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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後 台灣資本主義 各 段階의 民族主義(陳映真)

祖國: 追求, 喪失 및  再發見──戰後 台灣資本主義 各 段階의 民族主義(陳映真)

一、前言

二、殖民地·半封建社會段階(1895~1945)의 民族主義

三、半殖民地·半封建社會段階(1945~1950)의 民族主義

四、新殖民地·半封建社會段階(1950~1963)의 民族主義

五、新殖民地·半資本主義段階(1963~ )的民族主義

六、結語

 

一、前言

‘民族主義’라는 말은 理論과 學理에 있어 複雜한 구획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 小論에서 使用하는 ‘民族主義’라는 말이 지시하는 것은 世界가 帝國主義時代, 즉 各 民族이 각자 壓迫民族과 被壓迫民族으로 나뉘는 時代에 진입한 가운데 형성된 被壓迫 民族의 民族主義다. 壓迫民族의 民族主義는 擴張主義、侵略主義、霸權主義 그리고 民族 쇼비니즘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被壓迫民族의 民族主義는 帝國主義、霸權主義를 反對하고, 擴張主義와 侵略主義를 反對하며, 具體적으로 自己民族의 解放과 國家獨立을 爭取하기 為해 實踐하는 民族·民主運動이다.

小論은 戰後 台灣社會 各 段階의 社會性格,對外關係 그리고 階級結構의 變化에 대해서 이와 같은 民族主義의 消長을 分析하고자 企圖한다.

그런데 台灣 戰後 資本主義 諸段階를 探索하기 前에 반드시 戰後 台灣資本主義歷史의 前史, 즉 日帝殖民地 時代의 台灣社會에 對한 分析에서 著手해야 한다. 現代적 意義의 民族主義의 發軔이 실제로 日帝下殖民地의 社會矛盾과 이 矛盾에 相應하는 社會的、階級的,그리고 民族的 鬥爭에 發端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二、殖民地·半封建社會段階(1895~1945)의 民族主義

甲午 전쟁 패배와 日清간의 馬關條約으로 인해 台灣은  日本에 割讓되어 1895年부터 1945年까지 日本帝國主義의 殖民地로 전락되었다.

慘酷한 軍事 압제를 통해 台灣은 中國으로부터 日本으로 割讓되었고, 台灣總督府를 中心으로 하는 殖民地 統治機關이 建立되었다. 日本帝國主義는 直接 日本에서 軍、警 그리고 官僚를 派遣하여, 台灣에 對해 殖民地統治를 施行하였다. 그리고 日本帝國主義 獨佔資本은 日本現代帝國主義가 國家 상부구조에서 갖는 強大權力과 優越地位에 기대어, 現代資本主義 生產方式을 台灣으로 移殖하고, 台灣經濟剩餘에 對한 殖民地적 收奪을 했다.

그런데 日本帝國主義經濟圈內의 분업 體制 속에서, 台灣은 日本獨佔資本에 의해 工業原料供給基地의 地位로 規定되었다. 그리고 總督府強權의 다방면의 도움 속에서 三井、三菱 등을 中心으로 하는 日本獨佔資本이 台灣에서 全面적으로 확장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民族差別과 政治(法律)차별로 台灣 현지 資本의 發展을 抑壓하였고, 또한 總督府權力이 支持하는 日本帝國主義資本制生產이 台灣에서 支配性地位와 影響力을 얻는 條件 하에서, 繼續적이고 意識적으로 台灣 현지의 前資本主義적이고, 半封建적이며, 地主──佃農體制적인 傳統生產關係를 再編 및 유지/지속했다. 日本獨佔資本과 이와 같은 傳統적이고 前資本主義적이며 勢力이 뿌리 깊은  台灣地主──佃農體制가 서로 함께 溫存하고, 나아가 米와 糖과 같은 日本市場으로의 輸出을 目標로 하는 兩大 商品性 農作物의 ‘단작’(monoculture)經濟를 巧妙하게 利用하고 發展시켰다. 이에 따라 米、糖을 核心으로 하는 단작 경제가 日本帝國主義가 台灣을 支配하는 台灣殖民地經濟의 主軸으로 되었다.

그리고 製糖產業 가운데, 國家權力으로서 總督府의 介入은 日本糖業帝國主義資本이 資金融通을 享有하도록 했고, 警察權力으로 蔗農原料인 蔗 공급 및 市場獨佔 等 特權을 保證하여, 台灣에서 現代化된 大規模의 資本主義製糖工業을 發展시켰으며, 이로써 歷史悠久한 台灣 현지 傳統糖作坊工業을 궤멸시키고, 甚至어 民族 및 政治 차별로서 台灣本地製糖資本의 發展(공장 설립)과 現代化를 제한하여 현지 資本을 抑壓하고, 日本製糖資本이 쉽게 殖民地台灣의 製糖工業을 獨佔할 수 있도록  하였다.

蓬萊米 生產의 行程 中에서 日本當局은 種植栽培、加工(碾米) 및 島內流通過程의 各領域을 台灣地主階級에게 開放하여, 日本商業資本이 日本에 對한 대만 쌀의 輸出貿易過程을 獨佔하고, 資本 축적을 進行하여 결국 台灣의 (現代民法制約을 경유한)傳統地主-佃農制度를 溫存시키고, 台灣大地主、富農 및 地主-佃農體制를 기초로 하여 日本獨佔資本에 종속되어 있는 地主-資產階級을 구슬렸다.

台灣에서 日本獨佔資本과 그 商品의 進一步한  擴張과 流通은 다양한 壓抑條件에도 불구하고 本地資本主義의 왜곡되고 외삽적인 發展을  촉진하였고, 台灣社會가 鴉片戰爭 後의 半殖民地、半封建社會으로부터 殖民地、半封建社會로 移行하도록 하여, 社會階級構成 上의 重大한 轉變을 發生시켰다.

矢內原忠雄의 分析에 따르면, 日帝下 台灣社會의 資產階級은 民族面에 따라 日本人資產階級과 本地、台灣人資產階級으로 나뉘는데, 前者는 다시 帝國主義日本大獨佔資產階級을 代表하여 台灣을 向해  그 資本을 擴張하고, 日本本國에서 生活하며 日本獨佔資本產業을 보유 및 管理하는 ‘不在資本家’와 台灣에서 生活하면서 각자 日本大獨佔資本과 中小日本籍資本을 代表하는 在地資產階級으로 나뉜다. 後者는 다시 둘로 나뉜다. 하나는 日本當局에 의해 使用되고, 日帝特權에 의존하여 그 資本을 축적하며, 또 半封建地主身份을 兼하는 親日資產階級(辜顯榮과 林熊徵 일가) 및 (예를 들어 日籍產業에 投資하는 形式으로)日本資本에 의존하여, 台灣勤勞階級으로 부터 日本資本이 취하는 剩餘를 나누어 갖고 地主를 兼하는 資本階級이다. 다른 하나는 日本獨佔資本의 壓抑을 直接 받는 경우다(예를 들어 台灣籍 現代製糖資本、日本資本과 關係가 비교적 먼 放利性資本 및 農民階級과 마찬가지로 日本製糖資本에게 原料蔗를 공급하는 地位에서 農民階級과 利益이 重疊되는 中小地主 等等). 日籍資產階級 全部와 台籍資產階級의 최상위 系統은 利害가 比較적 一致하고, 台灣資產階級의 하위 계통과는 利害上 서로 對立된다.

台灣에서 米、糖 단작의 帝國主義經濟의 擴大와 發展은 傳統적 農民 가운데 顯著한 階級分化를 초래했다. 矢內原의 傑出한 研究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먼저 某種의 現代적 契約形式으로 各 現代製糖會社에 組織된 台灣農民은 農業勞動者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製糖會社가 所有하는 蔗作農場의 佃農으로 直接 充當되는 農民은 經濟적 本質에서 現代資本主義 '會社'의 (農業)임금勞動者에 더욱 근접한다.  더욱이 製糖 ‘會社’(公司)에 對한 長期債務의 束縛은 ‘會社’에 대한 종속화를 강화한다. 결국 ‘會社’ 資本의 長期적인 고용노동자가 되어 農業無產階級으로 전락한다. 少數日本人에 의한 在台 拓殖 農場에 隸屬된 台灣佃農은 資本主義적 關係 下에서 더욱 現代農業勞動者적 性質을 갖는다.

