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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9/03
    <DISTURBIA>, 2007, D.J. 카루소
    inforata
  2. 2007/08/31
    <자유의 환영>, 1974, 루이스 부뉴엘
    inforata
  3. 2007/08/31
    오즈가 남긴 것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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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8/31
    오즈가 남긴 것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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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7/25
    <부초>, 1959, 오즈 야스지로
    inforata
  6. 2007/07/19
    <늦봄>, 1949, 오즈 야스지로
    inforata
  7. 2007/07/18
    <21 Hungarian Dances>, Labeque Sisters.
    inforata
  8. 2007/07/13
    <동경 이야기>, 1953, 오즈 야스지로
    inforata
  9. 2007/07/13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오즈 야스지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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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7/12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까?
    inforata

<DISTURBIA>, 2007, D.J. 카루소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기로 읽힐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를 잃은 케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죽은 아버지의 그늘이 드리워진 인물이다. 영화의 초반 그는 감히 아버지의 서재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 하지만 완전히 갇혀버린 상황, 소통과 욕망의 통로가 극단적으로 막혀버린 상황에서 그는 욕망의 힘으로 바로 그 서재로 진입하게 된다. 이것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오이디푸스적 투쟁의 시작이 된다. 하지만 어머니의 태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케일은 여전히 어머니의 신뢰를 받을만한 팔루스를 지니지 못한다. 그녀에게 케일은 아직 아버지라는 존재에 넘어서지 못한 미성숙한 인간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영화는 터너라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아버지의 대체물을 등장시키고(어머니와 터너 간에 묘한 연애 감정이 있다) 케일은 그를 물리침으로써 아버지의 그늘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제야 케일은 족쇄를 풀고 집 밖으로 나와 어머니가 아닌 그녀에게 다가간다.


 

쉽게 정신분석학적으로 영화를 읽어볼 수 있었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공식에 대입한 듯이 보여주는 이 영화는 오히려 그 정확한 대입이라는 특징 때문에 정신분석학적으로 읽는 것이 진부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보다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케일이 보여주는 감금 상태에서의 생활이다. 그는 TV와 비디오 게임을 통해 시간을 보내지만 이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자, 밖의 소식을 혹은 단지 한마디 말이라도 듣기 위해 필사적이다. 누구와도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 주는 압박감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아니러니컬하게도 그는 세상 누구보다도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의 전자발찌는 24시간 내내 감시자와 그를 연결시켜준다. 또한 이 감시자는 단순히 처벌하기 위함 감시자로만 기능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는 감시자인 동시에 그가 위협에 빠졌을 때, 언제 어디서라도 달려오는 보호자이기도 한 것이다(보호를 받는 자가 장비대여료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양가적인 면이 곧 케일의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케일이 망원경을 들고 이웃을 염탐하기 시작한 순간, 그는 더 이상 감시당하는 대상이 아닌, 감시자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쉽게 푸코가 말하는 감시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는 여기서 조금 더 복잡하게 그러니까 이중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것 같다. 케일은 원형 감옥에 든 죄수로 감시의 시선이 내재된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푸코가 말하는 파놉티콘의 죄수가 된다. 하지만 그의 이웃들은 무엇인가? 케일과 그의 이웃의 관계에서 보자면 케일이 감시자이고 이웃들은 죄수가 된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케일은 단순히 처벌받는 대상으로 그들에게 숙지되고 있는 것이지 감시자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웃들은 케일이 보내는 감시의 시선을 내재화하지 않고 진정한 '리얼리티'를 케일에게 그대로 보여준다. 내재된 감시 체계가 작동하지 않을 때의 그들의 모습은 얼마나 자극적이고 재밌는 구경거리인가! 영화의 초반부 케일이 보는 TV 프로그램을 주목해보자. 그는 바로 그러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하나인 <현장고발 CHEATERS>를 보고 있다. 최근 불고 있는 리얼리티 쇼의 인기는 이미 바로 그러한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이라는 증거는 아닌가.

