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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기로 읽힐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를 잃은 케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죽은 아버지의 그늘이 드리워진 인물이다. 영화의 초반 그는 감히 아버지의 서재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 하지만 완전히 갇혀버린 상황, 소통과 욕망의 통로가 극단적으로 막혀버린 상황에서 그는 욕망의 힘으로 바로 그 서재로 진입하게 된다. 이것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오이디푸스적 투쟁의 시작이 된다. 하지만 어머니의 태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케일은 여전히 어머니의 신뢰를 받을만한 팔루스를 지니지 못한다. 그녀에게 케일은 아직 아버지라는 존재에 넘어서지 못한 미성숙한 인간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영화는 터너라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아버지의 대체물을 등장시키고(어머니와 터너 간에 묘한 연애 감정이 있다) 케일은 그를 물리침으로써 아버지의 그늘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제야 케일은 족쇄를 풀고 집 밖으로 나와 어머니가 아닌 그녀에게 다가간다.
쉽게 정신분석학적으로 영화를 읽어볼 수 있었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공식에 대입한 듯이 보여주는 이 영화는 오히려 그 정확한 대입이라는 특징 때문에 정신분석학적으로 읽는 것이 진부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보다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케일이 보여주는 감금 상태에서의 생활이다. 그는 TV와 비디오 게임을 통해 시간을 보내지만 이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자, 밖의 소식을 혹은 단지 한마디 말이라도 듣기 위해 필사적이다. 누구와도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 주는 압박감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아니러니컬하게도 그는 세상 누구보다도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의 전자발찌는 24시간 내내 감시자와 그를 연결시켜준다. 또한 이 감시자는 단순히 처벌하기 위함 감시자로만 기능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는 감시자인 동시에 그가 위협에 빠졌을 때, 언제 어디서라도 달려오는 보호자이기도 한 것이다(보호를 받는 자가 장비대여료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양가적인 면이 곧 케일의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케일이 망원경을 들고 이웃을 염탐하기 시작한 순간, 그는 더 이상 감시당하는 대상이 아닌, 감시자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쉽게 푸코가 말하는 감시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는 여기서 조금 더 복잡하게 그러니까 이중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것 같다. 케일은 원형 감옥에 든 죄수로 감시의 시선이 내재된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푸코가 말하는 파놉티콘의 죄수가 된다. 하지만 그의 이웃들은 무엇인가? 케일과 그의 이웃의 관계에서 보자면 케일이 감시자이고 이웃들은 죄수가 된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케일은 단순히 처벌받는 대상으로 그들에게 숙지되고 있는 것이지 감시자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웃들은 케일이 보내는 감시의 시선을 내재화하지 않고 진정한 '리얼리티'를 케일에게 그대로 보여준다. 내재된 감시 체계가 작동하지 않을 때의 그들의 모습은 얼마나 자극적이고 재밌는 구경거리인가! 영화의 초반부 케일이 보는 TV 프로그램을 주목해보자. 그는 바로 그러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하나인 <현장고발 CHEATERS>를 보고 있다. 최근 불고 있는 리얼리티 쇼의 인기는 이미 바로 그러한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이라는 증거는 아닌가.
하지만 이런 재밌는 리얼리티도 잠시. 감시당하는 자이자 감시하는 자인 케일의 존재에서 섬뜩함이 느껴진다.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체계의 도래의 예감에서 느껴지는 그런 공포이다. 자기도 모르게 찍힌 몰카가 인터넷에서 나돌지도 모르는 세상, 내가 쓴 글이 웹상 어디에 떠도는지 알 수 없는 세상. 그물망(웹)처럼 엮인 네트워크 사회에서 푸코가 말하는 파놉티콘의 감시자와 같은 어떤 꼭지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제 그물 속에 포획된 모든 자들이 감시자가 될 수도 감시당할 수도 있다. 앞으로 우리는 어디서 발을 뻗고 쉴 수 있을까. 노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 것보다, 과시적으로 쇼핑을 하는 것보다, 그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날이 오게 되진 않을까? 그러나 밖은 볼 수 있는 채로 말이다. 모두가 파놉티콘의 중앙 탑에 갇히길 원하는 세상.
"나 제발 혼자 있고 싶어요. 아무도 날 보지 못하게 해주세요. 얽히기 싫으니까요. 돈은 줄게요."
그러나 이것이 잘 되지 않았을 경우, 터너가 보이면 안되는 케일을 보게 된 것처럼, 그 결과는 서로의 치부가 낫낫이 드러나고 이를 다시 막기 위한 끔찍한 전쟁이 벌어질지도.
