟁의 관계에 의존할 뿐이다.
∘ 보편과 특수
특수한 현상들을 통해 일반적인 현상이 구축되는데, 이들 중 특수한 현상이 기본적인 것이다.
∘ 사물(things)과 과정(processes)
과정보다 사물에 대한 파악이 우선한다. 고정된 사물은 없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한 변화를 알기 이전에 그 변화와 관련된 사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더 우선적이다. 과정과 사물을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차이는 존재한다. 과정만을 따로 때내서 강조하면 관념론으로 빠져들어 간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왜 대립물의 투쟁 때문에)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변증법적 과정의 본질로 여겨지고, 부정의 부정을 거쳐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누구에 의해서, 신? 아니면 절대적 법칙?)
∘ 법칙이란 무엇인가?
-‘객관적’ 법칙이란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적인 개념 즉 ‘주관적’ 법칙으로 볼 수 있다. 유물론자로써 자연에 내재된 법칙이란 없으며 단지 사물과 과정(반응)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중력의 법칙은 현대 물리에서는 중력자(아직 관측되지 않은 입자)의 상호작용에 의한 반응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사회와 자연 사고 모두에 적용된다는 변증법에도 “객관적”인 법칙은 없으며, 단지 대립물의 상호 침투에서 발생되는 일반적인 과정을 “법칙”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물들의 과정을 이해하는 형식이 바로 “법칙”인 것이다. 중력, 전자기력, 계급투쟁 모두 자연의 혹은 사회의 대립물들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주관적인 법칙이라고 해서, 상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 법칙은 그 토대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만큼 실재와 근접해 있다. ‘객관적’이라는 의미에는 항상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라는 의미가 따라 다니기 때문에 객관적 법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
- 과학은 실수를 인식하는 독특한 패턴과 그 실수를 피하기 위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맑스주의에서는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들은 각각의 상황에서 인정되는 정보의 일부분으로 취급하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은 그 구체적인 상황 자체를 가지고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을 모두 합쳐 진리발견의 기초로 삼는다. 즉, 객관성은 과학이 가진 기본 조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할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가 편견을 갖고 세상에 맞서는 과정이며 다른 사람의 편견이 우리의 편견과 마서는 과정이며, 다시 여러 가지 다른 편견들이 우리가 가진 편견가 맞서는 끊임없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과학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남성으로 구성된 과학 기술계 내부의 성적편견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의 저항에 의해서만 균열을 낼 수 있다.
∘ 현상(appearance)과 실재(본질, reality)
강물의 운동을 보면-위에는 거품이 일고 아래에는 깊고 조용히 흘러간다. 거품조차도 본질의 표현이다. 즉, 감각에 의해 보이는 세계도 그것이 과학에 의해 밝혀진 세계와 다를 지라도 망상이 아니라 그것도 실재인 것이다.
∘ 과학에서 환상과 관념
관념도 역시 실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환상조차도 실재이며 꿈도 실재이다. 꿈이 실재가 아니라면 그러면 꿈의 원천은 무엇인가? 환상도 과학에 도움을 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는 환상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
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I
[번역]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II
리차드 레빈스
현실 과학에 대한 비판
“현실에 존재하는 과학”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 수준에서 진행해야 한다. 좀 쉬운 비판으로 자유주의 비판이 있다. 그것은 과학이 자신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 과학은 국제적으로나 대중적으로 공개하는 규칙이 있는데, 이 규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군사기밀이나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거부된다. [막대한] 연구비용과 과학교육 그리고 과학 언어의 난해함은 일반 대중이 독자적으로 [과학을] 논증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한다. 앞으로 과학자의 자격 증명서나 [과학자의] 염색체 같은 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각을 발표할 수도 없을 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과학에 관한 대중적인 결정을 할 때 과학의 권위에 최종적으로 호소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신뢰성은 권력 내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답을 줄때에만 유지된다. 과학자에게 신뢰성은 중요한 재산이다. 그런데 그 신뢰성은 그들의 충고를 정책 결정자가 잠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과학이 스스로 정한 규칙을 따르지 못한다는 비판 보다 더 중요한 비판은 객관성에 대한 기준 자체가 종종 객관성을 유지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아이디어는 그 생각의 원천에 대한 기준 없이 과학 자신의 힘으로, 과학의 틀 내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논쟁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기준인 것처럼 보이며, 기본적으로 공정한 것으로 보인다(역주- 예를 들어 과학의 공정성을 평가할 방법이 있다면, 그 평가 방법을 또 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무한히 반복해야 될까?). 그러나 페미니스트 측의 과학 비판에서 강조했듯이 연구 활동에서 연구자[특히 자본주의 남성]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발견의 과정에 대한 [일종에] 사기이며 과학 논쟁을 이해하는데 장벽으로 작용한다.