하지만 이런 재밌는 리얼리티도 잠시. 감시당하는 자이자 감시하는 자인 케일의 존재에서 섬뜩함이 느껴진다.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체계의 도래의 예감에서 느껴지는 그런 공포이다. 자기도 모르게 찍힌 몰카가 인터넷에서 나돌지도 모르는 세상, 내가 쓴 글이 웹상 어디에 떠도는지 알 수 없는 세상. 그물망(웹)처럼 엮인 네트워크 사회에서 푸코가 말하는 파놉티콘의 감시자와 같은 어떤 꼭지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제 그물 속에 포획된 모든 자들이 감시자가 될 수도 감시당할 수도 있다. 앞으로 우리는 어디서 발을 뻗고 쉴 수 있을까. 노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 것보다, 과시적으로 쇼핑을 하는 것보다, 그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날이 오게 되진 않을까? 그러나 밖은 볼 수 있는 채로 말이다. 모두가 파놉티콘의 중앙 탑에 갇히길 원하는 세상.

"나 제발 혼자 있고 싶어요. 아무도 날 보지 못하게 해주세요. 얽히기 싫으니까요. 돈은 줄게요."

그러나 이것이 잘 되지 않았을 경우, 터너가 보이면 안되는 케일을 보게 된 것처럼, 그 결과는 서로의 치부가 낫낫이 드러나고 이를 다시 막기 위한 끔찍한 전쟁이 벌어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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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환영>, 1974, 루이스 부뉴엘

<자유의 환영>에서 루이스 부뉴엘은 상식의 뒤집기를 시도한다. 근친상간으로 성적 통념을, 수도승의 방탕한 생활로 종교적 통념을, 식당과 화장실이라는 공간의 전도를 통해 일상적 통념을 깨뜨린다. 이 외에도 영화 내내 이러한 상식적 관념들은 끊임없이 뒤집히고 깨진다. 또한 영화의 형식적 차워에서도 고전적 서사 규칙을 어김으로써 같은 맥락의 위반을 달성한다. 위반/뒤집기/깨뜨리기라 말할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이 영화를 말 그대로 가득 채우고 있어 무엇을 깨뜨리려 하는가라는 질문조차 무색해 진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어김을 드러내고 있다 정도. 개인적으로 주목할만한 몇몇 장면들을 상기하는 것으로 이 어김들이 던져주는 것들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 싶다. 
1. 한 아이가 학교에서 실종된다. 하지만 여기서 실종이라는 사건만이 존재할 뿐 실제로 아이가 실종된 것은 아니다. 멀쩡한 아이를 옆에 두고 부모는 아이를 걱정하고 경찰은 조서를 꾸민다. 이 상황에서 특히 재밌는 장면은 실종된 아이를 보면서 몽타주를 작성하는 숏이다. 실종된 그 아이를 직접 보는 것보다 몽타주를 사실적으로 작성할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앞에 있는 아이가 실체 없는 귀신인 것처럼 완벽한 몽타주에도 불구하고 실종이라는 사건은 계속 된다. 즉 존재하지 않는 사건은 존재하고 존재하는 아이는 부재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실종된 아이가 사건을 만들지 않고 사건이 실종된 아이를 만들었다. 이는 원인과 결과의 전도를 보여준다. 실종이라는 사건이 실종되지 않은 아이를 실종된 것으로 규정짓는 것이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에 대한 사후적인 규정 - 앞에 있는 이 아이는 실종되었다 - 은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일까? 조금만 살펴보면 이러한 '사후 규정'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흔한 일임을 인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 대답 속에는 분명 사후 규정적 성격을 지닌 대답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나는 내가 지금 실종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미에서 실종에 관한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은 말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2. 내가 본 <자유의 환영>은 EBS에서 방영한 것의 녹화였는데, 녹화된 테잎에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한 평론가의 영화 소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평론가는 <자유의 환영>을 두고 루이스 부뉴엘의 가장 자유로운 영화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자유롭다고 평가한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그 수많은 어김들 때문임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자유의 환영>이라는 제목은 그가 말한 자유로움에 대해 회의하게 만든다. 일견 자유로워 보이는 그 형식과 상황들의 어김은 제목처럼 자유의 '환영'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대구를 이루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루이스 부뉴엘이 이 영화를 통해 재현하는 것이 '자유로움'에 대한 무엇이 아니라는 생각을 확고히 해주고 있다. 말 따옴표가 문장을 강조하듯이 "자유를 타도하라"라는 구호가 처음과 끝에서 영화를 열고 닫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 전체가 "자유를 타도하라"라는 외침 아래에, 안에 들어가 있는 셈이 된다. 실종에 대한 에피소드에서처럼 우리는 권리와 의지로 자유롭게 살아가기 보다는 규정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후적이고 자의적인 규정들에서 벗어나길 욕망한다. 규정들을 모두 내팽겨 쳐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가길 꿈꾸지만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다. 규정들을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규정이 없으면 규정을 어기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위반은 '무엇을' 위반하는 것으로 항상 대상을 필요로 한다. 자유도 이와 같이 속박이 없다면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루이스 부뉴엘은 이 규정들을 뒤집음으로서 그것들이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들을 위반하길 욕망하는 우리의 모습을 드러낸다. 자유에 대한 욕망은 속박이 전제되기 전에는 존재할 수 없기에 자유는 타도되는 것이다. '자유'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프랑스 혁명이 가져다 준 것은 자유가 아닌 허식이 제공하는 욕망으로 가득찬 자본의 시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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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가 남긴 것들 2

