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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31
    오즈가 남긴 것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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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8/31
    오즈가 남긴 것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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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07/19
    <늦봄>, 1949, 오즈 야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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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7/13
    <동경 이야기>, 1953, 오즈 야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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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7/13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오즈 야스지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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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가 남긴 것들 2

거장으로서의 오즈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내러티브적 측면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물론 오즈가 거장인 것은 형식적 의미에서 그런 것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무성의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될 정도로 진부한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진부할 뿐만 아니라 전개에 있어서 역시 엉성하다. 쉽게 생각할 때, 형식에 치중한 나머지 내러티브에 소홀했다. 또는 형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내러티브를 탈색했다. 이런 변명들을 만들어 줄 수는 있을 듯 하다. 그러나 형식과 내러티브는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전에는 이 변명들의 정당성이 획득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 형식과 내용적 측면이 한 방향을 향해 짜여져 있다면 그 효과가 배가된다는 것을 상식으로 전제한자면 당연히 그 둘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되고 이 변명은 오즈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경우, 영화의 주제가 필름이 담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담을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하고 있다면 어떠할까? 오즈가 바로 시각화될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즈의, 오즈적 주제는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방식은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떤 주제, 즉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이미지로 재현될 수도 없고, 언어화된 내러티브로도 재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은 뭘까? (내러티브를 언어적 재현에 대응시킨 것은 성급하고 거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여기서는 내러티브의 구조가 아닌 내러티브에서 말하여진 것만을 다룬다.) 이미지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상징화하지 않는 '말하기(말하기라 부를 수 있을까?)'에서 우리는 상징적으로 무엇을 포착해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오즈의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지로 그리고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이 사실은 역시나 이미지나 언어로 이루어진 영화가 담을 수 없는 무엇이 오즈적 주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주제의 특성상 그것은 오즈의 영화가 드러내는 시각적, 청각적 형상에서 드러날 수 없다. 이제 오즈가 보여줄 수 있는 주제는 이것 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것은 영화가 잘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 바로 재현의 불충성이다. 여기까지는 나의 오즈를 위한 충실한 변명 만들기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스런 의문들이 남아 있다.(오즈의 영화가 메타영화라는 이런 나의 결론적 변명은 기존의 호평들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이미 그들에 포획된 상태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나는 베끼고 있다.)

이전의 모든 호평들/변명들을 인정하더라도, 다시 말하면 그 형식적 측면과 그 주제적 측면에 대해 훌륭히 평가하고 그의 영화를 메타영화로 받아들이더라도, 관객이 느끼는 효과적 측면에서의 문제가 남는다. 스크린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시선이 중요한 것이고 무성의한 내러티브는 언어적 재현이 불가능한 그 주제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스크린에는 이미지가 보이고, 피상적일 망정 내러티브가 읽힌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번 오즈의 여름을 종결시킬만한 만족스런 해답을 찾지 못한 상태이다. 이 물음은 어쩌면 오즈를 벗어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따라다닐 그래서 오즈의 망령을 대동하는 그런 물음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 문제가 분명 대중과 평론가, 대중과 작가라는 끝나지 않는 관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관계는 재현의 불완전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관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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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가 남긴 것들 1

지난 목요일을 끝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세미나가 끝이 났다. 오즈의 영화가 나의 취향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었고 보면서 공부하면서 특별히 재밌다고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한 달 간의 오즈와의 '동고'는 명확한 끝이 아닌 어렴풋한 끝맺음으로 가시지 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리 지긋지긋해 했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맴도는 오즈에 대한 생각들이란.

