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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13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오즈 야스지로(2)
    inforata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오즈 야스지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오즈 야스지로

 

이상용의 비평 <아이들과 어른들의 변증법 - 태어나기는 했지만>은 어른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를 대립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변증법적 갈등으로 읽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이 두 세계를 병치시켜놓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대립적으로 그리고 있는가 다시 검증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아이와 어른, 순수와 비순수라는 통념적인 대립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세계가 과연 순수하게 그려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이러한 대립적 인식에 무리가 있음이 드러난다. 아이들과 어른의 세계는 다만 그 기준이 다를 뿐 모두 위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다만 위계를 세우는 기준, 그 잣대가 아이들에게는 힘이고 어른들에게는 돈이 될 뿐이다. 특히 어른들의 사무실과 아이들의 교실을 연속적으로 잇는 트래킹 숏은 이 두 세계가 얼마나 유사한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어른들의 사무실은 아이들의 교실로 자연스럽게 유사성을 가지고 이어진다.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Ozu Yasjiro

 

서로 구분되어 보이는 이 두 세계는 유사한 논리로 돌아가고 있지만 서로 섞이기 보다는 독립적으로 구성되고 있다. 두 세계 모두 위계는 존재하지만 그 위계의 정열에 있어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세대를 통한 전복을 꿈꿀 가능성이 보인다. 물론 똑같이 위계적 사회이겠지만. 그러나 야스지로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전복의 가능성보다는 어른들의 위계가 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승계될 것임을 암시한다. 지금은 형제가 타로 위에 군림하고 있지만, 결말에서는 사이가 좋아지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성인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같이 계급적 위치를 점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아이들의 세계가 어른들의 세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야스지로는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술을 파는 아저씨는 아이들의 힘으로 쓰여지는 성인이지만 그를 이용하여 쓸 수 있는 힘의 논리는 곧 성인들의 자본의 논리이다. 좀 더 거부감이 없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로 이러한 종속성이 다시 한번 나타나는데 주먹밥 앞에서 단식투쟁 중이었던 형제가 굴하는 장면에서 기성 세대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다음 세대의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어젯밤 훌륭함을 위해 열렬히 투쟁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은 다음 날 아침 배고픔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산 이들에게 받을 수 밖에 없는 그 무엇 때문에 아직도 악순환의 고리들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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