台灣의 大地主階級은 基本적으로 鞏固한 地主-佃農體制와 궤를 같이 하며, 日本帝國主義에 의해 溫存된다. 日本帝國主義는 現代資本主義 大農場機械生產으로 傳統적 台灣地主-佃農制를 파괴하고 대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의도적으로 半封建적 地主-佃農制를 ‘再編 및 持續’하였고, 나아가 이를 통해 台灣의 米、糖 단작을 基軸으로 하는 日本帝國主義의 殖民經濟結構를 支撐했다. 이 때문에 台灣地主階級, 특히 日本權力과 資本에 종속된 大地主階級과 日本帝國主義는 比較적으로 接近한 利益을 갖는다. 그러나 中小地主는 한편으로 日本權力의 鞏固화된 地主制 下에서 日本帝國主義의 日本帝國主義의 農民을 收奪하고, 다른 한편으로 製糖會社의 原料蔗 供應者의 立場에서 日本製糖獨佔資本과 一定한 矛盾을 가지며, 利益 上에서 다시 貧困이 廣泛한 佃農과 一致하는 측면을 가지는 것은 앞서 서술한 바이다.

中小地主의 經濟地位가 中小企業主, ‘自由職業’자(주로 의사와 같이), 小職員, 教師 等과 같이 力量이 微弱한 小資產階級으로 전환되는 것은,그들이 日本中小企業、自由業者等에 의해 壓抑 및 차별 받는 地位에 처하여, 결국 日本帝國主義와 一定한 矛盾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殖民地·半封建社會에서 社會階級의 矛盾과 民族間의 矛盾은 一定한 關聯性을 갖는다.

日本帝國主義國家權力, 즉 台灣에서 그것의 表現으로서 總督府、日本獨佔資本系統을 등에 업은 日本人 資本家、官吏、警憲 및 企業管理人이 殖民地台灣의 政治、經濟上의 統治者階級이 된다. 그리고 廣泛한 農業、工業領域 속의 直接生產者는 거개가 台灣人으로 되고, 政治經濟上 대만인이 상호 對立하고 競爭한다. 이 때문에 大體적으로 말해서, 殖民地 台灣에서 日本人과 台灣人의 民族적 對立은 同時에 社會經濟上 收奪者와 被收奪者의 對立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政治에서 表現되어, 殖民者가 被殖民者를 탄압하는 것이 된다. 즉, 殖民地 人民의 帝國主義와 封建主義에 대한 反抗, 廣闊한 스펙트럼을 갖는 民族解放에의 追求, 祖國으로 復歸하려는 民族民主革命, 그리고 日帝權力의 反革命과의 鬥爭이 그러하다.

1858年의 鴉片戰爭은 中國을 帝國主義의 刀俎 下의 魚肉이 되게 했다. 지리적으로 中國南疆의 要衝에 위치해 있고, 동시에 강제로 開港한 台灣은 더욱 集中적으로 帝國主義의 蠻橫적인 侵辱을 받았다. 그리고 台灣 紳民 중에서 祖國의 其他 內地 보다 더욱 높은 反帝意識이 發展했다. 理論적으로 이와 같은 反帝 抗倭 意識은 ‘資本主義前夜’의 台灣에서 濃厚한 封建主義、宗教迷信 그리고 種族意識이 民族意識 보다 높은 特性을 가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또한 日本帝國主義의 直接적인 威暴 下에서 素樸한 現代적 反帝民族主義 性質을 갖기도 한다.

이와 같은 素樸한 反帝民族抵抗運動은 前朝의 文武官僚、地主 및 仕紳階級이 中心이 된 ‘台灣民主國運動’과 貧困 農民의 保鄉抗倭 民族抵抗運動에서 表現된다. 官僚仕紳階級의 ‘獨立’ 運動은 其實 日本帝國主義가 台灣을 割併하는 것에 反抗한 것으로, 獨立의 이름으로 ‘供奉正朔,遙作(中國)屏藩’한 것이며, 실제로 中國과 ‘氣脈相通’하여, 台灣이 ‘無異中土’할 것을 욕망했다. 그리고 農民의 抗日蜂起의 目的은 다수가 ‘桑梓[고향]를 恢復’하고, ‘오랑캐를 誅滅’하여, 별도로 ‘台灣을 여는’ 데 있었고, 뜻은 ‘清國을 도와’, 日帝의 ‘任意肆虐’, ‘唯嗜殺戮’ 및 ‘苦害生靈,刻剝膏脂, 貪婪無厭’에 反抗하여, ‘中國:明聖之君’을 擁立하는 것이었다.  民國 成立 이후에 台灣農民의 民族적 抵抗은 ‘日本人을 台灣에서 逐出하여, 본래대로 中國으로 돌아가자’, ‘日本人을 全部 逐出하여, 台灣을 中國民族의 領有로 復歸시키자' 라고 公言하였다.

1895年부터 1920年까지, 貧困農民의 階級蜂起는 대부분 民族抵抗의 性質을 띠었고, 直接적으로 日本帝國主義 暴力의 鋒鏑을 向했다. 그리고 ‘土匪’라는 이름으로 日人에 의해 屠殺된 자가 1만 2천여 명에 達했다. 그에 이어 1915年까지, 즉, 日本國家權力이 台灣 주변부 資本主義構造體의 形成過程을 경유하여 確立된 時期에, 台灣農民은 日本獨佔資本의 擴張과 壓迫으로 인해 蜂起했다. 著名한 林圯埔事件(1912)은 竹林에 對한 三菱 資本의 佔有 및  배부에 기인한 事件이며, 北埔事件(1902)은 日本이 保甲民의 ‘討番’ 參與를 強行함에서 기인한 것이었던 것 等等이 있다. 그리고 이 期間 中國(北伐)革命의 進展은 또한 台灣에서 抗日復國의 漣漪를 일으켰고, 수많은 農民이 蜂起하여, ‘中國 援兵이 반드시 도착할 것’이며, 蜂起事件은 ‘中國의 冊封’과 ‘承認’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1915年 以後, 多少간 封建性、地方性, 甚至어 宗教迷信 等 ‘前現代性’을 띠고 있는 上述한 民族抵抗은 台灣 주변부 資本主義 社會結構의 進一步한 發展에 따라, 점차 帝國主義下 現代적 民族反抗運動으로 전환되었다.

1921年, 林獻堂이 中心이 되고, 上述한 日本獨佔資本과 關係가 소원하고, 一定한 利益衝突을 갖는 地主仕紳 階級을 基礎로 하는 ‘台灣議會設置運動’은 請願方式을 熱烈히 展開하여, 仕紳階級의 部份적인 台政과 台灣이 一定限度內의 自治權을 가질 것을 要求하였으나, 日本當局의 탄압을 받았다.

同年 10月, 林獻堂、蔡培火 및 蔣渭水 等이 ‘台灣文化協會’를 조직하고, 當時 台灣 各派 抗日民族運動과 社會運動 勢力을 모아,매우 活力을 갖는 反帝民族統一陣線을 形成하였다.

그러나 民族運動 內部에 潛藏되어 있는 階級矛盾은 理論 및 戰略 上 比較적 幼稚한 時期에 머물러 있었고, 불가피하게 이와 같은 統一陣線의 破裂을 가져왔다. 階級運動은 ‘궁극적으로 民族資產階級의 地主所有制를 打破할 것’을  目標로 삼아, 결국에 台灣 ‘民族運動과 階級運動이 相剋’되는 性質을 노출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는 左右分裂을 초래했다. 1927年에 連溫卿、鄭明、王敏川이 中心이 된 左派는 地主仕紳階級의 代表인 林獻堂、蔡培火、蔣渭水、陳逢源 및 蔡式穀 등의 領導權을 解除했다. 後者는 協會를 이탈하여 ‘台灣民眾黨’을 별도로 조직했다.

그리고 地主出身의 中產階級自由業(개업 醫師)者인 蔣渭水는 殖民地歷史發展에 따라 점차 左傾화되면서, 民眾黨 內에서 右翼의 蔡培火와 矛盾을 일으켜 分裂했다. 蔡培火는 民眾黨을 떠나 右翼 地主仕紳階級인 林獻堂、楊肇嘉와 순수하게 地主仕紳階級利益을 保護하고, 民族反日抵抗色彩가 옅어진 ‘台灣地方自治聯盟’을 따로 조직했다. 民眾黨은 蔣渭水의 領導下에 繼續 左傾화되었고, 廣泛하게 台灣工人運動에 개입하여, 大陸中國의 國民黨左派와 政治上의 聯繫를 형성했다.

第三인터내셔널, 日本共產黨과 勞農黨 및 中國共產黨의 交錯적인 影響下에서, 1928年 ‘日本共產黨台灣民族支部’ 通稱 ‘台共’이 건립되어, 積極적으로 文化協會에 介入하여 活動을 展開했다. 이에 文化協會는 다시 連溫卿一派에 對한 王敏川一派의 鬥爭이 출현했고, 前者는 除名되어 ‘文協’을 떠나게 되었다. 台共 內部에 이때 宗派主義 鬥爭이 發生하기도 했다. 1931年이 되어, 日本當局이 反帝民族運動을 全面鎮壓하는 局面에서 台灣反帝民族運動는 全面적으로 궤멸했다.

