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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가 남긴 것들 2

거장으로서의 오즈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내러티브적 측면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물론 오즈가 거장인 것은 형식적 의미에서 그런 것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무성의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될 정도로 진부한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진부할 뿐만 아니라 전개에 있어서 역시 엉성하다. 쉽게 생각할 때, 형식에 치중한 나머지 내러티브에 소홀했다. 또는 형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내러티브를 탈색했다. 이런 변명들을 만들어 줄 수는 있을 듯 하다. 그러나 형식과 내러티브는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전에는 이 변명들의 정당성이 획득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 형식과 내용적 측면이 한 방향을 향해 짜여져 있다면 그 효과가 배가된다는 것을 상식으로 전제한자면 당연히 그 둘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되고 이 변명은 오즈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경우, 영화의 주제가 필름이 담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담을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하고 있다면 어떠할까? 오즈가 바로 시각화될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즈의, 오즈적 주제는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방식은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떤 주제, 즉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이미지로 재현될 수도 없고, 언어화된 내러티브로도 재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은 뭘까? (내러티브를 언어적 재현에 대응시킨 것은 성급하고 거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여기서는 내러티브의 구조가 아닌 내러티브에서 말하여진 것만을 다룬다.) 이미지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상징화하지 않는 '말하기(말하기라 부를 수 있을까?)'에서 우리는 상징적으로 무엇을 포착해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오즈의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지로 그리고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이 사실은 역시나 이미지나 언어로 이루어진 영화가 담을 수 없는 무엇이 오즈적 주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주제의 특성상 그것은 오즈의 영화가 드러내는 시각적, 청각적 형상에서 드러날 수 없다. 이제 오즈가 보여줄 수 있는 주제는 이것 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것은 영화가 잘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 바로 재현의 불충성이다. 여기까지는 나의 오즈를 위한 충실한 변명 만들기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스런 의문들이 남아 있다.(오즈의 영화가 메타영화라는 이런 나의 결론적 변명은 기존의 호평들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이미 그들에 포획된 상태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나는 베끼고 있다.)

이전의 모든 호평들/변명들을 인정하더라도, 다시 말하면 그 형식적 측면과 그 주제적 측면에 대해 훌륭히 평가하고 그의 영화를 메타영화로 받아들이더라도, 관객이 느끼는 효과적 측면에서의 문제가 남는다. 스크린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시선이 중요한 것이고 무성의한 내러티브는 언어적 재현이 불가능한 그 주제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스크린에는 이미지가 보이고, 피상적일 망정 내러티브가 읽힌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번 오즈의 여름을 종결시킬만한 만족스런 해답을 찾지 못한 상태이다. 이 물음은 어쩌면 오즈를 벗어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따라다닐 그래서 오즈의 망령을 대동하는 그런 물음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 문제가 분명 대중과 평론가, 대중과 작가라는 끝나지 않는 관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관계는 재현의 불완전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관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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