인종주의자와 성차별 주의자들이 억압을 위해 [만들어 낸] 이성의 역사와 내용을 모른다면, 지식, 질병 혹은 사회적 행동에 대한 생물학적 결정성에 대한 논쟁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과학 논쟁의 원천과 사회적 결과를 명확하게 하는 것은 그 논쟁에 해답을 줄 수는 없을지라도 문제를 명확하게 분석하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감정(feeling)에서 사고(thinking)를 분리해 내는 것은 과학적 활동의 필수 단계이지만 단지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이 될 때, 과학자들은 잔인하리만큼 초연하게 가장 살인적인 기술과 이론을 개발한다(역주-원자 폭탄 개발을 생각해보라). 과학 활동이 중립적이라는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작업가설(역주- 여러 가지 얻은 실험결과를 기초로 하여 다음의 실험계획을 세우기 위한 잠정적인 가설)을 선언해야 한다: 억압에 관대하고, 정당화하며 그 억압을 증진시키는 모든 과학 이론은 잘못되었다; 과학 자료, 논리, 분석 혹은 함축된 의미를 유추할 때 그 속에 결점이 있는지 없는지를 발견해 내는 것은 우리들의 임무이다. [팽배한] 이데올로기 내에서는 잘못된 방법론이 받아들여지고 잘못된 논리들이 [마치 정당한 것으로] 이해되고, 잘못된 주장들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것 역시 우리들의 [중요한] 임무이다.
이것이 맑스주의가 주류 과학적 이데올로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맑스주의는] 세계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고 [변혁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결과와 밀접하게 관계하는 실천의 이데올로기다. 이러한 당파성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맑스주의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게 한다: 인류의 생존과 해방; 그것은 어떤 문제를 볼 때, 더 넓은 맥락에서 문제를 설정하기 위해 그 문제의 경계에서 부터 이의를 제기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 주위를 흔들고 있는 이데올로기들 때문에 보지 못하는 분석 목록들을 볼 수 있다. 또 맑스주의는 문제의 해결책들이 인민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한다. 그러나 더 좋은 세계에 대한 강력한 열망은 우리가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사람들이 우리의 프로그램에 얼마나 응답하는지, 얼마나 빨리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지 혹은 승리 후에 우리가 직면할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아무튼, 맑스주의는 과학과 공통으로 그리고 철학과 공통으로 일부 특성을 공유하지만 그것은 과학도 아니며 철학도 아니며 그리고 그 둘을 기계적으로 합쳐놓은 것도 아니다.
과학 그리고 좌파
과학적, 기술적 접근방법 역시 과학의 자기평가를 객관적 생산력으로 그리고 진리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파괴적인 결과를 [단순히] 과학을 잘못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고, 또 과학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진리를 왜곡한 것으로만 본다(역주- 과학 자체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데, 잘못 이용하거나 왜곡했기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IQ평가나 우생학과 같은 과학은 과학을 왜곡하거나 오용한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래서 과학-정치는 과학 정책으로 대치되고, 과학 정책의 임무를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족쇄를 제거 하고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제거하는 것으로 본다. 같이 실린 글(“과학과 발전: 농업에서 7가지 과학 발전주의자의 미신”)은 이러한 견해가 갖는 함정에 대해 잘 설명해 놓았다.