앞서 이미 殖民地台灣經濟의 基軸인 米、糖을 中心으로 하는 ‘단작’ 經濟에 대해 중점을 두어 提起한 바 있다. 故로 殖民地台灣의 產業은 農業을 主로 한다. 糖、米、茶葉 및 樟腦 等의 主要工業은 또한 그와 連結된 農業栽培 및 生產過程이 重要하여, 農業部門下의 農業勞動者가 殖民地獨佔資本이 直接 壓迫하고 착취하는 對象이 되도록 했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糖業帝國主義下에서 現代農業의 임금 勞動으로 전락한 台灣農民은 甘蔗 수매 方式과 價格에 관한 爭議, 土地徵收 및 日本退職官吏에의 土地 배분에 관한 關鍵적인 鬥爭 中에, 1925年, 二林事件으로 인해 鬥爭은 첫번째 農民工會(’農民組合’)설립을 선언하였다. 같은 해, 鳳山新興製糖廠의 土地徵購爭議 事件으로 ‘大甲農民組合’이 조직되었다. 26年에는 全島적인 農業勞動者의 工會 ‘台灣農民組合’이 건립되었고, 또한 迅速하게 全島에서 연이어 各地方 分會가 건립되었다. 1927年이 되면, 이러한 農民無產者의 戰鬥組織은 이미 2만여 農民을 끌어모으고 있었고, 殖民地台灣에서 가장 活力있고, 旗幟鮮明한 反帝民族運動組織이 되었다. 農民을 基礎로 하여, 台共을 中心으로 하는 領導下에서 抗日 中小地主、中產階級 및 知識份子를 團結시켜 하나의 抗日民族統一戰線을 形成하였고, 1931年 大鎮壓 이전까지 수많은 휘황찬란한 抗日民族運動史跡을 남겼다.

총체적으로 볼 때, 日帝下의 台灣, 즉 殖民地·半封建社會의 苛酷한 民族 및 階級 矛盾은 이 時期 民族主義의 基礎가 되었다. 中國에서 할양된 殖民地台灣은 朝鮮과 같은 其它殖民地와 달랐는데, 朝鮮의 殖民地化가 全朝鮮의 淪亡과 殖民地化인데 반대, 台灣의 殖民地化는 台灣이 中國으로 부터 日本에 割讓되어 殖民地化된 것이다. 그리고 朝鮮의 反日帝民族解放運動이 全韓民族의 民族解放運動인데 반해, 台灣의 抗日民族解放運動은 自然히 強烈한 復歸中國、振興中國의 ‘中國指向性’을 띠고 있었고, 漢民族을 자기 정체성으로 하여 日本帝國主義를 打倒하고, 日本帝國主義의 轄制와 壓迫으로부터 解放되어  獨立적인 精神과 思想內涵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日本의 在台權力 當局인 總督府의 最高 警憲機關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고, 當年의 抗日志士의 대규모 文獻이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때 台灣抗日民族運動陣營內部에는 殖民地·半封建社會內의 被壓迫人民의 서로 다른 階級立場과 利益을 代表하여 右翼으로부터 左翼까지 편재했으며, 地主仕紳으로부터 農工階級까지 서로 다른 目標와 戰略으로 인해 抗日運動의 統一陣線時期(1921~1927) 와 分裂重組時代(1927~1931)를 形成했다.

 

三、半殖民地·半封建社會段階(1945~1950) 民族主義

1945年, 日本이 第二次世界大戰에서 敗戰하면서, 日本帝國主義의 台灣殖民支配는 全面적으로 瓦解되었고, 台灣은 포츠담 宣言과 카이로 宣言으로 中國에 復歸했다.

社會성격에서 볼 때, 台灣社會는 政治와 經濟에서 台灣이 다시 中國으로 회귀하여 根本적인 재구성이 진행되었다. 日帝下의 台灣殖民地·半封建社會는 이로부터 當時 中國의 半殖民地·半封建 社會로 흡수되었다.

光復後 얼마 되지 않아, 當時 中國半殖民地·半封建社會의 統治階級, 즉 中國官僚資產階級、大買辦資產階級、大地主階級 및 大資產階級을 代表하는 國家權力인 陳儀 接收集團은 ‘台灣行政長官公署’로서 台灣總督府를 대체하였고, 이를 光復後 台灣의 統治機關로 삼았다.

곧이어 陳儀 當局은 台灣의 日產·敵產에 對한 國家沒收를 進行했고, 總督府 관할下 基幹產業을 國民黨 官營企業으로 全面 재편하여, 台灣銀行을 정점으로 하면서, 台灣의 金融、保險、電子、알루미늄、肥料、造船、機械、시멘트、제지、農林 및 工礦을 ‘國營’, ‘省營’ 및 ‘國·省合營’의 방식으로 國府로 귀속시키는 經營체제를 形成하였다. 따라서 日帝 台灣殖民地體制下의 日本獨佔資本은 一舉에 國府統治下 官業獨佔資本, 즉 國家資本의 獨佔 체계로 편입되었고, 一切의 台灣基幹產業、主要金融機關、商貿機關、運輸產業 및 通信產業을 포괄하여 高度의 統制力을 갖는 經濟 체계를 形成하였다.

그리고 國民黨統治集團의 再編을 거친 台灣 官業 獨佔資本은 1945年부터 土地改革이 완성되기 전인 1950年(즉, 傳統地主-佃農體制가 完全이 解體되기 이전)이전까지, 성격상 20年代 後半 이래로의 四大家族을 核心으로 하여, 大陸社會의 基礎위에서 生成 및 成長해온 中國官僚資本의 구성 部份이었다. 이러한 官僚資本은 國家權力에 기대어, 對外借款、財稅徵收와 投機 및 通貨膨脹의 手段으로 초과 축적을 통해 肥大해졌고, 半殖民地·半封建中國社會의 壓迫機制가 되었다.

陳儀 集團의 再編을 거친 台灣官業獨佔資本은 財政金融權力으로 社會資本을 官僚資本으로 轉化하고, 그 축적, 집적, 집중을 助長하였으며, 關稅 등 國家權力의 干涉으로 官僚資本의 獨佔性을 保障하고, 價格、市場의 獨佔과 政策적 價格보조로 초과 축적을 保證하기도 했다. 1950년 이후 美帝의 經濟援助는 基本적으로 官僚資本主義를 鞏固화 했다.

光復後의 台灣은 日本獨佔資本을 全面적으로 國民黨官業獨佔資本으로 改編하는 過程 中에 物質적으로 當時 中國半殖民地·半封建社會構造體 속으로 組織되기도 했다. 1945~50年間에 農業上의 급속한 復興이 있었지만, 陳誠 當局이 官業獨佔體制를 國共內戰의 財政에 服務시키고, 紙幣를 濫發하였으며, 大陸과 台灣 間의 掠奪적 貿易을 強行하여, 미친듯이 台灣經濟의 剩餘를 수탈하여 內戰의 財政으로 소모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하여 新民主主義革命이 迅速히 擴大되는 條件 下에서 구래의 半殖民地·半封建 中國社會가 갖는 末期적인 崩潰、腐朽 및 混亂 또한 台灣으로 전파됨에 따라, 深刻한 社會 및 政治적 矛盾을 초래하였고, 1947年 2月蜂起의 原因이 되었다.

階級關係에 있어, 陳儀 集團은 當時 中國官僚資產階級、地主階級、買辦階級 및 大資產階級을 代表하여 台灣의 統治集團이 되었다. 日帝時代로부터 延續되어온 台灣本地 地主仕紳階級은 이 時期에 이와 같은 統治集團과 良好한 關係를 가졌다. 일제시대에 經濟적으로 民族적 차별을 심하게 받은 台灣本地資產階級과 中小企業民族資本家는 陳儀 集團이 全面적으로 敵產基幹產業을 沒收함에 따라, 光復後 그들이 興業發達하는 美夢은 거품이 되었고, 國府에 대해 一定하게 대립되는 情緒를 가지게 되었다. 市民、知識人은 陳儀集團이 國共內戰을 支援하기 위해 竭澤而漁하고, 腐敗貪污하며, 人民에 對해 전횡을 일삼는 政治와 財政崩潰後 生活의 貧困化에 대해 크게 不滿을 가졌다. 廣大한 工農民眾 또한 不斷한 貧窮化로 인해 不平했다.

1946年 元月, 美軍駐華人員이 北大女學生 沈崇을 強姦한 事件이 全中國의 反美·反蔣·愛國·民主運動을 일으키고, 全國으로 퍼졌으며, 台灣까지 이르렀다. 台北에는 萬名의 各級學校 愛國學生이 集結하여 美軍의 暴行을 聲討했고, 台北에서 ‘美帝國主義는 꺼져라!’, ‘中華의 아들 딸 모욕받을 순 없다’, ‘內戰을 중단하라’ 및 政治民主化 口號를 외쳤다. 이는 日本이 패퇴하고, 台灣이 光復된 후, 全中國에서 反帝·反封建·民族和平 및 政治民主化를 要求한 變革運動의 時代적 背景 下에서 台灣의 民族主義가 새로운 發展을 보인 것이다.

