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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프- 서평

 

스탈린주의의 비극 속에 사라진 위대한 소련의 식물학자, 바빌로프의 이야기
[서평] 게리 폴 나브한,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황정규  ㅣ  2011년2월1일
 

1.
소위 많은 “생태주의자”들이나 생태주의를 수용해야 한다는 맑스주의자들이 대개 보이는 공통된 견해가 하나 있다. 맑스주의는 생태적 관심이 없고 자연을 이용과 파괴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너무나 많이 퍼져 있어서, 맑스주의가 생태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본적인 근거가 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충분한 역사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가 발전시킨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은 모두 유물론이라는 철학, 즉 자연에 대한 유물론적인 파악에 기반을 둔 것이다. 맑스는 유물론의 기계론과 결정론을 극복하고 관념론적인 인간이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유물론적 관점에서 자연과 인간간의 관계,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고유한 위치 등을 설명할 수 있는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또한 맑스와 엥겔스는 19세기 발전하는 자연과학의 성과를 습득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20세기 말에야 비로소 맑스, 엥겔스의 비판적 역사적 전집인 MEGA 중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노트 등이 발간되면서 겨우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맑스는 당대의 과학자들과 꾸준한 교류를 하였으며, 맑스의 장례식에서는 젊은 생물학자인 레이 랑케스터가 조사를 읽기도 하였다.
많은 자칭 타칭 맑스주의자들이 맑스주의는 자연과학에는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역사에 적용되는 것이다, 제한된 이론으로서 계급투쟁에 대한 것이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지만, 맑스주의는 그 근원부터가 유물론적 자연파악에 있었고, 맑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기반을 전혀 떠난 적이 없다. 오히려 맑스 사후의 맑스주의는 한편에서는 맑스가 발전시킨 변증법적 유물론이 기계적 유물론으로 전락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철학으로서의 토대를 잃어버리고 관념론에 오염되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연과학 속에서 맑스주의적 견해는 꾸준히 발전해왔다. 맑스주의를 자연과학에 적용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낳는 것마냥 보는 과학에 문외한인 맑스주의자에 비하면, 과감하게 맑스와 엥겔스의 방법론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자연과학자들을 보면 경외스러운 느낌이 일기까지 한다. 가령 생명의 기원에 관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할데인의 경우에는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의 최초 영역판 서문을 쓰기도 하였으며, 하버드대 생물학자들인 리처드 레빈스와 리처드 르윈틴은 자신들의 공저 “변증법적 생물학자”라는 책을 엥겔스에게 헌정하였다.
왜곡되고 불충분한 맑스주의의 이해가 맑스주의의 중요한 전통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전통을 망각하고, 자연과학 내에서 맑스주의적 세계관과 방법론을 이어가는 전통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2.
게리 폴 나브한의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책은 니콜라이 바빌로프에 관한 것이다.
바빌로프는 소련의 식물학자이자 유전학자로, 전세계에서 다양한 종자를 수집하고, 이를 인류의 식량확보를 위해 노력한 학자이다. 그는 상인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과학의 길을 선택하였고, 이 과학을 통해 인류에 공언하고자 하였다. 특히 러시아가 겪었던 끊임없는 기근을 보면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물학과 유전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과 긴밀하게 연관되었던 학자였으며, “1915년에서 1917년 사이, 유례없는 러시아혁명이 임박했을 무렵, 바빌로프는 교육수준이 낮은 동지들과 기꺼이 육체노동을 함께하며 자신이 프롤레타이아트와 소작농 계급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소작농 계급의 삶을 편하게 해줄 업적을 이루겠노라는 목표를 세웠다.”(70쪽)
그의 연구는 레닌의 강력한 후원 속에서 진행되었다. 레닌은, “공산주의는 소비에트권력과 전기화”라고 주장한 생산력주의자였다는 세간의 비판이 무색할 정도로, 사회주의 혁명이후 생태문제에 대해 선구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베르나드스키와 퍼스만의 요청에 따라 1920년대 우랄 남부지역에 최초로 자연보호지역을 설정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이 세우고 바빌로프가 이끌던 농업연구 조직은 소련 전역에 155곳의 실험경작지를 운영하고, “세계에서 가장 크며, 규모에서나 중요도에서나 미국의 연구소를 능가한다”(253쪽)라는 평을 들었다.