이러한 기술 관료적 견해에 반대하고 저항하기 위해, 과학의 계급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오만한 측면이 강조된다. <급진 과학 저널(Radical Science journal)>로 잘 알려진 이러한 견해는 다음 슬로건으로 요약된다. “과학은 사회적 관계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과학은 사회통제(social control)이다. [과학] 이론은 자연과는 관련이 없고 사회에 대한 의미만이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는 아원자 입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관한 것이다. 생산 확장의 목적은 더 이상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주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객관성은 계급 이데올로기를 숨기기 위한 슬로건이다.
페미니스트는 과학적 화법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것을 남성 가부장적인 측면이라고 강조하다. (수잔 그리핀(Susan Griffin(미국, 에코 페미니즘 문학가)의 “비인칭 수동문“에서) 예를 들어 지배를 나타내는 표현들, 자연을 ”관통하는(penetrating) “ ”그녀(자연)로부터 그녀(자연)의 비밀을 캐내는”,”지배(conquering) “ 등. 그리고 세계에 대한 공격적이고 거만한 [과학의] 자세는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특히 과학이 앎을(지식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은 대중 지식, (비이성이 아닌) 탈 이성적인(역주-이성 이외의 정신작용, 즉 감성, 감정 등을 의미) 그리고 “직관적” 지식, 즉 기원은 모르지만 특정 단계에서 감정적이고 심미적이고 지적인 결론을 통합한 과거 경험에 비추어 해석되는 인식들의 복합체들에 도전받고 있다(역주-과학은 아주 전문화되고 고도로 발전되었다고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정작 내일 만날 애인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직관이나 경험보다 더 해답을 주지 못한다).
자본주의 기술에 대한 천박한 미국 비평가들도 역시 [과학을] 유럽의 창조물로서 이질성을 강조하고 자연에 대한 전통적인 종교적 접근 속에서 저항의 원천을 찾고 있다. 기존에 과학에 대한 도전은 대안적인 치료와 생태학 등 여러 운동에서 그리고 새로운 전체론적(holism)인 여러 학회에서 실천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비판들은 우리가 과학을 분석할 때 중요하게 취급되고 고려되어야 한다. 이들은 기존의 과학 기구(institutions)의 외부이지만, 너무나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하기에] 통상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신선하고 새로운 시각을 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존의 과학을 부정할 때 단순히 기계적 의미에서 과학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되는 측면을 다시 통합하는 변증법적인 부정을 의미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적인 견해와 반과학적인 모든 견해를 극단적이라서가 아니라 일면적(one-sided)이기 때문에 비판한다. [이 두 측면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유주의자들은, “극단적인 것”은 나쁘고 “중도적인 것”이 좋다고 한다. 그리고 극단주의에 대한 비판은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1964년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에 대항한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의 선거 캠프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곤 했다(*). 그러나 극단-중도의 축은 세상에 대한 양적인 견해이다. 반면에 “일면적”이라는 비판은 질적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다원적 혹은 유연한 방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변증법적이 때문에 강조되어야 한다. 변증법적이라는 것은 어떤 견해에 대한 여러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자의 속기(shorthand, 날림의 언어)를 이용하는 것은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기에 반드시 피해야 한다.
기술과 과학의 도입과 발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과학과 기술은] 사회적 생산물로써 그 내용은 자연을 그대로 반영한 것도 아니며 미리 운명 지워진 특별한 어떤 길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해로운 기술에 대한 대안으로 기술 그 자체가 거부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기술은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물질세계에 작용하기 위한 의식적인 방법이다. 넓은 의미에서 기술은 우리 종(species)만큼 오래되었다. 우리는 단순히 기술 이전의 목가적인 자연 상태를 선호한다고 해서 그것을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사회적 필요를 보다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는 다른 대안적 기술을 찾을 수 있다.
과학에서 대안적인 길을 만드는 문제는 과학사회 내부에서 그리고 외부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문제이다. 그것은 과학이 가지고 있는 전 영역의 모순을 이해해야 하고, “실제 존재하는”, 대부분 부르주아지적인, 과학에 투쟁적이며 협동적일 수 있는 유연성을 필요로 한다. 파괴와 이윤을 위해 과학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저항은 물론이고 그것을 선호하는 제도적 구조 그리고 과학자들이 재생산되고 사회화되는 방식, 그들이 연구하는 지적인 틀에 대해서도 저항할 필요가 있다. 혁명운동은 과학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의 전쟁터로 다시 한 번 재인식해야 한다.