1947年 2月 28日, 台北市民의 蜂起가 中心이 되어 全島로 漫延하여 퍼진 二月事件은 高度의 地方自治를 要求했고, 全面적인 民主改革을 要求했으며, 內戰의 중단을 要求했고, 經濟의 振興과 公平한 分配를 要求하기도 했다. 當時의 全國적 局面에서 볼 때, 台灣의 二月事件은 當時 國內의 無數한 人民이 청렴한 政治를 要求하고, 地方의 民主自治를 要求하고 內戰에 反對한 反蔣, 反內戰, 反民生파탄의 群眾蜂起 事件 가운데 하나이며, 當時 歷史條件下의 愛國主義運動의 一環이었다.

1947年11月, 台灣 新生報 副刊 <橋>를 論壇으로 하여 近一年에 거친 台灣文字性質 및 方向에 대한 重要한 論戰이 展開됐다. 論戰중에 日帝下에서 發展한 台灣新文學이 科學、民主의 精神을 높이 들고,反帝、反封建을 思想內容으로 삼아 中國革命과 一致하는 바가 있었으며, “中國新文學戰鬥의 分支”라는 主張이 있었고, 作家 楊逵는 台灣新文學主流에서 “民族觀點에서 이탈한 바가 없었다”고 보았다. 駱駝英은 半殖民地·半封建中國社會와 日帝下 殖民地·半封建 台灣社會가 갖는 異同의 矛盾的 統一로부터 進一步하게 反帝·反封建·民主 및 科學 等 思想內容에서 兩地文學이 갖는 理論基礎를 確立하여, 이로부터 當時 台灣文學을 包含하는 中國文學의 總方向이 마땅히 ‘新現實主義’, 즉 “辯證唯物論과 歷史唯物論에 立腳하여, 歷史發展의 方向과 一致하는 階級立場에 서는” 藝術思想이자 表現方法으로 統一되어야 한다고 論證했다.

1947年2月事件 以後, 中共地下黨은 中共 ‘台灣省工作委員會’의 指導 下에 비교적 급속하고 廣泛한 發展을 보였다. 新民主主義적 變革運動은 反帝、反封建、反官僚資本主義라는 큰 깃발을 높이 들었고, 二月事變 大鎮壓을 경험한 後 고뇌하고 覺醒한 台灣青年、知識份子 및 工農 民眾을 흡수하여,當時 全中國 新民主主義革命의 總路線에 합류하게 되었다.

1949年 中共地下 ‘學生工作委員會’를 核心으로 하여 展開된 學生들의 ‘內戰에 반대하고, 民主改革과 經濟改革을 要求’한 學生愛國運動이 不斷히 고양되었다. 同年 6月4日, 陳誠 當局은 직접 愛國學生을 逮捕했고, 이는 著名한 ‘六四學運’ 事件이 된다. 同年 元月, 台灣의 著名한 作家 楊逵는 其他 本省 및 外省籍의 文化·文藝工作者들과 함께 『和平宣言』을 發表하여, 帝國主義가 고안한 ‘台灣신탁통치’와 ‘台灣獨立運動’을 결연히 反對한다는 主張을 하고, 徹底한 政治民主化改革,內戰 反對, 產業 振興, 台灣 建設을 要求하다가 종국에는 逮捕되어 투옥되었다.

1948年,台北、台中 等地에서, 二月蜂起를 領導한 바 있는 前 台共人員 및 中共地下黨 人士들은 二月事件後의 大鎮壓 속에서 홍콩으로 潛退하여 ‘台灣民主自治同盟’을 組織했다. 1948年에서 49年間에 이 同盟은 여러 차례 聲明을 發表하여, 台灣을 霸佔하고 台灣에 대한 聯合國 신탁통치 및 台灣獨立을 하려는 美帝國主義陰謀의 행위를 폭로하고 批判하며, ‘反蔣을 해야할 뿐만 아니라, 美帝國主義에 反對해야 한다’고 人民에게 호소했다. 當時 ‘台盟’ 主席이자, 台灣의 著名한 革命家인 謝雪紅은 문장을 써서 中國內政에 干涉하여 中國을 分裂시키려는 美帝國主義의 陰謀를 심도 있게 폭로했다.

以上 열거한 바와 같이, 1945年부터 50年까지 台灣의 重要 社會運動 및 政治運動은 當時 台灣半殖民地·半封建社會條件下,台灣의 愛國主義와 民族主義의 發展을 具體적으로 表現한다.

 

四、新殖民地·半封建社會段階(1950-1963) 民族主義

이 時期 中에 台灣에서 重大한 政治經濟上의 變化가 發生했다. 먼저 經濟方面을 보자.

台灣農地改革은 1952年에 완료되었다. 台灣에서 數百年의 歷史를 갖는 地主、佃農制가 解體되고, 大量의 小資產階級적 獨立自耕農으로 構成된 農村社會가 創造되었다. 台灣社會의 半封建성격은 이로 인해 크게 저하되었다. 廣泛한 ‘해방된 농민’은 연이은 ‘肥料換穀’과 ‘分糖’制 等 工農業間 不等價交換과 國家의 強權的 收奪을 당했지만, 여전히 國民政府를 支持하는 農村力量이 되었고, 農業生產은 1939年의 高記錄을 迅速하게 恢復했다.

韓戰 이후, 第七艦隊가 海峽을 봉쇄했다. 中國은 海峽을 사이에 두고 對峙하며 分裂되었고, 同時에 美國의 군사 및 경제 援助下에서 第一次 四年經濟發展計劃을 展開했다. 美國이 台灣의 經濟、財政、軍事各部門에 깊이 개입한 ‘援助經濟’下에서 台灣은 中國民族經濟圈과 完全斷絕된 條件下의 國民經濟單位를 形成하기 시작했고, 進一步하게 民族分裂의 物質적 構造를 強化했다.

冷戰戰略에 服務하며 대만에서 強力하게 私人資本主義發展을 촉진시킨 美國의 政策下에서,1950年 이후 台灣工業은 巨大한 官僚資本主義公業部門과 私人集團資本 및 中小企業이라는 이중 構造가 展開되었다. 그리고 ‘수입替代產業’의 發展이라는 전략下에서, 紡織、제지、시멘트、食品 產業을 中心으로 하는 台灣外省籍·本省籍 民間企業資本은 크게 發展하였고, 지금까지도 官僚資本公業體系와 함께 島內市場을 獨佔하고 있는 民間家族集團資本을 形成하였다. 이에 대해 國民黨官僚資本에 性格上의 轉變이 發生했다. 이 자본은 존속과 發展을 위해서 더이상 過去처럼 民間資本에 대한 壓抑 일변도의 수탈을 통해 비대해지지 않았다. ‘相對적인 自主性’이라는 權威주의적 條件을 繼續 維持하고, 美國의 壓力 下에서, 그것은 民間資本의 發展에 대해  收奪과 壓服이 아닌 扶持와 부축의 역할을 했다. 台灣의 前地主 仕紳階級은 產業資本階級으로 轉化하여 興業發家의 宿願을 보상받았고, 이로 인해 40年間 國民黨을 支持하는 階級으로 되었다.

이 밖에 1950年부터 1965年까지, 美國은 每年 대만에 約 1億 달러의 경제원조를 쏟아부었고, 이를 통해 台灣의 政、軍、經、財 各領域에 대한 심원한 影響力을 얻어 1953年부터 65년 사이에 미국자본은 台灣에 대해 독점적 패권을 행사했다. 미국의 원조 資金이 台灣의 戰後資本主義公業 및  私業部門에 깊히 介入하는 가운데, 公營企業과 私人 재벌 企業에 複雜한 買辦性을 가져왔고, 原料、資本、技術、市場 및 投資經營 方向에 있어서 미국에 대한 심각한 종속을 초래했다.

이 時期에 台灣輸出品은 여전히 米、糖을 大宗으로 하고, 輸出증가율은 年平均 24.6%에 達했다. 輸入品은 미국의 원조물자를 基軸으로 했다. 쌀의 輸出은 한편에선  國家權力으로 낮은 수준의 米價를 강제했고, 制度적인 徵收는 肥料로 米穀에 대해 不等價交換을 하고, 나아가 農村에 대한 各種 세금을 부과하여, 農地改革後의 農業에 대해 高額의 剩餘를 약탈했다. 미국원조糧食의 대규모 수입은 또한 過剩의 쌀을 수출로 전환하여 외화를 취득하고, 이를 工業資本의 發展에 보탰으며, 이로써 反共軍事財政을 支撐했다. 이 점에서 農村에 對한 國民黨國家의 地主적 掠奪과 과중한 軍事적인 財政은 그것의 一定한 半封建性格을 規定했다.