오즈는 왜 재미없었는가? 라는 질문을 세미나가 모두 끝난 후 다시금 스스로에게 던졌더니 지금까지와는 약간의 다른 뉘앙스를 띈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애초부터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다분히 지닌 영화들이 재밌기는 힘들다는 편견 아닌 편견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오즈의 영화 역시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몇 안되는 오즈의 영화를 보는 내내 재밌지는 않다란 결론을 이미 품고 있었다. 또한 재미없다는 것엔 내가 경계해야 마땅한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도 녹아 있는데 그것은 오즈의 영화가 흑백이란 점이다. '흑백 영화 = 재미없는 영화'란 공식이 오래 전부터 내 마음 속엔 굳건히 버티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오즈적으로 재미없음. 그것은 무어란 말인가? 몰입하는 나를 환기시키는 인물들의 노려보는 시선일까? 그의 엉성한 내러티브 때문일까? 혹은 진부한 주제일까? 아니면 답답하기 짝이 없는 평면적 화면 때문일까? 마지막 세미나를 위해 하스미 시케이코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中 '6장 멈춰 서 있는 것'의 발제는 내게 몇 가지 오즈에 대한 시사점을 남겨 주었다. 시사점이라기 보다는 이 역시 의문에 가까운 것이라 해야겠지만. 이는 오즈가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무엇으로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오즈는 지독한 연출로 짜여진 화면 속의 이미지를 구성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이미지를 통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결론적 의문이다. 이미지를 통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화면 속에 나타나는 사물 그 자체가 중요성을 가지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면 속에 나타나는 어떤 이미지 - 통합된 이미지이든, 개개의 사물에 대한 이미지이든 - 보다는 그는 영화 속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말한다. 시선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좀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선이면서 몸짓이고 방향이고 이미지로 나타나는 몸이 아닌 시선, 몸짓, 방향, 태도 등 쉽게 시각화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담아내는 시각적이지 않은 것으로서의 몸이다. 이 몸은 또한 대상으로서의 몸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그리고 행동中인 몸이다. 따라서 오즈의 인물들은 영화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완결된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대상이나 목적으로서 취급될 수 없다. 역으로 그들은 무엇을 대상이나 목적으로 가질 수도 없는 그런 인물이기도 하다. 오즈의 영화 속에서 그들이 던지는 시선이 어디로 귀결되는지 알 수 없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관객인 우리를 응시하기도 하고 저 멀리 어딘지 모를 곳을 그윽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저 멀리를 바라 보는 경우도 우리는 그 시선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고 우리를 바라 보는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대상이 될 수 없는 완결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류 치슈는 나를 보기도 하고 당신을 보기도 하며 어제의 우리를 혹은 오늘의 우리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하스미 시게이코는 이러한 응시에서 일본인의 특성을 연결시킨다.

"사람들은 특히 일본인들은 일상 생활에 있어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정도의 빈도와 집요함을 가지고 타인의 눈을 훔쳐 보지 않는다. 그것이 류 치슈와 같이 적의가 없는 것이든, 하라 세츠코와 같이 우수를 자아내는 것이든, 상대의 눈동자를 정면에서 언제까지나 지켜 보는 일은 우선 없다. 우리들이 어떤 종류의 눈동자에 글린다면 그것은 여기를 직시할 때가 아니라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이나, 그렇지 않다면 문득 시선을 비켜 눈을 내리뜨거나 하는 때임이 틀림없다."
- p.135, <감독 오즈 야스지로>, 하스미 시게이코
특히 일본인이라고 강한 일본적 특성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사람들은'이라 문장을 시작한 것과 같이 언급된 내용이 보편성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문화권에서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이 사실에서 몇 가지 생각이 다시 꼬리를 문다. 우선 논의를 연결선상에서 우선 류 치슈든 하라 세츠코이든 우리를 보는 그들의 시선은 그들이 아무리 집요하게 쳐다보더라도 완전한 대상을 가질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우리에게 집요한 시선을 던지면 던질수록 우리는 그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감춰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오즈는 인물들이 잘 보이도록 적나라하게 정면으로 그들을 잡아내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들을 볼 수 없도록 그리고 그들도 우리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하여 서로를 불완전한 시각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한 평면적 화면 구성은 이러한 시선을 더욱 날카로운 것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또 다른 생각은 여담에 가까운 것인데, 시각 회피 현상에 관한 것이다. 예전 어떤 인지 과학에 대한 한 다큐멘터리에서 본 현상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은 무언가를 볼 때는 잘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무언가 생각할 때에는 의도적으로 시각을 회피한다. 인물들의 노려보는 시선이 유발할 관객의 회피된 시각이 오즈의 영화에서 사유를 촉발시키진 않을까?
다시 논의로 돌아와서 첫 질문을 다시 던져보고 싶다. 오즈의 영화가 왜 재미가 없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시선이 지닌 특징 때문은 아닐까? 오즈의 영화가 시선들로(확장된 개념의 시선, 편의상 시선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 조합으로 이야기한다고 가정한다면 이 시선들의 특징이 곧 그 재미없음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오즈의 시선은 목적이 없다. 또한 오즈의 영화, 즉 시선의 결합체는 우리 관객의 시선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시선의 목적이 될 수 있는 조건인 시각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즈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따라서 볼 수 없는 것은 보는 것이 된다. 어렵게 그 볼 수 없는 시선을 추적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화 속에서도 목적을 드러내지 않기에 목적이 이어져나가는 끝없이 진행 중인 시선으로 머문다. 따라서 오즈의 영화는 목적적이고 결과론적이기 보다는 과정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혹은 보려고 했던 내가 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보기를 이 정도에서 끝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의 영화적 변주들은 끝 없음 혹은 덧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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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1949, 오즈 야스지로