COPYRIGHT 1986 Monthly Review Foundation, Inc.
COPYRIGHT 2004 Gale Group
(*) 역주- 골드워터는 북베트남에 핵폭탄을 투하하고, 사회보장제도를 없애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친 극우주의 정치가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1964년 대선에서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운동을 했다. 린드 존슨은 골드워터의 핵폭탄과 같은 극단적인 발언을 비판하기 위해 광고를 제작했다. 데이지 꽃잎을 따며 놀던 순진한 어린 소녀의 눈망울에 핵폭발의 버섯구름이 투영되는, 그 유명한 ‘데이지 걸’광고가 그것이다.
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
리차드 레빈스 (Richard Levins)
내가 글을 배우기 전에 할아버지(아브라함 색만, Abraham Sackman)는 배드 비샵 브라운 신부(역주- 윌리엄 몽고메리 브라운, 미국 성공회 주교이자 공산주의자. 배드 비샵
과학과 역사는 몇 가지 이유로 맑스주의자들에게 중요하다. 첫째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지배계급의 지식 독점과 종교적인 반계몽주의에 저항하는 것이며 특히 신교도들이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사상에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이 건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이 질문에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은하수 주변 바깥, 2류 태양 주위를 도는 작은 행성위에서 최근에 살고 있는 하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바위에서 과거를 읽을 수 있고 우리의 노동으로 현재를 변혁하며, 별들의 미세한 빛의 조성을 프리즘으로 알아내고 또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 자신의 미래 발전을 도모한다.
세계를 알고, 지식화해야 한다는 열정적인 책임감은 우리의 적들에게는 오만함으로, 더 심하게 지독한 뻔뻔함으로 인식되었다. 적들은 맑스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 미학의 핵심으로 신비주의, 불가지론, 랜덤함, 비이성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40년대 고전 아서 커스틀러
맑스주의자들에게 과학 기술의 발전은 세계에 대한 최신 지식을 얻는 다는 의미 이외에 특별히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기술과 사회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산 수단의 발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발전은 변혁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과학은 단지 과학적 성취와 응용기술을 나열한 명부가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회 환경에서의 인간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에 대한 학습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야할 대상인 것이다. 최근 들어 점점 더 다양한 이슈들, 지식의 군사화, 건강, 환경 경제 발전, 여성 해방, 인종주의와 계급 서열화의 합리화 그리고 교육 문제 등에 대한 정치적 투쟁에서 과학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혁명 정당은 권력을 잡기 전과 후 모두 과학에 관한 프로그램을 채용해야 하고 이런 저런 과학적 근거를 형성하는 사회 운동과 어떤 식으로 공동 투쟁할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맑스주의 과학자는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이 이데올로기적, 제도적 속박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한 사회주의자들은 과학의 문제들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부활시키고, 과학을 투쟁 활동과 연구를 위한 실천과제 속에 배치시켜야 한다.
과학을 이해하는 작업은 과학의 주요 모순을 명확하게 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현대 과학은 지식 성장의 역사에서 한 단계이며, 동시에 서구 부르주아지 계급에 속박된 창조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과학이 그들의 이익과 권력 추구를 위해 필요한지를 묻고, 지금까지 발전된 과학으로 적절한 방법을 적용한다. 그리고 부르주아 사상에 순응할 수 있는 적절한 답을 찾아낸다. 현대 과학은 생산력의 한 부분이면서 생산관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과학은 상품으로서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모순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실재(reality)를 해석하고 반영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실재를 혼미하게 하기도 한다. 또 과학은 부르주아 혁명의 산물이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처럼 부르주아의 욕망과 필요를 초월해서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그 근본 태생의 성흔은 결코 털어버리지 못한다.
