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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7/25
    <부초>, 1959, 오즈 야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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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7/19
    <늦봄>, 1949, 오즈 야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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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07/18
    <21 Hungarian Dances>, Labeque Si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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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7/13
    <동경 이야기>, 1953, 오즈 야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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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7/13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오즈 야스지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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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7/12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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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초>, 1959, 오즈 야스지로

색이 입혀진 까닭인지 <부초>는 오즈 야스지로의 다른 영화들과 문맥 상에 그 위치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부터 등장하던 배우들의 구성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보여준다. 하라 세츠코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지만 지리지리한 오즈 야스지로로의 여행에서 이러한 <부초>는 오아시스처럼 청량하게 다가왔다. <동경 이야기>, <늦봄>이 안에서 밖으로의 시선이라 한다면 <부초>는 밖에서 안으로의 시선이라 말하고 싶다. <동경 이야기>와 <늦봄>에서 가족을 중심으로 그것으로부터 이탈해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반면 <부초>는 일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꾸리지 못한 떠돌이 유랑 극단이 정착한 이들에게 갖는 부러움을 말한다. 유랑 극단은 아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근대적 가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구식인 동시에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에도 부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철저한 이방인이 된다. 실제 영화 말미에 가서 극단은 갈 곳 없는 신세로 인해 그 마저도 해체되고 만다. 다들 어디로 갈 것인가? 받아줄 가족이 있는 이들은 다행이지만 그것조차 남아 있지 않은 이들, 단장과 질투하는 여배우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다만 다시 유랑을 시작하는 수 밖에. 이러한 말미에서 내가 다소 위안을 찾는 것은 그 둘이 함께라는 점 뿐이다.

 

 - <부초>가 지니는 이러한 전도된 시선은 배우와 관객 간의 전도를 보여주는 위의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전도는 단순한 평행적 위치 바꿈이 아니다. 관객이 배우를 보는 태도와는 달리 배우들은 커튼 뒤에 몸을 숨긴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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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1949, 오즈 야스지로

자전거 장면

 자전거를 타는 노리코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카메라에 의한 트래킹 숏은 마치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 같은 화면을 만들어 낸다. 이는 ‘노리코는 자전거를 타고 있다.’라는 인식과 결합되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특히나 노리코의 배경이 지나가는 풍광이 아닌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하늘이기에 그 어색함이 배가되고 있다. 이 어색함에서 내가 머뭇거리는 것은 그 속에서 노리코와 카메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는 노리코가 카메라에 갇혔다 해야 할지 카메라가 노리코에 매달려 다닌다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움에서 오고 있다. 카메라를 지우고 스크린의 표면에서 다시 질문하자면 노리코는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지한 것일까?

 

야스지로의 카메라는 사실 거의 모든 인물을 영화에 내재된 어떤 규칙에 의해 평면적이고 한결같이 담아내고 있다. 또한 이렇게 화면 속에 담긴 인물들에게서 역시 노리코의 경우와 같은 유사한 어색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유독 노리코에게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노리코가 영화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생각되기 때문이다. 노리코 역을 맡은 하라 세츠코는 <동경 이야기>에서 역시 <늦봄>에서 노리코에 대응될 수 있는 이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고 있는데 이 점에서 최초의 질문을 노리코가 아닌 하라 세츠코에 관한 것으로 바꾸고 싶기도 하다. 하라 세츠코가 보여주는 지나치게 과장된, 그래서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그 미소는 분명 유별나기 때문이다. 하라 세츠코는 두 영화 모두에서 움직이길 거부하고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동경 이야기>에서는 8년 전 사별한 남편 곁에 여전히 남아 있고, <늦봄>에서는 홀로 남은 아버지 곁에 남아 있길 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부동으로 인해 갈등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갈등은 하라 세츠코 특유의 가면과 같은 마스크에 의해 은폐된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하라 세츠코는 움직이는 세계와 그것에 대한 거부를 한 몸에 담아내는 영화의 주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처음의 자전거 장면을 환기시켜 보자. 그 속에는 움직이지만 정지한 노리코와 역시 정지해 있지만 움직이는 영화라는 둘 간의 대응이 존재한다. 만약 스크린을 근대를 표상하는 한 표면이라 한다면 하라 세츠코를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근대 일본 속의 인물을 표상하는 한 표면(얼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분히 조작적인 표정을 드러내는 그녀의 얼굴에서 고도로 연출된 야스지로의 근대적 화면을 읽는 것은 과도한 상상일까? 이 상상 하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동경 이야기>와 <늦봄> 그리고 더 있을 하라 세츠코와 그 주변 인물들의 변주를 통해 일본의 근대라는 갈등적 ‘공간’을 근대적 ‘표면/얼굴’에 담아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평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인간의 근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표면/표층을 통한 근원과의 극렬한 대비를 통해서 일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평면인 표면으로 압축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 강박적 성격으로 인해 ‘공간은 표면에 압축될 수 있다’ 혹은 ‘압축되어야 한다.’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원근법이 우리를 속이려 했다면 야스지로는 허망함 속에 우리를 가두려 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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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Hungarian Dances>, Labeque Sisters.