자전거 장면

 자전거를 타는 노리코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카메라에 의한 트래킹 숏은 마치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 같은 화면을 만들어 낸다. 이는 ‘노리코는 자전거를 타고 있다.’라는 인식과 결합되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특히나 노리코의 배경이 지나가는 풍광이 아닌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하늘이기에 그 어색함이 배가되고 있다. 이 어색함에서 내가 머뭇거리는 것은 그 속에서 노리코와 카메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는 노리코가 카메라에 갇혔다 해야 할지 카메라가 노리코에 매달려 다닌다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움에서 오고 있다. 카메라를 지우고 스크린의 표면에서 다시 질문하자면 노리코는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지한 것일까?

 

야스지로의 카메라는 사실 거의 모든 인물을 영화에 내재된 어떤 규칙에 의해 평면적이고 한결같이 담아내고 있다. 또한 이렇게 화면 속에 담긴 인물들에게서 역시 노리코의 경우와 같은 유사한 어색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유독 노리코에게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노리코가 영화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생각되기 때문이다. 노리코 역을 맡은 하라 세츠코는 <동경 이야기>에서 역시 <늦봄>에서 노리코에 대응될 수 있는 이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고 있는데 이 점에서 최초의 질문을 노리코가 아닌 하라 세츠코에 관한 것으로 바꾸고 싶기도 하다. 하라 세츠코가 보여주는 지나치게 과장된, 그래서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그 미소는 분명 유별나기 때문이다. 하라 세츠코는 두 영화 모두에서 움직이길 거부하고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동경 이야기>에서는 8년 전 사별한 남편 곁에 여전히 남아 있고, <늦봄>에서는 홀로 남은 아버지 곁에 남아 있길 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부동으로 인해 갈등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갈등은 하라 세츠코 특유의 가면과 같은 마스크에 의해 은폐된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하라 세츠코는 움직이는 세계와 그것에 대한 거부를 한 몸에 담아내는 영화의 주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처음의 자전거 장면을 환기시켜 보자. 그 속에는 움직이지만 정지한 노리코와 역시 정지해 있지만 움직이는 영화라는 둘 간의 대응이 존재한다. 만약 스크린을 근대를 표상하는 한 표면이라 한다면 하라 세츠코를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근대 일본 속의 인물을 표상하는 한 표면(얼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분히 조작적인 표정을 드러내는 그녀의 얼굴에서 고도로 연출된 야스지로의 근대적 화면을 읽는 것은 과도한 상상일까? 이 상상 하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동경 이야기>와 <늦봄> 그리고 더 있을 하라 세츠코와 그 주변 인물들의 변주를 통해 일본의 근대라는 갈등적 ‘공간’을 근대적 ‘표면/얼굴’에 담아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평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인간의 근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표면/표층을 통한 근원과의 극렬한 대비를 통해서 일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평면인 표면으로 압축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 강박적 성격으로 인해 ‘공간은 표면에 압축될 수 있다’ 혹은 ‘압축되어야 한다.’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원근법이 우리를 속이려 했다면 야스지로는 허망함 속에 우리를 가두려 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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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이야기>, 1953, 오즈 야스지로

 