과학은 지적 자유를 향한 저항의 함성이 되기도 하지만 억압과 지배를 합리화하기도 한다. 조작된 미신에 대항하는 계몽의 무기이기도 하지만 제 3세계 문화의 지식을 인종주의와 맹목적 애국주의로 파괴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학은 우리 존재 조건이기도 하고 정치의 대상이기도 하다. 또 이데올로기 장벽을 넘어 국제 협력의 장이기도 하지만 계급투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길잡이기도 하지만 독단적인 교조의 그리고 자기자랑의 미사여구가 되기도 한다. 내적인 면에서, 작은 규모에서, 한 연구소 규모에서는 과학은 지적 교양을 증가시켜 주는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인 과학 활동 수준에서는 비이성적인 면이 증가하고 있다. 과학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지금 알려진 것으로 가정하고 연구하기도 하는데 종종 그러한 가정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맑스주의자는 이들 모순들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몇몇 학파들은 액면 그대로 이상화된 과학관을 받아들이고 있다. 많은 서구 유럽 맑스주의자 특히 유로코뮤니스트들 중에는 맑스주의 영역을 진보적인 정치경제 프로그램에만 국한시키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자연 과학의 오용과 독점을 비판하는 것 이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개념을 “스탈린주의”로 보고 거부하고 있다.
맑스주의 당에서 이런 독단적 흐름은 과학이 실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는 관심 없게 하고 과학을 객관적 실재와 동등한 것 그리고 (순수한) 진리로만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과학적 사회주의’처럼 ‘과학적’이라는 말을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말로 사용한다. 이미 엥겔스 시대에 “독일 사회주의는 최근에... 한층 더 터무니없는 잠꼬대를 지껄이며, ‘과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뻐기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엥겔스, 반듀링론) 그 이후 수십건의 체계적인 문건에서 단지 한 두 번 일어난 일을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해왔었고, 저자들은 그것을 인정해왔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유로꼬뮤니스트와 독단적인 좌파 모두 과학을 진보적이며 객관적이고 해방을 담지한 힘이라는 이상화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화려한 묘사에 맞지 않은 과학은 그것 자체로 순수하지만 단지 외부에서 탐욕과 ‘이데올로기’로 오염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에 접근하는 유물론자는 이런 이상적인 정의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 명확히 과학은 자본주의와 함께 진화하는 것으로써 정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역할을 부르주아 혁명에서 해방의 힘으로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를 견고하게 하는 힘으로 평가하고 짧게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계속)
인류역사의 빅뱅, 제로존 이론(?)
이랜드 사태 등 비정규직 투쟁으로 정신없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지난 8월 <과학동아>도 아닌 <신동아>는 과학 역사상 엄청난(?) 특종을 발굴했다. “한국 재야 과학자의 제로존 이론, 세계 과학사 새로 쓴다!”는 제목으로 “길이, 온도, 질량, 시간의 무차원화… 소립자에서 우주까지 대통합”한다는 이론을 발표한 것이다. 이 잡지는 제로존 이론을 “바벨탑 이전의 세계로 복원"하고 "인류 역사에 빅뱅 초래"할 만하며, "노벨상 0 순위"라고 평가하고 있다.
아마추어(그들은 ‘재야’ 과학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과학자 양동봉씨(표준반양자물리연구원장)에 따르면, 제로존 이론으로 질량(㎏), 시간(초), 길이(m) 등 7개 기본단위를 숫자로 변환해 모두 통일시킬 수 있다고 한다. 즉 사람의 키와 몸무게를 차원이 다른 숫자로 바꾸어 더하거나 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과학이론을 숫자로 통일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이비 종교의 교주이기도 한 피타고라스를 연상케 한다.