거장으로서의 오즈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내러티브적 측면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물론 오즈가 거장인 것은 형식적 의미에서 그런 것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무성의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될 정도로 진부한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진부할 뿐만 아니라 전개에 있어서 역시 엉성하다. 쉽게 생각할 때, 형식에 치중한 나머지 내러티브에 소홀했다. 또는 형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내러티브를 탈색했다. 이런 변명들을 만들어 줄 수는 있을 듯 하다. 그러나 형식과 내러티브는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전에는 이 변명들의 정당성이 획득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 형식과 내용적 측면이 한 방향을 향해 짜여져 있다면 그 효과가 배가된다는 것을 상식으로 전제한자면 당연히 그 둘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되고 이 변명은 오즈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경우, 영화의 주제가 필름이 담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담을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하고 있다면 어떠할까? 오즈가 바로 시각화될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즈의, 오즈적 주제는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방식은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떤 주제, 즉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이미지로 재현될 수도 없고, 언어화된 내러티브로도 재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은 뭘까? (내러티브를 언어적 재현에 대응시킨 것은 성급하고 거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여기서는 내러티브의 구조가 아닌 내러티브에서 말하여진 것만을 다룬다.) 이미지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상징화하지 않는 '말하기(말하기라 부를 수 있을까?)'에서 우리는 상징적으로 무엇을 포착해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오즈의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지로 그리고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이 사실은 역시나 이미지나 언어로 이루어진 영화가 담을 수 없는 무엇이 오즈적 주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주제의 특성상 그것은 오즈의 영화가 드러내는 시각적, 청각적 형상에서 드러날 수 없다. 이제 오즈가 보여줄 수 있는 주제는 이것 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것은 영화가 잘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 바로 재현의 불충성이다. 여기까지는 나의 오즈를 위한 충실한 변명 만들기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스런 의문들이 남아 있다.(오즈의 영화가 메타영화라는 이런 나의 결론적 변명은 기존의 호평들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이미 그들에 포획된 상태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나는 베끼고 있다.)

이전의 모든 호평들/변명들을 인정하더라도, 다시 말하면 그 형식적 측면과 그 주제적 측면에 대해 훌륭히 평가하고 그의 영화를 메타영화로 받아들이더라도, 관객이 느끼는 효과적 측면에서의 문제가 남는다. 스크린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시선이 중요한 것이고 무성의한 내러티브는 언어적 재현이 불가능한 그 주제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스크린에는 이미지가 보이고, 피상적일 망정 내러티브가 읽힌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번 오즈의 여름을 종결시킬만한 만족스런 해답을 찾지 못한 상태이다. 이 물음은 어쩌면 오즈를 벗어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따라다닐 그래서 오즈의 망령을 대동하는 그런 물음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 문제가 분명 대중과 평론가, 대중과 작가라는 끝나지 않는 관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관계는 재현의 불완전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관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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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가 남긴 것들 1

지난 목요일을 끝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세미나가 끝이 났다. 오즈의 영화가 나의 취향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었고 보면서 공부하면서 특별히 재밌다고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한 달 간의 오즈와의 '동고'는 명확한 끝이 아닌 어렴풋한 끝맺음으로 가시지 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리 지긋지긋해 했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맴도는 오즈에 대한 생각들이란.

