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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03
    <DISTURBIA>, 2007, D.J. 카루소
    inforata

<DISTURBIA>, 2007, D.J. 카루소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기로 읽힐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를 잃은 케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죽은 아버지의 그늘이 드리워진 인물이다. 영화의 초반 그는 감히 아버지의 서재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 하지만 완전히 갇혀버린 상황, 소통과 욕망의 통로가 극단적으로 막혀버린 상황에서 그는 욕망의 힘으로 바로 그 서재로 진입하게 된다. 이것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오이디푸스적 투쟁의 시작이 된다. 하지만 어머니의 태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케일은 여전히 어머니의 신뢰를 받을만한 팔루스를 지니지 못한다. 그녀에게 케일은 아직 아버지라는 존재에 넘어서지 못한 미성숙한 인간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영화는 터너라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아버지의 대체물을 등장시키고(어머니와 터너 간에 묘한 연애 감정이 있다) 케일은 그를 물리침으로써 아버지의 그늘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제야 케일은 족쇄를 풀고 집 밖으로 나와 어머니가 아닌 그녀에게 다가간다.


 

쉽게 정신분석학적으로 영화를 읽어볼 수 있었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공식에 대입한 듯이 보여주는 이 영화는 오히려 그 정확한 대입이라는 특징 때문에 정신분석학적으로 읽는 것이 진부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보다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케일이 보여주는 감금 상태에서의 생활이다. 그는 TV와 비디오 게임을 통해 시간을 보내지만 이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자, 밖의 소식을 혹은 단지 한마디 말이라도 듣기 위해 필사적이다. 누구와도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 주는 압박감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아니러니컬하게도 그는 세상 누구보다도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의 전자발찌는 24시간 내내 감시자와 그를 연결시켜준다. 또한 이 감시자는 단순히 처벌하기 위함 감시자로만 기능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는 감시자인 동시에 그가 위협에 빠졌을 때, 언제 어디서라도 달려오는 보호자이기도 한 것이다(보호를 받는 자가 장비대여료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양가적인 면이 곧 케일의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케일이 망원경을 들고 이웃을 염탐하기 시작한 순간, 그는 더 이상 감시당하는 대상이 아닌, 감시자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쉽게 푸코가 말하는 감시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는 여기서 조금 더 복잡하게 그러니까 이중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것 같다. 케일은 원형 감옥에 든 죄수로 감시의 시선이 내재된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푸코가 말하는 파놉티콘의 죄수가 된다. 하지만 그의 이웃들은 무엇인가? 케일과 그의 이웃의 관계에서 보자면 케일이 감시자이고 이웃들은 죄수가 된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케일은 단순히 처벌받는 대상으로 그들에게 숙지되고 있는 것이지 감시자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웃들은 케일이 보내는 감시의 시선을 내재화하지 않고 진정한 '리얼리티'를 케일에게 그대로 보여준다. 내재된 감시 체계가 작동하지 않을 때의 그들의 모습은 얼마나 자극적이고 재밌는 구경거리인가! 영화의 초반부 케일이 보는 TV 프로그램을 주목해보자. 그는 바로 그러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하나인 <현장고발 CHEATERS>를 보고 있다. 최근 불고 있는 리얼리티 쇼의 인기는 이미 바로 그러한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이라는 증거는 아닌가.

하지만 이런 재밌는 리얼리티도 잠시. 감시당하는 자이자 감시하는 자인 케일의 존재에서 섬뜩함이 느껴진다.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체계의 도래의 예감에서 느껴지는 그런 공포이다. 자기도 모르게 찍힌 몰카가 인터넷에서 나돌지도 모르는 세상, 내가 쓴 글이 웹상 어디에 떠도는지 알 수 없는 세상. 그물망(웹)처럼 엮인 네트워크 사회에서 푸코가 말하는 파놉티콘의 감시자와 같은 어떤 꼭지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제 그물 속에 포획된 모든 자들이 감시자가 될 수도 감시당할 수도 있다. 앞으로 우리는 어디서 발을 뻗고 쉴 수 있을까. 노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 것보다, 과시적으로 쇼핑을 하는 것보다, 그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날이 오게 되진 않을까? 그러나 밖은 볼 수 있는 채로 말이다. 모두가 파놉티콘의 중앙 탑에 갇히길 원하는 세상.

"나 제발 혼자 있고 싶어요. 아무도 날 보지 못하게 해주세요. 얽히기 싫으니까요. 돈은 줄게요."

그러나 이것이 잘 되지 않았을 경우, 터너가 보이면 안되는 케일을 보게 된 것처럼, 그 결과는 서로의 치부가 낫낫이 드러나고 이를 다시 막기 위한 끔찍한 전쟁이 벌어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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