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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31
    <자유의 환영>, 1974, 루이스 부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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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8/31
    오즈가 남긴 것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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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08/31
    오즈가 남긴 것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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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환영>, 1974, 루이스 부뉴엘

<자유의 환영>에서 루이스 부뉴엘은 상식의 뒤집기를 시도한다. 근친상간으로 성적 통념을, 수도승의 방탕한 생활로 종교적 통념을, 식당과 화장실이라는 공간의 전도를 통해 일상적 통념을 깨뜨린다. 이 외에도 영화 내내 이러한 상식적 관념들은 끊임없이 뒤집히고 깨진다. 또한 영화의 형식적 차워에서도 고전적 서사 규칙을 어김으로써 같은 맥락의 위반을 달성한다. 위반/뒤집기/깨뜨리기라 말할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이 영화를 말 그대로 가득 채우고 있어 무엇을 깨뜨리려 하는가라는 질문조차 무색해 진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어김을 드러내고 있다 정도. 개인적으로 주목할만한 몇몇 장면들을 상기하는 것으로 이 어김들이 던져주는 것들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 싶다. 
1. 한 아이가 학교에서 실종된다. 하지만 여기서 실종이라는 사건만이 존재할 뿐 실제로 아이가 실종된 것은 아니다. 멀쩡한 아이를 옆에 두고 부모는 아이를 걱정하고 경찰은 조서를 꾸민다. 이 상황에서 특히 재밌는 장면은 실종된 아이를 보면서 몽타주를 작성하는 숏이다. 실종된 그 아이를 직접 보는 것보다 몽타주를 사실적으로 작성할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앞에 있는 아이가 실체 없는 귀신인 것처럼 완벽한 몽타주에도 불구하고 실종이라는 사건은 계속 된다. 즉 존재하지 않는 사건은 존재하고 존재하는 아이는 부재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실종된 아이가 사건을 만들지 않고 사건이 실종된 아이를 만들었다. 이는 원인과 결과의 전도를 보여준다. 실종이라는 사건이 실종되지 않은 아이를 실종된 것으로 규정짓는 것이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에 대한 사후적인 규정 - 앞에 있는 이 아이는 실종되었다 - 은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일까? 조금만 살펴보면 이러한 '사후 규정'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흔한 일임을 인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 대답 속에는 분명 사후 규정적 성격을 지닌 대답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나는 내가 지금 실종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미에서 실종에 관한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은 말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2. 내가 본 <자유의 환영>은 EBS에서 방영한 것의 녹화였는데, 녹화된 테잎에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한 평론가의 영화 소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평론가는 <자유의 환영>을 두고 루이스 부뉴엘의 가장 자유로운 영화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자유롭다고 평가한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그 수많은 어김들 때문임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자유의 환영>이라는 제목은 그가 말한 자유로움에 대해 회의하게 만든다. 일견 자유로워 보이는 그 형식과 상황들의 어김은 제목처럼 자유의 '환영'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대구를 이루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루이스 부뉴엘이 이 영화를 통해 재현하는 것이 '자유로움'에 대한 무엇이 아니라는 생각을 확고히 해주고 있다. 말 따옴표가 문장을 강조하듯이 "자유를 타도하라"라는 구호가 처음과 끝에서 영화를 열고 닫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 전체가 "자유를 타도하라"라는 외침 아래에, 안에 들어가 있는 셈이 된다. 실종에 대한 에피소드에서처럼 우리는 권리와 의지로 자유롭게 살아가기 보다는 규정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후적이고 자의적인 규정들에서 벗어나길 욕망한다. 규정들을 모두 내팽겨 쳐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가길 꿈꾸지만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다. 규정들을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규정이 없으면 규정을 어기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위반은 '무엇을' 위반하는 것으로 항상 대상을 필요로 한다. 자유도 이와 같이 속박이 없다면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루이스 부뉴엘은 이 규정들을 뒤집음으로서 그것들이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들을 위반하길 욕망하는 우리의 모습을 드러낸다. 자유에 대한 욕망은 속박이 전제되기 전에는 존재할 수 없기에 자유는 타도되는 것이다. '자유'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프랑스 혁명이 가져다 준 것은 자유가 아닌 허식이 제공하는 욕망으로 가득찬 자본의 시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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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가 남긴 것들 2