이 이론에 대한 지지층도 만만치 않다. 전 KIST(한국과학기술 연구원) 부원장이자 단국대 부총장(전기전자공학)인 오명환 교수는 “양원장의 발견은 (중략) 물리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고, 제주대 교수 이현주 교수(원자핵 공학)는 “기존 패러다임의 중대한 전환을 초래할 것이다. 노벨물리학상을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서울대의 문병로 교수(컴퓨터공학부)는 “그가 발견한 방법은 매우 신기하고 놀랍다.” 한국생산기술 연구원 이상목박사는 “산업적 가치는 상상의 범위를 넘어설 것이다. 실험하지 않고도 결과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에 실험활동의 90%는 사라지고 진짜 필요한 실험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이것만 해도 경제적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아울러 정보, 컴퓨터, 재료, 소립자, 생체공학 등에 끼칠 영향은 ‘엽기적’일 것이란 표현도 부족하다.”고 평가했다(지지자들의 발언은 더 있지만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지지 발언이 이쯤 되면 제로존 이론의 진실성과 무관하게 왠지 줄기세포의 악몽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제로존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들 중에 물리학자는 한명도 없다.
물리학계에서는 사태 진압에 나섰다. 한국물리학회는 지난 6일 기자회견에서 '제로존이론'을 과학적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학회는 "양 원장과 그의 지지자에게 3차례에 걸쳐 논문 제출을 요청했으나 논문을 받지 못했“으며, 양 원장이 논문을 투고한 '유러피언 피지컬 저널 C'의 편집자로부터 논문 수준이 심사에 회부하지 못할 정도로 낮아 편집자가 즉각 `게재 불가(reject)' 판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제로존 이론과 인터넷
양 원장 측은, 물리학계가 검증을 위해 논문 제출을 요구했을 때, “유럽 물리학회지에서 현재까지도 심사 중인 논문을 공개한다는 것은 논문심사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어느 나라에서든 심사 중인 논문을 심사종료 전에 물리학회 등을 통하여 미리 공개한 사례는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과학자들 중 많은 수는 논문지에 발표하기 전에 인터넷 arXiv(http://arxiv.org)에 올려 토론하고 논쟁한다. 때로는 arXiv에 올려 많은 비판을 받고 논문지에 실리기 전에 스스로 철회하기도 한다. arXiv의 특성상 표절이나 거짓 데이터를 올리기 힘들다. 인터넷에 올라온 논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접근해서 오랜 시간 동안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조작된 데이터를 올렸다가는 그 흔적이 두고두고 남기 때문에 좁은 과학기술계에 살아남기 힘들다.
양 원장 측은 재야(?) 과학자답게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류에 대한 저항에서 찾기도 한다. 주류 과학계는 그물망처럼 권력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기존 이론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다. 주류이론에 도전하는 경우 논문지에 실리지 못하거나 왕따 당하기 쉽다. 양 원장 측도 같은 이유로 물리학계의 논문 검증을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고 비밀주의는 해답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한 인터넷은 해결책을 주기도 한다. 한 예로 양자역학 전문가인 Shahriar Afshar 박사는 보어의 상보성 이론을 부정하는 실험 방법을 제안한 바 있다. 보어는 음악에서의 바흐와 같이 양자역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입지적인 존재이다.
빛은 입자적 특성(국소영역에 모여 있는 특성)과 파동적 특성(전 공간에 퍼져있는 특성)이 모두 관측된다. 상보성 이론이란 파동성과 입자성이라는 모순적 특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이 상보성 이론에 반하는 이론이란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실험에 관한 것이다. 참고로 자연 변증법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상보성 이론에 반대하고 있다. 자연 변증법에 따르면 모순은 물질 내부에서 발생하고, 공존해야 하기 때문에 동시에 관측되어야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주장은 좌파 내에서 맑스의 이윤율저하의 경향에 반대하는 규모로 생각할 수 있다. 아무튼, Shahriar Afshar 박사는 자신의 논문과 제세한 실험 결과를 웹 블로거에 올려 공개토론을 제안하였고 (http://irims.org/blog/index.php/questions), 이를 통해 오히려 주류 과학계에 도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왜 이런 사건들이 반복될까?
