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일본영화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31
    오즈가 남긴 것들 1
    inforata
  2. 2007/07/19
    <늦봄>, 1949, 오즈 야스지로
    inforata

오즈가 남긴 것들 1

지난 목요일을 끝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세미나가 끝이 났다. 오즈의 영화가 나의 취향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었고 보면서 공부하면서 특별히 재밌다고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한 달 간의 오즈와의 '동고'는 명확한 끝이 아닌 어렴풋한 끝맺음으로 가시지 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리 지긋지긋해 했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맴도는 오즈에 대한 생각들이란.

오즈는 왜 재미없었는가? 라는 질문을 세미나가 모두 끝난 후 다시금 스스로에게 던졌더니 지금까지와는 약간의 다른 뉘앙스를 띈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애초부터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다분히 지닌 영화들이 재밌기는 힘들다는 편견 아닌 편견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오즈의 영화 역시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몇 안되는 오즈의 영화를 보는 내내 재밌지는 않다란 결론을 이미 품고 있었다. 또한 재미없다는 것엔 내가 경계해야 마땅한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도 녹아 있는데 그것은 오즈의 영화가 흑백이란 점이다. '흑백 영화 = 재미없는 영화'란 공식이 오래 전부터 내 마음 속엔 굳건히 버티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오즈적으로 재미없음. 그것은 무어란 말인가? 몰입하는 나를 환기시키는 인물들의 노려보는 시선일까? 그의 엉성한 내러티브 때문일까? 혹은 진부한 주제일까? 아니면 답답하기 짝이 없는 평면적 화면 때문일까? 마지막 세미나를 위해 하스미 시케이코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中 '6장 멈춰 서 있는 것'의 발제는 내게 몇 가지 오즈에 대한 시사점을 남겨 주었다. 시사점이라기 보다는 이 역시 의문에 가까운 것이라 해야겠지만. 이는 오즈가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무엇으로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오즈는 지독한 연출로 짜여진 화면 속의 이미지를 구성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이미지를 통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결론적 의문이다. 이미지를 통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화면 속에 나타나는 사물 그 자체가 중요성을 가지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면 속에 나타나는 어떤 이미지 - 통합된 이미지이든, 개개의 사물에 대한 이미지이든 - 보다는 그는 영화 속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말한다. 시선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좀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선이면서 몸짓이고 방향이고 이미지로 나타나는 몸이 아닌 시선, 몸짓, 방향, 태도 등 쉽게 시각화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담아내는 시각적이지 않은 것으로서의 몸이다. 이 몸은 또한 대상으로서의 몸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그리고 행동中인 몸이다. 따라서 오즈의 인물들은 영화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완결된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대상이나 목적으로서 취급될 수 없다. 역으로 그들은 무엇을 대상이나 목적으로 가질 수도 없는 그런 인물이기도 하다. 오즈의 영화 속에서 그들이 던지는 시선이 어디로 귀결되는지 알 수 없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관객인 우리를 응시하기도 하고 저 멀리 어딘지 모를 곳을 그윽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저 멀리를 바라 보는 경우도 우리는 그 시선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고 우리를 바라 보는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대상이 될 수 없는 완결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류 치슈는 나를 보기도 하고 당신을 보기도 하며 어제의 우리를 혹은 오늘의 우리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하스미 시게이코는 이러한 응시에서 일본인의 특성을 연결시킨다.