台灣戰後資本主義가 美國과 國府 當局이 同時에 政策적으로 台灣公營企業과 民間私人財團企業에 協助하여 發展했음은 前述한 바와 같다. 美國의 이러한 援助는 뚜렷한 政治적 意義를 가지고 있다. 公營企業에 대한 支持는 台灣을 撤守한지 얼마되지 않아 여전히 불안 심리가 팽배했던 國民黨의 社會基礎를 안정시키기 為한 것이었다. 民間企業에 대한 支持는 親美、私人資本主義企業의 台灣이어야 內在적으로 發展하는 強固한 反共動力이 共產主義의 擴張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美國이 깊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觀點에서 보면, 美國은 國民黨이 美第七艦隊의 海峽 간섭이라는 條件下에서 國府가 참혹한 反共 숙청(red purge)을 하여,4~5천명을 학살 및 총살하고, 1萬여 명을 拷問 및 監禁하여, 無產階級革命勢力과 이데올로기를 徹底히 消滅시키는 것을 묵인했고, 政治經濟學의 角度서 보면, 其實 台灣 戰後資本主義의 反共戰略적 發展을 위해 길을 닦았던 殘酷한 工事였던 것이다.

美國이 한국전쟁 이후 힘써 國民黨이라는 ‘억압적 國家’(repressive state)를 鞏固히 하고 確立하는 過程 또한 이와 같고 볼 수 있다. 미국(외국) 자본에 有利한 대만 ‘投資 분위기(investment climate)’를 조성하기 為해서 였다. 즉 노동자 階級의 組織적 爭議力量의 有無, 民主의 程度, 思想 검열, 特務 테러, 불법적 逮捕와 拷問의 有無, 法律上 外資에 對한 各種 혜택 및 特惠의 有無 等等과 같은 조건을 말한다. 이와 같은 指標가 부정적이고 안정적일수록, 즉 노동 階級의 組織力量이 취약하고, 民主가 유린되고, 人權이 파괴되고, 불법적 拷問、逮捕、處決이 普遍적일수록, 外資利潤은 더욱 自由롭게 本國으로 흘러가고, 外資에 대한 特惠法律이 많을수록, 즉 ‘投資 분위기(investment climate)’에 대한 평가가 좋을 수록, 美國은 ‘自由世界’ 範圍의 미발달 國家에서 大量의 ‘第三世界 파시스트 國家(The third world Fascist states)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高度의 台灣 反共·國家安全主義·對美종속국(The Anti-Communist-National Security U.S.client state)의 형성은 其實 이와 같이 高度의 ‘相對적 自主性’을 가진 國民黨國家가 高度의 파시스트적 독재로서 台灣戰後資本主義가 高度의 초과적이고 經濟외적인 축적과 擴大再生產 및 집적을 하도록 促進하기 為한 것이다.

政治적 숙청이 초래한 장기적이고 強烈한 恐怖와 國民黨이라는 ‘억압적 國家’가 形成되는 過程中에, 日帝時代 以來로 힘들게 發展시켜온 台灣의 愛國主義 및 民族主義의 전통──사람, 조직, 사상이데올로기, 사회과학 및 철학적 급진 전통은 절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內戰과 國際冷戰의 중첩 構造는 台灣에서 長期적으로 嚴酷한 思想 검열을 形成하여, 學術、思想 및 創作의 自由를 심각히 破壞했을 뿐만 아니라, 極端적으로 右翼적이고 反共적인 冷戰思想를 大量으로 製造했다. 그것이 오래 지속되면서, 이와 같은 極端적인 反共主義는 反民族 및 反華의 主義로 발전하였고, 이후 ‘獨台’와 ‘台獨’ 等 反民族의 逆流적인 思想根柢가 되었다.

다음으로 政治적 肅清 過程中에 일제 시대 親日派 매국노 地主 및 仕紳階級이 政治에서 昔日의 政敵──台灣左翼의 民族民主運動家──을 檢舉함을 통해 매국노의 죄값을 치르는 것을 면하게 해주었고, 進一步하게 그 生涯의 훗날 國府權力下의 榮華한 富貴와 맞바꾸기도 했다. 이와 같은 鮮明한 충신과 간신의 顛倒는 戰後 台灣의 民族主義에 있어 또다른 重大한 打擊이었다.

1950年 以後, 台灣은 美國의 遠東 反共戰略의 基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50~65年 期間 동안, 美國은 대만에 ‘協防司令部’를 설치했고, 台灣에 武裝한 군대를 주둔시켰다. 대만의 美國 공관、情報機關 및 軍經援助機關은 台灣에서 治外法權을 享有했고, 國府를 凌駕하는 權威를 가졌다. 台灣은 政治、國際外交、軍事、情報、財政上 完全히 美國에 종속되었다. 國民黨은 孫中山의 民族主義 原則을 포기했고, 一人一黨의 私를 위해, 美帝國主義의 ‘종속국’으로 전락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1950  年 以後, 國府의 對美 경사와 아첨은 따로 論할 필요가 없다. 즉, 崗村寧次、岸信介、藤尾正行과 같은 日本 前 戰犯軍人과 官僚에 대해 國賓으로 대우하며 영합하고, 一切의 反美 및 反日 言論을 억압한 것은 間接적으로 台灣의 民族主義를 억압한 것이다.

1950年 以後, 美國의 影響力이 台灣 各 領域에 深入하였다. 台灣高等教育、文化、이데올로기 分野에서 美國은 留學政策、基金會、人員交流交換、獎學金 및 美國 고등교육 教科書의 廣泛한 直接使用 등 40年 동안의 美國化를 통해 改造된 대규모의 買辦적 엘리트 지식인을 키워냈고, 그들이 점차 위로는 總統府에서 民間商貿機關의 領導 工作을 佔領했고, 朝野 兩黨、廣泛한 政、軍、經、財、商、學、大眾傳播、科技 等 領域에서 이와 같은 ‘미국제’ 博士와 碩士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美國中心의 文化、思想、이데올로기 및 知識、學說은 이들을 경유하여 台灣에서 不斷히 再生產되어, 台灣의 反民族(anti-national)、非民族(de-national)、親美 및 分離主義적인 思想의 根源을 形成했다.

총체적으로 보면, 國際冷戰體制의 논리 下에서, 美國은 經濟와 軍事武裝으로 1950이후 展開된 反共 肅清을 묵인하고 支持했으며, 巨大하고 持久적인 政治恐怖를 조성하였고, 이러한 恐怖 분위기 속에서 美國은 具體적인 金錢、物資、武器、政治 및 外交로 國民黨이라는 ‘억압적’이고 ‘준-파시스트’적인 (sub-fascist)國家의 成立과 強化를 支持했다. 이와 같은 殘暴한 過程은 經濟적으로 重要한 意義를 갖는다. 即 恐怖와 獨裁는 의도적으로 非民族、反民族적 條件을 製造하여, 外國資本과 本地資金의 恣意이고 高額의 축적과 집적에 도움을 줬다. 그리고 다른 한편 美國과 國民黨은 또한 同時에 일종의 ‘安慰 裝置’(placebo apparatus)를 設計했다. 廣泛한 台灣의 佃農과 貧農은 農地改革 中에 土地를 분배 받아 小資產階級의 獨立自耕農으로 전환되었는데, 일제시대 長期적으로 興業立業을 渴望한 地主 仕紳 資產階級은 美國의 政策적 援助와 國民黨 權力의 도움으로 수입替代產業 發展 政策下에서 급속히 거액을 축적했고, 中小企業도 發展하기 시작했으며, 部份적인 前 大地主階級 또한 ‘四大公司’의 開放을 통해 자연스럽게 產業資本家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이 時期 經濟의 相對적이고 총체적인 發展은 상대적이고 총체적으로 生活을 改善했다. 이와 같은 ‘安慰裝置’는 아주 크게 政治 恐怖와 政治獨裁가 초래한 고통에 대해  鎮靜 및 鎮痛 作用을 했다.

그런데 戰後 台灣의 民族主義 또한 이와 같은 機制 下에서 전에 없던 재난을 경험했다. 일제 以來 台灣의 영광스러운 民族民主運動과 愛國主義 進步傳統의 人脈、組織、思想、學術、文學藝術 等 巨大傳統이 순식간에 훼멸되었다.