바빌로프는 식량작물의 다양성을 확보, 연구하고, 이 연구를 통해 소련의 식량확보에 도움이 되는 작물을 개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바빌로프는 평생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물과 작물의 야생근연종을 수집하였으며, 수집한 종자의 수는 1933년 해외원정을 중단하였을 때까지 14만 8000 ~ 17만 5000개나 되었다.



3.
바빌로프의 주요 업적은 “다양성 중심지”라는 이론에 있다.
그의 초창기 연구목표는 “다양한 전통작물을 재배하는 실험경작지에서 병해저항력이 강한 작물을”(55쪽) 찾으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러시아와 동유럽의 기근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과정에서 “더 넓은 세상의 작물다양성에 눈뜨게 되었고, 결국 많은 저술과 원정, 발견”으로 이어졌다.
다양성 중심지라는 개념에 대해 나브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처음에 바빌로프는 이 개념을 재배작물의 기원지라는 관점에서 설명했지만, 그가 선택한 지역을 보면 작물뿐 아니라 야생근연종의 유전자 변이도 활발한 곳이다. 당시 보편적이던 고고학적 믿음과는 반대로 바빌로프는, 농업문명의 요람은 분지나 거대한 강가의 비옥한 범람평야가 아니라 산악지대라고 주장했다. 그는 산악지에에서 가장 높은 다양성을 보이는 작물을 600개까지 꼽았으며 작물다양성이 높은 지역일수록 토착언어와 야생생물다양성도 높다고 지적했다.”(40쪽) “바빌로프가 그린 중심지들이 차지하는 면적은 지표의 5분의 1도 안되지만 야생식물과 재배식물의 다양성이 월등히 높은 곳이다.”(41쪽)
바빌로프는 이러한 다양성 중심지를 단지 인간의 손때가 닿지 않는 자연지역으로 보지 않았다. 바빌로프는 이러한 생물의 다양성이 인간의 생활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인식하고 연구 속에서 이를 언제나 강조하였다. 따라서 나브한은 바빌로프가 “생물다양성과 문화다양성의 관계에도 최초로 주목한 학자”(47쪽)라고 평가한다.
바빌로프는 이러한 다양성 중심지에서 나온 유전자풀이 풍부한 작물들은 인류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식량작물의 다양성 중심지를 찾아, 전세계를 원정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바빌로프의 원정을 저자인 나브한이 좇아가면서, 바빌로프의 업적을 확인하고 바빌로프 당시와 지금의 상황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자는 페르시아의 파미르 고원을 시작으로, 이탈리아와 지중해, 레바논과 시리아, 아프리카 북부와 에티오피아, 카자흐스탄, 북미와 멕시코, 남미 아마존 지역까지 바빌로프가 지나갔던 방대한 장소를 하나하나 따라가면서, 식량작물의 다양성이 왜 중요한지, 이러한 다양성이 수천 년 동안 그 지역에서 적응해간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현재 작물다양성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4.
