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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초>, 1959, 오즈 야스지로

색이 입혀진 까닭인지 <부초>는 오즈 야스지로의 다른 영화들과 문맥 상에 그 위치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부터 등장하던 배우들의 구성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보여준다. 하라 세츠코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지만 지리지리한 오즈 야스지로로의 여행에서 이러한 <부초>는 오아시스처럼 청량하게 다가왔다. <동경 이야기>, <늦봄>이 안에서 밖으로의 시선이라 한다면 <부초>는 밖에서 안으로의 시선이라 말하고 싶다. <동경 이야기>와 <늦봄>에서 가족을 중심으로 그것으로부터 이탈해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반면 <부초>는 일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꾸리지 못한 떠돌이 유랑 극단이 정착한 이들에게 갖는 부러움을 말한다. 유랑 극단은 아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근대적 가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구식인 동시에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에도 부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철저한 이방인이 된다. 실제 영화 말미에 가서 극단은 갈 곳 없는 신세로 인해 그 마저도 해체되고 만다. 다들 어디로 갈 것인가? 받아줄 가족이 있는 이들은 다행이지만 그것조차 남아 있지 않은 이들, 단장과 질투하는 여배우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다만 다시 유랑을 시작하는 수 밖에. 이러한 말미에서 내가 다소 위안을 찾는 것은 그 둘이 함께라는 점 뿐이다.

 

 - <부초>가 지니는 이러한 전도된 시선은 배우와 관객 간의 전도를 보여주는 위의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전도는 단순한 평행적 위치 바꿈이 아니다. 관객이 배우를 보는 태도와는 달리 배우들은 커튼 뒤에 몸을 숨긴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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