오즈는 왜 재미없었는가? 라는 질문을 세미나가 모두 끝난 후 다시금 스스로에게 던졌더니 지금까지와는 약간의 다른 뉘앙스를 띈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애초부터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다분히 지닌 영화들이 재밌기는 힘들다는 편견 아닌 편견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오즈의 영화 역시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몇 안되는 오즈의 영화를 보는 내내 재밌지는 않다란 결론을 이미 품고 있었다. 또한 재미없다는 것엔 내가 경계해야 마땅한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도 녹아 있는데 그것은 오즈의 영화가 흑백이란 점이다. '흑백 영화 = 재미없는 영화'란 공식이 오래 전부터 내 마음 속엔 굳건히 버티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오즈적으로 재미없음. 그것은 무어란 말인가? 몰입하는 나를 환기시키는 인물들의 노려보는 시선일까? 그의 엉성한 내러티브 때문일까? 혹은 진부한 주제일까? 아니면 답답하기 짝이 없는 평면적 화면 때문일까? 마지막 세미나를 위해 하스미 시케이코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中 '6장 멈춰 서 있는 것'의 발제는 내게 몇 가지 오즈에 대한 시사점을 남겨 주었다. 시사점이라기 보다는 이 역시 의문에 가까운 것이라 해야겠지만. 이는 오즈가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무엇으로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오즈는 지독한 연출로 짜여진 화면 속의 이미지를 구성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이미지를 통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결론적 의문이다. 이미지를 통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화면 속에 나타나는 사물 그 자체가 중요성을 가지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면 속에 나타나는 어떤 이미지 - 통합된 이미지이든, 개개의 사물에 대한 이미지이든 - 보다는 그는 영화 속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말한다. 시선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좀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선이면서 몸짓이고 방향이고 이미지로 나타나는 몸이 아닌 시선, 몸짓, 방향, 태도 등 쉽게 시각화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담아내는 시각적이지 않은 것으로서의 몸이다. 이 몸은 또한 대상으로서의 몸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그리고 행동中인 몸이다. 따라서 오즈의 인물들은 영화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완결된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대상이나 목적으로서 취급될 수 없다. 역으로 그들은 무엇을 대상이나 목적으로 가질 수도 없는 그런 인물이기도 하다. 오즈의 영화 속에서 그들이 던지는 시선이 어디로 귀결되는지 알 수 없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관객인 우리를 응시하기도 하고 저 멀리 어딘지 모를 곳을 그윽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저 멀리를 바라 보는 경우도 우리는 그 시선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고 우리를 바라 보는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대상이 될 수 없는 완결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류 치슈는 나를 보기도 하고 당신을 보기도 하며 어제의 우리를 혹은 오늘의 우리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하스미 시게이코는 이러한 응시에서 일본인의 특성을 연결시킨다.