바빌로프의 “다양성 중심지” 이론이나 그의 연구태도는 단지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바빌로프는 언제나 다양성 중심지에서 작물을 가꾸고, 개선해가는 인간의 활동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 책의 표현대로 바빌로프는 “작물다양성은 사람이 만들어가는 생물다양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적극적인 작용은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자 변증법적 유물론이 강조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하면서, “부단한 감성적 노동과 창조, 이러한 생산이야말로 지금 존재하고 있는 감각적 세계 전체의 기초이므로, 이것이 단 일년만이라도 중단된다면, 포이에르바하는 자연 세계의 엄청난 변화를 발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아울러 전체 인간 세계와 그의 고유한 직관능력, 실로 그 자신의 존재마저도 당장 사라지고 말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빈번하게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파악하여 자연을 인간과는 분리되는 존재로서 보면서, 인간 역시도 자연의 산물이며, 역으로 자연 역시 인간의 적극적인 개입, 즉 인간의 노동을 통해 변화발전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모습을 본다. 생태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의 구분 역시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반면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는 경우에도 인간을 단지 자연에 수동적으로 순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자 자신의 산물이지만, 자연에 대해서 적극적인 개입을 하고 자연을 변형시켜왔는 점이 반드시 인식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적극적인 역할을 자연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기 십상이지만, 오히려 바빌로프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인간이 자연과의 공존 속에서 자연의 다양성을 더욱 확대시키면서 인간의 삶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상호발전의 가능성이 오히려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바빌로프의 마지막 해외원정지였던 아마존 열대우림의 잉가노족의 농업을 소개한다. 나브한에 따르면 아마존의 열대우림은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은 자연림같지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잉가노족의 농업경관은 농경지와 비농경지인 숲 등이 명확히 구분되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양자사이의 구분이 없으며, 따라서 작물과 야생식물, 잡초 등이 숲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의 민속생물학자인 카밀로는 “오랫동안 많은 서양인들은 우림을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이고 특별한 생태시스템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의 영토에서 발견되는 생활방식을 보면, … 수백년간 원주민들의 손길로 관리되었다. … 이렇게 인간과 숲이 상호작용하는 풍경은 인위적 숲 또는 인간화한 숲이라 부를 수 있다.”(240쪽) 이러한 주장은 맑스가 말한 “인간의 자연화”, “자연의 인간화”라는 말을 떠올리게 할 정도이다. 따라서 나브한은 “아마존 지역에서 일하는 국제보존단체 중에 서식지의 다양성을 함께 관리하기 위해 원주민공동체와 직접 연계된 곳은 거의 없다. 오히려 몇몇 단체는 원주민 거주지의 땅을 사들여 보호구역을 만들고는 그 어떤 종류의 농업도 금지해버렸다”(243쪽)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5.
바빌로프의 위대한 원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은 그리 행복한 것이 못되었다. 이 책은 바빌로프가 정치적인 이유로 밀려나고 결국 자신이 처음 교수생활을 시작하였던 사라토프의 한 감옥에서 굶주림으로 1943년 사망하게 되는 과정을 12장에서 상세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규모의 농업 연구를 위해 많은 인력과 재정을 레닌에게서 지원받았”(231쪽)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 중남미의 마지막 원정길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이무렵 스탈린정권이 농업 집산화를 가혹하게 시작한 후, 최악의 기근이 일어나려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바빌로프는 농업정책에서의 실패를 전가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 바빌로프는 당장 수백만의 인민이 굶어죽는 상황에서 한가하게 해외관광을 하는 부르주아 학자로 매도당했고, 당시의 정치이데올로기 속에서 승승장구하는 얼치기 리센코와의 논쟁 속에서 점점 더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40년 체포되어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최고법원 군사위원회에 의해 총살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러나 바빌로프의 과학적, 대중적 명성 때문에 소련의 관료들은 사형을 집행하지는 못한 채, 대외적으로는 바빌로프가 리센코와 함께 러시아의 식량공급을 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선전할 수밖에 없었다.
1939년 러시아 식물육종연구소 모임에서 바빌로프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남긴다.
“우리는 장적더미로 걸어갈 것입니다.
불타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와 관념론에 대항하다 화형을 당한 16세기 유물론자 조르다노 브루노처럼, 바빌로프는 소련 관료체제의 비이성과 비과학에 맞서 과학을 옹호하고 인류의 미래에 공헌하고자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변증법적 유물론자였다.
여전히 그의 연구가 한국에 많이 소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연구업적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나브한의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러한 책이 더욱 소개된다면 맑스주의가 진지한 생태적 관심은 없다는 생태주의자들의 억측 역시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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