 <동경 이야기>, 1953, 오즈 야스지로

<동경 이야기>는 오즈 야스지로가 보여주는 형식미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나 역시 지고지순한 미학의 대전제라 할 수 있는 통일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주제적인 측면에서의 동경의 비좁고 갑갑함이 그의 강박적이고 편집증적인 화면 구성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비좁은 일본 다다미 방을 보여주는 평면적 화면들은 관객이 그가 말하려는 정서, 갑갑함을 느끼기에 충분하고도 남아 심지어는 불편함까지 감지된다. 형식적으로 아니 훌륭하다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물을 다루는 그의 태도이다. 유심히 살펴 보면 그가 화면에서 인물의 구성에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는 배우들의 걸음걸이까지도 계산했다고 한다. 각각의 인물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드러나는 방식이 카메라 앞에서 정확하게 고정되어 있다.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인물들은 재현되어서는 안된다는 듯이 그 방식은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화면 속에서 나에게는 인물들이 미장센을 구성하는 기타 장식들과 같이 고정되어 죽은 듯이 보인다. 화면의 평면적 효과는 이러한 효과를 배가 시키는 듯 하다. 이마저도 통일성이라는 미학적 관점에서 훌륭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을 지니는 내가 오히려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저항감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인물이 카메라 앞에서 가구와 같은 무생물처럼 취급된다는 느낌이 <동경 이야기>가 훌륭한 형식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지나친 보수적 도덕성을 견지한 노리코라는 인물 역시 불편하긴 마찬가지지만 그것은 리얼리티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법도 한 구석이다. 그러나! 철저한 의도적 구성에 의한 죽어버린 인물들의 형식 중심의 영화를 과연 리얼리즘 미학을 추구하는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가 또 다시 떠오른다. 개인적 관점에서는 이 영화를 리얼리즘 계열로 분류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이로써 노리코가 보여주는 보수성에 대한 면죄부가 파기된다. 이제 우리는 그가 보여주는 보수성에 대해 공격할 수 있다. 보수적인 도덕적 강박때문에 <동경 이야기>의 인물들이 모두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 정서로서 이해하기 힘든 가족 간의 깍듯한 비인간적 예의가 보여주는 바는 바로 억압적인 도덕적 강박으로 인한 영화의 죽음이고 비인간화는 아닐런지. 인간중심적 사고를 넘어 야스지로의 카메라는 세계 속이 아닌 위에 군림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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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오즈 야스지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오즈 야스지로

 

이상용의 비평 <아이들과 어른들의 변증법 - 태어나기는 했지만>은 어른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를 대립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변증법적 갈등으로 읽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이 두 세계를 병치시켜놓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대립적으로 그리고 있는가 다시 검증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아이와 어른, 순수와 비순수라는 통념적인 대립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세계가 과연 순수하게 그려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이러한 대립적 인식에 무리가 있음이 드러난다. 아이들과 어른의 세계는 다만 그 기준이 다를 뿐 모두 위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다만 위계를 세우는 기준, 그 잣대가 아이들에게는 힘이고 어른들에게는 돈이 될 뿐이다. 특히 어른들의 사무실과 아이들의 교실을 연속적으로 잇는 트래킹 숏은 이 두 세계가 얼마나 유사한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어른들의 사무실은 아이들의 교실로 자연스럽게 유사성을 가지고 이어진다.

 

<태어나기는 했지만>, 1932, Ozu Yasjiro

 

서로 구분되어 보이는 이 두 세계는 유사한 논리로 돌아가고 있지만 서로 섞이기 보다는 독립적으로 구성되고 있다. 두 세계 모두 위계는 존재하지만 그 위계의 정열에 있어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세대를 통한 전복을 꿈꿀 가능성이 보인다. 물론 똑같이 위계적 사회이겠지만. 그러나 야스지로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전복의 가능성보다는 어른들의 위계가 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승계될 것임을 암시한다. 지금은 형제가 타로 위에 군림하고 있지만, 결말에서는 사이가 좋아지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성인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같이 계급적 위치를 점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아이들의 세계가 어른들의 세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야스지로는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술을 파는 아저씨는 아이들의 힘으로 쓰여지는 성인이지만 그를 이용하여 쓸 수 있는 힘의 논리는 곧 성인들의 자본의 논리이다. 좀 더 거부감이 없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로 이러한 종속성이 다시 한번 나타나는데 주먹밥 앞에서 단식투쟁 중이었던 형제가 굴하는 장면에서 기성 세대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다음 세대의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어젯밤 훌륭함을 위해 열렬히 투쟁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은 다음 날 아침 배고픔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산 이들에게 받을 수 밖에 없는 그 무엇 때문에 아직도 악순환의 고리들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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