"사람들은 특히 일본인들은 일상 생활에 있어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정도의 빈도와 집요함을 가지고 타인의 눈을 훔쳐 보지 않는다. 그것이 류 치슈와 같이 적의가 없는 것이든, 하라 세츠코와 같이 우수를 자아내는 것이든, 상대의 눈동자를 정면에서 언제까지나 지켜 보는 일은 우선 없다. 우리들이 어떤 종류의 눈동자에 글린다면 그것은 여기를 직시할 때가 아니라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이나, 그렇지 않다면 문득 시선을 비켜 눈을 내리뜨거나 하는 때임이 틀림없다."
- p.135, <감독 오즈 야스지로>, 하스미 시게이코
특히 일본인이라고 강한 일본적 특성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사람들은'이라 문장을 시작한 것과 같이 언급된 내용이 보편성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문화권에서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이 사실에서 몇 가지 생각이 다시 꼬리를 문다. 우선 논의를 연결선상에서 우선 류 치슈든 하라 세츠코이든 우리를 보는 그들의 시선은 그들이 아무리 집요하게 쳐다보더라도 완전한 대상을 가질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우리에게 집요한 시선을 던지면 던질수록 우리는 그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감춰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오즈는 인물들이 잘 보이도록 적나라하게 정면으로 그들을 잡아내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들을 볼 수 없도록 그리고 그들도 우리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하여 서로를 불완전한 시각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한 평면적 화면 구성은 이러한 시선을 더욱 날카로운 것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또 다른 생각은 여담에 가까운 것인데, 시각 회피 현상에 관한 것이다. 예전 어떤 인지 과학에 대한 한 다큐멘터리에서 본 현상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은 무언가를 볼 때는 잘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무언가 생각할 때에는 의도적으로 시각을 회피한다. 인물들의 노려보는 시선이 유발할 관객의 회피된 시각이 오즈의 영화에서 사유를 촉발시키진 않을까?
다시 논의로 돌아와서 첫 질문을 다시 던져보고 싶다. 오즈의 영화가 왜 재미가 없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시선이 지닌 특징 때문은 아닐까? 오즈의 영화가 시선들로(확장된 개념의 시선, 편의상 시선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 조합으로 이야기한다고 가정한다면 이 시선들의 특징이 곧 그 재미없음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오즈의 시선은 목적이 없다. 또한 오즈의 영화, 즉 시선의 결합체는 우리 관객의 시선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시선의 목적이 될 수 있는 조건인 시각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즈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따라서 볼 수 없는 것은 보는 것이 된다. 어렵게 그 볼 수 없는 시선을 추적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화 속에서도 목적을 드러내지 않기에 목적이 이어져나가는 끝없이 진행 중인 시선으로 머문다. 따라서 오즈의 영화는 목적적이고 결과론적이기 보다는 과정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혹은 보려고 했던 내가 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보기를 이 정도에서 끝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의 영화적 변주들은 끝 없음 혹은 덧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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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초>, 1959, 오즈 야스지로

색이 입혀진 까닭인지 <부초>는 오즈 야스지로의 다른 영화들과 문맥 상에 그 위치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부터 등장하던 배우들의 구성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보여준다. 하라 세츠코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지만 지리지리한 오즈 야스지로로의 여행에서 이러한 <부초>는 오아시스처럼 청량하게 다가왔다. <동경 이야기>, <늦봄>이 안에서 밖으로의 시선이라 한다면 <부초>는 밖에서 안으로의 시선이라 말하고 싶다. <동경 이야기>와 <늦봄>에서 가족을 중심으로 그것으로부터 이탈해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반면 <부초>는 일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꾸리지 못한 떠돌이 유랑 극단이 정착한 이들에게 갖는 부러움을 말한다. 유랑 극단은 아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근대적 가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구식인 동시에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에도 부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철저한 이방인이 된다. 실제 영화 말미에 가서 극단은 갈 곳 없는 신세로 인해 그 마저도 해체되고 만다. 다들 어디로 갈 것인가? 받아줄 가족이 있는 이들은 다행이지만 그것조차 남아 있지 않은 이들, 단장과 질투하는 여배우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다만 다시 유랑을 시작하는 수 밖에. 이러한 말미에서 내가 다소 위안을 찾는 것은 그 둘이 함께라는 점 뿐이다.