색이 입혀진 까닭인지 <부초>는 오즈 야스지로의 다른 영화들과 문맥 상에 그 위치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부터 등장하던 배우들의 구성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보여준다. 하라 세츠코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지만 지리지리한 오즈 야스지로로의 여행에서 이러한 <부초>는 오아시스처럼 청량하게 다가왔다. <동경 이야기>, <늦봄>이 안에서 밖으로의 시선이라 한다면 <부초>는 밖에서 안으로의 시선이라 말하고 싶다. <동경 이야기>와 <늦봄>에서 가족을 중심으로 그것으로부터 이탈해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반면 <부초>는 일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꾸리지 못한 떠돌이 유랑 극단이 정착한 이들에게 갖는 부러움을 말한다. 유랑 극단은 아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근대적 가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구식인 동시에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에도 부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철저한 이방인이 된다. 실제 영화 말미에 가서 극단은 갈 곳 없는 신세로 인해 그 마저도 해체되고 만다. 다들 어디로 갈 것인가? 받아줄 가족이 있는 이들은 다행이지만 그것조차 남아 있지 않은 이들, 단장과 질투하는 여배우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다만 다시 유랑을 시작하는 수 밖에. 이러한 말미에서 내가 다소 위안을 찾는 것은 그 둘이 함께라는 점 뿐이다.
- <부초>가 지니는 이러한 전도된 시선은 배우와 관객 간의 전도를 보여주는 위의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전도는 단순한 평행적 위치 바꿈이 아니다. 관객이 배우를 보는 태도와는 달리 배우들은 커튼 뒤에 몸을 숨긴채 바라보고 있다.
자전거를 타는 노리코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카메라에 의한 트래킹 숏은 마치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 같은 화면을 만들어 낸다. 이는 ‘노리코는 자전거를 타고 있다.’라는 인식과 결합되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특히나 노리코의 배경이 지나가는 풍광이 아닌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하늘이기에 그 어색함이 배가되고 있다. 이 어색함에서 내가 머뭇거리는 것은 그 속에서 노리코와 카메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는 노리코가 카메라에 갇혔다 해야 할지 카메라가 노리코에 매달려 다닌다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움에서 오고 있다. 카메라를 지우고 스크린의 표면에서 다시 질문하자면 노리코는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지한 것일까?
야스지로의 카메라는 사실 거의 모든 인물을 영화에 내재된 어떤 규칙에 의해 평면적이고 한결같이 담아내고 있다. 또한 이렇게 화면 속에 담긴 인물들에게서 역시 노리코의 경우와 같은 유사한 어색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유독 노리코에게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노리코가 영화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생각되기 때문이다. 노리코 역을 맡은 하라 세츠코는 <동경 이야기>에서 역시 <늦봄>에서 노리코에 대응될 수 있는 이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고 있는데 이 점에서 최초의 질문을 노리코가 아닌 하라 세츠코에 관한 것으로 바꾸고 싶기도 하다. 하라 세츠코가 보여주는 지나치게 과장된, 그래서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그 미소는 분명 유별나기 때문이다. 하라 세츠코는 두 영화 모두에서 움직이길 거부하고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동경 이야기>에서는 8년 전 사별한 남편 곁에 여전히 남아 있고, <늦봄>에서는 홀로 남은 아버지 곁에 남아 있길 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부동으로 인해 갈등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갈등은 하라 세츠코 특유의 가면과 같은 마스크에 의해 은폐된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하라 세츠코는 움직이는 세계와 그것에 대한 거부를 한 몸에 담아내는 영화의 주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처음의 자전거 장면을 환기시켜 보자. 그 속에는 움직이지만 정지한 노리코와 역시 정지해 있지만 움직이는 영화라는 둘 간의 대응이 존재한다. 만약 스크린을 근대를 표상하는 한 표면이라 한다면 하라 세츠코를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근대 일본 속의 인물을 표상하는 한 표면(얼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분히 조작적인 표정을 드러내는 그녀의 얼굴에서 고도로 연출된 야스지로의 근대적 화면을 읽는 것은 과도한 상상일까? 이 상상 하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동경 이야기>와 <늦봄> 그리고 더 있을 하라 세츠코와 그 주변 인물들의 변주를 통해 일본의 근대라는 갈등적 ‘공간’을 근대적 ‘표면/얼굴’에 담아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평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인간의 근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표면/표층을 통한 근원과의 극렬한 대비를 통해서 일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평면인 표면으로 압축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 강박적 성격으로 인해 ‘공간은 표면에 압축될 수 있다’ 혹은 ‘압축되어야 한다.’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원근법이 우리를 속이려 했다면 야스지로는 허망함 속에 우리를 가두려 하는 것은 아닌지.