 

五、新殖民地、半資本主義 段階(1963~)의 民族主義

이 時期 台灣社會의 新殖民地性은 앞 時期에 美國의 台灣에 對한 政治、軍事、經濟、文化 各方面에서의 深刻한 支配의 延續을 낳았던 것 외에 더욱 具體적으로 다음처럼 表現된다. (一)1965年 이후, 美國에 대해 심각한 종속을 통해 發展한 台灣이 이미 形成됨에 따라, 美國은 대만에 對한 援助를 중단하였고, 15年간 台灣을 經營한 特殊한 地位로 金融資本 및 投資의 方式으로 國府가 제공한 최대의 특혜 條件 下에서 대만에서 加工輸出을 하고 台灣의 超低임금을 利用하여, 大量의 經濟剩餘를 收取했다. (二)美國資金은 過去15年間 台灣公業資本、재벌資本과의 複雜하고 主從적인 關係를 利用하여, 交叉적인 投資로 台灣公私業 資本에 깊이 침투하여 그것의 買辦化와 종속화를 이루었다. (三)1979年, 미국과 대만이 斷交한 後, 여전히 宗主關係에 의거한 <台灣關係法>을 받아들여, 美國의 中國內政 및 台灣事務에 對한 干涉을 維持했던 것 等等이다.

그러나 台灣 戰後資本主義의 급속하고 종속적인 發展에 따라 台灣社會의 半封建적 性格은 解體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종속적 發展’(dependent development)의 구조적 제약 下에서 台灣 戰後資本主義는 中心國의 資本主義와 發展 수준, 構造 및 성격 상에서 여전히 巨大한 落差를 가졌고, 허다한 複雜한 問題가 초래한 後進性을 內包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半資本主義’로 規定된다.

台灣社會의 半封建性의 해체는 먼저 農地改革을 經由하면서 根本적으로 地主─佃農經濟體制를 消滅시켰다는데 있고, 아울러 進一步하게 大地主 仕紳 階級이 現代產業資本家로 전환되도록 輔導하여, 大量의 小資產階級 自耕農을 創造한데 있다. 다른 한편, 台灣의 官僚資產階級, 즉 國民黨統治權力 또한 美國主導下의 台灣資本主義發展過程에 따라 重大한 性格 변화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金融、商業資本에서 工業資本, 甚至어 에너지 產業과 基幹工業에의 投資로의 전환, 政治權力으로 民間資本을 扶助하는 等等은 모두 大陸 時代의 官僚資本이 가지지 않았던 性格이다.

1963年 以後 안정적으로 發展해온 戰後 台灣資本主義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一)高度의 獨裁적인 國家權力으로 長期인 低米價를 강제하고, 強權 및 恐怖 政策下에서 勞動階級의 組織적인 爭議權 等을 억압하는 條件 下에서 超 低임금 體制를 形成했다. 이와 같은 안정적이고 순종적인 低임금 勞動을 利用하여, 美日資本을 대량으로 끌어들이고, 노동집약적이고, 저부가가치의 加工 수출產業을 지향했고, 이로부터 美日 國際분업體系 속으로 편입되어 經濟적인 成長을 얻었다. 台灣은 이내 中心國의 低임금, 노동집약 產業의 國際적인 加工 基地가 되었다.

(二)結構에 있어서, 台灣 戰後資本主義는 官僚資本의 公營企業部門과 家族재벌資本 및 中小 企業資本部門으로 나뉜다. 앞의 둘은 關係가 比較적 밀접하고, 國家權力의 各種 特惠와 비호를 받아 島內 市場을 獨佔했고, 이 때문에 官僚資本과 家族재벌資本은 政治에서 比較적 一致한다. 後者는 國家權力의 扶助를 比較적으로 받지 못했는데, 國內市場에서도 마땅한 입지가 없어서 美日을 中心으로 하는 國際분업에 특화되었다. 즉, 외부를 향한 순환과 축적을 보였고, 이는 國民黨 權力에 對해 갈등적인 情緒를 가졌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이 零細한 大量의 中小企業은 1963年 이래로 台灣 對外輸出貿易經濟의 主力을 담당했고, 層層이 서로 연관되어,  不斷히 私人資本部門의 增殖을 이루었으며, 不斷히 經濟 發展을 추동하기도 했다.

(三)國民經濟 속에서 여전히 基幹 地位를 차지하고 있는 公業部門은 官僚資產階級에 의해 통제 및 관리를 받으며, 여전히 一定한 私產性을 가지고 있고, 게다가 官僚主義, 보잘것 없는 성과, 부패, 손실 等 落後적 現象이 일찍부터 構造化되었음에도 불구하고, 長期적으로 國家強權에 의존하여 價格 및 市場에서의 特權과 獨佔으로 축적을 이어나갔다.

 (四)家族재벌資本의 측면에서 보면, 오랜 기간 權力의 비호에 의해 融通, 價格市場의 保護를 향유하여 여전히 연구개발 部門에서의 嚴重한 落後、家族式 管理、資本社會化의 躊躇 等 落後現象이 存在한다. 이외에도 外國資本과 官僚資本에의 의존은 그 獨立性과 民族性을 糢糊化하고 있다.

(五)이와 같은 畸型적인 國民經濟構造 下에서, 台灣 經濟는 國民產業 最上層의 生產財 產業部門의 缺乏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그것과 外向적인 中小企業 加工수출工業 사이에는, 後者가 여전히 中心國 國際加工基地로 形成되었기 때문에 島內 產業(消費財 產業을 主로 함)과 구조적인 關聯性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外國資本, 即 國際市場의 意志, 利益, 需要는 台灣資本의 公業部門과 私業部門 모두에 대해 지나친 規定性과 指導性을 갖는다. 이는 正常적으로 高度 發展한 資本主義 체계에서는 없는 現象이다.

以上의 諸特質은 台灣 戰後資本主義로 하여금 비록 축적의 양과 經濟生活에서는 이미 점차 先進國에 접근하고 있지만, 真正으로 高度 發展한 資本主義와는 거리가 매우 먼 것이 되도록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新殖民地적인 ‘半資本主義’ 特質은 台灣資產階級의 性格에서도 表現된다.

앞에서 論及한 바와 같이, 50年代 崛起한 民間재벌資本은 그 發生과 成長 過程 모두 國家權力과 美國경제원조의 政策性 扶助를 받았다. 바로 台灣社會의 新殖民地化 過程 속에서 民間재벌資本이 官僚資本 및 美帝國主義 權力과 物資에 의존하여, 政治적 恐怖와 高度의 獨裁政治 下에서, 特權과 優惠로서 迅速하게 축적을 달성한 것이다. 이 때문에 民間재벌資產階級의 피 속에는 官僚資本 및 外國資本의 피가 흐르고 있고, 獨立性과 民族性을 상실하여, 民族資產階級의 性質을 갖지 않으며, 國民黨權力과 帝國主義에 대해 저항적 성격을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각하게 馴從적인 성격을 갖는다.

1963年 以後 굴기한 中小企業資本은 비록 官僚資本 및 재벌資本의 相對적인 壓迫을 받았고, 島內市場을 나누어 가질 수 없었으며, 資本融通上의 銀行 便利를 얻을 수 없었고, 國家權力의  강력한 政策적 保護를 받지도 못해, 현행 體制를 바꾸어 현행 權力에 저항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사 파시즘적 체제를 이용하여 더욱 苛酷하게 勞動階級을 착취하는 一面을 가지고 있고, 또 (1) 그 資本循環過程이 中國民族經濟圈과 관련되지 않고, 外向적으로 美日을 基軸으로 하는 國際分工體系의 기층에서 축적을 完成한다는 점, 즉 外國市場、경로、技術、半成品에 심각하게 종속되어 축적을 하는 것, 그리고 (2) 高度의 國際性(即 非民族性)과 金融流通에 뛰어난 ‘商人性’(이 性格과 그 의존성이 연결되어 買辦性을 가짐)으로 인해 台灣 中小企業 小資產階級은 反國民黨적인 성격을 가지면서도 民族資產階級의 性格을 가진다. 즉 그것의 축적 過程과 資本主義 世界體系의 關係는 矛盾性 보다 統一性이 더 많으며, 대항성 보다 의존성이 많게 된다. 그래서 其他 第三世界 中小企業 小資產階級과는 달리 民族民主運動의 支持者가 되지 못한다. 반대로 이 階級은 ‘反蔣이면서도 反美하지 않는’ 右翼民主改革派의 核心이 되어, 70年代 中期에 ‘黨外’ 民主運動의 形式으로 政治 舞台에 등장했다. 1979年末의 美麗島 事件은 國民黨이 보인 鐵腕의 鎮壓으로 인해, 그리고 대만의 外交적 挫折이라는 시련이 더해지면서, 國民黨의 民主化改革을 촉구하여 ‘革新(反共)保台’하고자 했던 體制內改革을 추구한  階級의 希望이 幻滅이 된 것인데, 이를 계기로 그 ‘反蔣·反共·不反美’의 保守적 民主化運動이 점차 台灣獨立運動, 即 資產階級 右派 反民族、反統一의 方向으로 傾斜되었다.