 

 - <부초>가 지니는 이러한 전도된 시선은 배우와 관객 간의 전도를 보여주는 위의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전도는 단순한 평행적 위치 바꿈이 아니다. 관객이 배우를 보는 태도와는 달리 배우들은 커튼 뒤에 몸을 숨긴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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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1949, 오즈 야스지로

자전거 장면

 자전거를 타는 노리코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카메라에 의한 트래킹 숏은 마치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 같은 화면을 만들어 낸다. 이는 ‘노리코는 자전거를 타고 있다.’라는 인식과 결합되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특히나 노리코의 배경이 지나가는 풍광이 아닌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하늘이기에 그 어색함이 배가되고 있다. 이 어색함에서 내가 머뭇거리는 것은 그 속에서 노리코와 카메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는 노리코가 카메라에 갇혔다 해야 할지 카메라가 노리코에 매달려 다닌다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움에서 오고 있다. 카메라를 지우고 스크린의 표면에서 다시 질문하자면 노리코는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지한 것일까?

 

야스지로의 카메라는 사실 거의 모든 인물을 영화에 내재된 어떤 규칙에 의해 평면적이고 한결같이 담아내고 있다. 또한 이렇게 화면 속에 담긴 인물들에게서 역시 노리코의 경우와 같은 유사한 어색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유독 노리코에게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노리코가 영화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생각되기 때문이다. 노리코 역을 맡은 하라 세츠코는 <동경 이야기>에서 역시 <늦봄>에서 노리코에 대응될 수 있는 이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고 있는데 이 점에서 최초의 질문을 노리코가 아닌 하라 세츠코에 관한 것으로 바꾸고 싶기도 하다. 하라 세츠코가 보여주는 지나치게 과장된, 그래서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그 미소는 분명 유별나기 때문이다. 하라 세츠코는 두 영화 모두에서 움직이길 거부하고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동경 이야기>에서는 8년 전 사별한 남편 곁에 여전히 남아 있고, <늦봄>에서는 홀로 남은 아버지 곁에 남아 있길 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부동으로 인해 갈등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갈등은 하라 세츠코 특유의 가면과 같은 마스크에 의해 은폐된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하라 세츠코는 움직이는 세계와 그것에 대한 거부를 한 몸에 담아내는 영화의 주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처음의 자전거 장면을 환기시켜 보자. 그 속에는 움직이지만 정지한 노리코와 역시 정지해 있지만 움직이는 영화라는 둘 간의 대응이 존재한다. 만약 스크린을 근대를 표상하는 한 표면이라 한다면 하라 세츠코를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근대 일본 속의 인물을 표상하는 한 표면(얼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분히 조작적인 표정을 드러내는 그녀의 얼굴에서 고도로 연출된 야스지로의 근대적 화면을 읽는 것은 과도한 상상일까? 이 상상 하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동경 이야기>와 <늦봄> 그리고 더 있을 하라 세츠코와 그 주변 인물들의 변주를 통해 일본의 근대라는 갈등적 ‘공간’을 근대적 ‘표면/얼굴’에 담아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평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인간의 근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표면/표층을 통한 근원과의 극렬한 대비를 통해서 일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평면인 표면으로 압축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 강박적 성격으로 인해 ‘공간은 표면에 압축될 수 있다’ 혹은 ‘압축되어야 한다.’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원근법이 우리를 속이려 했다면 야스지로는 허망함 속에 우리를 가두려 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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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Hungarian Dances>, Labeque Sisters.

헝가리무곡집 표지

 

헝가리 무곡은 어떤 하나의 특정한 감정을 노래한다기 보다는 여러 감정들의 기복을 노래하는 것으로 들린다. 온 세상의 슬픔을 담아내는 듯 하더니 별안간 힘을 내어 정진하고 춤추는 변덕스런 모양을 무려 각각의 21개의 곡들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슬펐다가 저렇게 열정적으로 투쟁하고 그렇게 기쁨을 맛본다는 변화무쌍한 스펙터클의 선율들은 그 지나친 변화무쌍함 때문에 하나의 흐름으로 묶여 있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따로 떼어져 있다면, 21개의 곡들 중에서 슬픔, 열정, 기쁨을 각각 떼어내 새롭게 재조합한다면 훨씬 아련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의 변덕스런 마음도 따라잡지 못할 이 변덕스러움에 내가 유달리 애착을 지니는 것은. 그러니 선율의 묶인 흐름이 아니라, 선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변덕스러움 바로 그것이 지닌 어떤 매력이다. 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나도 내 맘을 모르겠네. 그래서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 라베크 자매의 헝가리 무곡집은 훌륭하진 않더라도 실패하지 않는 선택일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 감정의 변덕스러움, 참을 수 없는 감정의 가벼움 그 자체를 투사하고 공명시켰던 것.