헝가리무곡집 표지

 

헝가리 무곡은 어떤 하나의 특정한 감정을 노래한다기 보다는 여러 감정들의 기복을 노래하는 것으로 들린다. 온 세상의 슬픔을 담아내는 듯 하더니 별안간 힘을 내어 정진하고 춤추는 변덕스런 모양을 무려 각각의 21개의 곡들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슬펐다가 저렇게 열정적으로 투쟁하고 그렇게 기쁨을 맛본다는 변화무쌍한 스펙터클의 선율들은 그 지나친 변화무쌍함 때문에 하나의 흐름으로 묶여 있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따로 떼어져 있다면, 21개의 곡들 중에서 슬픔, 열정, 기쁨을 각각 떼어내 새롭게 재조합한다면 훨씬 아련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의 변덕스런 마음도 따라잡지 못할 이 변덕스러움에 내가 유달리 애착을 지니는 것은. 그러니 선율의 묶인 흐름이 아니라, 선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변덕스러움 바로 그것이 지닌 어떤 매력이다. 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나도 내 맘을 모르겠네. 그래서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 라베크 자매의 헝가리 무곡집은 훌륭하진 않더라도 실패하지 않는 선택일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 감정의 변덕스러움, 참을 수 없는 감정의 가벼움 그 자체를 투사하고 공명시켰던 것.

 

Labeque Sisters

 

여러 헝가리 무곡집의 버젼 중에서 유독 라베크 자매 연주에 애착을 가지는 데에서 나름의 고집스런 이유가 있다. 이 이유가 음악에 앞서는 것인지 혹은 내 스스로 사후적인 의미를 덧붙인 것인지 이제 와서 알 수 없는 형편이 되었지만, 알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은 그 이유라는 것이 정말이지 그 음악에 끈끈하게 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작가의 존재가 텍스트의 배경이 되어 마땅한가에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이 가벼운 감정/감상에 있어서 작가라는 배경은 비교적 무거운 효과를 낸다.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브람스가 아닌 비교적 가까이 있는 라베크 자매라는 배경만이. 하지만 이 배경이라는 것이 비운의 천재 또는 변태적 천재와 같은 위대한 작가의 신화가 아닌 변덕스러움이라는 신화라고 하기엔 일상을 직시하고 있는 듯한 무엇이다. 카티아 라베크와 마리엘 라베크 이들 자매 간에는 서로에 대한 변덕스런 감정들이 없지 않을 수 있었을까? 피아니스트라는 같은 같은 직업을 가지고 피아노 소리라는 말로 그 변덕스러움을 21개의 무곡으로, 그들 간에 존재했던 감정 섞인 대화를 재현하고 있는 어쩌면 재현이 아닐 수 있는 그 소리가 내가 아끼는 이 CD 속에 담겨 있다. 남의 자매 일에 안이한 유추를 감행한 결과지만 이젠 음악에서 떼어낼 수 없는 배경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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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이야기>, 1953, 오즈 야스지로

 

 <동경 이야기>, 1953, 오즈 야스지로

<동경 이야기>는 오즈 야스지로가 보여주는 형식미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나 역시 지고지순한 미학의 대전제라 할 수 있는 통일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주제적인 측면에서의 동경의 비좁고 갑갑함이 그의 강박적이고 편집증적인 화면 구성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비좁은 일본 다다미 방을 보여주는 평면적 화면들은 관객이 그가 말하려는 정서, 갑갑함을 느끼기에 충분하고도 남아 심지어는 불편함까지 감지된다. 형식적으로 아니 훌륭하다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물을 다루는 그의 태도이다. 유심히 살펴 보면 그가 화면에서 인물의 구성에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는 배우들의 걸음걸이까지도 계산했다고 한다. 각각의 인물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드러나는 방식이 카메라 앞에서 정확하게 고정되어 있다.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인물들은 재현되어서는 안된다는 듯이 그 방식은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화면 속에서 나에게는 인물들이 미장센을 구성하는 기타 장식들과 같이 고정되어 죽은 듯이 보인다. 화면의 평면적 효과는 이러한 효과를 배가 시키는 듯 하다. 이마저도 통일성이라는 미학적 관점에서 훌륭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을 지니는 내가 오히려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저항감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인물이 카메라 앞에서 가구와 같은 무생물처럼 취급된다는 느낌이 <동경 이야기>가 훌륭한 형식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지나친 보수적 도덕성을 견지한 노리코라는 인물 역시 불편하긴 마찬가지지만 그것은 리얼리티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법도 한 구석이다. 그러나! 철저한 의도적 구성에 의한 죽어버린 인물들의 형식 중심의 영화를 과연 리얼리즘 미학을 추구하는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가 또 다시 떠오른다. 개인적 관점에서는 이 영화를 리얼리즘 계열로 분류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이로써 노리코가 보여주는 보수성에 대한 면죄부가 파기된다. 이제 우리는 그가 보여주는 보수성에 대해 공격할 수 있다. 보수적인 도덕적 강박때문에 <동경 이야기>의 인물들이 모두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 정서로서 이해하기 힘든 가족 간의 깍듯한 비인간적 예의가 보여주는 바는 바로 억압적인 도덕적 강박으로 인한 영화의 죽음이고 비인간화는 아닐런지. 인간중심적 사고를 넘어 야스지로의 카메라는 세계 속이 아닌 위에 군림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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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오즈 야스지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오즈 야스지로