<동경 이야기>는 오즈 야스지로가 보여주는 형식미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나 역시 지고지순한 미학의 대전제라 할 수 있는 통일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주제적인 측면에서의 동경의 비좁고 갑갑함이 그의 강박적이고 편집증적인 화면 구성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비좁은 일본 다다미 방을 보여주는 평면적 화면들은 관객이 그가 말하려는 정서, 갑갑함을 느끼기에 충분하고도 남아 심지어는 불편함까지 감지된다. 형식적으로 아니 훌륭하다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물을 다루는 그의 태도이다. 유심히 살펴 보면 그가 화면에서 인물의 구성에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는 배우들의 걸음걸이까지도 계산했다고 한다. 각각의 인물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드러나는 방식이 카메라 앞에서 정확하게 고정되어 있다.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인물들은 재현되어서는 안된다는 듯이 그 방식은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화면 속에서 나에게는 인물들이 미장센을 구성하는 기타 장식들과 같이 고정되어 죽은 듯이 보인다. 화면의 평면적 효과는 이러한 효과를 배가 시키는 듯 하다. 이마저도 통일성이라는 미학적 관점에서 훌륭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을 지니는 내가 오히려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저항감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인물이 카메라 앞에서 가구와 같은 무생물처럼 취급된다는 느낌이 <동경 이야기>가 훌륭한 형식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지나친 보수적 도덕성을 견지한 노리코라는 인물 역시 불편하긴 마찬가지지만 그것은 리얼리티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법도 한 구석이다. 그러나! 철저한 의도적 구성에 의한 죽어버린 인물들의 형식 중심의 영화를 과연 리얼리즘 미학을 추구하는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가 또 다시 떠오른다. 개인적 관점에서는 이 영화를 리얼리즘 계열로 분류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이로써 노리코가 보여주는 보수성에 대한 면죄부가 파기된다. 이제 우리는 그가 보여주는 보수성에 대해 공격할 수 있다. 보수적인 도덕적 강박때문에 <동경 이야기>의 인물들이 모두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 정서로서 이해하기 힘든 가족 간의 깍듯한 비인간적 예의가 보여주는 바는 바로 억압적인 도덕적 강박으로 인한 영화의 죽음이고 비인간화는 아닐런지. 인간중심적 사고를 넘어 야스지로의 카메라는 세계 속이 아닌 위에 군림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이상용의 비평 <아이들과 어른들의 변증법 - 태어나기는 했지만>은 어른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를 대립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변증법적 갈등으로 읽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이 두 세계를 병치시켜놓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대립적으로 그리고 있는가 다시 검증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아이와 어른, 순수와 비순수라는 통념적인 대립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세계가 과연 순수하게 그려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이러한 대립적 인식에 무리가 있음이 드러난다. 아이들과 어른의 세계는 다만 그 기준이 다를 뿐 모두 위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다만 위계를 세우는 기준, 그 잣대가 아이들에게는 힘이고 어른들에게는 돈이 될 뿐이다. 특히 어른들의 사무실과 아이들의 교실을 연속적으로 잇는 트래킹 숏은 이 두 세계가 얼마나 유사한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어른들의 사무실은 아이들의 교실로 자연스럽게 유사성을 가지고 이어진다.
서로 구분되어 보이는 이 두 세계는 유사한 논리로 돌아가고 있지만 서로 섞이기 보다는 독립적으로 구성되고 있다. 두 세계 모두 위계는 존재하지만 그 위계의 정열에 있어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세대를 통한 전복을 꿈꿀 가능성이 보인다. 물론 똑같이 위계적 사회이겠지만. 그러나 야스지로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전복의 가능성보다는 어른들의 위계가 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승계될 것임을 암시한다. 지금은 형제가 타로 위에 군림하고 있지만, 결말에서는 사이가 좋아지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성인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같이 계급적 위치를 점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아이들의 세계가 어른들의 세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야스지로는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술을 파는 아저씨는 아이들의 힘으로 쓰여지는 성인이지만 그를 이용하여 쓸 수 있는 힘의 논리는 곧 성인들의 자본의 논리이다. 좀 더 거부감이 없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로 이러한 종속성이 다시 한번 나타나는데 주먹밥 앞에서 단식투쟁 중이었던 형제가 굴하는 장면에서 기성 세대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다음 세대의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어젯밤 훌륭함을 위해 열렬히 투쟁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은 다음 날 아침 배고픔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산 이들에게 받을 수 밖에 없는 그 무엇 때문에 아직도 악순환의 고리들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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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너무너무 보고싶은데 -ㅅ-);; 매번 놓치고 만다는. 흠흠 (아무튼 영화 제목 완전 최고 아닙니꺄?)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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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지만...... 마구 궁금한 제목이죠.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