 

Labeque Sisters

 

여러 헝가리 무곡집의 버젼 중에서 유독 라베크 자매 연주에 애착을 가지는 데에서 나름의 고집스런 이유가 있다. 이 이유가 음악에 앞서는 것인지 혹은 내 스스로 사후적인 의미를 덧붙인 것인지 이제 와서 알 수 없는 형편이 되었지만, 알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은 그 이유라는 것이 정말이지 그 음악에 끈끈하게 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작가의 존재가 텍스트의 배경이 되어 마땅한가에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이 가벼운 감정/감상에 있어서 작가라는 배경은 비교적 무거운 효과를 낸다.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브람스가 아닌 비교적 가까이 있는 라베크 자매라는 배경만이. 하지만 이 배경이라는 것이 비운의 천재 또는 변태적 천재와 같은 위대한 작가의 신화가 아닌 변덕스러움이라는 신화라고 하기엔 일상을 직시하고 있는 듯한 무엇이다. 카티아 라베크와 마리엘 라베크 이들 자매 간에는 서로에 대한 변덕스런 감정들이 없지 않을 수 있었을까? 피아니스트라는 같은 같은 직업을 가지고 피아노 소리라는 말로 그 변덕스러움을 21개의 무곡으로, 그들 간에 존재했던 감정 섞인 대화를 재현하고 있는 어쩌면 재현이 아닐 수 있는 그 소리가 내가 아끼는 이 CD 속에 담겨 있다. 남의 자매 일에 안이한 유추를 감행한 결과지만 이젠 음악에서 떼어낼 수 없는 배경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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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이야기>, 1953, 오즈 야스지로

 

 <동경 이야기>, 1953, 오즈 야스지로

<동경 이야기>는 오즈 야스지로가 보여주는 형식미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나 역시 지고지순한 미학의 대전제라 할 수 있는 통일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주제적인 측면에서의 동경의 비좁고 갑갑함이 그의 강박적이고 편집증적인 화면 구성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비좁은 일본 다다미 방을 보여주는 평면적 화면들은 관객이 그가 말하려는 정서, 갑갑함을 느끼기에 충분하고도 남아 심지어는 불편함까지 감지된다. 형식적으로 아니 훌륭하다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물을 다루는 그의 태도이다. 유심히 살펴 보면 그가 화면에서 인물의 구성에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는 배우들의 걸음걸이까지도 계산했다고 한다. 각각의 인물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드러나는 방식이 카메라 앞에서 정확하게 고정되어 있다.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인물들은 재현되어서는 안된다는 듯이 그 방식은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화면 속에서 나에게는 인물들이 미장센을 구성하는 기타 장식들과 같이 고정되어 죽은 듯이 보인다. 화면의 평면적 효과는 이러한 효과를 배가 시키는 듯 하다. 이마저도 통일성이라는 미학적 관점에서 훌륭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을 지니는 내가 오히려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저항감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인물이 카메라 앞에서 가구와 같은 무생물처럼 취급된다는 느낌이 <동경 이야기>가 훌륭한 형식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지나친 보수적 도덕성을 견지한 노리코라는 인물 역시 불편하긴 마찬가지지만 그것은 리얼리티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법도 한 구석이다. 그러나! 철저한 의도적 구성에 의한 죽어버린 인물들의 형식 중심의 영화를 과연 리얼리즘 미학을 추구하는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가 또 다시 떠오른다. 개인적 관점에서는 이 영화를 리얼리즘 계열로 분류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이로써 노리코가 보여주는 보수성에 대한 면죄부가 파기된다. 이제 우리는 그가 보여주는 보수성에 대해 공격할 수 있다. 보수적인 도덕적 강박때문에 <동경 이야기>의 인물들이 모두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 정서로서 이해하기 힘든 가족 간의 깍듯한 비인간적 예의가 보여주는 바는 바로 억압적인 도덕적 강박으로 인한 영화의 죽음이고 비인간화는 아닐런지. 인간중심적 사고를 넘어 야스지로의 카메라는 세계 속이 아닌 위에 군림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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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오즈 야스지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오즈 야스지로