1950年 이래로 民族主義가 挫折된 社會와 歷史의 發展 속에서 우리는 1970年代 10年間의 新生代 民族主義의 復興을 特別히 언급하고자 한다.

60年代 中期 이후 台灣 資本主義의 全面적 發展에 따라, 大量의 資產階級과 中產階層이 創造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廣泛하게 台灣의 現代적 勞動階級을 社會적 舞台로 등장시키게 되었다. 反共 戒嚴 體制下에서 團結爭議權을 完全히 喪失한 台灣 노동자 階級은 沉默속에서 가혹한 수탈을 당했다. 社會矛盾은 抑壓하에서 격화되고 있었다.

60年代末, 美國을 中心으로 하는 資本主義 社會에 廣泛한 反思 運動이 출현했고, 한 世代 知識份子의 ‘反叛’을 초래했다.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 黑人民權運動, ‘民主社會學生’(SDS)運動, 言論自由化運動 및 中國、越南、쿠바 革命에 대한 再評價 등이 美國知識界를 席捲하여, ‘新左翼’ 思想體系를 싹틔웠다. 이와 같은 環境 下에서 홍콩 대만 출신의 北美 留學生들은 회피할 수 없는 衝擊을 받았다. 게다가 이 시기 美國 또한 對中國政策을 轉換하여, 大眾 매체 가운데 文革 초기 中國의 影象이 대규모로 출현했다. 1970年, 美國의 石油資本이 中國領土로서 豐富한 石油가 매장된 釣魚台의 ‘行政權’을 任意로 日本에 귀속시킴으로 인해, 北美에 留學중인 홍콩, 대만의 中國 學生은 忿怒하며 抗議했다. 그리고 國民黨 當局이 留學生의 愛國運動에 對해 干涉하여, 運動의 열기가 증대되었고, 迅速하게 ‘(社會主義中國)에 대한 인정 運動’으로 發展하여 , ‘統一運動’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조어도 보위 運動은 비록 급속하게 左右로 대립하며 分裂하였고, 運動이 ‘四人幫’의 붕괴에 따라 점차 소멸하였지만, 運動의 左翼은 深遠하고 重要한 影響을 남겼다. 1950年 冷戰政治에 의해 사멸되고 금지되었던 中國革命의  歷史 및 各種 左翼 社會科學이 이번 運動의 過程 속에서 새로운 한 세대 지식인의 思想生活과 行動과 밀접한 聯繫를 갖게 되었다. 中國의 愛國主義、民族主義、反帝主義의 傳統은 다시금 冷戰歷史 속에서 成長한 한 세대 지식인 속에 점화되었다. 1950년 反共肅清 중에 훼멸된 民族主義는 다시 復興하여 發展하게 되었다.

조어도 보위 愛國運動의 左翼 思潮는 1970年에 台灣 西化文藝의 代表型式인, 現代詩에 대해 集中적으로 批判하는 運動을 촉발시켰다. 1970年에서 74年까지의 現代詩 批判은 人民을 위한 文學, 文學語言의 大眾性을 제기하며, 文學의 民族形式과 民族風格을  主張하고, 文學의 惡質적 西化에 反對했다. 1977年, 現代詩 論爭의 延長線 上에서 國民黨 御用文人인 彭歌와 余光中의 비난 하에서 鄉土文學論戰이 爆發했다. 官方은 鄉土文學이 ‘工農兵’ 文學이라고 비판하며 死地로 몰아가고자 했다. 鄉土文學 一派는 文學의 民族性을 힘써 제창했고, 台灣 社會經濟의 殖民地化를 역설하며, 勞動人民을 為한 文學의 위를 향한 服務를 강조했다.

조어도 보위 운동의 洗禮를 받은 島內外의 젊은 세대는 50年 白色테러로 斷絕된 급진 傳統의 새로운 전수자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70 年代에 北美로부터 연이어 大陸中國으로 향했고, 北美에서의 비교적 유망한 前途를 拋棄하며 大陸 各領域의 建設에 參加했다. 당시의 情勢下에서 그들은 台灣社會에서 모범적인 意義를 가졌다. 台灣에서 조어도 보위 세대는 雜誌 『夏潮』를 中心으로 해서 台灣의 젊은 세대의 進步的이고, 愛國主義的이며, 民族主義的인 論壇을 形成했다.

1988年, 台灣 戒嚴令이 解除된 後, 台灣中產階級과 中產階層의 政治要求를 代表한 ‘黨外運動’은 迅速히 政黨 설립을 宣布했다. 台灣工人階級에게 자신의 政黨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던 夏潮系의 知識人은 台灣에서 50年代 政治적 牢獄 중에 생존한 선배 세대 運動家를 결집하여, 工黨과 工黨 解體後의 勞動黨의 창립을 지지했다. 이들은 主客觀적으로 複雜한 한계성과 困難下에서 지금까지도 결연히 뚜렷하게 左派統一의 旗幟를 높이 들고 있는 勞動黨을 支持하고 그 發展을 위해 努力하고 있다.

1987年, 蔣經國은 大陸 친지방문 政策을 선언하고, 일찍이 1979年 大陸에서 兩岸 평화統一政策을 선언한 後 展開된 兩岸經濟往來를 대만에서 公開化했다. 그 시기부터 지금까지, 大陸에 對한 台灣의 여행, 친지방문, 投資, 공장설치 등의 活動이 迅速하게 증대하여, 兩岸 經濟關係의 심화와 밀접화가 더욱 強大한 기세로 不斷히 發展하도록 했다.

台灣戰後經濟史의 角度에서 보면, 이는 극히 重要한 構造적 변화다. 1895年부터 1945年까지, 台灣은 基本적으로 中華民族經濟圈으로부터 剝離되어 日本 帝國主義經濟圈으로 편입된 資本循環을 하도록 강요 받았다. 1945年, 台灣이 光復되어, 台灣은 다시 나날이 崩潰되어 가는 半殖民地·半封建적 民族經濟로 編入되었다. 1950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美帝國主義가 軍事적으로 海峽에 개입하고, 台灣經濟는 다시 中華民族經濟과 斷絕되고 美日資本體系에 종속되어 ‘독자적’으로 發展하였다. 1988年 이래로, 台灣은 大陸과 다시 하나의 民族經濟下에서 整合되고 있다. 그리고 이번 整合은 분명히 台灣의 經濟、政治 및 文化에서 重大한 變化를 낳을 것이다.

이와 같은 變化를 낳은 內部原因은 바로 上述한 台灣 戰後資本主義의 종속적 發展이 초래한 矛盾에 의한 것이다. 임금 상승으로 인해 台灣은 低임금의 강점을 상실했다. 연구개발에서의 長期적인 落後로 인해 台灣產業은 自主적으로 상향이동할 수 없었다. 게다가, 兩岸關係가 개선되지 못함으로 인해 再生產과 擴大再生產은 躊躇하며 나아가지 못했고, 投資는 둔화되었다. 바로 이 때, 市場 종말에 직면한 台灣 中小企業資本은 兩岸이 일방적 往來를 회복한 時機에 資本 자체의 논리에 따라 大陸이라는 龐大한 低임금 地帶로 몰려가 高額의 剩餘를 취하며 延命했다.

台灣 中小企業資本은 大陸의 開放改革 過程中 不斷히 膨脹하는 中國民族經濟 속으로 더욱 깊이 편입되어 循環함에 따라, 본래 買辦性 및 종속성, 甚至어 非民族性 및 反民族性을 띠고 있던 台灣 中小企業資本은 점차 성격을 변화시키게 되었다. 즉 점차 資本의 民族性을 증가시키게 된 것이다. 1991年 말, 본래 中小企業의 政治적 願望을 代表한 民進黨이 대만독립조항을 정식으로 黨綱에 삽입시키는 가운데 출현한 黨內 논쟁 속에서 部份적인 中小企業資本의 躊躇와 反對意見이 具體적으로 出現한 바 있었다.

다른 한편, 二代에 걸친 蔣氏 總統이 사망한 이후, 1950年 台灣 戰後資本主義 축적과 擴大再生產을 위해 設立된 高度의 個人獨裁적인 反共·보나파르트 국가(Anti-Communist-Bonapartist State)가 붕괴되었다. 國家의 相對적 自主性은 하향 調整되어, 台灣 官僚資產階級, 大재벌資產階級 및 買辦階級의 利益을 더욱 적합하게 代表하게 되었다. 이러한 階級은 지금까지도 基本적으로 島內市場을 獨佔하고 있으며, 基本적으로 50年代이래로 延續되어 온 特權으로 축적과 집적의 증대를 享有하고 있다. 이 때문에 비록 權力과 利益 分配上 이미 더욱 省籍이 아닌 階級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지만, 李登輝 體制는 基本적으로 官僚資產階級, 大재벌 資產階級 및 여러 買辦資產階級의 利益에 따라, 現狀유지를 主張하고, 反共拒和 를 主張하며, 宣傳上으로 여전히 ‘反共統一’과 ‘勝共統一’ 및 ‘和平演變統一’을 主張하고,  依然히 外國勢力에의 의존에 안주를 主張하며, 台灣을 ‘政治實體’로 삼아, 實質적인 ‘一中一台’, ‘두 개의 중국’을 主張하고 있다.