거장으로서의 오즈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내러티브적 측면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물론 오즈가 거장인 것은 형식적 의미에서 그런 것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무성의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될 정도로 진부한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진부할 뿐만 아니라 전개에 있어서 역시 엉성하다. 쉽게 생각할 때, 형식에 치중한 나머지 내러티브에 소홀했다. 또는 형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내러티브를 탈색했다. 이런 변명들을 만들어 줄 수는 있을 듯 하다. 그러나 형식과 내러티브는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전에는 이 변명들의 정당성이 획득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 형식과 내용적 측면이 한 방향을 향해 짜여져 있다면 그 효과가 배가된다는 것을 상식으로 전제한자면 당연히 그 둘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되고 이 변명은 오즈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경우, 영화의 주제가 필름이 담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담을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하고 있다면 어떠할까? 오즈가 바로 시각화될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즈의, 오즈적 주제는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방식은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떤 주제, 즉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이미지로 재현될 수도 없고, 언어화된 내러티브로도 재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은 뭘까? (내러티브를 언어적 재현에 대응시킨 것은 성급하고 거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여기서는 내러티브의 구조가 아닌 내러티브에서 말하여진 것만을 다룬다.) 이미지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상징화하지 않는 '말하기(말하기라 부를 수 있을까?)'에서 우리는 상징적으로 무엇을 포착해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오즈의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지로 그리고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이 사실은 역시나 이미지나 언어로 이루어진 영화가 담을 수 없는 무엇이 오즈적 주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주제의 특성상 그것은 오즈의 영화가 드러내는 시각적, 청각적 형상에서 드러날 수 없다. 이제 오즈가 보여줄 수 있는 주제는 이것 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것은 영화가 잘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 바로 재현의 불충성이다. 여기까지는 나의 오즈를 위한 충실한 변명 만들기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스런 의문들이 남아 있다.(오즈의 영화가 메타영화라는 이런 나의 결론적 변명은 기존의 호평들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이미 그들에 포획된 상태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나는 베끼고 있다.)

이전의 모든 호평들/변명들을 인정하더라도, 다시 말하면 그 형식적 측면과 그 주제적 측면에 대해 훌륭히 평가하고 그의 영화를 메타영화로 받아들이더라도, 관객이 느끼는 효과적 측면에서의 문제가 남는다. 스크린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시선이 중요한 것이고 무성의한 내러티브는 언어적 재현이 불가능한 그 주제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스크린에는 이미지가 보이고, 피상적일 망정 내러티브가 읽힌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번 오즈의 여름을 종결시킬만한 만족스런 해답을 찾지 못한 상태이다. 이 물음은 어쩌면 오즈를 벗어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따라다닐 그래서 오즈의 망령을 대동하는 그런 물음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 문제가 분명 대중과 평론가, 대중과 작가라는 끝나지 않는 관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관계는 재현의 불완전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관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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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가 남긴 것들 1

지난 목요일을 끝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세미나가 끝이 났다. 오즈의 영화가 나의 취향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었고 보면서 공부하면서 특별히 재밌다고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한 달 간의 오즈와의 '동고'는 명확한 끝이 아닌 어렴풋한 끝맺음으로 가시지 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리 지긋지긋해 했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맴도는 오즈에 대한 생각들이란.