 

이상용의 비평 <아이들과 어른들의 변증법 - 태어나기는 했지만>은 어른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를 대립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변증법적 갈등으로 읽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이 두 세계를 병치시켜놓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대립적으로 그리고 있는가 다시 검증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아이와 어른, 순수와 비순수라는 통념적인 대립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세계가 과연 순수하게 그려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이러한 대립적 인식에 무리가 있음이 드러난다. 아이들과 어른의 세계는 다만 그 기준이 다를 뿐 모두 위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다만 위계를 세우는 기준, 그 잣대가 아이들에게는 힘이고 어른들에게는 돈이 될 뿐이다. 특히 어른들의 사무실과 아이들의 교실을 연속적으로 잇는 트래킹 숏은 이 두 세계가 얼마나 유사한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어른들의 사무실은 아이들의 교실로 자연스럽게 유사성을 가지고 이어진다.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Ozu Yasjiro

 

서로 구분되어 보이는 이 두 세계는 유사한 논리로 돌아가고 있지만 서로 섞이기 보다는 독립적으로 구성되고 있다. 두 세계 모두 위계는 존재하지만 그 위계의 정열에 있어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세대를 통한 전복을 꿈꿀 가능성이 보인다. 물론 똑같이 위계적 사회이겠지만. 그러나 야스지로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전복의 가능성보다는 어른들의 위계가 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승계될 것임을 암시한다. 지금은 형제가 타로 위에 군림하고 있지만, 결말에서는 사이가 좋아지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성인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같이 계급적 위치를 점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아이들의 세계가 어른들의 세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야스지로는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술을 파는 아저씨는 아이들의 힘으로 쓰여지는 성인이지만 그를 이용하여 쓸 수 있는 힘의 논리는 곧 성인들의 자본의 논리이다. 좀 더 거부감이 없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로 이러한 종속성이 다시 한번 나타나는데 주먹밥 앞에서 단식투쟁 중이었던 형제가 굴하는 장면에서 기성 세대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다음 세대의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어젯밤 훌륭함을 위해 열렬히 투쟁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은 다음 날 아침 배고픔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산 이들에게 받을 수 밖에 없는 그 무엇 때문에 아직도 악순환의 고리들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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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이해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내가 생각하기로 이해는 용서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 이해하여 어디까지 용서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해결되기 전에는 어디서부터 이해의 노력이 시작되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용서든 이해든, 그 둘은 항상 붙어 다니는 것이고 구분하기 힘들다 생각되기에, 필요한 것만이 명확하고 그것이 어디까지 나아가야 할지 그 경계선은 보이지 않는다. 상대주의가 이 시대의 미덕처럼 자리잡고 있지만 어디까지 우리가 상대주의로 이해해야 하는지. 범죄자 마저도 넓은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다른 예를 들자면 아랍 국가에서 비춰지는 성차별적 제도들을 상대주의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그럴 수 없는지.

 

누구나 정신적으로 무한히 자유롭겠지만 물리적 행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사념이 물리적 공간으로 현실화될 때, 이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면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역시 어디까지라는 문제가 나에게 떠오른다. 이런 생각이, 안이하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는,  떠오른다. 단순한 표현의 차원이라면 끝까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언변이든 활자화된 텍스트이든 혹은 이미지로 표현된 것이든. 폭력적인 언변, 텍스트, 이미지의 포화 속에서 나 역시 그것들을 가끔씩 두려워 한다. 이 두려움이 표현에 한계를 설정하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표현하지 못하기에 받는 고통들을 생각한다면 이 두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추악한 것은 말로 표현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굴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도? 잠재적으로 추악한 것은 폭력이 될 수 있기에 말아야만 하는 것일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미치도록 외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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