1979年 ‘美麗島事件’ 중에 台灣 中小企業 資產階級과 龐大한 外產階層의 利益을 代表한 ‘黨外’ 運動이 主張한 體制內改革으로 ‘保台’한다는 希望이 수포가 되면서, ‘反蔣·反共·親美’적인 政治要求 속에 점차 그 親美·反共·反蔣의 階級立場이 분명해지고 民族分裂主義로 나아가게 되었다.

80年代末葉 以後, 비록 部份적인 台灣 中小企業資本이 資本의 논리에 服從하여, 점차 大陸의 中國民族經濟圈으로 편입되고, 점차 資本의 民族性을 증대시켰지만, 여전히 政治 및 思想 등 상부구조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台灣의 小資產階級과 中產階級의 民族 分裂主義는 1991年이 되어 台獨 조항을 民進黨黨綱에 삽입시키면서 최고조에 達했다. 이와 같은 民族分裂主義는 당시 李登輝 ‘獨台’ 政權의 直間接적인 溫存, 유화, 鼓勵 및 利用의 관계 下에 獨台과 台獨의 利益은 점차 一致되는 추세에 들어서고, 朝野의 一致된 反民族 및 反統一 勢力이 形成되었다.

그런데 1991年말의 選舉에서 급진적인 台獨主張이 失敗를 고하게 되었다. 점차 심화되는 兩岸 經濟關係로 인해 部份적인 中小企業 資產階級이 台獨에 對한 支持를 撤銷하게 되었던 점이 失敗의 重要原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國民黨과 民進黨은 역설적으로 兩岸三通과 民族統一을 阻止하는 問題에서 갈수록 가까워지고 있고, 台灣民間, 특히 中小企業 資產階級의 直航, 三通 및 漸進的인 民族統合을 要求하는 願望과는 대치하고 있다.

中華民族共同體를 基礎로 한 再生產體系의   建設, 實踐 및 統合은 暫時 分裂된 祖國의 서로 다른 두 體制의 한계를 超越하여, 兩岸互補적인 經濟關係를 建設하고, 兩岸經濟利害를 하나의 民族共同體 下에 統攝하여 兩岸 全中國이 相互 補充적 基礎 위에서 統一된 民族經濟의 重要條件을 實現하는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 점차 증대되어 오늘날 막을 수 없게 된 兩岸의 經濟 整合이 兩岸統一의 重大한 物質적 條件이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物質적 變化에 相應하는 新時期의 民族主義가 멀지 않은 未來에 台灣의 政界, 文化界 및 思想, 社會科學界에서 發展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이의가 없다.

 

六、結語

民族은 人類가 創造한 最高의 人種共同體이다. 이는 自然적인 過程을 거쳐서 形成되었을 뿐만 아니라, 民族共同體 構成員, 즉 社會적으로 存在하는 사람의 不斷한 社會實踐을 거친 產物이다. 中國現代民族意識의 形成은 台灣에 있는 中國人民이 現代民族意識을 形成함을 포함하며, 帝國主義 침략 歷史 속에서 反 침략, 反民族壓迫의 廣泛하고 長久한 抵抗, 특히 抗日民族解放運動의 實踐 속에서 形成되고 成熟한 것이다.

1950年以後, 中國은 內戰과 冷戰의 이중 구조 속에서 分裂되었다. 台灣은 新殖民地體制속에서 對外 의존적인 機制下의 獨自적 經濟성장을 經由하여, 特殊한 台灣戰後資本主義體制를 形成했다. 그리고 民族主義가 戰後資本主義 各 段階의 서로 다른 物質構造에 相應하여 기복을 보인 것은 앞서 논의한 바와 같다.

1988年 이래로 展開된 兩岸經濟의 整合이 하나의 中華民族 獨立自主적 民族經濟를 재건할 수 있을지는 今後의 發展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基本條件을 達成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一)民族經濟再生產體系의 확립이다. 即, 民族資本─買辦資本, 外國資本 및 官僚資本이 아닌──이 支配, 管理 및 계획하며, 自己民族이 支配하는 地理적 範圍內에서 再生產行程의 進行을 확립하여 民族構成員의 生活需要를 滿足시키는 것이다.

(二)자기완결적이고 자기 통제 및 관리적인 再生產機制의 形成이다. 即, 外國資本의 논리와 수요擴大가 再生產의 主導적 條件이 되지 않는 것이다. 農漁礦業을 基層으로 하고, 消費財 生產의 國民工業을 中堅으로 하며, 生產財 製造의 國民工業을 정점으로 하는 健全한 經濟구조를 확립하여 對內對外적인 분업의 合理化를 이루는 것이다.

(三)經濟成果가 民族構成體內의 國民과 人民에게 擴散되어, 公平하고 正義로운 分配로 經濟上의 不正과 腐敗를 소멸시키고, 階級間收入의 格差를 해소하는 것이다.

1949年 革命 이후, 帝國主義 軍事 및 經濟 封鎖와 包圍下에서 中國大陸은 資本主義 世界市場과 基本적으로 隔絕되어, 獨立自主적으로 國家計劃經濟體制下에서 基本적으로 商品 및 市場經濟을 거부하고, 需要를 위한 生產, 公平을 위한 分配, 革命保衛를 위해 國防工業 等을 優先적으로 發展시키는 路線을 채택하게 되었다. ‘開放改革’ 以後, 中國은 國際市場에 참여하여, ‘計劃經濟와 市場經濟의 상호 結合’을 진행하는 축적 政策을 決定하였다. 10여年 동안, 비록 經濟적으로 매우 뚜렷한 성장을 보였지만, 적지 않은 심각하고 위태로운 問題를 누적시켰다. 外來資本이 大陸의 超低임금으로 인해  그 자신의 需要와 논리에 의해 대거 유입되고, 市場, 貨幣, 商品 經濟가 空前의 膨脹을 함에 따라, 商品 및 현금에 對한 社會의 높은 飢餓를 誘發하여, 49年 이후 잠시 消滅된 부패, 및 敗德 等 부정적 現象의 復活을 초래했다. 某種의 資本主義적 축적을 鼓舞하는 가운데, 公私關係의 矛盾, 所有制 問題의 矛盾은 나날히 뚜렷해지고, 勞動力의 商品化는 나날이 심화되는 가운데, 末端의 直接生產者, 即 國家 및 社會의 領導地位에 있는 노동자 階級의 現代적 임금 無產階級化 問題, 女工 및 童工에 對한 착취 問題, 開放된 沿海 特區 및 古老한 內陸 貧困地區의 經濟 格差 問題, 工農業 產品價格의 巨大한 落差가 龐大한 內地 農業人口를 沿海 도시로 내몰아 超低임금 勞動의 巨大한 隊伍 問題 및 分配와 收入의 불균형을 추동하여 초래한 새로운 階級分化 問題 등은 識者층의 깊은 關心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上述한 自立적 民族經濟建設의 세 가지 指標를 시험에 들게 하고 있으며, 最終적으로는 民族經濟 재건 過程 중 兩岸間 民族團結 및 統一의 진행과정에 影響을 줄 것이다.

70年代 조어도 보위 運動으로 다시 점화되었고, 基本적으로 中國革命과 社會主義建設을 擁護한 北美의 새 세대 民族主義者들 가운데 一部份은 일찍이 70年代末에 文革後 中國이 社會主義原則으로부터 後退하였다고 여기며 苦悶에 빠진 바 있었다. 近年에 開放改革의 展開와 深化가 표출하고 있는 대규모의 부정적 現象 및 社會主義原則으로부터의 各種 퇴보와 그에 背離된 生活 情況은 台灣의 新生代 進步적 民族主義 계열의 사람들에게 複雜한 걱정과 苦悶의 心情을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 事實上, 작금의 開放改革運動은 實際로 海峽을 중간에 두고, 台灣에서 보아도, 大陸內部에서 명백하고 激烈한 認識上, 思想上, 理論上 및 實踐上의 矛盾을 초래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正確하고, 科學적이며, 民主적이고, 깊이 있게 이와 같은 矛盾에 직면하여, 진지하게 理論 및 實踐상의 解決을 내놓는 것은 兩岸經濟를 포괄한 中華民族經濟體를 재건하여, 民族團結과 평화를 完成하고, 勝利로서 民族統一의 偉大한 事業을 達成하는데 불가피한 작업이다.

《海峽評論》21期,1992年9月號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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