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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19
    <늦봄>, 1949, 오즈 야스지로
    inforata

<늦봄>, 1949, 오즈 야스지로

자전거 장면

 자전거를 타는 노리코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카메라에 의한 트래킹 숏은 마치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 같은 화면을 만들어 낸다. 이는 ‘노리코는 자전거를 타고 있다.’라는 인식과 결합되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특히나 노리코의 배경이 지나가는 풍광이 아닌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하늘이기에 그 어색함이 배가되고 있다. 이 어색함에서 내가 머뭇거리는 것은 그 속에서 노리코와 카메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는 노리코가 카메라에 갇혔다 해야 할지 카메라가 노리코에 매달려 다닌다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움에서 오고 있다. 카메라를 지우고 스크린의 표면에서 다시 질문하자면 노리코는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지한 것일까?

 

야스지로의 카메라는 사실 거의 모든 인물을 영화에 내재된 어떤 규칙에 의해 평면적이고 한결같이 담아내고 있다. 또한 이렇게 화면 속에 담긴 인물들에게서 역시 노리코의 경우와 같은 유사한 어색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유독 노리코에게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노리코가 영화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생각되기 때문이다. 노리코 역을 맡은 하라 세츠코는 <동경 이야기>에서 역시 <늦봄>에서 노리코에 대응될 수 있는 이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고 있는데 이 점에서 최초의 질문을 노리코가 아닌 하라 세츠코에 관한 것으로 바꾸고 싶기도 하다. 하라 세츠코가 보여주는 지나치게 과장된, 그래서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그 미소는 분명 유별나기 때문이다. 하라 세츠코는 두 영화 모두에서 움직이길 거부하고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동경 이야기>에서는 8년 전 사별한 남편 곁에 여전히 남아 있고, <늦봄>에서는 홀로 남은 아버지 곁에 남아 있길 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부동으로 인해 갈등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갈등은 하라 세츠코 특유의 가면과 같은 마스크에 의해 은폐된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하라 세츠코는 움직이는 세계와 그것에 대한 거부를 한 몸에 담아내는 영화의 주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처음의 자전거 장면을 환기시켜 보자. 그 속에는 움직이지만 정지한 노리코와 역시 정지해 있지만 움직이는 영화라는 둘 간의 대응이 존재한다. 만약 스크린을 근대를 표상하는 한 표면이라 한다면 하라 세츠코를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근대 일본 속의 인물을 표상하는 한 표면(얼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분히 조작적인 표정을 드러내는 그녀의 얼굴에서 고도로 연출된 야스지로의 근대적 화면을 읽는 것은 과도한 상상일까? 이 상상 하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동경 이야기>와 <늦봄> 그리고 더 있을 하라 세츠코와 그 주변 인물들의 변주를 통해 일본의 근대라는 갈등적 ‘공간’을 근대적 ‘표면/얼굴’에 담아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평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인간의 근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표면/표층을 통한 근원과의 극렬한 대비를 통해서 일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평면인 표면으로 압축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 강박적 성격으로 인해 ‘공간은 표면에 압축될 수 있다’ 혹은 ‘압축되어야 한다.’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원근법이 우리를 속이려 했다면 야스지로는 허망함 속에 우리를 가두려 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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