오즈는 왜 재미없었는가? 라는 질문을 세미나가 모두 끝난 후 다시금 스스로에게 던졌더니 지금까지와는 약간의 다른 뉘앙스를 띈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애초부터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다분히 지닌 영화들이 재밌기는 힘들다는 편견 아닌 편견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오즈의 영화 역시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몇 안되는 오즈의 영화를 보는 내내 재밌지는 않다란 결론을 이미 품고 있었다. 또한 재미없다는 것엔 내가 경계해야 마땅한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도 녹아 있는데 그것은 오즈의 영화가 흑백이란 점이다. '흑백 영화 = 재미없는 영화'란 공식이 오래 전부터 내 마음 속엔 굳건히 버티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오즈적으로 재미없음. 그것은 무어란 말인가? 몰입하는 나를 환기시키는 인물들의 노려보는 시선일까? 그의 엉성한 내러티브 때문일까? 혹은 진부한 주제일까? 아니면 답답하기 짝이 없는 평면적 화면 때문일까? 마지막 세미나를 위해 하스미 시케이코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中 '6장 멈춰 서 있는 것'의 발제는 내게 몇 가지 오즈에 대한 시사점을 남겨 주었다. 시사점이라기 보다는 이 역시 의문에 가까운 것이라 해야겠지만. 이는 오즈가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무엇으로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오즈는 지독한 연출로 짜여진 화면 속의 이미지를 구성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이미지를 통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결론적 의문이다. 이미지를 통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화면 속에 나타나는 사물 그 자체가 중요성을 가지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면 속에 나타나는 어떤 이미지 - 통합된 이미지이든, 개개의 사물에 대한 이미지이든 - 보다는 그는 영화 속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말한다. 시선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좀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선이면서 몸짓이고 방향이고 이미지로 나타나는 몸이 아닌 시선, 몸짓, 방향, 태도 등 쉽게 시각화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담아내는 시각적이지 않은 것으로서의 몸이다. 이 몸은 또한 대상으로서의 몸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그리고 행동中인 몸이다. 따라서 오즈의 인물들은 영화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완결된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대상이나 목적으로서 취급될 수 없다. 역으로 그들은 무엇을 대상이나 목적으로 가질 수도 없는 그런 인물이기도 하다. 오즈의 영화 속에서 그들이 던지는 시선이 어디로 귀결되는지 알 수 없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관객인 우리를 응시하기도 하고 저 멀리 어딘지 모를 곳을 그윽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저 멀리를 바라 보는 경우도 우리는 그 시선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고 우리를 바라 보는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대상이 될 수 없는 완결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류 치슈는 나를 보기도 하고 당신을 보기도 하며 어제의 우리를 혹은 오늘의 우리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하스미 시게이코는 이러한 응시에서 일본인의 특성을 연결시킨다.

"사람들은 특히 일본인들은 일상 생활에 있어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정도의 빈도와 집요함을 가지고 타인의 눈을 훔쳐 보지 않는다. 그것이 류 치슈와 같이 적의가 없는 것이든, 하라 세츠코와 같이 우수를 자아내는 것이든, 상대의 눈동자를 정면에서 언제까지나 지켜 보는 일은 우선 없다. 우리들이 어떤 종류의 눈동자에 글린다면 그것은 여기를 직시할 때가 아니라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이나, 그렇지 않다면 문득 시선을 비켜 눈을 내리뜨거나 하는 때임이 틀림없다."
- p.135, <감독 오즈 야스지로>, 하스미 시게이코
특히 일본인이라고 강한 일본적 특성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사람들은'이라 문장을 시작한 것과 같이 언급된 내용이 보편성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문화권에서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이 사실에서 몇 가지 생각이 다시 꼬리를 문다. 우선 논의를 연결선상에서 우선 류 치슈든 하라 세츠코이든 우리를 보는 그들의 시선은 그들이 아무리 집요하게 쳐다보더라도 완전한 대상을 가질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우리에게 집요한 시선을 던지면 던질수록 우리는 그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감춰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오즈는 인물들이 잘 보이도록 적나라하게 정면으로 그들을 잡아내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들을 볼 수 없도록 그리고 그들도 우리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하여 서로를 불완전한 시각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한 평면적 화면 구성은 이러한 시선을 더욱 날카로운 것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또 다른 생각은 여담에 가까운 것인데, 시각 회피 현상에 관한 것이다. 예전 어떤 인지 과학에 대한 한 다큐멘터리에서 본 현상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은 무언가를 볼 때는 잘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무언가 생각할 때에는 의도적으로 시각을 회피한다. 인물들의 노려보는 시선이 유발할 관객의 회피된 시각이 오즈의 영화에서 사유를 촉발시키진 않을까?
다시 논의로 돌아와서 첫 질문을 다시 던져보고 싶다. 오즈의 영화가 왜 재미가 없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시선이 지닌 특징 때문은 아닐까? 오즈의 영화가 시선들로(확장된 개념의 시선, 편의상 시선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 조합으로 이야기한다고 가정한다면 이 시선들의 특징이 곧 그 재미없음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오즈의 시선은 목적이 없다. 또한 오즈의 영화, 즉 시선의 결합체는 우리 관객의 시선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시선의 목적이 될 수 있는 조건인 시각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즈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따라서 볼 수 없는 것은 보는 것이 된다. 어렵게 그 볼 수 없는 시선을 추적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화 속에서도 목적을 드러내지 않기에 목적이 이어져나가는 끝없이 진행 중인 시선으로 머문다. 따라서 오즈의 영화는 목적적이고 결과론적이기 보다는 과정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혹은 보려고 했던 내가 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보기를 이 정도에서 끝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의 영화적 변주들은 끝 없음 혹은 덧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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