"사람들은 특히 일본인들은 일상 생활에 있어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정도의 빈도와 집요함을 가지고 타인의 눈을 훔쳐 보지 않는다. 그것이 류 치슈와 같이 적의가 없는 것이든, 하라 세츠코와 같이 우수를 자아내는 것이든, 상대의 눈동자를 정면에서 언제까지나 지켜 보는 일은 우선 없다. 우리들이 어떤 종류의 눈동자에 글린다면 그것은 여기를 직시할 때가 아니라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이나, 그렇지 않다면 문득 시선을 비켜 눈을 내리뜨거나 하는 때임이 틀림없다."
- p.135, <감독 오즈 야스지로>, 하스미 시게이코
특히 일본인이라고 강한 일본적 특성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사람들은'이라 문장을 시작한 것과 같이 언급된 내용이 보편성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문화권에서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이 사실에서 몇 가지 생각이 다시 꼬리를 문다. 우선 논의를 연결선상에서 우선 류 치슈든 하라 세츠코이든 우리를 보는 그들의 시선은 그들이 아무리 집요하게 쳐다보더라도 완전한 대상을 가질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우리에게 집요한 시선을 던지면 던질수록 우리는 그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감춰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오즈는 인물들이 잘 보이도록 적나라하게 정면으로 그들을 잡아내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들을 볼 수 없도록 그리고 그들도 우리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하여 서로를 불완전한 시각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한 평면적 화면 구성은 이러한 시선을 더욱 날카로운 것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또 다른 생각은 여담에 가까운 것인데, 시각 회피 현상에 관한 것이다. 예전 어떤 인지 과학에 대한 한 다큐멘터리에서 본 현상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은 무언가를 볼 때는 잘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무언가 생각할 때에는 의도적으로 시각을 회피한다. 인물들의 노려보는 시선이 유발할 관객의 회피된 시각이 오즈의 영화에서 사유를 촉발시키진 않을까?
다시 논의로 돌아와서 첫 질문을 다시 던져보고 싶다. 오즈의 영화가 왜 재미가 없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시선이 지닌 특징 때문은 아닐까? 오즈의 영화가 시선들로(확장된 개념의 시선, 편의상 시선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 조합으로 이야기한다고 가정한다면 이 시선들의 특징이 곧 그 재미없음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오즈의 시선은 목적이 없다. 또한 오즈의 영화, 즉 시선의 결합체는 우리 관객의 시선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시선의 목적이 될 수 있는 조건인 시각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즈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따라서 볼 수 없는 것은 보는 것이 된다. 어렵게 그 볼 수 없는 시선을 추적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화 속에서도 목적을 드러내지 않기에 목적이 이어져나가는 끝없이 진행 중인 시선으로 머문다. 따라서 오즈의 영화는 목적적이고 결과론적이기 보다는 과정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혹은 보려고 했던 내가 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보기를 이 정도에서 끝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의 영화적 변주들은 끝 없음 혹은 덧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늦봄>, 1949, 오즈 야스지로

자전거 장면

 자전거를 타는 노리코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카메라에 의한 트래킹 숏은 마치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 같은 화면을 만들어 낸다. 이는 ‘노리코는 자전거를 타고 있다.’라는 인식과 결합되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특히나 노리코의 배경이 지나가는 풍광이 아닌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하늘이기에 그 어색함이 배가되고 있다. 이 어색함에서 내가 머뭇거리는 것은 그 속에서 노리코와 카메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는 노리코가 카메라에 갇혔다 해야 할지 카메라가 노리코에 매달려 다닌다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움에서 오고 있다. 카메라를 지우고 스크린의 표면에서 다시 질문하자면 노리코는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지한 것일까?

 

야스지로의 카메라는 사실 거의 모든 인물을 영화에 내재된 어떤 규칙에 의해 평면적이고 한결같이 담아내고 있다. 또한 이렇게 화면 속에 담긴 인물들에게서 역시 노리코의 경우와 같은 유사한 어색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유독 노리코에게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노리코가 영화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생각되기 때문이다. 노리코 역을 맡은 하라 세츠코는 <동경 이야기>에서 역시 <늦봄>에서 노리코에 대응될 수 있는 이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고 있는데 이 점에서 최초의 질문을 노리코가 아닌 하라 세츠코에 관한 것으로 바꾸고 싶기도 하다. 하라 세츠코가 보여주는 지나치게 과장된, 그래서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그 미소는 분명 유별나기 때문이다. 하라 세츠코는 두 영화 모두에서 움직이길 거부하고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동경 이야기>에서는 8년 전 사별한 남편 곁에 여전히 남아 있고, <늦봄>에서는 홀로 남은 아버지 곁에 남아 있길 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부동으로 인해 갈등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갈등은 하라 세츠코 특유의 가면과 같은 마스크에 의해 은폐된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하라 세츠코는 움직이는 세계와 그것에 대한 거부를 한 몸에 담아내는 영화의 주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처음의 자전거 장면을 환기시켜 보자. 그 속에는 움직이지만 정지한 노리코와 역시 정지해 있지만 움직이는 영화라는 둘 간의 대응이 존재한다. 만약 스크린을 근대를 표상하는 한 표면이라 한다면 하라 세츠코를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근대 일본 속의 인물을 표상하는 한 표면(얼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분히 조작적인 표정을 드러내는 그녀의 얼굴에서 고도로 연출된 야스지로의 근대적 화면을 읽는 것은 과도한 상상일까? 이 상상 하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동경 이야기>와 <늦봄> 그리고 더 있을 하라 세츠코와 그 주변 인물들의 변주를 통해 일본의 근대라는 갈등적 ‘공간’을 근대적 ‘표면/얼굴’에 담아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평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인간의 근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표면/표층을 통한 근원과의 극렬한 대비를 통해서 일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평면인 표면으로 압축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 강박적 성격으로 인해 ‘공간은 표면에 압축될 수 있다’ 혹은 ‘압축되어야 한다.’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원근법이 우리를 속이려 했다면 야스지로는 허망함 속에 우리를 가두려 하는 것은 아닌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