양원장 측은 그들의 이론으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표준 & 원천기술 국가로 확고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고, 21세기 대한민국의 차세대 성장 동력을 자연스럽게 획득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논문지보다 신동아에 먼저 발표한 이유 역시 해외 유명 학술지에 제출된 “논문의 게재 승인을 계속 기다리다가, 시기를 놓쳐 핵심 정보가 관련 외국학자들에게 유출되는 위험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즘 들어 이러한 종류의 사건들이 자주 반복되고 있다. 2005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김현탁 박사팀이 노벨상을 수상 가능성이 높은 금속 절연체 이론을 개발했다고 언론에 크게 보도한 바 있다. 이 기술로 1천억 달러(한화 약 100조원)로 추정되는 세계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과장 보도였음이 드러났다. 30조 이상의 국익을 안겨줄 것으로 예측된 황우석 줄기세포 사건도 또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유지가 발견되면 누가 빨리 점유하느냐 경쟁을 해야 한다. 배타적 소유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므로, 안정적인 소유권이 확보될 때 까지 비밀스럽게 작업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이미 인류의 공동자산이 아닌 한 국가 혹은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배타적 소유가 확보될 때까지 숨기는 풍토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풍토는 제로존 이론의 아류를 반복 생산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돈이 되지 않는’ 기초연구에 투자 받지 못하는 현 과학 기술계의 현실도 여기에 한 몫을 한다.
댓글 목록
앙겔부처
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와 공유지의 비극 따위 날려버릴 수 있는.. 너무 잘 읽었어요!진철
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http://en.wikipedia.org/wiki/Tragedy_of_the_commons (위키피디아)http://dieoff.org/page95.htm (1968년 Science지에 발표된 원문입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용어는 1968년도에 Garrett Hardin이 The Tragedy of the Commons 이라는 윗 링크 글을 발표하면서 생겨난 개념이라고 알고 있어요. 글 자체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저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요.
일단 하딩은 '공유지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사유화가 아니라 공공영역에서의 통제라고 생각했구요, 몇몇 나라에서 자신의 글이 공공지의 사유화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깊은 우려와 반대를 표현했었어요. 하딩의 글은 sustainability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며 미국의 1960, 70년대 환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구요.
'공유지의 비극'이 조작된 것이라는 말 뒤에 가지신 생각이 궁금해서 이렇게 댓글 남겨요. 물론 이 짧은 칼럼에서 더 깊은 고민을 보여주기는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소유와 점유를 구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서 하딩이 글에서 보여준 농토 경작을 예로 들어 논리 전개를 시작한 공유지의 비극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실제적인 반론 없이 그의 의견을 '무조건 황폐해진다'는 식으로 몰아부치고 사실 조작된 것이라는 말은 억지 같아서요. 노동자 집단의 소유와 통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게.. 뭐랄까요.... 그냥 레토릭으로 들린다고 할까요.
더 배우고 싶어서 시비를 겁니다. 궁금합니다.
지각생
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오우~ 반가운 목소리로군요 :)해민
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글이 대문에 걸렸군요. 부끄~. 진철/자세한 comment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될 듯합니다. 공돌이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 하시면 안됩니다. ㅎㅎ그런데..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애기는 사실, 공장이나 연구소에서
생산 및 기술 개발(생산)의 계획단계부터의 '민주적 결합'을 요구하는 운동을 하자는 취지로, 이미 사유화 된 공장과 연구소 환경속에 이데올로기화 한 "공유지의 비극"의 논리를 깰 필요가 있을 듯해서 적은 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공유지의 비극에서 언급되는 기본적인 가정에 불만이 있습니다. "목동이 자신의 양을 최대화 하려고 한다는 점", "목동들은 서로 어떤 논의도 하지 않는다는 점" 이 두가지의 가정은 결론을 미리 전제한 한 듯한 느낌이 들고, 당시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중립적 과학을 가장한 <의식적/무의식적> 편들기?)