 

이상용의 비평 <아이들과 어른들의 변증법 - 태어나기는 했지만>은 어른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를 대립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변증법적 갈등으로 읽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이 두 세계를 병치시켜놓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대립적으로 그리고 있는가 다시 검증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아이와 어른, 순수와 비순수라는 통념적인 대립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세계가 과연 순수하게 그려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이러한 대립적 인식에 무리가 있음이 드러난다. 아이들과 어른의 세계는 다만 그 기준이 다를 뿐 모두 위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다만 위계를 세우는 기준, 그 잣대가 아이들에게는 힘이고 어른들에게는 돈이 될 뿐이다. 특히 어른들의 사무실과 아이들의 교실을 연속적으로 잇는 트래킹 숏은 이 두 세계가 얼마나 유사한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어른들의 사무실은 아이들의 교실로 자연스럽게 유사성을 가지고 이어진다.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Ozu Yasjiro

 

서로 구분되어 보이는 이 두 세계는 유사한 논리로 돌아가고 있지만 서로 섞이기 보다는 독립적으로 구성되고 있다. 두 세계 모두 위계는 존재하지만 그 위계의 정열에 있어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세대를 통한 전복을 꿈꿀 가능성이 보인다. 물론 똑같이 위계적 사회이겠지만. 그러나 야스지로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전복의 가능성보다는 어른들의 위계가 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승계될 것임을 암시한다. 지금은 형제가 타로 위에 군림하고 있지만, 결말에서는 사이가 좋아지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성인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같이 계급적 위치를 점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아이들의 세계가 어른들의 세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야스지로는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술을 파는 아저씨는 아이들의 힘으로 쓰여지는 성인이지만 그를 이용하여 쓸 수 있는 힘의 논리는 곧 성인들의 자본의 논리이다. 좀 더 거부감이 없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로 이러한 종속성이 다시 한번 나타나는데 주먹밥 앞에서 단식투쟁 중이었던 형제가 굴하는 장면에서 기성 세대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다음 세대의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어젯밤 훌륭함을 위해 열렬히 투쟁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은 다음 날 아침 배고픔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산 이들에게 받을 수 밖에 없는 그 무엇 때문에 아직도 악순환의 고리들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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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이해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내가 생각하기로 이해는 용서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 이해하여 어디까지 용서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해결되기 전에는 어디서부터 이해의 노력이 시작되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용서든 이해든, 그 둘은 항상 붙어 다니는 것이고 구분하기 힘들다 생각되기에, 필요한 것만이 명확하고 그것이 어디까지 나아가야 할지 그 경계선은 보이지 않는다. 상대주의가 이 시대의 미덕처럼 자리잡고 있지만 어디까지 우리가 상대주의로 이해해야 하는지. 범죄자 마저도 넓은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다른 예를 들자면 아랍 국가에서 비춰지는 성차별적 제도들을 상대주의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그럴 수 없는지.

 

누구나 정신적으로 무한히 자유롭겠지만 물리적 행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사념이 물리적 공간으로 현실화될 때, 이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면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역시 어디까지라는 문제가 나에게 떠오른다. 이런 생각이, 안이하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는,  떠오른다. 단순한 표현의 차원이라면 끝까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언변이든 활자화된 텍스트이든 혹은 이미지로 표현된 것이든. 폭력적인 언변, 텍스트, 이미지의 포화 속에서 나 역시 그것들을 가끔씩 두려워 한다. 이 두려움이 표현에 한계를 설정하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표현하지 못하기에 받는 고통들을 생각한다면 이 두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추악한 것은 말로 표현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굴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도? 잠재적으로 추악한 것은 폭력이 될 수 있기에 말아야만 하는 것일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미치도록 외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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