또 그 대안으로, 노동자 (민중) 집단의 소유(?)와 '민주적' 통제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요. 그러나 '개별적 주체'의 판단보다 공유지의 비극을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많다는 생각하며, (당연한 애기지만) 그러한 합의 구조가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들사람
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진철님이 날카롭게 지적한 대목이 성가신 물어뜯기를 대비해ㅋ 보완할 여지가 분명 있다손 쳐도, 전체적인 논지는 두고두고 살찌워가야 할 만큼 소중하다고 봅니당.^^ 진철님의 지적성 질문도 아마 그래서 이뤄진 걸 텐데, 좀 딴 얘기지만 공돌이라고 하시니 더더욱 반가운 주장이군요.ㅋ사실 역사적 사회주의 블럭의 국가 소유가 사적 소유의 철폐라기보단 바로 그 사적 소유의 '집중화된 형태'와 별다르지 않았다고 본다면, '노동자들의 집단소유'란 말은 진철님 지적마따나 듣기좋은, 그래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레토릭이 되기 십상이다 싶어요. 이렇듯 국가소유가 사적 소유의 변종이자 형태적 연장이나 마찬가지였다면, '민주적 통제'라는 건 그 방법상의 실효성을 떠나 정작 토지와 건축물 등 기존 생산수단의 '사용'이 뜻하는 바와 관련해 (인식론적, 존재론적 단절을 수반하는) 노동자들의 '자기변화'란 어떤 것인지를 공백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돌아가야 할 기본 원칙' 같은 것도 확실히 아니지 싶어요. 때문에 설사 기본원칙이라 한들 막상 텅 빈 무엇에 불과할 테구요.
아무래도 중요한 건, (이미 자본화된) 현존하는 여러 생산수단들에 대해, '내 소유(혹은 특정 법인/문중의 소유)'라고 해서, 더군다나 그게 영속적인 이윤 창출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수다한 누군가에겐 당장 필요한데도 사용이 금지, 제한돼야 하는 식의 준칙이 적용될 수 없도록 하는 '사회적 힘'을 육성하는 일일 텐데요. 이러자면 우선 사적 소유와는 엄연히 구별되는 '개별적 소유'가 '필요에 의한 생산'을 장려하는 점유 개념과 병존할 수 있는 사용(과 활동)의 준칙을 '사적 소유'화된 생산수단들에 대해 적용, 개입시키는 집단적인 실천 기술과 의제들이 (아무래도 현장의 이른바 '생산직'/'기술직' 노동자들의 중지를 바탕으로) 고안돼야겠지요.
이런 관점을 따를 경우, 예컨대 쌍용차 집단해고 사태 같은 경우도, 실은 오래 전부터 과잉생산 조짐이 완연했던 자동차산업자본(가들)의 입지이전 및 노동유연화 전략에 대해 "자르지 마라!" 식의 수세적 총고용보장 요구를 넘어서서, 기존 생산수단/사업장의 용도를 이윤의 축적에서 살림살이의 축적으로 변환시킬 '급소'들을 건드리고 요구하는 식으로 주도권을 잡아간다는 '전망'도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았을까요? 쌍용차 사태가 끝난 게 아니라 앞으로도 도래할 상황을 암시하는 진행형인 사건이라고 하면, 이게 단순 가정일 수만도 없겠다는 생각입니다만.
해민
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진철,들사람 모두 감사합니다.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만, 저의 욕심이겠지요? 아무튼 저의 생각도 조만간에 남기겠습니다.(입에 풀칠하느라.. 요즘 좀..ㅎㅎ) 지각생, 앙겔부처님도 반겨 주셔서 감사~紅知
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와아~ 정말 정말 좋은 글 그리고 덧글 잘 읽었습니다...>.<쓰신 글을 의약품 쪽과 관련해서만 소화해 읽었습니다만...지난 2년간 푸제온 투쟁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것이, 의약품 운동이 이미 만들어진 약에 대해 가격 또는 공급량을 정하는 시점에서 시작되었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강제실시 청구 과정에서 국내에서 푸제온의 물질을 대체할 수 있는 물질 개발이 이뤄졌었고, 그러나 시장의 필요에 부응하지 못해 사장된 사실을 알고 나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졌구요.
결국 약이 시장에서 나오는 시점이 아니라('분배'의 문제), 시장에서 나오기 전부터 개입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배분'의 문제?)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그 대안으로서 언급되는 국영제약회사 뭐 이런 것들, 거기에 왠지 심정적으로 동의가 힘든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분이 무엇인지 본문 글과 덧글에서 잘 설명을 해주시네요. 여하튼 좋은 글과 논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